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퀼레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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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유적
중세 초기의 바실리카
Aquileia
이탈리아 동북부에 위치한 도시. 베네치아에서 동쪽으로 125km 떨어져 있으며, 로마 시대의 유적과 바실리카로 유명한 작은 마을이다. 북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으로는 슬로베니아와 마주한 입지 조건 덕분에 과거부터 중부 유럽과의 교류가 잦았다. 과거에는 로마 제국에서 5위[4] 안에 들고 본국 이탈리아 반도 한정 제2의 대도시였으나, 452년에 훈족에게 파괴된 후 쇠락, 현재 인구는 3500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다.
기원전 181년에 로마인들이 포 강 유역의 이민족이었던 갈리아인과 이스트리아인에 대항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서 건설한 식민 도시이다. 기원전 90년에 자치 도시로 지정되며 귀족 가문들이 이주,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아퀼레이아는 로마 제국 시기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 중에 하나였고, 나티사 강[5] 을 통해 바다로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알프스를 넘어오는 중부 유럽의 상인들과의 교역이 이루어진 후 호박 등 보헤미아 일대의 특산품을 지중해 세계에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역할은 6세기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어받았다.
로마 제국과 독일 남부/보헤미아/발칸반도 일대 세력 간의 충돌 시애 아퀼레이아는 항상 그 지휘 본부가 되었다. 이란 세력과의 전쟁에서 안티오키아가 맡았던 역할과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기원전 11년, 판노니아[6] 와 일리리아[7] 정복전쟁을 지휘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투스가 이곳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168년에 마르코마니족과의 전쟁에서 마지막 5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퀼레이아를 요새화 한 후 전쟁의 후방 보급 기지로 삼았다. 이 지역의 율리안 알프스는 낮은 편이라 북쪽 도나우 전선과의 교통이 원활하였기 때문이다.
300여년간 번영하던 도시는 3세기의 혼란을 거치며 쇠퇴하였다. 238년에는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가 원로원과의 내전에서 이 도시를 공격하다가 암살당하기도 하였다. 비록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궁전이 세워져 조폐국 기능을 얻는 영광을 얻었지만 425년에 라벤나로 이전되었다. 아퀼레이아는 452년에 아틸라의 훈족 군대에게 대대적으로 파괴되어 마을로 전락하였다. 훈족, 그리고 6세기 말의 랑고바르드족을 피해 달아난 주민들 중 일부는 베네치아 석호 일대에 정착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의 선조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4세기 초에 건립되어 11세기와 14세기에 보수된 대성당은 1715년까지 총대주교구가 위치하여 종교적 중요성만은 근대까지 유지되었다. 성당 남쪽 홀 바닥을 장식한 모자이크는 6-7세기 (동로마 제국 시대)의 것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르네상스 도시로 유명한 우디네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고 몬팔코네와는 서쪽으로 18km 떨어져있다. 슬로베니아와의 국경도시인 고리치아로부터 서남쪽으로 32km 떨어져 있으며 트리에스테와는 52km 떨어져 있다. 이 들과는 자동차로 모두 30분 내지 1시간 내외의 거리로 왕래할 수 있다.
로마 유적
중세 초기의 바실리카
1. 개요[편집]
Aquileia
이탈리아 동북부에 위치한 도시. 베네치아에서 동쪽으로 125km 떨어져 있으며, 로마 시대의 유적과 바실리카로 유명한 작은 마을이다. 북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으로는 슬로베니아와 마주한 입지 조건 덕분에 과거부터 중부 유럽과의 교류가 잦았다. 과거에는 로마 제국에서 5위[4] 안에 들고 본국 이탈리아 반도 한정 제2의 대도시였으나, 452년에 훈족에게 파괴된 후 쇠락, 현재 인구는 3500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다.
2. 역사[편집]
2.1. 로마 시대의 번영[편집]
기원전 181년에 로마인들이 포 강 유역의 이민족이었던 갈리아인과 이스트리아인에 대항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서 건설한 식민 도시이다. 기원전 90년에 자치 도시로 지정되며 귀족 가문들이 이주,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아퀼레이아는 로마 제국 시기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 중에 하나였고, 나티사 강[5] 을 통해 바다로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알프스를 넘어오는 중부 유럽의 상인들과의 교역이 이루어진 후 호박 등 보헤미아 일대의 특산품을 지중해 세계에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역할은 6세기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어받았다.
2.1.1. 로마와 중/동유럽의 교통로[편집]
로마 제국과 독일 남부/보헤미아/발칸반도 일대 세력 간의 충돌 시애 아퀼레이아는 항상 그 지휘 본부가 되었다. 이란 세력과의 전쟁에서 안티오키아가 맡았던 역할과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기원전 11년, 판노니아[6] 와 일리리아[7] 정복전쟁을 지휘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투스가 이곳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168년에 마르코마니족과의 전쟁에서 마지막 5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퀼레이아를 요새화 한 후 전쟁의 후방 보급 기지로 삼았다. 이 지역의 율리안 알프스는 낮은 편이라 북쪽 도나우 전선과의 교통이 원활하였기 때문이다.
2.2. 훈족의 파괴[편집]
300여년간 번영하던 도시는 3세기의 혼란을 거치며 쇠퇴하였다. 238년에는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가 원로원과의 내전에서 이 도시를 공격하다가 암살당하기도 하였다. 비록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궁전이 세워져 조폐국 기능을 얻는 영광을 얻었지만 425년에 라벤나로 이전되었다. 아퀼레이아는 452년에 아틸라의 훈족 군대에게 대대적으로 파괴되어 마을로 전락하였다. 훈족, 그리고 6세기 말의 랑고바르드족을 피해 달아난 주민들 중 일부는 베네치아 석호 일대에 정착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의 선조가 되기도 하였다.
2.3. 중세 : 종교적 중요성[편집]
다만 4세기 초에 건립되어 11세기와 14세기에 보수된 대성당은 1715년까지 총대주교구가 위치하여 종교적 중요성만은 근대까지 유지되었다. 성당 남쪽 홀 바닥을 장식한 모자이크는 6-7세기 (동로마 제국 시대)의 것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3. 위치[편집]
르네상스 도시로 유명한 우디네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고 몬팔코네와는 서쪽으로 18km 떨어져있다. 슬로베니아와의 국경도시인 고리치아로부터 서남쪽으로 32km 떨어져 있으며 트리에스테와는 52km 떨어져 있다. 이 들과는 자동차로 모두 30분 내지 1시간 내외의 거리로 왕래할 수 있다.
[1] 아퀼레이아는 초기 로마 제국의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 중 하나이다.[2] 고대 아퀼레이아 유적 대부분이 그대로 발굴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 지중해 지역에서 초기 로마 도시의 가장 완벽한 사례로 손꼽힌다.[3] 아퀼레이아에 있는 가톨릭 성당은 중세 시대 초기에 중부 유럽의 기독교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4] 로마 - 알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 - 카르타고 - 아퀼레이아의 순서[5] 당시에는 이손초 강의 지류였으나 현재는 독립된 강이다.[6] 현 헝가리.[7] 현 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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