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덤프버전 :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 펼치기 · 접기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
다섯 황제의 해
소 페르티낙스
세베루스 왕조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군인 황제 시대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 발레리아누스 2세 | 살로니누스 | 소 빅토리누스 | 테트리쿠스 2세
사두정치
크리스푸스 | 리키니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왕조
달마티우스 | 한니발리아누스 | 마그누스 데켄티우스 |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서로마 제국
팔라디우스
레오 왕조
파트리키우스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게르마누스
이라클리오스 왕조
마르티노스 | 테르벨
이사브리아 왕조
니키포로스 | 흐리스토포로스
아모리아 왕조
알렉시오스 모셀레 | 바르다스
마케도니아 왕조
대 바르다스 포카스
두카스 왕조
요안니스 두카스 | 기오르기 2세
콤니노스 왕조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 | 소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 요안니스 로게리오스 달라시노스 | 벨러 3세 | 몬페라토의 레니에르
앙겔로스 왕조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 콘라드 1세 | 마누일 마우로조미스
라스카리스 왕조
레온 가브라스
팔레올로고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스트라티고폴로스 | 루지에로 데 플로르 |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 흐렐야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로마 제국 카이사르
Gaius Julius Verus Maximus |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파일: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jpg
제호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Verus Maximus Caesar)
생몰 년도
미상 - 238년
카이사르 재위 기간
236년 ~ 238년
부모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아버지)
카이킬리아 파울리나(어머니)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로마 제국카이사르. 236년 아버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되었지만 238년 아버지와 함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2. 행적[편집]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카이킬리아 파울리나의 아들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외모가 무척 준수했고 라틴어그리스어에 숙달했고 웅변, 문법, 수사학에 관해 적절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는 여동생 테오클리아와 그를 결혼시키려 했으나, 테오클리아가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막시미누스는 너무 멍청하며 우리와 격이 다른데, 왜 그런 인간의 아들에게 시집 보내느냐"라고 설득해 이를 취소시켰다고 한다. 이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테오클리아의 혼처를 다시 구해 오래된 로마 귀족의 자제로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학에 능통한 메살라와 결혼시켰다고 한다.

235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236년 아들을 카이사르에 지명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의 아버지와는 달리 성품이 온화하고 다정해 주변인들을 잘 대했다고 한다. 또한 술에 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사냥을 무척 좋아해 멧돼지, 두루미, 오리 등 온갖 사냥감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238년 아프리카 총독 고르디아누스 1세와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황제를 자칭하며 막시미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원로원이 이를 지지하면서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누미디아 방면군 사령관 카펠리아누스에게 피살되자, 푸피에누스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세우고 고르디아누스 1세의 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를 카이사르로 세워 막시미누스에 대항했다.

당시 도나우 전선에 있던 막시미누스는 이 소식에 격분해 군대를 동원하여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러던 중 아퀼레이아가 성문을 걸고 저항하자, 막시미누스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한 뒤 4주 동안 공성전을 벌였지만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그에게 식량과 전쟁 물자를 보내주는 도시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보급품이 바닥나면서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막시미누스가 아퀼레이아에 얶매인 채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못하자, 그를 따라왔던 병사들은 반감을 품었다. 그들은 아퀼레이아와 북이탈리아 로마인들이 푸피에누스와 그를 따른 근위대, 투항한 막시미누스 진영 병사들에게 떡갈나무와 올리브 나무 잎사귀와 나뭇가지를 선물하고, 꽃잎을 행군하는 곳에 뿌리고, 응원을 해주고 격려하면서, 자신들을 야만족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고 저주를 퍼붓고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보고 깊은 절망과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238년 4월, 제2 파르티카 군단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막시미누스와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근위대장 아눌리누스 등을 살해했다.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전투가 중단된 정오에 병사들이 황제의 천막에 접근하자 막시미누스가 그들과 이야기하려 했지만 병사들이 입을 열지 않고 즉시 그 자리에서 막시미누스와 아들을 죽였다고 한다. 막시미누스 부자와 근위대장 아눌리누스의 수급은 라벤나에서 푸피에누스 편 장병들에게 전달되었다. 아퀼레이아 시민들은 수급들을 확인한 뒤 성문을 활짝 열어 칼을 맞댄 옛 막시미누스 병사들을 위로한 뒤 굶주린 병사들에게 식량을 나눠줬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것은 잔인한 아버지에게 합당하지만 선한 아들에게는 부당했던 막시미누스들의 최후였다. 그들의 죽음은 속주민들에게 큰 기쁨을, 야만인들 사이에 깊은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30 10:20:45에 나무위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