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스토포로스(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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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동로마 제국 카이사르
Χριστόφορος | 흐리스토포로스

제호
흐리스토포로스(Χριστόφορος)
생몰 년도
750년대 후반 - 미상
카이사르 재위 기간
769년 ~ 780년
부모
콘스탄티노스 5세(아버지)
에우도키아(어머니)
형제자매
니키포로스(형)
니키타스(남동생)
안티모스(남동생)
에우도키모스(남동생)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안투사(여동생)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이사브리아 왕조카이사르, 반란자. 형 니키포로스와 함께 콘스탄티노스 6세를 상대로 반란을 꾀했으나 발각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생애[편집]


750년대 후반에 콘스탄티노스 5세에우도키아 황후 사이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복 형으로 레온 4세가 있었고, 친형으로 니키포로스, 친동생으로 니키타스, 안티모스, 에우도키모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안투사가 있었다. 769년 어머니가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을 때, 그는 니키포로스와 함께 카이사르에 선임되었고 니키타스는 노빌리시무스(nobilissimus)를 받았다. 안티모스와 에우도키모스는 775년 레온 4세에 의해 노빌리시무스(nobilissimus) 칭호를 받았다.

775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사망한 후 레온 4세가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자신이 황제에 올라야 한다고 여겼다. 이는 레온 4세의 어머니이자 콘스탄티노스 5세의 첫번째 황후인 하자르의 이리니는 동로마 제국민으로부터 오랑캐 취급받는 하자르 출신인 반면, 자신의 어머니 에우도키아는 귀족 가문 출신인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776년 봄, 그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음모를 꾸미다 발각당했다. 이후 본인은 카이사르 직위를 박탈당했고 다른 음모자들은 머리를 삭발당한 뒤 크림반도의 체르손으로 추방되어 수도자로 지내야 했다. 이때 그는 이에 연관되지 않았기에 카이사르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780년 10월 레온 4세가 사망했고,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가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6세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이리니섭정을 맡았다. 이리니는 성상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기에, 성상 파괴주의를 교리로 삼은 교회와 성상 파괴를 지지한 동방 군대의 반감을 샀다. 아나톨리아 테마의 스트라테고스 그레고리오스와 엑수비토르 근위연대 사령관 콘스탄티노스 등은 니키포로스를 황제로 세울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는 한달 만에 발각당했고, 이리니는 니키포로스를 포함한 콘스탄티노스와 에우도키아의 다섯 형제들을 공개된 장소에서 삭발시키고 모든 공직에서 해임한 뒤 수도원에 감금했다.

792년 8월, 정부군이 불가르족을 상대로 마르첼라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6세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타그마타 근위연대는 니키포로스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6세가 신속히 대응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니키포로스는 실명형에 처해졌고, 그는 니키타스, 안티모스, 에우도키모스와 함께 혀가 베어졌다. 797년 이리니가 콘스탄티노스 6세를 실명시키고 여제에 오르자, 니키포로스 형제들의 추종자들이 수도원에 잠입해 이들을 탈출시킨 뒤 아야 소피아에 피신시켰다. 추종자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형제 중 한 사람을 황제로 받들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리니의 최측근인 환관 아이티오스는 이들을 체포해 아테네로 유배보냈다.

799년, 남부 테살리아의 벨체티아에 거주하는 슬라브족 통치자 아카미로스가 테살리아 현지군과 함께 니키포로스 형제 중 한 명을 황제로 받들려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흐리스토포로스는 니키타스, 안티모스, 에우도키모스와 함께 실명형에 처해진 뒤 큰형 니키포로스을 비롯한 모든 형제와 함께 마르마라 해의 파노모스로 유배되었다. 812년, 데블토스(Develtos)가 크룸이 이끄는 불가리아 제1제국군에게 공략당한 것에 분노한 병사들이 니키포로스 형제 중 한 명을 황제로 받들려 했다.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미하일 1세 랑가베스는 병사들을 긴급 체포해 처형한 뒤 니키포로스 형제를 마르바라 해의 아푸시아 섬에 유배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다섯 형제가 비극적인 말로를 보낸 것과 대조적으로 막내 누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안투사는 천수를 누렸다. 그녀는 평생 결혼을 거부하고 수녀가 되었는데, 신앙심이 무척 투철하여 황녀의 의복 아래에 수도자들이 입는 거친 천으로 된 속옷을 항상 입었다고 한다. 레온 4세가 사망한 후 이리니 태후가 그녀에게 공동 섭정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단호히 거부하고 수녀로서의 생활에 정진했다. 그녀는 훗날 정교회로부터 성녀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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