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네스토 세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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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제61대 대통령
에르네스토 세디요 폰세 데레온[1]
Ernesto Zedillo Ponce de León

파일:Ernesto_Zedillo_Ponce_de_Leon_Official_Photo_1999.jpg}}}
출생
1951년 12월 27일 (72세)
멕시코 멕시코시티
학력
멕시코 국립과학기술대학교 (경제학 / 학사 )
예일 대학교(경제학 / 석사 , 박사)
재임 기간
제61대 대통령
1994년 12월 1일 ~ 2000년 11월 30일
서명
파일:에르네스토 세디요 서명.svg}}}
직업
관료, 정치인
국적
파일:멕시코 국기.svg 멕시코
정당
경력
교육부 장관
기획예산부 장관
제61대 멕시코 대통령 (1994 - 2000)
1. 개요
2. 생애
3. 정치 활동
4. 갑작스러운 후보 지명과 대통령 당선
5. 대통령 시절
5.1. 살리나스와의 갈등
5.2. 사파티스타와의 화해
5.3. 71년 장기집권의 끝
6. 퇴임 후
7. 여담



1. 개요[편집]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멕시코의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1929년부터 이어진 제도혁명당 장기집권 시기의 마지막 대통령이다.


2. 생애[편집]


1951년 멕시코시티에서 정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바하칼리포르니아 주 메히칼리로 이주했으나 14살 때인 1965년에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왔다.

1969년 멕시코 국립과학기술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국군 및 해군 은행(반제르시토)에서 일하면서 학자금을 직접 벌었다고 한다.

1974년에는 예일대에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밟았다.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멕시코의 공공 대외 부채: 석유와 관련된 최근 역사 및 미래 성장> 이었다.

3. 정치 활동[편집]


세디요는 제도혁명당의 일원으로 멕시코 은행 (멕시코 중앙 은행)에서 일했으며, 그곳에서 국가 개선을 위한 거시 경제 정책 채택을 지원했다.

1987년 그는 기획예산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차관 재임 기간 동안 세디요는 과학 및 기술 개혁을 시작했다.

1992년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에 의해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에 있는 동안 그는 멕시코 공립학교 교과서 개정을 담당했다. 1년 후 그는 제도혁명당의 대통령 후보인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의 선거 운동을 돕기 위해 사임했다.

4. 갑작스러운 후보 지명과 대통령 당선[편집]


그러나 선거 운동 도중인 1994년 3월, 콜로시오 후보가 바하칼리포르니아 주 티후아나에서 마리오 아부르토 마르티네스의 총에 맞아 암살당한다.

이에 선대본부장을 하고 있던 세디요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그리고 콜로시오 사망에 따른 동정론이 겹쳐 그 해 8월에 대선에서 승리한다. 과반에 살짝 못 미치는 득표였다.

5. 대통령 시절[편집]


취임하자마자 외환위기를 맞닥뜨려야 했다. 멕시코의 외환보유고가 고작 61억 달러까지 떨어졌고, 월스트리트의 투자자들은 멕시코의 채무이행 능력을 의심하고 자금 회전을 중단했다.

세디요 정부는 12월 22일, 더 이상 국채를 갚을 능력이 없음을 공식 선언하고, 이듬해 1월 페소화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1달러당 3.45 페소였던 환율이 이듬해 1월 10일 5.78 페소로 66.7%나 절하됐고, 주가는 40%나 폭락했고, 경제는 일거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멕시코발 외환위기가 남미와 동남아시아의 신흥시장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가 멕시코에 200억 달러를 빌려주면서 어느 정도 해결을 보았다.

이 위기의 책임은 퇴임한 살리나스 전 대통령에게 있었지만, 살리나스는 이게 다 세디요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웠다.

5.1. 살리나스와의 갈등[편집]


임기 초반, 세디요 정권은 과거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사망한 당선인의 임기를 자기가 세운 허수아비들로 채웠던 막시마토 시기의 정권과 유사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니까 살리나스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디요는 제도혁명당 사무총장 호세 프란시스코 루이스 마시우의 암살에 관여한 혐의로 살리나스 전 대통령의 형인 라울 살리나스를 체포했다. 형이 체포되자 살리나스는 방송에 출연하여 세디요를 맹비난했다. 몬테레이의 지지자의 집으로 가서 단식투쟁을 했다. 그러다가 어찌저찌 중재가 되어 세디요와 화해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5.2. 사파티스타와의 화해[편집]


1994년부터 남부의 치아파스에서 봉기한 사파티스타 반군은 멕시코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1995년 세디요 정부는 사파티스타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치아파스주 통제권과 관련된 문제로 금방 결렬되었다. 그런 와중에 멕시코 정부는 사파티스타의 대변인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신원을 라파엘 세바스티안 기옌 비센테라는 전직 교수라고 유추했다.

1996년 3월 사파티스타와의 평화 협정인 산 안드레스 협정을 맺었다. 산 안드레스 협정은 원주민의 다양성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 원주민이 사용하고 점유하는 영토 내의 천연 자원의 보존, 대중의 의사 결정에 원주민 공동체의 더 많은 참여라는 다섯 가지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5월에는 테러리스트로 체포된 사파티스타들을 석방했다.

하지만 뒤로는 야당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7년 치아파스주의 악틸이란 마을에서 라스 아베하스라는 평화주의 단체의 일원 45명이 우익 군사단체 마스카라 로하에게 학살당하는 악틸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악틸 학살 사건은 2020년 9월에 와서야 멕시코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에르네스토 세디요 당시 대통령에 대한 재판을 요구하고 있다.

5.3. 71년 장기집권의 끝[편집]


1929년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살아남은 혁명가들을 불러모아 만들어낸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도 정말 끝이 보이고 있었다. 사실은 1988년에 끝이 날 뻔했지만, 부정선거를 저지르거나 여당 후보의 암살로 인한 동정표로 두 번이나 더 연장한 것이었다.

1996년 세디요는 선거 관리의 공정성과 자금 운용의 투명성 등을 담은 정치개혁법을 제출했고,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또한 선거를 감시하는 자치 조직을 만들었다. 1997년에는 임명직이던 멕시코시티 시장을 선출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97년 총선에서 제도혁명당은 창당 이래 처음으로 과반에 미달했다. 이로써 멕시코 의회는 제도혁명당, 국민행동당, 민주혁명당 3강 체제로 전환되었다.

아무튼 임기 중반까지는 경제문제로 인해 지지율이 나빴고, 이것이 1997년 총선에서의 참패로까지 이어졌지만 재임기 후반기에는 지지율이 상당히 높아졌다. 그러나 이것이 제도혁명당의 지지율 상승과는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이 2000년 대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2000년 대선에서 제도혁명당의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 후보는 대통령에게 지명된 것이 아닌 당내 경선을 통해 지명되었다. 또한 선거를 내무부가 관리하는 것이 아닌 신설된 연방 선거 기관이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1만여명의 멕시코인 참관인들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850여명의 외국인 참관인들이 투표 과정을 지켜보게 되었다.

7월 2일 치러진 선거 결과 우파 성향인 국민행동당비센테 폭스 후보가 예상외로 넉넉한 표차이로 승리했고,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71년만에 정권교체가 확정되었다. 한편 세디요 대통령은 투표가 종료되자마자 국영방송에서 폭스의 승리를 선언했다.

제도혁명당의 강경 당원들은 세디요를 배신자, 반역자로 여기며 비난했다. 이에 세디요는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약속과 의무를 이행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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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퇴임 후[편집]


파일:세디요2021.jpg
2021년 모습.

퇴임 후에는 씨티그룹 등 여러 국제 기업과 NGO에서 경제 관련 직책을 맡았다. 현재는 예일 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예일 세계화 연구 센터의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다.

2020년에는 팬데믹 대비 및 대응을 위한 독립 패널(IPPR)에 합류했다. 이 그룹은 WHO와 각국 정부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을 어떻게 대처했는지 조사하는 독립 그룹이다.

7. 여담[편집]


  • 1996년 11월 28일부터 30일까지 방한해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 2018년 전직 대통령 연금이 폐지될 때까지 연금을 모두 받지 않고 일부만 받았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9 03:26:22에 나무위키 에르네스토 세디요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