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유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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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유키코
(おか( 有希子(ゆきこ | Yukiko Okada


본명
((とう 佳代(かよ (사토 카요, Kayo Sato)
애칭
윳코 (ユッコ)
출생
1967년 8월 22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사망
1986년 4월 8일 (향년 18세)
도쿄도 신주쿠구 요츠야
묘소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조만지[1] 57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직업
가수, 배우
데뷔
1984년 4월 21일 싱글 1집
ファースト・デイト

(데뷔일로부터 14608일, 39주년)
활동 기간
1983년 10월 10일[2]~1986년 4월 7일
팬클럽
1984년 7월 29일~1986년 5월 2일
서명
파일:오카다 유키코 서명.png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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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55cm, 45kg, O형
가족
아버지 사토 카즈히코
어머니 사토 타카코(19??~1991)
언니 사토 치카(1965년생)
학력
타카쿠라 소학교 (졸업)
사와카미 중학교 (졸업)
코우요우 고등학교 (전학)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1. 개요
2. 생애
2.1. 데뷔 전
2.2. 데뷔 후
3.1. 후일담
3.2. 미디어에서의 취급
5. 출연
5.1. 드라마
5.2. 예능
5.3. 라디오
5.4. CM
5.5. 비디오
5.6. DVD
5.7. 포스터
5.8. 기타
5.8.1. 오카다 유키코 관련 도서
6. 수상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時はあたかも素人っぽさが売りのおニャン子クラブが人気絶頂。岡田有希子(の死)と共に、プロのアイドル歌手の時代も終わってしまった

}}}}}}

일본 쇼와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돌 중 한 명이자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3]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 비운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린다.[4]


2. 생애[편집]



2.1. 데뷔 전[편집]


파일:오카다 유키코 1967년 8월 22일.png

파일:o0800102615163342470.jpg

1967년(쇼와 42년) 8월 22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에서 제왕절개에 이른 난산으로 언니와 2살 차이 나는 막내딸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교육가, 아버지는 도요타 본사 연구직 그리고 어머니는 변호사 및 전통 의류 업을 하던 집안이였다. 태어난 직후엔 신체 47cm, 2.7kg의 미숙아였으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 유키코가 2살이 되었을 무렵 일본의 3대 신사 중 하나라 불리는 아츠타 신궁이 있는 나고야시 아츠타구로 이사하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데뷔 준비를 위해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파일:o0704058515163343017.jpg

유소년기 시절의 유키코는 '사(さ) 행'을 발음하기 어려워해서 '선생님(센세)'를 "텐테"라고 발음하였다.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언니 치카가 다녔던 나고야 YMCA 어린이 체육 교실에 다닌 적도 있었다.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는 독서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학업에 크게 집착하지는 않았던 평범한 소녀였다. 어릴적부터 작은 귀가 컴플렉스였기에 1985년 숏컷 스타일을 하기 전까지 귀가 잘 안 보이는 헤어스타일을 유지해왔다. 그리고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소꿉놀이가 아닌 도구를 사용하여 만드는 것이나 조립하는 것을 좋아해서 조부모님이 유키코에게 갖고싶은 선물을 물으면 '목공 도구 세트'라고 대답하여 가족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파일:o0799102815321470952.jpg


파일:n-images-2369-2873355809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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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 같이 작품을 표현하는 화가라는 직업을 동경하였다고 한다. 이때 일화로 초등학교 1학년쯤 자동차 그리기 숙제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차 테두리 그리는 걸 도와주다가 유키코가 "이건 내 그림인데 왜 엄마가 그리냐"며 지우고 본인이 다시 그렸다고 하며, 4학년 때는 수채화를, 중학생이 되며 유화와 일본화를 배우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5] 재능이 있다면 어머니에게 예술대학으로 진학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여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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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쇼와 53년), 5학년때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하는 사생 대회에 당당히 입선 생애 처음으로 신문사 취재에 응한다. 이듬해 아츠타 신궁에서 주최하는 사생대회에서 최우수상이나 다름없는 미야자와상을 받게된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는데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뽑히게 되었고 훗날 밝히길 자신은 수직적인 관계보단 수평적인 관계가 더 어울린다고 말했다. 연예계 또한 동경하던 유키코는 초등학교 2학년 합창부에 들어가 6학년 CBC 합창 콩쿠르에서 준우수상을 받고 또한 6학년에 연극부에 가입하며 학예회에서 옛날이야기 우라시마 타로의 오토히메 역을 맡게 되었는데, 그 연극은 교장까지 보러 올 정도였고 데뷔했을 때와 달리 어른들도 소화하기 힘든 소프라노 곡조로 부르고 있다.







의상 또한 직접 재료를 구매해서 제작하고 복도에 전시했는데 PTA 회의차 들렸던 학부모들도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때마침 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가 한창 방영되고 있는 시기라 마리 앙투아네트 걸음걸이를 연구하기도 했다.[6] 이것을 계기로 중학생이 되어 유수한 아이돌을 배출한 '호리프로 탤렌트 캐러반' 등의 오디션에 응모하게 되었다.

1981년(쇼와 56년) 중학교 2학년에는 니콘에서 주최한 '프레시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였다. 그리고 이때 준 그랑프리를 차지하게 되며 1982년 잡지에 게재되고 특대 포스터까지 제작되어 각 지에 붙여졌고 여행까지 주어진 상이었다. 그리고 평소 동경하고 팬이었던 여성 아이돌 카와이 나오코초상화를 그려 본인에게 직접 보내려고 하였다.[7]

파일:1981년 니콘 프레쉬 걸 콘테스트 - 오카다 유키코.jpg
1981년(쇼와 56년) 니콘에서 주최한 '프레쉬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게재된 광고[8]
그러던 중 1982년(쇼와 57년) 8월, 가수가 되기 위해 닛폰 테레비의 예능 신인 발굴 프로그램 스타 탄생![9]에 출전하기로 결심하는데, 이때 "대회에 나갈 생각이라면 내신서를 써주지 않겠다."라는 학교 선생님의 반대에 유키코는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나고야 지역 예선 대회에 출전하여 결승 티켓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뿐만 아니라 언니 치카를 제외한 유키코의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결사반대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12월에 열린 결승 대회는 출전하지 못했다.

3. 나고야 시립 코요고등학교에 합격할 것[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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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코의 가족들은 유키코에게 3가지 조건을 걸고 이 조건을 전부 해내면 출전을 허락하기로 하였다. 위에 상기한 세 가지 모두 대단한 조건이지만 특히 두 번째는 () 즉 유키코는 엄친딸이었다.[11] 부모님으로서는 일부러 무리한 조건을 걸면 딸이 지쳐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그날 이후 매일같이 새벽 2~3시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에 전념하였고 놀랍게도 세 가지 조건을 전부 해내고 1983년 3월 30일 '스타 탄생!' 제46회 결전 대회에 결승 대회에 출전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당시 저명한 여러 개의 연예 사무소의 오퍼를 받았으나 선 뮤직 프로덕션의 후쿠다 전무의 눈에 띄어 부모님에게 각고의 설득을 한끝에 계약을 맺고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이때 '스타 탄생!'아이치 나고야 예선에서는 키타하라 사와코의 'MY BOYFRIEND'를 가창하였고 결전 대회에서는 나카모리 아키나슬로 모션를 가창하였다.



1983년(쇼와 58년) 스타 탄생!에서의 유키코.

파일:1983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1.jpg파일:1983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jpg}}}
1983년 오카다 유키코 팬클럽 회지

1983년 7월 17일,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저명한 영능력자이자 성명 판단가[12]인 오키 히로코[13]에게 예명 오카다 하루코(岡田晴子), 오카다 카요코(岡田佳代子), 오카다 유키코(岡田有希子)라는 3개의 이름들을 후보로 정했으나 처음에는 오카다 하루코(岡田晴子)로 결정되었으나 '하루코(晴子)'는 같은 연예사무소 선배인 쿠와타 야스코(桑田靖子)와 한자가 비슷하였고 '카요코(佳代子)'는 성격적으로 약한 이름이라 격한 연예계 생활에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인해 희망을 가지다(望をする)라는 의미를 가진 현재의 예명인 오카다 유키코로 결정되었다. 연예계에서의 목표는 야마구치 모모에와 같은 일본을 대표하는 톱스타가 되는 것이었고 또한 카와이 나오코에 대한 동경도 품고 있었다.

1983년 8월 25일, 도쿄로 상경한 유키코[14] 는 세타가야구에 위치한 선 뮤직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집에서 하숙하며 동갑내기이고 급우이자 이미 1년 일찍 데뷔한 아이돌인 쿠와타 야스코와 같은 '스타 탄생!' 합격자 타키 사토미가 있었으며 타키 사토미와는 룸메이트로 지냈다고 한다. 또한 9월 1일 나고야 코우요우 고등학교에서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편입하였다. 유키코는 하숙하며 7개월간 발성과 춤 레슨을 쌓았으며 매일 아침 선 뮤직의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와 같이 조깅하기도 하였다.

파일:tg001.jpg
오카다 유키코와 타케우치 마리야

But 竹内まりやさんが来てくれたのは
하지만 타케우치 마리야씨가 와 주신 것은
すごおく感激だった
저엉말 감격!!이었다
やっぱ素敵な女性(ひとだナと思う
역시 멋진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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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포니 캐년의 프로듀서는 오카다 유키코의 이미지를 6대학 야구(도쿄를 소재지로 한 유서깊은 고교 야구 리그)를 보러 다니는 야마노테(도쿄 15구의 명칭)의 아가씨로 정하고 1983년 12월 10일 이치구치자가 스튜디오에서 레코드 녹음을 시작하며 타케우치 마리야에게 곡을 의뢰하였고 12월 12일 데뷔곡 ファースト・デイト 레코딩 시작. 그리고 12월 18일 '양양 노래하는 스튜디오'에 첫 출연하였다.


2.2. 데뷔 후[편집]


1984년 오카다 유키코 팬클럽 회지

1984년 1월 10일 남성지 잡지사 '스콜라'로부터 첫 취재를 시작으로, 3월 11일 도쿄의 메이지 싱궁 회화관 앞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의 이벤트 '토비라! 팝시티 과자 페어'가 개최되어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3월 20일부터 4월 8일까지, 티 파티 형식의 팬 교류회인 '모여라 유키코 프렌즈'를 나고야를 시작으로 전국 7개의 도시에서 개최되었고, 3월 25일에는 음악 프로그램 TBS의 더 히든 스테이지, 4월 14일에는 테레비 도쿄에서 방송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양양 노래하는 스튜디오'와 TV 아사히에서 방영된 '아이돌 펀치'에서 가수로서 처음으로 여러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カフェゼリー[15]CM

굉장하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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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ファースト・デイト image.jpg


いつまでも、一緒にいてね ステキの国からやって来たリトル・プリンセ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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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데뷔 싱글 'ファースト・デイト'를 발매하며 정식 데뷔. 당시 유키코가 인사차 직접 레코드점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파일:오카다 유키코 레코드점 방문.jpg}}}



ファースト・デイト 무대



ファースト・デイト 더 베스트 텐 스포트라이트 무대

5월 31일, 공교롭게도 같은 날 데뷔한 아이돌 키쿠치 모모코와 함께 TBS의 음악 프로그램 더 베스트 텐의 스포트라이트 코너에 출연하였다. 당시 더 베스트 텐 차트에서 ファースト・デイト의 순위는 21위로 정식 출연은 아니였고 당시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쿠메 히로시가 유키코의 이름을 '오카다 키코'로 착각하여 부르며 곡명도 '퍼스트 레이디'라고 실수했던 일화가 존재한다.

파일:岡田有希子 「第3回 メガロポリス歌謡祭」.jpg}}}

7월 6일 '제3회 메갈로폴리스 가요제'에서 '최우수 신인 다이아몬드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7월 18일 두 번째 싱글 'リトル プリンセス' 발매. 데뷔곡 ファースト・デイト에서 시작되는 3부작의 2번째 작품이다.



リトル プリンセス 무대

파일:「Dunk」848号より.jpg}}}

파일:「ザ・テレビジョン」より.jpg}}}



リトル プリンセス 제10회 일본 TV 음악제(예선)



リトル プリンセス 제10회 일본 TV 음악제(본선)

1984년(쇼와 59년) 8월 23일과 9월 6일에는 제10회 일본 TV 음악제가 개최되어 リトル プリンセス[16]를 예선과 본선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이무렵 선뮤직 대선배인 미야코 하루미가 본인의 독특한 이른바 하루미 창법을 유키코에게 직접 손수 전수 해주어 이때부터 발성이 조금 바뀌었다. 이전보다 더욱 어른스러워졌고 곡에 대한 해석 또한 늘어났고 가창력이 더욱 늘어난 유키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Dreaming Girl 恋、はじめまして 무대

이후 10월 15일, 닛폰 테레비의 음악 프로그램인 더 톱텐에서는 8위, 10월 18일에는 더 베스트 텐에서는 10위를 차지하며 드디어 정식 출연에 성공. 제 26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최우수 신인상까지 수상하였다. 줄곧 사무소 선배이자 톱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와 비교되며 포스트 마츠다 세이코, 제2의 마츠다 세이코라고 언론에서 칭했지만 정작 유키코 본인은 역시 자신은 자신일 뿐이니까, 마츠다 세이코를 따라하고 싶지 않다.라고 얘기하였으며 목표로 하는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오카다 유키코라는 답변을 내놓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프로듀서 등에게 좌지우지되는 일이 많은 연예계에서 확고한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유키코의 귀엽고 청순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데뷔 초부터 똑똑하고 총명한 면모도 돋보였는데 음반 영업소에 인사차 그녀를 데리고 갔을 때에, "애인이 있으신 분들은 1/3을, 사모님이 계신 분은 1/4이면 되니까 자신에게 애정을 주세요." 라고 했다고 하는데, 어린 소녀가 영업직 앞에서 귀여우면서 능글맞게 말하는 것을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한다.
파일:1985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jpg}}}
1985년 오카다 유키코 팬클럽 회지


파일:1985년 고향 나고야에 방문한 오카다 유키코(1).jpg


파일:1985년 고향 나고야에 방문한 오카다 유키코(2).jpg


파일:1985년 고향 나고야에 방문한 오카다 유키코(3).jpg

1985년 나고야에 놀러간 유키코[17]



二人だけのセレモニー 무대



二人だけのセレモニー 무대



Summer Beach 무대

당시 아이돌이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은 사소한 일이였는데[18] 아마 유키코도 선배들의 성공 사례를 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잘랐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1984년 여름부터, 숏컷을 하고 싶은 생각을 비췄으나 선뮤직에서는 기존의 '오카다 유키코의 이미지가 있다'고 계속 반대된 것 같다. 그러나 이후 5번째 싱글 'Summer Beach'를 발매하던 시기에 '여름 곡이고, 숏컷도 좋겠지'라는 생각으로 허락되었고 이 곡의 발매는 4월 17일. 그 한발 앞서, 투어를 통해 팬들에게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보여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파일:Okada_Yukiko_hair.jpg}}}
1985년 가을호 헤어 카탈로그

이것저것 헤메이다 결국에는 이거니까 싫어져 (웃음)

}}}}}}



哀しい予感 무대



Love Fair 무대

근면성실한 타입이였던 유키코는 남들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고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연예인 생활 동안 자신을 굉장히 몰아붙이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살이 쉽게 찌는 체질이라서 다이어트에 대한 긴장을 늦출 새가 조금도 없었고, 시력이 좋지 않았음에도 콘텍트 렌즈의 부작용을 염려하여 렌즈를 착용하지 않았다.[19] 또한 무리한 스케줄이 이어지며 하루에 3~4시간 정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당시 "요즘은 하루에 20시간 정도는 일하고 있어요."라고 밝히기도 했다.

파일:禁じられたマリコ 岡田有希子.jpg

11월 5일부터 연속 TV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 (TBS계)로 첫 주연. 드라마 촬영은 콘서트 기간 중이였던 9월 19일부터 12월 말까지 매일같이 진행됐다고 한다. 스케줄의 연속으로 8시간동안 휴식이 없거나 때로는 촬영이 심야에 진행되기도 했지만, 유키코는 NG를 거의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기 유키코의 무대를 보면 매우 피곤해보인다. 결국 1985년(쇼와 60년) 11월 29일부터 12월 2일 까지 과로로 입원하였다. 실제로 당시 유키코는 쉬는 날이 부족하다며 휴일을 더 늘려달라거나 잠시 활동을 쉬고싶다는 표현을 자주 하였다.

파일:1986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1.jpg파일:1986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2.jpg}}}
1986년 오카다 유키코 팬클럽 회지

신인상을 받으며 주목 받았던 1984년과 달리 1985년은 二人だけのセレモニー 이후 음반 매출의 증가 없이 정체된 상태였고 다른 동기 아이돌과는 달리 아직까지 그녀를 대표하는 히트곡이 없었던 상황이였다. 이때 선 뮤직 측에서는 일명 유코 프로젝트를 준비하는데 유키코의 다음 싱글로 히트를 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련한 대책을 내세웠다. 그것은 바로 화제성을 받는 것. 작사에 연예사무소 직속 선배이자 엄청난 인기를 끌던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20], 작곡, 편곡에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상당히 호화로운 구성으로 오카다 유키코의 새 싱글을 준비한다.[21] 특히 출산 이후 연예계 활동을 쉬고 있던 마츠다 세이코가 처음으로 다른 가수에게 작사를 해줬다는 점으로 발매하기 전부터 여러 기사에서 오르는 등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6년(쇼와 61년) 1월 29일, 오카다 유키코의 8번째 싱글 くちびる Network가 발매되었다. 사무소의 기대대로 이 곡은 당시 싱글 판매량이 23만장 이상을 기록했고 2월 10일 오리콘 주간 차트 1위를 달성하며 유키코의 첫번째 히트곡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유키코의 くちびるNetwork는 가네보 화장품, 나카야마 미호의 色・ホワイトブレンド는 시세이도 화장품의 CM송으로 각각 다르지만 화장품의 CM송에 사용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이 날 더 베스트 텐 무대에서는 특이하게도 나카야마 미호가 무당벌레 카트를 운전해주며 유키코와 함께 타고 가는 무대형식으로 출연하였다.


앞으로는, 자유로운 시간이 늘어난 만큼, 건강을 위해서라도 스포츠라도 할까?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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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호리코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나카노 선플라자 홀에서 열린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절친 타나카 쿠미와 손을 잡고 취재를 받았다.

파일:오카다 유키코 1986.3.6 사인.jpg
"졸업 ・・・ 이번 봄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회인으로서 힘낼게요! 잘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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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봄이고, 모두가 즐거운 기분이 될 수 있으면~이라고 생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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くちびる Network 마지막 무대[22]

많은 사람들에게 1986년 4월 4일 녹화된 가요 도키리 대방송이 유키코의 마지막 무대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위의 くちびる Network 무대가 4월 6일 녹화로 밝혀지며 이 무대가 유키코의 마지막 무대이다.


파일:일본 라디오 방송 '밤 놀이 나이트' 최종회 유키코 사진.jpg


잘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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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 테레비의 연속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23]'에서 주연으로 등장, 1월에 발매한 싱글 '입술 Network'의 오리콘 차트 1위 달성, 4월 5일부터 개최되고 있었던 전국 콘서트, 4월 10일부터 테레비 아사히의 드라마 가출소녀[24] 촬영 일정과 싱글 '꽃의 이미지' 발매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착실하게 인기를 얻어가던 쇼와시대의 톱 아이돌, 오카타 유키코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줄 알았지만...


3. 사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후일담[편집]


사건 직후 선뮤직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기자회견을 열었고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 밝힌 인터뷰이다.

유키코는 미네기시 씨에게 연심을 품고 플라토닉한 사랑을 계속 이어오다 자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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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서 아이자와 사장은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원인이 미네기시 토오루에게 품어 왔던 연심이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아이자와 사장의 사무실 벽에는 유키코의 사진을 걸어 놓고 있었고 휴대전화의 배경이나 수첩에도 유키코의 사진이 붙어져 있으며 선뮤직이 있는 한 오카다 유키코는 영원하다.라며 유키코를 아끼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링크]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유키코와 생전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후쿠다 전무는 기자회견 당시엔 정말로 괴로웠다. 하지만 아이자와 사장과 기자의 질문엔 정직하고 전부 대답하자고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배우와의 교제가 원인이 아닌가 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지만 진상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유키코는 정말 멋진 아이였다는 것. 장례식 때 그녀의 아버지가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을 응축한 것 같은 행복한 아이였습니다.'라는 얘길 해주셨습니다. 아이자와 사장도 저도 그 말에 얼마나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라고 후에 회상하였다.

4월 10일 13시경 도쿄도 나카노구/호센지에서 본장·고별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팬 전용 헌화대가 설치되며, 많은 팬과 연예인을 합쳐 총 7000명이 참석하였다.[26]




유키코씨 정말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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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베스트 텐 통상회 엔딩에서 진행되는 기념 사진 촬영 이후 종래의 엔딩곡인 1위곡이 아닌 유키코의 '입술 Network'가 흐르는 가운데, 지난 날 유키코의 인터뷰 장면들이 지나가면서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추모 인사를 전하며 생전에 유키코의 장면들을 보여주며 프로그램의 엔딩 롤이 흐르고 방송이 종료되었다.

4월 12일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에서 개최된 전국 콘서트는 연예사무소 선배이자 동세대 아이돌 하야미 유가 미국 스케줄을 취소하고 대역을 맡았고 시즈오카에서는 연예사무소의 최고 선배인 모리타 켄사쿠가 아이돌인 이토 츠카사와 함께 대역으로 진행되었지만 오사카에서 개최 예정이였던 콘서트는 결국 취소되었다.

정규 앨범과 동일한 이름의 사진집 '비너스 탄생'이 4월 4일에 발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황을 고려해 전부 회수되었다. 또한, 잡지 '중일시대'에서는 1986년 4월호부터 오카다가 집필한 소설을 연재할 예정이었지만 이 또한 취소되었다. 음악 정보지 '오리콘 위클리'에서는 4월 28일호를 긴급 추모호로 내기도 하였다. 한편, 유키코의 프로마이드의 판매는 계속 진행되었고, 랭킹 상위 5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프로마이드 판매점 '마르벨도'의 상무인 미츠자와 히로시는 "제2의 아카기 케이이치로[27]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28]

사후 포니캐년에서 유키코의 라이브 영상이 담긴 DVD 박스를 발매하는데 그녀의 남은 유가족들이 이를 반대해 무산됐다고 한다.[29]

업투보이 1986년 5월호의 오카다 유키코 인터뷰

나약하다는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나는 아직 그 정도의 가수가 아니에요. 하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좀 더 어른들도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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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터뷰를 보면서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사카모토 류이치마츠다 세이코라는 유명인들의 서포트가 있었기 때문에 '입술 Network' 라는 곡은 어쩌면 유키코에게 큰 압박감 속에서 오리콘 1위를 달성하고 안심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황스러움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얽히는 곡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정상에 올라, 앞으로 더 높은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면 18살의 나이의 유키코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중압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1986년(쇼와 61년) 5월 2일, 오카다 유키코의 팬클럽이 해산했고 마지막 팬클럽 전보에는 미조구치 매니저가 남긴 마지막 인사가 있다. 이후 6월 1일 추모 사진집 '안녕 유키코'가 발매되었다.

그녀는 노력에 노력을 더해 빛을 내는 타입이며 세이코가 천재형이라고 하면, 유키코는 노력형이라고 하는 편이 좋았을 지 모릅니다. 유키코는 지는 걸 싫어하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집중력은 놀랄 만큼 굉장했습니다. 드라마 대본을 읽기 시작하면 그것에 몰두해 몇 번을 불러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아이였기 때문에 매니저인 저로써는 전혀 관리할 필요가 없는 편한 아이였습니다.

파일:1983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1.jpg
치프 매니저 미조구치 노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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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직후 요츠야서로 달려온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그 해 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서 인터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물론 대답을 해줄 리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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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연예계를 꿈꿔왔던 1981년 유키코가 중학교 2학년이였던 시절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니콘에서 주최한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합격한 것과 학교 성적이 좋아 선생님들께 예쁨 받았던 것을 주변 친구들이 질투했었고, 때마침 우상이나 다름없던 카와이 나오코가 NHK 레츠고 영 리허설 도중 추락하여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었는데 이 사실을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어머니께서 주니치신문을 보여주고 나서 믿게 되는 등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고 있었을 당시에 일어난 것으로 어느 날, 유키코가 집에 혼자 있을 때 고기만두 같은 것을 데워 먹으려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 나중에 가스 냄새를 알아채고서야 껐다는 유키코 본인의 증언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한 후 유키코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자살이 아니고 그냥 죽었었을 텐데. 하지만 역시 죽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유키코가 그 때부터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게 된 계기라고 여긴 어머니는 '혹시 자살을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어림짐작했다고 밝혔다.

파일:external/s29.postimg.org/img_0_m.jpg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함을 느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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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1일,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는 생전 유키코가 썼던 일기와 메모, 그림 및 사진 등을 엮어서 오카다 유키코 - 사랑을 주세요(岡田有希子 - 愛をください)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책의 이름이 생전 유키코가 좋아하던 아이돌인 카와이 나오코의 곡 제목과 같다.[30]

2016년 12월 2일에 오카다 유키코 특집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자살 당시 보도된 방송들과 호리코시 동창생들이 유키코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 등이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이 방송에서 연예사무소 선뮤직에 보관되어있던 유키코의 자료를 훔쳐간 '리처드'라는 호주 출신 외국인이 나온다. 이 외국인은 유키코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녀의 열광적인 팬이었고, 그녀의 사후 반 년 뒤 직접 일본으로 날아와 당시 다니던 죠치 대학교의 학부생이자 유키코와 같은 연예사무소 아이돌이었던 하야미 유와 친해져 1989년 선뮤직에 입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한창 진행중이던 마츠다 세이코미국 진출에 관련해서 통역까지 맡았다. 그러나 1991년 우연히 유키코의 자료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던 다른 직원들이 "쓸 일 없으니 창고에 넣어두라."는 대화를 나누는 걸 듣고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격분한 나머지 회사가 보관한 유키코의 굿즈를 몰래 훔쳐 달아남과 함께 퇴사했다. 30년 만에 공개된 굿즈는 총 194점이며, 데뷔 초기의 생사진과 브로마이드, 직접 그린 의상 스케치, 광고 필름과 레코드의 오픈릴, 육성이 담긴 미공개 영상 등이었고 모두 아주 깨끗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녀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사랑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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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코의 기일인 4월 8일 정오 12시에는 매년 신주쿠구의 요츠야 선 뮤직 프로덕션 사무소 앞에서 수많은 팬들이 모여 추모 행사를 열고 있으며,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조만지(成満寺)[31]에 잠든 유키코의 묘에도 37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활짝 핀 신선한 꽃이 단 한 번도 마를 날이 없이 꾸준히 장식된다고 한다. 당시 중고등학생이나 20대였을 팬들은 4-50대 중장년이나 60대 중후반[32]이 되었고 당시 삼촌팬이었던 이들은 노인이 되었는데[33] 사진 속의 유키코는 여전히 10대 후반 모습으로 그대로인 것이 참 짠하다.

데뷔 동기이자 같은 시기 아이돌로 활동했던 타나카 쿠미는 생전 유키코와 가장 사이가 좋았었는데, 2012년부터 수년 간 방송했던 후쿠오카의 로컬 라디오 방송에서는 매회 반드시 유키코의 곡을 틀었다. 그 계기는 유키코의 27주기였던 2012년 4월 8일, 추모 현장인 요츠야의 추모 이벤트에 참석해 그곳에서 100명이 넘는 팬들이 유키코를 그리워하며 묵념하는 것을 보며 "유키코는 팬들의 마음 속에서 아직 살아있다."고 감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송은 전 세계의 웹에서도 들을 수 있어, 해외에 거주하는 열성적인 팬들에게도 유키코에 대한 사연이 날아오기도 했다고.

파일:yukiko0.jpg
2016년(헤이세이 28년) 30여 년만에 열린 팬미팅 현장.

2016년 4월부터 시작한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인 토카이 라디오에서 생전 유키코가 진행을 맡았던 '도키도키 라디오(ドキドキラジオ)'라는 방송명을 본따 'ドットーレ山口의 도키도키 라디오 84(ドットーレ山口のドキドキラジオ'84)'라는 트리뷰트 방송이 시작되었고, 이 방송을 계기로 생전 유키코의 소속 레이블이었던 도쿄포니캐년 사내와 나고야의 토카이 라디오 회장에서 '오카다 유키코 팬미팅'을 개최하여 수많은 팬들이 응모하여 참석했다. 이 이벤트는 반응이 매우 좋았는지 2019년까지도 열린다. 해당 기획은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생전부터 그녀의 팬이었던 의사이자 진행자 야마구치 사토루(47)가 시작한 것으로,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50주년 생일인 8월에 열었던 이벤트가 대반향을 일으켜 유키코의 생전 첫 팬미팅 날짜에 근 30년 만에 재차 팬미팅이 열렸다. 이벤트는 당시의 굿즈와 포스터, 미발표 사진 감상과 관계자들의 토크쇼와 가라오케 대회 등으로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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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헤이세이 29년) 4월 8일 도쿄도 신주쿠구 요츠야 교차로에서 열린 사망 31주기 추모 현장.

없어지며 한층 더 존재가 커진 희유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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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8집 싱글 입술 Network 오리콘 차트 첫 싱글 1위라는 커리어를 달성하며 이제 막 탑 아이돌의 반열에 오르려던 찰나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고, 따라서 지금 유키코의 인지도에 비해 성적이나 커리어가 저조해 보인다면 그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살아 있었다면 더욱 전설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수들은 여럿 있지만, 물이 들어올 때 노도 저어보기 전 떠난 경우는 연예계에서 극히 보기 드문 사례인 것이다. 팬에게 꿈을 안겨주고 순수하게 아이돌을 응원하는 기쁨도 주었지만 동시에 아이돌이 아이돌로서 존재하는 고난과 고통도 던져주었으며 없어지고 나서 더욱 더 존재가 커진 존재가 되었다.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유키코는 1986년 3월부터 적어도 1년 동안 재수를 하며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으로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고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찍 가수에서 탤런트로 전향할 생각까지 있었다고(...) 그리고 탤런트로 전향한 후에는 일을 조금씩만 하고 싶다 라는 의견을 선 뮤직 프로덕션에 전달하였지만 이러한 유키코의 의견에 당황하며 지금 한창 잘나가는데 갑자기 그런 결정을 꺼낸 부분에 대해 유키코에 대한 상품성이 떨어질 우려로 급한 마음이었는지 드라마, 비디오, 음반 등 스케줄을 잇달아 많이 잡는 행보를 보이며 이를 통해 유키코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와 단지 상품으로만 취급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추후 국회에서 유키코의 수익을 30억엔이라고 밝혀졌으나 정작 유키코 본인은 살아생전 그러한 천문학적인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한달에 겨우 6만엔으로 생활하는 착취에 시달리고 (소속사 프로덕션은 다르지만 미나미노 요코는 이보다 훨씬 더 심한 한달 3만엔만 월급으로 받았다고 한다.) 결국, 소속사 사무소 선 뮤직 프로덕션 측이 이러한 행태에 유키코가 자살에 이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본 현지 팬들은 유키코의 자살의 유력한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다.[34]

3.2. 미디어에서의 취급[편집]


하필 유키코의 투신자살이 발생한 시기만 하더라도 황색언론(黃色言論) 또는 옐로 저널리즘이 일본 내에서 극에 달하던 시기였고 투신 현장을 지켜봤던 기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수습이 아닌 유키코의 시신 사진을 촬영하여 모자이크 처리 과정 없이 흑백으로 그대로 잡지에 싣고 아스팔트에 피와 뇌수[35]가 흥건한 광경을 적나라하게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행위 등의 비도덕적인 미디어의 보도 태도[36]는 대중들에게 매우 지탄을 받아왔다. 이 뿐만 아니라 흩어진 뇌수를 담아갔다거나 몰래 가져가 살점을 먹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도 들려왔다. 그리고 4월 9일 닛폰 테레비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고별식이 방송되었다.



오카다 유키코 고별식

아이돌 선배인 나카모리 아키나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의 심야 라이브 무대 영상[37]에 유키코의 유령이 찍혔다는 소문과 유키코의 시신 사진을 찍었던 사진기자가 얼마 뒤에 죽었다는 소문이 생겼다. 2002년 12월 1일, 우리나라에서도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진실 혹은 거짓'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방영하였으며 여기서는 '진실'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진짜로 믿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당연히 위의 이야기들은 거짓이다. 사진기자는 그 당시 죽지 않았으며, 유령의 경우 실제 영상을 확인해본 결과 뒤에 앉아있던 다른 출연가수[38]가 어둡게 비춰져 유령처럼 보인 것 뿐이다.[39] 한 마디로 저런 소문을 유키코가 듣는다면 당연히 저승에서 펄펄 뛸 소리라는 것.

유키코의 투신 사건과 더불어 일명 윳코 신드롬[40]이라는 베르테르 효과로 1986년 일본의 청소년 자살율이 급증하였고 일본 전역에 다시 한번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국 일본 정부 차원에서도 해당 사태를 심각하게 취급하며 결과적으로 유키코에 관련된 어떠한 것도 자제하고 금기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발매되지 못했던 싱글 꽃의 이미지도 서명 운동[41]에도 불구하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1999년이 되어서야 시판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수십년 동안 일본 방송계에서 오카다 유키코에 관한 언급은 터부시되고 있는 상태였다. 추억의 80년대 아이돌을 자주 다루는 일본 방송계에서 유키코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슷하게 갑작스럽게 삶을 마감했고 그 여파도 컸음에도 끝없이 재조명되었던 오자키 유타카, ZARD, hide 등과는 대조적인데, 유키코의 경우엔 자살 직후의 모습이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며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42], 상기한 베르테르 효과로 인한 영향 때문에 언급 자체를 자제하였지만 근년에 들어, 사건 현장에서 매년 이루어지고 있는 추모 행사를 취재하거나 과거 함께 활동했던 왕년의 아이돌들과 함께 추억을 회상하는 방송도 나오는 등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키코를 재조명하는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4. 음반 목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카다 유키코/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출연[편집]



5.1. 드라마[편집]


년도
방송사
제목
배역
방영 횟수
비고
1983년
파일:NHK 로고.svg
나고야 방송국
중학생 일기
(中学生日記)
엑스트라
-
데뷔 전
파일:테레비 도쿄 로고(1981-1985).png
양양 노래 스튜디오
(ヤンヤン歌うスタジオ)
-
5분 프레임 드라마
매치의 청춘 가사 아이(아웃로우) PART2
1984년
매치의 청춘 스크램블 PART1 - PART2
1985년
파일:NHK 로고.svg
사나다 태평기
(真田太平記)
조연
45부작
17화, 19화, 23화, 24화, 28화 출연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1957-1986).svg
카구야 공주 날아서 첫 경험!?
(かぐや姫・とんで初体験!?)
실즈 별의 소녀 밀 역
단발 드라마
월요일 드라마 랜드에서 방송된 단발 드라마
파일:TBS 테레비 로고(1961~1991).png
금지된 마리코
(禁じられたマリコ)
스기우라 마리코 역
12부작
연속 드라마 첫 주연 작품


5.2. 예능[편집]


년도
방송사
제목
비고
1983년
파일:테레비 도쿄 로고(1981-1985).png
양양 노래 스튜디오
(ヤンヤン歌うスタジオ)
86년까지 출연.
1984년
파일:닛폰 테레비 일문 로고(1953-2003).svg
까크라킨 대방송!!
(カックラキン大放送!!)
86년까지 출연.


5.3. 라디오[편집]


년도
방송사
제목
비고
1983년
파일:MBS 라디오 로고.svg
사토미・히토미・유키코의 뭔가 좋은 일이 없어.
(サトミ・ヒトミ・ユキコの何かいいことないか仔猫ちゃん)
1983년 10월 16일 - 1984년 3월 9일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파일:닛폰 테레비 로고 화이트.svg
Tobidase! Pop City
1983년 10월 16일 - 1984년 3월 25일
1984년
파일:라디오 닛케이 로고.svg
백만명의 영어
(百万人の英語)
1984년 2월 9일
파일:도카이 라디오 로고.png
나미코·유키코·코오사토의 두근두근 라디오
(奈美子・有希子・小緒里のドキドキラジオ)
1984년 4월 9일 - 1985년 10월 7일
1985년
파일:도카이 라디오 로고.png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파일:닛폰 테레비 로고 화이트.svg
오카다 유키코의 밤 놀이 나이트
(岡田有希子の夜遊びしナイト)
1985년 10월 13일 - 1985년 12월 29일
1986년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파일:닛폰 테레비 로고 화이트.svg
유키코·쇼코·마리 밤 놀이 나이트
(有希子・章子・麻里の夜遊びしナイト)
1986년 1월 5일 - 1986년 4월 6일


5.4. CM[편집]


기업명
브랜드
품목
cm송
비고
1984년
에자키 글리코
글리코
카페 젤리
ファースト・デイト
[43] 영상
도시바
PASOPIA
PASOPIA IQ MSX
Believe In You
[44] 영상
에자키 글리코
CECIL
초콜릿
-Dreaming Girl- 恋、はじめまして
[45] 영상
1985년
MOON STAR
벤처 트랜잠
VENTURE Σ
Fly Up! Angel
영상
도시바
LET'S CHAT
헤어케어 전자제품
二人だけのセレモニー
[46] 영상
일본우편
우체국
전자우편
오리지널
[47] 영상
도시바
퍼스널
퍼스널 TV U·30
二人だけのセレモニー
[48]
도시바
쓰쿠바 EXPO '85'
도시바관
오리지널
[49]
에자키 글리코
글리코
카페 젤리
Summer Beach
[50]
COW BRAND
러브쥬
샴푸 & 린스
오리지널
[51]
에자키 글리코
CECIL
초콜릿
Love Fair
[52]
COW BRAND
러브쥬
샴푸&린스
오리지널
[53]
에스에스 제약
에스텍 감기 시리즈
에스택 과립
오리지널
영상
OZaKi
칸코 학생복
칸코 여자 통학복
오리지널
영상
1986년
에스에스 제약
브론 시리즈
에스에스브론액
오리지널
영상
왕문사
HIGHTOP
참고서
오리지널
[54]
에자키 글리코
글리코
카페 젤리
오리지널
[55]
왕문사
중일시대
Photra 110
오리지널
[56]


5.5. 비디오[편집]


년도
제목
비고
1985년
Yukiko in SWISS

Memories of Switzerland



5.6. DVD[편집]


년도
제목
비고
2002년
Memories in Swiss
1985년에 발매한 두개의 스위스 비디오를 DVD로 재발매


5.7. 포스터[편집]


기관
비고
칸다 경찰서
(神田警察署)
연말 연시 방범 홍보
방위청
(防衛省)
자위관 모집 3등 육위의 여자 제복 차림으로 3대의 젊은 자위관 6명에게 안고 있는 도안[57]
소방청
(消防庁)
화재 예방 운동


5.8. 기타[편집]



5.8.1. 오카다 유키코 관련 도서[편집]


날짜
제목
출판사
1984년 4월 5일
실록 만화 오카다 유키코(아이돌 코믹스)
実録まんが岡田有希子(アイドルコミックス)
주식회사 학연
1985년 2월
눈동자는 비밀색 - 당신만이 이 생각 -
瞳はヒミツ色 -あなただけにこの想い-
주식회사 악어북
1985년 7월
나미코·유키코·코오사토의 두근두근 북 두근두근·라디오NYX보다 사랑을 담아
(奈美子・有希子・小緒里のドキドキブック「ドキドキ・ラジオ」NYXより愛をこめて)
왕문사


6. 수상[편집]


수상년도
시상식
수상 부문
수상 작품
1984년
일본 유선 대상
(日本有線大賞)
상반기 유선 신인상
(上半期 有線新人賞)
ファースト・デイト[58]
제3회 메갈로폴리스 가요제
(第3回メガロポリス歌謡祭)
최우수 신인상
(最優秀新人ダイアモンド賞)
リトル プリンセス[59]
제10회 일본 TV 음악제
(第10回日本テレビ音楽祭)
최우수 신인상
(最優秀新人賞)
ABC 영 가요 대상
(ABCヤング歌謡大賞)
84 신인 그랑프리
(84 新人グランプリ)
-Dreaming Girl- 恋、はじめまして[60]
제14회 긴자 음악 축제
(第14回銀座音楽祭)
그랑프리
(グランプリ)
제17회 신주쿠 음악제
(第17回新宿音楽祭)
금상
(金賞)
제11회 요코하마 음악제
(第11回横浜音楽祭)
신인 특별상
(新人特別賞)
제10회 당신이 선택하는 전일본 가요 음악제
(第10回あなたが選ぶ全日本歌謡音楽祭)
최우수 신인상
(最優秀新人賞)
제15회 일본 가요 대상
(第15回日本歌謡大賞)
우수 방송 음악 신인상
(優秀放送音楽新人賞)
일본 유선 대상 유선
(日本有線大賞)
유선 신인상
(有線新人賞)
전일본 유선 방송 대상
(全日本有線放送大賞)
신인상
(新人賞)
제11회 FNS 가요제
(第11回FNS歌謡祭)
최우수 신인상
(最優秀新人賞)
FM 도쿄 리스너스 그랑프리
(FM東京リスナーズグランプリ)
5월 월간 그랑프리
(5月期月間グランプリ)
제26회 일본 레코드 대상
(第26回日本レコード大賞)
최우수 신인상
(最優秀新人賞)
1985년
골든 애로우상
(ゴールデン・アロー賞)
음악 신인상
(音楽新人賞)
二人だけのセレモニー[61]
제4회 메갈로폴리스 가요제
(第4回メガロポリス歌謡祭)
팝스 부문상
(ポップス部門賞)
Summer Beach
제11회 일본 TV 음악제
(第11回日本テレビ音楽祭)
금의 비둘기상
(金の鳩賞)
哀しい予感[62]
제11회 당신이 선택하는 전일본 가요 음악제
(第11回あなたが選ぶ全日本歌謡音楽祭)
금상
(金賞)
Love Fair
제12회 FNS 가요제
(第12回FNS歌謡祭)
우수 가창 음악상
(優秀歌唱音楽賞)


7. 여담[편집]


  • 윳코 공식 팬클럽 명칭은 윳코 프렌즈.[63]

  • 유키코의 가족 구성원은 아버지, 어머니, 언니 '치카', 유키코 (카요)이렇게 4인 가족으로 1986년 유키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님 두 분 모두 돌아가셨고 현재는 언니 '사토 치카' 혼자만 생존하고 있다고 한다. 언니의 이름인 치카와 유키코(카요)의 이름을 보고 아버지께서 치카-카요 무슨 끝말잇기 같다고 웃으셨다고 한다.

  • 좋아하는 음식은 파스타, 타코야키, 오코노미야키, 아이스크림 등이며, 싫어하는 음식은 카레우동, 낫토라고 한다.[64]

  • 평소 시력이 양쪽 0.1 이하일 정도로 좋지 못해서 촬영 이외의 시간에는 테가 커다란 안경을 착용했다. 선배이자 같은 아이돌이였던 코이즈미 쿄코는 자서전에 "일 이외에는 언제나 우유병 밑뚜껑 같은 두터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렌즈를 통해 보이는 작아진 눈이 왠지 너무 귀여웠다."라는 말을 남겼고 친구였던 타나카 쿠미"안경은 마치 우유병 밑뚜껑 같은 모양. 안경을 쓸 땐 귀엽다고 할지 웃기다고 할지..."라고 회상하였다. 그럼에도 촬영 때는 콘텍트렌즈나 안경은 전혀 착용하지 않았다.[65]

  • 연예계 데뷔라는 목표를 위해 성적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교재와 문제집을 통째로 외우는 방법'을 소개하였는데 "카메라맨이 셔터를 누르듯 정신을 통일하여 1페이지 1페이지 진지하게 머릿속에 넣어가면 떠올릴 때 신기하게도 하나의 사진같이 머리에 되살아난다."라며 공부 방법을 얘기하였다.참 쉽죠? 또한 밤에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매일같이 빠짐없이 야식을 챙겨주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야식을 먹여 뚱뚱하게 만들면 오디션 결승에 떨어질 것이라 생각한 어머니의 계략(?)이었다고 한다.(...)

  •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였음에도 체형을 신경 쓰며 "좀 더 마르고 싶다. 가슴은 너무 발육해버렸으니까 좀 더 작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수영복 화보 촬영 때는 배가 나오는 걸 싫어해 하루에 한 끼 밖에 먹지 않았다.

  • 스타탄생 출연 이후 프로덕션에서의 스카우트 제의는 선 뮤직 프로덕션켄온[66]이 있었으며, 레코드 음반사로는 캐년 레코드[67]닛폰 TV계의 VAP에서 제의가 들어왔었다. 최종적으로 선 뮤직 프로덕션포니 캐년으로 정해지며 예명 오카다 유키코로 데뷔하게 되었다.

  • 연예사무소 선 뮤직 프로덕션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와 그의 자택에서 함께 합숙했던 선후배와 동료들은 유키코에 대해 "연예 활동도 물론이며 공부 또한 소홀히 하지 않고 시험 기간엔 거의 자지 않았다. 일하고 늦게 귀가한 날에도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과 잡다한 일을 하고나서 어느샌가 바닥 위에 자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연애에 대해선 남자와 사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동경하던 사람은 있었지만 사귀지는 않았다고 얘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한 타치 히로시는 정말로 좋아해서 TV에 나올 때마다 들떠 있거나 함께 대담한 것을 매우 기쁘게 얘기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키코가 사망 직전까지 고민하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었다고 한다.

  • 교우관계는 1984년(쇼와 59년) 데뷔 동기인 타나카 쿠미오기노메 요코[68] 가장 친했다. 그 이외에 키쿠치 모모코호리코시 고등학교의 동급생이었던 미나미노 요코, 이시노 요코, 나가야마 요코, 쿠와타 야스코, 혼다 미나코 등 동시기 같이 활동하던 동료들과도 사이가 좋았으며 당대 최고의 인기가도를 달리던 나카모리 아키나와도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스타 탄생! 출신인 것 뿐만 아니라 당시 오디션에서 자신의 곡 슬로우 모션을 부른 것 등, 이래저래 접점이 있어 아키나가 유키코를 귀엽게 보았다고. 여러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도 같이 출연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아키나의 싱글 ジプシー・クイーン 녹음 작업을 위해 이동 중 유키코의 급서 소식을 듣고 충격에 오열하며 레코딩 작업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키코의 추모 방송이나 장례식 당시에도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멍하니 있거나 울기만 하였다고.

  • 첫 번째 사진[69]에서는 좌측의 네 번째, 두 번째 사진[70]과 세 번째 사진[71]에서의 가운데가 유키코 본인이며 그녀가 속한 반에는 미나미노 요코, 혼다 미나코[72], 나가야마 요코[73], 이시노 요코, 타나카 쿠미 등 이미 아이돌로 데뷔한 학우들이 많았다. 유키코의 직속 선배인 마츠다 세이코와 데뷔 동기인 오기노메 요코와 직속 후배인 사카이 노리코도 유키코와 같은 고교 동문 출신이다.

  • 일기를 6개월에 한 번씩은 꼭 썼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일기 쓰는 걸 좋아했으며, 사후 책을 통해서 그녀의 일기가 공개되었다. 최초 인터뷰에 응했던 일, 오디션 프로그램에 합격통보가 온 이야기 등의 여러가지의 그녀의 생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바빴던 스케줄로 인해 1985년을 끝으로 더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다.

  • 1986년 5월 22일 동급생이자 소속사 선배인 쿠와타 야스코의 싱글 '콘크리트를 안아줘'는 발매 직전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사건의 영향으로, '라라바이를 안아줘'로 변경되었고 B면의 'JUST'가 A면으로 변경되어 발매되었다.

  • 90년대 J-POP을 평정했던 코무로 테츠야가 작곡가로서 처음 제작한 곡을 유키코에게 주었는데 1985년(쇼와 60년) 9월에 발매한 시월의 인어[74]의 수록곡인 'Sweet Planet'과 '水色プリンセス'이다.

  • 유명해지면 황색 잡지 프라이데이와 포커스와 플래시에 출연해보고 싶다고 했다.[75]

  • 일본 연예계에 족적을 남긴 1967년생들의 데뷔 시기보다 유키코는 더 빠른 편이였는데, 어린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그 끝도 더 빨랐다. 대부분의 동년생들이 나이가 들어 일본 연예계의 대선배가 되었음에도[76] 현재까지도 오카다 유키코라는 인물이 대중들에게 10대 소녀라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 생전 팬이라고 밝힌 연예인 중에서 같은 나고야 출신인 타치 히로시[77]는 드라마 '서부경찰'을 보고 관심이 생겼고 음악방송에서 실제로 만나고는 바로 팬이 되었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이 때문에 사인이 타치 히로시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루머가 생겼다.[78] 또한 같은 아이돌이였던 카와이 나오코의 공공연히 팬이라고 밝혔다. 중학생 시절 때부터 좋아했으며 포스터를 보고 중학교 2학년 때 직접 그린 카와이 나오코의 초상화를 방송에서 공개한 적이 있다.[79]

  • 계속 활동했다고 가정한다면 유키코 또한 1986년에서 1988년 사이에 내한 했을 것이다. 선뮤직 직속 선배였던 하야미 유도 1986년 문화 축전으로 내한하였고 1987년 토토즐 무대에서도 특별출연하였다. 마츠다 세이코 또한 조용필과 친분이 있어 내한공연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쟁사였던 본드 기획사는 같은 시기에 소녀대혼다 미나코를 86년, 88년 올림픽에 맞춰 한국 공연을 추진하여 성사시켰기 때문에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선뮤직도 아마 유키코를 내한 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 정보잡지 쇼와 40년남에서 2022년에 꽃의 82년조 데뷔 40주년을 기념해 동년 12월 9일부터 2023년 1월 8일까지 80년대 아이돌 총선거를 진행하였는데, 여성 아이돌 부문에서 유키코가 10위를 차지해 당당히 TOP 10에 이름을 올렸다.# 다른 아이돌에 비해 활동한 기간이 2년 남짓으로 매우 짧은데도 마츠모토 이요하야미 유, 혼다 미나코, 쿠도 시즈카, 오기노메 요코, 하라다 토모요 등 동시기 내지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다른 쟁쟁한 아이돌들을 제치고 10위를 기록했다. 또한 특이하게도 유키코가 아이돌로 활동했던 시기의 사람들인 50대, 60대보다 10대, 20대, 30대에서 더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 2023년 8월 23일 포니캐넌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공식 유튜브 채널이 개설되었다. 6 오카다 유키코의 뮤비를 고화질로 감상할 수 있다.#

  • 2024년 1월 29일, 포니캐넌의 공식 뉴스에 의하면 오카다 유키코의 데뷔 40주년을 기념하여 데뷔일 전날인 4월 20일 Summer Beach 아날로그 레코드 (12인치)를 새롭게 발매한다고 한다. B면은 유키코의 최대 히트곡인 입술 Network가 수록되며, 본 레코드의 재킷은 AI 이미지를 활용하여 제작된다고 한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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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成満寺[2] 1983년 5월 15일 선 뮤직과 정식 계약하며 오카다 유키코라는 이름으로 이 날 잡지'POPEYE'에 첫 등장하였다.[3] 일본의 정통파 아이돌의 전성기는 유키코 이후로 끊겼기 때문에 정통파 아이돌 출신이였던 유키코가 죽지 않았고 오랜기간 활동했더라면 훨씬 많은 명곡들을 남겼을 것이며, 그에 따라 유키코의 영향을 받은 후배 아이돌 또한 많이 생겨나며 전성기가 길어졌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4] 활동 기간은 717일로 다소 짧은 기간이며 현재는 사후의 시간이 오래 지난 아이돌임에도 불구하고 변치않고 지금까지 응원하는 당시의 팬 세대와 오늘날 인터넷 매체를 통해 새롭게 생겨난 팬 세대까지 존재할 만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5] 추후 데뷔 이후에도 그림 그리는 모습을 자주 보였으며, 자신이 직접 거울을 보면서 자화상에 자신이 입고 싶어하는 의상을 그려 싶다는 더 베스트 텐에서 방송이 송출된 적이 있다.[6] 당시 초등학교 졸업 작품에서 밝혀지길 장래희망이 성우였다고 하는데, 이 때부터 아마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관심에 갖게 된 것은 아닌가...[7] 이는 데뷔 후에 방송에서 공개되었다.[8] 데뷔 전에는 예명이 아닌 '사토 카요'라는 본명을 사용하였다.[9] 모리 마사코를 시작으로, 사쿠라다 준코야마구치 모모에이와사키 히로미핑크레이디코이즈미 쿄코나카모리 아키나도 이 프로그램 출신이다. 유키코가 이 프로그램 최후의 후반기 합격자이자 우승자였고, 이후 스타 탄생!은 종영된다.[10]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에서 높은 학군의 학교였다. 그러나 한 학기만 다니고 연예 활동을 위해 도쿄로 상경해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전학했다.[11]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으며 할아버지가 교사라고 한다.[12] 성명으로 그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일[13] 마츠다 세이코를 비롯하여 하야미 유, 타무라 에리코 등 선뮤직 소속된 사람을 포함하여 50명 이상에게 예명을 붙여준 인물로 유명하다.[14] 당시의 일화로 가족과 감동적인 이별을 할 것 같았지만, 짐 옮기는 것을 도와줬던 언니 치카가 내리기 전에 신칸센이 출발해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엄청난 첫날이 되었다고.[15] 카페젤리[16] 리틀 프린세스[17] 유키코의 어머니와 언니가 함께 등장한다.[18] 예를 들어 마츠다 세이코는 '붉은 스위트 피'로, 기존 세이코짱 컷에서 숏컷 헤어스타일로 바꾸게 되며 난리가 났었지만, 그것을 계기로 '부릿코' 노선에서 벗어나 여성 팬들이 생겨났고 코이즈미 쿄코의 경우에도 당시 사무소에 말하지 않고 멋대로 머리를 자른 뒤 발매한 5번째 싱글 '새빨간 여자아이'의 이미지와 어울려 성공하였다.[19] 대중에 모습을 비치지 않을 때에는 높은 도수의 안경을 착용하고 생활하였다고 한다.[20] 당시 くちびる Network의 가사의 내용에 대해 세이코는 너무 야하다라고 생각했지만 유키코가 부르자 귀엽고 윤기 있는 곡이 되었다고 언급했다.[21] 파일:사카모토 류이치, 마츠다 세이코, 오카다 유키코.jpg[22] 영상 초반에 유키코가 드라마 '가출소녀'와 신곡 '꽃의 이미지'를 기대해달라고 언급한다.[23] 禁じられたマリコ[24] 家出少女[링크] https://www.bilibili.com/video/BV18T4y1G74u/[25] 쟈니스 사무소 소속으로 1982년부터 1988년까지 활동한 남자아이돌 그룹.[26] 연예인 조문·헌화자 아카시야 산마/아사노 유코/아카자 미요코/이시바시 다카아키/이시카와 사유리/이키 히로시/이시카와 히토미/이시카와 히데미/이시노 마코/이시노 요코/이쿠타 토모코/이노우에 준/이와사키 요시미/이모리 미유키/이와이 토모미/에드 야마구치/오기노메 요코/오하시 준코/오자키 아미/카와이 나오코/카와이 카즈미/카와미 미유키/카시부치 테츠로/키타지마 사부로/요시카와 코지/키나시 노리타케/키무라 이치하치/키쿠치 모모코/키치 요코/쿠메 히로시/쿠로야나기 테츠코/쿠라자와 아츠미/쿠와타 야스코/코이즈미 쿄코/콘도 마사히코/코무로 테츠야/코니시 히로유키/이마노 리에/더 드리프터스/사이조 히데키/사카모토 류이치/사카이 노리코/사카이 마사아키/사카키바라 이쿠에/사쿠라다 준코/사와구치 야스코/시부가키대[25]/시마다 신스케/칸노 미카/시미즈 구니아키/세키구치 히로시/치 마사오/타케우치 마리야/타치 히로시/다이가와 요스케/다하라 토시히코/타나카 쿠미/다카베 토모코/타카미 치카/타키 사토미/체커즈/도미츠 카즈오/나오에 기이치/나카오 아키라/나카모리 아키나/나카야마 미호/나카하라 에/나가야마 요코/나가세 마사토시/니누마 겐지/니시무라 토모미/노구치 고로/노자와 나오코/하야미 유/하시모토 미카코/히로오카 슌/비트 다케시/후지무라 슌지/후루타 치로/호리우치 타카오/호리 치에미/혼다 미나코/마츠다 세이코/마츠모토 노리코/마츠모토 유리/마키무라 미에코/미나미노 요코/미카미 히로시/미즈타니 마리/미네기시 토오루/미카츠 하루미/모리타 겐사쿠/모리 마사코/야시로 아키/야마모토 조지/야마모토 유카리/요시무라 마리/요시 이쿠조/류레이타/와다 아키코[27] 1939년생으로 배우로 활동하다 1961년, 향년 21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요절하였다.[28] 여담으로 유키코가 출연할 TV아사히 드라마 '가출소녀(家出少女)'에서 맡았던 배역은 추후 와타나베 노리코라는 배우로 교체되어 촬영되었고 같은 해 8월 4일 방영되었다고 한다.[29] 1986년 5월 14일 발매될 예정이었던 9집 싱글 꽃의 이미지도 처음에는 발매가 반대되었다고 한다. 그 후 13년 뒤인 1999년 3월 17일에 그녀의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어 발매되었다. 이것도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팬들은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30] 오랜 시간이 지나며 현재는 절판되었으나 일본 아마존닷컴 등지에서는 중고로 구할 수 있다. 유키코의 팬이라면 한 번 사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31] 메이테츠 비사이선 사야역에서 가깝다.[32] 유키코가 활동할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경우 한정.[33] 일부는 천수를 누리고 병이나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34] 실제로 유키코가 데뷔 이후로 방송과 음반 비디오 등에 출연한 것을 보면 실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정을 소화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죽음의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건 없지만 사실에 입각해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유키코는 1984년 4월 21일에 가수로 데뷔해 1986년 4월 8일 죽기 직전까지, 고작 2년 밖에 안 되는 사이에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던 77곡의 노래를 발표했고 한달에 한번 쉴 정도로 매우 바쁜 왕성한 활동을 했었다. 물론 동시대 아이돌 대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많이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금지된 마리코 이외에 별 대사는 없었던 단역으로도 출연까지 하며 연기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 자살 원인에 대해서 실연이 원인이라는 등 다양한 말들이 떠돌지만 메모에는 실연을 줬다는 상대방의 이름은 실제로 없고 단지 소문에 불과하다. 아마도 유키코가 동경했던 연예계의 세상은 유키코 자신의 생각과는 달랐기 때문에 몹시 힘들어했던 것으로 자살한 것이 중론이다. 또한 유키코의 노트에서 발견된 '언제나 아이돌이고 싶다.'는 메모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35] 뇌척수액[36] 전술했지만 특종에 매달려 시신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기자의 자질은 둘째 치고 고인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추태를 그대로 보여줬다. 또한 경찰과 병원으로 연락을 취했던 사람은 주변의 기자나 행인이 아닌 그 상황을 나중에 목격한 유키코의 매니저가 했을 지경.[37] 1986년 5월 28일[38]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가요 프로그램인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는 원래 출연자가 무대 뒤쪽에 나란히 앉아있다.[39] 물론 어디까지나 그 당시의 흉흉했던 일본 사회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지만.[40] ユッコ・シンドローム[41] 팬덤인 유키코프렌즈를 중심으로 벌어졌었고 꽃의 이미지가 해금되기까지 연예사무소 선뮤직의 공헌도 있었겠지만 절친이였던 오기노메 요코의 공헌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42] 게다가 이 셋의 죽음이 갑작스럽긴 하였으나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은 아니었다. 생전 오랜 기간 활동하며 일본 가요계에 미친 영향 또한 활동기간이 짧았던 유키코와 비교하면 훨씬 컸던 점도 크다.[43] 파일:グリコカフェゼリー 恋する乙女編.jpg[44] 파일:東芝MSXパソコン パソピアIQ.jpg[45] 파일:グリコ セシルチョコレート.jpg[46] 파일:東芝 Lets Chat.jpg[47] 파일:郵便局 電子郵便.jpg[48] 파일:東芝パーソナルTV U・30.jpg[49] 파일:つくばEXPO85 東芝館.jpg[50] 파일:グリコ カフェゼリー.jpg[51] 파일:牛乳石鹸 ラブジュ シャンプー&リンス.jpg[52] 파일:グリコ セシルチョコレート(花少女編).jpg[53] 파일:牛乳石鹸 ラブジュシャンプー&リンス.jpg[54] 파일:旺文社 ハイトップ.jpg[55] 파일:グリコカフェゼリー(カラオケに熱中するカバ編?).jpg[56] 파일:旺文社 中一時代.jpg[57] 파일:岡田 有希子 防衛省.jpg[58] 퍼스트 데이트[59] 리틀 프린세스[60] -Dreaming Girl-사랑,처음 뵙겠습니다[61] 둘만의 세레모니[62] 슬픈 예감[63] 윳코(유키코 별명) + 프렌즈(친구) ユッコフレンズ[64] 더 베스트 텐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내용이다.[65] 안경을 쓰지 않으면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아 인사를 하지 못해 건방진 사람으로 오해받는 게 싫었다고 한다.[66] 나카모리 아키나가 소속되어 있었다.[67] 현 포니 캐년[68] 음악 방송에서도 친한 동기로 언급하기도 하였고 사후 34년이 지났음에도 유키코 묘소에 찾아간다고 한다.[69] 파일:오카다 유키코 졸업사진 1.jpg[70] 파일:오카다 유키코 졸업사진 2.jpg[71] 파일:오카다 유키코 졸업사진 3.jpg[72] 1967~2005. 맨 오른쪽 위의 사진의 인물이다. 2004년(헤이세이 16년)에 이름 뒤에 고의로 온점을 붙였다.[73] 아이돌 시절에는 비너스 등을 번안하여 히트를 쳤으나 대박을 내지는 못 했다. 이후 1993년(헤이세이 5년)에 엔카 가수로 전향하면서 다수의 히트를 내면서 NHK 홍백가합전에도 연속 출전하는 중견 여가수가 되었다.[74] 十月の人魚[75] 1986년(쇼와 61년) 4월에 출연하였지만 물론 출연의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애초에 프라이데이와 포커스와 플래시와 같은 황색 잡지에 유명인이 좋은 일로 출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76] 물론 유키코 또한 후세대 아이돌들에게는 똑같은 대선배격 존재이지만, 단지 오래 전 고인이 된 탓에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아이돌들과 친분을 쌓지도, 그들에게 선배 아이돌로서 가르침을 전하지도 못했을 뿐이다.[77] 舘ひろし[78] 아이러니하게도 타치 히로시는 1983년(쇼와 58년), 즉 유키코의 데뷔 싱글이 나오기 1년 전에 이시하라 군단의 멤버로 들어갔다.[79] 유키코의 어머니가 쓰신 자서전에 있는 그녀의 일기장에 의하면 무대가 끝나고 내려와 카와이 나오코에게 인사를 했는데 웃으면서 받아줬으며,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힘내."라고 말해줘서 유키코의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며 설레였다는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