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왕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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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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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왕
□왕
우거왕

'기자'의 재위 및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인정되지 아니함.
'한후'는 고조선 군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음.







준왕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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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제6대 군주
準王 | 준왕


마한 초대 군주
馬韓王 | 마한왕

출생
기원전 3세기 추정
고조선?
사망
기원전 2세기 추정
마한?
재위기간
(음력)

제6대 군주[1]
기원전 210년 ~ 기원전 194년
마한 초대 군주
기원전 194년 ~ 연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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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韓) / 기(箕)[1]

준(準) / 한(韓)
부왕
부왕
왕호
준왕(準王)
한왕(韓王)


1. 개요
2. 고조선 시절
3. 왕위를 찬탈당한 이후: 마한왕?
4. 삼한정통론
5. 기자기자조선의 군주들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 목록
6. 기타
7. 같이보기



1. 개요[편집]


고조선군주. 기자조선설을 따른다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군주다.

주요 사료나 연구 결과 등을 종합해보면, 기원전 3세기 후반 경부터 기원전 3세기 초엽까지 연나라에게 요녕 지역을 빼앗기면서 한반도 서북부 일대만을 관할하는 소국으로 전락하고, 또한 진나라 시기까지 큰 존재감 없이 지내던 고조선을 초한쟁패기라는 난세를 이용해 영토를 크게 늘리는 등 중흥시켰지만, 수하였던 위만의 정변으로 무너진 군주이면서도 (남부 동래설을 인정한다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내서 다시 군주가 된 의지사나이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항우가 한때 중국전역을 재패했음에도 결국 권토중래를 단념하고 자살한것을 생각하면 정반대의 길을 걸은 셈이다. 다만 재위 중에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에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수준에 그치며 그 이외의 일에 대해서 그다지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2. 고조선 시절[편집]


삼국지》에 따르면 기자의 40여 세손이라고 한다.[2] 부왕(否王)의 아들로 기원전 210년경에 즉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진시황 대에 부자 세습을 이루었다는 것 외에는 명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염철론』에 따르면 부왕이 진, 한 교체기에 능동적으로 움직여 패수(일반적으로 압록강에 비정)까지 진출하여 어느 정도의 영토 회복을 이뤄냈다고 한다.

大夫曰 往者 四夷俱强 幷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東越越東海 略浙江之南 南越內侵 滑服令 … (후략) ….

대부가 이르기를 "지난날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은 요새를 넘어 연의 동쪽을 겁박했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쪽을 약탈했습니다.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습니다. … (후략) …"

염철론》 비호편

 
다만 이렇게 획득한 지역을 놓고 '의 옛 공지(秦故空地)', 즉 비어있는 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국이 엄격한 군현 지배를 한 지역 같지는 않다. 아마도 진이 전국 각지의 반란으로 무너진 혼란기에 중국 정부의 통제가 닿지 못한 지역에 깃발을 꽂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나마도 직접 통치가 아니라 중국계 유민을 받아들여 모여살게 하면서 간접 통치 구조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二十餘年 而陳 項起 天下亂 燕 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20여 년 뒤 진승항우가 봉기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 한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위략》


기원전 195년에는 과거 연나라 땅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는데, 이때 박사(博士) 직과 [圭], 100리의 땅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100리의 땅'은 맹자에서 말한 제후국의 땅('사방 100리의 땅')과 이미지가 많이 겹친다. 아마도 일종의 영주를 책봉하는 식으로 서쪽 지배권을 확립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중국 쪽과 딱히 관계를 맺은 기록은 나오지 않는데, 부친이었던 부왕과 이후 위만이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특이한 케이스. 물론 상기된 유망민 문제가 신경쓰여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님 단순히 기록이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194년, 위만반란을 일으켜 왕검성[3]을 공격했다(《위략》에 따르면 한나라가 쳐들어온다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준왕은 맞서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않아 측근들과 함께 남쪽 한 땅(韓地)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한지에 정착한 뒤 나라를 건국하고 한왕(韓王)을 자칭하였으며, 빼앗긴 고향 위만조선과는 교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의 생애는 기록에 없다.


3. 왕위를 찬탈당한 이후: 마한왕?[편집]


삼국사기》에서 신라백제의 초기 기록에서 등장하는 '마한왕'이 그의 왕가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와 백제를 비롯한 삼한 전체에 대해 명목상 상국 행세를 했으나 당시 이미 쇠퇴했는지 차츰 그 권위를 무시당하다가 백제에게 끝내 병합당한다. 이 때문인지 《삼국지》에서는 한의 왕통이 지금은 끊어졌다고 하였으나, 제사는 계속 이어졌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는 《후한서》 동이 열전에도 등장한다.

“侯準既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 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은 그의 근신과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지(韓地)에 거처하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당초 조선왕 준이 위만에 패했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 열전

 
조선 초에 편찬된 역사서 《동국통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성이 익주에 있으며 초대 마한왕이 준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삼한(三韓)에 대한 설(說)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開國)하여 마한(馬韓)이라 불렀었는데,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즉위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4]

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5]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후략)"

동국통감》 외기(外記) 삼한기


이외에도 조선시대의 연구가들은 모두 준왕이 내려와서 현 전라북도 익산시 일대를 중심으로 마한을 건국했다고 보았다. 현재 최근 발굴 성과 등을 토대로 한 추측으로는 바로 익산에 소재한 건마국이 준왕 직계 세력으로 유력하다. 자세한 내용은 건마국 참조. 단, 익산 일대의 전승과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의 문헌 기록을 보면 건마국이 주욱 마한 수장국이었어야 할 텐데, 삼국지의 내용이나 삼국사기 백제 관련 기록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들로 봐선, 기원후 3세기 시점에선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를 중심으로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목지국이 마한 수장국인 것으로 나온다.

물론 목지국도 건마국도 다른 충남북 및 전북 내륙부와 마찬가지로 묘제를 비롯한 물질문명은 고조선계인 토광목관묘-토광석관묘계 그리고 세형동검 등이 특징이기에, 초기 마한을 주도하던 세력과 고조선의 직접적인 계승 혹은 강력한 영향 관계가 고고학적으로도 받침됨은 마찬가지다. 다만 건마국 같은 경우 묘하게도 위만조선이 성립하는 기원전 190년 경에는 그 주도 세력이 반론이 불가능할 정도로 당시 고조선 세력 자체지만, 이후 어느 시기가 지나면 토착집단인 토돈분구묘제 집단 및 훗날 일본으로 건너가서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하는 걸로 추정되는 주구묘 집단으로 내부 주도권이 교체되는 것으로 나온다.

이 또한 언젠가부터 준왕 집안의 대가 끊겨 타인들이 제사를 잇고 있다는 삼국지 기록과 묘하게 합치되는데, 준왕 남래 시절로 계보가 소급되는 준왕 집단의 직계가 세력을 잃으면서 건마국이 목지국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다만 대대적인 집단 단위로 이주한 이상 설령 준왕 개인은 정말로 후손이 궁해서 대가 끊겼을 수는 있지만 여타 왕족인 친척들을 비롯해 고조선계 집단 전체의 후손이 후한서의 기록대로 아주 절멸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건마국이 세력을 잃었을 때도 목지국이나 익산시 입점리 및 웅포리 세력 등 여타 고조선계 세력들은 잔재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백제 왕실에게서도 꽤 대우를 받았던 걸로 보인다. 아마 건마국의 수장이 더 이상 준왕 집단 혹은 준왕과 관련 있는 고조선 직계 집단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던 사실, 청당동의 목지국이 적어도 묘제로만 봐선 준왕 집단과 훨씬 더 가까운데다 낙랑군과 거래할 때의 입지도 유리했던 사실 등을 이유로, 다른 마한 및 삼한 거수국들에 대한 권위 및 실력에서 목지국에게 밀려 수장국 지위를 잃은 것으로 생각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건마국 문서 참조.


4. 삼한정통론[편집]


삼한 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후기 국학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 없고 적통인 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족보들의 내용으로는 준왕의 씨족은 기씨(箕氏)에서 한(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들이 있다.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은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적인 실증사관은 아니고 조선시대의 관념론적 사관이라 할 수 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마한을 한국사의 정통 왕조 중 하나로 보았다. 정통 왕조로 간주하던 고조선의 군주였던 준왕이 찬탈자 위만에게 쫓겨와 여기서 마한왕이 되어 이어졌기 때문. 그리고 마한 멸망 이후의 삼국시대신라 문무왕이 통일할 때까지는 하나의 정통 국가가 없는 무통(無統)의 시대로 보았다.


5. 기자기자조선의 군주들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 목록[편집]


위략(魏略)》과 《위지(魏志)》의 글을 토대로 하여 한국 고유의 성씨인 한씨(韓氏)의 시조로 여겨져 왔다. 이를 바탕으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6]의 씨족대전(氏族大全), 《열성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등 많은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현재로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부정되고 있고, 임진왜란 이후의 사료들만이 있는 상황이므로 확실치 않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마한 말기에 잔약(孱弱)한 자손 세 사람이 있었는데, 친(親)이라고 하는 사람의 후예는 한씨(韓氏)가 되고, 평(平)이라고 하는 사람은 기씨(奇氏)가 되고, 양(諒)이라고 하는 사람은 용강(龍岡)의 위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서 그 후예가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

《증보문헌비고》 제계고 마한의 씨족편
비록 임진왜란 이후의 사료만이 현재 전해오고 있으나 구전으로는 이미 그전부터 인식되고 있었던것으로 나타난다
상이 이르기를, "기자의 자손은 후세에 아는 자가 없으니 매우 서운하다...(후략)..." 근수[7]가 아뢰기를,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하자, 영경이 아뢰기를,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 삼한(三韓)이 국호이었으므로, 한을 가리켜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공가(孔哥)·인가(印哥)·선우가(鮮于哥)도 다 기자의 후손입니다. 대개 기자의 작은 아들이 우(于)에 봉해졌으므로, 선우라 합니다. 고시(古詩)에 '기자의 후손에는 털북숭이가 많다.(箕子枝裔多髯翁)' 하였는데, 대개 선우추(鮮于樞)를 가리킨 것입니다." 하고, 윤휘는 아뢰기를, "평안도에서는 선우가가 대대로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이 된다 합니다."

《선조실록》 36년 8월 13일(병신일)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의하면 "나라를 뺏긴 후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정착을 했는데 그곳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어 대한민국의 성씨이천 서씨의 시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6. 기타[편집]


  • 김시습의 소설인 금오신화 중 '취유부벽정기'에서 나오는 신녀는, 자신은 본래 준왕의 딸로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깨끗하게 자결하려다가 단군의 도움으로 천녀가 되었다고 말한다.

  • 신찬성씨록에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의 장수 답본춘초(答㶱春初)가 준왕의 후손이라고 적혀있다. 특이한 게 '백제국 조선왕 준'의 후손이라 하여 조선왕이 백제에 종속되었던 듯한 모양새로 적혀있다. 이후 자손 혹은 친척으로 보이는 답본양춘(答本陽春)이 724년 아사다노무라지(麻田連)씨[8]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7.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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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기상으로 봤을때 이전 조선왕 시기 초기에 일어난 고조선-연 전쟁이 기원전 281년에 일어났고 부왕이 기원전 230년경에 즉위했으니 부왕은 조선왕 3세의 손자뻘이니 부왕의 아들인 준왕은 제6대 조선왕이 된다.[2]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僭號稱王. 기자의 40여 세 후손인 조선후 회(준의 오기)가 칭왕했다.[3] 고조선의 수도. 학계에서는 현재의 평양 지역에 해당한다고 보고있다.[4] 현재의 익산시.[5] 다른 곳에는 "미륵산성(彌勒山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6] 동국문헌비고의 증보판.[7] 윤근수(尹根壽, 1537년(중종 32년) ~ 1616년(광해군 8년).[8] 정확히는 아사다가 성씨에 해당하는 우지(氏), 무라지는 가문의 격을 나타내는 카바네(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