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러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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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18대 국왕
벨러 3세
III. Béla

출생
1148년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사망
1196년 4월 23일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재위
헝가리 왕국의 왕
1172년 ~ 1196년 4월 23일
크로아트 왕국의 왕
1181년 ~ 1196년 4월 23일
배우자
안티오키아의 아그네스
(1168년에서 1172년 사이 결혼/1184년 사망)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1186년 결혼)
아버지
게저 2세
어머니
키예프의 에우프로시네
형제
이슈트반 3세, 게저, 아르파드, 엘리자베트, 오돌라, 엘레니
자녀
임레, 언드라시 2세, 헝가리의 머르기트, 콘슈탄치어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헝가리 왕국 제18대 국왕. 동로마 제국에 인질로 끌려가 10여 년간 그곳에 억류되었다가 형 이슈트반 3세가 사망한 뒤 제국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1180년 마누일 1세가 사망한 후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제국을 침공해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하고 헝가리를 강국으로 육성했다.


2. 생애[편집]


1148년경 헝가리 왕 게저 2세키예프 루스 대공 므스티슬라프 1세의 딸 에우프로시네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이슈트반 3세, 게저, 아르파드, 엘리자베트, 오돌라, 엘레니가 있었다. 1161년 크로아티아-달마티아 등 헝가리의 일부 영역을 부여받아 아파치 공작에 선임되었다. 1162년 5월 31일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형 이슈트반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일전에 게저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한 뒤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던 라슬로 2세이슈트반 4세가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지원에 힘입어 왕위를 빼앗았다. 이슈트반 3세는 포조니로 도주했고, 라슬로 2세가 마누일 1세에게 뇌물을 듬뿍 받은 헝가리 귀족들의 추대로 새 왕에 올랐다.

1163년 1월 14일, 라슬로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이슈트반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동로마 공주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했기에 제국에 끌려가기만 할 것으로 예상한 헝가리 귀족들에게 경원시되었다. 이슈트반 3세와 벨러는 이 때를 틈타 영주들을 회유해 자신들에게 가담시킨 후 세케슈페헤르바르로 진격했다. 1163년 6월 19일, 두 형제는 세케슈페헤르바르 인근에서 이슈트반 4세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이로써 왕위에 복귀한 이슈트반 3세는 감옥에서 풀려난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카스의 조언에 따라 이슈트반 4세를 석방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4세는 왕위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동로마 제국에 망명한 뒤 마누일 1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호소했고, 마누일은 이를 받아들여 헝가리에 대군을 보냈다. 이슈트반 3세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황제로부터 헝가리 왕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동생 벨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야 했고, 동생 벨러가 아버지 게저 2세로부터 부여받은 아파치 공국을 제국이 장악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리하여 인질로 보내진 벨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마누일 1세는 그에게 그리스식 이름인 '알렉시오스'를 하사하고 자신의 딸인 마리아 콤니니와 약혼시켰다. 심지어 1165년에는 아들이 좀처럼 태어나지 않자 그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했다. 1166년 이슈트반 3세가 시르미움을 탈환하고자 침공을 개시해 현지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지모니를 제외한 모든 시르미움 일대를 평정했다. 이에 마누일 1세는 3개의 분견대를 헝가리로 급파했다. 이때 그는 도나우 강으로 진격하는 알렉시오스 악수흐의 부대에 동행했다. 이슈트반 3세는 독일인 용병을 모집해 동로마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나, 1167년 7월 8일 시르미온 전투에서 참패하자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동로마 제국이 달마티아, 시르미움, 크로아티아를 가지는 것을 받아들였다.

1169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황후가 아들 알렉시오스 2세를 낳자, 마누일 1세는 벨러를 후계자로 삼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딸과의 약혼 역시 없던 일로 처리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황제는 1168년에서 1172년 사이에 마리아 황후의 이복동생인 안티오키아의 아그네스와 그를 결혼시켰다. 1172년 3월 4일 이슈트반 3세가 사망하자, 헝가리 귀족들은 마누일 1세에게 벨러 왕자를 귀국시켜달라고 청했다. 마누일은 제국을 다시는 적대하지 않고 봉신의 서약을 준수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낸 뒤 벨러를 돌려보냈다.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카스가 제국의 앞잡이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며 대관식 주관을 거부하자,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알렉산데르 3세는 에스테르곰 대주교가 부재한 경우에는 컬로처 대주교가 그를 대신해 왕좌에 오를 왕자에게 도유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벨러는 1173년 1월 13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얼마 후, 어머니 에우프로시네와 남동생 게저가 그를 몰아내고 왕위를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적발되었다. 벨러는 어머니를 예루살렘으로 추방했고, 게저를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게저는 1174년 또는 1175년 감옥에서 탈출하여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도주했다.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가 게저를 인도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벨러는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2세와 연합하여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1177년, 소베슬라프 2세는 게저를 체포한 뒤 헝가리에 보냈고, 벨러는 동생을 다시 한 번 지하감옥에 수감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와 협력해 자신의 봉신인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피해를 입힌 소베슬라프 2세에게 분노해 그를 폐위시키고 프르셰미슬 왕조의 또다른 구성원인 베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세우겠다고 선포했다. 소베슬라프 2세가 쉽사리 물러나지 않자, 프리드리히 1세는 새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보헤미아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벨러가 오스트리아를 위협하자, 레오폴트는 보헤미아로 진격하던 군대를 돌려야 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벨러는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에 협조했다. 1176년 마누일 1세가 룸 술탄국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했을 때, 그는 보조군을 파견했다. 그러면서도 교황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고, 서유럽에 학생들을 유학 보내서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그의 치세 동안 많은 이들이 외국 대학에서 공부해 학자로 거듭났는데, 그 중에는 훗날 헝가리의 역사를 다룬 연대기를 집필한 아노니무스도 있었다. 또한 벨러는 프랑스 왕국 출신 수도자들을 초빙하여 헝가리 수도원에 배속시켰고, 기존의 수도원들과 새로 설립된 수도원들에게 폭넓을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던 1180년, 마누일 1세가 사망하고 11살의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가 등극했다. 모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섭정을 맡았지만, 몬페라토의 레니에르마리아 콤니니 부부의 반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등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제국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한편, 지난날 마누일 1세에 맞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흑해의 해안지대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수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전해듣고 오래도록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1181년 5월, 안드로니코스는 어린 황제를 위해 제국의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봉기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제국이 안드로니코스의 봉기로 인해 혼란스러워지자, 벨러는 마누일 1세와 맺었던 맹약을 깨뜨리고 공세를 개시해 1181년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탈환하고 자라 시를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시켜 보호시로 삼았다. 1182년 5월,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수도원에 보내진 마리아 황후가 벨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벨러는 이에 따라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공격해 그 일대를 파괴했다. 그러자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반역죄로 고발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게 한 뒤 디오메데스 수도원 근처에 있는 좁은 지하감옥에 수감시켰다. 이후 1182년 말 마리아를 처형하고 시신을 바다에 내던졌으며, 그녀에 대한 동정여론이 생길 것을 우려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소재한 모든 마리아의 상을 훼손하거나 파괴했다.

1183년 초, 벨러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혼란이 갈수록 심해지는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해 니시와 세르디카를 공략하고 세르디카에서 릴라의 성 이반의 유품이 담긴 관을 탈취했다. 1183년 10월,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황제 알렉시오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이에 반발한 이들이 제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1185년에는 시칠리아 왕국이 쳐들어왔다. 벨러 3세는 이 때를 틈타 공세를 이어가 동로마 제국의 북방 영역을 약탈했다.

1185년 9월 안드로니코스 1세가 폐위되고 이사키오스 2세가 등극한 후 시칠리아 왕국을 격파하자, 벨러는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기로 했다. 이사키오스는 왕이 되기 전인 1185년 1월에 벨러의 딸 머르기트와 결혼한 바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사위에게 딸의 지참금 형식으로 니시와 바랑크 일대를 돌려줬다. 이때 릴라의 성 이반 유품도 세르디카로 반환되었다.

1184년 아내 아그네스가 사망한 뒤 독신으로 지내던 벨러는 1186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딸 마르그레테와 재혼했다. 1187년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이 자라를 탈환하고자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좀처럼 성벽을 뚫지 못하다가 헝가리군이 인근에 이르자 철수했다. 1188년 말 할리치나 공작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보야르들의 반란을 피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볼히니아 공작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할리치나를 차지했지만, 벨러가 할리치나로 쳐들어오자 볼히니아로 도피했다. 벨러는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를 할리흐 공작으로 되돌려놨지만 그를 계속 붙잡아두고 자신의 아들인 언드라시를 할리치나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삼았다.

1189년 여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하던 중 헝가리를 통과했다. 벨러는 십자군을 환대했고,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그때까지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게저 왕자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고, 아내 마르그레테도 그렇게 하라고 종용했다. 이에 벨러는 십자군에 따라간다는 조건하에 게저를 석방시켰고, 게저는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헝가리를 떠나 동방으로 향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와 이사키오스 2세간의 갈등이 불거지자, 벨러는 두 군주를 중재해 평화 협약을 맺게 했다.

1189년 또는 1190년, 헝가리에 억류되어 있던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탈출하여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후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2세의 지원에 힘입어 할리치나를 탈환하고 공국의 통치권을 되찾았다. 벨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1193년 초 세르비아 공국으로 영역을 확장하고자 출진했지만, 세르비아를 제국의 영역으로 여겼던 이사키오스 2세가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자 도로 거두었다. 한편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자라를 탈환하고자 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격퇴되었다.

1194년, 장남 임레를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공작으로 삼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1194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참패한 이사키오스 2세가 보복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지원을 요청하자, 벨러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전국에 군대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1195년 4월 원정을 준비하던 이사키오스 2세가 형 알렉시오스 3세에게 폐위되면서, 불가리아를 향한 협공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후 교황청에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에 뛰어들겠다고 서약하고 이를 위한 준비에 착수헀으나, 1196년 4월 23일에 병사했다.

그는 첫 번째 왕비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임레, 언드라시 2세, 머르기트, 콘슈탄치어를 낳았고, 두 번째 왕비 마르가리타와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뒤 장남 임레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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