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진/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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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오류 목록
2.1. 확실한 역사적 오류
2.2. 조금 애매한 것들
2.3. 옥에 티
3. 역사와 부합하는 부분


1. 개요[편집]


MBC의 전 드라마 닥터 진의 역사적 오류 모음이며, 문단이 너무 길어짐에 따라 문서를 분리했다. 이게 다 몰라서 생긴 오류라면 정말 너무 많다보니 평행세계라서 다른 것이라는 설정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많이 나왔다. 마지막화에 평행세계라는 언급은 있는데 확실하게 나오진 않았다.


2. 역사적 오류 목록[편집]



2.1. 확실한 역사적 오류[편집]


  • 안동김씨가 노론 벽파다 실제로는 김조순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안동김씨는 권력을 놓치는 그 때까지 노론 시파였다. 다만 벽파로 바꾼 것은 당대 안동김씨의 수구 이미지를 강화시키고 흥선대원군에게 개혁자 이미지를 부여하려고 바꾼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벽파는 경주 김씨 일파 주축으로 1806년에 시파의 반격으로 멸당되었다.

  • 진혁의 어투나 용어 자체가 너무 현대적인데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질 않는다. 심지어 궁중에 들어가서도 궁중 예법과는 동떨어진 어구들을 사용하는데 내시고 관리고 아무도 태클을 걸지 않는다. 물론 드라마의 시적 허용이라지만.[1][2]

  • 조대비를 지칭할 때 간혹 마마님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었다. '마마'가 왕족에 대한 존칭인 반면 '마마님'은 상궁에 대한 존칭인데, 진혁은 물론이거니와 흥선대원군철종까지 이런 실수를 가끔씩 했다.

  • 이하응은 27세 때 종친부 최고품계인 현록대부(정1품)에 봉해졌으므로 경칭은 그저 대감이면 족하다. 나으리, 어르신은 더 어색하다. 별명도 막걸리 대감이었다고 전해진다.


  • 환도를 들고 다닌다. 무조건 띠돈이나 칼집 고리에 매고다녀야 하는 것 만은 아니니 어느정도는 허용할 수 있지만, 김경탁을 비롯 주요 인물들은 다 들고다니니 문제.[3]


  • 허광이 부적을 쓰는 장면. 수천년 전의 편작은 '병은 무당이나 귀신이 낫게 해주는게 아님'이라고 했고, 장중경 역시 상한론에서 곽란[4] 편을 만들어 치료법을 나열했다. 허광의 조상인 허준부터도 '곽란은 귀신에 의해 생기는게 아니고 음식 때문에 생기는 거임'이라는 단계심법의 대목을 인용했다. 무엇보다 허준의 저서 상당수는 전염성 질환에 대한 것들이다. 허준보다 약간 후대인 청대에는 대규모 전염성 질환의 유행으로 오늘날의 바이러스나 세균과 유사한 개념도 사용되고 있었다. 종두법(인두법)이 처음 고안된 것도 청나라 초기. 허광이 그들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부적을 믿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허광이 극 중에서 보여주는 허준에 대한 존경심과 각종 의서에 통달한 모습을 보면 아귀가 맞지 않는다. 다만 명백한 역사적 오류임과 별개로 부적을 쓰는 장면은 원작에도 있던 장면이다. 그것도 한의학계 최고봉이라는 다키 겐엔이 했던 짓. 역사적 오류는 맞지만 원작을 반영한 설정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할 듯. 이는 당시 일본이 한의학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후진국에 가까웠기에 비롯된 일이다.

  • 이하응이 "첩실을 들여 봤자 호강도 못 시켜 주니 계향을 저버렸다"며 자책한다. 이하응은 첩실이 3명 있었으며, 계성월이라는 에게서 낳은 이재선이라는, 나중에 고종에게 처형당하는 서자도 있었다. 또한 이하응은 실제로 '추선(秋善)'이라는 이름의 기생 출신 첩도 있었다.

  • 천하장안 포지션을 맡을 주팔이 패거리가 중인이 아닌 거리 왈짜패.

  • 홍영래 등 조선 신자들이 몰래 미사에 참례하는데, 프랑스인 신부한국어미사를 집전한다. 라틴어가 아닌 언어로 미사를 드리는 것이 허락되는 것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일이다.[5] 뭐 그 신부가 독단적으로 조선 신자들을 위해 한국어로 해준 것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어쨌든 고증 오류라고 보는 게 맞다.

  • 홍영휘가 지붕 위에서 김병희를 저격하기 위해 활시위를 당길 때 몽골리안 사법이 아니라 지중해식 사법으로 당긴다.[6]

  • 김경탁이 사용하는 마상통(동양의 머스켓 권총)이 수석총이다.[7] 효종네덜란드벨테브레가 표류해 와서 수석총을 전해주긴 했지만 구조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사장되고 조선은 망할때 까지 꿋꿋이 화승총을 고수했다.[8] 김경탁만 수석총을 쓴다면 모르겠는데 진주민란을 진압할 때도 관군들이 이열 횡대로 열심히 수석총을 쏴대며, 병인양요 때 강화도 정족산성 군사들도 모두 이 녀석을 썼다.
  • 이하응이 조대비에게 "헌종이 승하했을 때의 수모를 잊지 말라"고 말한다. 철종 즉위를 조대비가 막지 못한 것은 그 당시 내명부 1인자가 조대비가 아닌 순조의 정비였던 순원왕후 김대비여서 아무런 실권이 없었기 때문이지, 안동 김씨에게 날치기 당한 것이 아니다. 순원왕후는 엄연히 조대비의 시어머니라 그녀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철종은 정당한 절차를 통해 즉위한 왕이다.[9] 뒷날 철종 사후 안동 김씨의 권력이 막강했어도 조대비가 고종을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었던 것도 조대비가 왕실의 가장 큰어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철종이 국정에는 관심 없이 여색만 밝힌다는 묘사. 이때쯤 철종은 진주민란을 기회로 안동 김씨를 제어해 보려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 등 한참 바빴을 시기다. 성과가 없어서 문제였지만.

  • 고종 즉위식때의 진혁 의상. 임금의 아버지인 흥선군 및 문무백관들 모두가 제례에 맞는 의관을 입었는데, 진혁만 내의원에서 일할 때 입던 옷 그대로 입고 즉위식에 참관했다. 현대에서도 관혼상제 등에서 옷을 제대로 안 갖춰입으면 눈총을 받는데, 의관에 대해 철저했던 조선시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평상시에 편하게 입고 다니는 것은 그렇다 쳐도, 즉위식 당시만큼은 제대로 의관을 갖췄어야 했다.

  • 집권 후 대원군의 관복. 사실 그 관복은 대원군의 말년 모습이라고 발견된 사진(흥선 대원군 항목의 '오류' 목차를 참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관복으로 이전에 대원군을 다룬 사극에서도 대원군이 그런 옷을 입고 등장했었다. 문제는 그 관복은 베트남 대신의 관복이다. 그런데 일단 그 관복이 어쩐지 위엄이 있어 보이는지 대원군을 다룬 사극에서 계속 등장하고 있다. 그나마 이전 사극에서는 대원군 섭정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관복을 입고 등장했고 베트남 관복을 입고 나오는 것은 주로 말년에 그런 옷을 입고 등장했었는데, 여기서는 섭정기부터 그 옷을 입고 있다. 사실 그 사진의 주인도 대원군일 가능성은 적다. 대원군은 초상화나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실제 초상화나 사진과 그 문제의 베트남 관복을 입은 노인이 닮았는지도 생각해 보자. 게다가 고종즉위를 앞두고 전대미문의 살아있는 대원군의 등장에서 그 지위에 대한 논의는 대군에 준하는 예우를 한다.인데, 대군이래 봐야 관복에 기린흉배를 부착할 수 있을 뿐이다. 용은 임금 만의 것이므로 역모죄감이다.

  • 병인양요 때 몰려온 프랑스 해군 군함(그나마 다 CG였다)들이 다 똑같이 생겼다. 이때 온 군함들은 전함, 순양함, 통신함, 포함 등 그 함급이 다양했다. 또한 그 군함들이 다 철제다. 이 배들은 철제 전투함도, 장갑함도 아닌 그냥 대형 목조함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따위로 만들어 놓았다.

이 장면에서 병인양요 때 몰려온 프랑스 군함들의 정체는 무려 영국 전설의 공학자인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의 걸작이자 산업혁명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 초거대 증기선 그레이트 이스턴호다.(물론 이 배는 군용이 아니다.)

그레이트 이스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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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봐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대 선박임을 알수있다.

'그레이트 이스턴호'는 외륜과 스크루로 추진되었으며, 2중 강철선체로 된 최초의 선박이었다.
진수(進水)할 당시 이 배는 배수량 1만 8,914t, 길이 211m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선박이었다.
속력을 14.5Kn(노트:시속 27㎞)까지 올리고 추진장치들을 번갈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해 외륜 엔진 2개와 스크루 엔진 2개, 돛대 6개를 달았다.
1889년 해체되었으나 1898년까지 40년 동안 가장 큰 선박이었던 그레이트 이스턴은 뉴욕-런던(리버풀), 런던-인도를 오갔다.
특히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 대서양을 오간 1867년의 항해는 유명해서, SF 소설가 쥘 베른도 이 배를 탑승하고 "〈떠 있는 도시 Une Ville flottante>"라는 글을 썼다.
사실 이 배는 지나친 배수량에 인한 적자운용으로 여객선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1874년 전신을 위한 대서양 해저 케이블을 성공적으로 설치하여 명성을 얻었다.

  • 조선시대에서 주사기용 바늘을 대장간에서 만든다. 바늘 안에 미세한 구멍이 뚫린 주사기용 바늘을 만드는데 상당한 수준의 철 가공 기술력이 들어가는 물건이다. 대충 대장간 장인의 손길로 망치를 동원한 단조따위로 되는게 아니라 금형을 동원해 냉간단조 기계로 주욱 뽑아내야 하는 영역이다. 주사기가 처음 개발된 것이 1853년이고, 닥터 진의 배경은 1860년이다. 7년의 시차가 있긴 하나 산업 혁명이 한창이었던 서양의 기술력과 아직 농업사회를 채 벗어나지 못한 조선의 기술력을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 아무튼 저 시절에 마을 대장간에서 대충 만들만한 물건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주사바늘이라고 다 같은게 아니고 게이지라는 단위가 있는데, 주로 18게이지에서 26게이지까지 있으며 18게이지는 외경 1.270mm, 내경 0.838mm. 가장 작은 26게이지는 외경 0.457mm에 내경 0.241mm로 미세한 물건이다. 행여나 대장간 사람이 백동제 담뱃대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했다고 해도 흉내 낼 수 있는 물건은 절대 아니다. 원작 만화조차 해당 고증을 메우기 위해 서양의 야금술을 배운 기술자가 으로 간신히 만들었다는 설정을 붙였다.

  • 병인양요 때 투입된 프랑스군은 모두 해군 인원이었고, 지상전도 승조원을 차출해 편성한 해군 육전대였으나, 이 작품에선 거기 있지도 않았단 육군들만 나온다. 역시 미 해군해병대가 투입되었음에도 육군만 잔득 나오는 신미양요를 다룬 미디어들과 마찬가지로 만들 때마다 개선이 안 되는 부분. 그나마, 프랑스 육군의 고증은 이를 다룬 국내 미디어들 중에선 수준이 제일 높다(?).

  • 김경탁의 마상통이 총구가 아래를 향한 상태로 패용하고 다닌다. 마상통은 전장식 머스켓이기 때문에, 저렇게 들고 다니면 총알이 새게 된다. 즉 김병희는 따로 총알을 준비해서 자살을 한 꼴이 된다.

  •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피격당한 조선 병사에게서 적출한 총탄이 조선 조총탄과 같은 쇠구슬이다. 이때 서양에서는 이미 미니에 탄 사용 시작. 그리고 미니에 탄에 맞은 상처는 해당 장면에서 묘사된 것처럼 얌전한 관통상은 아니다. 전장식 라이플이 주로 쓰인 미국 남북전쟁 관련 사진을 찾아보면 확인할 수 있다.(그런데 작중 프랑스 병사들이 들고다니는 총은 후장식 볼트액션 라이플이던데…)

  • 마지막회 흥선대원군과 진혁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창덕궁이 여전히 만월대 세트장이다. 어찌 보면 이건 역사적 오류가 아니라 옥에 티지만.


2.2. 조금 애매한 것들[편집]


고증 오류이긴 한데, 정확히 역사적 오류라고 보긴 애매하고 반론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이다. 작중에서 조금만 더 상세히 설명했으면 오류가 되지 않았을수도 있는 부분들이다.

  • 진혁이 이하응의 정체를 알게 되는 장면에서 "흥선대원군?"이라고 중얼거리자 이하응이 "대원군은 살아있는 임금의 아비에게만 붙이는 작호"라고 말한다. 하지만 살아서 대원군 소리 들은 것은 오히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하응이 최초이자 유일하며, 조선시대에는 흥선대원군 이전에 대원군 작호 받은 사람이 3명이나 더 있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죽은 후 대원군에 봉해졌고 한 대원군은 왕으로 추존되었다. 다만 이하응이 말한 것이 살아있는 "임금의 아비"를 말하는 것인지, "살아있는 임금"의 아비를 말하는 것인지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는 있다. 자세한 것은 대원군 항목 참고.

  • 환도 칼자루가 앞으로 오게 칼을 차고 있다. 단 이건 완전히 역사적 오류라고는 할 수 없는 게 어차피 조선시대 환도는 단지 띠돈을 이용해 차고 다닌다는 게 공통점일 뿐, 칼자루가 앞으로 오게 차던 뒤로 오게 차던 등에 지고 매던 착용자 마음대로였다. 단지 활을 패용해야 하기 때문에 칼자루가 뒤로 가는 방식을 가장 많이 사용했을 뿐이다.문제는 드라마 상에서 나온 배우들이 모두 앞으로 차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조선 배경 사극에서 칼집을 손에 안 들고 허리에 찬 것만 해도 장한 거다(…).

  • 기생이 몸을 판다는 묘사. 조선시대 기생은 예능인이지 창녀가 아니었다.[10] 전문적으로 몸을 파는 기생은 삼패기생, 혹은 창기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다. 춘홍을 포함해서 작중 등장하는 기생들은 선비들과 학문과 시조를 나누는 일패기생이다. 물론 계향이는 이전에 몸을 팔던건 아니었고 기생에서 면천시켜 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갔다는 묘사가 나온다.

  • 이 썩어나고 있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서만 나는 귀한 진상품이었다. 귤이 썩어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 자세한 것은 조선시대 제주도 진상품 고난을 참조. 애당초 이 썩어날 것까지 감안해서 올리고 왕과 궁궐 대신 관청 순으로 분배되는 것이다. 물론 활인서에까지 분배된 은 하품이라서 썩어나는게 있을수도?

  • 페니실린 반응 검사. 원작 만화에서도 페니실린을 처음 투여하기 전에 페니실린 반응을 체크한 뒤 투여했다. 하지만 작중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된 채 바로 페니실린을 투여했다. 방송에 안 나올 때 검사를 했을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을 생략한 것은 오류.

  • 단근질의 시행 문제. 고문할 때마다 열심히 인두로 살을 지진다. 단근질이라고 불리던 낙형(烙刑)은 영조 때 이미 악형이라 하여 금지되었다. 하지만 법으로 금지된 고문이라고 하여 아예 안 한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몰래몰래 행하여졌다고 한다. 게다가 당대 안동 김씨 세도가라면 걸려도 쌩깔 만한 권력은 있을 것이다.

  • 진혁이 영래에게 당시에는 여자 의사가 없었고, 여자가 의학을 배우는 것이 고될 테니 포기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의녀는 있었다. 물론 양의사 기준이면 말이 달라지지만. 혹은 진혁이 의녀의 역할을 현대의 간호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덧붙여 공식적인 한국 최초의 여성 양의사는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박에스더(1876~1910)[11]라는 사람이다. 닥터 진의 시대에서 10년 정도 후에 태어난 인물.

  • 서양 선교사인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12]가 주사기를 처음 보는 것이라면서 모르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닥터 진의 배경 시점보다 이미 7년 전에 만들어진 물건을 모르고 있다. 물론 플라스틱 주사기는 2차대전 이후에나 나오는 물건이므로 그것이 주사기인지 모를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서양을 돌아다니기보다는 청나라나 조선 등을 돌아다녔고.

  • 대원군과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의 밀약. 본시 대원군과 풍양 조씨들(조영하, 조성하 등)은 프랑스를 이용해 다른 서양국가를 제어하려고 프랑스인 신부들과 접촉했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일이 수틀려 비밀이 밖으로 새게 되었고, 정치적 핀치에 몰릴 위기에 처한 대원군은 풍양 조씨들을 앞세워 대대적인 박해를 주도한다. 즉, 밀약이 실패해서 박해가 있었던 것이지, 박해를 막으려고 밀약을 한 것이 아니다. 일의 인과관계가 완벽하게 반대다. 다만 이 밀약은 진혁의 주전으로 일어난 것이므로 역사적 사건과는 다를수 있다. 오히려 진혁으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사건이라고 봐야 할 듯.

  • 김경탁이 정족산성의 최고 선임자에게 반말로 지시를 내린다. 당시 정족산성의 최고선임자였던 양헌수의 직책은 천총. 종사관 김경탁 따위는 새까만 하급자다. 이걸 현대군 기준으로 하자면, 중대장연대장에게 반말로 지시를 내리는 격이다. 하지만 작중에서 등장한 최고 선임자가 양헌수였는지, 그리고 그의 직책이 천총이었는지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오류라고 꼬집기엔 애매하다.

  • 조선군이 너무 잘 싸운다. 애초에 통진부만 하더라도 프랑스군 60명에게 한 번에 뚫렸다. 다만 외규장각도 털리고 나머지 요새가 다 개발살나서 정족산성 하나만 남았다는 언급이 나오기는 했다. 게다가 흥선군이 이끌고 온 원군은 최정예부대다.

  • 연회 중에 신정왕후 조씨에게 만세를 외친다. 17화 고종 즉위식에서는 천세를 사용하지만 사실 만세를 못 썼던 것은 아니다. 천세를 많이 써서 그렇지.

  • 이하응이 '함풍 10년'이라는 연호를 쓴다. 물론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나라라면 이를 갈 정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공식 문서를 제외하고는 숭정이나 영력 같은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를 사용했다. 이에 따르면 '숭정4경신', 혹은 '영력4경신'[13]이라는 표현이 맞다. 정 아니면 육십간지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일단 이 시기에는 육십간지가 연도를 표기하는 기본 단위였으니 아예 '경신년'이라고 부르든가. 이 표현이 애매한 이유는 연호라는 것 자체가 일상생활에서 쓰이기에는 너무 공식적인 표현이고, 게다가 영력 운운하는 것은 현대로 치면 2012년을 융희 106년이라 부르는 급의 꼴통 같은 표현이라는 것(…). 사실 청나라의 연호를 쓰는데 어느 정도는 허용하는 범위도 있었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청나라는 조선의 상국이었기 때문이다.


2.3. 옥에 티[편집]


이것도 뭐 역사적 오류이긴 한데, 불멸의 크리넥스와 같이 제작진의 잔실수에 가까운 부분이다(…)

  • 조선시대에 LTE가 잡힌다. {{{#!html
<img src="http://upload.enews24.net/News/Contents/20120611/10298010.jpg" width=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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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사당패 옷에 단추가 플라스틱이다.

  • 김경탁이 신은 목화신의 밑창이 고무다. 작중에서도 아직 조선에 고무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묘사가 있으므로[14] 고증 오류라기보다는 옥의 티.그러나 이건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지적되었는데 옥에 티는 맞긴 해도 이건 해당 항목에 기재된 것처럼 배우 발 보호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만큼 거슬리겠지만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그래도 덧신, CG 등으로 가려준다거나 하는 등의 노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 흥선군의 머리가 짧다. 보통 사극을 찍는 남자 배우들은 상투가발 등으로 원래 머리를 가리는데 못 가린듯.

  • 진혁이 조선에 온지 꽤 됐는데도 수염이 안 자란다.

  • 처음엔 영래가 춘홍에게 반말을 하더니 중반 이후로는 하오체를 쓴다.


3. 역사와 부합하는 부분[편집]


  • 각종 의학적 사실들. 위의 페니실린 양성반응검사와 같은 약간의 문제점이 있었지만, 닥터진에서 그 외 의학적인 고증은 전반적으로 잘 된 편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게 촬영시 실제 의사들의 검수를 받았다고.

  • 이하응이 "지금이 철종시대냐"고 언급한 진혁을 혼내는 부분. 철종이라는 호칭은 임금이 죽은 뒤에야 받는 묘호다. 당시로는 멀쩡히 살아있는 임금에게 제멋대로 묘호를 갖다 붙이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이하응이 철종드립을 친 진혁을 혼내는 것은 정확한 재현.


  • 이하응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 실제로도 부대부인 민씨는 천주교 신자가 맞았다. 작중에서 이하응의 부인이 천주교 신자라 포청에 끌려가는 내용도 있다.

  • 서원 철폐. 고종 집권초 이하응이 상당수의 서원을 철폐해 백성들에게 큰 지지를 받은 것은 실제 있던 일이다. 이 때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거라면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할 수 없다"는 대사도 나온다. 서원철폐 당시 실제로 그가 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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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진혁이 현대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대사를 고어체로 바꾸지 않았을 수도 있다.[2] 일례로 진혁이 내시들에게 철종의 증세를 물어보는 과정에서 "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임금의 변은 궁중식 표현으로 "매화"다. 뭐 당시 철종이 죽네 사네 상황이 급박하긴 했다. 때문에 내시나 누구나 신경쓸 겨를도 없었겠지만[3] 전통 환도 패용법은 손잡이가 뒤로 가게 하여 허리에 차는 방식이다. 띠돈은 칼을 뽑을 때 칼을 돌리게 하여 뽑을 수 있게 하는 허리띠다.[4] 콜레라수인성 전염병의 통칭[5] 그래서 한제국 건국사에서도 윤준혁이 라틴어를 모르는 탓에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아멘"만 했다.[6] 덧붙이자면 양궁에서 쏘는 방법이 지중해식 사법이다. 시위를 당길때 세손가락으로 당겨 쏘는 것이 지중해식 사법. 국궁에서는 몽골리안 사법이라 하여 시위를 엄지로 당기는데, 깍지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당기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극에서 보이는 사법은 지중해식 사법이 많다.[7] 수석총이라고 언급되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 쏠 때마다 화승의 교체를 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화승식 머스켓(화승총)은 아닌데, 한제국 건국사에서도 없어서 만들어야 했던 뇌관식 머스켓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수석식 머스켓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8] 단순히 복잡한 탓에 높은 양산 비용만이 문제가 아니라 수석식 머스켓에 필수 소모품인 고품질 부싯돌을 대량으로 구하기 힘든 탓에 청이나 일본에서도 서구에서 구한 소총을 연구한 적이 있으나, 비용과 수급 문제로 포기했다.[9] 철종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왕위 계승이 가능한 영조의 유일한 혈통은 철종밖에 없었기 때문.[10] 이는 일본의 게이샤도 마찬가지인데, 일본에서 유곽에서 몸을 파는 것은 유녀(遊女)이지 게이샤가 아니었다.[11] 본래 이름은 김점동이었으나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세운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며 '에스더'라는 서양식 이름을 받았고, 이후 박유산이라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씨를 따랐다.[12]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13] 숭정, 혹은 영력 연간 이래 4번째 맞는 경신년이라는 의미(…).[14]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에 들어온 물량은 거의 없어서 허광이 청나라 상인에게 어렵게 구했을 정도(그것도 소량만)로 드물다. 즉 신발 밑창으로 쓸 정도로 넉넉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