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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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6년(쇼와 61년) 4월 8일 일본 쇼와 시대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이었던 오카다 유키코가 만 18세에 투신자살한 미제사건.
지금까지도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밝혀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2] 이후 이 사건을 모방하는 자살 사건이 빈번해져서 일본 언론사는 오카다 유키코의 애칭인 윳코를 붙여 "윳코 신드롬"(ユッコ・シンドロー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자살 직후의 영상으로 거적이 덮힌 유키코의 사체와 핏자국이 버젓이 나온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은 황색언론이 극에 다다라 특종을 위해서라면 취재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자극적인 보도를 하기 위해 안달났기 때문에[3] 방송 리포터인 나시모토 마사루(梨元勝, 1944~2010)[4][5] 가 무리하게 취재한 작태는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인 사이에서 비판을 받는다.[6]
2. 정황[편집]
2.1. 사건 직전의 상황[편집]
오카다 유키코는 사망 나흘 전인 1986년 4월 4일 소속사 선배인 하야미 유, 남성 아이돌 시부가키대와 함께 'スターどっきりインタビュー(스타 깜짝 인터뷰)'라는 일반 어린이들이 스타들에게 질문을 하는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했다. 당시 활동하던 노래 입술 Network를 부르는데 눈에 힘이 없고 다크 서클이 보이며 마지막 부분에 유키코의 사망을 추모하는 자막이 송출되었다.[8]
유키코는 4월 12일에 열릴 단독 콘서트를 위해 매일 선 뮤직 프로덕션에서 새벽 3시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9]#
사망 사흘 전인 4월 5일 인기가도를 달리던 유키코는 소속사의 동료 아이돌들과 합숙하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相澤 秀禎)의 자택을 떠나 미나토구 미나미 아오야마에 있는 맨션으로 자취를 시작하기 위해 사장의 자택에서 이삿짐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3일 후 사망 당일엔 유키코가 살던 방에는 곧 데뷔를 앞둔 사카이 노리코[10] 가 들어올 예정이었다. 이 날 아이자와 사장은 오카다 유키코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유키코가 저는 이제 틀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신인들이 잔뜩 나와서...라는 말을 했고 이에 아이자와 사장은 무슨 소리냐. 너는 우리 회사의 기둥이니 힘을 내!라고 격려하였는데 이에 유키코는 위에 있잖아요... 또 한 명(사카이 노리코)이...라고 말했다. 그때의 사카이 노리코는 예명도 아직 없었던 무명의 여중생이었지만 이 날 짐을 정리하면서 나온 본인의 포스터를 후배인 사카이 노리코에게 사인을 적어 선물로 주었다.[11]
사망 이틀 전인 4월 6일에는 고향 나고야에 돌아가 콘서트를 열었고 콘서트장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본가에 들러 가족들과 오랜만에 재회하였다. 본가에서 가족과 모여 식사를 하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언니의 성인식 사진을 보았는데 유키코는 묘하게도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평소의 유키코였다면 "왜 나만 없는 거야? 힝!"이라며 가볍게 장난 섞인 짜증을 내고 자신의 무대 비디오를 보면서 그것에 대해 웃으면서 이야기했겠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사진을 보며 장난 섞인 짜증도 내지 않고 자신의 무대 비디오도 보지 않으며 아무 미소도 짓지 않아서 왠지 모를 낯섦이 느껴졌다고 유키코 사후에 어머니가 이야기했다.[출처]
당일 저녁 오후 8시 53분 부모의 차를 타고 나고야역에 도착해 도쿄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는데 그것이 어머니가 본 딸 '사토 카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때 유키코는 부모에게 "아빠나 엄마가 혼자 도쿄로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지만 역시 아빠나 엄마가 도쿄로 오시는 게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라는 묘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당시 유키코는 데뷔 3년째에 이미 수익 30억 엔을 올리는 톱 아이돌이었는데[12] 고향에 살던 부모더러 도쿄로 오라고 말한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일 심야 도쿄로 돌아간 유키코는 매주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의 마지막 화 녹음을 마쳤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방송 스케줄이었다. 이 방송에서는 향후 스케줄 보고 같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사망 하루 전날인 4월 7일은 오후 시부야 판테온에서 열린 '록키 4' 시사회 참석 이외에는 빽빽히 들어찬 스케줄이 없는 드문 날이었다. 이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자택으로 돌아온 유키코는 가스 자살을 시도하기에 앞서 연습 비슷한 행동을 하였는데 가스 냄새가 유출되어 맨션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금방 잠잠해졌다. 오후 10시에 미조구치 매니저가 유키코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8일) 예정되었던 새 드라마의 촬영이 하루 연기되었다고 알리자 유키코는 "어머, 아쉽네?"라고 말했으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밝았다고 한다. 이후 아이돌 동료였던 이시노 마코가 오후 11시 반에 유키코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4번 정도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아 끊었다고 진술했다.
2.2. 사건 발생[편집]
4월 8일 정오를 넘긴 12시 20분에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되었다.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가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숨졌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사고도 아니고 사람의 통행량이 많은 대낮 신주쿠구 요츠야에 있는 자신도 소속된 선 뮤직 프로덕션 건물 7층에서 20m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했을 당시 건물 1층에는 도시락 가게가 있었는데 점심 무렵이라 사람들로 가득했다. 더구나 가스 중독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고 사망 당일 오전에 보도되어 기자 무리들도 그 앞에서 진을 쳤기 때문에 유키코의 투신자살 현장을 눈 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 목격자들이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엇인가가 사람인 줄 모르고 검은 쓰레기라고 생각했으나 눈 앞에 있는 것이 투신자살한 시체임을 깨닫고 구토하였으며 특종을 위해 잠복해 있던 한 기자는 유키코의 사진을 얻어갔다.
유키코가 투신한 직후에는 사람들이 신원을 식별하지 못해 '오카다 유키코의 매니저가 투신한 건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카다 본인임을 알았다.
다음의 내용은 유키코가 죽기 직전의 상황이다. 충격적인 사진은 없지만 글의 내용 때문에 열람 시 주의 틀을 달았으니 유의.
2.3. 사건 직후[편집]
시신이 수습된 직후 보도를 듣고 전국에서 몰려온 팬 수백 명은 사건 현장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모여 묵념하듯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으나 이윽고 그 장소는 젊은 청년들이 울부짖는 현장으로 변했다. 그들이 가져온 꽃다발이 쌓이고 쌓여 2미터에 이르렀다. 황색언론 잡지인 프라이데이와 포커스는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적나라한 시신의 사진을 무삭제로 잡지에 실었다.
자살이 확실한 상황이라 검증만 했을 뿐 부검은 진행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고향인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부모가 올라와 요츠야서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날 모든 방송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 방송이 밤까지 이어졌으나 단 한 곳 테레비 아사히의 간판 뉴스 채널 '뉴스 스테이션'에서는 아나운서 쿠메 히로시가 "연쇄 반응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자살 관련 보도를 절제하였습니다."라는 멘트를 하고 사건 보도를 일절 하지 않았다.[14]
사건 직후 연예계에서는 오카다가 첫 정규 출연을 했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사회자가 오카다의 인물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추모 방송을 내보냈으며 그녀를 귀여워했던 선배 가수 콘도 마사히코와 나카모리 아키나가 출연해 눈물을 보였다. 4월 10일 음악 방송 '더 베스트텐'에서는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시청자를 향해 "유키코 씨의 밝은 미소가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키코 씨, 정말 감사했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고 음악 버라이어티 '가요 깜짝카메라 대방송'은 그녀가 생전 마지막으로 녹화를 마친 방송이었기 때문에 추모하는 자막을 띄워 보냈다. 이 사건은 동년 2월 발생한 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과 맞물려 청소년 문제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일본 국회에서도 다룰 정도였다.
이후 유서가 일부 노출되면서 "제 멋대로인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 밝혀졌고 유서 속에서 언급된 듯한 배우 미네기시 토루(峰岸 徹)[15] 가 동일 밤 오후 10시 경 TBS 테레비의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심정은?
"솔직히, 엄청난 충격입니다."
-어떤 교제였었나?
"같이 일하며 여러 가지로 귀여워했었고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귀여워한 존재였습니다."
-유서에 당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같이 일하고 밥을 먹거나 그녀를 배웅한 것뿐이라..."
-사랑의 파국 같은 것이 있었나?
"그녀는 의외로 섬세해서 밝은 면과 훅하고 깊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빠 같은 존재였지만 그녀에겐 동생이 아니라 플러스 마이너스 알파 같은 것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첫사랑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안 했나?
"나이도 다르고 그런 교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호의를 드러내지 않게 주의하던 정도였습니다. 정말 저에 대한 일로 자살했는지 어떤지는 의문입니다."
-좋아한다고 고백받았습니까?
"없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추상적으로라도 저는 뭐라고 할 수 없네요."
-어떻게 했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는지?
"그녀에겐 로맨틱한 면이 있었으니 발라드 시라도 써주었다면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책임은 느낍니다. 비난은 받을 생각이니 제 딸이 크면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시켜주고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사망한 지 이틀이 지난 4월 10일 나카노의 사찰 호센지(宝仙寺)에서 회사장을 치뤘다. 친구이자 동세대 아이돌인 오기노메 요코, 미나미노 요코와 데뷔곡을 시작으로 많은 곡의 작사를 해 준 다케우치 마리야, 소속사 선배인 사쿠라다 준코, 쿠로야나기 테츠코, 타치 히로시 등 많은 연예계 관계자들이 찾아왔고 그녀의 죽음에 그녀와 함께 작업했던 선배 가수 마츠다 세이코, 재일 한국인 작곡가 강진화, 유키코에게 준 곡이 작곡가로서는 첫 작업이었던 코무로 테츠야, 수록곡을 함께 작업한 사카모토 류이치 외의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유골은 유키코의 고향 나고야시에 가까운 아이사이시의 사찰 조만지(成満寺)에 봉안되었다. 법명[16] 은 侑楽院釈尼佳朋(유교인샤쿠니카호)로 유키코의 '유'와 '음악'의 '악', 본명인 카요의 한자 '佳'를 따서 지었는데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던 아이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986년 5월 발매된 잡지 '위클리 세븐'에 실린 오카다 유키코의 영결식에서 취재한 연예계 동료들의 코멘트와 모습은 다음과 같다.
미네기시 토루: 오늘은 향을 피우러 온 것 뿐입니다.
: 착하고 총명한 여자 아이였다.킷카와 코지(吉川晃司): 신인상을 받을 때 함께였어서 도저히 남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음악) 장르가 달라 많이 만날 순 없었지만 동기였고 신경쓰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시부가키대의 후카와 토시카즈: 사망 4일 전에도 테레비 아사히 방송[18]
에서 함께여서 언제나와 같이 밝게 인사했었는데. 하지만 신인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연약해 보이는 여자애라 괜찮은 걸까 하고 걱정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울고 있을 때도 있었고...시부가키대의 야쿠마루 히로히데: 유키코는 혼자서 우울해지는 타입. 나랑 닮았다고 생각해서 자주 얘기를 걸곤 했다. 굉장히 머리가 좋은 애라 더욱이 혼자서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게 좋지 않았던 걸 수도. 여러 가지 상담에도 응했었지만 그게 어떤 내용인지는 말할 수 없다. "너무 고민하지 마"라고 얘기했었는데... 죽을 거라면 그냥 연예계를 그만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타하라 토시히코: 같은 포니캐년 소속이었기 때문에, 함께 일할 기회도 많았었는데...작년에 추락한 JAL에 같이 타고 갈 예정이었는데 직전에 변경되어서 "아, 안 타서 다행이다. 럭키" 같은 얘기를 나눴었는데. (중략) 반 년 정도 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모습은 있었다. 하지만 상담 같은 건 없었고 무엇에 고민했는지도 모른다. 가볍게 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너무 순수했던 걸까.
나카모리 아키나: (향을 피우며 계속 울고 있었다.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 (충격으로 얼굴이 파래진 채 교복을 입은 채로 뛰어왔다.)
2.3.1. 공황 윳코 신드롬[편집]
이 사건은 어느 연예인의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베에 사는 16살 소녀가 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자살 직후 일주일 만에 소녀 7명이 "오카다 유키코가 되고 싶다."는 유서를 남긴 후 투신자살했고 같은 해 5월 5일에는 21세 재수생이 선 뮤직 프로덕션 건물 옥상의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그 장소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하여 또 한 번 충격을 주었다.
자살을 기도한 청소년의 수는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4월 한 달에만 전년의 2배 이상인 114명이었고 1986년 한 해에만 799명이 자살하는 등 전년 대비 자살률 증가 44%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를 일컬어 '공황 오카다 유키코 현상(윳코 신드롬)'이라고 불렸다. 이 문제는 연예계 외에 정치권으로도 영향을 미쳐 가이후 도시키 문부대신이 야당의 추궁을 받고 "10대 가수의 실태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3. 죽음의 이유를 둘러싼 많은 설[편집]
유키코가 갑작스럽게 스스로 삶을 포기한 이유는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다.
1985년 11월 초부터 1986년 1월 말에 걸쳐 TBS로 방영된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에서 유키코는 함께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루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는데 토루에게 거절당하자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유키코가 쓴 글 등을 모아 1988년 7월에 출판한 책 <사랑을 주세요(愛をください)>[20] 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일부 노출된 유서에는 연필로 오카다 유키코가 직접 "미네기시 씨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다. 제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쓴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전술한 것처럼 미네기시 토오루가 사건 당일 밤에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루와는 드라마 촬영 후 돌아가는 방향이 같아서 바래다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사망 전날 오후 11시 반 이후부터 택시를 타고 미네기시 토루가 살던 세이죠의 자택 앞으로 찾아가 새벽 5시까지 혼자 기다렸다 돌아왔다는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후일 주간지에 미네기시가 "나의 인생에서 가장 귀찮은 사건이었다."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게재되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루는 당시 유키코와 나이차가 20살 이상이나 되는 어린 딸이 있는 이혼남이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투신자살 사건 발생 이후 기자회견에서도 유키코에 대해 "귀여운 동생 같은 느낌이나 이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마치 '형'(アニキ) 같은 느낌이었다."며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었다고 극구 부인했다.
미네기시 토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저 유키코에게 연예개 선배로서 후배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어린 유키코가 미네기시의 호의에 반해 연심을 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주세요>에 "미네기시 씨에 대한 일은 여성 주간지, TV 등에서 이래저래 퍼뜨려져서 그때마다 저는 미네기시 씨에게 죄송했고, 또 딱하다는 마음만이 들었습니다."라고 적어 놓은 것, 후쿠다 전무와 아이자와 사장이 밝힌 유서의 내용에서 남들이 생각하는 이상한 관계가 아니라 플라토닉한 짝사랑이었다는 증언을 보면 더더욱 확실해진다. 지금으로선 이 이유가 거의 확실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
인터넷이 발달한 후에는 이 사건에 배우 칸다 마사키가 개입되었다는 설도 퍼졌는데 칸다 마사키와 오카다 유키코는 연인 관계였고 유키코가 칸다의 아이를 임신까지 했는데 칸다 마사키와 마츠다 세이코가 결혼한단 발표가 나오자 충격에 빠져 자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카다 유키코가 둘의 약혼식에 소속사 후배로서 한껏 밝은 얼굴로 축하해 주는 영상이 남아 있기도 하고 임신으로 휴업 중이던 마츠다 세이코가 오카다 유키코를 위해 직접 작사와 데모 레코딩까지 해 준 '입술 Network'를 듣고 오카다가 감격했다는 레코딩 관계자의 증언도 있으므로 칸다가 관련되었다는 설은 어디까지나 찌라시가 써내린 자극적인 루머일 뿐이다. <사랑을 주세요>에서도 유키코의 어머니가 해당 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분노할 정도였다.[21] 유키코가 남긴 일기장과 유서를 가지고 있다는 선 뮤직 프로덕션의 아이자와 사장도 마츠다 세이코와 칸다 마사키 커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메세지를 전했다.
이외에도 원래 오카다 유키코가 좋아하던 대상은 배우 타치 히로시[22] 라는 등 유키코가 성소수자였다는 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다.
자살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선 뮤직 프로덕션 소속사의 후쿠다 전무는 방송에서 첫 번째 자살 미수 때는 연심이나 기타 사적인 일 때문에 고민하던 것이 원인이었으나 두 번째 자살 시도는 자신의 자살 시도가 알려져서 사무소나 가족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심적 부담이 커진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였다. 후쿠다는 유키코가 사라졌을 때 무언가를 직감하여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다녔는데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 계단 위에서 유키코가 신고 있던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인 모습을 발견했다. 유키코는 생전 혼자서 고민을 끌어안는 성격이었고 자살하기 전부터는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할 때가 잦았다고 한다.
유키코가 자살한 원인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런 추측을 내놓기도 한다. 유키코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때묻지 않은 성격이었는데 일본 연예계의 추악한 일면을 알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의 꿈과 환상이 깨지는 바람에 연예계 자체에 환멸을 느껴 아이돌을 그만두려고 했지만 아이자와 사장은 유키코를 세이코처럼 톱 아이돌로 육성하고 싶었기 때문에 격렬하게 반대하여[23] 은퇴가 무산되자 절망해 투신자살을 택했다는 것이다.
다만 생전에 근면성실하고 굉장한 노력가인 유키코가 단순히 연예계에 실망했다거나 연애가 깨졌다는 문제 등으로 준에 대한 실망, 연애 문제 등으로 자살할 것 같지는 않다는 추측도 있다. 오히려 스케줄이 너무 과도하여 피로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이 발병했고[24] 예기치 않게 휴일이 생기자 우발적으로 자살 기도를 했다가 사건이 너무 커지자 가족들과 소속사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데게 큰 죄책감을 느껴서 자살을 했다는 추측이다.
유키코의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의 아이자와 히데요시 사장은 유키코가 생전에 쓴 일기와 분홍 종이에 쓰인 '유서'도 수중에 넣었다. 아이자와는 이를 두고 대중들을 상대로 계속 보여줄까 말까 밀당하였으나 결국 단 한 번도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키코의 유족들도 내용을 모른다고 한다.[25] 아이자와 사장은 끝까지 이 유서 내용을 세상에 밝히지 않았고 2013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였으므로 금고가 열리지 않는 한 유키코 자신이 설명한 자살 원인이 밝혀질 가능성은 이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