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리오 살리나스

덤프버전 :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파일:Julio_Salinas.jpg

이름
훌리오 살리나스
Julio Salinas

본명
훌리오 살리나스 페르난데스
Julio Salinas Fernández
출생
1962년 9월 11일 (61세)
스페인 빌바오
국적
[[스페인|

스페인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행정구
]]

신체
188cm | 체중 82kg
직업
축구선수 (센터 포워드 / 은퇴)
소속
선수
빌바오 아틀레틱 (1981~1984)
아틀레틱 클루브 (1982~1986)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86~1988)
FC 바르셀로나 (1988~1994)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4~1995)
스포르팅 히혼 (1995~1996)
요코하마 F. 마리노스 (1997~1998)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1998~2000)
국가대표
파일: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56경기 22골 (스페인 / 1986~1996)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4. 여담




1. 개요[편집]


파일:julio salinas.jpg

스페인의 축구선수 출신 축구 해설자이자 방송인이다.

1980~90년대 스페인과 라리가를 대표하는 공격수 중 한 명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11세에 아틀레틱의 유스팀에 입단한 살리나스는 1982년 아틀레틱 빌바오의 리저브팀인 빌바오 아틀레틱에 콜업되어 세군다 B(3부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맹활약으로 빌바오 아틀레틱을 세군다리가(2부 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고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훗날 은사인 하비에르 클레멘테 감독에 의해 1군 팀인 아틀레틱 빌바오에 콜업되어 1군과 리저브 팀을 오고가며 활약했고 마침내 1983년 3월 26일, 셀타 비고를 상대로 라리가 첫 골을 넣었다. 또한 1군 팀의 경기와 병행하면서도 리저브 팀에서도 무려 23골을 넣는 놀라운 기량을 선보이며 세군다리가 득점왕까지 차지한다. 두 시즌 동안 3부 리그와 2부 리그 득점왕을 모두 석권한 셈이다.

이후 두 시즌 동안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12골을 넣은 그는 수뇌부와의 협상 결렬로 1986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였고 그곳에서 두 시즌 동안 주포로 뛰며 31골을 넣었다. 팀의 주포이긴 했으나 당시 아틀레티코의 헤수스 힐 회장은 리그 우승을 이끌기에 살리나스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1988년 여름 이적시장에 그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살리나스 또한 1987-88시즌 들어서 좁아진 자신의 입지에 불만이 쌓여있던 차였고 결국 팀을 떠나는 것에 합의한다.

1988년 여름 이적시장에 나온 그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팀은 친정팀인 아틀레틱 빌바오였다. 하지만 급여 문제에서 의견 차이를 보이며 협상이 결렬되었고 이에 헤수스 힐 회장은 살리나스에게 FC 바르셀로나행을 권유했고 이를 살리나스가 받아들이면서 FC 바르셀로나로의 이적이 성사되었다.

당시 바르사의 누녜스 회장은 이른바 헤스페리아의 반란이라고 일컬어지는 불협화음 사건으로 어수선해진 팀을 재편하는 중이었고 아약스에서 대성공을 거둔 요한 크루이프를 감독으로 선임하는 것을 필두로 여러 선수들을 폭풍 영입하기 시작했다. 이때 누녜스 회장이 살리나스에게 러브콜을 보낸 뒷배경에는 몇 가지 비화가 있는데 결정적으로 아틀레틱 빌바오 시절 은사였던 하비에르 클레멘테 감독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했던 살리나스의 영입에 대부분의 꾸레들은 실망했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바로 신임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였다. 크루이프는 당시 바르사와 잉글랜드의 간판 스타인 게리 리네커의 역할을 줄이고 대신 살리나스의 공격 비중을 늘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루이프의 이런 결정을 의심했지만 살리나스는 이적 첫 해에 26골을 넣으며 자신의 진가를 증명함과 동시에 크루이프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는 팀 내 최다 득점 기록이자 바우타사르, 우고 산체스에 이은 라리가 3위 득점 기록이었다. 이후 4시즌간 라 리가 4연패를 이끌고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드림팀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지며 기량이 점점 하락했고 결국 91-92 시즌 들어서는 리그에서 한 자릿수 득점밖에 기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에 바르사는 희대의 천재 골잡이 호마리우를 영입했고 살리나스는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 벤치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만다.

결국 UEFA 유로 1996 출전을 위해 1994년 팀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입단하여 12골을 기록, 부활을 알렸으나 1995년 여름에 부임한 존 토샥 감독과의 불화로 1시즌 만에 다시 스포르팅 히혼으로 이적을 감행하였다. 1995-96시즌, 그곳에서 18골을 터뜨리는 활약을 펼쳐 목표로 하던 유로 1996에 참가하는 스페인 무적함대에 승선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97년 일본 프로축구팀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 입단하였다. 그는 팀에서 예전 동료 혼 안도니 고이코에체아와 같이 뛰며 그의 실력을 보여주었고, 1998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에서 황혼기를 보낸 후, 2000년 5월 19일 은퇴하였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julio salinaspain.jpg

10년간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활약하였으며 56경기에 출전하여 22골을 넣었다.

1986년 1월 22일 소련과의 평가전에서 선발 출전하며 데뷔전을 치렀고 그 경기에서 데뷔골을 넣어 2:0 승리를 이끌었다. 데뷔전인 소련과의 경기에서 미겔 무뇨스 감독의 눈 도장을 찍은 살리나스는 이후에도 꾸준히 대표팀에 차출되었고 스페인의 간판 공격수인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투톱 파트너로 1986년 FIFA 월드컵1990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여 1986년 FIFA 월드컵에서는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1990년 FIFA 월드컵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며 스페인의 8강(7위)16강(10위)에 일조했다.

UEFA 유로 1988에도 참가했으나 팀이 전체적으로 부진했고 본인 또한 무득점으로 침묵하면서 이탈리아, 서독에게 2연패를 당해 조별리그에서 조기 탈락하는 고배를 마셨다.

90년대 초반부터 슬럼프에 빠져있던 살리나스는 1994년 FIFA 월드컵 출전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었지만 빌바오 시절 은사이자 당시 스페인 대표팀 감독으로 재임 중이던 하비에르 클레멘테 감독의 부름을 받아 대표팀에 승선했고, 1994 월드컵 유럽 지역예선에서 7골을 기록하는 활약으로 스페인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크게 공헌하며 기대에 부응했다.[1] 결국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1994 월드컵에도 참가하게 되었고 대한민국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며 세 대회 연속 골을 성공시켰으나, 그 후 대한민국의 홍명보서정원이 동점골을 기록하여 2:2무승부로 대한민국에게 승점을 넘기고 말았다. 그래도 1승 2무의 성적으로 16강 진출한 뒤 16강전에서 스위스까지 대파하고 8강 진출에 성공한 스페인을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이탈리아였다.

이 경기는 지금까지 살리나스 커리어 최악의 흑역사로 회자되는 경기인데 이 경기에서 살리나스는 1:1로 팽팽히 맞서던 후반 잔루카 팔리우카 골키퍼와의 1:1 상황을 맞이했으나 팔루카의 선방에 막혀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날렸고 반대로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조는 찬스를 놓치지 않고 득점을 성공시켜 스페인의 8강(8위) 탈락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모든 비난의 화살은 살리나스를 향했다.

하지만 클레멘테 감독은 살리나스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았고 이적할 팀까지 추천해 주며 폼이 올라오면 언제든지 기용할 의사를 밝혔다. 결국 스포르팅에서 재기에 성공해 폼을 끌어올린 살리나스는 다시 스페인 대표팀의 주전으로 발돋움했고 커리어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UEFA 유로 1996에 출전하였다. 해당 대회 8강 잉글랜드전에서 득점했으나 오프사이드로 취소되었고 그외에도 여러가지 편파판정으로 인해 패하면서 8강(6위)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3. 기록[편집]



3.1. 대회 기록[편집]






3.2. 개인 수상[편집]




4. 여담[편집]


  • 흙수저 출신으로 축구선수로 성공하기 전까지 정육점 배달, 복권 판매, 상하차 아르바이트 등을 했다고 한다.

  • 18개월간 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군필자이다. 이 또한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선택한 것이다. 다만 스페인은 징병제가 아닌 선택적 모병제인지라 일주일에 한 번만 출근을 했고 그 덕분에 선수 생활과 병행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 라리가 득점왕 타이틀은 없지만 오랫동안 좋은 폼을 보여준 선수로 80~90년대를 통틀어 그보다 많은 득점을 기록한 선수는 우고 산체스뿐이다. 당연히 그 시기 스페인 선수 중에서는 최다 득점자이며 라리가 역대로 봐도 최다 득점 22위에 랭크되어 있다.

[1] 스페인 대표팀 내 최다 득점이자 플로린 러두쵸이우(9골), 이안 러쉬(8골)에 이어 유럽 지역예선 전체 득점 순위 3위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7 13:01:40에 나무위키 훌리오 살리나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