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준왕 (문단 편집) == 고조선 시절 == 《[[정사 삼국지|삼국지]]》에 따르면 [[기자(중국)|기자]]의 40여 세손이라고 한다.[*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僭號稱王. 기자의 40여 세 후손인 조선후 회(준의 오기)가 칭왕했다.] [[부왕(고조선)|부왕]](否王)의 아들로 기원전 210년경에 즉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진시황]] 대에 부자 세습을 이루었다는 것 외에는 명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염철론』에 따르면 부왕이 진, 한 교체기에 능동적으로 움직여 패수(일반적으로 [[압록강]]에 비정)까지 진출하여 어느 정도의 영토 회복을 이뤄냈다고 한다. >大夫曰 往者 四夷俱强 幷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東越越東海 略浙江之南 南越內侵 滑服令 … (후략) …. >대부가 이르기를 "지난날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은 요새를 넘어 연의 동쪽을 겁박했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쪽을 약탈했습니다.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습니다. … (후략) …" >---- >《[[염철론]]》 비호편 다만 이렇게 획득한 지역을 놓고 '[[진(통일왕조)|진]]의 옛 공지(秦故空地)', 즉 비어있는 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국이 엄격한 군현 지배를 한 지역 같지는 않다. 아마도 진이 전국 각지의 반란으로 무너진 혼란기에 중국 정부의 통제가 닿지 못한 지역에 깃발을 꽂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나마도 직접 통치가 아니라 중국계 유민을 받아들여 모여살게 하면서 간접 통치 구조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二十餘年 而陳 項起 天下亂 燕 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20여 년 뒤 [[진승]]과 [[항우]]가 봉기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 한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 >《위략》 기원전 195년에는 과거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 땅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는데, 이때 [[박사]](博士) 직과 [[홀]][圭], 100리의 땅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100리의 땅'은 [[맹자]]에서 말한 제후국의 땅('사방 100리의 땅')과 이미지가 많이 겹친다. 아마도 일종의 [[영주(중세)|영주]]를 책봉하는 식으로 서쪽 지배권을 확립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중국 쪽과 딱히 관계를 맺은 기록은 나오지 않는데, 부친이었던 부왕과 이후 위만이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특이한 케이스. 물론 상기된 유망민 문제가 신경쓰여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님 단순히 기록이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194년, '''[[위만]]은 [[위만의 정변|반란]]을 일으켜 [[왕검성]][* [[고조선]]의 수도. 학계에서는 현재의 [[평양]] 지역에 해당한다고 보고있다.]을 공격'''했다(《[[위략]]》에 따르면 [[한나라]]가 쳐들어온다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준왕은 맞서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않아 측근들과 함께 남쪽 한 땅(韓地)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한지에 정착한 뒤 나라를 건국하고 한왕(韓王)을 자칭하였으며, 빼앗긴 고향 [[위만조선]]과는 교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의 생애는 기록에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