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유키코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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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유키코
岡田(おかだ 有希子(ゆきこ| Yukiko Okada


본명
((とう 佳代(かよ (사토 카요, Kayo Sato)
애칭
윳코 (ユッコ)
출생
1967년 8월 22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사망
1986년 4월 8일 (향년 18세)
도쿄도 신주쿠구 요츠야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신체
155cm|45kg|O형
가족
아버지 사토 카즈히코
어머니 사토 타카코
언니 사토 치카(1965년생)
학력
타카쿠라 소학교 (졸업)
사와카미 중학교 (졸업)
코우요우 고등학교 (전학)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직업
가수, 배우
데뷔
1984년 4월 21일 싱글 1집
(데뷔일로부터 14636일, 40주년)
활동 기간
1984년 4월 21일 ~ 1986년 4월 7일
팬클럽
1984년 7월 29일 ~ 1986년 5월 2일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
레이블
포니캐년
서명
파일:오카다 유키코 서명.png

1. 개요
2. 생애
2.1. 데뷔 전
2.2. 데뷔 후
3.1. 미디어에서의 취급
3.2. 사후의 이야기
4. 음반
4.1. 싱글 음반 목록
4.2. 정규 음반 목록
5. 여담
6. 관련 링크(팬 사이트)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いつまでも、一緒にいてね。ステキの国からやって来たリトル・プリンセ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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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름을 알린 일본아이돌 중 한 명이자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1] 만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 비운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린다. 활동한 기간은 2년이라는 다소 짧은 기간이며 현재는 살아있던 시간보다 사후의 시간이 훨씬 더 오래 지난 아이돌임에도 현재까지 변치않고 응원하는 당시의 팬들과 오늘날 인터넷 매체를 통해 새롭게 나타난 팬 세대가 존재할 만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

소속사는 우수한 아이돌을 배출한 선 뮤직 프로덕션으로 80년대 대표적인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의 직속 후배이자 사카이 노리코의 직속 선배였다. 깨끗하고 청순한 모범생 이미지로 활동하며 대세 아이돌로 절정의 인기를 얻어가던 도중 갑작스런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데뷔 2주년 기념일이 겨우 2주일 앞이었다. 활동 기간은 정작 2년 정도이고, 수많은 소녀 아이돌 스타들이 활동하던 시기임을 감안해도 데뷔 초부터 큰 인기를 모은 그녀의 존재는 마츠다 세이코나카모리 아키나 다음으로 독보적이였다.

일본 연예계의 족적을 남긴 1967년생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의 데뷔시기와 비교하면 유키코는 다소 빠른 편이였고,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여 그 끝도 더 빠를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동년생들이 나이가 들어 일본 연예계의 대선배가 되었음에도[2] 현재까지도 오카다 유키코라는 인물이 대중들에게 10대 소녀라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2. 생애[편집]



2.1. 데뷔 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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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42년)1967년 8월 22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에서 제왕절개에 이른 난산으로 태어나 태어난 직후엔 47cm, 2.7kg의 미숙아였지만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키코가 2살이 되었을 무렵 일본의 3대 신사 중 하나라 불리는 아츠타 신궁이 있는 나고야시 아츠타구로 이사하였고 이후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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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년기에는 언어장애까지는 아니었으나 '사(さ)행'을 발음하지 못해 '선생님(센세)'를 "텐테"라고밖에 발음하지 못했다.[3]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언니가 다녔던 YMCA의 체육 교실에 다니기도 하였으나 운동신경이 부족하다 생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는 독서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학업에 크게 집착하지는 않았던 평범한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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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의 유키코는 그림 그리는 직업을 동경하였고 4학년 때는 수채화를, 중학생 때는 유화와 일본화를 배우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평소 동경하던 여성 아이돌 카와이 나오코초상화를 그려 본인에게 직접 보내려고 하였다.(이는 데뷔 후에 방송에서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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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연예계 또한 동경하던 유키코는 초등학교 6학년에 연극부에 가입하며 학예회에서 옛날 이야기 모모타로의 오토히메역을 맡게 되었는데, 그 연극은 교장까지 보러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중학생이 되어 유수한 아이돌을 배출한 '호리프로 탈렌트 캐러반' 등의 오디션에 응모하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인 1981년(쇼와 56년) 니콘에서 주최한 '프레쉬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준그랑프리를 차지하게 된다.[4]

파일:1981년 니콘 프레쉬 걸 콘테스트 - 오카다 유키코.jpg
1981년(쇼와 56년) 니콘에서 주최한 '프레쉬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게재된 광고[5]
그러던 중 1982년(쇼와 57년) 8월, 가수가 되기 위해 닛폰 테레비의 예능 신인 발굴 프로그램 스타 탄생![7]에 출전하기로 결심하는데, "대회에 나갈 생각이라면 학생기록부를 써주지 않겠다."라고 학교 선생님에게 반대 당했으나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나고야 지역 예선 대회에 나가 결승 티켓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선생님 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 또한 결사반대하여 12월에 열린 결승 대회는 출전하지 못했고, 그 여파로 식사도 거르고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자 보다 못한 가족들이 3가지 조건을 걸고 이 조건을 전부 해내면 출전을 허락하기로 한다.

3. 나고야 시립 코요고등학교에 합격할 것[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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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한 세 가지 모두 대단한 조건이지만 특히 두 번째는… 어떤 의미로 엄친딸이었다. 부모님으로서는 일부러 무리한 조건을 걸면 딸이 하다가 지쳐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 했지만 유키코는 그 날 이후 매일같이 새벽 2~3시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에 전념하여 놀랍게도 세 가지 조건을 전부 해내고, 이듬해 1983년 결승 대회에 출전하여 당당히 합격. 저명한 여러 개의 소속사의 오퍼를 받았으나 선 뮤직 프로덕션의 후쿠다 전무의 눈에 띄어 부모님에게 각고의 설득을 한 끝에 계약을 맺고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이 때 오디션 예선과 결승전인 '스타 탄생!'에서 각각 부른 노래가 키타하라 사와코의 MY BOYFRIEND와 나카모리 아키나슬로우 모션.



1983년(쇼와 58년) 스타 탄생!에 출연한 유키코.[9]

참고로 이 영상에서 함께 인터뷰하는 사람들 모두 아이돌 데뷔가 결정된 사람들이지만 안타깝게도 유키코를 제외하면 모두 묻혔다(...).

1983년 7월 17일,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에서 저명한 영능력자이자 성명 판단가[10]인 오키 히로코[11]에게 예명 오카다 하루코, 오카다 카요코, 오카다 유키코라는 3개의 이름들을 후보로 정했으나 '하루코'는 같은 소속사 선배인 쿠와타 야스코(桑田靖子)와 한자가 비슷하였고 '카요코'는 성격적으로 약한 이름이라 격한 연예계 생활에 버틸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이유로 탈락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희망을 가지다(望をする)라는 의미를 가진 현재의 예명인 오카다 유키코로 결정되었다. 연예계에서의 목표는 야마구치 모모에와 같은 일본을 대표하는 톱스타가 되는 것이었고 또한 카와이 나호코'''에 대한 동경도 품고 있었다.

이후 8월 25일, 도쿄로 상경하여 선뮤직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집에서 하숙하며 동거인으로 1년 선배인 쿠와타 야스코와 같은 '스타 탄생!' 합격자 타키 사토마가 있고 타키와는 룸메이트로 지냈다고 한다. 9월 1일에는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편입하며 당시 동급생으로는 앞서 나온 쿠와타 야스코 외에 다나카 쿠미, 이시노 요코, 혼다 미나코, 나가야마 요코, 미나미노 요코, 미야자키 마스미, 나가세 마사토시 등이 있었으며 이후 정식 데뷔 전까지 라디오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탤런트로서 짧게 활동했다.

2.2. 데뷔 후 [편집]


레이블인 포니 캐년의 프로듀서는 유키코의 이미지를 6대학 야구(도쿄를 소재지로 한 유서깊은 고교 야구 리그)를 보러 다니는 야마노테(도쿄 15구의 명칭)의 아가씨로 정하고 데뷔곡을 다케우치 마리야에게 의뢰하였고 아이돌 활동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데뷔 해인 1984년은 쉬는 날이 하루밖에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낸 해가 되었다고 하는데 1월 10일에는 젊은 남성용 잡지사인 '스콜라'로부터 첫 취재를 받았고, 3월 11일 도쿄의 메이지 싱궁 회화관 앞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의 이벤트 '토비라! 팝시티 과자 페어'가 개최되어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3월 20일부터 4월 8일까지, 티파티 형식의 팬 교류회인 '모여라 유키코 프렌즈'를 나고야를 시작으로 전국 7개의 도시에서 개최하였고, 3월 25일에는 음악 프로그램 TBS의 더 히든 스테이지[12], 4월 14일에는 테레비 도쿄에서 방송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양양 노래하는 스튜디오'와 TV 아사히에서 방영된 '아이돌 펀치'에서 가수로서 처음으로 여러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4월 21일, 싱글 1집 퍼스트 데이트로 정식 데뷔하며 캐치프레이즈는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줘(いつまでも、一緒にいてね), 멋진 나라에서 찾아 온 리틀 프린세스(ステキの国からやって来たリトル・プリンセス)였다.



데뷔곡 First Date (ファースト・デイト) 무대 영상

5월 31일, TBS의 음악 프로그램인 더 베스트 텐의 스포트라이트 코너에서 키쿠치 모모코와 함께 출연하였는데 이때의 순위는 21위였다. 여담으로 당시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이름을 '오카다 우키코'로 착각하여 부르며 곡명도 '퍼스트 레이디'라고 잘못 설명하였다는 비하인드가 있다. 이후 10월 15일 닛폰 테레비의 음악 프로그램인 더 톱텐에서 8위, 10월 18일에는 더 베스트 텐에서 10위에 오르며 출연에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 26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최우수 신인상까지 수상하였고 데뷔하고 나서는 줄곧 사무소 선배이자 톱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와 비교되며 포스트 마츠다 세이코, 제2의 마츠다 세이코라고 칭했지만 정작 유키코 본인은 역시 자신은 자신일 뿐이니까, 마츠다 세이코를 따라가고 싶지 않다.라고 얘기하였으며 목표로 하는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오카다 유키코라는 답변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프로듀서 등에게 좌지우지되는 일이 많은 연예계에서 확고한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리틀 프린세스(リトル プリンセス) 무대 영상



Dreaming Girl 恋、はじめまして 무대 영상


파일:1985년 고향 나고야에 방문한 오카다 유키코(1).jpg


파일:1985년 고향 나고야에 방문한 오카다 유키코(2).jpg


파일:1985년 고향 나고야에 방문한 오카다 유키코(3).jpg

1985년 잠시 고향을 방문하여 가족[13]과 시간을 보내던 유키코

귀엽고 청순해보이는 그녀의 외모와 달리 데뷔 초부터 똑똑하고 총명한 면모도 돋보였는데 음반 영업소에 인사차 그녀를 데리고 갔을 때에, "애인이 있으신 분들은 1/3을, 사모님이 계신 분은 1/4이면 되니까 자신에게 애정을 주세요." 라고 했다고 하는데, 어린 소녀가 영업직 앞에서 귀여우면서 능글맞게 말하는 것을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한다.



Love Fair 무대 영상

그러나 늘 근면성실한 타입인데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고된 연예인 생활 동안, 또래의 아이돌에 비해 자신을 굉장히 몰아붙이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살이 쉽게 찌는 체질이어서 다이어트의 긴장을 늦출 새가 조금도 없었고, 시력이 좋지 않았음에도 콘텍트 렌즈의 부작용을 염려하여 렌즈를 착용하지 않았다.[14] 게다가 빠듯한 스케줄의 연속으로 하루에 3~4시간 정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한참 인기를 얻을 무렵, "요즘은 하루에 20시간 정도는 일하고 있어요."라고 밝히기도 했고 1985년(쇼와 60년) 12월,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1986년(쇼와 61년) 생전 발매한 마지막 싱글 くちびる Network 무대 영상

데뷔 2년차에 접어든 유키코는 1986년(쇼와 61년) 1월 싱글 くちびる Network를 발매하였다. 작사는 소속사 선배인 마츠다 세이코가 맡았고 작곡, 편곡은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았는데 특히나 출산 이후 연예계 활동을 쉬고 있던 세이코가 처음으로 다른 가수에게 가사를 써준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당시 싱글 판매량은 23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히트곡이 되었으며, 유키코는 이때 처음으로 오리콘 차트에서 1위를 획득하였다. 이 무렵에는 유키코의 외모도 점점 어른스러워지고 세련되어졌고 탑 아이돌로 치고 올라가던 시기였다.

파일:오카다 유키코 졸업사진 1.jpg

파일:오카다 유키코 졸업사진 2.jpg

파일:오카다 유키코 졸업사진 3.jpg

가운데가 유키코 본인이며 그녀가 속한 반에는 미나미노 요코, 혼다 미나코[15], 나가야마 요코[16], 이시노 요코 등 이미 아이돌로 데뷔한 학우들이 많았다.[17]

3월 호리코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며 성인이 되었고 데뷔 이후 처음으로 주연으로 발탁된 TBS 테레비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禁じられたマリコ)>를 성공적으로 종방하였고, 사건 하루 전에는 사진집인 <비너스 탄생>이 발매되는 등, 가파르게 오르는 인기에 박차를 가하던 참이었다.

4월 5일부터 전국 콘서트가 시작되며, 10일에는 TV아사히의 <가출소녀(家出少女)> 드라마 촬영 일정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야말로 점차 커다란 인기를 얻으며 톱 아이돌로 향하는 길을 확실히 가고 있었던 촉망받는 아이돌로,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카다 유키코 또한 머지않아 일본 톱 아이돌이 되어 당시 같은 소속사 아이돌 선배이자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마츠다 세이코와 함께 나란히 서는 것도 시간 문제라는 의견도 존재하였다. 그렇게 유키코의 전성기가 이제 막 시작되려던 그때 ...

3. 사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미디어에서의 취급[편집]


사후 미디어에서 유키코에 대한 대우는 최악이라 평가 받는다. 당시 죽은 사람의 시체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그대로 잡지에 싣고 아스팔트에 뇌수와 피가 흥건한 광경을 생방송으로 그대로 적나라하게 내보내는 행위 등의 미디어의 보도 태도[18]가 대중들에게 매우 지탄을 받았었다. 이뿐만 아니라 흩어진 뇌수를 담아갔다던가 가져간 살점을 먹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도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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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28일 나카모리 아키나 밤의 히트 스튜디오 방송.[19]

유키코의 시체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가 얼마 뒤에 죽었다느니, 평소 유키코를 귀여워하던 선배인 나카모리 아키나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의 심야 라이브 영상(1986년 5월 28일)에 그녀의 유령이 찍혔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진실 혹은 거짓'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방영(2002년 12월 1일)하였으며 여기서는 '진실'로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 위의 이야기들은 거짓이다. 사진기자는 죽지 않았으며, 유령의 경우 실제 영상을 확인해본 결과 뒤에 앉아있던 다른 출연가수[20]가 어둡게 비춰져 유령처럼 보인 것 뿐이다.[21] 한 마디로 저런 소문을 유키코가 듣는다면 당연히 저승에서 펄펄 뛸 소리라는 것.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의 존재는 일본 방송계에서 터부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추억의 80년대 아이돌을 자주 다루는 일본 방송계에서 유키코의 얘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이유로는 사건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며, 상기한 베르테르 효과로 인한 영향 때문에 언급 자체를 자제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근년에 들어, 사건 현장에서 매년 이루어지고 있는 추모 행사를 취재하거나 과거 함께 활동했던 왕년의 아이돌들과 함께 추억을 회상하는 방송도 나오는 등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녀를 재조명하는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3.2. 사후의 이야기[편집]


유키코의 사후에는 5월 14일에 발매 예정이었던 싱글 꽃의 이미지와 유키코의 콘서트 모습을 담은 비디오의 판매가 무산되었다. 원래 소속사 측에서 예정대로 발매를 요청했으나 레코드 측인 포니캐년에서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꽃의 이미지는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1999년이 되어서야, CD앨범 '메모리얼 BOX' 내에 수록되었지만, 콘서트 영상은 2023년 현재도 상품화되지 않았다. 4월 12일 고향인 나고야에서 열린 전국 콘서트는 소속사 선배이자 동세대 아이돌 하야미 유가 미국 스케줄을 취소하고 대역을 맡았고 시즈오카에서는 소속사의 최고 선배인 모리타 켄사쿠가 아이돌인 이토 츠카사와 함께 대역으로 진행되었지만 오사카의 콘서트는 중지되었다.

앨범과 동일한 이름의 사진집인 '비너스 탄생'이 4월 4일에 발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해 전부 회수되었다. 또한, 잡지 '중일시대'에서는 1986년 4월호부터 오카다가 집필한 소설을 연재할 예정이었지만 이 또한 취소되었다. 음악 정보지 '오리콘 위클리'에서는 4월 28일호를 긴급 추모호로 내기도 하였다. 한편, 유키코의 프로마이드의 판매는 계속 진행되었고, 랭킹 상위 5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프로마이드 판매점 '마르벨도'의 상무인 미츠자와 히로시는 제2의 아카기 케이이치로[22]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담으로 유키코가 출연할 예정이었던 TV아사히 드라마 <가출소녀(家出少女)>에 유키코가 맡은 배역은 추후 와타나베 노리코라는 배우로 교체되어 촬영되었고 같은 해 8월 4일 방송되었다고 한다.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 그녀의 어머니는 유키코의 일기와 메모, 그림 및 사진 등을 엮어서 오카다 유키코 - 사랑을 주세요(岡田有希子 愛をください)라는 책을 출간하였다.[23]

사망 후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유키코는 연예계를 꿈꿨던 1981년 중학교 2학년 시절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유키코가 니콘에서 주최한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합격한 것과 학교 성적이 좋아 선생님들께 예쁨을 받았던 걸 주변 학생들이 질투하여 고민하고 있었을 당시에 일어난 것으로 어느 날 집에 혼자 있을 때 고기 만두같은 것을 데워 먹으려고 가스에 올려놓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 나중에 가스 냄새를 알아채고서야 껐다는 유키코 본인의 증언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한 후 유키코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자살이 아니고 그냥 죽었었을 텐데. 하지만 역시 죽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유키코가 그 때부터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게 된 계기라고 여긴 어머니는 '혹시 자살을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어림짐작했다고 밝혔다.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하나 더 얘기하면, 유키코의 아버지는 그녀 사후 주식에 투자했다 잘못되어서 그녀의 유품까지 모두 버려야 했고, 화병으로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생전 그녀의 연고지였던 아츠타 구에는 그녀의 언니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생전에 작업을 같이했던 작사가 강진화, 작곡가 타케우치 마리야 같은 경우는 이것이 거짓일 것이라고 얘기하였으나, 몇 년 전에 다시 이야기 한 바에 따르면 기억이 오래돼서 사실여부를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어머니는 유키코가 자살로 세상을 떠난지 5년 후인 1991년 병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팬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사랑받는 이유는 누군가와 결혼하지 않았고 노화할 일도 없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영원한 18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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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판매 호조에 한정하면 훨씬 더 잘 나갔던 사람은 몇 명이나 있다. 그러나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라고 여겨졌을 데뷔 3년 째에 사라져버린 가수는 전무후무하다.[24] 팬에게 꿈을 안겨주고 순수하게 아이돌을 응원하는 기쁨도 주었지만 동시에 아이돌이 아이돌로서 존재하는 고난과 고통도 던져주었으며 없어지고 나서 더욱 더 존재가 커진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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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의 후배 아이돌 산뮤(さんみゅ~)가 데뷔 싱글로 오카다 유키코의 8집 싱글 '입술 Network'를 리메이크하여 발매했다. 영상 이 외에도 데뷔 싱글 퍼스트 데이트, 그녀의 자살로 안타깝게 발매되지 못했던 9집 싱글 꽃의 이미지도 리메이크되어 발매되었지만 2023년 일본 현지 내에서는 지금까지도 이 영상에 댓글이 달릴 정도로 여러 반응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 듯하다.

타케우치 마리야는 유키코를 기리는 의미로 2019년 발매한 40주년 기념 앨범의 발매일을 유키코의 생일 전날로 정하고, 본인이 써주었던 데뷔곡 '퍼스트 데이트(ファースト・デイト)'를 셀프 커버하였다. 동년 3월에 방송한 NHK의 특집 방송에서 타케우치 마리야는, "몇 번이나 그녀의 곡을 불러보려 했지만 생각이 너무나 깊어져 부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겨우 유키코의 멜로디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며 마음을 밝혔다.

데뷔 동기이자 같은 시기 아이돌로 활동했던 타나카 쿠미는 생전 유키코와 특히 사이가 좋았었는데, 그녀가 2012년부터 수년 간 방송했던 후쿠오카의 로컬 라디오 방송에서는 매회 반드시 유키코의 곡을 틀었다. 그 계기는 유키코의 27주기였던 2012년 4월 8일, 추모 현장인 요츠야의 추모 이벤트에 참석해 그곳에서 100명이 넘는 팬들이 유키코를 그리워하며 묵념하는 것을 보며 "유키코는 팬들의 마음 속에서 아직 살아있다."고 감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송은 전 세계의 웹에서도 들을 수 있어, 해외에 거주하는 열성적인 팬들에게도 유키코에 대한 사연이 날아오기도 했다고.

2016년 12월 2일에 오카다 유키코 특집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영상 링크 자살 당시 보도된 방송들과 호리코시 동창생들이 유키코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 등이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이 방송에서 소속사 선뮤직에 보관되어있던 유키코의 자료를 훔쳐간 '리처드'라는 호주 출신 외국인이 나온다. 이 외국인은 유키코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녀의 열광적인 팬이었고, 그녀의 사후 반 년 뒤 직접 일본으로 날아와 당시 다니던 죠치 대학교의 학부생이자 유키코와 같은 소속사 아이돌이었던 하야미 유와 친해져 1989년 선뮤직에 입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한창 진행중이던 마츠다 세이코미국 진출에 관련해서 통역까지 맡았다. 그러나 1991년 우연히 유키코의 자료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던 다른 직원들이 "쓸 일 없으니 창고에 넣어두라."는 대화를 나누는 걸 듣고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격분한 나머지 회사가 보관한 유키코의 굿즈를 몰래 훔쳐 달아남과 함께 퇴사했다. 30년 만에 공개된 굿즈는 총 194점이며, 데뷔 초기의 생사진과 브로마이드, 직접 그린 의상 스케치, 광고 필름과 레코드의 오픈릴, 육성이 담긴 미공개 영상 등이었고 모두 아주 깨끗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2019년(헤이세이 31년) 1월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묘소 조만지(成満寺)에서의 성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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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헤이세이 28년) 30여 년만에 열린 팬미팅 현장.

2016년 4월부터 시작한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인 토카이 라디오에서 생전 유키코가 진행을 맡았던 '도키도키 라디오(ドキドキラジオ)'라는 방송명을 본따 'ドットーレ山口의 도키도키 라디오 84(ドットーレ山口のドキドキラジオ'84)'라는 트리뷰트 방송이 시작되었고, 이 방송을 계기로 생전 유키코의 소속 레이블이었던 도쿄포니캐년 사내와 나고야의 토카이 라디오 회장에서 '오카다 유키코 팬미팅'을 개최하여 수많은 팬들이 응모하여 참석했다. 이 이벤트는 반응이 매우 좋았는지 2019년까지도 열린다. 해당 기획은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생전부터 그녀의 팬이었던 의사이자 진행자 야마구치 사토루(47)가 시작한 것으로,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50주년 생일인 8월에 열었던 이벤트가 대반향을 일으켜 유키코의 생전 첫 팬미팅 날짜에 근 30년 만에 재차 팬미팅이 열렸다. 이벤트는 당시의 굿즈와 포스터, 미발표 사진 감상과 관계자들의 토크쇼와 가라오케 대회 등으로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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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헤이세이 29년) 4월 8일 도쿄도 신주쿠구 요츠야 교차로에서 열린 사망 31주기 추모 현장.

기일인 4월 8일 정오 12시에는 매년마다 신주쿠구의 요츠야 선 뮤직 프로덕션 사무소 앞에서 수많은 팬들이 모여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이 추모 행사에는 이 행사를 위해 멀리 외국에서 온 유키코의 팬들도 상당수라고 한다. 당시 중고등학생이나 20대였을 팬들은 4-50대 중장년이나 60대 초반[25]이 되었고 당시 삼촌팬이었던 이들은 노인이 되었는데[26] 사진 속의 유키코는 10대 후반 모습 그대로인 것이 참 짠하다.

사실, 포니캐년에서 유키코의 라이브 영상이 담긴 DVD 박스를 발매하는데 그녀의 남은 유가족들이 이를 반대해 무산됐다고 한다.[27]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고교 졸업 후[28]에 적어도 1년이라는 시간동안 재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했고 아이돌로서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던 윳코는 어린 나이임에도 일찍이 가수에서 탤런트로 전향할 생각이였다고 한다. 탤런트로 전향 후에는 일을 조금씩만 하고 싶다고 소속사에 의견을 말했지만 소속사는 윳코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윳코가 지금 한창 잘 나가는데 갑자기 그런 결정을 꺼내서 급한 마음에 윳코의 드라마, 비디오 음반 등 스케줄을 잇달아 많이 잡는 행보를 보이며 윳코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이런 소속사의 태도로 단지 상품으로만 취급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결국엔 윳코의 우울증이 금심해졌기 때문에 소속사측이, 윳코의 자살에 이르게 했다는게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윳코가 데뷔 이후로 방송과 음반 비디오 등에 출연한 것을 보면 실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정을 소화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죽음의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실에 입각해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윳코는 1984년 4월 21일에 가수로 데뷔해 1986년 4월 8일 죽기 전까지, 2년이 안 되는 사이에 상상 못할 정도로 많았던 77곡의 노래를 발표했고 매우 바쁜 왕성한 활동을 했었다. 윳코는 또한 금지된 마리코에 별 대사는 없었던 단역으로도 출연했었고 연기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 자살 원인에 대해서 실연이 원인이라는 등 분분하며 다양한 말들이 있지만 메모에는 실연을 줬다는 상대방의 이름은 실제로 없고 단지 소문에 불과하다. 아마도 윳코가 동경했던 연예계의 세상은 윳코 자신의 생각과는 달랐기 때문에 몹시도 힘들어했던 것으로 자살한 것이 중론이다. 또한 윳코의 노트에서 발견된 ‘언제나 아이돌이고 싶다.’는 메모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4. 음반[편집]



4.1. 싱글 음반 목록[편집]


파일:[1984.04.21] First Date (ファースト・デイト) (VBR).jpg
ファースト・デイト
20위
데뷔 싱글

파일:リトル プリンセス.png
リトル プリンセス
14위
-

파일:dreaminggirl.png
恋、はじめまして
7위
글리코 세실 초콜릿 cm송


파일:546712506_pic1_full.jpg
二人だけのセレモニー
4위
도시바 Let's Chat cm송

파일:Summer beach-앨범커버.jpg
Summer Beach
5위
글리코 카페제리 cm송

파일:슬픈예감.png
哀しい予感
7위
-


파일:lovefair.png
Love Fair
5위
글리코 세실 초콜릿 cm송

파일:R-3915488-1537621959-8197.jpg
くちびるNetwork
1위
'가네보 화장품 86봄'의
이미지송

파일:꽃의이미지.webp
花のイマージュ
-
발매 중지


파일:ab67616d0000b2731e01bf1f421885d6e8c25dce.jpg
Believe In You
63위
기존의 원곡을 리믹스하여 재발매


4.2. 정규 음반 목록[편집]


파일:신데렐라-앨범커버.jpg
シンデレラ
7위
CD는 12월 21일 발매

파일:FAIRY-앨범커버.jpg
FAIRY
2위
-

파일:시월의인어.jpg
十月の人魚
4위
-

파일:qlsjtmxkstod.webp
ヴィーナス誕生
4위
-



4.3. 베스트 앨범[편집]


오카다 유키코/베스트 앨범 문서 참조.


5. 여담[편집]


  • 당시 팬덤 명은 '윳코 프렌즈' 였다.[29]

  • 생전 팬이라고 밝힌 연예인은 같은 나고야 출신 연예인 타치 히로시(舘ひろし)였는데, 드라마 '서부경찰'을 보고 관심이 생겼고 음악방송에서 실제로 만나고는 바로 팬이 되었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이 때문에 사인이 타치 히로시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루머가 생겼다.[30]

  • 데뷔를 위해 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한 공부법으로 '교재와 문제집을 통째로 외우는 방법'을 소개했다. "카메라맨이 셔터를 누르듯 정신을 통일하여 1페이지 1페이지 진지하게 머릿속에 넣어가면 떠올릴 때 신기하게도 하나의 사진같이 머리에 되살아난다."라며 공부 방법을 얘기하였다.참 쉽죠? 또한 열심히 공부를 하고있으면 어머니가 매일같이 빠짐없이 야식을 챙겨주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야식을 먹여 뚱뚱하게 만들면 오디션 결승에 떨어질 것이라 생각한 어머니의 계략(?)이었다고 한다.

  •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였음에도 체형을 신경 쓰며 "좀 더 마르고 싶다. 가슴은 너무 발육해버렸으니까 좀 더 작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수영복 화보 촬영 때는 배가 나오는 걸 싫어해 하루에 한 끼 밖에 먹지 않았다.

  • 좋아하는 음식으로는 '파스타, 타코야키, 오코노미야키, 아이스크림' 등이 있고 싫어하는 음식으로는 '카레우동, 낫토' 등이 있다.[31]

  • 평소 시력이 양쪽 0.1 이하일 정도로 매우 나빴기 때문에 촬영 이외의 시간엔 테가 커다란 안경을 착용했다. 동료였던 코이즈미 쿄코"일 이외에는 언제나 우유병 밑뚜껑 같은 두터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렌즈를 통해 보이는 작아진 눈이 왠지 너무 귀여웠다", 친구였던 타나카 쿠미는 "안경은 마치 우유병 밑뚜껑 같은 모양. 안경을 쓸 땐 귀엽다고 할지 웃기다고 할지..."라고 회상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촬영 때는 콘텍트렌즈나 안경을 전혀 착용하지 않았다.[32]

  •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와 그의 자택에서 함께 합숙했던 선후배와 동료들은 유키코에 대해 "연예 활동도 물론이며 공부 또한 소홀히 하지 않고 시험 기간엔 거의 자지 않았다. 일하고 늦게 귀가한 날에도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과 잡다한 일을 하고나서 어느샌가 바닥 위에 자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연애에 대해선 남자와 사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동경하던 사람은 있었지만 사귀지는 않았다고 얘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한 타치 히로시는 정말로 좋아해서 TV에 나올 때마다 들떠 있거나 함께 대담한 것을 매우 기쁘게 얘기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유키코가 사망 직전까지 고민하던 일들은 아무도 몰랐었다고 한다.

  • 90년대 J-POP을 평정했던 코무로 테츠야가 작곡가로써 처음 만들어 유키코에게 주었던 곡이 1985년(쇼와 60년) 발매한 '시월의 인어(十月の人魚)' 수록곡인 'Sweet Planet', '水色プリンセス'이다.



  • 일기를 최소 6개월에 한 번씩은 썼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일기 쓰는 걸 좋아했으며, 사후 그녀의 일기가 공개되었다. 최초 인터뷰에 응한 것, 오디션 프로그램에 합격통보가 온 것 등의 여러가지의 그녀의 생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유명해져서 황색 잡지 프라이데이와 포커스와 플래시에 출연해보고 싶다고 했다.[33]

  • 유키코가 자살한 날이 사와지리 에리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해서, 한때 에리카는 오카다 유키코의 환생이라고 불린 적도 있다. 그러나 에리카가 마약 관련 혐의로 체포되면서 고인드립 취급될지도 모른다. 사실 그 전에도 팬들이 여기에 대해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 한국의 아티스트와 비교하자면 성별은 다르지만 서지원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듯. 실제로 두 가수는 2년의 짧은 시간을 활동했지만 큰 인기를 얻었고 꽃다운 스무살 남짓한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둘 다 본명이 아닌 예명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다만 차이점은 서지원의 경우는 자살의 원인이 명백하게 밝혀졌던 것이고 유키코의 경우는 현재까지도 미궁인 상태이다.

  • 좀비 랜드 사가 시리즈콘노 준코가 그녀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 추정되고 있다. 생전에는 현실의 오카다 유키코가 살았던 시대의 아이돌이었다는 점, 투신자살을 했는지 여객기 추락사고를 당했는지의 차이가 있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망한 게 비슷하다는 점, 사망 당시의 나이·키·좋아하는 색깔 등의 프로필이 오카다 유키코와 같다는 점, 그리고 콘노 준코의 헤어스타일이 데뷔 초의 오카다 유키코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오카다 유키코가 모티브인 캐릭터라는 설이 유력하다.

  • 가수 카와이 나오코의 팬이라고 한다. 중학생 시절 때부터 좋아했으며 포스터를 보고 직접 그린 카와이 나오코의 초상화를 들고 나와 공개한 적이 있다.[34]

  • 연예계 동료 중이기도 하며, 호리코시 고등학교 동급생 중에서 이름이 유사하고 동갑내기인 오카무라 유키코(岡村有希子)가 있었으나 당시 해당 당사자에 비해 인지도는 워낙 넘사벽인지라 뜨질 못해 예명을 오카무라 카에(岡村佳枝)로 개명하다가 결혼 후부터 와타나베 카에(渡辺佳枝)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 가족 관계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 사토 치카, 사토 카요(본명) 이렇게 4인 가족이었으나, 1986년 유키코가 자살로 세상을 떠난 이후 부모님 또한 두 분 다 돌아가셔서 지금은 언니 사토 치카 혼자만 생존해있다고 한다.[35]


  • 2023년 8월 23일 포니캐년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아직 6곡 뿐이지만 오카다 유키코의 뮤비를 감상을 할 수 있다.#


6. 관련 링크(팬 사이트)[편집]


혐오스러운 사진(자살 직후라든가...) 관련한 사이트는 올리지 말 것.[36]

그 밖에도 구글[37]에 오카다 유키코 생전 또는 오카다 유키코 팬클럽이라 검색하면 생전의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연관 이미지로 자살 직후 현장 사진이 나올 수도 있으니 주의.

  • 유키코의 유년시절
  • Inogashira's Diary - 팬 블로그
  • http://kanon822.sakura.ne.jp/yukiko01.htm - 팬 사이트
  • 실록 만화 오카다 유키코
  • http://cafe.naver.com/koreaokadayukiko - 국내 팬카페[38]
  • BLASTER822R - 유키코의 뮤직비디오나 노래들을 볼 수 있는 유튜브 계정.
  • 인스타 팬계정 - 인스타그램에 있는 유키코의 팬계정


7. 관련 문서[편집]



[1] 유키코가 20대를 넘는 연령대까지 살아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일본 정통파 아이돌의 전성기는 더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었을 거라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 해당 대체역사에서 유키코가 모종의 이유로 빨리 은퇴하지 않는 한 실제보다 훨씬 많은 명곡들을 남겼을 것이며, 그에 따라 유키코의 영향을 받은 후배 아이돌들이 많이 생겨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2] 물론 유키코 또한 후세대 아이돌들에게는 똑같은 대선배격 존재이지만, 단지 오래 전 고인이 된 탓에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아이돌들과 친분을 쌓지도, 그들에게 선배 아이돌로서 가르침을 전하지도 못했을 뿐이다.[3] 어린 아이들이 가장 발음하기 힘들어하는 발음이 /s/ 계열 발음이다. 재밌게도 이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반대로 /m/ 같은 입술소리는 가장 쉽게 발음하는 소리라고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언어에서 '엄마'에 해당하는 단어에는 /m/이 거의 필수적으로 들어간다.[4] 이 콘테스트는 입상한 이들이 1982년 잡지에 게재되는가 하면 특대 포스터까지 제작되어 각 지에 붙여질 정도의 대형 콘테스트였다. 부상으로 여행까지 주어진 상이었다.[5] 이 때는 '사토 카요'라는 본명을 사용했다.[6] 스타 탄생! 후반기의 합격자일 뿐 마지막 합격자는 아니다.[7] 모리 마사코를 시작으로, 사쿠라다 준코야마구치 모모에이와사키 히로미핑크레이디코이즈미 쿄코나카모리 아키나도 이 프로그램 출신이다. 유키코가 이 프로그램 최후의 우승자[6]였고, 이후 스타 탄생!은 종영된다.[8]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에서 높은 학군의 학교였다. 그러나 한 학기만 다니고 연예 활동을 위해 도쿄로 상경해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전학했다.[9] 52초부터[10] 성명으로 그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일[11] 마츠다 세이코를 비롯하여 하야미 유, 타무라 에리코 등 선뮤직 소속된 사람을 포함하여 50명 정도에게 예명을 붙여준 인물로 유명하다.[12] 유키코가 처음 출연하는 음악 프로그램이였으나 이날 종방하였다.[13] 사진에 등장한 사람은 유키코의 어머니와 언니이다.[14] 대중에 모습을 비치지 않을 때에는 높은 도수의 안경을 착용하고 생활하였다고 한다.[15] 1967~2005. 맨 오른쪽 위의 사진의 인물이다. 2004년(헤이세이 16년)에 이름 뒤에 고의로 온점을 붙였다.[16] 아이돌 시절에는 비너스 등을 번안하여 히트를 쳤으나 대박을 내지는 못 했다. 이후 1993년(헤이세이 5년)에 엔카 가수로 전향하면서 다수의 히트를 내면서 NHK 홍백가합전에도 연속 출전하는 중견 여가수가 되었다.[17] 심지어 직속 선배인 마츠다 세이코와 데뷔 동기인 오기노메 요코와 직속 후배인 사카이 노리코도 유키코와 같은 고교 동문 출신이다.[18] 전술했지만 특종에 매달려 시신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기자의 자질은 둘째 치고 고인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추태를 그대로 보여줬다. 또한 시신의 수습이나 경찰과 병원으로 연락한 사람은 주변의 기자나 행인이 아닌 유키코의 매니저가 했을 지경.[19] 해당 방송에서 아키나가 부르는 노래는 집시퀸(ジプシー・クイーン)이며, 가사에는 유키코의 죽음을 내포 하고 있다는 괴담이 떠돌았다.[20]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가요 프로그램인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는 원래 출연자가 무대 뒤쪽에 나란히 앉아있다.[21] 물론 어디까지나 그 당시 흉흉했었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지만.[22] 1939년생으로 배우로 활동하다 1961년, 21살의 나이에 요절하였다.[23] 이 도서는 현재 절판되었으나 일본 아마존닷컴 등지에서는 구할 수 있다. 오카다 유키코에게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사보는 것도 괜찮을 듯.[24] 실제로 오카다 유키코는 8집 싱글 입술 Network로 오리콘 차트 첫 싱글 1위를 하여 이제 막 탑 아이돌의 반열에 오르려던 참에 생을 마감하였고, 따라서 인지도에 비해 생전의 성적이 무언가 저조해 보인다면 그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살아 있었다면 더욱 전설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수들은 여럿 있으나, 물 들어올 때 노도 저어보기 전에 떠난 경우는 연예계에서 극히 보기 드문 사례.[25] 유키코가 활동할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경우 한정.[26] 일부는 천수를 누리고 병이나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27] 5월 14일 발매될 예정이었던 9집 싱글 ‘꽃의 이미지’도 처음에는 발매가 반대되었다고 한다. 그 후 13년 뒤인 1999년 3월 17일에 그녀의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어 발매되었다. 이것도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현재 팬들은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다.[28] 1986년 3월[29] 윳코(유키코 별명) + 프렌즈(친구) ユッコプレンズ[30] 아이러니하게도 타치 히로시는 1983년(쇼와 58년), 즉 유키코의 데뷔 싱글이 나오기 1년 전에 이시하라 군단의 멤버로 들어갔다.[31]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내용이다.[32] 시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인사를 하지 못해 건방진 사람으로 오해받는 게 싫었다고 한다.[33] 1986년(쇼와 61년) 4월에 출연했다. 물론 출연의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애초에 프라이데이와 포커스와 플래시와 같은 황색 잡지에 유명인이 좋은 일로 출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봐도 된다(...).[34] 유키코의 어머니가 쓰신 자서전에 있는 그녀의 일기장에 의하면 무대가 끝나고 내려와 카와이 나오코에게 인사를 했는데 웃으면서 받아줬으며,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힘내."라고 말해줘서 유키코의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며 설레였다는 일화가 있다.[35] 부모님이 유키코가 태어난 후 이름을 카요라고 지었는데 아버지께서 치카-카요 무슨 끝말잇기 같다고 웃으셨다고 한다.[36] 리그베다 위키에서는 이 문서에서 자살 직후 사진을 올리고 지우는 수정전쟁이 난 적이 있었다.[37] 구글의 경우 오카다 유키코만 검색하면 맨 첫 줄부터 잔혹한 사진이 표시되니 특히 주의. 한국어로는 무엇으로 검색하든 그 사진이 뜨는 판국이니 가급적 일본어로 검색하자.[38] 한국 대표 팬클럽이지만 오래전부터 대표 운영자의 성격이 정말 이상하기로 소문이 자자해서 팬클럽의 활동성은 크지 않다.이와 관련해서 네이버 지식인에도 올라와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