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라이온즈/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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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토브리그[편집]
1.1. 코칭스태프 이동[편집]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우용득 감독이 결국 해임됐고 신임 감독으로 前 LG 트윈스 감독이던 백인천을 선임했다. 조창수 2군 감독이 다시 수석코치로 복귀했고, 권영호 투수코치 대신 정순명과 임호균을 영입했다. 타격코치로 박흥식을 추가 영입했다. 이밖에 한화 이글스 스카우트로 있던 차동열도 배터리코치로 영입했고, 전 해태 타이거즈 코치였다가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연수를 갔던 서정환을 수비코치로 영입했다.[1]
백인천 감독의 부임으로 배대웅 코치는 계약기간이 남았음에도 물갈이 대상이 됐고, 해임되는 대신 해외 연수를 떠났다.
1.2. 선수 이동[편집]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의 불똥은 선수단에도 튀었다. 게다가 오봉옥이 시즌이 끝난 1995년 11월에 음주운전으로 인명사고를 내면서 오봉옥을 필두로 선수단이 대거 정리됐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김실도 방출 명단에 끼어 있었는데, 김실은 오봉옥과 같이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했다.
1995년 12월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산하 마이너리그 소속 최창양을 트레이드 형식으로 데려왔다. 트레이드 금액을 포함해 총 7억을 들였는데, 최창양이 필라델피아에 입단한지 1년만에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애초 최창양의 필라델피아 입단부터 삼성이 손 썼다는 소문도 있었다.
1.3. 신인 지명[편집]
- 포지션은 지명 당시 기준.
- ※표시는 지명권 포기 등으로 입단하지 않은 선수.
- #표시는 대학 진학이나 유급으로 이후에 지명 당해가 아닌, 그 이후에 입단한 선수.
2. 전지훈련[편집]
그동안 미국 교육리그 파견의 성과를 좋게 평가해, 1995년 말에는 미국 교육리그에 2군 선수 전원이 참가했다. 실전 경험 습득 및 선수 기량 파악이 그 목적이었다.
1996년 초 오랜만에 일본에서 전지훈련이 실시됐다. 이번에는 남쪽의 오키나와. 국내 최초로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했고, 유례없이 1군과 2군 전원이 참가했다.
3. 정규 시즌[편집]
기존의 김상엽과 박충식과 김태한, 7억을 들인 최창양, 대학야구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던 전병호와 박태순과 최재호 등의 입단으로 시즌 시작 전부터 우승 후보로 꼽혔다. 그러나 이 해 팀내 최다승은 9승을 올린 최재호였다. 김상엽, 김태한, 박충식 모두 100이닝을 소화하지 못했다. [16]
양준혁의 활약에도 45승 5무 64패로 6위까지 주저앉았다. 당시 팀 창단 이후 최하 순위. 참고로 삼성은 프로야구 출범 이래 한 번도 7위나 그 이하의 순위로 시즌을 마감하지 않았다. 성적만 보면 삼성 역대 최악의 시즌이었으나...[17]
3.1. 선수 이동[편집]
5월 10일에 한화 이글스에서 퇴단한 후 군복무를 마친 양용모를 영입했다.
5월 25일에는 김태룡과 동봉철이 해태 타이거즈의 김훈과 이병훈을 상대로 트레이드됐다. 당시 삼성은 우타 외야수가 필요했고 해태는 좌타 외야수가 필요하긴 했지만, 동봉철은 백인천 감독에게 찍혀 트레이드 대상이 됐다는 후문이 있었다.
4. 선수별 개인 성적[편집]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성적.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 투수는 이닝이 많은 순서대로, 타자들은 타수가 많은 순서대로.
- 시즌 중 이적한 선수들은 당해 삼성 소속 성적만 기록.
4.1. 투수[편집]
- 우완
- 좌완
4.2. 타자[편집]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5. 수상 및 기록[편집]
- 양준혁 :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타율 1위(.346), 안타 1위(151개), 2루타 1위(33개), 장타율 1위(.624), 사이클링 히트(8월 23일 대구 현대 유니콘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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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삼성이 요미우리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서정환을 코치로 영입하자 해태 측에서 함부로 코치 빼갔다고 항의하기도 했다.[2] 어깨 통증으로 인해 전지훈련 도중 이탈했고, 입단 첫 해에는 타자로 나왔다. 이후 2군에서도 투수와 타자를 병행했다.[3] 상무 입대 이후 1998년 LA 다저스와 계약. 부상으로 마이너리그에서도 기회를 못 받다가 결국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은퇴했다.[4] 동국대 진학 이후 2000년 입단.[5] 동국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6] 고려대 진학 이후 2000년 입단.[7] 경성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8] 원광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9] 경성대 진학 이후 2000년 입단.[10] 건국대 진학 이후 미국 진출을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지명권을 포기. 우여곡절 끝에 2003년 신고선수로 입단.[11] 지명권 포기.[12] 경희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13] 단국대 진학 이후 2000년 입단.[14] 영남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15] 성균관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16] 사실 아래의 투수 운영을 보면 투수 중 오로지 선발등판만 했던 투수는 없었고 선발과 구원을 오갔다. LG의 이광환, 롯데의 김용희 감독 등이 고정 선발로테이션, 1이닝 마무리를 앞장서서 운영하고 있던 상황에서 삼성과 쌍방울에 새로 부임한 백인천과 김성근은 이러한 변화에 역행하는 대표적인 감독이었다. 삼성에서 선발로 20경기 이상 등판한 투수는 최창양이 전부였으며 나머지는 구원과 선발을 오갔다. 규정이닝을 넘긴 투수도 두 명에 불과한데 둘다 간신히 126이닝을 채웠다.[17] 그러나 이 시기 리빌딩이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흑역사 취급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