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F. 케네디/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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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출마 거부와 번복[편집]
로버트 케네디는 1964년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자마자 린든 B. 존슨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1966년 2월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민주당원에게 27%의 지지를 얻어 5%를 얻는데 그친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을 크게 앞질렀고 3선 도전의 야욕을 보이던 린든 존슨 대통령의 52%를 뒤쫓았다. 베트남 전쟁과 1966년 중간선거의 참패 등으로 존슨 대통령의 지지율이 꺾인 1967년에, 로버트 케네디의 대통령 출마를 지지하는 여론은 민주당 내에서 43%에 이르렀고 존슨은 34%에 그쳤다. 본선 경쟁력에서 케네디는 특히 무당층에게 소구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존슨에 대비했을 때 케네디는 민주당원에게 2% 정도 더 받지만 무당층에게는 무려 14%정도 더 지지를 받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존슨에 대적하는 것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백악관과 상원 민주당이 모두 존슨의 편이었기 때문에 존슨 치하에서 살아남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로버트의 측근들도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는데, 테드 케네디는 존슨에게 밉보일 여유도 없을 뿐더러 현직 대통령과의 경선에서 패배하면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므로[1] 존슨의 3선 임기가 만료되는 1972년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1967년 로버트 케네디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였으며, 케네디가 불출마한다면 존슨은 70%대 후반의 지지율로 여유롭게 민주당의 지명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존슨의 유일한 반대자는 베트남 전쟁 전면 철수 정책을 내세운 미네소타 주의 상원의원 유진 매카시였다. 유진 매카시는 거의 무명의 인물이었고, 초기 지지율은 10%대 초반에 그쳤다. 1968년 1월 구정공세로 베트남 전쟁 수행 지지율이 꺾였음에도 여전히 존슨의 위세는 굳건했고, 로버트 케네디도 1968년 1월 30일 불출마의 뜻을 굳히며 자신의 측근인 조지 맥거번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1968년 3월 12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거 잘 구축된 반전 풀뿌리 조직을 동원한 유진 매카시가 42%를 얻어, 49%를 얻은 존슨 대통령을 거의 추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존슨의 위세에 처음으로 금이 간 것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그것을 기회로 여기고 1968년 3월 16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린든 존슨이 고조되는 흑백 인종갈등을 잘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유진 매카시는 국외 정책과 달리 국내 정책이 부실해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2] 했지만, 사실상 유진 매카시의 "일격"에 자신감이 붙어 출마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대부분의 반전운동가들은 로버트 케네디를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유진 매카시의 한 선거운동원은 "크리스마스 아침날 일어났는데 누가 선물을 모조리 훔쳐간 것"이라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의 입장에서 보자면, 테드 케네디가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1972년, 혹은 1976년까지 대선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존슨이 출마를 포기한 이상 1968년 대선에서 당선되는 사람은 누구든 1972년 대선에 재선을 노릴 것이고, 1976년이면 8년이나 기다려야했다. 당시 상원은 휴버트 험프리와 마이크 맨스필드 원내대표가 이끄는 속칭 "위대한 사회 민주당원"이 민주당 내 주류를 차지했고 로버트 케네디의 동맹은 몇 없던 상황이었다. 상원의원으로서 8년이나 기다리는건 위험했고, 1972년 재선에 도전하는 현직 대통령에 대항해 출마하는 것은 무모했다. 로버트 케네디의 입장에서도 1968년 출마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아무튼 로버트 케네디의 입후보 선언은 그 자체로 존슨의 정치적 인생을 끝내는 것이나 다름 없었고,[3] 존슨은 2주 후 베트남 폭격 일시 중단과 3선 출마 포기 성명문을 냈다.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존슨의 후계자로 즉시 예비선거에 뛰어들었다. 이로서 1968년 대선 민주당 예비선거는 반전좌파의 매카시, 민주당 기득권의 험프리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의 구도로 압축되었다.
3. 예비선거에서[편집]
휴버트 험프리는 존슨의 사퇴 직후부터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고, 1968년 4월 27일 형식적인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험프리는 예비선거를 통한 대의원 확보보다는 간접적으로 선출되는 주 대의원단 확보에 더 공을 들였으므로, 예비선거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전당대회에서 험프리 측과 대의원을 합칠 각 주의 "Favorite Son"[7] 이 다수 출마했다. 유진 매카시는 반전 좌파의 표를 일부 로버트 케네디에게 잃으며 주춤했으나 여전히 로버트 케네디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경선은 험프리를 지지하는 Favorite son, 유진 매카시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의 삼자 구도로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특히 인디애나, 네브래스카, 오리건, 캘리포니아 4개 지역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다.
예비선거 시작 직후인 4월 9일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후보 지지율은 로버트 케네디 35%, 휴버트 험프리 31%, 유진 매카시 23%로 박빙으로 나타났다.
3.1. 인디애나 예비선거 (5월 7일)[편집]
험프리와 존슨을 지지하는 로저 브래니진 인디애나 주지사가 favorite son으로 경선에 참여했다. 로저 브래니진은 인디애나 주 내에서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었고 92개 카운티 전역에서 캠페인을 벌였기에 케네디에게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케네디는 대도시 빈민가와 흑인 밀집 지역, 대학교를 순회하며 자신의 장기인 연설을 통해 지지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한편 유진 매카시는 시골과 소도시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핵심 지지층들을 결집시키는 풀뿌리 캠페인을 벌였다.
1968년 4월 4일 사우스벤드의 노터데임 대학교(노트르담 대학교)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첫 유세를 가졌다. 로버트 케네디는 노터데임 대학교에서 자신에게 항의하는 의대생들을 상대로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 중 아무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백인과 흑인, 빈곤층과 중산층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전진하는 것이 1968년의 도덕적 의무입니다"라고 연설했다. 사우스벤드를 떠나 인디애나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로버트 케네디는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시민들에게는 아직 이 소식이 알려지기 전이었고 케네디의 보좌진들은 킹 목사의 암살 소식이 알려지면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언급하지 말자고 조언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즉석 연설을 통해 킹 목사가 암살되었다고 대중에게 알렸다. 대중의 탄식 소리가 잦아든 후에, 로버트 케네디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이 연설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한 기관이 선정한 "20세기 미국 최고의 연설"에서 17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킹 목사의 죽음이 알려지자 미국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폭동의 수위가 매우 낮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9] 4월 10일 로버트 케네디는 동생 테드와 함께 킹 목사의 장례식에 참여했으며, 당시 증언에 의하면 그는 그 자리에서 야유나 비난이 아닌 박수갈채를 받은 유일한 백인이었다.마틴 루터 킹 목사는 동료 인간 간의 사랑과 정의를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그 노력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어려운 날에 우리는 미국이 어떤 국가인지, 어떻게 나아가야하는지 자문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우리는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살아가며 서로를 향한 증오로 가득 찬 이 양극화의 상황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킹 목사님이 말하셨듯 우리 땅 전체에 드리워진 폭력을 이해하고, 이를 사랑하려는 노력으로 대체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흑인 여러분 중, 모든 백인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 가득찬 분들께 저는 제 마음 속에서도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형은 백인에게 암살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된 미국을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다 함께 이 어려운 시기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고대 그리스의 아이스킬로스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잠을 자는 시간에도 고통은 마음 속에 한방울 씩 떨어진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우리의 의지와 무관히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으로 지혜는 찾아온다."
미국에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닙니다. 미국이 필요로하는 것은 증오가 아닙니다. 미국에 필요한 것은 폭력과 불법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지혜, 연민이며, 백인이든 흑인이든 그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면 그들을 위해 품을 수 있는 우리 속의 정의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밤, 마틴 루터 킹의 가족을 위해 기도해드리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우리가 모두 사랑하는 조국과 연민, 이해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간을 겪을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폭력이나 불법, 무질서가 당장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 살아가는 대다수의 백인과 흑인은 함께 살기를 원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길 원하며,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위한 정의를 원합니다. 오래 전 그리스 시인이 쓴 글, 즉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이 세상의 삶을 온화하게 하는 것에 헌신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 밤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을 위해 기도합시다.
물론 로버트 케네디가 단순히 연대와 희망 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인디애나 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법무장관을 맡은 자신의 경력을 내세워 법과 질서(Law and order)를 바로잡고 불법을 근절하겠다고 주장했다. 흑인과 빈민층의 폭동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폭력까지 옹호할 수는 없다는 것이 로버트 케네디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이는 매우 교묘한 전술이었는데, 청년좌파 세대에게는 유진 매카시에 지지가 약간 밀렸지만 도시 빈민층과 유색인종에게는 엄청난 표를 얻을 수 있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인디애나 프라이머리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흑인의 85%~90%의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민주당 후보로서는 거의 유례가 없는 수치였다.
5월 7일 예비선거 결과 로버트 케네디는 초반의 열세를 뒤집고 328,118표를 득표해 42.26%로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저 브래니진은 238,700표로 30.74%, 유진 매카시는 209,695표로 27.01%였다. 인디애나 프라이머리의 최대 승자는 로버트 케네디였으며, 케네디의 캠페인은 이것으로 확고한 추진력을 얻었다.
3.2. 네브래스카 예비선거 (5월 14일)[편집]
선거 결과, 네브래스카에 공을 들인 로버트 케네디가 52%를 얻어 31%의 매카시를 여유롭게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로버트 케네디는 25개의 카운티 중 24개의 카운티에서 승리했는데, 매카시는 대학생들이 다수 거주하는 밀스 카운티에서 패배했다. 네브래스카 대학교에서 유진 매카시의 몰표가 쏟아진 탓이었는데 증언에 의하면 매카시는 밀스 카운티에서 로버트 케네디에 딱 2표 앞섰다고 한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를 토대로 오리건 프라이머리와 캘리포니아 예비선거 승리를 위한 모멘텀을 마련했다.
3.3. 오리건 예비선거 (5월 28일)[편집]
이러한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미리 정해져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오리건 예비선거는 유진 매카시의 승리가 거의 유력시된 싸움이었다. 유진 매카시는 로버트 케네디보다 6개월이나 빨리 오리건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는데, 신좌파 대학생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으로부터 일정부분 지지를 얻고 있었다. 반면 로버트 케네디의 핵심 지지층인 유색인종은 오리건에 거의 살지 않았는데, 당시 오리건 주 인구 중 유색인종의 비율은 단 2%에 그쳤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가 주장하는 의제 역시 부유한 중산층 거주지였던 오리건에는 통하지 않았다.고용률은 높았고, 빈곤율은 낮았으며, 주민 대부분은 휴양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로버트 케네디가 내세운 총기 규제에는 반대했다. 또한 로버트 케네디의 "케네디 신화" 재건에는 관심이 없고 유진 매카시의 반전진보주의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더 많았다.
예비선거 일주일 전인 일요일 아침, 매카시와 케네디는 우연히 포틀랜드의 공원에서 동시에 선거운동을 하게 되었다. 유진 매카시의 선거운동원은 로버트 케네디의 차를 발견하고 같이 사진이나 한장 찍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로버트 케네디는 화를 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운전수에 빨리 장소를 벗어나라고 했다. 황당해진 매카시의 운동원들은 로버트 케네디의 등 뒤에 "겁쟁이!"라고 소리쳤고, 이는 카메라에 그대로 녹화되어 그날 밤 오리건 주 TV 뉴스를 장식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 사건 이후 오리건 내에서 이미지를 회복할 기회가 없었고, 민주당 일부 유권자 사이에게 퍼져있던 "기회주의자" 케네디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고 말았다. 유진 매카시는 유세에서 "자신에게 차갑다는 이유로 프라이머리에서 도망치려는 사람은 장미가 피어나는 따뜻한 오리건에 출마해서는 안됩니다"라는 명연설을 하며 자신의 우세에 쐐기를 박았다.
투표 결과 매카시는 44%를 얻어 38%의 케네디를 근소하게 앞질렀다. 이것은 대의원을 얻고 못얻고의 문제가 아니라,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 전략상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오리건에서 유진 매카시를 눌러 리처드 데일리 등의 당 기득권에게는 자신의 강세를 입증하고, 유진 매카시에게는 지속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서 유진 매카시의 선거 포기를 종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진 매카시는 여전히 자신이 신좌파, 교외 백인 유권자, 대학생 사이에서 인기가 건재함을 입증했고, 케네디가 "무적"의 후보는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무엇보다 케네디 가문이 누군가에게 경선에서 패배한 것은 이것이 거의 처음이었다.[10] 수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케네디에게 모두 나쁜 결과였으므로 케네디 입장에서는 충격적이었을만 하다. 케네디의 전기작가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이때의 패배를 기점으로 자신이 무적이 아니며 많은 지지층과 자원봉사자들이 자신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임을 깨달았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유진 매카시에게 승리 축하 전보를 보내고[11] , 매카시와 TV 토론을 할 것이며,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에서 패배하면 더이상의 반전진영의 분열을 막기 위해 자신이 사퇴하고 매카시에게 기회를 양보하겠다는 배수진을 치면서 지지층을 다시 결집시켰다. 캘리포니아 예비선거는 그만큼이나 결정적이게 되었다.
3.4. 캘리포니아 예비선거 (6월 4일)[편집]
6월 4일, 캘리포니아, 뉴저지, 사우스다코타에서 민주당 예비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이중 케네디와 매카시가 가장 집중한 곳은 미국 최대의 주인 캘리포니아였다. 캘리포니아 예비선거는 매카시와 케네디의 맞장 승부였고, 그만큼 정치적인 상징성이 큰 예비선거였다. 예비선거를 앞두고 로버트 케네디가 유진 매카시와의 토론을 승낙한 것이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의 정치적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유진 매카시는 달변가로 토론에서 강했고, 로버트 케네디 역시 말빨로는 뒤지지 않는 인물이지만 형과 마찬가지로[12] 생방송 토론회보다는 연설이 주특기였다.
이 때문에 매카시가 TV 토론회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TV 토론회는 전반적으로 로버트 케네디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두 후보는 토론을 진행하며 거의 모든 의제에 비슷한 의견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이것만으로도 양쪽 중 어느쪽이 선거를 도중 포기할 명분은 생긴 셈. 다른 문제는 제쳐두고, 매카시와 케네디는 각각 자신의 핵심 어젠다였던 베트남 전쟁과 흑인 게토 문제에 갑론을박을 나눴다. 매카시는 로버트 케네디와 존 F. 케네디가 백악관에 있으면서 쿠바 침공을 주도하고 베트남 침공을 설계했다고 지적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매카시가 흑인과 유색인종 게토화 문제에 대해 실질적 해결책이 없다고 비판했고, 매카시는 흑인 게토를 교외에 편입시킴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고 답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그러면 흑인들을 버스에 태워서 오렌지 카운티에 보낸다는 것인가?"라고 일격했고 매카시는 이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또한 유진 매카시는 토론 내내 지루하다는듯한 표정을 보였고 로버트 케네디는 형과 같이 열정적으로보였다. 비록 로버트 케네디는 토론 직후 토론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지만 토론을 시청한 무당층 유권자는 2대 1의 비율로 로버트 케네디가 승리했다고 답했다.
이에 반해 유진 매카시는 UCLA, UC 버클리, USC 등 많은 대학교 캠퍼스에서 신좌파 대학생들에게 큰 환호를 받긴 했으나 대도시 유권자 사이에서는 지지가 밀렸다. 신좌파 히피 운동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에서 반전운동가들은 대부분 유진 매카시를 지지했으며, 히피들은 유진 매카시를 베트남 전쟁 종전의 선구자로 여겼다. 그럼에도 몇몇 대학생들은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하는 대도시의 큰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했다. 가령, 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 모임(SDS)의 의장이자 신좌파 혁명의 리더였던 톰 헤이든(Tom Hayden)은 로버트 케네디의 캠페인에 참여했다. 유진 매카시는 오리건 예비선거와 달리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약점을 보였는데, 1965년 투표권법과 이주노동자 최저임금 보장 반대의 전적이 알려지며 대대적으로 매카시를 거부하는 운동이 있었고, 매카시는 제한적으로 대도시 교외의 진보주의자와 대학생들을 포섭할 수 밖에 없었다. 매카시는 뒤늦게 로버트 케네디의 "오렌지 카운티" 발언을 언급하며 그가 흑인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우익적 캠페인을 진행한다고 공격했으나 하늘이 두쪽나더라도 케네디를 지지할 기세의 흑인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4. 미완으로 끝난 선거운동[편집]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시 10분, 연설장을 벗어난 로버트 케네디와 일행은 12시 15분 호텔 주방 복도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과 일일히 악수하고 있었다. 16세의 호텔 주방 보조원 후안 로메로(Juan Romero)와 로버트 케네디가 악수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총성이 들렸다. 괴한에 의해 22구경 리볼버에서 총 8발의 총알이 발사되었고 5발은 빗나갔지만 3발은 로버트 케네디를 명중했다. 가슴과 목 뒤쪽, 오른쪽 귀에 총알이 박혔는데, 그중 마지막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케네디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케네디는 위중 상태에 빠졌고, 인근의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에서 케네디의 몸에 박힌 총알을 모두 빼내는 수술을 시행했음에도 뇌의 손상이 너무 심각해 상황이 계속 나빠졌다. 결국 암살 다음날인 6월 6일 새벽 1시 44분 사망 판정이 내려짐에 따라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문서 참조.
5. 사망 이후[편집]
케네디가 사망하자 케네디의 선거운동원은 사분오열되었다. 일부는 험프리를 막겠다는 목적으로 유진 매카시 측으로 캠프를 옮겼지만, 또다른 일부는 케네디의 유지를 이어받아 새로운 사람을 대선 후보로 내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36세로 불과 1살 차이로 대선 출마 연령을 넘긴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대선 후보자로 지목되어, 일부 선거운동원은 드래프트 테드(Draft Ted)[14]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테드 케네디 본인이 대선 출마가 부적절하다고 느꼈기에 거절하면서 이 운동은 동력을 얻지 못했다.
대신 생전 로버트 케네디의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하나였으며, 케네디 자신이 대선 후보로 지지하기도 한[15] 조지 맥거번 사우스다코타 상원의원이 로버트 케네디의 진영을 수습하기 위해 출마했다. 맥거번은 예비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고 매카시 쪽으로 이탈하지 않은 로버트 케네디의 대의원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출마 시점이 너무 늦었기에 당선 가능성은 전무했다. 기본적으로 당시 경선 시스템은 후보 선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고 대부분의 대의원이 당 기득권의 영향을 받았기에, 케네디 암살 시점에서 휴버트 험프리의 후보 지명은 거의 확정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8월 전당대회에서 휴버트 험프리가 맥거번과 매카시를 꺾고 여유롭게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면서 로버트 케네디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베트남 전쟁 반대를 외치는 매카시 지지자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민주당 당직자들과 시카고 경찰이 시위대를 과격진압하는 바람에 험프리의 이미지가 실추되었고 이를 극복할 기회가 없었다. 그나마 선거 운동 막판에 험프리가 자신의 본래 입장이었던 "베트남 북폭 반대"를 내세우며 케네디와 매카시 지지층을 흡수하며 지지율을 상승시켰지만, 닉슨의 우세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고, 11월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이 불과 0.7% 차이로 당선되면서 1932년 이후 30년 넘게 이어진 민주당의 전성시대는 끝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