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제1연방공화국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과달루페 빅토리아
비센테 게레로
호세 마리아 보카네그라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메호르 무스키스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산타 안나
제9대



미겔 바라간




중앙집권공화국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호세 후스토 코로
니콜라스 브라보
프란시스코 에체베리아
발렌틴 카날리소
제14대
제15대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
마리아노 파레데스



제2연방공화국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호세 마리아노 살라스
페드로 마리아 데 아나야
마누엘 데 라 페냐
마리아노 아리스타
제20대
제21대
제22대
제23대
후안 바우티스타 세바요스
마누엘 마리아 롬바르디니
마르틴 카레라
로물로 디아스 데 라 베가
제24대
제25대
제26대
제27대
후안 알바레스
이그나시오 코몬포르트
베니토 후아레스
펠릭스 마리아 술로아가
제28대
제29대
제30대

마누엘 로블레스 페수엘라
미겔 미라몬
호세 이그나시오 파본


합중국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세바스티안 데 테하다
호세 마리아 이글레시아스
포르피리오 디아스
후안 네포무세노 멘데스
제35대
제36대
제37대
제38대
마누엘 곤살레스 플로레스
프란시스코 레온 데 라 바라
프란시스코 마데로
페드로 라스쿠라인
제39대
제40대
제41대
제42대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프란시스코 카르바할
에우랄리오 구티에레스
로케 곤살레스 가르사
제43대
제44대
제45대
제46대
프란시스코 라고스 차사로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
알바로 오브레곤
제47대
제48대
제49대
제50대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에밀리오 포르테스 힐
파스쿠알 오르티스 루비오
아벨라르도 L. 로드리게스
제51대
제52대
제53대
제54대
라사로 카르데나스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미겔 알레만 발데스
아돌포 루이스 코르티네스
제55대
제56대
제57대
제58대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루이스 에체베리아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제59대
제60대
제61대
제62대
미겔 데 라 마드리드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에르네스토 세디요
비센테 폭스
제63대
제64대
제65대

펠리페 칼데론
엔리케 페냐 니에토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아즈텍 · 제1제국 · 제2제국



멕시코 제52대 대통령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Manuel Ávila Camacho

출생
1897년 4월 24일
멕시코 푸에블라 주 테시우틀란
사망
1955년 10월 13일 (향년 58세)
멕시코 멕시코 주 우익스퀼루칸
학력
국립예비학교(중퇴)
재임 기간
제52대 대통령
1940년 12월 1일 ~ 1946년 11월 30일
직업
군인, 정치인
종교
가톨릭
국적
[[멕시코|

멕시코
display: none; display: 멕시코"
행정구
]]

정당
경력
국방장관
제52대 멕시코 대통령 (1940 - 1946)

1. 개요
2. 생애
3. 대통령 시절
4. 이후
5. 여담



1. 개요[편집]


멕시코의 군인이자 제52대 대통령.

2. 생애[편집]


1897년 푸에블라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력은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부속의 고등교육 기관인 국립 예비학교를 중퇴한 것이 전부였다. 그는 1914년 중위로 혁명군에 입대하여 1920년 대령에 올랐다. 같은 해 라사로 카르데나스 휘하의 미초아칸 주 참모총장을 지내며 친분을 쌓았다. 1929년 카르데나스 휘하에서 불만을 품은 장군들의 군사 반란인 에스코바르 반란에 맞서 싸웠고, 같은 해 준장 계급을 달성했다.

카마초는 1936년 국방장관이 되었다. 1940년에는 멕시코 혁명당 대표로 지명되어 멕시코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다만 대선 과정에서 카마초의 지지자들에 의해 폭력 사태가 일어나면서 47명이 사망하고 400여명이 부상당하는 등 유혈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상대 후보인 후안 안드레우 알마산이 쿠바의 아바나로 건너가 미국에 도움을 청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승복하면서 마무리되었다.

3. 대통령 시절[편집]


혁명과 크리스테로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멕시코 대통령들은 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카마초가 가톨릭에 유화적으로 나오면서 사이가 개선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멕시코 국가를 공식화시켰다. 본래 10절까지 있던 가사를 1,5,6,10절만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화를 추구했지만 소수에게만 이득이 되었기에 소득 불평등이 심해졌다. 마침 진행되고 있던 제2차 세계 대전의 덕을 톡톡히 봐서 1940년에서 1945년 사이 매년 약 10%씩 성장시켰다. 특히 전쟁을 치르던 미국에 공급하던 원자재가 경제 발전의 주축이었다.

1942년 멕시코 국적의 유조선 두 척이 멕시코만에서 나치 독일의 U보트에 의해 격침당했다. 같은 해 5월 22일 추축국에 선전포고하고 공식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태평양 전선에 비행 중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떠난 미국인들을 대체하기 위해 미국 국내에 30만 명의 노동자를 제공했다.

전쟁에는 짧게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는 승전국이 되면서 전후 국제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리고 연합국으로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미국-멕시코 전쟁 후 오랫동안 존재했던 미-멕 갈등이 해소되었으며, 미국은 철도 개선 비용을 제공하는 등 멕시코에 재정을 지원했다.

1946년 1월 18일 그는 멕시코 혁명당(PRM)을 제도혁명당(PRI)으로 고쳤다. 그리고 군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군을 당내 조직에서 제거했다.

4. 이후[편집]


1946년 퇴임하였고, 자기 소유의 목장에서 일하면서 살다가 1955년 사망했다.

5. 여담[편집]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멕시코인들이 미군 소속으로 참전할 수 있게 하는 협정을 맺었다. 뒷날 이 협정을 통해 멕시코인 약 12만명이 미군 소속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15:19:47에 나무위키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