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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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생애 (1968년 미국 대선 ·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가족
아버지 조셉 패트릭 케네디 · 배우자 에델 케네디 · 장남 조 케네디 2세 · 차남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 남동생 존 F. 케네디 · 테드 케네디 · 손자 조 케네디 3세 · 조카 존 F. 케네디 주니어
역대 선거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관련 인물
존 F. 케네디 · 마릴린 먼로 · 지미 호파 · 마틴 루터 킹 · 조지프 매카시 · 존 에드거 후버 · 린든 B. 존슨 · 테드 케네디 · 랄프 야버러 · 조지 맥거번 · 에이브 리비코프 · 밴스 하트케 · 케네스 오도넬 · 아서 슐레진저 · 니콜라스 카젠바흐 · 아치볼드 콕스 · 샘 지앙카나 · 카를로스 마르셀로 · 휴버트 험프리 · 유진 매카시
사건사고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파일:노란색 깃발.svg 자유주의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Assassination of Robert F. Kennedy

파일:로버트 케네디 암살.jpg


▲ 로버트 케네디가 피탄된 직후 촬영된 사진[1]


파일:06061968 NYT.png


▲ 1968년 6월 6일의 뉴욕타임스 1면

발생일
1968년 6월 5일 12시 15분
유형
살인, 정치적 테러
발생 위치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앰배서더 호텔 주방 복도
(34°03′35″N 118°17′50″W)
가해자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 (Sirhan Bishara Sirhan)[2]
범행 동기
로버트 F. 케네디의 친 이스라엘 성향
피해자
사망
로버트 F. 케네디 / 미국 상원의원
부상
5인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총격과 그 직후
3.2. 수술
3.3. 암살 이후
4. 암살범
5. 음모론
5.1. 두번째 암살범이 있다?
5.2. 만주 후보자 가설
5.3. 음모론에 대한 반박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이자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의 후보자 로버트 F. 케네디가 팔레스타인 난민 시르한 시르한에게 친 이스라엘 성향을 이유로 암살당한 사건을 의미한다.

흔히 마틴 루터 킹, 맬컴 X,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과 더불어 "1960년대 4대 암살 사건"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최초의 정치적 테러 사건으로서 정치외교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2. 배경[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미국 상원의원 로버트 F. 케네디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으로, 케네디 대통령의 가장 친밀한 측근이었으며 그의 밑에서 법무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 후, 로버트 케네디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3]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이 되며 로버트 케네디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났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법무장관 직을 사퇴했으며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출마해 케네디 가문의 위상을 복구시키는데 전념한다.

1968년 대선을 앞두고,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 여론 악화로 3번째 출마를[4] 포기하자 로버트 F. 케네디는 민주당 예비선거에 뛰어들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노렸다. 그는 출마와 동시에 미국인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으며 반전좌파 진영을 대표한 유진 매카시와 여러 예비선거에서 경합을 이루었다. 둘은 대부분의 안건에 있어 비슷한 입장을 취했고[5], 이 때문에 경선 도중 단일화를 해 존슨의 지지를 얻고 있던 휴버트 험프리를 꺾어야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인 캘리포니아의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하는 쪽으로 단일화가 될 가능성이 높았고, 로버트 케네디는 아예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패배하면 예비선거에서 사퇴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전반적으로 구도는 매우 치열했지만 최종적으로 유색인종과 도시 빈민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로버트 케네디가 유진 매카시를 앞지르고 신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6월 4일 밤,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로버트 케네디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로버트 케네디는 중앙 선대본부가 위치한 L.A.의 앰배서더 호텔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설을 했다. 관중들은 환호했고 12시 10분 쯤 로버트 케네디는 아내 에델 케네디, 측근 케네스 오도넬, 조지 맥거번 등과 짧은 대화를 나눈 후 혼잡한 인파를 피해 호텔 주방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6]


3. 전개[편집]



3.1. 총격과 그 직후[편집]


6월 5일 12시 15분, 로버트 케네디는 호텔 주방 복도로 빠져나가면서 복도에 있는 지지자들과 일일히 박수를 하고 있었다. 호텔 주방 보조원이었던 후안 로메로(Juan Romero)와 악수를 하던 도중, 암살범 시르한 시르한(Sirhan Sirhan)이 접근해 22구경 리볼버로 로버트 케네디를 쐈다. 총 8발이 발사되었으며 3발의 총알이 각각 케네디의 가슴, 뒷목, 오른쪽 귀 뒤쪽에 맞았고 총알 파편이 겨드랑이에 박혔다. 5발은 빗나가 주방 문이나 바닥에 박혔다. 로버트 F. 케네디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후안 로메로의 손을 잡은 채 주방 바닥에 쓰러졌으며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1분 후 시르한 시르한이 리볼버를 다시 장전하고 확인사살을 하려 하자, 사설경호원은 그를 제압했다. 얼마 후 출동한 LAPD 경관들이 그를 긴급 체포했다.

로버트 F. 케네디는 치명상을 입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의식만큼은 남아있었기에 후안 로메로에게 "모두들 다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후안 로메로가 "예, 모두들 괜찮아요"라고 답했고, 케네디는 "모두들 괜찮을거에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의 상황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15분 후 응급 의료진이 출동해 로버트 케네디의 뺨을 때리며 의식을 확인했지만 그때 케네디는 거의 의식불명 상태였다. 의료진들이 들것에 케네디를 실으려 하자 케네디는 반사적으로 "날 들어올리지 말아줘..."라고 힘 없이 말했고 이것이 케네디의 유언이 되었다.

앰배서더 호텔 내부는 혼란스러웠다. 지지자들은 총성 몇발이 울리자 호텔 주방 복도로 뛰어갔고 호텔 바닥에 로버트 케네디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흥분한 일부 지지자들은 "암살자를 죽여라! 암살자를 죽여라!"라고 부추겼고, 또 다른 지지자는 "죽여서는 안돼! 살려야해! 제2의 리 하비 오스왈드를 만들어서는 안돼!"라고 소리쳤다. 로버트의 부인 에델 케네디는 힘 없이 서있었고 군중이 몰려드는걸 제지하고 있었다. 이때 막간의 틈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기자가 쓰러져있는 로버트 케네디의 사진을 찍었다. 한편 경쟁자 유진 매카시의 선거 본부도 소식을 전해듣고 충격에 빠졌다. 매카시의 선거운동원조차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소식을 듣고 오열했고, 일부는 "만약 케네디가 살아 돌아오면 난 케네디를 지지할거야"라고 말했으니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총상을 입은 로버트 케네디는 구급차에 실려 즉시 그 근방에 가장 가까운 병원이었던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으로 이송되었다.


3.2. 수술[편집]


6월 5일 새벽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으로 옮겨진 로버트 케네디는 의식 불명 상태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2시 22분, 병원 측은 로버트 케네디가 매우 위중한 상태이며 30분 이내에 대수술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오전 3시 12분, 집에서 잠을 자던 최고 수준 외과의사까지 모두 불려나와 로버트 케네디의 몸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고, 신경망을 이어붙이고, 피를 수혈하는 대수술이 이루어졌다. 같은 시각 케네디 가문의 일원은 매우 어린 아이들을 빼고는 모두 소식을 전해들었고 캘리포니아로 모여들었다. 형수 재클린 케네디는 5년만의 총격 사건에 공황 상태에 빠졌다.

7시 20분까지 총 4시간 8분이 걸린 수술이 종료되었다. 의사들은 총알을 모두 빼냈고, 병원 측은 앞으로의 36시간이 고비라고 설명했다. 의료진은 오른쪽 귀에 박힌 총알이 치명상을 입혀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과 기타 중요한 신경망이 망가졌고[7],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식물인간 혹은 뇌사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아침 잠에서 일어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는 조간 신문에서 아버지가 총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조 케네디 2세는 학교에서 테드 케네디의 전화를 받아 총격 사실을 전해들었다. 테드 케네디는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와 조 케네디 2세에게 수술 진행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차마 사실을 모두 전할 수는 없어서 금방 회복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오후 5시 30분, 병원 밖에서 케네디 지지자와 일부 매카시 지지자들이 로버트 케네디의 쾌유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 동안, 케네디의 대변인과 의사들은 케네디가 영구적인 뇌 손상을 입었으며 이제 케네디가 사냐 마냐의 문제만이 남아있다고 인정하였다.

다음날인 6월 6일 1시 44분 로버트 케네디에게 사망 판정이 내려졌다. 이 소식은 2시에 언론보좌관 프랭크 맨키위츠가 기자회견을 통해 케네디의 사망을 공식화함으로 언론에 공개되었다.

3.3. 암살 이후[편집]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은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트렸다. 암살 당시 로버트 케네디 바로 옆에 있던 후안 로메로는 "아무리 희망을 품더라도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어요"라고 회상하며, "그때 내가 악수를 하지 않았다면..."이라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다 2018년 죽었다.#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 퓨 리서치 센터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장 기억에 남는 60~70년대의 사건"에서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사건이 달 착륙, 존 F. 케네디 장례식에 이은 3위를 차지하기도 했을 정도로 이 사건은 아직도 미국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로버트 케네디는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 직후 뉴욕 프라이머리에서 대승을 거두어 8월 있을 전당대회에서의 지명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암살로 로버트 케네디 지지층은 사분오열되었고, 유진 매카시 측도 점차 동력을 잃었다. 케네디의 기존 지지층은 그나마 케네디와 의견이 비슷했던 매카시로 지지를 옮기거나, 36세의 테드 케네디를 대신 후보로 내세우자는 "Draft Ted"[8]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단 케네디 진영 측은 로버트 케네디의 측근이었던 조지 맥거번 의원을 내세워 남은 대의원을 수습하도록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8월 전당대회에서 휴버트 험프리가 당 기득권의 지지 속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본선에서 닉슨에게 패배하며 루스벨트 이후 이어지던 민주당의 전성기 시대가 끝나게 된다.

이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이 "그때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지 않았다면..."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로버트 케네디가 1968년 대선에 나갔으면 이겼을 것이라는 말이 많은데, 이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로버트 F. 케네디/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의 해당 단락을 참조할 것.


4. 암살범[편집]


암살범 시르한 시르한(Sirhan Sirhan, سرحان بسارة سرحان)[9]은 1944년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시르한 시르한이 4살 때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나 집이 폭격을 받고 친척 중 일부를 잃기도 했는데, 그의 어머니에 따르면 이것이 어린 시르한에게 PTSD와 정신적 상해를 남겼다고 한다. 시르한 시르한의 가족은 12살에 전쟁으로 불안정한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를 떠나 뉴욕에 정착했는데, 고정된 수입원이 없어 일용직을 전전했고 이와중에 시르한은 마구간에서 일하다가 말발굽에 머리를 맞아 크게 다치기도 했다. 이름과 출신 성분 때문에 이슬람교도로 종종 오해되나 실제로는 침례교를 믿었다고 한다.

시르한 시르한은 어릴 때 전쟁 충격과 선천적인 정신병 등으로 인해 편집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20대의 나이로 팔레스타인에 방문해 이스라엘 건국을 옹호하고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을 두둔하는 발언을 한 로버트 F. 케네디를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의 원흉으로 생각해 유독 증오하였다.[10] 경찰에 의해 발견된 시르한 시르한의 수첩에 "로버트 케네디는 죽어야한다"가 빼곡하게 써져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 일어나자 시르한의 반시오니즘, 반이스라엘, 로버트 케네디에 대한 증오는 커졌고 그때부터 암살을 계획한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 6월 4일 시르한 시르한은 몰래 구한[11] 리볼버를 들고 앰배서더 호텔로 향해 케네디를 은밀하게 뒤쫓았다. 6월 5일은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난지 1년이 되는 날이었기에 정치적 의미도 컸다. 시르한 시르한은 사설 경호원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재빠르게 로버트 케네디에게 접근, 걸어가면서 케네디에게 리볼버를 난사하였다. 몇분 후 시르한은 경호원과 지지자에게 제압되었고 LAPD에 의해 구속되어져 재판에 넘겨졌다.

시르한 시르한은 재판 도중에 자신이 했던 말을 계속 뒤집고, 누군가 세뇌를 통해 자신에게 케네디 암살을 사주하도록 했다고 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건국 이후 계속 케네디를 증오했고 그 계획을 실천했다는 모순된 증언만 내놓았다. 전문적인 프로파일러들은 그가 전형적인 편집증 증세를 앓고 있으며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검사 측은 시르한 시르한이 일단 최소 3주 전부터 총기를 구입하고 로버트 케네디의 유세 장소를 따라다니는 등 계획적인 범죄 정황이 발견되어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판사 역시 이를 받아들여, 정신병을 토대로 선처를 요구하던 변호인의 요구를 기각하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72년 캘리포니아 주법에서 사형제가 폐지되자 그는 사형에서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12] 시르한 시르한은 감옥에서 자신의 진술을 뒤바꾸는 등의 행동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나 최근에는 일관되게 자신의 범행을 알코올 중독과 어릴적의 트라우마가 겹친 것의 영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감옥에 수감된 후 17번이나 가석방 신청을 냈고, 그중 가장 가석방에 가까웠던 사례는 2022년이었다. 시르한 시르한은 가석방 위원회에 의해 상당히 태도가 개선되었기 때문에 가석방을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개빈 뉴섬 주지사는 자신의 직권으로 시르한 시르한이 범행을 반성하지 않고 있고 범행 자체도 너무 심각하기에 석방될 수 없다는 이유로 가석방 신청을 기각했다. 가장 최근의 요청 사례인 2023년 3월 1일 가석방 요청은 위원회 선에서 컷 당했다. 시르한 시르한은 82세가 되는 2026년에 다시 가석방을 신청할 자격을 얻게 된다.

현재 로버트 케네디의 자식 중 케네디 암살 음모론을 믿는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는 가석방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2018년 감옥에서 시르한 시르한을 접견한 후 시르한의 눈에서 진실을 보았으며 자신의 음모론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한편 그에 비해 비교적 정상적인 커리어를 밟은 또다른 자식 조 케네디 3세는 시르한 시르한의 가석방에 반대하고 있다.

5. 음모론[편집]


존 F. 케네디의 암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사건도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 승리 직후 아랍인에 의해 뜬금 없이 암살당했기 때문에, 정황상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을 막으려는 특정 세력이 암살한게 아니냐는 소리가 끊임 없이 나온다. 심지어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와 데이비드 케네디마저 이 음모론을 신봉하고 있다.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는 CIA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며 진실을 파헤치겠다며 2024년 미국 대선에 출마한 상태이다.

주요 암살 배후로 지목되는 대상은 다음과 같다.

  • FBI, CIA: 현재 가장 유력한 배후로 지목되는 대상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존 F. 케네디 암살 배후에 CIA가 있다고 심정적으로 믿은 것으로 알려져있고[13], 이상주의자인 케네디의 특성상 CIA와 FBI가 국내외에서 벌이던 공작을 혐오하였다. 특히 존 에드거 후버와의 악연은 뿌리깊다. 비록 마릴린 먼로와의 염문 때문에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긴 했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의 권한을 이용해 후버 FBI 국장을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했다. FBI 예산을 자르고, FBI의 관할이었던 업무부서를 법무부로 옮기고, 대놓고 흑인 민권 세력을 밀어주면서 반공 보수파를 탄압하는 식이었다. CIA 국장인 리처드 헬름스의 경우 케네디와 사이가 나빴던 존슨 대통령의 절친으로, 베트남이나 중동 관련해 더러운 일에 많이 연루되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 CIA와 FBI의 앞날은 뻔했으므로 둘이 암살을 사주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닉슨>은 아예 이 가설을 차용해 후버 국장이 케네디를 암살한 것으로 나온다. 최근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가 공개적으로 CIA 연루설을 주장하며 한국에서도 관심도가 올라가고 있다.

  • 마피아, 노동조합: FBI/CIA와 더불어 전통적으로 제기되는 배후이다. 카를로스 마르셀로나 지미 호파 같은 마피아-노동조합 보스들은 1950년대부터 로버트 케네디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인생의 신조로 마피아를 뿌리뽑고 노동조합 사이에서 마피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을 삼았고, 정계입문을 한 그날부터 끊임 없이 노동조합의 비리를 파헤치고, 마피아 보스들을 체포하고, FBI와 마피아의 유착을 제거하는 것에 열을 올렸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부패 노동조합 /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존 F. 케네디 암살 음모론에 마피아가 연루되어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같은 이유로 마피아가 노동조합과 손을 잡고 로버트 케네디를 암살했다고 주장한다.

  • 민주당 기득권 세력: 비록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3선 출마를 포기한 상황이었지만,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 등 민주당의 자금과 조직을 꽉 잡고 있는 민주당의 기득권 당권파 세력은 휴버트 험프리를 압도적으로 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험프리와 대립한 유진 매카시로버트 케네디가 연대하면 험프리에 유의미한 반대 세력을 형성하고 더 나아가 험프리의 대통령 후보 지명까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더구나 존슨과 로버트 케네디는 사적으로도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던 것으로 유명하고. 이 때문에 험프리를 위시로 한 민주당 당권파 세력이 케네디 암살을 사주한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있다.

  • 소련, 공산권: 소수설이나, 암살범 시르한 시르한의 수첩에는 "나는 공산주의의 대의와 공산주의자들을 깊이 존경하고 따른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무너지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승리할 것이다!"라는 문구가 써져있어 그가 쿠바소련의 강경파와 연관되어있는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추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로버트 케네디가 일관되게 공산주의에 강경한 매파였던 것이 드러났기에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우익 극단주의 세력: 이 이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유진 세자르(Eugene Cesar)가 진짜 암살범이었다고 주장한다. 유진 세자르는 앰배서더 호텔 측에 의해 고용된 사설 경호원이었는데, 사실 이 사람은 극우파로 케네디 형제를 매우 증오했으며 그들이 당선되면 미국이 깜둥이 공산주의 나라가 될거라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했던 인물이었다. 일부 음모론자들은 더 나아가 유진 세자르가 CIA와 손을 잡고 로버트 F. 케네디를 암살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가 이 가설을 지지하고 있다.

  • 군부 강경파: 베트남 전쟁에 특히 비판적인 음모론자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베트남 전쟁 철수를 공약한 것에 불만을 품고 그를 암살했다고 주장한다. 이건 그냥 멀리갈 것 없이 미국사에 무지한 것이다. 1968년 당시 베트남 전쟁 반전파 후보는 유진 매카시였지 로버트 케네디가 아니었고 그러면 유진 매카시를 암살하지 무엇하러 로버트 케네디를 암살하나?

  • 리처드 닉슨: 공화당의 유력한 경쟁 상대였던 리처드 닉슨도 암살범으로 지목되나 가능성이 거의 없다. 리처드 닉슨은 로버트 케네디의 입후보와 완주를 응원했는데, 이유는 로버트 케네디가 계속 예비선거에 남아있을수록 유진 매카시의 반전좌파 진영이 분열되고 민주당도 분열되어서 닉슨의 승률이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여론조사는 로버트 케네디의 본선 경쟁력이 제일 취약함을 보여준다. 이를 미루어보자면 리처드 닉슨에게는 로버트 케네디의 경선 완주와 본선 출마가 가장 이상적 선택지였기에 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5.1. 두번째 암살범이 있다?[편집]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과 달리, 범인이 시르한 시르한인건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이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많은 음모론자들은 시르한 시르한은 연막이고 두번째 암살범이 있는데 그가 진짜 암살범이라고 주장한다. 로버트 케네디를 가격한 총탄은 에서 날아온 것으로 분석되었는데, 많은 목격자들은 시르한 시르한이 총을 로버트 케네디의 뒤가 아닌 에서 쏘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사실 진짜 범인은 따로 있고 시르한 시르한의 총성에 묻혀 비밀리에 암살을 저지른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후 추가적으로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식료품 창고 문은 LAPD의 관리 부실로 인해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음모론자들은 이것이 문에 박힌 총알의 개수가 8개보다 많은 13개여서 CIA나 존슨이나 마피아나 여타 배후가 비밀리에 증거를 인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007년에는 음향 분석에 따라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암살 당일 녹음 파일을 들으면 총성으로 의심되는 소리가 13번 들렸다는 것이다. 시르한 시르한이 쓴 22구경 리볼버는 8발 까지밖에 장전할 수 없고, 총알을 재장전하기 전 사설 경호원들에게 제압되었기에 공식적으로 발포된 총알은 8발에 불과하다. 그런데 일부 음모론자들은 5발의 총알이 더 발사되었고 이것이 로버트 케네디에게 진짜 치명상을 입혔다고 보고 있다.

당일 암살을 목격한 산드라 세라노(Sandra Serrano)는 "물방울 무늬 치마를 입은 여성"을 진범으로 지목했다. 당일 앰배서더 호텔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물방울 무늬 치마를 입은 여성이 수상하게 주방 복도를 들락거리는 것을 여러번 봤다고 증언을 한 바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산드라 세라노는 물방울 무늬 치마를 입은 여성이 있는 그 방향에서 총격이 여러번 들렸고 로버트 케네디가 바로 다음 순간 쓰러졌다고 주장했다. 다만, 후일 과학자들이 엄밀하게 분석한 결과 세라노가 있는 위치에서 총성이 아무리 해도 들릴 수 없다는 분석 결과가 나오며 세라노는 빈축을 샀고, 경찰과의 심문에서 물방울 무늬 치마를 입은 여성이 진범이라는건 자기가 꾸며낸 말이라고 인정해버려 더욱 빈축을 산 바 있다. 세라노는 자신이 LAPD에 의해 협박을 받아 그렇게 답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다른 "두번째 암살범"의 후보자는 앞서 언급한 우익 극단주의자 유진 세자르(Eugene Cesar)이다.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유진 세자르는 사실 경호원 훈련을 제대로 받지도 않은 비정규직이었다. 그는 유명 군수 기업인 록히드사의 공장에서 일했는데, 그가 일하는 보직은 미국 국방부와 긴밀히 연결된 자리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케네디를 살해한 총기 기종인 22구경 리볼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심문에서 이 총을 암살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 팔아버렸다고 주장했지만, 추후 조사에 따라 1968년 9월까지도 리볼버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정도 되니 의심이 되는건 당연한 일. 그러나, 강도 높은 경찰 심문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범이라는 증거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며,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한 조사에서도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고 나왔다.

5.2. 만주 후보자 가설[편집]


시르한 시르한이 진범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대체 가설인 "만주 후보자 가설"(Manchurian Cadidate Theory)을 내세운다. 만주 후보자란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붙잡힌 연합군 포로가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에 의해 세뇌되어 자군에 사보타주를 저지른다는 소설에서 따온 것이다. 이 내용은 시르한 시르한 본인과 그의 변호사가 주장하고 있기도 해 나름대로 음모론 가설로 자리잡았다. 일부 음모론자들은 CIA나 우익 극단주의자들이 그를 납치, 세뇌하여 로버트 케네디를 암살하도록 조장하였다고 주장한다.

다만 프로파일러들의 엄밀한 분석에 따르면 시르한 시르한이 정신적으로 이상한 면은 있지만 그건 편집증의 영향이지 세뇌의 영향이라 보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현대의 기술로도 그정도로 사람을 완벽하게 세뇌시키는 것은 에로 동인지에나 나올법한 얘기이다.

5.3. 음모론에 대한 반박[편집]


그러나 이러한 많은 음모론에도 불구하고 시르한 시르한에게 배후가 있다는 주장은 여론의 큰 반향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몇가지 이유로 설명된다.

  • 음모론의 논파: 현재까지 나온 거의 대부분의 음모론의 논거가 논파되었다. 예를 들어 13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는 주장은 추후 더욱 명확한 음향 분석 결과 2010년대 들어서는 8발만 발사된게 맞다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 상태이다. 일부 결정적인 증거가 사실은 과장되거나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음모론은 힘을 잃었다.

  • 시르한 시르한의 명백한 범행 동기: 리 하비 오스왈드가 도대체 왜 케네디를 죽였는지는 아직도 아무도 모르지만, 시르한 시르한이 케네디를 죽인 동기는 아주 명백하다. 오늘날에도 잊을만하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 대한 문제로 주요 인사가 이스라엘 비밀 공작원에 의해 암살되거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에게 당하곤 하며, 유대인 극단주의자나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한 테러 사례는 셀 수 없다. 1968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팔레스타인 문제는 주요 화두가 아니었기에 생소하게 느껴졌지만, 오늘날에 팔레스타인은 국제적인 화약고로 잘 알려져있고 그런만큼 시르한 시르한이 로버트 F. 케네디의 친이스라엘적인 입장 때문에 암살했다고 하면 수긍하는 사람들이 많다.

  • 시르한 시르한에 대한 수사 결과: 리 하비 오스왈드와 구분되는 명확한 차이점이다. 리 하비 오스왈드는 체포 2일만에 잭 루비에게 살해당했고 상세히 수사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시르한 시르한은 오늘날까지 70대 노인으로 잘 살고 있고, 60여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미국 최고의 형사와 프로파일러들이 그를 심문했다. 시르한 시르한의 정신병력에 대해 체킹한 문헌만 하더라도 음모론과 관련된 문헌의 양만큼 많을 정도이고, 해가 지날수록 시르한 시르한의 살인 동기와 정신 상태에 관한 정보는 정교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점차 음모론이 힘을 잃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는 2018년 시르한을 만나고 나서 자신이 마치 진실이라도 얻은마냥 떠들고 다녔지만, 수십년간 시르한을 수사한 전문 프로파일러들은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의 주장을 진지하게 들을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를 위시로 한 많은 음모론자들이 아직도 미국 내에 수가 적지 않으며, 이들은 끊임 없이 새로운 가설을 만들고 지지자를 모으고 있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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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케네디 옆 놀란 표정으로 있는 소년은 앰배서더 호텔에서 일하던 후안 로메로이다. 케네디는 그와 악수를 한 직후 총에 맞았다.[2] 아랍어 표기는 سرحان بشارة سرحان.[3] 정치적으로 사이가 좋지 못하기보다는 성격상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는데, 린든 존슨은 로버트 케네디를 철부지 재벌 2세 정도로 생각했고 로버트 케네디는 목적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존슨의 음험한 정치 스타일을 혐오했다.[4] 첫 대통령이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한 잔여임기 1년 승계였기 때문에, 3선 금지의 예외조항에 따라 68년 대선 출마가 가능했다.[5] 다른 점이 있다면 유진 매카시는 케네디에 비해 더욱 강경한 반전 입장을 취했고, 케네디는 매카시에게 부족했던 국내 빈곤 문제, 흑인 인권 문제를 핵심 어젠다로 삼았다.[6] 원래 호텔 주방이 아닌 반대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설 경호원들이 다른 쪽으로 케네디를 안내했다.[7] 당시 케네디를 수술했던 의사는 케네디가 총알을 1cm만 앞에서 맞았더라면 그가 생존할 뿐만 아니라 몇 주 뒤 선거운동을 다시 시작했을 거라고 말했다.[8] 후보자 옹립 운동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9] 아랍어 발음을 살려서 "써한 써한"이라고 쓰기도 한다. 한국에서 조금 옛날에 나온 책은 대부분 서한 서한이나 써한 써한 같은 표기를 따르고 있다.[10] 그는 로버트 케네디가 이스라엘에 전투기 50대를 지원했다고 생각했다. 메모장에서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구가 발견되었으나 그가 공산주의자인지는 불명확하다.[11] 시르한 시르한은 요르단 시민권자였기에 캘리포니아 주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총기를 구할 수 없었다.[12] 찰스 맨슨도 같은 이유로 사형을 피했다.[13] 암살 다음날 로버트 케네디는 CIA 국장을 호출해 CIA가 암살을 사주한게 아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