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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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岡田有希子自殺事件

발생일
1986년 4월 8일 오후 12시 15분경
발생 위치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요츠야4초메 28-17, 선 뮤직 프로덕션[1]
(東京都新宿区四谷4丁目28-1, サンミュージックプロダクション)

유형
투신자살
원인
미제사건
인명피해
사망
1명
1. 개요
2. 정황
2.1. 사건 직전의 상황
2.2. 사건 발생
2.3. 사건 직후
2.3.1. 공황 윳코 신드롬
3. 죽음의 이유를 둘러싼 많은 설



1. 개요[편집]


1986년(쇼와 61년) 4월 8일 일본 쇼와 시대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이었던 오카다 유키코가 만 18세에 투신자살미제사건.

지금까지도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밝혀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2] 이후 이 사건을 모방하는 자살 사건이 빈번해져서 일본 언론사는 오카다 유키코의 애칭인 윳코를 붙여 "윳코 신드롬"(ユッコ・シンドロー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후쿠다 전무: 그때 저와 3명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전화가 와서 제가 전화를 받고 한 명이 사라졌습니다. 그 때 티슈를 찾다가 사라져서 찾다가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슬리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라가보니까 뛰어내리는 걸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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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직후의 영상으로 거적이 덮힌 유키코의 사체와 핏자국이 버젓이 나온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은 황색언론이 극에 다다라 특종을 위해서라면 취재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자극적인 보도를 하기 위해 안달났기 때문에[3] 방송 리포터인 나시모토 마사루(梨元勝, 1944~2010)[4][5]가 무리하게 취재한 작태는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인 사이에서 비판을 받는다.[6]

2. 정황[편집]



2.1. 사건 직전의 상황[편집]




1986년(쇼와 61년) 4월 4일에 출연한 'スターどっきりインタビュー(스타 깜짝 인터뷰)'[7]

유키코: 에? 보통이에요. (손을 둥그렇게 말면서)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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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유키코는 사망 나흘 전인 1986년 4월 4일 소속사 선배인 하야미 유, 남성 아이돌 시부가키대와 함께 'スターどっきりインタビュー(스타 깜짝 인터뷰)'라는 일반 어린이들이 스타들에게 질문을 하는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했다. 당시 활동하던 노래 입술 Network를 부르는데 눈에 힘이 없고 다크 서클이 보이며 마지막 부분에 유키코의 사망을 추모하는 자막이 송출되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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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쇼와 61년) 4월 5일에 사카이 노리코에게 선물로 준 사인 포스터.

유키코는 4월 12일에 열릴 단독 콘서트를 위해 매일 선 뮤직 프로덕션에서 새벽 3시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9]#

사망 사흘 전인 4월 5일 인기가도를 달리던 유키코는 소속사의 동료 아이돌들과 합숙하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相澤 秀禎)의 자택을 떠나 미나토구 미나미 아오야마에 있는 맨션으로 자취를 시작하기 위해 사장의 자택에서 이삿짐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3일 후 사망 당일엔 유키코가 살던 방에는 곧 데뷔를 앞둔 사카이 노리코[10]가 들어올 예정이었다. 이 날 아이자와 사장은 오카다 유키코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유키코가 저는 이제 틀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신인들이 잔뜩 나와서...라는 말을 했고 이에 아이자와 사장은 무슨 소리냐. 너는 우리 회사의 기둥이니 힘을 내!라고 격려하였는데 이에 유키코는 위에 있잖아요... 또 한 명(사카이 노리코)이...라고 말했다. 그때의 사카이 노리코는 예명도 아직 없었던 무명의 여중생이었지만 이 날 짐을 정리하면서 나온 본인의 포스터를 후배인 사카이 노리코에게 사인을 적어 선물로 주었다.[11]

사망 이틀 전인 4월 6일에는 고향 나고야에 돌아가 콘서트를 열었고 콘서트장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본가에 들러 가족들과 오랜만에 재회하였다. 본가에서 가족과 모여 식사를 하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언니의 성인식 사진을 보았는데 유키코는 묘하게도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평소의 유키코였다면 "왜 나만 없는 거야? 힝!"이라며 가볍게 장난 섞인 짜증을 내고 자신의 무대 비디오를 보면서 그것에 대해 웃으면서 이야기했겠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사진을 보며 장난 섞인 짜증도 내지 않고 자신의 무대 비디오도 보지 않으며 아무 미소도 짓지 않아서 왠지 모를 낯섦이 느껴졌다고 유키코 사후에 어머니가 이야기했다.[출처]

당일 저녁 오후 8시 53분 부모의 차를 타고 나고야역에 도착해 도쿄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는데 그것이 어머니가 본 딸 '사토 카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때 유키코는 부모에게 "아빠나 엄마가 혼자 도쿄로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지만 역시 아빠나 엄마가 도쿄로 오시는 게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라는 묘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당시 유키코는 데뷔 3년째에 이미 수익 30억 엔을 올리는 톱 아이돌이었는데[12] 고향에 살던 부모더러 도쿄로 오라고 말한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일 심야 도쿄로 돌아간 유키코는 매주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의 마지막 화 녹음을 마쳤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방송 스케줄이었다. 이 방송에서는 향후 스케줄 보고 같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1986년(쇼와 61년) 4월 6일에 녹음한 레귤러 라디오 방송 '夜遊びしナイト!'의 마지막 방송.[13]

사망 하루 전날인 4월 7일은 오후 시부야 판테온에서 열린 '록키 4' 시사회 참석 이외에는 빽빽히 들어찬 스케줄이 없는 드문 날이었다. 이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자택으로 돌아온 유키코는 가스 자살을 시도하기에 앞서 연습 비슷한 행동을 하였는데 가스 냄새가 유출되어 맨션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금방 잠잠해졌다. 오후 10시에 미조구치 매니저가 유키코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8일) 예정되었던 새 드라마의 촬영이 하루 연기되었다고 알리자 유키코는 "어머, 아쉽네?"라고 말했으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밝았다고 한다. 이후 아이돌 동료였던 이시노 마코가 오후 11시 반에 유키코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4번 정도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아 끊었다고 진술했다.


2.2. 사건 발생[편집]


4월 8일 정오를 넘긴 12시 20분에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되었다.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가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숨졌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사고도 아니고 사람의 통행량이 많은 대낮 신주쿠구 요츠야에 있는 자신도 소속된 선 뮤직 프로덕션 건물 7층에서 20m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했을 당시 건물 1층에는 도시락 가게가 있었는데 점심 무렵이라 사람들로 가득했다. 더구나 가스 중독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고 사망 당일 오전에 보도되어 기자 무리들도 그 앞에서 진을 쳤기 때문에 유키코의 투신자살 현장을 눈 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 목격자들이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엇인가가 사람인 줄 모르고 검은 쓰레기라고 생각했으나 눈 앞에 있는 것이 투신자살한 시체임을 깨닫고 구토하였으며 특종을 위해 잠복해 있던 한 기자는 유키코의 사진을 얻어갔다.

유키코가 투신한 직후에는 사람들이 신원을 식별하지 못해 '오카다 유키코의 매니저가 투신한 건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카다 본인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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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사망 하루 전인 1986년(쇼와 61년) 4월 7일 시부야구 판테온에서의 스케줄로 찍힌 모습.
사망 당시의 복장은 사진 속 복장 그대로였다고 한다.


다음의 내용은 유키코가 죽기 직전의 상황이다. 충격적인 사진은 없지만 글의 내용 때문에 열람 시 주의 틀을 달았으니 유의.
[ 펼치기 · 접기 ] 열람 시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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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8일 오전 9시, 도쿄 미나토구의 미나미 아오야마 로터리 맨션. 6층의 거주자가 짙은 가스의 냄새를 맡았다. 통보를 받은 관리인은 가스의 누출이 어디인지 한 채씩 찾아다녔고 402호실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지만 반응이 없고 다급해진 관리인은 보조키로 문을 열었다. 이 방의 거주자는 사토 카요(오카다 유키코의 본명). 차주는 선 뮤직 프로덕션. 보통 맨션이었고 출입도 자유롭지만 떠오르는 아이돌 스타였던 그녀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관리인 외에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관리인은 체인락 때문에 더 이상 열지 못하고 "사토 씨 괜찮습니까?" 라고 여러 번 외쳤지만 반응은 없었다.

오전 10시 9분. 관리인의 연락을 받은 경시청이 아카사카 소방대원을 대동한 채 출동하고 소방대원이 체인락을 절단한 후에야 현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실내에는 강한 가스 냄새가 진동했고 한가운데 한 명의 소녀가 왼손에서 피를 흘린 채 울고 있었다.[1] 왼손에는 커터 칼로 자른 듯한 5cm 자상이 두 개나 있었고 주변엔 그녀가 흘린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에 급히 호송된 오카다. 곧바로 왼손의 상처를 봉합수술로 치료하고 신경안정제를 투여했다. 의외로 침착한 그녀의 반응에 의사는 곧바로 퇴원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당시 휴가를 얻었던 오카다의 매니저 미조구치는 회사의 사장인 아이자와와 또 다른 매니저 야마구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두 사람은 11시가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해서 오카다와 대면했지만 그녀는 자살 이유에 대해선 함구한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사무실에 있던 소속사의 후쿠다 전무는 아이자와 사장에게 "유키코가 큰일이다. 키타아오야마 병원에 빨리 데리러 가달라."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 병실 커텐 안에서 손목에 붕대를 감싸고 울고 있던 유키코와 대면했다. 엉엉 울고 있기보다는 조용히 훌쩍훌쩍 울고 있는 느낌으로. 다행히도 깊은 상처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사에게 입원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은 후쿠다 전무는 유키코를 데리고 나와 택시에 올랐다.

"어디로 가고 싶니? 나고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까? 자택 맨션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사무소로 갈까?"라고 묻자 유키코는 "사무소가 좋아요."라고 대답하여 사무소가 위치한 신주쿠의 요츠야로 향했다. 소속사 건물 6층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오카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그녀의 표정에 무언가를 눈치 챈 후쿠다 전무는 매니저인 야마구치와 사장 비서에게 철통 같은 감시를 지시하고 여기서 오카다의 2차 자살 시도가 무위로 끝나는 듯했다.

"딸기 주스가 마시고 싶어요." 오카다의 부탁에 후쿠다가 사장 비서에게 이를 부탁하고 감시인은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서 갑자기 전화를 해온 사장. 이미 자살 미수가 기자들의 귀에 들어간 상황에서 향후 대처를 의논하기 위해 후쿠다는 오카다의 옆을 떠나며 야마자키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둘만 남게 된 오카다와 야마자키. 순간 생수를 엎지른 오카다.

"가만 있어. 내가 티슈를 찾을 테니."

야마자키가 티슈를 찾는 일순간의 틈에 오카다 유키코가 없어진다.

"유키코가 없어졌습니다."

패닉에 빠진 야마자키가 옆방에서 사장과 전화 통화를 하던 후쿠다 전무에게 달려가 외쳤고 다급해진 두 사람은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았다. 바로 그때 휴가 중이던 오카다 유키코의 전담 매니저 미조구치가 택시를 타고 선뮤직 사옥에 도착했다. 12시 6분.

택시에서 내려 사옥으로 들어가려던 미조구치의 눈에 갑자기 검은 물체가 쿵 하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직감으로 오카다 유키코가 떨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다가갔지만 사람으로 생각되는 물체는 이미 머리통이 터져 하얀 뇌수가 사방에 흔재해 식별할 수 없었다. 다만 언제나 그녀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만이 그 물체가 오카다 유키코였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그녀가 자살한 선뮤직 사옥은 요츠야 4가의 교차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오카다가 먹고 싶다던 스트로베리 주스를 배달하기 위해 온 웨이트리스는 사체를 보고 기겁해 구토했다.

"유키코, 유키코!" 눈물을 쏟아내는 미조구치.

매니저로서 그녀의 참담한 사체만은 매스컴에 노출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미조구치는 회사에 올라가 모포를 가져와서 조각나고 터진 머리와 뇌수를 주워 담으며 사체를 수습했다.[2] (이하 생략...)


2.3. 사건 직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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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쇼와 61년) 4월 8일에 사망 당시 신주쿠 요츠야의 현장 전경.

시신이 수습된 직후 보도를 듣고 전국에서 몰려온 팬 수백 명은 사건 현장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모여 묵념하듯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으나 이윽고 그 장소는 젊은 청년들이 울부짖는 현장으로 변했다. 그들이 가져온 꽃다발이 쌓이고 쌓여 2미터에 이르렀다. 황색언론 잡지인 프라이데이와 포커스는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적나라한 시신의 사진을 무삭제로 잡지에 실었다.

자살이 확실한 상황이라 검증만 했을 뿐 부검은 진행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고향인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부모가 올라와 요츠야서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날 모든 방송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 방송이 밤까지 이어졌으나 단 한 곳 테레비 아사히의 간판 뉴스 채널 '뉴스 스테이션'에서는 아나운서 쿠메 히로시가 "연쇄 반응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자살 관련 보도를 절제하였습니다."라는 멘트를 하고 사건 보도를 일절 하지 않았다.[14]

사건 직후 연예계에서는 오카다가 첫 정규 출연을 했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사회자가 오카다의 인물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추모 방송을 내보냈으며 그녀를 귀여워했던 선배 가수 콘도 마사히코나카모리 아키나가 출연해 눈물을 보였다. 4월 10일 음악 방송 '더 베스트텐'에서는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시청자를 향해 "유키코 씨의 밝은 미소가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키코 씨, 정말 감사했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고 음악 버라이어티 '가요 깜짝카메라 대방송'은 그녀가 생전 마지막으로 녹화를 마친 방송이었기 때문에 추모하는 자막을 띄워 보냈다. 이 사건은 동년 2월 발생한 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과 맞물려 청소년 문제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일본 국회에서도 다룰 정도였다.

이후 유서가 일부 노출되면서 "제 멋대로인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 밝혀졌고 유서 속에서 언급된 듯한 배우 미네기시 토루(峰岸 徹)[15]가 동일 밤 오후 10시 경 TBS 테레비의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심정은?

"솔직히, 엄청난 충격입니다."

-어떤 교제였었나?

"같이 일하며 여러 가지로 귀여워했었고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귀여워한 존재였습니다."

-유서에 당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같이 일하고 밥을 먹거나 그녀를 배웅한 것뿐이라..."

-사랑의 파국 같은 것이 있었나?

"그녀는 의외로 섬세해서 밝은 면과 훅하고 깊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빠 같은 존재였지만 그녀에겐 동생이 아니라 플러스 마이너스 알파 같은 것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첫사랑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안 했나?

"나이도 다르고 그런 교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호의를 드러내지 않게 주의하던 정도였습니다. 정말 저에 대한 일로 자살했는지 어떤지는 의문입니다."

-좋아한다고 고백받았습니까?

"없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추상적으로라도 저는 뭐라고 할 수 없네요."

-어떻게 했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는지?

"그녀에겐 로맨틱한 면이 있었으니 발라드 시라도 써주었다면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책임은 느낍니다. 비난은 받을 생각이니 제 딸이 크면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시켜주고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사망한 지 이틀이 지난 4월 10일 나카노의 사찰 호센지(宝仙寺)에서 회사장을 치뤘다. 친구이자 동세대 아이돌인 오기노메 요코, 미나미노 요코와 데뷔곡을 시작으로 많은 곡의 작사를 해 준 다케우치 마리야, 소속사 선배인 사쿠라다 준코, 쿠로야나기 테츠코, 타치 히로시 등 많은 연예계 관계자들이 찾아왔고 그녀의 죽음에 그녀와 함께 작업했던 선배 가수 마츠다 세이코, 재일 한국인 작곡가 강진화, 유키코에게 준 곡이 작곡가로서는 첫 작업이었던 코무로 테츠야, 수록곡을 함께 작업한 사카모토 류이치 외의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유골은 유키코의 고향 나고야시에 가까운 아이사이시의 사찰 조만지(成満寺)에 봉안되었다. 법명[16]은 侑楽院釈尼佳朋(유교인샤쿠니카호)로 유키코의 '유'와 '음악'의 '악', 본명인 카요의 한자 '佳'를 따서 지었는데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던 아이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986년 5월 발매된 잡지 '위클리 세븐'에 실린 오카다 유키코의 영결식에서 취재한 연예계 동료들의 코멘트와 모습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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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기시 토루: 오늘은 향을 피우러 온 것 뿐입니다.

타치 히로시[17]

: 착하고 총명한 여자 아이였다.

킷카와 코지(吉川晃司): 신인상을 받을 때 함께였어서 도저히 남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음악) 장르가 달라 많이 만날 순 없었지만 동기였고 신경쓰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시부가키대의 후카와 토시카즈: 사망 4일 전에도 테레비 아사히 방송[18]

에서 함께여서 언제나와 같이 밝게 인사했었는데. 하지만 신인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연약해 보이는 여자애라 괜찮은 걸까 하고 걱정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울고 있을 때도 있었고...

시부가키대의 야쿠마루 히로히데: 유키코는 혼자서 우울해지는 타입. 나랑 닮았다고 생각해서 자주 얘기를 걸곤 했다. 굉장히 머리가 좋은 애라 더욱이 혼자서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게 좋지 않았던 걸 수도. 여러 가지 상담에도 응했었지만 그게 어떤 내용인지는 말할 수 없다. "너무 고민하지 마"라고 얘기했었는데... 죽을 거라면 그냥 연예계를 그만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타하라 토시히코: 같은 포니캐년 소속이었기 때문에, 함께 일할 기회도 많았었는데...작년에 추락한 JAL에 같이 타고 갈 예정이었는데 직전에 변경되어서 "아, 안 타서 다행이다. 럭키" 같은 얘기를 나눴었는데. (중략) 반 년 정도 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모습은 있었다. 하지만 상담 같은 건 없었고 무엇에 고민했는지도 모른다. 가볍게 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너무 순수했던 걸까.

나카모리 아키나: (향을 피우며 계속 울고 있었다.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오기노메 요코[19]

: (충격으로 얼굴이 파래진 채 교복을 입은 채로 뛰어왔다.)



2.3.1. 공황 윳코 신드롬[편집]


이 사건은 어느 연예인의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베에 사는 16살 소녀가 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자살 직후 일주일 만에 소녀 7명이 "오카다 유키코가 되고 싶다."는 유서를 남긴 후 투신자살했고 같은 해 5월 5일에는 21세 재수생이 선 뮤직 프로덕션 건물 옥상의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그 장소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하여 또 한 번 충격을 주었다.

자살을 기도한 청소년의 수는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4월 한 달에만 전년의 2배 이상인 114명이었고 1986년 한 해에만 799명이 자살하는 등 전년 대비 자살률 증가 44%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를 일컬어 '공황 오카다 유키코 현상(윳코 신드롬)'이라고 불렸다. 이 문제는 연예계 외에 정치권으로도 영향을 미쳐 가이후 도시키 문부대신이 야당의 추궁을 받고 "10대 가수의 실태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3. 죽음의 이유를 둘러싼 많은 설[편집]


유키코가 갑작스럽게 스스로 삶을 포기한 이유는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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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禁じられたマリコ)'의 포스터.

1985년 11월 초부터 1986년 1월 말에 걸쳐 TBS로 방영된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에서 유키코는 함께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루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는데 토루에게 거절당하자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유키코가 쓴 글 등을 모아 1988년 7월에 출판한 책 <사랑을 주세요(愛をください)>[20]에 이런 내용이 있다.

카요(윳코의 본명)의 유서 - 지금도 그것을 유서라고 해야 좋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그 중 미네기시 토오루씨의 이름은 확실히 쓰여져 있었습니다. 미네기시 씨를 좋아했다고.
(중략)
저는 그 후 두 번 다시 그 "유서"를 보지 못했습니다.

일부 노출된 유서에는 연필로 오카다 유키코가 직접 "미네기시 씨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다. 제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쓴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전술한 것처럼 미네기시 토오루가 사건 당일 밤에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루와는 드라마 촬영 후 돌아가는 방향이 같아서 바래다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사망 전날 오후 11시 반 이후부터 택시를 타고 미네기시 토루가 살던 세이죠의 자택 앞으로 찾아가 새벽 5시까지 혼자 기다렸다 돌아왔다는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후일 주간지에 미네기시가 "나의 인생에서 가장 귀찮은 사건이었다."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게재되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루는 당시 유키코와 나이차가 20살 이상이나 되는 어린 딸이 있는 이혼남이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투신자살 사건 발생 이후 기자회견에서도 유키코에 대해 "귀여운 동생 같은 느낌이나 이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마치 '형'(アニキ) 같은 느낌이었다."며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었다고 극구 부인했다.

미네기시 토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저 유키코에게 연예개 선배로서 후배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어린 유키코가 미네기시의 호의에 반해 연심을 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주세요>에 "미네기시 씨에 대한 일은 여성 주간지, TV 등에서 이래저래 퍼뜨려져서 그때마다 저는 미네기시 씨에게 죄송했고, 또 딱하다는 마음만이 들었습니다."라고 적어 놓은 것, 후쿠다 전무와 아이자와 사장이 밝힌 유서의 내용에서 남들이 생각하는 이상한 관계가 아니라 플라토닉한 짝사랑이었다는 증언을 보면 더더욱 확실해진다. 지금으로선 이 이유가 거의 확실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

인터넷이 발달한 후에는 이 사건에 배우 칸다 마사키가 개입되었다는 설도 퍼졌는데 칸다 마사키와 오카다 유키코는 연인 관계였고 유키코가 칸다의 아이를 임신까지 했는데 칸다 마사키와 마츠다 세이코가 결혼한단 발표가 나오자 충격에 빠져 자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카다 유키코가 둘의 약혼식에 소속사 후배로서 한껏 밝은 얼굴로 축하해 주는 영상이 남아 있기도 하고 임신으로 휴업 중이던 마츠다 세이코가 오카다 유키코를 위해 직접 작사와 데모 레코딩까지 해 준 '입술 Network'를 듣고 오카다가 감격했다는 레코딩 관계자의 증언도 있으므로 칸다가 관련되었다는 설은 어디까지나 찌라시가 써내린 자극적인 루머일 뿐이다. <사랑을 주세요>에서도 유키코의 어머니가 해당 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분노할 정도였다.[21] 유키코가 남긴 일기장과 유서를 가지고 있다는 선 뮤직 프로덕션의 아이자와 사장도 마츠다 세이코와 칸다 마사키 커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메세지를 전했다.

이외에도 원래 오카다 유키코가 좋아하던 대상은 배우 타치 히로시[22]라는 등 유키코가 성소수자였다는 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다.

자살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선 뮤직 프로덕션 소속사의 후쿠다 전무는 방송에서 첫 번째 자살 미수 때는 연심이나 기타 사적인 일 때문에 고민하던 것이 원인이었으나 두 번째 자살 시도는 자신의 자살 시도가 알려져서 사무소나 가족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심적 부담이 커진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였다. 후쿠다는 유키코가 사라졌을 때 무언가를 직감하여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다녔는데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 계단 위에서 유키코가 신고 있던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인 모습을 발견했다. 유키코는 생전 혼자서 고민을 끌어안는 성격이었고 자살하기 전부터는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할 때가 잦았다고 한다.

유키코가 자살한 원인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런 추측을 내놓기도 한다. 유키코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때묻지 않은 성격이었는데 일본 연예계의 추악한 일면을 알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의 꿈과 환상이 깨지는 바람에 연예계 자체에 환멸을 느껴 아이돌을 그만두려고 했지만 아이자와 사장은 유키코를 세이코처럼 톱 아이돌로 육성하고 싶었기 때문에 격렬하게 반대하여[23] 은퇴가 무산되자 절망해 투신자살을 택했다는 것이다.

다만 생전에 근면성실하고 굉장한 노력가인 유키코가 단순히 연예계에 실망했다거나 연애가 깨졌다는 문제 등으로 준에 대한 실망, 연애 문제 등으로 자살할 것 같지는 않다는 추측도 있다. 오히려 스케줄이 너무 과도하여 피로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이 발병했고[24] 예기치 않게 휴일이 생기자 우발적으로 자살 기도를 했다가 사건이 너무 커지자 가족들과 소속사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데게 큰 죄책감을 느껴서 자살을 했다는 추측이다.

유키코의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의 아이자와 히데요시 사장은 유키코가 생전에 쓴 일기와 분홍 종이에 쓰인 '유서'도 수중에 넣었다. 아이자와는 이를 두고 대중들을 상대로 계속 보여줄까 말까 밀당하였으나 결국 단 한 번도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키코의 유족들도 내용을 모른다고 한다.[25] 아이자와 사장은 끝까지 이 유서 내용을 세상에 밝히지 않았고 2013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였으므로 금고가 열리지 않는 한 유키코 자신이 설명한 자살 원인이 밝혀질 가능성은 이제 없다.

[1] 선 뮤직 프로덕션은 2009년 8월 요츠야산초메역 근처로 사무소를 이전했다.[2] 후술하겠지만 유키코 본인이 자살 직전까지 적은 일기장과 유서가 명확하게 존재하지만 유키코의 소속사는 유키코의 가족을 포함한 대중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즉,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물증이 있음에도 미제사건이 되어 버린 드문 사례다.[3] 28년 후인 2014년 대한민국의 세월호 참사 당시의 언론과 여러모로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4] 2010년 8월 21일 저택에서 65세의 나이로 폐암으로 사망했다. 1968년에 여성 전문잡지인 '영레이디'의 취재기자로 입사하여 연예보도를 맡은 이후 텔레비전의 리포터 쪽으로 영역을 넓혀서 당시에는 드문 연예전문 리포터로 폭넓은 활약을 했으며 경력만 해도 무려 40년에 달하는 그야말로 일본 연예계의 산 증인이었다.[5] 사망 5년 전인 2005년부터는 휴대폰 연예뉴스 사이트인 '나시모토 연예! 뒷 채널(梨元 芸能!裏チャンネル)'를 개설하여 유료 채널임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30만 명이나 되는 등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기도 했으며 TV를 거쳐 인터넷 사이트, 블로그, 트위터까지 연예뉴스로 새로운 미디어를 개척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돌연사로 세상을 떠났으니 일본 연예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6] 당시 일본에서는 유명인 관련 사건이나 일반 사건사고가 일어났다면 이 정도로 취재하는 게 일상이긴 했다.[7] 방송은 사건 이후에 방영되어 "이 방송은 4월 4일(금)에 녹화한 것입니다."라는 자막이 두차례 송출되었다.[8] 삼가 故 오카다 유키코 님의 명복을 빕니다.[9] 생전 당시 인터뷰에서는 "팬들과 같이 즐겁게 공연을 즐기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서 힘들지 않다."고는 했지만 역시 성장기에 새벽 3시까지 연습을 굴리는 소속사 관계자들이 봐도 유키코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10] 통칭 노리삐. 유키코와 같은 소속사인 선 뮤직 프로덕션의 소속으로 유키코의 직속 후배 아이돌이다.[11] 이후 그 포스터는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간직하고 있었다.[출처] 오카다 유키코 사후 책 <사랑을 주세요>[12] 수입의 액수는 사후 국회에서 열린 회의에서 다루었다.[13] 1986년 5월 14일 발매 예정이었다가 무산되어 13년 뒤인 1999년(헤이세이 11년) 3월 17일에야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어 발매된 꽃의 이미지라는 곡도 2분 55초부터 나온다.[14] 쿠메 히로시는 유키코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많이 나왔던 음악 프로그램인 더 베스트 텐의 MC였지만 이후 뉴스 스테이션의 MC를 맡기 위해 그만두었다. 당시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도 많이 있었다.[15] 1943년 07월 17일생으로, 유키코와는 24살 나이 차이로 거의 아빠와 딸 정도였다. 1977년에 결혼했으나 1983년에 이혼했고 딸이 있었다. 이후 2008년 폐암으로 사망했다.[16] 원래 법명은 승려로 출가하거나 수계해야 받는 것이지만 일본 불교에는 죽은 자는 모두 부처가 된다(성불)고 하여 장례식에서 승려가 망자에게 법명을 지어주는 관례가 있다.[17] 당시 인기 있었던 배우로, 유키코는 생전에 항상 그를 가장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이라고 대답했다. 이시하라 군단의 멤버 중 1명이며, 현재 이시하라 군단의 3거두(와타리 테츠야, 칸다 마사키, 타치 히로시) 중 1명이다.[18] 상단 영상 19초에 나온다. 해당 촬영이 유키코의 마지막 녹화였다.[19] 데뷔 동기이자 동시대 여자 아이돌로 현재도 활동 중.[20] 유키코가 생전에 쓴 글을 모았기 때문에 오카다 유키코 명의로 출판되었다.[21] 칸다가 연관되었다는 설은 유키코가 자살한 직후부터 퍼졌던 모양이다. 다만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옛날의 소문이 다시 퍼진 것이다.[22] 사건 당시 칸다 마사키와 같은 이시하라 군단의 멤버였다.[23] 당시 유키코는 제2의 마츠다 세이코라는 거대한 타이틀을 쥔 대형 신인이었다. 자살한 1986년에는 첫 번째로 발매된 싱글 <입술 네트워크(くちびるNetwork)>가 처음으로 오리콘에서 1위를 차지하여 안 그래도 가파르게 오르던 인기에 한창 박차를 가했다. 선배 아이돌 세이코나 아키나처럼 톱 아이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24] 오카다 유키코는 스케줄이 하도 빠듯하게 짜여서 하루에 3~4시간밖에 잠을 자질 못할 정도였다. 한참 인기를 얻을 무렵 "요즘은 하루에 20시간 정도는 일하고 있어요."라고 밝혔고 1985년 12월에는 과로로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25] 유서는 소속사의 금고에 철저한 보안 아래 현재도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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