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신체적 특징 및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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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체적 특징
1.1. 외모
1.2. 키
1.3. 각종 질병
2. 사생활
3. 종교
4. 가족들과의 관계
4.1. 친가
4.2. 연인 및 그 후손들



1. 신체적 특징[편집]



1.1. 외모[편집]



파일:Napoleon Bonaparte Portrait.jpg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보나파르트(Bonaparte franchissant le Grand-Saint-Bernard)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 1801년
나폴레옹과 함께 그야말로 전설이 된 그림이다. 타 버전이 몇 가지 더 존재하며 구도는 같지만 얼굴이 검은 백마와 망토가 노란색인 버전도 매우 유명하다. 왼쪽 아래의 바위들에 나폴레옹의 성인 보나파르트와 한니발카롤루스 대제가 새겨진 것은 덤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성인 보나파르트가 한니발카롤루스 대제보다 더 위에 있어 나폴레옹이 이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선전하는 것도 덤이다. 흔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라고 부른다. 그림에는 멋있어 보이라고 백마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에는 지구력이 뛰어난 노새사용했다고 한다. 말메종과 부아프레오 성에 있는 원본 그림은 그야말로 신고전주의의 극한이라 칭할 만하며, 그야말로 크기와 포스 모든 면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들은 선전을 위해 미남 대역을 고용해 그려진 것들이 대다수라고도 하는데, 초상화에서 나폴레옹의 외모는 그린 화가에 관계없이 매우 일관된 편[2]이기 때문에 대역들은 얼굴보다는 포즈를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다비드가 그린 얼굴이 본인과 닮은 편이라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1801_Antoine-Jean_Gros_-_Bonaparte_on_the_Bridge_at_Arcole.jpg
파일:attachment/napoleon1.jpg
사실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은 수려한 미남이었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어느 정도 보정이 들어갔다 치더라도, 정권을 잡기 이전의 초상화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사망 후에 남긴 데스 마스크를 봐도 얼굴은 확실히 평균 이상으로 잘생긴 편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6개의 나폴레옹 석고상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참고로 우측의 초상화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별의 별 고생을 다하고 막 프랑스로 돌아온 러시아 원정 후 결국 파리가 함락당하고 극한의 상황에 몰린 퇴위 직전의 나폴레옹을 상상해 그린 상상화다. 당장 러시아에서 손실할 병력을 복구하고 민심을 달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녀야 할 판국에 태평하게 초상화를 그리진 않았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돌게 된 이유는 영국의 풍자 만화 때문인데, 프랑스 제국과 적대적이던 영국이 적대국가의 최종보스 나폴레옹을 당연히 잘생기게 그릴 리가 없었으니,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대개 키 작고 못생긴 난쟁이로 널리 퍼진 것이다. 사실은 나폴레옹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외모에 대해서는 "키가 좀 작았어도[3] 얼굴은 조각을 해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그의 미소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의 초상화를 봐도 그 유전자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세월 앞엔 장사 없다고 나이가 들면서 격무에 시달린데다 생활습관까지 불량하여 중년의 나폴레옹은 살이 붙고 외모도 좀 가버리긴 했다.

파일:1280px-Jacques-Louis_David_-_The_Emperor_Napoleon_in_His_Study_at_the_Tuileries_-_Google_Art_Project.jpg
프랑스 제국 근위대 척탄병 대령 복장을 하고 있는 나폴레옹. 역시 다비드의 작품이다. 가슴팍에 저렇게 손을 넣는 포즈는 '숨겨진 손'(hand-in-waistcoat pose)이라 하여 서양에서 유행하던 상류층, 근엄한 리더십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4] 하지만 나폴레옹의 위장 건강이 나빴다는 게 널리 알려지면서 이 포즈는 '배가 아파 문지르는 포즈'로 잘못 알려졌다. 한편 프리메이슨 회원 상징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1.2. 키[편집]


작지만 사나운 인물을 뜻하는 나폴레옹 콤플렉스의 유래가 됐을 정도로 작은 키로 유명하다. 물론 지금은 폐기된 설이지만 일설에서는 키가 155cm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사후 부검 당시 측정한 실제 나폴레옹의 키는 168cm였다. 나폴레옹이 키가 꽤 줄어들었을 50대에 사망했으니 20~30대에는 170cm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나폴레옹은 당시 프랑스인 평균키인 164cm보다 오히려 4cm나 더 컸다. 그리고 당시 다른 유럽인들의 평균키도 크게 차이가 없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유럽인 전체로 확대해도 최소 평균키였지 절대 작은 키는 아니었다.[5]

나폴레옹이 상류층(귀족 등)에서 키가 작은 편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귀족들 평균키가 몇이었는지도 모를 뿐더러 정작 나폴레옹 시대의 귀족이나 상류층 출신 중에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의 키가 164cm고, 프리드리히 대왕이 162cm, 괴테가 169cm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는 키가 작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1세기 뒤에 태어난 영국 국왕인 조지 5세와 영국 귀족인 윈스턴 처칠의 키가 168cm다.(...)[6] 그래서 귀족들 중에서 나폴레옹보다 키가 큰 귀족들도 있었지만 나폴레옹보다 키가 작은 귀족들도 많았다.

그리고 19세기 이전(전근대) 전세계의 상류층(귀족)들의 키는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아버지의 키는 180cm인데 아들의 키가 160cm인 경우도 흔했다.[7][8] 물론 잘 먹고 잘 자고 스트레스도 적게 받는 귀족들이면 일반적으로 서민층보다는 키가 더 큰 것은 맞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밑도 끝도 없기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다. 그리고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키는 그 나라의 귀족들, 상류층의 평균키와 비교하면서 크다 작다 하지 않는데 나폴레옹한테만 이런 잣대를 들이대는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

결과적으로 18세기 프랑스의 징병검사 기록에 따르면 귀족이 대부분이었던 장교층의 평균키는 174.6cm임을, 그리고 표준적으로 프랑스 상류층의 키는 평균보다 7cm 높았다는 통계를 볼때 나폴레옹의 키는 일반 상류층에 비해 아주 약간 못미치거나 사실상 평균에 근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반귀족들과의 비교에 있어서도 나폴레옹이 성장기에 코르시카 출신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집안 사정 악화로 인한 가난으로 다른 귀족들에 비해 성장에 있어 어느 정도 불리했던 점, 그리고 사후 부검에 의한 키이므로 노화에 의한 1~3cm정도의 신장 하락이 존재함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평균 키 논문 참고자료 즉, 나폴레옹의 키는 절대 작은 수준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함 내지 전체 인구 수준에선 상위권에 속하는 신장을 지녔다는 것.



나폴레옹의 키가 작다는 인식이 퍼진 이유들 정리하자면
  • 나폴레옹은 다른 장교들과 달리 이각모를 넓게 쓰는 버릇도 있었다. 그래서 더 작아 보였다.
  • 약간 펑퍼짐한 체격 때문에 '작아 보이는' 인상에 한몫했다.
  • 본인 스스로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라는 말도 했다.
  • 키가 큰 사람만 골라 뽑은 척탄병 사이에 있다 보니 [9] 상대적으로 키가 작게 보였다.
  • 그 당시 프랑스에서 썼던 피에(pied)라는 단위를 잘못 환산해서라는 말도 있다. 원래 피에(pied)는 '발'이라는 뜻으로 정확히 영국의 피트(feet)에 해당되며, 보조 단위인 푸스(pouce)도 인치(inch)처럼 1/12 또는 '엄지손가락'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도량형이 다 그러했듯이 18세기 말까지는 나라(또는 지방)마다 시기마다 그 크기가 조금씩 다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대략 17세기 말~18세기 말 기준으로 1피에가 약 32.5㎝, 1푸스(=1/12피에)가 약 2.71㎝였다.[10] 당시 나폴레옹의 키는 통상 '5피에 2푸스'라고 이야기되었으니, 이것을 18세기 말 단위를 적용해 환산하면 약 168㎝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야드파운드법을 쓰던 영국에서는 1피트가 약 30.5㎝, 1인치가 약 2.54㎝로 약간 더 작았음에도 그대로 '5피트 2인치'라고 옮겨버렸다.(...) 도량형의 차이를 감안하면 5피트 6인치 정도라고 해야 맞는데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영국인들의 뇌리 속에는 나폴레옹이 실제보다 10㎝나 작은 158㎝의 단신이라는 인식이 박혀버리게 되고, 곧 다른나라 사람들에게도 그런 인식이 전해지게 된다.
  • 적국의 지도자를 폄하하기 위해 당시 영국의 언론들이 일부러 그렇게 퍼뜨렸다. 그리고 129년뒤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11]한테도 비슷한 프레임이 씌워진다. 이런 수법은 지금도 쓰인다. 북한에서 김정은은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유일신으로 숭배되는 위대한 존재이나, 한국에서는 그냥 대마왕 돼지일 뿐이다. 양측 언론이 그렇게 만든다. 만만한 존재로 만들어야 싸울 때 군 사기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이 낭설에는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진짜로 키가 작았던 게 한몫을 보탰다. 키가 불과 160cm였다고 한다. 역대 프랑스 대통령 중 최단신이다. 근데 나폴레옹 3세는 생물학적 친조카가 아니라는 설[12]이 역사학계에서도 자주 나올 정도로 유전학적 검증 대상으로 부적합한 부분이 있다. 오히려 친아들인 나폴레옹 2세가 장교 시절 키가 180cm가 약간 넘을만큼 상당히 컸다는 증언이 있고, 아기 때 우량아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는데 모친이 난산을 했고 태어난 직후 쟀을때 몸무게가 4kg이 넘었다고 한다.

매체에서 쓰이는 우락부락한 거구들 사이에 있는 체구 왜소하고 제일 약해 보이는 인물이 알고보니 최고 지도자라는 클리셰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단신인 사람이 거구의 부하들을 부리고 다니는 모습은 반대의 경우와 다른, "저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저런 덩치들이 찍소리도 못 하고 복종하는가?" 하는 위엄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다.


1.3. 각종 질병[편집]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전까지의 초상화는 '유황을 끼얹은 것 같다'라고까지 얘기될 만큼 창백한 안색에 대단히 여윈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비서 브리엔에게 '나는 나이가 들어도 살이 붙을 것 같지 않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황제 즉위 이후부터 급격히 살이 붙게 되고, 나중에는 심각한 비만이 되었는데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말년을 묘사한 초상화를 보면 그야말로 펭귄의 모습이다. 사후 부검할 때 복부에서 엄청난 지방을 걷어냈다고 한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위장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는 평생 나폴레옹을 괴롭혔다.

식습관도 불량했는데, 나폴레옹은 식사를 지나치게 빨리 하는 편이었다.[13] 대식가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소박한 편에 가까웠다. 다만 감자 같은 탄수화물을 선호했고 야전에서 바쁠 때는 말 위에서 식사를 때우기도 했으니 균형잡힌 건강한 식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식습관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밑의 기타문단을 참조. 승마 등 운동을 너무 격렬하게 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칠 정도였음에도 갑자기 비만체가 된 걸 보면 잘못된 식습관 및 불량한 수면패턴, 그리고 유전적인 요인이 같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다.

한편, 그에겐 피부가 가려운 피부염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시간이 있으면 장시간의 목욕을 즐기고 목욕탕 안에서 집무를 보기도 했다고 한다. 목욕시에 시종 루스탐에게 피부를 세게 벅벅 밀게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원정 때 부인인 조제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기침과 편두통, 발열이나 배뇨 곤란, 치질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중에 치질은 거머리 치료법으로 호전된 듯했다가 다시금 재발해서 결국 아편을 처방받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만 아편을 처방받은 날이 하필이면 워털루 전투 때였는데 당연히 전투지휘에 큰 지장을 주었다.


2. 사생활[편집]


여러 가지 비범한 모습과 신화적인 전설들이 내려오지만 사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인간적으로서는 성격의 단점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완고한 데다가 독선적인 면이 강하여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기 싫어했으며 독단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경향이 많았다. 여성 문제에서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의 사랑으로 유명하지만 서로 성격이 만만치 않았던 데다가,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결국 이혼한 뒤 오스트리아의 황녀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은 묘하게 엇갈린 사이로 처음엔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거의 일방적으로 사랑했고 조제핀은 상황상 마지못해 넘어간 것에 가깝지만, 조제핀이 나폴레옹의 마음에 넘어가 열중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나폴레옹 쪽에서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이 죽는 순간 마지막에 말한 단어가 조제핀의 이름이었으니 진정한 사랑이라 해야 할까.[14]

어쨌든 주변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아도 세속의 권력과 영화에 찌들기 이전에는 상당히 순수한 면이 있고, 인간성도 털털하고 괜찮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어린 시절부터 일진적인 면모가 있고 유럽 귀족들이 말했던 것처럼 야만적인 해적 귀족스러운 모습들도 있어서 당시에도 나폴레옹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실제로도 나폴레옹 본인이 미화하도록 요청한 것들을 제외하면 주변인들의 기록에서 나폴레옹이 주변인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다는 기록들이 상당히 많아서 생각보다 평이 좋지 않다. 베르티에 원수가 나폴레옹의 무모한 전쟁에 반대하며 직언을 올렸을때 그의 머리를 잡아다가 벽에 찍어버리거나 말단 병사에게 주먹질을 해서 코피를 터뜨리기도 했으며 하인들에게도 폭력을 쓰기도 했고 말메종 궁전에서 번식기에 접어든 동물을 그냥 죽이고 싶어서 때려 죽이고는 말리는 조제핀에게조차 모욕을 주기도 했다. 여성들에게는 폭력은 덜 휘둘렀으나 역시나 무례하게 대하며 물건처럼 여기는 성향이 있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최후의 충신이었던 베르트랑의 회고록에서도 자신의 재미를 위해 그의 부인을 요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베르트랑 본인 앞에서도 그의 부인을 매춘부라고 비웃어 베르트랑을 모욕하기까지 한다. 앙토마르키 같은 주변인들에게도 비슷한 조롱을 하고 다녔다. 영국인들에게는 '차갑고 악마같은 인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나 그의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를 달리 보기도 했다.

조제핀과 헤어진 직후 한 배우가 나폴레옹의 이 역린(?)을 건드릴 뻔한 일화가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프랑수아 조제프 탈마라는 연극배우가 있었다. 나폴레옹 본인도 그를 튈르리 궁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좋아했다. 탈마는 로마 제국을 무대로 한 연극 '브리타니쿠스'에서 네로 역을 맡았다. 물론 이 공연에는 나폴레옹도 직접 관람하러 참석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극의 내용 중 네로의 아내인 옥타비아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장면이 있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이전부터 브리타니쿠스의 내용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극을 계속 진행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폴레옹과 궁정 관계자들이 한 행동은 '잠이 든 척 하기'였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탈마의 행동이 비의도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괜히 사건 만들어서 유명한 배우를 족친다며 여론을 흔들기는 곤란하므로 잠이 들어서 문제의 장면을 못 본 척 하며 넘어간 것이다.

재밌는 점은 나폴레옹의 친지들은 나폴레옹에게 도움은 안되고[15] 그저 배신 혹은 이용만 해먹었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아들인 외젠과 딸인 오르탕스는 나폴레옹을 끝까지 따랐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친지들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외젠과 오르탕스를 친자식처럼 아꼈다. 하지만 혈연주의가 강했던 보나파르트 가문은 이 둘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제4차 대불(對佛)동맹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는 나름대로 훈훈한 일화도 남겼다. 베를린 총독 하츠펠트 대공이 간첩 혐의에 연루되었다는 증거인 편지를 입수한 나폴레옹이 하츠펠트 대공을 체포하자, 대공의 부인이 남편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못 된다며 총살당할 처지가 된 남편의 구명을 호소하러 왔다. 나폴레옹이 그녀의 눈앞에 편지를 들이대자 부인은 울음을 터뜨렸고, 임신 중이었던 부인의 부른 배를 보자 마음이 약해진 나폴레옹은 지금 이 편지를 곁에 있는 난로에 던지면 아무 증거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고 그녀에게 넌지시 귀띔했다. 결국 하츠펠트 대공은 목숨을 건졌다.


3. 종교[편집]


나폴레옹은 종교적으로 상당히 복합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종교적 배경은 크게 두 요소로 이루어져있는데, 하나는 18세기 계몽주의를 학습한 엘리트로서 가진 반종교·반교회적 스탠스이다. 또 하나는 코르시카의 귀족으로서 학습한 가톨릭적 스탠스이다.

가령 자코뱅파 군인으로 활약하던 시절에도 다른 자코뱅보다는 반가톨릭 스탠스가 온건한 편이었다. 또한 권력을 잡은 후에는 프랑스와 가톨릭교회의 관계 정상화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노트르담 대성당의 1802년 부활대축일 미사에 참례할 것을 장군들에게 '명령'하는 등 혁명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톨릭교회에 상당한 편의를 봐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교황들과 충돌하였다.

그런데 이 일견 모순되는 종교성을 일관되게 설명 가능한 요소가 있다. 그건 바로 나폴레옹이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자코뱅 시절의 교회 약탈은 무슨 이념적인 교회 파괴라기보다는 '그냥' 약탈이었으며, 혁명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스와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정상화시킨 것도 당시 프랑스 여론을 보면 나폴레옹에게 이득이었다.[16] 또한 교황 비오 7세와 대립하긴 했으나 이념적 대립이라기보다는, 역시 나폴레옹 스스로의 야망과 관련된 것이었다.

요컨대 나폴레옹은 특정한 종교적/반종교적 스탠스를 이념적으로 추구한다기보다는, 마치 현대 유럽인처럼
ㄱ. 계몽주의적 교육
ㄴ. 종교적 전통
ㄷ. 개인 중심적 사고관
세 가지가 결합된 사람이었다.


4. 가족들과의 관계[편집]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코르시카 특유의 혈통에 대한 집착과 가족주의 때문에 낭패를 본 바가 많았다. 물론 권력자가 혈연에 의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고, 신분에 따라 재능을 단련할 기회가 차등적으로 주어지던 전근대 시대에는 권력자 주위의 혈연 집단이 의외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의 별볼일 없던 지방귀족이었고 자신의 출세도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온전히 자신의 재능에 의지해 출세한 경우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의지했던 보나파르트 가문의 형제들은 가문 자체가 배경이 한미하니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 나폴레옹의 형제들은 당대 기준으로 보아도 굉장히 무능했고, 심지어 권력자가 자신의 혈족에게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충성심도 없을만큼 이기적이었다.[17] 오히려 나폴레옹의 형과 동생들은 무능한 주제에 야망과 욕심은 엄청 많고 나폴레옹 덕분에 배부르게 호의호식했으면서, 그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온갖 문제를 일으키다가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그의 몰락에 일조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본인들도 왕과 왕비 자리에서 폐위되어 여기저기 망명 신세를 지는 와중에도, "이게 다 나폴레옹 때문이다!"라고 원망이나 하며 상황파악도 못하는 문자 그대로 답이 없는 집안이었다. 시골 촌구석에서 출세한 자식이 생겨나면 온 가족이 빨대꼽아 쪽쪽 빨아먹으며 끊임없이 불평이나 요구사항만 늘어놓는 전형적인 일자무식 촌부집안의 이미지와 완벽히 상통한다.[18] 그나마 정상적인 친족은 조제프루이 정도다.

오죽하면 나폴레옹도 스스로 "내 형제들 말만 들으면 처음부터 우리 아버지는 프랑스의 유서 깊은 정통 황제이시고 내가 그 프랑스 황제의 자리를 계승서열을 무시하고, 쿠데타 반란을 일으켜서 우리 아버지로부터 왕관을 혼자 꿀꺽하고는 형제들을 모두 내쫓고 나 혼자 호의호식한 줄 알겠다. 아주 기가 막혀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라고 푸념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나폴레옹은 친형제들보다 의붓자식인 외젠오르탕스와 훨씬 더 친하게 지냈으며, 의붓자식들도 자신들을 아껴주는 나폴레옹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굉장히 따랐다. 특히 의붓아들인 외젠은 능력은 물론 인품도 출중해서, 나폴레옹의 몰락 때 도망치긴 커녕 의붓아버지를 도와줄려고 나설 정도였다. 당연히 나폴레옹도 외젠을 친아들처럼 대하며 굉장히 아꼈다.


4.1. 친가[편집]


파일:Charles-Marie Bonaparte.jpg
  • 카를로 마리아 부오나파르테(Carlo Maria Buonaparte, 1746~1785): 프랑스식 이름은 샤를마리 보나파르트(Charles-Marie Bonaparte)이며, 나폴레옹의 아버지. 이탈리아 피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법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코르시카 법원에서 근무한 경력을 가진 법률가이다. 39살 나이로 요절했으며 죽을 당시 나폴레옹은 사관생도였으니 아들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죽었다. 고향인 코르시카에서는 제법 명문 집안 출신이고 코르시카 독립전쟁에 열심히 나선 인물이었다. 코르시카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파올리의 부관이었을 정도. 비록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친 프랑스파가 되었지만 그 덕에 코르시카 총독 빽으로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기에 나폴레옹 인생에 그도 큰 다리를 놓아준 셈이다.


파일:Maria Letizia Bonaparte.jpg
  • 마리아레티치아 부오나파르테(Maria-Letizia Buonaparte, 1750~1836): 나폴레옹의 어머니. 혼전 성씨는 라몰리노(Ramolino)였다. 뛰어난 미인이고 기질이 거세어, 평범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남편 샤를 보나파르트에 비해 보나파르트 형제들의 독특한 개성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듣는다. 14살에 결혼하여 15살에 아들을 낳았으나 1살도 못돼 죽었다. 모두 자식들을 7남 6녀를 낳았는데 그중 2남 3녀는 2살도 안 돼 일찍 죽고 나폴레옹을 비롯한 8명만 어른으로 자랐다. 나폴레옹이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기에 나폴레옹의 집권을 썩 반기지 않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며느리 조제핀과도 불화를 빚었다.(나폴레옹의 어머니는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유일하게 나폴레옹에게 황제가 되지 말라고 조언했다.) 대신 금전에 대한 집착이 강해 여러 은행가들을 곁에 두고 치부에 힘썼다고 하는데, 입버릇처럼 '내가 낳은 이 여러 왕과 공주들이 나중에 다시 내게 빵을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실제로 나폴레옹 몰락 후 보나파르트 가문의 재정을 상당부분 책임진 것은 나폴레옹 집권기 동안 레티치아가 열심히 치부했던 돈이었다. 아들의 유배와 죽음까지도 보고 아들보다 15년이나 더 살다가 당시에는 엄청난 장수를 누리고 86세에 죽었다. 그녀에 대한 책자도 세월이 지나 여러 권이 나오고 여장부로서 많이 재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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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제프 보나파르트 (1768~1844): 나폴레옹의 형. 스페인 국왕 호세 1세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피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법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변호사로 일했고, 프랑스 혁명발발 당시에는 프랑스령 코르시카섬 아작시오 지방의 판사직책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선량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사람이어서 나폴레옹 집권 이후 주로 외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나폴리 왕국의 국왕으로 임명되었는데, 입헌군주국에 가까운 정책들을 입안하며 나폴리를 부흥시켰다. 본인도 나폴리에 대해 애착이 대단했는지 나폴리를 조아킴 뮈라에게 넘기고 스페인 왕국의 국왕으로 전봉하라는 나폴레옹의 지시가 내려오자, "내가 일국의 군주인데 신하처럼 옮겨다닐 수는 없다"라며 저항했지만, 나폴레옹이 "남들이 들으면 형이 왕국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줄로 알겠네?"라며 압박하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스페인으로 전봉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이탈리아에 비해 훨씬 보수적인 카톨릭 국가였고, 조세프가 계몽주의 군주이자 인격자라는 사실은, 대다수 스페인 사람들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전국적인 저항이 일어났고,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려던 조제프와는 달리 나폴레옹이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자 결국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이를 지원한 영국군을 지휘한 인물이 하필 아서 웰즐리였다. 조제프는 계몽군주로써는 능력이 있었지만, 전쟁을 지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고, 나폴레옹이 그에게 붙여준 군사 조언가들 역시 웰즐리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떠나고, 러시아 원정으로 프랑스의 병력이 고갈되자 그는 프랑스로 쫒겨나게 되었다. 1814년 프랑스 방어전에서 그는 명목상 파리를 수비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지만 실권은 마르몽 원수에게 있었고, 마르몽 원수는 나폴레옹을 배신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미국에서 거주했으며, 현지에선 거부로 유명세를 떨쳤다. 멕시코 황제로 추대받기도 했으나 거절했고, 말년은 유럽에서 살다가 184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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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뤼시앵 보나파르트(Lucien Bonaparte, 1775~1840): 이탈리아어 이름은 루치아노 부오나파르테(Luciano Buonaparte). 나폴레옹의 형제들 중 형인 조제프와 함께 정치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고 알려진 인물. 재능보단 열정이 더 두드러졌다는 평도 있지만, 동생과 사이가 틀어진 시절 나폴레옹이 한 말이어서 객관적인 평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당시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면서 나폴레옹이 패닉에 빠졌을 때, "내 형이 혁명정신을 저버리면 내가 먼저 형에게 달려들겠다"라는 발언으로 사태를 진정시켜 나폴레옹 집권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문제는 이 발언이 그의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후 내무장관에 취임하지만, 나폴레옹이 종신통령에 취임하는 행보를 보이자, 내무장관이면서도 반정부적인 팜플렛을 작성했는데 내심 내무장관직을 노리던 푸셰가 이를 나폴레옹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장관에서 잘렸다. 이후 마드리드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했고 돌아와선 상원의원이 되었지만, 결국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이에 반대하여 로마에 은거해버렸다. 이후 나폴레옹이 그에게 지금 부인[19]과 이혼하고 유럽 왕족과 재혼하라고 압박했지만 이를 거부했다. 1808년에는 프랑스군이 교황령이었던 로마를 점령하여 합병시키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때 다시 나폴레옹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지만, 영국 해군에 나포되는 바람에 한동안 강제로 영국에서 살게 되었는데, 의외로 영국에서는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프랑스로 돌아왔고, 백일천하때는 모처럼 형에게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말 그대로 백일천하였으며 이후 학술에 전념하며 평온하게 살다 1840년 가족력으로 추정되는 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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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 안 엘리자 보나파르트 바초키(Marie Anne Elisa Bonaparte Baciocchi Levoy, 1777~1820): 이탈리아어 이름은 마리아 안나 엘리자 부오나파르테(Maria Anna Elisa Buonaparte). 카롤린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질이 거세고 야심이 많아 나폴레옹이 토스카나 일대에 영지를 주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남편 펠릭스 바초키(Felix Pasquale Baciocchi, 1762~1841)[20]가 자신의 눈에 차지 않는다고 하여, 당대의 유명한 문인 퐁탄과 연애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엘리자를 사랑했다고 한다. 결국 엘리자도 오빠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오스트리아의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풀려난 뒤에는 지방의 작은 별장에서 연금을 받으며 남편과 함께 평온하게 살다가 사망했다. 죽을 때 엘리자의 곁을 지킨 건 남편 뿐이라서 그녀는 "나는 배신했지만 당신은 바보같이 나를 따르니 참 우습네요. 하지만 정말 고마워요. 마지막까지 남은 게 오로지 당신 뿐이니" 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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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이 보나파르트(1778~1846): 프랑스 제국의 괴뢰국 홀란트 왕국의 국왕으로 지냈고, 나폴레옹의 양녀 오르탕스와 결혼하여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비롯한 여러 아들을 보았다. 나폴레옹 2세 탄생 전에는 나폴레옹이 루이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을 만큼 총애했지만, 루이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데다 부인 오르탕스와의 사이도 좋지 못해 개인적으로 계속 불행한 삶을 살았다. 게다가 군사적 재능도 훌륭하지 못했고 군주로서도 별 존재감이 없었다. 형이 몰락한 뒤로 이름을 숨기고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살아갔다. 그래도 1840년에 프랑스로 귀국하여 형의 장례식을 보고 늘그막은 그럭저럭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막내아들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이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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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린 보나파르트(Pauline Bonaparte, 1780~1825): 이탈리아어 이름은 마리아 파올라 부오나파르테(Maria Paola Buonaparte). 보나파르트 자매들 중 가장 미모가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여인. 르클레르 장군과 1797년에 결혼하여 아이티에 파견되었지만, 부부가 나란히 사복을 채우는 바람에 평이 좋지 못했다. 1802년 황열병으로 남편 르클레르가 30세 나이로 요절하자 다음해인 1803년에 보르게세 왕자(1775~1832)와 재혼하여 나폴레옹의 정략에 충실히 따랐다. 낭비가 심했고 연애행각이 잦아 언니들만큼이나 말썽이 많았지만, 사적으로 봤을 때는 나폴레옹에게 가장 우호적이고 가장 사이가 좋은 여동생이었다. 나폴레옹도 폴린을 가장 총애했는데, 이를 두고 대불 동맹군은 둘이 서로 근친상간을 한다는 악의적인 흑색선전을 일삼기도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 되자 어머니와 함께 섬으로 와서 그를 위로하였고, 오빠가 사망했을 때도 장례식에 참석하여 형제 가운데 가장 슬퍼했었다. 나체족으로 아이티에 있을때 알몸으로 집안에 있거나 바닷가에서 훌러덩 벗고 헤엄치길 즐기다 보니 현지인들에게 하얀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SRPG 게임인 성녀전기에서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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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 카롤린 뮈라 (Marie Annonciade Caroline Murat, 1782~1839): 이탈리아어 이름은 마리아 카롤리나 무라(Maria Annunziata Carolina Murat)이며 흔히 카롤린 보나파르트(Caroline Bonaparte)로 불린다. 나폴레옹의 막내여동생이자 보나파르트 가문 최악의 배신자. 나폴레옹의 절친이었던 조아킴 뮈라에게 시집갔다. 정치적 야심이 대단해서 남편 뮈라를 나폴레옹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획책했다. 나폴레옹의 가족들 중에서도 그의 첫번째 아내 조제핀과 두번째 아내 마리 루이즈, 양녀 오르탕스를 제일 경계했다. 나폴레옹과 뮈라가 폴란드로 출정한 동안, 나폴레옹이 전사할 경우를 대비해 당시 파리 방위사령관이었던 앙도슈 쥐노를 정부로 삼아 남편 뮈라를 제위에 올릴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이후 남편 뮈라가 나폴리 왕이 되면서 왕비가 되지만, 문제는 카롤린이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나머지 해방전쟁 당시 오빠를 배신하고 만 것이다. 이후 오빠와 뮈라 모두 몰락하고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으나 남편과 오빠를 망친 인간으로 낙인찍힌 터라 무수한 문전박대를 당하며 고생하게 된다. 그래도 늘그막에 재혼하여 어느 정도 넉넉하게 살다가 갔지만 지나간 영광을 잊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아이들에게 자신은 왕비로서 유럽을 호령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오빠 덕에 나폴리 왕비 자리를 거저 얻어먹었는데 그것도 망각하고 배은망덕하게 굴다가 폐위된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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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롬 보나파르트(1784~1860):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을 지냈고, 워털루 전투에서도 사단장으로 참전했다. 보나파르트 형제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는 것까지 보았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비교적 나폴레옹의 뜻에 충실히 따른 편이었지만, 베스트팔렌 왕으로 재위하던 중에는 지나치게 사치를 즐겨 주위의 골치를 썩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에게 "폐하는 선대 나폴레옹 폐하와 하나도 닮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나폴레옹 3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과 마찬가지로 나도 친척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지 않습니까"라고 답한 일화가 있다고. 제2제정 당시 상원 의장을 지내는 등 평안한 늘그막을 지냈다. 손자인 찰스 조셉 보나파르트(1851~1921)는 미국에서 살면서 정치인이 되어 미국 법무장관 재임 당시 FBI[22]를 세웠다. 1860년까지 살았기에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 중 유일하게 사진이 남아있다.

가족들이 이렇다 보니, 나폴레옹이 그나마 믿고 의지했던 것은 자신의 어머니와 둘째 여동생인 폴린, 아내 조제핀이 데려온 외젠오르탕스였고, 외젠은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을 지내면서 대체로 나폴레옹의 기대를 충족시킨 편이었다. 때문에 외젠이 나폴레옹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체역사적 가정들도 종종 나오고 있지만, 보나파르트 가문이 조제핀과 그녀의 아이들에게 보였던 적대감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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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 가문은 현재 코르시카 지방 정부에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은 샤를 나폴레옹 (Charles Napoléon. 위 사진 오른쪽의 백발 신사)과 그의 장남,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 (Jean-Christophe Napoléon. 샤를 왼쪽의 인물)이다. 샤를 나폴레옹은 1950년생으로 위에서 소개한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의 후손이며, 코르시카의 시장을 역임했으며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은 1986년생으로 경영학을 전공한 후 뉴욕, 런던에서 금융 분야에 종사했으며, 가문의 차기 수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 200주년 기념 행사에서도 가문을 대표해서 참석했을 정도. 2019년에는 마리 루이즈 조카의 직계 후손인[24] 올림피아 폰 운트 추 아르코지네베르크라는 오스트리아인 여성과 오는 10월 결혼식을 올렸다.#[25]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데 아들과 아버지가 공동 당주인 이유는 선대 당주이자 샤를의 아버지, 장크리스토프의 할아버지인 루이 나폴레옹이 샤를이 자신의 동의 없이 이혼한 뒤[26] 평민과 재혼 (귀천상혼)하자 샤를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십대에 불과하던 손주, 장크리스토프에게 당주 직위를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적통 당주는 루이 나폴레옹의 손자인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이지만 샤를은 이에 반발하여 적통 당주는 여전히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두 부자의 관계는 원만한 편인데, 샤를이 자신의 사망 후 당주의 지위는 장남인 장크리스토프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해서 장크리스토프가 단독 당주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기 때문. 때문에 장크리스토프 또한 아버지가 당주를 자칭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어 사실상 부자가 모두 공동 당주라고 할 수 있다.


4.2. 연인 및 그 후손들[편집]


위에 언급한 현대의 보나파르트 가문의 인물들은 나폴레옹의 직계 자손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의 자손이다. 제롬이 꽤나 자유분방했고 그 덕분에 워낙 자손을 많이 두어서, 제롬의 후손들이 지금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다.

나폴레옹 2세는 나폴레옹 1세의 유일한 적자이자 나폴레옹 1세가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본 늦둥이이다. 자식은 많았지만 죄다 사생아로써 나폴레옹과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만 적자로 인정했다.

나폴레옹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두 명 있었다. 다시 말해 나폴레옹의 애인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인데 사생아들이라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고 정식으로 호적에 오르지도 못해서, 정식 황태자이자 적자인 나폴레옹 2세와 달리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이 두 사생아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는데, 그가 세인트헬레나에서 죽기 얼마 전에 남긴 유언에서 그 둘을 언급하며 많은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황제께서는 발레프스카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알렉상드르)에게 이십만 프랑(현재기준 약 80만 미국달러)을 주면서 다른 사람, 특히 그의 의붓아버지(발레프스키 백작)로부터 그의 이익을 보호하라고 당부하셨다. 황제께서는 뮈라가 소개한 여자(드누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레옹에게 십오만 프랑(약 60만 미국달러)을 남기고, 그의 보호자에게 맡긴 삼십만 파운드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땅을 사주라고 하셨다.

-베르트랑의 일기 중에서, 1821년 4월 22일

나폴레옹은 동생 제롬 못지 않은 바람둥이로 그의 수많은 애인 중 잘 알려져 있는 두 명의 애인이 있는데, 첫째 애인이 엘레오노르 드누엘(Eleonore Denuelle)이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한 재력 있는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아버지가 집안에서 이름난 가정교사를 들여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현숙하고 명망 있는 숙녀로 자라났다. 외모도 뛰어났기에 여러 고위층 남성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18세에 장프랑수아 르벨오노르(Jean-Francois Revel-Honore)라는 장교와 결혼했지만 그가 공금 유용 및 사기죄로 2년형을 선고받자 그와 이혼하고 독신이 되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나폴레옹의 눈에 들었는데, 사실 그녀가 나폴레옹과 만날 수 있었던 계기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카롤린의 공이 컸다. 엘레오노르가 카롤린과 사적으로 친했던 터라 그녀가 엘레오노르를 오라버니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나폴레옹은 그녀의 박식함과 외모에 반해 그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조제핀과 결혼중인 상태였으므로 애인으로 삼았다. 엘레오노르는 나폴레옹의 애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한 명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샤를 레옹(Charles Leon)으로 당시 애인의 자식은 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인 드누엘을 따라 이름이 샤를 레옹 드누엘이 되었다. 샤를 레옹은 어머니를 닮아 유식하고 아버지를 닮아 잘 생겼으며, 아버지의 작위를 잇지 못하는 대신 군인이 되어 장교를 역임하고, 백작 작위를 받아 부유하게 살다가 죽었다. 샤를 레옹에게도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들은 군인이 되었고 나폴레옹 3세 시절 일어난 여러 전투에 참여했는데, 그 와중에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대신 딸들은 살아서 결혼하여 자식을 많이 두어 지금도 샤를 레옹의 딸들의 자손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둘째 애인은 마리아 발레프스카(Maria Walewska)[27]이다. 마리아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폴란드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엘레오노르처럼 유복한 삶을 살며 자라났다. 특히 그녀의 가정교사들 중 한 명이 바로 폴란드와 프랑스의 유명한 음악가인 프레데리크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Nicolas Chopin)이다. 쇼팽이 폴란드의 음악가로 통하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 니콜라가 젊은 시절에 폴란드로 떠나서 폴란드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생활하다 폴란드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쇼팽이기 때문이다. 바로 폴란드에서 니콜라가 한창 음악가로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 가르쳤던 소녀가 바로 마리아였다. 그러나 폴란드는 당시 식민지나 다름이 없어 국가의 주권이 거의 박탈된 상태로,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갈망하고 있던 시대였다. 마리아도 그중의 한 명이었는데, 나폴레옹이 정복 전쟁을 할 때 폴란드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는데, 마리아가 사는 성이 있는 지역을 통과하다 우연히 나폴레옹이 마리아와 눈이 마주쳤고, 나폴레옹은 마리아가 마음에 들어 측근에게 일러 마리아를 데려오라 했다. 나폴레옹을 열렬히 환영하던 폴란드인들은 폴란드의 명운을 걸고 어떻게든 마리아를 찾아서 나폴레옹에게 바치려 했지만 큰 문제가 있었으니 마리아가 이미 아들 안토니 루돌프 바질리(Antoni Rudolf Bazyli)까지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이었다. 발레프스카는 마리아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이 아니라 남편 아테나시우스 콜로나발레프스키 백작의 성씨였던 것이다.[28] 결혼 전 성씨는 웡친스카(Łączyńska)였다.

마리아는 조국 폴란드에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인물인 나폴레옹을 열렬히 환영하러 갔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지만 설마 자신이 모국의 공인 공녀로써 나폴레옹에 바쳐지는 신세가 될지는 몰랐고 당연히 이 성상납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서 거부했다. 당시에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라고 해도 도덕적인 일은 절대 아니었고 전 유럽인들이 뒤에서 소곤거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니 마리아로서는 당연한 거부였다. 어떻게든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당시 폴란드인들은 물론 거물 중의 거물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직접 마리아에게 찾아가 애원하고, 심지어 남편인 발레프스키 백작까지 자신의 아내 앞에서 무릎 꿇고 제발 나폴레옹과 만나 줄 것을 애원했다.[29] 결국 남편까지 나서서 나폴레옹과 만나 줄 것을 요구하는 주위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마리아는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다. 마리아를 만난 나폴레옹은 우격다짐으로 그녀를 취하였지만 그녀의 식견과 외모에 감탄했으며 그녀가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자신이 유럽을 평정하면 폴란드를 독립국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하고 자신의 부하들과 폴란드 대중 앞에서도 그랬다. 마리아는 나폴레옹의 서약을 신뢰하여 그의 애인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바르샤바 공국을 설립해주고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여 줌으로서 그 약속의 일부를 지켜주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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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궁정화가 프랑수아 제라르(François Gérard)가 그린 마리아 발레프스카의 초상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그다지 미인이 아닌 것 같지만 대단히 아름답게 그려진 다른 초상화들도 있기 때문에 이는 제라르 화풍의 문제일 수도 있다. 사진도 각도에 따라 외모가 다르게 나오는데 화풍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초상화야 말해 뭐하겠는가. 또 외모가 별로였다고 해도 마리아가 프랑스어가 유창했고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지적이었다는 주위의 평가를 보면 이런 지성과 발랄함에 나폴레옹이 반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마리아는 나폴레옹의 아들인 알렉상드르 플로리앙 조제프(Alexandre Florian Joseph)를 낳았다. 그러나 이 아들 또한 애인 간의 사생아였으므로 아버지의 성과 작위를 잇지 못하고 성은 어머니의 남편인 발레프스키 백작의 성[31]을 따른 발레프스키(Walewski)를 따르고, 자신의 작위 이름인 콜로나 백작(Comte de Colonna)를 붙여 콜로나발레프스키(Colonna-Walewski)로 했다. 알렉상드르는 프랑스와 폴란드를 오고 가며 외교관을 역임했으며, 프랑스 의회의 장도 역임했다. 그는 위의 샤를 레옹과 달리 아들이 죽지 않아 대를 이어 지금까지 그 후손이 존재한다.

알렉상드르의 탄생은[32] 나폴레옹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바로 나폴레옹이 자신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결혼 뒤 둘 사이에서는 아이가 전혀 없었는데 조제핀이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아이가 없는 이유를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33] 때문에 엘레오노르 드누엘이 아들 샤를 레옹을 낳았을 때도 샤를 레옹이 진짜 자신의 아들이 맞는지 약간 의심하고 있었다.[34] 하지만 잘 노는 스타일이라 바람 피웠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던 엘레오노르와 달리 마리아 발레프스카가 나폴레옹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지극히 헌신적이라는 사실은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자신까지 모두 공인하는 사실이라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가 나폴레옹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자신의 소생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조제핀의 딸인 오르탕스와 자신의 동생 루이를 결혼시켜 두 사람 사이의 소생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자신의 후계자를 낳을 결심에[35] 조제핀과 이혼하고 유럽 왕실 가운데서 자신의 후계자에게 혈통의 권위를 안겨줄 적절한 상대를 찾게 되고 결국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게 된다.

마리아의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은 자신의 아내가 나폴레옹과 외도해서 낳은 알렉상드르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했을 뿐 아니라 주위에도 자신의 아들로 소개했으며 죽을 때는 상당한 유산도 물려주었다. 알렉상드르 본인도 자신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임을 치욕적으로 여겨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끝까지 자신은 발레프스키 백작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를 어필했다고 한다.[36] 마리아는 1816년에 나폴레옹의 6촌인 필립 앙투안 도르나노(Philippe Antoine d'Ornano)와 재혼하였다. 기병 장교 출신인 도르나노는 나폴레옹이 그녀를 데리고 다니던 4차 대불동맹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그는 예전부터 마리아를 사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군이자 사촌의 연인에게 마음을 드러낼수는 없었던지라 그저 먼 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만 보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발레프스키 백작이 늙어서 사망하여 그녀가 공식적인 미망인이 되자 마리아에게 수차례 청혼을 하였고, 그녀도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둘은 벨기에 리에주의 저택에서 회고록 등을 작성하며 살았으며, 마리아는 아들 루돌프오귀스트(Rodolphe-Auguste)를 낳고 이듬해,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렉상드르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처음에는 영국의 6대 샌드위치 백작(Earl of Sandwich)인 조지 몬터규(George Montagu)[37] 딸 캐서린과 결혼해 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으나, 요절했다. 두 번째로는 교황청의 서기의 딸과 결혼해 한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두었으나 아들은 결혼하지 않고 죽었고 딸 한 명은 요절하고 나머지 두 명의 딸만이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다. 마지막으로 알렉상드르는 앞서 결혼한 두 명의 여자와는 출신이 완전히 다른, 라셸 펠릭스(Rachel Felix)라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이 여자는 다름 아닌 연극 배우였다. 라셸은 한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이름이 알렉상드르 앙투안이었으며, 알렉상드르 앙투안은 결혼하여 앙드레 알렉상드르 마우리스(Andre Alexandre Maurice)라는 아들을 낳고, 앙드레 알렉상드르 마우리스는 결혼하여 앙투안 레옹 샤를(Antoine Leon Charles)이라는 아들을 낳고 앙투안 레옹 샤를은 두 명의 아내를 두어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중의 가장 큰아들이 알렉상드르 콜로나발레브스키라는 사람으로, 지금 프랑스에서 생존 중이다. 사진을 보아하니 80대는 되어 보이시는 듯. 링크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조상 알렉상드르의 마지막 부인이 당시 하찮은 직업 중의 하나였던 연극 배우인 라셸이었는데, 정말 현재 생존 중인 알렉상드르 옹(翁)이 그의 친 자손이자 곧 나폴레옹의 친 자손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의 후손인 샤를(위 장크리스토프의 아버지)의 DNA와 알렉상드르 옹의 DNA를 비교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일치했고, 알렉상드르 옹은 실제로 나폴레옹의 생물학적 후손임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은 제롬의 후손이 딱 잡고 있기 때문에 알렉상드르 옹은 가문 승계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끔 나폴레옹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도 있는 것 같다. 워털루 전투 2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행사에 참가한, 현재 로마노프 왕가의 수장인 드미트리 왕자(좌)와 알렉상드르 옹(우)

또한 자식은 보지 못했지만 나폴레옹이 아직 출세하기 전 만났던 약혼녀이자 나폴레옹에게 버림받고도 평생 그에게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 가련한 여인 데지레 클라리, 그리고 라이벌에서 부하가 되고 다시 원수가 된(...) 베르나도트와의 삼각관계 이야기가 상당히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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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그의 애인 마리아 발레프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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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콜로나발레브스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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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 캐롤린 몬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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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 디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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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세 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라셸 펠릭스.


[1] 1748~1825/ 신고전주의 화가. 천재적인 그림 실력과 그에 맞먹는 처세술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나폴레옹 이후까지도 살아남아 천수를 다했다. 그러나 다비드는 이 그림을 그린 이후 유럽 제패와 권력에 차츰 타락하는 나폴레옹을 직접 마주보면서, 말년에 저 그림을 그린 것을 자기 인생의 흑역사로 취급하게 된다.[2] 심지어 적국인 영국에서 그린 초상화도 마찬가지. 아래는 나폴레옹이 유배 당한 후 그려진 초상화인데, 작은 키에, 배가 나오고, 얼굴도 살찌고 머리숱도 적어졌지만 본 바탕은 프랑스 그림과 같다.[3] 그의 키는 당대 프랑스인 평균 키였으나 당대 귀족 평균 키에는 한참 못미치는 키였다. 대신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는 정말로 단신이었다.[4] 개화기 시절 한국이나 일본의 인물들도 갑신정변 주역들의 일본 망명 사진에 나오듯 사진을 찍을 때 나중에 따라한다.사진[5] 현재 세계에서 평균키가 가장 큰 네덜란드인조차도 그 당시에는 평균 신장 167cm, 당대 기준 평균 키가 가장 컸던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의 남성 평균 신장도 170cm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었다.[6] 물론 조지 5세와 윈스턴 처칠이 살았던 당대에는 키가 작은 건 맞다. 평민 중산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보다도 한참 작고, 가난한 농노 출신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키가 비슷했다.[7] 고려세조는 체격이 컸다고 하는데 그의 후손인 인종은 키가 작았다고 기록된 것과(다만 당시 인종의 나이는 13세였으므로 이후에 더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태조의 키가 180cm인데 후손인 고종의 키는 153cm로 조상인 태조의 키보다 한참 작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8] 마찬가지로 표트르 대제는 나폴레옹보다도 1세기 전에 살았던 사람임에도 203cm의 어마무시한 장신이었지만, 마지막 후손인 니콜라이 2세는 당대 러시아 제국의 평민 평균 신장과 비슷한 170cm에 불과했다.[9] 프랑스 제국 근위대 항목에도 있듯 고참 근위대 척탄병의 키제한은 178cm 이상이었다.[10]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 정부는 과학적인 미터법을 도입하며 표준화를 시도했으나, 오랜 관습에 젖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황제 즉위 이후인 1812년에 전통 단위들도 인정하되, 미터법을 기준으로 그 크기를 재정의하며 1미터 = 3피에 = 36푸스로 규정한다. 즉 19세기 초 프랑스에서는 1피에가 약 33.3㎝, 1푸스는 약 2.78㎝가 되었다.[11] 1914년 당시 만 19세(1895년 생) 독일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71cm으로, 175cm인 히틀러 또한 평균보다는 컸다.[12] 즉 나폴레옹 동생의 부인이 다른 남자의 아이(나폴레옹 3세)를 임신한채로 결혼했다는 설이다. 대신 나폴레옹 2세는 얼굴이 부자지간 치고도 너무 많이 닮은 편이라 나폴레옹의 친아들이 맞는데, 이 쪽은 20대 초반에 죽었지만, 10대 후반에 장교가 되었을때 키가 매우 컸다고 한다. [13] 당시 기록을 보면 나폴레옹의 식사 시간은 평균 10분 이내, 오래해봤자 15분이었다고 한다. 현대 한국인 기준으로 봐도 급하게 먹는 편이고, 나폴레옹 당시나 지금이나 오랜 식사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인 관점으로 보자면 정말 말도 안 되게 빨리 먹는 수준이다.[14] 조제핀도 비록 이혼하긴 했지만 몰락하여 유배를 떠난 나폴레옹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죽을 때까지 나폴레옹에 대한 그 어떤 배신 행위도 거부하며 그를 향한 신의를 지켰다.[15] 대부분의 형제자매들이 여기에 속했다. 이들이 워낙 걸출한 나폴레옹의 능력을 못 따라가 제 자리 지키기만 가능한 수준이라 나폴레옹에게 도통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건 능력에 맞지 않는 쓸데없는 야심을 가지진 않았기 때문에 팀킬은 하지 않았다. 그나마 제일 나았던 친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는 혁명 전쟁 때도 형이 시키는대로 오스트리아도 갔다가 이탈리아도 갔다가 유럽 여기저기로 나름 하라는대로는 행동은 했고, 그렇다고 엄청난 성과는 없었지만 결국 네덜란드 왕 자리도 받았다. 유능한건 아니어도 뭔가 성실하고 솔직하고 온순한 듯한 모습이 있어서, 원래 성격이 예민한 나폴레옹이 가장 신용하는 동생이었다. 나폴레옹은 가족들 능력 같은건 바라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거짓말이나 거짓보고 등이라도 안 하길 바랬는데 거기 딱맞는 동생이었다.[16] 가톨릭은 혁명 세력의 반대를 받은 것이지 여론의 반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당대 프랑스의 정치 참여층 대부분은 반가톨릭적 성향을 가졌으나, 이 정치 참여층이라는 것이 매우 협소한 계층에 불과했다. 당장 파리 바깥으로만 가도 가톨릭은 여전히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다수 종교였으며, 자기중심적 성격인 나폴레옹이 정확히 이것을 이용한 것이다.[17] 대표적으로 아래에도 후술된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조아킴 뮈라의 아내인 카롤린 보나파르트. 이쪽은 아예 남편인 뮈라까지 꼬드겨 오빠인 나폴레옹을 배신했다.[18] 다만 나폴레옹의 친족들이 이러기만 했다면 문제가 그나마 덜했겠지만 이들은 자기 자신이 가진 것을 누가 주었는데 누구 덕에 유지하고 있는지조차 망각한 모습을 보였다. 보나파르트 가는 코르시카의 귀족 출신이므로 당연하지만 나폴레옹이 아니었다면 제국의 황가가 되는 것도 그 일원들이 황족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근본도 없는 듣보가 황제 칭하고 친족들에게 각국의 왕 자리를 주는 모습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즉 나폴레옹이 망하면 다음으로 망하는 건 자기네들인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 그것조차 모르는 이도 있었다. 이들 중 그나마 칼 14세는 무사히 넘어갔던 것은 진작부터 나폴레옹과 대립해왔고(나폴레옹이 전성기였던 1807년부터 대립이 시작되었다.) 또 당시 스웨덴 왕이었던 칼 13세가 아예 자기 양자로 입양하여 정통성을 세워주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근본없는 건 같아도 칼 13세가 직접 정통성을 세워줬고 날로 먹은 것도 아니다. 반면 다른 이들은 그나마 호세 1세로데베이크 1세 정도가 능력이나 민심에서 그럭저럭 합격점이었다. 그런 이들조차도 결국 쫓겨났다.[19] 뤼시앵의 두번째 부인. 첫번째 부인은 여관집 딸이었는데, 결혼 6년만에 5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두번째 부인은 귀족 출신으로 남편과 사별하고 뤼시앵과 재혼했다. 나폴레옹은 뤼시앵에게 왕족과 형식적으로 결혼하기만 한다면 된다면서, 현재 부인과 이혼한 후 동거해도 상관없다고 제안했지만, 뤼시앵은 "그녀는 창녀가 아니라 내 부인이다"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20] 코르시카 아작시오 출신. 바초키 가문은 보나파르트와 같은 코르시카 귀족 가문으로, 16세기 중반에 보나파르트 가문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일원 중 한 사람인 톰마조 바초키(Tommaso Baciocchi)가 가족을 데리고 이탈리아 본토에서 이주해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 정착했다. 펠릭스는 톰마소의 7대손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바초키(Francesco Maria Baciocchi, 1716~1779)의 15명의 자녀들(9남 6녀) 중 14번째 자식이다. 15~16세기부터 코르시카, 특히 중심 도시인 아작시오에 살기 시작한 가문들에는 대표적으로 아리기카사노바(Arrighi-Casanova), 도르나노(d'Ornano, 프랑스의 미용 회사인 시슬리(Sisley)의 전 회장이었던 위베르 도르나노와 같은 가문이다.), 라몰리노(Ramolino), 바초키(Baciocchi), 세바스티아니(Sebastiani) 등이 있는데, 이 가문들은 보나파르트 가문과 결혼 관계를 맺거나 각종 교류들을 하여 친밀했고 그래서 펠릭스는 어릴 적부터 근처에 살던 동생뻘인 나폴레옹과 친했다. 이런 둘의 친한 관계 더분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여동생인 엘리자를 펠릭스에게 소개해주어 결혼한 것이다.[21] 친자가 아니라는 설이 있다만 학계에선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22] 그 당시 이름은 법무부 수사국(BOI, Bureau of Investigation)이었다.[23] 물론 위에 나와있는 가족들의 행보를 보면 이들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호세 1세는 집권 과정에서는 나약하고 탐욕스러워 하등 도움된 것이 없지만 동생 덕에 얻어먹은 스페인 왕으로서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털린 것은 상대가 하필 아서 웰즐리라는 것과 이 때 정작 나폴레옹이 상황을 오판하고 도움을 주지 않아서 그랬다.(정작 본인은 상황을 잘 파악하고 필요한 것을 제때 요구했다.) 재능이야 동생보다 한참 하수여도 그 자리에 못 앉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동생에게 대든 것도 아니고 뤼시앵은 집권 과정만 빼면 특별히 도움 준 것도 피해 준 것도 없고 그렇다고 뭘 받아먹은 것도 없다. 루이는 역시 호세처럼 능력은 나폴레옹보다 여러모로 떨어졌고 우울증이 있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호세처럼 왕 노릇 할 정도는 되었고 나폴레옹 말은 잘 들었다. 폴린은 능력은 없다 쳐도 말은 잘 들었다. 제롬은 너무 사치스럽긴 했지만 충성심, 능력 모두 합격점, 물론 충성심과 능력 모두 만족하는 것을 기준으로 친다면 제롬 빼고 다 문제지만 그래도 나머지 이들도 적당히 자기 분수는 알고 행동해서 피해는 안 줬다. 즉 형제자매들 중 욕먹어야 할 정도로 문제를 일으킨 건 엘리자와 카롤린 뿐이다.[24] 외조부가 카를 1세의 차남인 로베르트 대공이다. 따라서 마리 루이즈의 남동생 프란츠 카를 대공의 후손이다. 현재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수장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25] 한편 올림피아의 외조모는 사보이아 왕가의 분가인 사보이아-아오스타가(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메데오가 개창한 공작가)의 3대 공작 아메데오의 장녀 마르게리타이고 장크리스토프의 고조할머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장녀 마리아 클로틸데이기 때문에, 올림피아는 장크리스토프에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준으로 11촌 조카뻘이다.[26] 전 아내는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베아트리스 공주로 그녀의 아버지는 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의 당주, 카스트로 공작 페르디난도 공이었고 그녀의 동생 카를로는 현재 부르봉-양시칠리아 왕가 카스트로 계통의 당주이다.[27] 프랑스식 이름은 마리 발레브스카(Marie Walewska)이다.[28] 발레프스카는 발레프스키의 여성형이다.[29] 마리아의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은 이미 60이 훨씬 넘은 노인이었는데 60대 노인과 지적이고 아름다운데다 집안까지 괜찮은 10대 소녀와의 결혼은 당시에도 드물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아들이 사실은 발레프스키 백작의 아들이 아니고 마리아가 10대의 소녀 시절 혼외임신한 것을 늙은 발레프스키 백작이 떠안는 형식으로 결혼한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다만 소문이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은 절대 아니다.[30] 하지만 바르샤바 공작은 폴란드인이 아닌 독일인이었다. 물론 생판 남을 공작에 임명한 것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당시 폴란드 국왕에 단골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주 당선이 되었던 작센 국왕 (당시엔 작센 선제후)에게 공작위를 주었다.[31] 폴란드인은 남성의 성 끝에는 보통 -ski가 붙고, 여성의 성 끝에는 보통 -ska가 붙는다. -ski나 -ska 앞에는 같은 가족이면 같다.[32]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탄생이 아니라 임신[33] 현재는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었던 이유를 조제핀이 둘째 오르탕스를 낳은 뒤 뭔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일단 항렬부터 조제핀 드 보아르네나폴레옹보다 한 세대 더 높다.[34] 현재는 샤를 레옹이 나폴레옹의 친자가 맞다는 게 통설이다.[35] 알렉상드르는 사생아라 당시 유럽의 관습으로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36] 하지만 마리아와 나폴레옹의 관계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데다, 무엇보다 외모부터가 나폴레옹과 판박이라서 이런 주장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아래에 언급하듯이 나폴레옹의 아들이라는게 엄연한 사실이다.[37] 작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샌드위치의 유래로 유명한 4대 샌드위치 백작인 존 몬터규(John Montagu)의 손자이다.[38] 폴란드식 이름은 알렉산데르 콜로나발레프스키(Aleksander Florian Józef Colonna-Walew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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