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대한민국/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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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목록
2.1. 1900년대
2.2. 1910년대
2.3. 1920년대
2.4. 1930년대
2.5. 1940년대
2.6. 1950년대
2.7. 1960년대
2.8. 1970년대
2.9. 1980년대
2.10. 1990년대



1. 개요[편집]


20세기에 한반도(대한민국, 북한)에 찾아온 한파를 나열한 문서.

1900년은 20세기가 아니지만, 19세기에 넣으면 1900년대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더욱 부자연스러우니 20세기 문서에 정리하였다.


2. 목록[편집]



2.1. 1900년대[편집]


1900년대는 1890년대의 겨울 양상이 이어지면서 12월보다는 1월, 특히 2월 한파가 잦은 양상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1905년 1월처럼 심한 이상 고온이 기승을 부릴 때도 2월은 한파가 길게 지속되어 추운 편이었다. 물론 1907년처럼 12월이 추운 해도 존재했으나 대부분 2월이 더욱 추운 양상을 보였다.

  • 1900년 1~2월 한파
    한반도 기상학의 역사를 다루는 블로그에 따르면 인천의 1900년 1월 평균 기온이 -6.1℃에 달했다고 한다. 하위 10위인 수준이나 동시기 다른 해보다는 매우 낮은 기록이다. 원산도 1월 평균 기온이 -6.2℃로 낮은 편이었고, 부산0.7℃로 기록되었다. 1899년 12월은 저 블로그에서도 그렇고 기상자료개방포털 해관기상관측자료에서도 그렇고 그렇게 심한 한파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나 1900년으로 넘어가면서 새해 첫날부터 영하 두 자릿수를 밑도는 강력한 한파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해관기상관측자료를 볼 때, 인천의 월평균 기온은 고작 -6.1℃에 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거의 한 달 동안 영하 두 자릿수의 날씨가 지속되어 1월 한 달간 -10℃ 이하인 일수가 20일에 달하고 1월 9일까지는 인천조차 아예 최저 기온 영하 두 자릿수로 도배되어 있다. 최저 기온을 더 가까운 쪽으로 맞춰서 -n.0℃, -n.5℃ 단위로 끊었다고 해도 계속 영하 두 자릿수를 밑도는 한파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 춥기로 악명높았던 1917년 1월 상순, 1922년 1월 상순도 깨지 못한 기록이다. 게다가 1월 중순, 하순도 1월 19~23일에 기온이 잠시 오른 것을 제외하면 추위가 계속 지속되었고 1월 24~27일은 해당 겨울에서 가장 추위가 극한에 달해 인천의 최저 기온이 1월 24일 -10.0℃, 1월 25일 -15.0℃, 1월 26일 -17.5℃, 1월 27일 -15.0℃를 기록했다고 나와 있다. 특히 1월 26일은 부산이 어마어마했는데, 무려 -13.3℃라는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는 그 춥기로 악명높았던 1917년 1월 8일(-12.7℃), 1923년 1월 2일(-12.5℃), 1931년 1월 11일(-12.4℃), 2011년 1월 16일(-12.8℃)보다도 낮다. 오로지 1915년 1월 13일(-14.0℃)만이 이를 능가한다. 즉 위의 기록들로 어림잡아 보자면 인천 기준 -7℃ 정도의 1월 평균 기온을 기록했을 법한데 기록상으로는 -6.1℃에 그치니 아마 기록에서 오점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1]
이러한 증거를 가지고 판단하여 서울의 1900년 1월 평균 기온은 최소 1922년 1월처럼 -7.8℃에 준하거나 오히려 더 낮아 -8℃ 이하를 기록할 법하다. 그러나 1963년 1월을 능가하는 영하 두 자릿수의 월평균 기온이 나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1918년 1월 인천의 월평균 기온이 -6.0℃였고, 서울은 -7.5℃였다. 또한 1900년 1월이 1922년 1월 한파와 비슷해보이는 점이 있는데, 원산에서도 비슷하게 인천보다 살짝 낮았고 중국 베이징도 1922년 1월과 월평균 기온이 같은 점을 보아 짐작하였을 때 한반도 이북에 한기가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 큰 것으로 보인다. 정작 부산의 1900년 1월 평균 기온은 0.7℃로 1922년보다 높다. 해관기상관측자료를 보았을 때 2월도 1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한파가 오래 지속되었다. 인천의 최저 기온이 2월 1일 -10.5℃, 2월 4일 -13.0℃, 2월 5일 -13.0℃, 2월 6일 -15.5℃, 2월 7일 -11.5℃ 등 장기적인 -10℃ 이하는 여전했고, 그 이후로 좀 나아졌지만 2월 16일에도 -10.8℃을 기록하는 등 춥기는 추웠다. 대략 2월 25~26일까지 추위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3월 들어 인천의 최저 기온도 영상권을 회복하며 겨울이 끝났다.

  • 1901년 2월 상순~중순 한파
    1901년 1월은 큰 추위가 없이 평범했다. 하지만 2월이 되자마자 강력한 입춘 한파가 찾아온다. 인천은 2월 1일 아침 최저 기온 -9.5℃, 한낮에도 -5.0℃에 머물더니 2월 2일 아침 최저 기온 -16.5℃, 한낮 기온 -9.4℃에 머무르는 등 강력한 한파가 찾아온다. 다음 날인 2월 3일에도 -15.0℃에 머물며 매우 추웠다. 인천이 이 정도였으니 서울은 -16~-18℃ 안팎이었을 듯. 부산도 2월 2일 아침 최저 기온 -9.4℃, 한낮 기온 -3.9℃에 머물러서 추위가 매서웠다. 추위는 2월 5일까지 이어지다가 풀렸는데 그 이후에도 이따금씩 추위가 찾아와 2월 12일에 다시 수은주가 -12.0℃까지 곤두박칠치는 등 2월 중순 치고는 꽤 추웠다.

  • 1902년 1월 한파
    기상자료개방포털 해관기상관측자료에 의하면, 인천의 최저 기온이 1월 4일 -16.0℃, 1월 24일 -15.0℃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달은 앞의 두 날을 제외하면 특별히 추운 날은 없었으며, 한반도 기상학의 역사를 다루는 블로그에 의하면 인천의 월평균 기온이 -2.6℃에 불과했다고 하지만 한파가 찾아온 날에는 인천 최저 기온이 -15℃를 밑도는 날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같은 날 서울은 최소 -16℃, 최대 -20℃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낮았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 1904년 1월 한파
    한반도 기상학의 역사를 다루는 블로그에 의하면, 뮈텔 주교의 일기에 당시 서울의 날씨가 적혀 있다. 일기에는 1월 23일 -22℃, 1월 24일 -23℃, 1월 25일 -22℃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다만 아쉽게도 그는 일기에 정수만 표시하고 소수점을 표기하지 않아 정확한 수치까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대략적인 비교에 만족해야 한다. 어쨌든 이것이 사실이라면 서울의 공식 기상 관측 이후 역대 최저 기온인 1927년 12월 31일의 -23.1℃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낮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사흘 연속으로 -22℃ 이하를 기록한 것 역시 1907년 공식 기상 관측 이래에는 전무했던 일이다. '한반도의 기상 관측이 조금만 더 빨랐으면 기록적인 측면에서 대단한 기록이 많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들게 되는 대목이다. 실제로 한반도의 기상 관측은 세계적으로 볼 때 역사적,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가장 늦은 편에 속한다. 이는 한반도의 기후 데이터 제공에 한계를 주어서, 기후 역사학자들이 한반도의 과거 기후를 연구하는데 있어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인천의 경우 기상자료개방포털 해관기상관측자료에 수록된 최저 기온을 살펴보면, 1월 23일 -16.0℃, 1월 24일 -14.0℃, 1월 25일 -14.5℃, 1월 26일 -16.5℃를 기록했다고 적혀 있다. 서울과 달리 -20℃ 이하의 기온을 기록하지는 않았고 1월 24일은 두 개의 자료를 비교했을 시 서울과 인천의 최저 기온이 9℃의 차이가 나는데, 보통 서울과 인천의 겨울철 최저 기온은 1~3℃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뮈텔 주교의 일기에 적힌 1월 24일 서울의 최저 기온 -23℃ 기록은 다소 신빙성이 의심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월 전체의 최저 기온 극값을 대조해보면 서울 -23℃, 인천 -16.5℃로, 비록 차이가 크기는 하지만 기록된 날짜도 이틀밖에 차이나지 않고, 유사 사례인 1918년, 1920년, 1928년 1월처럼 서울과 인천의 최저 기온이 6~7℃의 차이를 보인 경우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2] 서울의 -23℃ 기록도 애매하지만 약간 신빙성이 있어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감안해도 실제로는 -20~-21℃였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이 시기 일본의 기온 양상을 보면 1월 상순에는 춥고, 중순에는 비교적 이상 고온이 일어났다가, 하순 쯤에 본격적인 맹추위[3]가 찾아온 것으로 보이는데, 서울을 비롯한 한반도도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 뿐 이와 비슷한 양상을 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에 의하면 1904년 1월은 한 달 내내 길게 추위가 이어진 양상은 아니었을 듯하며 비슷한 양상으로 추위가 찾아온 2018년 1월의 완벽한 상위호환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또한 1903년 12월 상순부터 한기 남하로 인해 일본 내륙 지역들 중 연속으로 영하를 기록한 지역이 있었으므로, 한반도 역시 12월 상순부터 한파가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 1904년 12월 12일~1905년 1월 1일, 1월 28일~3월 한파
    이해의 겨울은 정말 특이한 양상으로 회자되는데, 한겨울인 12월, 1월보다도 한겨울에서 벗어날 시기인 2월이 더욱 겨울 날씨에 부합하는 양상을 띄었기 때문이다. 그중 1905년 1월은 아예 1916년, 1972년, 1973년, 1979년, 2020년 1월의 조상격으로 거의 한 달 동안 온풍만 불어댄 끝에 월평균 기온이 영상으로 기록되었으니 말 다했을 지경. 우선 추위 자체는 11월 16일에 잠깐 왔다가 12월 12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중 12월 18일과 12월 23일에는 인천의 최고 기온도 각각 -3.3℃, -3.1℃에 그치고 12월 19일에는 최저 기온이 -9.6℃에 머물렀으나, 이것이 1904~1905년 겨울 시즌 초반 중에서 그나마 가장 겨울 같은 날씨였다. 1905년 새해 첫날에는 최저 기온 -6.8℃에 한낮에도 영상으로 오르지 못하는 겨울 날씨가 시작되었으나, 1월 2일부터 바로 기온이 오르더니 1월 25일까지 장장 3주가 넘는 시간 동안 봄 같은 날씨가 찾아왔다.[4] 그나마 1월 26~27일에는 구름이 많이 끼었는지 기온 상승이 지체되었으며, 1월이 끝나가는 1월 28일이 되어서야 진짜 겨울이 시작되어 1월 31일에 -11.4℃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2월이 되자 추위의 기세가 더해져 2월 6일에 최저 기온 -13.1℃, 2월 9일에 최고 기온 -6.6℃를 기록하며 그제서야 연중 가장 추운 날씨가 찾아왔고, 12월, 1월도 아닌 2월 전체의 최저 기온이 영하로 뒤덮이는 진풍경을 기록했다. 3월 상순에도 최저 기온 -5℃ 이하의 꽃샘추위는 계속되었으며[5], 3월 17일에 -4.9℃까지 내려간 후 3월 20일부터 영하로 내려가지 않으며 그대로 겨울이 끝나게 되었다. 다만 2월에 시작된 이상 저온의 여파는 4~5월과 7~8월에도 남아 있었다. 서울 기준으로 4~5월 평균 기온이 각각 9℃대 후반, 14℃대 후반으로 추정될 정도로 차가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7월과 8월에도 여름다운 날씨는 실종되고, 8월은 아예 월평균 기온이 23℃까지 올라갔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역시나 차가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저온/사례/20세기 문서 참조.

  • 1905년 11월 4~5일, 12월 12일~1906년 2월 18일 한파
    이해는 일찍부터 반짝 추위가 한반도를 방문했다. 11월 4일에 인천의 일평균 기온이 -0.6℃로 굴러떨어졌고 최저 기온도 -3.4℃까지 내려갔으며, 다음 날에는 최고 기온 1.9℃, 최저 기온 -5.8℃, 일평균 기온 -1.8℃를 기록해 체감상 한겨울과 같은 날씨를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6] 그 뒤로는 11월 21일 최저 기온 -3.3℃ 빼고는 별다른 추위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러다 달을 넘긴 12월 12일에 하루 종일 기온이 떨어지는 양상이 일어나면서 겨울이 시작되었다.
12월 12일 인천의 최저 기온은 -7.6℃였고 최고 기온도 -1.6℃에 머물렀으며, 12월 13일은 -9.1℃, 12월 14일에는 -10.4℃까지 내려갔다. 12월 16일까지 추위가 계속되고 사흘 동안 날씨가 풀렸지만 다시 한기가 들이쳐서 12월 21일에 최고 기온 -3.4℃, 최저 기온 -9.2℃를 기록. 12월 24일부터 일주일간 날씨가 풀렸으나 12월 31일에 최저 기온 -8.1℃로 내려가고 최고 기온마저 0.1℃를 기록하면서 1905년이 끝나게 되었다.
그렇게 1906년은 새해부터 최고 기온 -6.3℃라는 추위가 찾아오며 시작되었고, 1월 2일에 -10.4℃로 내려간 뒤 맑은 날씨의 영향으로 1.9℃까지 올라갔으며, 그렇게 다시 1월 10일까지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 그러나 진짜 추위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1월 11일에 다시 하루 종일 영하로 굴러떨어지는 양상을 보이며 시작된 추위는 1월 12일에 -11.6℃까지 떨어진 뒤 1월 14일에 풀렸지만 이는 강설에 의한 영향일 가능성이 컸고, 아니나 다를까 1월 16일에 다시 한기가 내려와 다음 날에 최고 기온 -6.2℃, 최저 기온 -11.1℃를 기록하며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파는 1월 20일과 1월 21일에 절정을 맞이하였는데, 1월 20일에 -14.9℃를 기록하고 최고 기온마저 -9.3℃에 머무르며 1월 21일까지 혹한이 계속되었다. 이에 당시 황제였던 고종이 "겨울철의 매서운 추위는 아직 극심하지 않으나, 이 내린 뒤의 갑작스런 한파는 역시 근간에 이런 날이 없었다고 한다"라며 옥에 수감되어 있던 죄인들 중 경범죄를 저질러 수감된 이들을 석방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1월 30일까지 계속된 추위는 1월 31일에 어느 정도 풀리기는 했지만 이것도 운량이 많은 영향일 가능성이 컸고, 역시 달을 넘긴 2월 1일에 다시 한기가 내려오며 입춘 한파가 시작되었다. 2월 2일 최고 기온이 -8.7℃에 그치고 2월 3일에는 최저 기온이 -14.8℃까지 내려갔으며, 2월 10일에 최고 기온 -9.4℃를 기록하여 그제서야 연중 가장 낮은 최고 기온이 기록되었고, 2월 11일에는 -15.4℃가 찍히며 연중 가장 낮은 최저 기온을 기록. 그렇게 2월 18일까지 한파가 계속되었고, 2월 17일에도 최고 기온 -6.4℃에 머무르고 2월 18일에는 최저 기온 -12.8℃가 기록되었는데, 이날을 끝으로 갑자기 한기가 걷히고 온풍이 올라와 겨울이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2월 하순 전체가 따뜻했으며, 연례행사로 3월 3~8일에 다시 꽃샘추위가 내려와 3월 6일에 절정[7]을 맞이한 뒤로 큰 추위는 물러갔다.

  • 1906년 11월 22일~1907년 3월 한파
    우선 이 시기 서울은 공식 기상 관측이 없었던 고로 인천 기준으로 서술한다. 우선 11월 20일부터 인천의 최저 기온이 영하로 돌아섰고 11월 22일에는 최고 기온조차 -2.3℃에 그쳤으며, 11월 23일과 11월 26일에 최저 기온 -6.8℃, -6.4℃를 기록했다. 11월 30일에는 최고 기온 -2.0℃, 최저 기온 -7.7℃로 11월 중 가장 낮은 기온을 보이며 본격적인 겨울로 돌입했다. 그 뒤 12월 9일과 12월 10일을 제외하고는 큰 추위가 없었으나, 12월 19일에 하루 종일 기온이 떨어지는 양상을 보이며 한파가 불어닥치기 시작했고, 12월 21~23일에 최저 기온이 -11~-12℃에 머무르고 한낮에도 -6~-7℃에 그치는 등 한파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이 추위로 12월 22일에 서울의 한강이 결빙되었으며, 이는 첫 공식 결빙 선언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28일까지 추위가 계속되었다가 12월 29일에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며 1906년이 마무리되었다. 해를 넘겨 1907년 1월은 1월 1~2일과 1월 9~11일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한파 없이 오히려 연속적인 이상 고온 행렬이 이어졌고, 1월 16일과 1월 17일에 최고 기온 9.1℃, 9.4℃를 기록하였다. 1월 14일부터 1월 28일까지 보름 연속으로 일평균 기온이 영상이었다. 그러다 1월 30일부터 다시 한파로 전환되었으며, 2월 1일과 2월 2일에 최저 기온 -13.2℃, -14.1℃라는 한파를 기록하며 입춘 한파가 1월 한파보다 오히려 더 무서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뒤로 온풍과 냉풍이 서로 교차해가는 끝에 2월 27일까지 점점 따뜻해지다가 겨울의 마지막 날인 2월 28일에 최고 기온 -2.1℃, 최저 기온 -8.2℃를 기록. 달을 넘긴 3월 1일에 -8.9℃를 끝으로 3월 6일부터 한파가 물러가고 온풍이 유입되어 겨울이 끝나게 되었다. 연이어 3월 14~18일에 다시 한 번 강한 꽃샘추위가 찾아와 3월 14일 최고 기온과 최저 기온이 0.0℃, -2.8℃에 그치고 3월 15일 최저 기온도 -5.8℃에 그쳤지만 이것이 마지막 꽃샘추위였다.

  • 1907년 11월 24일~1908년 3월 한파
    전술했듯이 1907년 10월 1일부터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최초의 기상 관측이 시작되었는데, 서울은 기상 관측 첫 해인 1907년부터 한파 겨울을 맞이했다. 우선 11월 24일부터 일평균 기온이 -1.1℃로 떨어지며 겨울 진입을 알렸고, 다음 날에는 한낮에도 -0.7℃에 머물렀으며, 가을의 마지막 날인 11월 30일에는 최고 기온 -2.4℃, 최저 기온 -8.9℃에 그침으로써 본격적인 겨울 날씨로 돌입하였다. 그 뒤 12월과 1월은 따뜻했다 추워졌다의 반복이었다.
12월 하순에는 한파가 더욱 발달하였다. 12월 21일 낮 최고 기온이 -8.1℃에 그쳤고 최저 기온도 -14.8℃였으며[8] 12월 22일 최저 -18.0℃에 최고 -10.2℃[9], 다음 날인 12월 23일에는 -20.1℃로 -20℃를 밑돌았다. 게다가 그 상태에서 미친듯한 일교차를 보였음에도 최고 기온이 -9.4℃[10]에 그쳐 혹독한 겨울철 날씨를 제대로 보였다. 이후 온기 난입으로 불과 며칠만에 6℃까지 올라(...) 바로 며칠 전에 -20℃를 넘던걸 생각해보자... 이상 난동이 일어났으나 다시 한기 남하로 -14℃까지 하강하는 등 하순 내내 정신없는 날씨가 전개되었다. 이듬해 1월 역시 사흘 정도 추워져 최저 기온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하다 나흘 정도 따뜻해지는 전형적인 삼한사온의 패턴을 보였다. 하지만 2월은 삼한사온의 형식에서 벗어나 계속 한파가 이어졌다. 최저 기온이 대부분 영하 두 자릿수로 이어지는 한파의 모습을 보였으며 최저 기온 극값도 -15.8℃(2월 7일)로 1월 22일 -14.3℃의 최저 기록보다 더 낮았고, 월평균 기온도 -4.0℃로 전년도 12월과 1월의 월평균 기온보다 더 낮은 기현상이 벌어졌다.
2월의 기록적인 한파는 하순에 들어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지만 3월에도 서울 월평균 기온이 2.9℃를 기록해 평년보다 약간 낮은 기온을 보여주었다. 4월에도 영하의 기온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월평균 기온도 10.1℃로 평년보다 약간 낮은 편이었다.


2.2. 1910년대[편집]


사실상 서울 기상 관측 사상 극단적 성격을 지닌 겨울의 끝판왕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12월, 1월, 2월 모두 전설적인 한파 기록이 대다수 포진해 있는 연대이다. 특히 1915년 1월의 역사적인 단일 한파와 1916~1917~1918년으로 이어지는 두 겨울 시즌이 기상 관측 역사상 전례가 없는 수준의 대한파(大寒波)였다. 또한 서울에서 -20℃ 이하를 가장 많이 기록한 연대이기도 하다. 물론 1915~1916년 겨울처럼 극단적으로 따뜻한 겨울도 있었으나, 극단 한파의 빈도가 훨씬 높았다.

  • 1910년 1월 30일~2월 2일 한파
    1909년 12월은 매우 추웠지만 1910년 1월은 전반적으로 따뜻했으나 1월 하순~2월 상순에 강력한 한파가 찾아온다. 서울은 1월 30일 아침 6시에 -11.8℃를 기록하더니 해가 뜨고 오히려 기온이 더 떨어져 오후 2시에 -15.5℃[11], 오후 10시 -18.2℃까지 떨어지더니 1월 31일 아침 최저 기온 -19.9℃를 기록했다. 인천도 1월 30일 -17.8℃[12], 1월 31일 -18.7℃로 역대 최저 기온 8위를 기록했다. 부산조차도 1월 31일 아침 최저 기온이 -11.9℃까지 떨어졌다. 2월 1일은 아침 최저 기온이 서울 -17.8℃, 인천 -17.3℃로 나아지는 듯했으나 추가로 한기가 낮에 또 찾아와서 각각 낮 최고 기온 -11.5℃, -11.9℃를 기록하고 2월 2일 아침 최저 기온이 서울 -19.6℃, 인천 -18.0℃를 기록했다. 2월 2일 서울의 아침 최저 기온 기록은 1913년 2월 9일과 함께 2월 역대 공식 최저 기온 1위이다. 인천의 경우도 1913년 2월 9일 -18.4℃ 다음으로 2월 역대 최저 기온 2위이다.

  • 1910년 11월~1911년 1월, 4월 한파
    11월부터 기온이 낮아지기 시작해 12월이 시작되었다. 서울은 12월 한 달 동안 최저 기온이 -5℃ 이상으로 올라간 날이 5일[13]에 불과했으며, 12월 11~12일에 최저 기온이 -16.8℃까지 내려가는 등 겨울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추운 날씨를 보였다. 결국 12월 평균 기온이 -4.6℃로 평년보다 상당히 낮은 기온을 기록했고 다음 해 1월까지 이어졌다. 12월 31일~1월 2일에 큰 한파가 오고 서울은 1월 2일 최저 기온이 -19.7℃로 -20℃에 가까울 정도로 낮았다. 그 다음부터는 12월과 비슷한 기온을 보이다 역시나 1월 11일부터 다시 한파가 시작되었고, 서울은 1월 13일에 가장 낮아서 -21.5℃를 기록했다. 이후 한파의 영향으로 -10℃를 밑도는 추위가 계속되었고 1월 24일까지 최저 기온 -19.7℃를 기록하는 등 매우 추웠으나 1월 25일 이후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대체로 1월은 최저 기온 극값이 기록적이기는 했지만 한파가 짧게 자주 찾아오는 양상을 띄었고, 최저 기온이 -20℃ 전후로 떨어진 몇몇 날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맘때 기온을 기록하였으며 하순 후반에는 아예 이상 고온을 보였기에 서울의 월평균 기온은 -5.0℃로 평년보다 조금만 낮았다. 게다가 2월과 3월 역시 일제강점기 치고는 평년 수준을 기록했다(월평균 기온 기준으로 -1.1℃, 4.0℃).
하지만 4월에는 심한 이상 저온이 이어져서 4월 19일에 이 내리고 4월 20일에 0.3℃를 기록하였으며 월평균 기온도 9.4℃로 역대 네 번째로 낮았다. 그리고 이해부터 1913년까지는 연평균 기온이 매우 낮아서 여름에도 선선했다. 다만 대구는 이 시기에도 36~38℃를 넘어가는 등 상당히 더웠다.

  • 1912년 10월~1913년 3월 한파
    -20℃ 이하의 한파는 없었지만, 서울은 9월부터 이어져온 엄청난 이상 저온 현상으로 10월 초중순부터 영하로 떨어지며[14] 급기야 기상학적 겨울이 (공식 관측상 유일하다고 기록된) 10월 하순에 시작한 것도 모자라, 11월 16일에 최저 기온이 -9.9℃를 기록하여 그 조짐을 보였다. 12~1월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역시나 최저 기온 -18~-19℃ 정도의 큰 한파가 찾아왔으며, 1월 14일에 -18.9℃를 기록하는 등 한파의 기세를 더해갔다. 그리고 한파는 2월이 되어 더 심해져서 2월 9일에 서울은 아침 최저 기온 -19.6℃, 낮 최고 기온 -12.1℃, 일평균 기온 -15.9℃로 1910년 2월 2일과 함께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2월 역대 공식 최저 기온을 기록했고, 최고 기온과 일평균 기온은 아예 압도적으로 낮은 하위 1위로 등극하였다. 3월에도 중부 지방은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한 날도 있을 만큼 충분히 기록적이었다. 4월에 들어 기온이 크게 올라 에 접어들며 겨울이 끝났지만 완연한 봄이라고 하기에는 평년보다 낮았으며, 이후 연말까지 심한 이상 저온 현상으로 인해 1913년 서울의 연평균 기온이 10.0℃로 역대 세 번째로 낮았다.

  • 1915년 1월 중순, 2월 하순~3월 상순 한파
    1월 12~15일 사이에 발생한, 한반도에서 근대적인 기상 관측 시작 이래 가장 강한 단일 한파이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강릉, 목포 등 당시에 기상관측소가 있던 곳은 대부분 최저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이다. 기상자료개방포털에서 당시 기온을 시간대별로 확인할 수 있다. 1914~1915년 겨울은 일제강점기 치고는 따뜻한 겨울이었지만 1월 중순만 유독 한파의 강도가 심했다. 즉 엄청나게 강하지만 짧은, 짧고 굵은 한파가 지나간 셈. 특히 한반도 역사상 기록적으로 추웠던 1915년 1월 중순 한파의 극점은 전국이 모두 1월 13일이었다.
우선 서울의 기록을 살펴보자. 서울은 1월 12일에 전날인 1월 11일 최저 기온 -3.1℃에서 무려 18℃ 가량 떨어진 -20.9℃를 기록했다. 불과 하루만에 최저 기온이 18℃ 가까이 떨어진 것이다. 바람도 엄청나게 불어서 최대 풍속이 9.2m/s를 기록하여 체감온도는 무려 -34.0℃까지 급하락했다. 게다가 이 기온은 정황상 아침이 아니라 1월 12일 오후 11시~자정 사이 쯤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 링크에서 1월 12일의 기온 분포를 시간별로 보면 오전 2시 -4.6℃, 오전 6시 -8.0℃로 하강했는데, 기온 하강이 해가 뜬 이후에도 여전히 엄청난 속도로 지속되어 한낮인데도 기온이 올라가기는 커녕 오히려 3~5℃ 이상 하강하며 오전 10시 -11.5℃, 오후 2시 -15.0℃, 오후 6시 -17.3℃, 오후 10시 -20.7℃까지 떨어졌다. 보통 다음 날 아침이 -21~-22℃로 기록적으로 추워도 전날 오후 10시~자정 사이의 기온은 아직 -16~-18℃대에 머무는데 1월 12일은 오후 10시에 이미 -20.7℃까지 떨어진 점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기온 하강이 거의 없어서 다음 날인 1월 13일 아침 최저 기온이 -21.3℃를 기록했다. 한편 1월 13일 서울은 낮 기온도 거의 오르지 못해 낮 최고 기온조차 -16.3℃에 머물렀다. 결국 서울의 1915년 1월 13일 일평균 기온이 -19.2℃를 기록하여 현재까지도 역대 최저 1위이다. 서울은 다음 날인 1월 14일도 아침 최저 기온 -21.3℃, 낮 최고 기온 -13.8℃에 그치고 일평균 기온도 -18.0℃로 역대 최저 3위를 기록했다. 인천의 경우도 1월 12일의 일 최저 기온 -20.6℃[15]를 기록했으며, 1월 13일에는 아침 최저 기온 -20.9℃, 낮 최고 기온 -15.9℃, 일평균 기온 -18.7℃인천의 역대 최저 기온 2위, 낮 최고 기온 역대 최저 1위, 일평균 기온 역대 최저 1위를 한 번에 경신한다. 1월 14일도 아침 최저 기온 -20.6℃[16], 낮 최고 기온 -12.5℃, 일평균 기온 -16.9℃로 여전히 극단적으로 추웠다.
이 한파가 놀라운 점은 태백산맥의 영향으로 겨울에 상대적으로 따뜻한 강릉조차 1월 13일 아침 최저 기온이 -20.2℃까지 떨어져 강릉의 기상 관측 사상 역대 최저 기온 1위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어지간하면 아무리 추워도 -15℃ 아래로 잘 떨어지지 않는 대구도 1월 13일 아침 최저 기온 -18.6℃[17], 낮 최고 기온 -11.3℃, 일평균 기온 -14.9℃로 대구 일평균 기온 역대 최저 1위를 기록한다. 따뜻한 도시의 대명사인 부산조차도 1월 13일 아침 최저 기온 -14.0℃, 낮 최고 기온 -8.2℃, 일평균 기온 -11.3℃를 기록해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부산의 역대 최저 기온 1위, 낮 최고 기온 역대 최저 1위, 일평균 기온 역대 최저 1위를 달성했다. 이후 1월 15일까지 서울은 -20℃ 이하의 기온을 기록하며 엄청난 추위를 보였으나 1월 16일부터 크게 따뜻해지며 다시 평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다만 1월 하순에 잠시 엄청난 이상 고온이 있었는데, 1월 27일에 서울 최고 기온이 무려 12.0℃까지 올라갔을 정도였다. 하순의 이상 고온을 제외하면 진짜 한파는 거의 끝났지만 이후에도 평년보다 조금 낮았으며 2월 상순에 잠시 -13~-16℃ 정도의 한파가 있었다.[18] 참고로 일본 기상청에서 확인해본 결과 이 한파 당시에 세워진 역대 순위권의 기록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도 1915년 1월 한파는 기록적인 한파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가사키의 예시를 보면, 1월 14일의 아침 최저 기온, 낮 최고 기온이 모두 낮은 쪽으로 상위 1위에 랭크되어 있다.
한편 3월을 하루 앞둔 2월 28일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서울의 경우 아침 최저 기온이 -13.7℃, 낮 최고 기온이 -11.6℃로 일평균 기온이 -13.0℃를 기록했다. 강릉의 경우 일평균 기온이 -11.8℃를 기록했다. 3월을 하루 앞에 두고 이런 날씨를 기록하였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며 계절을 고려할 때 동년 1월 13일 한파와 강도가 비슷하거나 더 심해 보인다. 이후 3월 1일에는 더 낮아져서 최저 기온 -14.1℃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3월 역대 최저 기온을 경신했다. 남은 3~4월에도 이상 저온이 기승을 부리면서 추운 날씨는 길게 이어졌는데, 3월 평균 기온은 0.6℃로 매우 낮았고 4월도 9.5℃로 2010년 4월과 같았다.

  • 1916년 12월 25일~1917년 2월 10일 한파
    한반도에서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1월 평균 기온이 가장 낮은 겨울 중 하나다.
    1월로는 1936년, 1963년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추웠던 1월로 기록되었다.[19] 1916년 12월 중순까지는 아직 한파가 찾아오지 않아 비교적으로 온화한 편이었다. 1916년 12월 16일에 -8.5℃까지 떨어지기는 했으나 12월 24일까지 영하 두 자릿수 이하를 기록한 날은 없었다.[20] 특히 초중순에는 추위가 거의 없어서 12월 24일까지의 평균 기온은 0.6℃로, 당시 기준으로 가장 높았던 1915년 12월의 0.8℃에 버금가는 이상 난동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성탄절이 되자마자 완전히 반전되어, 최저 기온이 약 14℃ 가량 떨어지며 갑작스러운 한파가 찾아왔다.
12월 25일 낮에는 -4~-5℃ 정도였으나 오후 6시부터 서울의 기온이 -9.7℃로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오후 10시에는 -14.3℃까지 떨어졌고, 이후 12월 26일 오전 2시 -16.9℃, 오전 6시 -18.5℃, 오전 10시 -17.2℃를 기록한다. 결국 1916년 12월 26일 서울은 아침 최저 기온 -19.0℃[21], 낮 최고 기온도 -12.5℃로 12월 낮 최고 기온 역대 최저 1위를 기록, 일평균 기온은 -16.1℃로 산출되어 12월 역대 최저치였다. 같은 날 인천은 아침 최저 기온 -18.6℃, 낮 최고 기온도 -12.4℃, 일평균 기온은 -15.9℃로 산출, 아침 최저 기온과 일평균 기온이 12월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12월 평균 기온도 12월 24일까지의 0.6℃에서 최종 -1.4℃로 약 2℃나 떨어져 이전의 난동을 감안할 시 엄청난 추위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12월 26일 이후 1월 12일까지 12월 30일 단 하루를 제외하고 최고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한파는 1~2월 내내 강약을 반복하면서 무려 2개월 가까이 지속되었다. 한파 기간 동안 총 네 번의 기온 극점이 있었는데 12월 26일, 1월 4~5일, 1월 8~10일, 1월 21~24일이다. 특히 1월 8일에는 서울이 -20.4℃로 -20℃를 밑돌았으며 인천은 -19.5℃를 기록하여 서울과 차이가 많지 않았고 이 밖에도 강릉 -17.0℃, 대구 -16.3℃, 부산 -12.7℃ 등으로 많은 지역이 최저 기온 극값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결국 서울의 1월 상순 평균 기온이 -11.5℃하위 1위를 기록했다.[22] 중순에는 최고 기온도 영상으로 올라가고 몇몇 날이 최저 기온 -10℃ 이하를 기록하지 않아 비교적 따뜻한 날이 조금 있었으나, 1월 21일에 다시 엄청난 한기가 재림하여 서울은 1월 21일에 -19.8℃, 다음 날인 1월 22일에는 1월 중 가장 낮아서 -21.1℃를 기록했다. 서울의 1월 하순 평균 기온은 -9.5℃를 기록하여 하위 4위에 속한다. 1월 평균 기온도 서울 -9.0℃(역대 최저 2위), 인천 -8.0℃(역대 최저 1위), 대구 -5.1℃(역대 최저 1위), 부산 -1.5℃(역대 최저 3위) 등으로 대부분의 지점에서 역대 최저 1~3위에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1월 30~31일에 조금 올라갔던 기온이 2월이 시작되자 곧바로 급락해서 2월 상순에도 -17℃ 전후[23]의 강력한 한파가 남았다.
그나마 2월 중순부터 기록적인 한파는 잦아들었지만, 이 여파로 서울의 2월 평균 기온도 -3.4℃에 달했다. 심지어 3월 하순까지도 최저 기온이 빈번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하는 등(특히 3월 27일에 -3.7℃까지 내려갔다), 1936년만큼은 아니지만 무시 못할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역시나 북한은 더 추워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17년 1월 평양의 월평균 기온이 -12.1℃, 최저 기온은 무려 -28.5℃를 경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평안북도 운산에서는 12월 26일 -37.6℃, 황해북도 신계에서는 1월 22일 -31.4℃를 기록했다는 정보가 남아있다.[24] 중강은 1916년 12월 최저 기온 -35.2℃의 기록이 남아있고[25] 다음 해 1917년 1월에는 무려 -39.5℃까지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26] 또한 중강의 1917년 1월 월평균 기온이 -23.3℃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더군다나 1917년 1월 한파는 한파 강도도 상상초월이었지만 지속적이기까지 해서 서울도 최저 기온이 -10℃ 이상으로 거의 오르지 못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중강의 최저 기온을 추측해보면 1월 한 달 동안 최저 기온이 -20℃ 이상 올라가는 것도 손에 꼽을 정도의 초강력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게다가 중강이 이 정도였다면 백두산 근처인 삼지연에서는 -45℃ 이하의 기록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1917년 한 해 동안 서울 등 중부 지방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평년보다 낮은 이상 저온 현상이 계속되었고, 여름이 되자 서울에서 36℃를 넘는 폭염이 찾아오기는 했으나 가을 늦더위 없이 10월 하순부터 기온이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며 12월에도 매우 강한 추위가 불어닥쳐서 후술할 1917~1918년 한파로 이어졌으며, 결국 1월과 12월의 한반도 역사상 기록적으로 강력한 한파로 인해 서울의 1917년 연평균 기온이 9.8℃로 1936년과 함께 공동 최저 2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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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자료는 기습 한파가 찾아왔던 1916년 12월 26일 낮 12시의 일기도이다. 매우 길게 남쪽으로 뻗어있는 시베리아 고기압을 볼 수 있으며 희미한 기온선을 자세히 보면 서울개성, 황해도 해안 지방은 -10℃에서 -15℃ 사이에 위치해 있고 평양원산 등 그보다 북쪽에 있는 지역은 -15℃에서 -20℃ 사이에 해당되고 압록강, 두만강 라인에 속하는 일부 지역들은 낮 기온조차 무려 -20℃에서 -25℃ 이상 오르지 않는 매우 강한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는 것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낮 12시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 기온 기준선은 최저 기온 기준이 아닌 낮 기온 기준일 가능성이 높다.

  • 1917년 12월 중순~1918년 1월 한파
    1916년 4월부터 이어진 강한 라니냐로 인한 이상 저온의 여파로 2년 연속 한파 겨울을 맞이했다. 1917년 12월~1918년 1월은 북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도 기록적인 한파에 시달렸다. 12월 초중순까지는 평년과 비슷한 기온을 기록했으나, 12월 15일 이후로 -10℃에서 -20℃ 안팎의 한파가 들이닥쳤다. 서울은 12월 15일부터 1월 9일까지 거의 한 달 정도인 25일간 단 한 차례도 낮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성탄절이 지나 한파는 절정에 달했는데, 12월 26일 서울의 낮 최고 기온은 -12.3℃, 인천-12.7℃[27]를 기록했고, 12월 27일의 최저 기온은 서울 -20.4℃(12월 역대 최저 3위), 인천 -17.9℃(12월 역대 최저 2위), 대구 -15.2℃(12월 역대 최저 1위), 부산 -12.0℃(12월 역대 최저 1위)까지 떨어졌다. 북한은 역시나 말할 것도 없이 훨씬 추워서 평안북도 초산에서 비공식적으로 -36.7℃의 기록이 관측되었다. 중강도 1917년 12월 최저 기온 -33.8℃를 기록하여 독보적이었다.
월평균 기온도 서울 -5.7℃[28], 인천 -5.0℃, 대구 -2.2℃를 기록하면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12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 1위를 기록했다.[29] 또한 12월 하순은 일제강점기의 어지간한 1월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한파가 기승을 부린 탓에, 서울의 12월 하순 평균 기온이 무려 -10.7℃에 달해 하위 1위다. 이듬해 1월 상순에도 한파는 계속 이어져서 1월 3일에는 서울의 아침 최저 기온이 -21.8℃를 기록했다. 이 여파로 서울의 1월 상순 평균 기온도 -10.8℃하위 2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1월 2~10일까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13℃ 이하를 기록하는 초강력 한파가 이어졌다.
다행히 1월 중순부터는 한파가 진행되어도 점차적으로 추위가 약해졌으며, 한파는 라니냐가 풀릴 쯤인 2월이 되자마자 풀려서 전년도처럼 심한 꽃샘추위가 오지는 않았다. 다만 2월 중순에는 1월의 휴유증인지는 몰라도 반짝 한파가 있었지만 2월 하순에 최고 기온이 크게 오르며 3월에 들어서며 겨울이 끝났다. 이는 현대에 와서도 이상 고온에 속한다. 심지어 한파 절정 기간이었던 12월 15일~1월 9일까지 26일간의 평균은 무려 -10.2℃로 아예 영하 두 자릿수를 찍었다. 실제로 12월 25일~1월 9일 기간 동안(12월 31일, 1월 1일을 제외하고) 일평균 기온이 영하 두 자릿수로 아예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1월이 추웠던 1917년, 1936년, 1963년도 깨지 못한 기록이다.[30] 이렇듯 1월도 1월 9일을 끝으로 역대 최장이라 부를 만한 장기 한파는 끝이 났지만 중하순에도 2011년처럼 꽤 추운 날씨가 길게 이어져 서울 월평균 기온 -7.5℃로 역대 최저 7위에 속하는 상당히 추운 겨울로 남았다. 하지만 2월이 되자마자 따뜻해지고 중순에 반짝 한파가 찾아왔다.

  • 1918년 12월~1919년 2월 한파
    1916~1917년, 1917~1918년 겨울보다는 따뜻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추웠다. 12월은 당시 치고는 조금 따뜻했지만 1월에는 매우 추워졌고, 2월이 되어 서울에서 -18.3℃를 기록하면서 앞서 서술한 두 한파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서울은 -20℃ 이하의 기온은 없었으나 한파가 오면 -15℃ 이하를 기록하는 등 12월부터 2월까지 안 넣기에는 애매한 정도이자[31] 평년보다 다소 추운 겨울이었다.


2.3. 1920년대[편집]


1910년대의 극단적 성격의 겨울 양상은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매우 추운 겨울이 많았다. 특히 서울의 경우는 1927년 12월에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했을 정도로 한파의 강도는 1910년대 못지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 연대에는 1915~1916년 겨울처럼 따뜻한 겨울도 전무했다. 물론 해마다 강도의 차이는 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중요한 시즌만 서술하였다.

  • 1919년 12월~1920년 2월 한파
    12월 중순부터 시작된 한파가 3월까지 지속되며 4년 연속 한파가 찾아왔다. 12월 30일에 서울-19.3℃를 기록하였고 다음 해 1920년 1월에 들어서도 여전히 한파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서울의 1월 최저 기온은 1월 4일 -22.3℃로 그야말로 엄청난 기록을 보여주었다. 이는 서울의 역대 최저 기온 3위이다.
1월 중순~하순이 되어서도 한파는 잘 풀리지 않고 여전히 -10℃에서 -19℃의 한파가 기승을 부렸으며, 1월 9일 -19.5℃, 1월 16일 -19.6℃, 1월 23일 -19.7℃ 등 -20℃에 근접하는 추운 날씨가 길게 이어졌다. 다행히 1월 28~31일에 잠시 크게 따뜻해졌지만 다시 2월에 들어 추워졌다. 2월 11일 서울의 최저 기온은 -18.5℃로 1월 못지않은 기온을 기록했으며 이는 서울의 2월 역대 최저 기온 3위이다.
12월에서 2월까지 빠짐없이 추웠으며, 그야말로 삼한사온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3월에 들어 기온이 점차 온화해졌지만 2000년대 이후 3월 치고는 꽤 낮았다. 현재의 북한 지역은 남한보다 더 심해서, 통계청에 따르면 평양은 비공식적으로 1920년 1월 최저 기온이 무려 -28.5℃로 1917년 1월과 함께 역대 최저다.

  • 1921년 12월 하순~1922년 2월, 3월 하순 한파폭설
    1921년 성탄절 무렵에 단기간 한파가 지나간 이후로 큰 추위 없이 12월을 마무리했지만, 이듬해인 1922년이 되자 1월 2일부터 역시나 한파가 기승을 부렸으며 이 한파는 2월 상순까지 이어졌다. 서울은 최저 기온이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하지 않은 날이 월 전체에서 불과 5일[32]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갔고, 월평균 기온이 -7.8℃로 1945년 1월과 함께 월평균 기온 역대 최저 5위를 달성했다. 1월 15일처럼 잠시 크게 따뜻한 시기도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1월 중하순에 가장 심한 한파가 몰려온다. 서울은 1월 16일 -10.1℃, 1월 17일 -15.2℃, 1월 18일 -17.6℃, 1월 19일 -19.8℃로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1월 20일에 -21.0℃를 기록했다. 게다가 남은 하순에도 최저 기온 -12~-19℃의 한파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한파가 본격적으로 심화된 1월 17~31일까지는 2주 연속으로 서울 최저 기온이 -12℃ 이하를 기록하는 엄청난 추위를 보였다. 결국 서울의 1월 하순 평균 기온은 무려 -10.0℃를 기록하였다.
북한의 가장 추운 지역으로 잘 알려진 중강은 11월부터 -20℃를 밑도는 기온을 세우더니 1월 18일에는 -41.6℃를 기록할 만큼 심했으며, 대한민국 통계청 기온 자료에 따르면 평양1월 평균 기온이 -13.6℃로 압도적으로 낮아 관측 이래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월평균 기온 최저 1위를 기록했고 아침 최저 기온 기록도 -27.8℃에 달했다.
1월이 거의 빠짐없이 한파로 뒤덮였으며, 이러한 기록적 한파는 2월 초중순까지 이어지다가 점차 물러갔다. 하지만 추위가 완전히 물러가지는 않아서 3월 상순에서 4월 하순까지의 꽃샘추위 뒤끝이 매우 심했다. 특히 서울은 3월 23일 혹은 24일에 최심적설량 31cm로 2010년 1월 4일의 25.8cm보다 5.2cm나 많은 폭설이 내렸다. 출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천은 더 심해서 무려 43.8cm라는, 수도권에서 볼 수 있는 수치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강설량을 3월 하순에 재현한다. 이는 당연히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압도적인 폭설 기록이다. 폭설 다음 날인 3월 25일에 서울이 -10.2℃까지 하강, 춘분 이후 관측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하였다. 이는 서울에서 3월 하순에 측정된 기온 중 압도적으로 가장 낮은 기온이다.
그래도 다행히 4월 중순에 들어서 기온이 올라가며 추위는 풀렸다. 또한 중강의 1922년 1월 평균 기온이 -26.6℃로 믿기지 않는 기록을 보여주면서 한반도 기상 관측 사상 월평균 기온 역대 최하위를 기록했고 중국 하얼빈에도 엄청난 추위가 찾아와 월평균 기온이 -27.6℃로 중국의 1898년 기상 관측 사상[33] 1월 역대 최저 월평균 기온으로 남아있다. 평양중강, 하얼빈 셋 다 1월 평균 기온 역대 최하위를 동시에 기록한 것을 보면 당시 한기의 중심이 북한만주 일대에 엄청나게 강하게 형성된 듯하다. 그 영향이 한기의 가장자리인 서울에도 강하게 미쳤기에, 서울 역시 월평균 기온 -7.8℃라는 매우 낮은 값이 나온 것이고. 하지만 의외로 남부 지방은 1922년 1월의 월평균 기온, 아침 최저 기온 모두 그렇게까지 낮지 않은 것을 보면 한기가 한반도 이북에 편중되어 있었다는 점이 더욱 확실해진다. 일본도쿄의 1월 평균 기온이 0.6℃로 1885년 1월과 함께 역대 최하위를 기록하였고, 1월 22일에는 최저 기온이 -8.1℃로 기록되었다. 삿포로에서는 1월 평균 기온 -10.2℃로 1876년 기상 관측 이래 가장 추웠던 1월로 기록되었다. 일별로 들어가면, 1월 17일에 -27.0℃, 다음 날에도 -26.8℃를 기록하였다.

  • 1922년 11월~1923년 4월 한파폭설
    월별 평균 기온으로 보면 특별하지는 않지만 일별로 상세하게 따지면 꽤나 흥미로운 기록이 많았던 겨울이다. 1920년대 내에서도 상당히 추웠던 겨울로, 11월부터 때이른 추위가 기승을 부리며 시작되었다. 11월 2일에 -1.0℃를 기록하며 일찍이 시작된 추위는 중순인 11월 20일에 최저 기온 -8.4℃, 최고 기온 -0.6℃로 당시 거의 한겨울 날씨를 보이면서 기세를 더해갔다. 하순에도 11월 22일을 제외하면 아침 최저 기온이 전부 영하권을 기록하면서 결국 11월 26일 최저 기온 -8.8℃, 최고 기온 -4.3℃를 기록, 다음 날인 11월 27일 -11.6℃를 기록하면서 11월 극점을 찍는다. 이는 1970년 11월 30일 -11.9℃, 1947년 11월 27일 -11.8℃ 이후 현재까지도 11월 역대 최저 기온 3위이다. 이렇게 하여 산출된 11월 평균 기온도 3.5℃로 매우 낮았다. 이는 11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 3위이다.
시간이 흘러 12월 상순에 들어서는 그나마 따뜻한 편이었으나 12월 중순부터 다시 추워지기 시작해 12월 13일에 -11.1℃를 기록하였다. 12월 18일 -12.8℃, 12월 19일 -14.7℃, 12월 20일 -15.7℃ 등 겨울이 깊어질수록 점점 계단식으로 추워지는 매우 교과서적인 추위 패턴이 유지된다. 한편 12월 15일에는 최저 기온 -9.0℃, 최고 기온 -3.8℃에 5.9mm의 강수가 있는 것으로 보아 폭설이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로 낮은 기온이면 수상당량비도 커서[34] 10cm에 가까운 폭설이 쏟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12월 26일까지는 -10℃ 미만의 추운 날씨가 이어지다가 12월 27일 이후 조금 따뜻해지나 싶더니 12월 31일 이후 다시 추워져 역대 최악의 신정 한파가 시작된다. 1923년 1월 1일 당시 서울의 기온을 시간별로 보자면 오전 2시 -12.5℃, 오전 6시 -14.3℃, 오전 10시 -14.7℃, 오후 2시 -13.9℃, 오후 6시 -16.3℃[35], 오후 10시 -17.7℃, 자정 이전에 벌써 -18.4℃를 기록하며 마무리했고 다음 날인 1월 2일에는 오전 2시 -18.2℃, 오전 6시 -19.7℃를 기록한다.
종합적으로 1월 2일 최저 기온은 -20.4℃에 달했고 최고 기온은 -12.0℃에 머물러 일평균 기온은 -16.1℃로 추산되었다. 1916년 12월 26일과 함께 서울의 일평균 기온 역대 최저 공동 8위 온도다. 게다가 다른 지역의 한파는 상대적으로 서울보다 더 기록적이었다. 보통 한파 시 서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따뜻한 인천도 서울과 기온 차이가 크지 않아 최저 기온이 -19.4℃에 달해 지금까지도 역대 최저 기온 공동 7위의 한파고, 강릉 최저 기온 -16.6℃, 대구 최저 기온 -16.1℃에 최고 기온 -9.1℃[36], 부산 최저 기온 -12.5℃[37] 등 전국이 순위권 안에 드는 초강력 한파였다. 서울은 1월 3일에도 -19.0℃를 기록하고 1주일이 지난 1월 10일에도 -19.8℃의 강력한 추위가 찾아왔다. 1월 상순 평균 기온은 -8.9℃로 현재까지도 하위 5위이며, 1월 중순까지도 최저 기온이 -10℃를 넘나들었다. 중순에는 또 한 번 한파가 강해져서 1월 17일에 최저 기온 -20.0℃를 기록했다. 특히 1월 19일에는 여름이 덥다는 대구조차 -20.2℃의 기온이 관측되어 10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대구의 역대 최저 기온을 세웠다.
이렇게까지 대구의 기온이 극단적으로 떨어진 이유는 한파 직전에 닥친 폭설의 영향으로 보인다. 지면에 가득히 쌓인 이 햇빛을 반사시키는 등 반사율을 강화시켜서 기온을 더욱 극단적으로 내렸다는 원리. 실제로 자료를 보면 1월 15일 대구에는 33.5mm의 강수량이 기록되어 있는데, 같은 날 기온 자료를 살펴보면 최저 기온 -3.9℃, 최고 기온 1.6℃, 일평균 기온 -2.0℃이다. 즉 저 강수량이 모두 으로 내렸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태. 위 자료들에 근거하여 최소 25~30cm 이상의 대폭설이 쏟아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렇게 쌓인 엄청난 양의 은 잘 녹지도 않는다. 때마침 찾아온 강한 한기와 함께 시너지를 내어 기온을 극단적으로 끌어내려 대구의 기온을 1월 16일 -13.5℃, 1월 17일 -15.3℃, 1월 18일 -19.6℃, 1월 19일 -20.2℃까지 내린 것이다. 그러다가 또 1월 21일이 지나면서 갑자기 따뜻한 날씨를 보였다. 온난종관형 저기압이 지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은 -5.8℃로 기록적인 축에는 못 들지만 당시 치고도 상당히 추운 편. 풀렸던 추위는 2월에 들어 다시 기를 폈다. 한파의 강도는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최저 기온이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한 날이 많았다. 2월 중순에는 꽤나 따뜻했으나 한파는 아직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고 2월 하순에 또다시 찾아왔다. 2월 26일에는 서울 최저 기온 -13.9℃, 2월 27일에는 -13.5℃를 보이며 3월을 코 앞에 둔 시기 치고는 꽤나 지나친 추위였고, 급기야 서울의 2월 하순 평균 기온이 -6.2℃하위 1위를 기록하였다. 3월에는 기온이 올라가서 평범한 날씨를 맞이했지만 하순부터 다시 떨어져 4월에는 꽃샘추위를 기록하며 다시 기온이 낮아졌다. 꽃샘추위로 인해 4월 20일에는 최저 기온이 -1.3℃로 영하권이었고, 4월 평균 기온도 9.3℃로 역대 세 번째로 낮았다.

  • 1923년 11월~1924년 3월 한파
    여름은 다소 더웠지만 9월부터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9월 28일에 서울이 5.6℃였고, 10월 내내 약한 이상 저온이 이어졌다. 10월 하순에 기온이 오르기는 했으나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며 11월로 접어들면서 삼한사온의 날씨를 보였다. 하지만 하순부터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면서 영하의 기온이 지속되었고 11월 30일에 -10.9℃, 겨울 첫날인 12월 1일에 -13.1℃로 매우 크게 추워져서 하루만 빨랐어도 1970년 11월 30일 기록된 -11.9℃의 11월 역대 최저 기온이 경신될 뻔했다. 이 강력한 한파는 점차 풀렸지만 중순부터 기온이 다시 낮아지기 시작하더니 하순으로 갈수록 심해지면서 12월 29일에 서울 최저 기온이 -16.8℃를 기록했다. 1월로 넘어가면서 한파가 도로 풀렸지만 초중순에 -14℃ 정도의 반짝 한파가 온 뒤 1월 11일부터 기온이 크게 오르기 시작하면서 1월 16일까지 최고 기온이 연속으로 7℃ 이상이상 고온이 판을 치면서 한파가 가시는 줄 알았으나 1월 하순에 더욱 강한 추위가 지속되면서 -10℃ 이하를 연속으로 기록하였고 1월 27일에 서울 최저 기온이 -18.7℃를 기록했다.
그리고 2월도 초중순을 제외하고 추운 날씨가 길게 찾아와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한 날이 있었고 2월 23일에 -13.2℃를 기록하여 늦겨울 추위의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3월도 하순인 3월 21일까지 최저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지 않았으며 전부 -2℃ 이하인 지속적이고 긴 추위가 이어졌다. 다만 3월의 1.1℃를 제외하고 월평균 기온은 한파라고 부르기 처참한 수준인데, 12월 -2.1℃, 1월 -2.5℃, 2월 -1.8℃로 겨울 최저 기온 극값에 비해 월평균 기온이 매우 높았다. 특히 12월은 평년보다 조금만 낮은 수준이라 그렇다 쳐도 1월이 매우 높았다. 이는 중순의 이상 고온이 월평균 기온을 떨어뜨리는데 방해를 하기도 했고 한파가 올 당시 최저 기온만 낮았고 최고 기온은 최저에 비해 비교적 높은, 일교차가 매우 큰 날씨를 보여서이다.

  • 1926년 12월~1927년 2월 한파
    12월 상순부터 강력한 한파가 찾아와 서울은 12월 9일에 -16.9℃를 기록하여 12월 상순의 추위라고는 믿기지 않는 칼바람이 불었고,[38] 월평균 기온도 -4.0℃로 일제강점기 시대를 감안해서라도 평년보다 2~3℃ 낮았다. 12월 9일 혹한의 원인 참조.
이후 1927년 1월은 갑자기 크게 따뜻해져서 1월 6일에 서울 최고 기온이 11.7℃까지 올라가면서 엄청난 대비를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1월 중순에는 다시 평년 수준으로 돌아갔고 1월 15일에는 폭설로 추정되는 날씨를 보였다. 특히 강릉에서는 최저 기온 -4.7℃, 최고 기온 0.8℃에 일 강수량 69.3mm의 기록이 남아있다. 1월 18일부터 기온이 10℃ 이상 떨어지면서 가장 강한 한파가 찾아와 1월 22일에는 서울의 최저 기온이 2018년 1월 26일과 비슷한 값인 -17.7℃를 기록했다. 이 한파는 1월 하순까지 계속 이어지다 2월에 들어서자마자 누그러지는 듯 보였으나 2월 7~14일에 서울에서 -10~-14℃의 한파가 있었고 겨울의 마지막 날인 2월 28일에도 끝까지 한파가 기승을 부리며 서울은 2월 28일 -13.3℃를 기록했다. 지금까지 서울 위주로만 서술해서 상대적으로 다른 연도들에 비해 한파의 강도가 조금 뒤쳐지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단락이 만들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북한평안북도, 자강도 지역이 유래없이 추웠기 때문이다.
아래 기록들은 모두 비공식 자료인 만큼 공신력이 약간 부족하나, 강계는 1월 23일 -42.4℃를 기록해 현재까지도 한반도 역대 최저 기온 2위이며 풍산에서는 1월 19일 -41.5℃, 갑산에서는 1월 19일 -41.0℃, 삼수에서도 1월 22일 -41.0℃를 기록해 사실상 한반도 한파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40℃보다 낮은 기온을 기록한 지역도 몇 있었으며 이는 후술할 역대급 기록들도 쉽게 미치지 못하는, 그야말로 엄청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평양이 -25.5℃를 기록했으며 창성은 1월 22일 -34.2℃, 그나마 좀 이름이 알려진 의주조차 1월 22일 -32.0℃로 여러모로 평안북도 지방에서는 역대 최악의 한파라고 불릴 만했다.
북아시아동시베리아에서도 강력한 한파가 덮쳐 러시아 야쿠츠크에서 -50℃를 기록하였고,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 상하이도 혹한으로 피해를 입었다. 또한 평안북도 신의주압록강을 맞대고 있는 중국 단둥에는 1927년 1월 월평균 기온이 -11.0℃를 기록하였다.

  • 1927년 12월~1928년 2월 한파
    12월 중순까지는 평년과 비슷한 기온을 기록하였으나, 12월 18일부터 추위가 시작되어 -10℃ 전후의 기온을 기록하면서 12월 27~28일 서울에 19.5cm라는 폭설이 내린 이후로 추위가 더욱 심해졌다. 서울은 12월 29일에 최저 기온이 이미 -20.7℃로 -20℃ 이하로 추락했으며, 특히 1927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는 9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서울의 역대 최저 기온-23.1℃를 기록했다. 특히 1월도 아닌 12월 하순에 이러한 기록이 나와서 서울의 역대 공식 최저 기온을 기록했으며 당시 기준으로도 평년보다 14~16℃ 정도 낮은 초이상 저온이다. 서울의 12월 하순 평균 기온은 -7.2℃를 기록하여 하위 3위였다.
또한 이날 강원도 철원에서도 비공식적으로 -31.0℃까지 떨어졌다는 정보가 있고 횡성에서도 비공식적으로 -29.8℃까지 떨어진 기록이 있지만 신문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의문스러운 점은 당시 서울에 12월 하순에 19.5cm의 이 오면서 반사율이 심해져서 기온이 크게 내려갔다 하더라도 서울 쪽에만 지나치게 기온이 낮게 나왔다는 것이다. 12월 31일에 인천도 -13.5℃ 정도에 불과했으며 남부 지방도 영하 한 자릿수로 크게 낮지 않았고, 심지어 제주는 최저 기온이 영상권이었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평년~약간 낮은 기온을 보였는데 서울 혼자 -23℃ 이하로 내려가 역대 최저 기온 1위를 찍을 정도로 추웠다는 점에서 다소 신빙성이 의심된다. 아예 오류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말이 많은 기록 중 하나이다. 어쩌면 이 당시 온도계의 정확성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39] 당시 기사 참조, 부산, 김해 지방에는 많은 눈이 내리고 낙동강까지 얼었다.
이후 -15℃를 밑도는 추위가 1월 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특히나 1월 5~7일에는 다시 한 번 기온이 급락해 1월 5일 서울 최저 기온이 -22.2℃로 역대 최저 4위를 기록했고 1월 6일과 1월 7일도 -20.9℃, -21.7℃를 기록했으며 서울의 1월 상순 평균 기온은 -9.3℃에 달해 1938년과 함께 하위 4위로 기록되었다. 게다가 중부 지방에서 -20℃를 밑도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 매서운 추위를 보였으나 1월 9일부터 크게 따뜻해지며 평년 기온을 유지하거나 조금 낮은 수준의 기온을 기록하였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1928년 1월 13일에 북한 자강도 자성에서 -38.7℃까지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혹서혹한의 고장인 중강이 있는 동네라 그리 비현실적이지는 않은 기록이다.
2월에는 다시 추워지며 겨울다운 기온을 보였으나(-10℃ 전후로), 전의 12월 29일~1월 8일의 아성을 이기지는 못하고 2월 22일부터 서서히 따뜻해지며 3월이 되자마자 겨울이 잦아들었다. 다만 그렇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한강은 전년도 성탄절에 얼었던 강물이 4월 4일에야 해빙되면서 역대 가장 늦은 한강 해빙일을 기록했다.


2.4. 1930년대[편집]


일제강점기의 매우 추운 겨울은 193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다만 이 연대는 1935년, 1937년 12월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대의 12월에도 기록할 만한 12월 평균 기온을 보여 비교적 12월이 따뜻한 편이었다. 대신 1월이 1910년대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추운 해들이 많았고 2월도 따뜻하지 않았다.

  • 1931년 1~4월 한파
    전년도 11월은 이상 저온이 발생했지만 12월과 1월 상순은 따뜻한 편이었으나[40] 1월 9일부터 급속도로 기록적인 한파가 들이닥쳤다. 서울은 전날인 1월 8일보다 13℃나 떨어진 -14.2℃를 기록했고, 1월 10~11일에는 더욱 심해진다. 기상자료개방포털을 확인해보면 1월 10일 서울은 최저 기온 -21.9℃, 일 최고 기온 -13.0℃(낮 최고 기온이 아님)를 기록했는데[41] 시간대별로는 오전 2시 -17.7℃, 오전 6시 -20.0℃, 오전 10시 -19.3℃, 오후 2시 -17.1℃, 오후 6시 -18.9℃, 오후 10시 -19.7℃를 기록한다. 종합적으로 1월 10일 서울 최저 기온은 -21.9℃로 역대 최저 5위, 일평균 기온은 -18.9℃로 산출되어 역대 최저 2위를 기록했다. 특히 다음 날인 1월 11일 서울에서는 아침 최저 기온이 무려 -22.5℃를 기록하여 서울의 1월 역대 최저 기온 1위, 연 전체로 확대해도 2위로 남게 되었다. 낮 최고 기온도 -14.7℃로 가히 놀라운 수준.
역시나 인천도 1월 10일에 -20.4℃로 매우 기록적인 한파가 찾아오더니 1월 11일 아침 최저 기온이 -21.0℃까지 떨어졌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부동의 인천 역대 최저 기온 1위 기록이다! 이 한파는 겨울이 지나 4월까지 이어지면서 유례없는 꽃샘추위가 발생했다. 2월 8일에 서울 최저 기온이 -17.8℃를 기록하고 3월에도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하기도 했다.[42] 4월 6일에는 최고 기온조차 고작 3.7℃밖에 오르지 못했다. 3월에도 첫날을 제외(3월 1일 최고 기온 1.6℃)하면 이보다 낮은 최고 기온을 기록한 날이 없어서 더욱 특이하다. 4월 하순부터 기상학적인 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크게 올라 날씨가 제대로 풀리기 시작해서 차츰 평년 수준으로 회복했지만, 중순까지 이어졌던 이상 저온의 여파가 아주 컸던 탓에 서울의 4월 평균 기온이 8.8℃로 기록되어 지금까지도 4월 역대 최하위로 남아있다.[43]
1931년의 한파는 따뜻하다가 갑자기 한파가 들이닥치는 경향이 컸으며, 1월 11일 -22.5℃ 이후로 조금씩 한파의 기세가 누그러지나 싶더니 2월 5일부터 추워져서 2월 8일에 다시 -17.8℃를 기록했다. 그 이유로 월평균 기온은 생각보다 높지만 최저 기온은 매우 기록적으로 낮았다. 물론 4월의 이상 저온 현상으로 서울 월평균 기온이 8.8℃로 역대 최하위를 기록하기는 했으나 1월 평균 기온 -3.9℃는 한파가 제대로 왔다 하면 월평균 기온 -5℃ 이하를 기록하던 일제강점기의 1월 치고는 오히려 조금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2월 평균 기온 -2.7℃는 일제강점기라는 것을 감안해도 평년보다 낮았다.

  • 1931년 12월 중순, 1932년 1월 초중순, 2월 중순 한파
    엄청난 한파를 보여주었던 1931년 1월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기록적이었는데, 한파는 12월 중순, 1월 초중순, 2월 중순에만 몇 차례 오고 그마저도 서울 기준 최저 기온 -14℃ 정도로 큰 한파가 찾아왔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1월 6일, 서울 최고 기온이 14.4℃를 달성하여 1월 이상 고온 현상이 많이 일어나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서울의 1월 역대 최고 기온을 달성했다. 하지만 한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서 12월 13일에는 기온이 가장 낮아 서울 최저 기온이 -14.7℃를 기록했다. 그나마 한파가 오면 -15℃ 이하, 제대로 왔다 하면 -20℃ 이하를 기록했던 일제강점기 서울의 겨울 치고는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러나 북한강계에서는 남한이 이상 고온을 보였던 1월 8일에 최저 기온 -30.5℃를 기록했다. 그쪽이야 현재까지도 한파가 제대로 왔다 하면 -30℃ 이하로 내려가서 그렇게 놀라운 기록은 아니지만 1931~1932년 겨울이 춥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더군다나 12월은 현대의 12월 평균 기온에 비하면 조금 낮은 편이다. 이상 고온으로 손꼽히는 2019~2020년 겨울에도 강계는 2월 5일에 -27.0℃를 기록했고 2017~2018년 겨울 당시에는 1월 25일에 -29.5℃까지 내려갔다.

  • 1933년 1~3월 한파
    12월은 일제강점기 시대 치고는 따뜻했고 1981~2010년 평년과 비슷했으며 가끔 중부 지방에 -10℃ 정도의 추위가 찾아오는 정도에 그쳤지만 1월 11일부터 급속도로 추워지더니 3월 중순까지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1월 13일에는 중강에서 한반도 역대 공식 최저 기온-43.6℃가 기록되었다. 또한 중강이 유독 추위가 강했어서 월평균 기온 -25.3℃ 기록을 세웠다. 이는 중강의 월평균 기온 역대 최저 2위 기록이다.
신의주, 라선 등은 -22~-23℃ 사이를 기록하고 평양은 -20.0℃를 기록했다. 마찬가지로 서울에서도 한파의 영향으로 1월 13일에 -18.2℃가 기록되었다. 하지만 서울은 하순에 한파가 더욱 강해져서 1월 26일과 1월 27일에 -18.4℃로 가장 낮았으며, 1933년의 한파는 3월까지도 지속되어 유례없는 꽃샘추위가 발생하였다.
2월 하순에도 유난히 한파가 강해서 서울은 2월 26일에 -13.6℃를 기록하였고, 3월 6일에는 서울이 -12.8℃를 기록, 3월 7일에도 중강 -32.0℃, 라선 -16.0℃, 신의주 -21.0℃, 평양 -17.0℃, 원산 -12.0℃를 기록했으며, 심지어 제주마저 3월 9일에 -3.4℃로 영하에 머물렀다.
정리하자면, 1월 중순부터 시작된 최장 한파가 3월까지 이어졌으며, 중부 지방은 -10℃에서 -18℃ 안팎의 한파가 지속되었고, 2~3월에는 며칠간 좀 나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추웠다. 3월 20일 무렵부터는 서서히 으로 접어들었으며, 반대로 이전의 한파를 비웃기라도 하듯 4월에는 이상 고온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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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1월 13일 오전 6시 일기도의 일부이다. 중강 혼자서 -40℃ 이하를 기록한 것이 눈에 띈다.

  • 1934년 1~3월 한파
    전년도 못지않게 한파가 지속되어 추웠던 겨울이다. 1933년 12월은 전반적으로 따뜻했으나 12월 하순부터 시작된 한파가 그대로 3월까지 지속되어 혹독했다. 1월에는 서울의 최고 기온이 고작 2.8℃(1월 29일 기록)였으며, 최저 기온은 1월 12일에 기록된 -18.7℃이다. 1월 한 달간 중부 지방이 -10℃에서 -15℃ 정도의 날씨를 꾸준히 기록하였으며, 그 결과 서울 월평균 기온이 -8.3℃로 역대 최저 4위를 기록했다. 다만 1917년이나 1936년 1월처럼 -20℃ 이하를 찍은 날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1963년 1월처럼 낮 최고 기온이 극단적으로 낮은 것도 아닌지라 딱히 내세울 것이 굉장히 애매한 포지션의 겨울이다. 그저 애매하게 -10~-15℃ 사이의 최저 기온만 이어졌을 뿐. 그래도 -10℃ 이하의 날씨가 28일에 달해 후술할 1936년 1월과 공동으로 1위이다. 부산은 1월 24일에 -9.9℃를 기록하고 인천은 1월 25일에 -16.0℃의 최저 기온을 기록했으며, 서울도 하순에 다시 거센 한파로 1월 26일에 -18.0℃까지 내려갔고 목포는 1월 27일에 -8.8℃, 대구는 1월 28일에 -14.6℃를 기록하였다. 2~3월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한파의 기세가 약해졌으나, 여전히 최저 기온이 영하권이었다. 3월 하순부터 서서히 영상으로 올라갔고 날씨를 보이며 겨울이 끝났다.

  • 1934년 12월 상순 한파
    11월 하순부터 추워지면서 서울 등 중부 지방이 12월 상순부터 -7℃에서 -9℃ 사이를 연일 기록하여 기상 관측 사상 가장 빠른 한강 결빙을 기록하였다(12월 4일). 이 한파는 12월 중순에 들어 서서히 약해져서 12월 중순~3월은 대부분 평년보다 높은 정도의 기온을 기록하였으나, 몇 번의 반짝 한파가 있었다.

  • 1935년 12월~1936년 4월 한파
    12~2월 겨울 전체 평균 기온이 가장 낮았던 겨울 중 하나이다. 기상 관측 사상 한파의 규모가 후술할 1944~1945년과 함께 가장 컸던 겨울이다. 서울의 월평균 기온은 12월 -3.9℃, 1월 -8.8℃[44], 2월 -4.4℃를 기록하여 겨울 전체 평균 기온이 -5.7℃였다. 현대에는 겨울 전체 평균 기온이 -3℃ 밑으로 내려가는 것조차 지난 30년간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대단한 수치다.
서울은 12월 상순에는 오히려 따뜻했으나 12월 9일부터 최저 기온이 -11.0℃로 낮아지더니, 이날을 기점으로 장기 한파가 시작되었다. 12월 9일부터 12월 26일까지는 대부분의 날이 최저 기온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하는 등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렸으며, 12월 27~28일에 잠시 기온이 크게 올랐으나 다시 매우 급락해 12월 30일에는 -16.9℃로 상당히 낮았다. 또한 1월은 최저 기온이 -10℃ 이상으로 올라간 날이 단 3일[45]밖에 되지 않았으며, 한파가 극에 달한 1월 17~18일에는 최저 기온이 각각 -20.1℃, -19.7℃를 기록하였고 최고 기온도 -12.0℃에 그쳐 매서운 추위를 보여주었다.[46] 서울의 1월 중순 평균 기온은 -10.2℃를 기록하여 후술할 1942년과 1963년에 이은 하위 3위를 기록하였다.
2월에도 여전히 한파가 이어져서 2월 5일에 -17.5℃까지 내려갔고, 1월에 비해 다소 약해지기는 했으나 혹독한 추위는 여전했다. 이러한 추위는 3월에도 지속되어, 3월 2일에는 서울의 최저 기온이 -13.7℃를 기록하기도 했다. 2월 29일 함흥에서는 -21.0℃를 기록했다. 한파로 인한 동사자도 많았다. 결국 3월 평균 기온도 기상 관측 이래 유일한 영하-0.3℃를 기록했다.[47] 심지어 4월에도 종종 영하권의 기온을 보이면서[48] 월평균 기온이 9.1℃를 기록했고 1931년에 이어 두 번째로 추웠다. 다행히 4월 21일경이 되어서야 겨울이 끝나고 뒤늦은 이 시작되었지만 이 한파의 여파로 1936년 여름은 서늘하고 이상 저온을 보였다. 결국 1~4월의 압도적인 이상 저온여름철의 냉하로 1936년 서울 연평균 기온이 9.8℃로 1917년과 함께 역대 최저 2위를 기록했다. 이후 1936년 12월~1937년 2월과 1938년 12월~1941년 12월까지의 겨울은 그럭저럭 평년 수준 겨울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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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를 보면 유럽 지역에 비교적 이상 고온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달리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지역이 강한 한파를 보였는데 몽골 일대와 북시베리아는 아예 새파랗게 변했다. 여러모로 얼마나 기록적인 한파였는지 보여주는 셈이다.

  • 1937년 12월~1938년 2월 한파
    1935~1936년 겨울의 하위호환 격으로 한파가 찾아왔다. 서울의 월평균 기온은 12월 -3.9℃, 1월 -6.3℃, 2월 -3.3℃로 겨울 평균 기온이 -4.5℃로 -4℃ 이하를 기록했다. 1월 27일에는 기온이 가장 낮아 서울 최저 기온이 -19.0℃를 기록했다. 이후 3월은 몇 번의 꽃샘추위를 제외하면 대부분 평년 수준이었고 4월도 그다지 큰 꽃샘추위 없이 지나갔다.

  • 1938년 12월~1939년 2월 한파
    1938년 12월은 월평균 기온 -2.3℃로 비교적 평범했으나, 하순에 짧은 한파가 찾아와 12월 29일 서울 최저 기온이 -15.7℃를 기록했다. 이 한파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아서 12월 31일~1월 1일에는 일시적으로 따뜻해졌으나 1월 상순으로 넘어가면서 이전보다 더욱 강한 한파가 불어 1월 5일 서울 최저 기온 -16.6℃, 일평균 기온 -14.3℃를 기록하였고 1월 6일에는 최저 기온 -19.6℃를 기록하여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다. 남은 1월도 최저 기온 -10℃ 이하의 추위가 잦았지만 당시 치고 그리 눈에 띄는 한파는 아니었고 1월 평균 기온은 -5.2℃를 기록하여 평년보다 약간 낮았다. 하지만 이 한파가 2월까지 고스란히 이어지면서 입춘 무렵인 2월 상순에도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고, 2월 6일 최저 기온 -16.0℃, 2월 8일 최저 기온 -15.3℃를 기록하였다.


2.5. 1940년대[편집]


1940년대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가는 만큼 20세기 초반(1900~1930년대)에 비하면 점차적으로 겨울이 따뜻해지고 극단적인 한파의 빈도가 줄어드는 시기였다. 물론 당시에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 고온과 도심의 열섬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과거에 비해 한파가 약해지고 월평균 기온이 높아지는 현상이 시작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 1939년 11월~1940년 3월 한파
    그해 여름에는 20세기의 2018년 폭염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될 정도로 1994년과 함께 어마어마한 폭염을 보였고 10월까지 늦더위가 매우 강했으나 11월 중순부터 최저 기온 영하의 날씨가 기록되는 등 이른 추위가 찾아왔고, 이후 한동안 가을 날씨가 계속되다가 11월 25일부터 기온이 떨어져 11월 26일에 최고 기온 -3.3℃, 최저 기온 -10.2℃를 기록하였다. 이 강추위 때문인지, 서울의 11월 평균 기온이 5.9℃로 약간 낮게 기록되었다.
이 강추위로 본격적인 겨울 날씨로 돌입, 12월 중순까지 최저 기온 -11~-14℃를 기록한 날도 있었다.[49] 그러다가 12월 20일부터 이듬해 1월 2일까지 날씨가 풀렸지만, 1월 3일에 낮 기온이 영하를 기록하면서 따뜻한 날씨가 끊겼다. 그래도 1월 4일부터 다시 날씨가 따뜻해졌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다시 한파가 찾아와 1월 9일 최고 기온 -10.5℃, 1월 10일에는 최저 기온 -17.7℃로 연중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했다. 1월 12~13일에 날씨가 다시 풀리는 듯 싶었지만, 1월 14일부터 다시 영하로 떨어지면서 장장 한 달에 가까운 지옥문이 열렸다. 특히 서울은 1월 하순 동안 최저 기온이 -13℃ 위로 올라가지 못했으며, 1월 10일처럼 -17℃ 이하는 아니지만 -13~-16℃의 한파가 하순 동안 계속 이어졌고 최고 기온도 매우 낮아서 서울의 1월 하순 평균 기온이 -11.0℃하위 1위이다. 그로 인해 1940년 1월 서울의 월평균 기온은 -7.4℃로 역대 최저 8위에 달했다.
2월 8일의 -13.9℃를 끝으로 -10℃ 이하의 한파에서 벗어났지만, 또 3월 3일까지 한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하의 날씨가 이어졌다. 그 뒤 본격적으로 날씨가 따뜻했지나 했지만, 3월 15일에 다시 -7.7℃라는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3월 22일에 -4.6℃를 기록한 것을 끝으로 강력한 꽃샘추위는 끝났다. 하지만 이 여파로 서울의 3월 평균 기온이 3.7℃를 기록했다. 다만 당시 치고는 기록적인 수준까지는 아니고 약간 낮은 것이다.[50]

  • 1941년 1월 중순~2월 한파
    1940년 12월부터 1941년 1월 중순까지는 평년보다 따뜻한 날씨를 주로 보이다 약 1월 13일부터 추워지기 시작해 한파가 강약을 반복하며 -5℃에서 -19℃까지 진행되었다. 1월 하순에는 더욱 심해져서 1월 31일 서울은 -20.4℃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한파는 따뜻했다 추워지는 패턴의 반복으로 2월 중순까지 계속되다 2월 20일에 들어 점차 기온이 올라갔다.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은 -3.8℃로 당시 기준보다는 높았지만 2월은 -2.4℃로 당시의 평년보다 다소 낮았다.

  • 1942년 1~2월 한파
    1941년 12월은 평년보다 따뜻했지만 하순부터 평년 이하로 점점 내려가더니 다음 해 1월이 되자 큰 대비를 보이면서 서울 월평균 기온 -6.4℃를 기록했다. 일단 상순도 비교적 추웠는데, 1984년에 나온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해의 철원 김화읍에서는 1월 5일에 비공식적으로 -33.4℃를 기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대한민국 역대 공식 최저 기온인 양평의 -32.6℃보다 낮은 기록이다. 그리고 1월 9일에 서울에서 9.8cm대설이 내린 이후 본격적으로 강한 맹추위가 기승을 부려 중순 내내 -14℃에서 -18℃의 매우 추운 날씨가 찾아왔다. 극값은 1월 18일의 -17.9℃. 앞서 1940년 1월 하순처럼 이러한 추위가 중순 내내 이어졌던 탓에 서울의 1942년 1월 중순 평균 기온은 -10.9℃하위 1위에 속한다. 서울은 하순에 접어들어 기온이 올라 평년 수준으로 되돌아갔고 2월은 일시적으로 아예 이상 고온 수준으로까지 올랐지만 곧바로 다시 기온이 내려갔고, 특히 2월 13일에는 -16.7℃까지 낮아지기도 했다. 이 추위도 상당히 지속 기간이 길어서 2월 평균 기온이 -3.5℃로 상당히 낮았다. 2월 20일에 마지막 한기가 온 뒤 2월 21일 낮부터 추위가 풀려 평년 수준으로 다시 돌아갔다.

  • 1943년 1~2월 한파
    1월 5일 서울 최저 기온은 -15℃ 정도였으나 이상하게 광주만 유난히 온도가 낮게 기록되어 -19.4℃로 광주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51] 이후 1월 12일에도 한기가 다시 남하하면서 대구 -14.9℃, 부산은 -12.4℃로 후술할 1963년 1월 한파 당시 1월 16일과 온도가 같아 공동 5위, 인천은 1월 13일 -16.0℃를 기록했고 서울은 1월 12일 -18.6℃를 기록했다. 이 여파로 서울의 월평균 기온은 -6.6℃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해 1월에 북한백두산에서는 비공식적으로 -47.5℃가 관측되었다는 자료도 있다. 단 1943년 여름은 더웠다.

  • 1944년 12월~1945년 3월 한파
    일제강점기 마지막 겨울이라는 타이틀답게 서울 기준 겨울 전체 평균 기온이 -6.1℃역대 가장 낮은 겨울 평균 기온을 기록했다. 서울의 12월, 1월, 2월 평균 기온은 각각 -5.8℃[52], -7.8℃, -4.9℃였으며[53], 12월은 1917년보다 0.1℃ 낮아 12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 1위를 달성했고, 1월도 1922년 1월과 월평균 기온이 같아서 역대 최저 5위를 기록했다. 기상 관측 사상 1935~1936년과 함께 한파의 규모가 가장 컸다.[54] 그나마 -20℃ 이하의 기온은 없었다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1944년 12월에는 일시적으로 기온이 오른 12월 4~5일, 12월 11~12일, 12월 21~23일을 제외하면 모든 날의 최저 기온이 -9℃에서 -15℃ 사이였고 한파가 가장 강했던 12월 27일에는 서울 최저 기온이 -15.5℃를 기록하였으며 추위가 풀리지 않아 다음 해 1월까지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1944년은 11월 하순에 매우 따뜻하여 현대 기준으로도 매우 높은 이상 고온이 이어졌지만 12월이 되자마자 돌변하여 장기간 매우 추운 날씨가 이어진 셈이다. 특이사항으로 1944년은 겨울 시작인 12월 상순부터 날씨가 급변하여 매우 추워져서, 서울의 12월 상순 평균 기온이 -5.8℃로 월 전체 평균 기온과 같았으며 하위 1위 기록이다.
이듬해 1월에 접어들어 한파가 서서히 풀리나 싶더니 하순에 다시 추위가 한반도를 스치면서 1월 27일 서울 최저 기온이 -19.1℃로 가장 낮았다. 2월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흐름으로 최저 기온 -7℃에서 -15℃의 한파가 끝내 풀리지 않았고 2월 3일에 -15.6℃를 기록하였으며 2월 상순 평균 기온이 -8.5℃로 후술할 1980년에 이은 하위 2위를 차지했고, 1935~1936년과 함께 역대 가장 한파가 오래 지속된 겨울로 남게 되었다. 3월 평균 기온도 2.3℃로 역대 최하위인 1936년(-0.3℃)까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꽃샘추위가 심했으며, 이러한 추위는 4월 중순부터 기온이 올라가며 점차 풀렸지만 5월이 되자 최저 기온 2.7℃라는 때아닌 꽃샘추위가 찾아오기도 했고, 5월 평균 기온은 13.6℃로 역대 최하위를 기록했으며 7월까지 이상 저온을 보였다. 다만 1945년 8월은 더웠고, 1945~1946년 겨울은 그다지 크지 않은 한파가 지나가면서 따뜻한 편이었다.

  • 1946년 12월~1947년 3월 한파
    11월은 어느 정도 따뜻했지만 하순부터 기온이 내려가며 12월이 시작되었다. 이후 눈에 띄는 한파는 12월 8일부터 시작되어 강약을 반복한 채 중부 지방에서 -10℃ 이하의 추위가 계속되었다. 12월 12일에는 한강도 얼어서 꽤나 이른 결빙을 기록했다. 성탄절이 지난 12월 26일에 갑자기 따뜻해졌다가 12월 27일부터 다시 추워져서 12월 29일에는 서울 -17.0℃, 인천 -12.2℃, 부산 -7.0℃, 광주 -10.8℃ 등으로 매서운 추위를 보였다. 연말인 12월 30~31일 동안 풀리면서 다음 해 1월은 평년과 비슷하거나 높은 기온을 보이다가 1월 하순에 또 한파가 지나갔다. 1월 28일에 서울 -15.1℃, 인천 -12.8℃를 기록하고 남부 지방도 -10℃를 조금 밑도는 날씨를 보였다.
이 한파는 오래 지속되어 2월에 더 심해졌다. 2월 3일에는 서울 -17.2℃, 인천 -15.2℃, 부산 -10.8℃, 광주 -10.4℃, 대구 -13.1℃의 혹한으로 2월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후 중부 지방은 최저 기온 -10℃ 이하의 추위가 꾸준히 지속되었고 서울의 2월 중순 평균 기온은 -7.1℃하위 1위를 기록하였으며 2월 23일에 들어 기온을 회복하였지만 서울의 2월 평균 기온은 -5.3℃역대 최저 1위를 기록하였고 3월 4일에 서울이 -10.6℃, 대구가 -7.2℃를 기록하는 등 매우 변덕스러웠다가 3월 하순이 되어서야 기온을 회복하여 영상으로 올라가며 겨울이 끝나갔다. 월평균 기온은 서울 기준으로 12월, 1월, 2월 각각 -4.3℃, -3.9℃, -5.3℃이며 1월은 당시 치고는 다소 높은 수준이지만 2월은 역대 최하위를 기록했다. 겨울은 끝난 후에도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잦은 이상 저온 현상을 보여, 1947년 서울 연평균 기온이 9.6℃로 역대 최하위를 기록했다.

  • 1947년 12월~1948년 2월 한파
    12월 상순에는 몇몇 날이 최저 기온 -10℃ 이하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그리 눈에 띄는 추위는 없었으나, 중순이 되자 기온이 크게 떨어져 최저 기온 -10~-17℃의 한파가 중순 내내 이어지며 매우 추웠다. 중순 첫날인 12월 11일부터 서울 최저 기온이 -13.0℃로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12월 13일에는 -16.5℃까지 내려갔고, 12월 14~16일에 조금 나아지는가 했지만 더욱 강력한 추위가 불어닥쳐 12월 17일 -14.9℃, 12월 18일 -16.3℃, 12월 19일 -17.3℃, 12월 20일 -17.2℃를 기록하여 어지간한 1월도 필적하지 못하는 추위가 12월 중순을 장악하였다. 이 여파로 12월 중순 평균 기온이 무려 -10.8℃를 기록하여 압도적인 하위 1위를 차지하였다.
다행히 12월 21일부터 추위가 누그러들었고 남은 12월 하순은 한파가 이어지기는 했으나 중순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12월 전체가 한파에 시달렸고 특히 중순의 한파가 독보적으로 강력했기에, 서울의 12월 평균 기온이 -5.4℃로 1944년, 1917년에 이어 역대 최저 3위를 기록하였다. 이는 앞서 열거한 두 해를 제외하면 일제강점기의 내로라하는 12월 한파 겨울들도 능가하지 못한 엄청난 기록이다.
이듬해인 1948년 1월은 월평균 기온 -4.5℃로 평년보다 조금 낮은 정도에 그쳤지만, 상순과 중순에는 한파 없이 평범했고 1월 20~21일에 이상 고온으로 서울 최고 기온이 10℃ 전후로 올라간 이후 1월 26일부터 기온이 하강하여 1월 27일에 -18.0℃로 1947~1948년 겨울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 그 이후 며칠간은 평년 기온을 회복하였으나 2월 3일에 -15.8℃까지 떨어지며 다시 한 번 한파가 왔고 2월 6일 -15.0℃, 2월 7일 -15.2℃를 기록하였으며 2월 1일 하루를 제외하면 2월 상순 내내 -10℃ 이하를 기록하는 등 추위는 계속 이어졌다. 2월 중순이 되자 한파는 풀렸으며 2월 23일에 -11.2℃까지 내려간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의 한파는 없었다.


2.6. 1950년대[편집]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겨울이 따뜻해져서 현대와 비슷한 기온을 보이는 1월이 늘어났고 서울에서는 최초로 -20℃ 이하를 기록하지 않은 연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월평균 기온상으로는 현대에 비하면 훨씬 추운 해가 많았는데, -6℃ 미만을 기록한 달은 없었지만 -5~-6℃ 정도의 애매하게 낮은 월평균 기온을 기록한 달이 많았다. 그리고 나머지 해들도 월평균 기온이 낮지는 않지만 산발적으로 강한 한파가 찾아오는 양상을 띄었다.

  • 1949년 12월 상순, 하순~1950년 1월 상순 한파
    이 기간을 제외하면 2019~2020년 겨울과 비교가 가능할 수준의 따뜻한 겨울 중 하나였으나 이 시기 한정으로 강한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12월 상순부터 일찍이 시작된 한파로 서울 최저 기온이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특히 12월 6일에는 -13.5℃로 한겨울에 준하는 혹한이 찾아왔다. 중순에는 한파가 풀려 따뜻한 날씨로 되돌아갔지만 하순부터 다시 영하 두 자릿수로 떨어지더니, 12월 31일~1월 1일간 잠시 따뜻해지나 싶더니 더욱 강한 한파가 닥쳤다. 1월 7일 서울의 최저 기온이 -18.0℃를 기록하여 서울의 1949~1950년 겨울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 이후 1월 중순에 들어 크게 따뜻해져서 1월 17일 서울의 최고 기온이 10.1℃로 엄청난 대비를 보였다. 또 1월 치고 믿기지 않는 많은 가 내려 지금까지도 서울의 강수량 96.9mm로 1월 역대 강수량 1위로 남아있고 1월 30일에는 서울에 (일 최다 강수량) 51.9mm의 폭우가 내렸다. 물론 하순에 들어 이상 고온이 해소되고 2월은 평년보다 살짝 따뜻한 수준에 가까웠지만 3월 12일경의 꽃샘추위를 뒤로하고 겨울이 사실상 끝났다.

  • 1950년 11월 14~15일 한파
    부산이 -6.5℃, 대구가 -7.7℃, 포항이 -7.8℃를 기록했으며 부산은 11월 역대 최저 기온 1위이다. 동남권에서는 1979년 11월 14일보다 더 추웠던 모양이다. 동시기에 강릉[55] 역시 11월 14~15일에 각각 -7.6℃와 -7.4℃를 기록함으로써 중부 지방에서도 만만치 않은 한파가 들이닥쳤음이 확실해졌다. 미군에 의해 비공식으로 실시된 서울의 기록으로는 11월 15일 최저 기온이 -9.8℃로 기록되어 있다.

  • 1951년 1~3월 한파
    1951년 1~3월 한파에 한해서 서울과 양상이 비슷한 전주(1~2월)와 수원(3월)의 기록을 단편적으로 인용한다. 미군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실시된 기록에 따르면 1950년 12월 19일 서울이 -12.0℃까지 하강해 한파일수가 기록되었고, 해를 넘겨 전주에서는 1월 13일 -10.3℃, 1월 17일 -13.5℃, 1월 22일 -13.4℃를 기록하여 연이은 온풍 개입에도 불구하고 이를 뚫어내었다. 겨울에 서울보다 통상 2~3℃ 정도 높은 전주의 날씨를 생각하면, 서울은 같은 날에 -15~-17℃ 정도의 한파가 온 것으로 보인다. 1월 21일에는 낮에도 -6℃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애매한 추위만 왔고, 그마저도 2월 21일부터는 온풍 유입으로 2월 28일까지 1주일 동안 추운 날씨 없이 흘러갔다. 그러다 2월이 지나가고 3월 1일이 되자마자 하루 종일 이루어진 한기 남하로 인해 수원은 3월 2일 한낮에 -5℃ 이상 올라가지 못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13℃에 가까운 기온이 기록되었다. 2월에도 기록하지 못한 기온을 3월 상순에 기록한 셈이다.

  • 1954년 12월~1955년 2월 한파
    11월은 초이상 고온으로 서울 월평균 기온이 9.5℃를 기록하는 완연한 가을 날씨를 보였으나, 12월로 넘어오자 롤러코스터 타듯 기온이 크게 떨어져서 겨울이 시작되었다. 전체적으로 12월은 극단적인 한파는 없었지만 한 달 내내 끊이지 않고 추운 날씨가 이어졌으며 이상 고온도 거의 없었기에[56] 월평균 기온이 -2.7℃로 꽤 낮았으며 최저 기온은 12월 27일에 -12.5℃를 기록한 것이 극값이었다.
연이어 1월이 되자 한파가 심화되어, 길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추위가 찾아왔으며 상순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10~-15℃를 기록하는 강력한 한파가 계속되었다. 특히나 최고 기온마저 단 하루도 영상으로 오르지 못했고 심하면 -9.1℃(1월 10일 기록)까지밖에 오르지 않는 등 시원한 한낮과 혹독한 새벽의 겨울 날씨가 이어진 여파로 서울의 1월 상순 평균 기온이 -8.7℃에 달해 기록적으로 낮았다. 그리고 1월 11일에 최저 기온 -17.2℃로 극값을 기록했으며 사흘 동안 잠시 풀렸던 한기가 1월 15일에 다시 시작되어 1월 16일 아침에 -15.8℃로 2차 한파가 휘몰아친다. 다만 하순이 되자 한파는 서서히 잦아들어 평범한 1월로 끝이 났으나 상순과 중순이 여러모로 대단한 한파여서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은 -5.6℃에 달했다.
2월도 상순까지는 1월 하순의 평범한 날씨가 변함없이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순이 되자 강한 한기가 내려와서 2월 11일에 -14.3℃, 2월 12일에 -14.2℃를 기록한다. 그러다 2월 17~18일에 최고 기온이 11℃ 이상으로 오르는 이상 고온이 유입되어 겨울이 끝나는 줄 알았으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2월 19일을 기점으로 다시 추워지더니 2월 21일에 -14.2℃의 초이상 저온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것도 반짝일 뿐 2월 26일에는 최고 기온 15.1℃의 초이상 고온으로 겨울이 끝나버렸다.

  • 1956년 12월~1957년 3월 한파
    11월 중순부터 평년보다 상당히 낮은 기온을 보였다. 이때의 겨울은 좀 특이한 편에 속했는데, 12월과 2월 평균 기온이 1월보다 낮게 기록되었다. 12월 4일부터 점차 추워지더니 12월 8일부터 12월 26일까지 -10℃에서 -15℃를 밑도는 한파가 풀리지 않고 지속되어 결국 서울에서 -5.2℃라는 평년보다 매우 낮은 축에 드는 월평균 기온을 달성하였다. 이는 현재까지도 서울의 12월 평균 기온 최저 4위에 해당한다. 그래도 12월 27일부터 서서히 따뜻해지면서 1월 한 달간은 강추위가 지속돼도 12월처럼 한파가 지속되지는 않고 평년 정도의 기온을 보이며 2월 상순까지 지속되었으나, 2월 9일부터 추위가 다시 시작되었으며 서울은 최저 기온이 전날 -3.8℃에서 -14.0℃로 뚝 떨어졌다. 추위가 가장 심했던 2월 11일에는 서울의 기온이 -17.3℃를 기록하였고, -10℃ 아래로 잘 안 내려가는 부산도 -10.8℃를 기록하였다. 이후 전체적으로 한파가 점점 잦아들기는 했으나, 상당히 오래 지속되어서 서울의 2월, 3월 평균 기온은 각각 -4.3℃, 0.0℃를 기록하였다. 결국 4월이 되어서야 최저 기온이 비로소 영상권으로 올라가며 겨울이 마무리되었다.

  • 1958년 1월 한파폭설
    서울 기준으로 1950년대에서 가장 낮은 월평균 기온을 기록한 1월이다. 1950년대의 1월은 전쟁 등도 있었고 월평균 기온이 기록적으로 낮지는 않아 1950년대 최저라도 -6.0℃로 다른 연대의 최저 월평균 기온보다 높은 편이고 최저 기온도 심하게 낮지는 않아서 별로 기록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우나, 이는 둘째 주의 이상 고온 때문이었고 그 시기를 제외하면 1963년 1월의 추위와 맞먹으며 최고 기온이 유난히 낮은 것이 특징이다.
1958년 1월의 특징은 한파도 한파지만 그 어느 해보다도 중부 지방에 눈이 정말 많이 내렸다는 것이다. 서울은 1월 1일 시작부터 5cm의 많은 이 내리더니 기온이 급하강, 1월 3일 아침 최저 기온 -17.4℃, 낮 최고 기온 -8.8℃의 1차로 제법 강한 추위를 겪는다. 이후 1월 5일까지 -10℃ 안팎의 추위가 이어지다가 1월 6일부터 낮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며 1차 추위는 풀린다. 1월 12일까지는 평년보다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며 추위가 없는 듯했으나 1월 13일에 갑자기 9.8cm의 폭설이 쏟아지고 이 폭설은 1월 14일 2.4cm, 1월 15일 5.5cm로 사흘 내내 총 17.7cm의 눈이 쏟아지며 계속된다. 결국 기압골 후면으로 강한 한기가 남하하는 조건이 형성되면서 1월 15일 낮부터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 2차 대한파가 찾아온다. 1월 15일 최저 기온 -17.2℃[57], 1월 16일 최저 기온 -18.2℃, 최고 기온 -12.6℃, 일평균 기온 -15.7℃, 1월 17일 최저 기온 -17.5℃, 최고 기온 -10.4℃, 1월 18일 최저 기온 -17.4℃, 최고 기온 -8.1℃의 강한 추위가 몰아친다. 특히 1월 16일 최고 기온 -12.6℃는 광복 이후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최고 기온 기록이다. 낮 최고 기온이 계속 이렇게 낮았던 이유는 한파 직전에 폭설이 내려서 반사율(알베도)[58]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계속 아침 최저 기온 -10℃ 안팎에 낮에도 영하권의 추위가 이어지다가 다시 한 번 1월 20일 2.4cm, 1월 21일 9.1cm로 이틀 간 총 11.5cm의 폭설이 쏟아진다. 폭설 이후 기온이 급하강하여 1월 22일 최저 기온 -15.1℃, 1월 23일 최저 기온 -17.8℃, 낮 최고 기온 -11.7℃, 일평균 기온 -15.1℃, 1월 24일 최저 기온 -18.0℃로 3차 대한파가 찾아온다. 이 한파는 쉽게 풀리지 않아서 2월 1일까지 -10℃ 이하의 추위가 계속 이어진다. 즉 1월 15일에 찾아온 2차 대한파가 3차 대한파와 연결되어[59] 약 20일 가까이 추위가 이어진 것. 이와 같은 장기 한파로 인해 1958년 1월이 1950년대 중 가장 낮은 월평균 기온(-6.0℃)을 기록한 것이다.
특이사항으로 이 당시 한파가 주목받을 점은 보통 이 정도 장기적으로 추우면 대륙고기압의 영향이 너무 강해서 지배적이기 때문에 서울은 이 자주 내리지 않고 극도로 건조하기 마련이다.[60] 그런데 1958년 1월은 일별 신적설량 합계가 한 달간 무려 60.4cm.[61] 역대 1월 최다다.에 달하고 대설일수[62]도 5일, 단순 적설일수도 10일에 달했다. 특히 1월 26일의 18.9cm는 관측 사상 1월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값이다. 이 영향인지 3~4월 꽃샘추위가 심각했지만 5월부터 기온이 압도적으로 크게 높아져서 6월은 7~8월보다 극값이 높은 폭염이 찾아오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폭염/사례 문서 참조.

  • 1959년 1월 한파
    1958년 12월은 평년보다 매우 높은 초이상 고온 현상을 보이며 서울 월평균 기온이 평년보다 3.6℃나 높은 4.0℃를 기록했고 최저 기온조차 -3.2℃(12월 6일 기록)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 12월 평균 기온은 현재까지도 역대 최고 1위이며, 오히려 11월 20일에 -3.3℃의 기온이 관측되어 12월 최저 기온이 11월 최저 기온보다 높은 기현상이 벌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고온/사례 문서 참조.
하지만 1월이 시작하자마자 기온이 확 낮아져서 1월 5일 서울 최저 기온 -19.8℃[63], 최고 기온조차 -13.1℃, 특히 극단적으로 낮은 낮 기온으로 인해 일평균 기온이 -16.4℃[64]엄청난 대비를 보여주었다. 이후 중순에 들어서 기온이 조금 높아지는 듯 보였으나 1월 17일을 전후하여 기온이 다시 낮아지기 시작해 1월 17일 서울 최저 기온 -18.0℃, 최고 기온 -11.7℃를 기록했으며 일평균이 -15.4℃로 2차 한파도 만만치 않았다. 이후 1월 하순 들어 크게 따뜻해져서 2월은 거의 3월보다 조금 낮은 기온을 보이고 항상 따라오는 3~4월 꽃샘추위도 없었으며, 사실상 겨울이 끝났다.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은 -5.1℃로[65] 불과 한 달 전인 1958년 12월의 4.0℃보다 9.1℃나 낮아져서 큰 대비를 보였으나 이후 2월에는 2.4℃로 이상 고온이었으며 3~4월에는 큰 추위가 없었다.


2.7. 1960년대[편집]


1963년 1월을 제외하면 월평균 기온이 극단적으로 낮은 달은 찾아볼 수 없지만, 서울 최저 기온이 -18℃ 이하를 기록한 달이 많았다(1963년, 1965년, 1966년, 1967년 1월과 1965년 12월). 다만 최저 기온 극값 자체는 -18.4℃로 모든 연대마다 -18℃ 이하를 기록한 21세기(2000~2020년대)와 거의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높기도 하다.[66]

  • 1959년 12월 16일~1960년 1월 한파
    11월에 들어 추위가 일찍 들어온 것을 징조로, 12월 16일부터 성탄절까지 열흘간 한 차례의 한파가 발생하였다. 12월 18일에는 -12.9℃까지 떨어졌으나, 전체적으로는 당시 기준으로 심각한 한파가 별로 없어서 12월 평균 기온은 1.1℃에 그쳤다. 급기야 1월 3일에 온기 개입으로 기온이 올랐고, 1월 4일에는 최고 기온 10.8℃에 하루 종일 기온이 영상에 머물렀다가 다음 날에 다시 하강했다. 그 뒤 한동안 강도가 약한 한파가 계속되었다가, 1월 21일부터 본격적인 한파가 발생해 1월 24일에 -17.0℃까지 하강하고 1월 23일에는 높아봐야 -9.6℃에 그쳤다. 이 당시 한기 남하의 영향으로 1월 26일에는 서울역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야속한 한파 날씨는 압사 사고로부터 불과 3일이 지난 1월 29일의 -14.6℃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으며, 2월에도 잘해봐야 -8.6℃(2월 12일 기록)에 그칠 정도로 심한 한파는 전무하였다. 1월 평균 기온은 -3.3℃였고, 2월 평균 기온 1.7℃까지 1959~1960년 겨울 시즌 평균 기온은 -0.2℃에 그쳤다.

  • 1960년 11월 하순~1961년 2월 한파
    11월 25일까지는 큰 한파가 없다가 11월 26일이 되자 완전히 반전되어, 최저 기온이 전날 대비 10℃ 이상 떨어지며 갑작스러운 한파가 시작되었다. 11월 26일의 서울 최저 기온이 -10.2℃까지 떨어졌고, 다음 날인 11월 27일에는 무려 -11.2℃까지 기온이 떨어져, 마치 한겨울을 연상케 하는 강한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그 외에도 인천이 -9.7℃, 부산이 -5.6℃까지 떨어졌으며 심지어 제주마저 2.6℃까지 떨어졌다. 이후 12월 상순에는 기온이 올랐으나 12월 17일부터 -10℃를 밑도는 한파가 시작되었고, 한파는 12월 30일에 절정을 찍어 서울의 최저 기온이 무려 -16.0℃, 최고 기온마저 -9.7℃에 그쳤다. 그리하여 이해 12월 평균 기온은 하순 한파의 영향으로 -1.9℃를 기록해 2017년 12월과 같았으며, 이 한파는 1월이 되자 더 심해져 월평균 기온 -5.2℃를 기록하고 만다.
1월 5일에는 서울 최저 기온이 -16.5℃를 기록해 상당히 추웠으며, 이후 중순까지 장기 한파가 이어지다가 하순에 기온이 평년 수준으로 되돌아갔고, 2월에는 상순 초반에 강한 추위로 2월 1일에 -14.2℃를 기록하였으나 곧바로 평년 수준의 기온을 회복하였다. 다만 주기적으로 -14~-17℃까지 내려가는 비교적 강한 한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한강은 결빙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파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1961년 1월에 한강이 결빙되었는데 관측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상청 자료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1961년 당시 경향신문한 기자가 찍은 사진에서 이 시기에도 결빙했음이 확인된다(연말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이, 1961~1962년 겨울은 1962년 1월 5일이 되어서야 한강 결빙이 확인되었으므로 저 사진은 1961년 초에 찍힌 것이 확실하다). 심지어 해당 링크에 들어가보면 1961년에 한강이 결빙되었을 때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이 얼어붙은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진까지 나온다. 아마 1961년 당시 결빙 관측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굳이 사진이 아니더라도 기온 자료를 보면 한강이 얼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나름 추위가 강했다. 기온표만으론 정확히 언제 얼고 풀렸는지 알 길이 없지만...

  • 1962년 11월~1963년 2월 한파 (12월 23~29일 제외)
    11월 하순부터 강한 추위로 11월 24일에 -7.7℃를 기록했으나, 12월에는 기온이 오히려 올라 12월 29일까지는 평년보다 높은 이상 고온이 이어졌으나[67] 12월 30일에 최고 기온이 -1.2℃ 전날보다 무려 11.8℃나 급락하여 중부 지방에 폭설이 내리면서 급변, 1월 평균 기온이 서울 -9.1℃[68][69], 부산 -2.2℃, 대구 -4.9℃ 등에 이르렀다. 서울과 부산은 지금까지도 월평균 기온 역대 최저 1위 기록이다. 부산의 최저 기온이 1월 15일에 -12.4℃까지 내려갔으며, 한파는 1월 23일에 극에 달해 이날 서울의 아침 최저 기온이 -18.4℃, 낮 최고 기온 -12.1℃, 일평균 기온 -15.5℃를 기록했다. 그 다음 날인 1월 24일도 아침 최저 기온 -18.0℃, 낮 최고 기온 -10.6℃, 일평균 기온 -14.6℃로 거의 비슷한 추위가 이어졌다. 특히 1월 중순과 하순 모두 몇몇 날을 제외하면 일평균 기온 -10℃를 아득히 밑도는 추운 날씨가 이어진 탓에 서울의 1월 중순 평균 기온은 -10.4℃하위 2위, 1월 하순 평균 기온도 -10.6℃하위 2위를 기록하였다.
서울이 이 정도이니 강원도는 얼마나 추웠을까? 1963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1월 23일 아침 설악산 향로봉에서는 무려 -31.5℃, 화천 상서면의 대성산에서는 -30.0℃라는 엄청난 기온이 기록되었다. 광주는 1월 24일 최저 기온이 -16.8℃까지 떨어졌다. 특히나 최고 기온조차 낮았기 때문에 서울은 -20℃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도 역대 가장 낮은 1월 평균 기온을 기록하게 되었다. 최고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간 날이 1월 전체에서 고작 4일[70]뿐이었으며, 1월 11~28일에는 아예 최저 기온이 영하 두 자릿수로 도배되어 있다. 특히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최저 기온 극값은 (서울 기준) -18.4℃로 별로 기록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나머지 날들도 최저 기온은 물론 최고 기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71] 월평균 기온이 매우 낮게 나와서 서울과 부산이 월평균 기온 역대 최저 1위 기록을 세운 것이다. 서울은 하필 이 시기에 연탄이 귀해져서 부족한 연탄으로 잊지 못할 겨울을 보냈다. 여담으로 미군에 의한 비공식 관측 기록상 수원[72]은 1월 23일에 -23.1℃까지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2월도 꽤나 추운 편이었으나 하순 들어 기온이 올라갔다. 이로 인해 3월은 당시 치고 이상 고온을 보였다.

  • 1963년 12월 하순, 1964년 2월 한파
    1963년 12월과 1964년 1월은 반짝 한파가 가끔 찾아왔을 뿐 평년보다 따뜻한 편이었다.[73] 특히 1월은 초이상 고온을 보였고 최저 기온 극값이 -8.2℃[74]에 불과했으며 이보다 높은 경우는 20세기 내에서는 전혀 없고 2007년과 2020년까지 올라가야 된다. 하지만 2월 6~10일 사이에 내린 으로 인해 2월 11일이 되어 본격적인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설날인 2월 13일 서울-16.2℃의 기온을 기록하였으며 이날은 기상 관측 사상 겨울에 한강이 가장 늦게 얼었다.
이 기록적인 2월 한파는 2월 25일에 접어들어 서서히 물러나갔으며 3월 상순에는 비교적 온화했으나 3월 15일과 3월 19일에 많은 눈이 내려 중순~하순에는 다소 강한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3월 평균 기온도 3.5℃로 다음 해보다는 아니지만 다소 추운 편이었다. 그러나 서쪽 지역은 3월 29일부터 기온이 올라서 4월에는 상당히 강한 이상 고온을 보였으며 특히 전주는 1981~2010년 기준으로도 4℃ 가량 높았으나 반면 동해안 지역은 이 한파의 후유증으로 동풍이 잦아 4월에도 매우 낮은 초이상 저온이 와서 강릉 기준 7.9℃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로 인해 1964년 4월의 기온 편차는 매우 컸다.

  • 1965년 1월 한파
    1964년 12월은 전반적으로 큰 추위가 없이 포근했다가 1월 11일에 갑자기 혹한이 찾아온다. 1월 11일 서울은 아침 최저 기온 -16.0℃를 기록했고, 낮에도 기온이 거의 오르지 못해 오후 3시에 -13.2℃를 기록한다. 그리고 해가 지면서 기온이 빠르게 하강, 자정이 다 되어서 -16.5℃를 기록하여 아침에 기록된 최저 기온을 밤에 재경신한다. 다음 날인 1월 12일 서울은 최저 기온 -18.1℃, 최고 기온 -11.2℃, 일평균 기온 -15.3℃를 기록했다.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은 -4.2℃로 평년보다 조금 낮았다. 이렇게 보면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이 단락이 만들어진 이유는 강원도 산지 때문이다.
1월 12일, 인제고성 사이에 걸쳐있는 설악산 향로봉과 화천 상서면 대성산에서 -33.0℃라는 매우 기록적인 수치가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열거한 산악 지역들의 기온은 비공식이지만, 그래도 1981년 1월 5일의 대한민국 공식 최저 기온인 -32.6℃보다 낮은 기온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 외에도 1월 12일 새벽에 철원 원남면 적근산에서 -32.0℃가 관측되었고 양구 동면 대우산과 홍천 내면 백암산에서 -29.0℃가 관측되는 등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는 기록적인 한파가 불어닥친 것으로 보인다.

  • 1965년 12월~1966년 2월 한파
    12월 중순까지는 평년 정도의 기온을 기록했으나, 12월 15일부터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더니 12월 17일에는 서울의 최저 기온이 -18.2℃를 기록하는 등 이례적인 12월 한파가 찾아왔다. 이후 한파의 여파로 낮은 기온을 보이다가 1월에 들어서 평년의 기온을 회복하는 듯 싶었으나 1월 17일부터 추워지더니 1월 20일에는 서울 -18.0℃, 인천 -17.2℃, 부산 -10.8℃, 광주 -11.0℃ 등으로 1965년 12월 못지않은 추위가 찾아오고 오래 지속된 편이었지만 1월 31일부터 다음 달 2월 2일까지 사흘간은 크게 따뜻해졌다. 이후 2월은 따뜻했다 추워졌다의 반복으로 점차 기온이 평년 수준을 회복하였지만 2월 23일에 서울이 -13.6℃를 기록하는 등 변덕스러운 추위가 이어졌다.[75]
여담으로 1965년 12월 중국 헤이룽장성다싱안링지구 모허시에서는 월평균 기온이 무려 -35.3℃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보였다. 즉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중강, 삼지연, 개마고원 일부 지방의 최저 기온에서나 볼법한 -35℃의 기온이 최저 기온도 아닌, 월평균 기온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는 한반도에서는 아무리 기록적인 한파가 올지라도 절대로 기록할 수 없는 엄청난 수치이다. 당장 한반도의 역대 최저 월평균 기온은 1922년 1월 중강-26.6℃이다.

  • 1966년 11월~1967년 2월 한파
    작년에 이어서 한파 겨울을 맞이했으며 작년보다도 한파가 지속되었고(12월 24일~1월 18일) 2월마저 추웠다. 11월 하순부터 날씨가 추워지더니 12월 1일부터 -12.5℃의 최저 기온을 기록하며 12월을 시작했다가 다시 기온이 상승하여 평년 수준을 유지했다. 이후 성탄절 전날인 12월 24일부터 다시 추워졌으며, 12월 27일에는 서울 -15.2℃, 대구 -11.8℃, 광주 -9.8℃, 부산 -9.9℃ 등의 12월 한파가 1월까지 조금 누그러진 채로 지속되었다. 1월 14일부터 다시 추워지면서 1월 16일에 서울 -18.4℃, 인천 -17.8℃, 부산 -12.2℃, 대구 -15.4℃, 광주 -12.1℃, 춘천 -25.6℃를 기록하며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1월 18일부터 한파가 풀리며 2월까지 크게 따뜻해졌지만 2월 셋째 주에는 꽤 낮은 기온을 기록했다(-10℃ 전후). 하지만 2월 20일부터 기온이 올라서 어느 정도 날씨로 접어들었다.[76]

  • 1967년 12월~1968년 2월 한파
    서울의 12월, 1월, 2월 평균 기온이 각각 -4.9℃, -4.0℃, -4.4℃를 기록하여 겨울 평균 기온(12~2월 전체 평균)이 -4.4℃로 -4℃를 밑돌았다. 이는 1946~1947년 겨울의 -4.5℃ 이래 해방 이후 두 번째로 추운 겨울이고, 6.25 전쟁 이후로는 역대 가장 추운 겨울인 것이다. 또한 1928년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늦은 한강 해빙일(3월 28일)을 기록했다.
12월이 이례적으로 추웠던 겨울이므로 12월 위주로 조명해보겠다. 우선 서울은 12월 상순부터 -10℃를 넘나들며 추웠는데 특히 12월 8일에는 -14.5℃를 기록했다. 12월 중순에는 추위가 약간 누그러졌지만 이 잦게 내렸다. 특히 12월 14일 서울에는 하루 동안 12.2cm의 폭설이 쏟아졌다. 12월 하순에는 추위가 정점에 달했는데 상당히 기록적이었다. 특히 서울의 12월 하순 평균 기온으로는 -9.1℃로 어지간한 일제강점기 한파보다도 훨씬 낮고 역대 최저 2위에 속하는 값이다. 12월 20~21일에 접어들자 한기가 와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으며 한파가 누그러들기는 커녕 오히려 성탄절 이후 더욱 추워지더니 12월 27일 최저 기온 -10.8℃, 12월 28일 최저 기온 -14.8℃, 최고 기온 -9.0℃, 12월 29일 최저 기온 -17.0℃, 최고 기온 -10.6℃, 12월 30일 최저 기온 -17.4℃에 달해 1967~1968년 겨울 최저 기온을 달성했다. 인천도 -16.3℃, 춘천은 무려 -21.7℃까지 떨어지며 현재까지도 춘천의 12월 역대 최저 기온 기록으로 남아있다. 1월 이후로는 그렇게 극단적인 한파는 없었으나 서울 기준 1월 15일에 -15.1℃를 기록하는 등 추운 날씨는 여전히 나타났고 추위가 얇고 길게 이어져 1월, 2월도 월평균 기온이 -4℃ 이하를 기록하게 된다.
해당 겨울이 기록적인 한파는 적었기에 왜 굵은 글씨 처리했는지 의아할 수 있는데, 일별 기록이 아닌 월평균 기온 관점으로 해석하면 당위성이 충분해진다. 서울 기준으로 12~2월 평균 기온이 모두 -4℃ 이하를 기록한 겨울은 1944~1945년 겨울[77]과 이 겨울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해당 겨울의 한파가 얼마나 끈질기게 멈추지 않고 이어졌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대규모 한파로 알려진 1935~1936년 겨울조차도 12월은 -3.9℃로 아쉽게 3개월 연속 -4℃ 이하를 기록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겨울 내내 멈추지 않고 월평균 기온 -4℃ 이하를 기록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78] 또한 겨울 평균 기온 -4.4℃라는 기록은 각종 넘사벽 추위가 넘쳐나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기록들까지 다 합쳐도 역대 최저 6위[79]에 해당하는 값으로 당시 치고도 매우 추운 편이었다.

  • 1968년 12월 31일~1969년 2월 한파폭설
    1968년 12월에는 이상 고온으로 서울의 월평균 기온이 3.1℃일 만큼 온화하였다.[80] 하지만 1월이 되자마자 한파가 찾아와서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은 -3.5℃를 기록했다.[81] 최저 기온 극값은 1월 3일의 -15.2℃이고 2월에도 한파의 기조가 이어져서 마찬가지로 서울 월평균 기온 -2.7℃를 기록하였으며 최저 기온 극값도 -15.9℃(2월 5일 기록)로 1월보다 더 낮았다. 또한 이례적으로 많이 내렸는데, 서울의 계절합계깊이신적설량이 1980~1981년 겨울의 88.5cm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102.2cm를 기록하여 1위를 차지했다. 특히 1월 28일에는 서울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 최심신적설량 25.6cm로 2010년 1월 상순의 25.8cm에 거의 근접한 기록을 보였다. 아예 신문 첫 페이지부터 대문짝하게 걸려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기록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전에서는 2월 6일 -19.0℃로 기상 관측을 시작하자마자[82]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하게 되었다. 같은 날 수원에서는 -25.8℃를 기록, 마찬가지로 수원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 청주에서는 2월 6일에 무려 -26.4℃강원도 산간 지역으로 따져도 최하위권인 기온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춘천에서도 1월 31일~2월 2일 사이에 합계 최심적설 126.2cm의 어마어마한 폭설이 내려 2월 6일에 -27.9℃로 춘천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하였다. 이 당시 수원이나 청주가 비정상적으로 기온이 낮았던 이유도 그 당시에는 도시 규모가 작아서 관측소가 있는 곳은 거의 시골이었기 때문에 열섬 현상이 적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서울은 2월 6일에 -15.3℃였는데, 이것도 당시 관측소 주변에는 도시화가 되었기 때문으로 열섬 현상으로 기온이 크게 내려가지는 않았는데 거기에다가 이 타 지역보다 덜 온 것으로 보인다. 만약 수원, 청주도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더라면 -20℃ 정도로 이보다는 높았을 듯하다.[83]
연이어 2월 중순에는 기온이 올라갔으나 하순에 다시 강한 한파가 찾아왔는데, 을 앞둔 시기임에도 서울 최저 기온이 -7~-12℃ 사이로 추웠고 최저 기온은 2월 25일 -12.2℃였으며 2월 하순 평균 기온이 -6.1℃하위 2위를 기록하였다.


2.8. 1970년대[편집]


1970년대에 접어들어 겨울이 매우 따뜻해져서 1월 평균 기온이 영상권이고 평년보다 3~5℃ 높은 초이상 고온인 해가 많았다(1972년, 1973년, 1979년). 이중 1972년과 1973년은 2년 연속으로 한강이 얼지 않았고, 이 여파로 10년 동안 1월 평균 기온이 1℃ 가까이 올랐다. 대신 12월과 2월은 이상 저온도 꽤 있었다.

  • 1969년 11월~1970년 3월 한파
    11월과 12월은 극단적인 기온은 없으나 꾸준히 이상 저온이 이어져 월평균 기온이 각각 5.0℃, -2.0℃를 기록하였다. 1월 상순이 되자 기온이 더욱 급락해 1월 5일에는 해방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 최저 기온이 -20℃ 이하인 -20.2℃를 기록했다. 이 시기에는 열섬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기록이 나온 것이다. 이후 2월 상순에도 한파가 있었으나, 서서히 풀려가기만 했으면 3월까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2월 하순부터 다시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3월 26일까지 겨울 수준의 기온을 보였다. 결국 2월과 3월의 월평균 기온이 별 차이가 없거나 3월이 2월보다 더 낮은 기현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저온/사례/20세기 문서 참조.

  • 1970년 11월~1971년 3월 한파
    이미 11월 중순부터 부분적으로 -4℃ 이하로 내려가는 등 한파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11월 30일에 -11.9℃로 11월 역대 최저 기온 1위를 기록했고, 12월 하순에 본격적인 한파가 시작되었다. 1월 5일에 서울 최저 기온 -16.1℃를 기록하였고 1월 중순에는 날씨가 풀릴 것처럼 보였으나 곧 다시 한파가 찾아왔다. 2월에도 중순과 하순에 걸쳐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다가 3월 5~14일에 한파가 다시 찾아왔는데, 그중 3월 6일에 최고 기온 -4.0℃, 3월 7일에는 최저 기온 -11.6℃를 기록하기도 했다. 3월 15일 이후로는 큰 한파 없이 끝났지만 1971년 3월은 평년에 비해 매우 추웠다. 날짜만 보면 몇 달 내내 한파가 이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중간마다 최저 기온마저 영상으로 오르는 날도 있는 등 한파와 거리가 먼 애매한 날씨가 제법 있었다.

  • 1972년 11월 하순, 1973년 1월 상순 한파
    서울의 11월 하순 평균 기온이 -3.0℃하위 1위이다. 의외로 11월 최저 기온 극값은 -8.1℃(11월 28일 기록)로 기록적인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12~1월에는 이상 고온을 보였으며, 12월 12~13일과[84] 이듬해 1월 2~3일에 -10℃를 밑도는 한파가 찾아오고 난 후 계속 이상 고온을 보이며 겨울이 끝났다.
여담으로 1973년 1월의 신기한 점은 최고 기온과 최저 기온 극값이 각각 11.3℃, -11.3℃로 데칼코마니를 보여주었다.

  • 1973년 12월~1974년 2월 한파
    각 월말마다 강력한 한파가 찾아왔다. 그리고 한파 직전마다 많은 폭설이 내린 것도 특징. 12월 22일 중부 지방에 내린 기록적인 대설 뒤 강하게 확장한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인지[85] 12월 24일에는 서울-17.4℃를 기록하는 등 전국적으로 일평균 기온이 매우 낮으며 여러 지역에서 12월 일평균 기온 최저 기록이 나왔다. 대전은 -14.2℃로 1월보다도 낮은 기록이 나왔다. 원주는 1월이어도 매우 기록적인 수치인 최저 기온 -26.8℃, 일평균 기온 -20.4℃를 기록했다. 이천도 12월 25일 -25.7℃를 기록하며 월 상관없는 해당 지역 역대 최저 기온을 경신하는 등 내륙 중심으로 매우 기록적인 한파였으며, 결국 서울의 12월 평균 기온이 -3.0℃를 기록하여 당시 평년보다 1.9℃ 낮았다. 시간이 흘러 이듬해 1월은 서울 월평균 기온이 -2.5℃[86]로 당시 기준으로는 포근했으나 1971~2000년 기준으로는 평년과 완전히 같았다.
그러나 1월 21일에 전국에 대설이 내렸고, 그 이후에 다시 강한 한파가 찾아왔다. 1월 24일에는 서울이 -15.5℃까지 내려갔으며 1월 26일에는 대구 -14.1℃, 경상북도 구미는 무려 -24.0℃[87] 등.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평창 대관령면의 기록이다. 기상 관측이 시작된 1973년 이래 지금까지 어떠한 겨울도 근접하지 못하는 압도적인 한파를 보였기 때문이다. 1월 23일 -25.3℃, 1월 24일 -28.9℃,[88] 1월 25일 -27.1℃, 1월 26일 -25.9℃, 1월 27일에는 잠시 -16.7℃로 올라갔지만 1월 28일 다시 -25.4℃ 등. 하루만 -25℃ 이하로 떨어져도 드물 정도로 추운 기록에 속하는데, 나흘 연속 -25~-29℃의 한파가 이어진 것은 정말 놀라운 기록이다. 2월 하순 한파도 거셌는데, 서울이 2월 26일에 -14.0℃까지 내려갔다. 서울의 2월 평균 기온은 -2.1℃로 1월과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다.

  • 1976년 12월 25일~1977년 2월 22일, 3월 3~5일 한파
    1916~1917년 한파의 재현 수준으로, 기온은 다소 높아도 양상이 비슷했다. 12월 초중순에 잠시 추워진 것을 제외하고는 심각한 이상 난동을 보여 12월 25일까지의 평균 기온은 무려 3.4℃로 평년보다 3℃ 이상이나 높은 강력한 이상 고온을 보였고 성탄절 낮까지만 하더라도 그리 춥지 않은 날씨를 보였는데, 밤부터 기온이 돌연 13℃ 이상 떨어지더니, 다음 날에는 최고 기온마저 전일 대비 15℃ 이상 떨어진 -10.4℃를 기록하며 기습 한파가 시작되었고 이날 서울 최저 기온은 -16.5℃였다. 12월 27일은 서울 최저 기온이 -18.5℃를 기록할 정도였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49년 만의 12월 최저 기온이었다.
이 강력한 한파로 12월 25일까지의 3.4℃였던 월평균 기온을 최종 0.4℃로 3℃씩이나 떨어뜨리게 되어 강력한 한파의 위력을 제대로 과시했다. 평창 대관령면은 1977년 1월에 한파가 절정에 달했는데, 1월 25일의 최고 기온 1.2℃를 제외하고 모두 최고 기온이 영하를 기록했을 정도였다.[89]
여담으로 같은 시기에 북한에서도 강한 한파가 찾아왔는데, 비공식적으로 1월 2일에 삼지연 고산 지대에서 -45.1℃가 기록되었다는 정보도 있다. 이렇듯 1월은 전국적으로 강한 한파가 이어져 서울 월평균 기온이 -6.7℃로 1970년대에서 가장 낮았다. 이후 한파 막바지인 2월 중순이 가장 기세가 강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대관령 -21.7℃, 원주 -21.5℃, 대전 -14.6℃, 대구 -13.8℃, 광주 -12.6℃를 기록했으며 서울은 2월 16일에 무려 -16.8℃를 기록했다. 이 한파는 2월 22일까지 이어졌다가 곧 기온이 크게 올랐고, 3월 3일과 3월 5일의 반짝 한파를 끝으로 1976~1977년 겨울은 끝이 났다. 그러나 1977년 3월 3~5일의 꽃샘추위가 3월 치고는 매우 강력했는데 대구, 광주, 전주 등 남부 지방에서 최저 기온이 -10℃ 이하를 보였으며 부산도 -9.7℃로 -10℃에 가까웠다.

  • 1977년 12월 21~26일, 1978년 1~2월 한파
    12월은 서울의 월평균 기온이 2.4℃, 전국 월평균 기온이 3.0℃일 정도로 온화하였으며 기상학적 겨울도 12월 21일로 평년보다 상당히 늦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성탄절부터 약한 한파가 와서 최저 기온이 -8.8℃를 기록하였고, 다음 날인 12월 26일에는 -9.4℃를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12월 최저 기온 극값이었다.
하지만 1월 하순에 들어 본격적인 한파가 시작되었고, 1월 30일부터 기온이 급락하기 시작하여 1월 31일에 -13.3℃로 1월 최저 기온 극값을 찍은 후, 다음 날인 2월 1일에는 2월 시작부터 최저 기온이 -16.0℃까지 곤두박질쳤고, 최고 기온마저 -8.4℃에 그쳤다. 평창 대관령면에서는 2월 1일의 최고 기온이 -13.3℃를 기록한 뒤, 2월 15일에 -27.6℃를 기록하여 절정을 찍었고 다음 날인 2월 16일에도 -26.7℃를 기록하여 매서운 추위를 보였다. 서울도 마찬가지로 2월 14~16일 동안 사흘 내내 -12℃를 밑도는 한파일수가 기록되었고[90], 심지어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는 제주마저도 2월 14일부터 2월 18일까지 닷새 연속으로 영하를 기록하였다.[91] 서울의 월평균 기온은 -2.5℃로 1월보다 낮았다. 이 추위는 3월 16일까지 이어져, 3월 17일부터 완전히 끝나며 한파에서 자유로워졌다.


2.9. 1980년대[편집]


1980~1986년까지는 1970년대에 비해 겨울이 다소 추워진 양상을 보이며 일제강점기의 명성에는 못 미치지만 장기 한파를 보이는 겨울이 늘어났다. 또한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2월 평균 기온 -3℃ 이하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7년 이후로는 더 이상 극단 한파가 찾아오지 않고 있으며 한파의 강도도 약해져 사실상 현대와 같은 기온을 보이는 겨울이 주를 이루고, 이상 고온을 보이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 1979년 11월, 1980년 1~2월 한파
    다음 겨울 못지않게 기록이 의외로 많았던 겨울로, 11월 상순에는 날씨가 따뜻했지만 중순부터 기온이 급하락, 무려 11월 14일서울-11.1℃로 평년보다 약 13~16℃ 이상 낮은 초이상 저온을 보였다. 이 기온은 서울의 11월 중순 역대 최저 기온으로 2위인 1912년 11월 16일의 -9.9℃와 1.2℃나 차이나는 일제강점기에도 기록하지 못했던 압도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92] 심지어 인천-12.0℃로 서울보다 기온이 더 낮았으며 서울이 공식적으로 기록하지 못한[93] 11월 한파일수가 기록되기까지 했다.
이후 날씨가 풀리는 듯 싶었으나 하순까지 다소 추운 날씨를 기록하며 12월로 이어졌다. 이 압도적인 초이상 저온의 영향으로 서울 월평균 기온이 5.7℃로 11월 치고 꽤 낮았다. 이후 12월은 중순까지 별 추위 없이 이상 고온으로 월평균 기온 1.4℃로 2019년 12월과 같았으나 해를 넘기며 1980년 1월 5일부터 1월 22일까지 한파가 지속되었다. 1월 17일에 -15.9℃의 극값을 기록하며 상당히 낮았고 이후 1월 26일부터 기온이 크게 오르며 사흘 연속으로 최고 기온 8℃ 이상을 기록해[94] 2018년 1월 중순처럼 한파가 머무르는 와중에 따뜻한 날씨가 찾아왔다.
월초에도 1월 5일까지 큰 추위 없이 따뜻했던 관계로 1월 평균 기온은 -3.7℃로 장기 한파 치고는 높았다. 하지만 2018년 1월처럼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면 그 뒤에는 기록적인 한파가 있는 법, 1월 29일부터 급속도로 낮아지더니 1월 31일에는 -15.4℃로 다시 추워졌으며 이후 2월 중순까지 후술할 1984년의 상위호환같은 날씨가 이어진다. 특히 2월 1일부터 -14.0℃가 기록되었고 이후 2월 6~8일에 최저 기온 -14℃ 이하의 날씨가 사흘 연속 이어졌다. 2월 7일에는 -14.5℃까지 떨어져 2월의 최저 기온 극값을 기록했다. 또한 다른 날에도 최저 기온이 연속으로 영하 두 자릿수 이하였고 높아도 -9℃대인 기온 경향으로 서울의 2월 상순 평균 기온이 -8.8℃로 하위 1위이며 일제강점기의 장기 한파를 압도한다. 중순에도 후술할 1984년보다도 다소 추운 날씨가 이어지며 2월 14일엔 -10℃ 이하인 -10.6℃가 기록되었지만 하순에는 최고 기온이 영상 10℃까지 올라가는 등[95] 따뜻해졌고 3월로 들어서며 겨울이 끝났다.
이로써 서울의 2월 평균 기온이 -3.1℃로 매우 낮았으며[96] 이후 3월과 11월을 제외하고 1980년에는 지속적인 이상 저온[97]을 보이며 거의 1910~1920년대 수준으로 연평균 기온이 매우 낮았다.

  • 1980년 12월~1981년 1월, 2월 25~28일 한파
    11월은 따뜻한 편이었으나 12월이 되어 큰 추위가 찾아왔다. 이미 서울의 월평균 기온이 -3.8℃로 평년보다 상당히 낮았다. 12월 하순에 접어들어 성탄절 전후로 눈이 내리고 한파가 더욱 심해져 12월 29일에는 서울 최저 기온이 -16.2℃를 기록했다. 새해부터 폭설이 온 다음 추위는 더욱 심해져, 서울은 1월 한 달 동안 최고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간 날이 고작 5일[98]에 불과했다. 결국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이 -7.0℃라는 엄청난 수치를 기록했다.[99]
그리고 일교차 때문에 묻히지만 서울 기준으로 1963년, 2011년 1월처럼 평년보다 높았던 날이 단 하루도 없이 31일 내내 이상 저온으로 도배되었다. 1월 4일에는 서울이 -16.5℃를 찍어 상당히 추웠으며, 한파가 최절정에 이른 1월 5일에 경기도 양평에서는 대한민국 기상 관측 역대 공식 최저 기온-32.6℃가 기록되기도 했다.[100] 최대 풍속 2.5m/s로 계산하면 체감온도-42.0℃까지 내려간다. 게다가 1981년 1월 양평월평균 기온이 -13.5℃로 대한민국 기상 관측 역대 최저 월평균 기온을 기록했고, 월평균 최고 기온조차 -3.4℃, 월평균 최저 기온은 무려 -22.8℃라는 무시무시한 수치가 기록되었다. 이해 1월 양평의 최저 기온이 31일 중 무려 22일이 -20℃ 이하였고[101], 새해부터 폭설이 내려 그에 따른 반사율(알베도)로 1월 1일, 1월 2일, 1월 3일에 걸쳐 최저 기온이 하루가 지날 때마다 대략 10℃씩 강하하더니 1월 3~6일간 -30℃ 이하의 최저 기온이 연일 관측되었다.[102] 이와 같은 추위에 현지 주민들조차도 최저 기온 극값을 전해듣고는 추위에 떠는 와중에도 전혀 믿겨지지 않아서 다시 되물었을 정도라고 한다. 이 말인 즉 당시의 추위는 현지에 살아왔던 사람들조차 경악하게 만들 정도로 역대급이었다는 뜻이다.
이 외에도 같은 1월 5일에 충주 -28.5℃[103], 홍천 -28.1℃[104], 원주 -27.6℃[105] 등 중부 내륙 지역에서 지역별 역대 공식 최저 기온이 기록되었다. 이 외에도 1월 6일에 인제에서 -25.9℃가 기록되었다. 이는 인제에서 기록된 공식 기온 중 역대 최저치이다.
이렇게 극심한 한파로 인해 동파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중순에는 남부 지방에서 다시 한 번 한파가 찾아와 1월 17일에 경상북도 구미에서 -19.7℃, 영천에서 -20.5℃, 의성에서는 무려 -23.3℃를 기록하였다. 시간이 지나 2월 25~28일에도 엄청난 한파가 몰아닥쳤고, 일교차가 컸던 1월 한파와 달리 낮에도 기온이 크게 오르지 않았으며, 남부 지방도 한파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최저 기온 -10℃ 이하를 기록한 곳이 많았다. 서울 등 수도권은 2월 중순을 제외하면 12월부터 2월까지 빠짐없이 추웠다. 수도권도 2월 25~28일간의 한파에 영향을 받아 2월 26일 서울이 -15.6℃[106] 까지 떨어졌고 경상북도 울진은 -14.1℃까지 떨어졌으며 제주마저 -5.1℃로 떨어졌다.
당시 2월 하순 추위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했으면, 한기가 영향을 미치는 지역과 거리가 멀어서 어지간히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는(1981년 1월도 마찬가지였다) 일본하치조 섬조차 2월 26일 -0.3℃, 2월 27일에 -2.0℃까지 급전직하했다. 이는 1906년 관측 이래 가장 낮은 온도다.

  • 1981년 11월~1982년 2월 한파
    2002~2003년 한파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겨울로, 특히 11월과 1월 하순은 진행 양상이 상당히 비슷했다. 10월 23일부터 최저 기온이 0.6℃까지 떨어졌고 기상 관측 사상 이 가장 빠르게 내렸다. 11월에는 서울 월평균 기온이 3.6℃였고, 전국 11월 평균 기온은 역대 최하위를 기록했다. 최고 기온 극값은 11월 1일에 기록한 13.6℃가 끝이었으며, 11월 7일에는 최고 기온이 1.0℃였고 11월 8일에는 최저 기온이 무려 -7.0℃로 크게 떨어져 극값을 경신하였으며, 한파의 고장인 평창 대관령면은 무려 -13.3℃까지 떨어졌다.
11월 중순에는 평년 수준이거나 약간 낮은 기온을 보이다가 하순에 다시 한파가 와서 11월 28일에 -5.9℃를 기록하여 상순 못지않은 추위를 보여주었다. 이후 12월이 되자 중부 지방은 -10℃ 이하, 강원도 산간 지역은 -20℃ 이하의 한파가 덮쳐 중부 지방이 12월 상순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로 변하는 기염을 토했다. 12월 2일에 서울의 최저 기온이 -11.0℃, 인천-10.3℃, 평창 대관령면-20.2℃를 기록하면서 강한 한파를 보였으며 중순까지는 매우 추운 날씨가 이어졌고 12월 하순부터 이듬해 1월 상순까지는 포근한 날씨를 보여주는 듯 싶었으나 1월 중순부터 다시 급락해 1월 14일에 -13.8℃를 기록하고 한파가 중순 내내 이어져 서울의 1월 중순 평균 기온은 -6.7℃로 다소 낮았다.
하순에 기온이 다시 올라가나 싶었지만 1월 27일부터 다시 급락해 1월 29일에는 -14.1℃로 극값을 재경신하였으며 서울 월평균 기온은 -3.6℃로 평년과 비슷했다. 이후 2월에는 2월 7일에 -11.8℃, 2월 8일에 -10.9℃의 한파를 끝으로 겨울이 끝났다.

  • 1982년 11월~1983년 2월 한파
    전반적으로 포근한 엘니뇨 유형의 겨울이었으나 가끔씩 한파가 찾아왔다. 11월 24일부터 -5.8℃를 기록하고 11월 25일에는 -7.1℃를 기록하여 강한 추위가 왔으나 12월에는 월평균 기온이 -0.1℃로 당시 기준 평년보다 0.5℃ 높아 약한 이상 고온을 보였으며, 1월에도 이상 고온이 이어져 월평균 기온이 -1.7℃를 기록하여 평년보다 높았다. 현대 기준으로도 평년보다 0.3℃ 높은 값이다.
하지만 한파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12월 6일에 -9.8℃로 -10℃에 근접한 한파가 찾아왔지만 이것은 12월 최저 기온 극값이었다. 1월에도 1월 8~11일, 1월 20~22일까지 -10℃를 밑도는 한파가 찾아왔으며, 그 중 1월 9일에 -13.9℃로 한파가 가장 강했고, 1월 10일에 한강이 얼어붙었으나 1월 하순에 이상 고온이 와도 한강이 녹지 않았다. 그러나 2월 중순에 들어서 본격적인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2월 9일부터 급락하기 시작해 2월 12일에 -13.3℃까지 떨어져 1월 최저 기온 극값과 비슷한 날씨를 보였으며, 낮 최고 기온도 -6.2℃에 불과했다. 다음 날인 2월 13일에도 -12.5℃를 기록하였으며 2월 15일에 잠깐 올랐으나 2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10℃를 밑도는 추위가 다시 한 번 찾아오고 난 후 2월 22일에 한강이 해빙하며 비로소 겨울이 끝났다. 서울 월평균 기온은 -1.7℃로 1월과 동일하여 평년보다 낮았다. 이후 3~5월은 이를 비웃듯이 이상 고온이 찾아왔다.

  • 1983년 11월~1984년 3월 한파
    11월 17일부터 -6.0℃를 기록하는 등 겨울이 시작되기 전부터 강한 추위를 보였으나 이후 다시 올랐다. 그로부터 별다른 추위 없이 평년 수준이나 이상 고온이 이어지다가 12월 14일부터 점점 추워지더니 12월 23일부터 -10℃ 이하인 날이 잦았다. 또한 성탄절에 -13.5℃를 기록하며 12월 최저 기온 극값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12월 평균 기온은 -1.1℃로 당시 평년치보다 0.5℃ 낮았다. 이후 1984년 2월 중순까지 한파가 이어졌다.
특이하게도 1984년 1월은 최저 기온 극값이 -13.6℃(1월 26일, 27일 기록)로 평범하지만 월 내내 이상 고온이 거의 없이 -8℃에서 -13℃ 사이를 연속으로 기록한 점에서 특이하다. 그러나 평창 대관령면에서는 -20℃ 이하의 기온이 무려 열흘이나 관측되어[107] 월평균 기온이 2011년 1월과 같은 -11.2℃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2월이 시작하자마자 오히려 한파가 더욱 강해졌고 서울에서 2월 3일 -15.0℃를 기록한 이후 -10℃ 이하의 장기 한파가 계속 이어지며 2월 6일에는 -15.1℃로 극값을 재경신하면서 2월 치고 매우 낮았다. 특히 서울의 2월 상순 평균 기온이 -8.2℃로 하위 3위이며 2위인 1945년을 제외하고 일제강점기 한파를 압도하는 기록이다.[108] 중순부터는 한파가 풀리기 시작했지만 2018년 2월처럼 여전히 다소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으며 하순부터 기온이 올라가나 했더니 오히려 월말에도 -8.1℃의 한파가 닥쳤다.
이런 장기 한파 경향 때문에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이 -5.9℃, 2월 평균 기온이 -3.5℃로 매우 낮았다. 그리고 이 한파는 3월까지도 이어져서 전국 1월 평균 기온이 -4.3℃로 역대 최저 4위, 2~3월 평균 기온이 각각 -2.3℃, 3.2℃로 역대 최저 1위를 기록하였다. 한 해가 연속 두 달을 최저 1위로 만든 셈이다. 비록 이 겨울은 최저 기온이 별로 기록적인 편이 아니었지만 한파의 지속 강도는 1935~1936년, 1944~1945년 겨울 수준으로 상당히 강한 축에 속했다. 물론 1936년, 1945년, 1963년 1월 수준으로 월 내내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하지는 않았고 최저 기온 극값도 -18℃ 이하로 매우 낮지는 않아서 앞서 서술한 겨울들에 비하면 덜한 편이다.

  • 1984년 12월 하순~1985년 2월 한파
    2010~2011년 겨울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겨울로, 이보다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전년도처럼 장기 한파가 꽤 길게 이어진 겨울 중 하나이다. 11월은 따뜻했지만 하순에는 꽤 추웠으며, 12월에는 별다른 추위 없이 12월 20일까지 이상 고온이 이어지는 듯했으나[109] 12월 21일부터 12월 29일까지 낮 최고 기온이 영하권을 지속적으로 기록했고 최저 기온도 연속으로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한 날이 많았기 때문에 12월 평균 기온이 -0.9℃로 당시 평년치보다 0.3℃ 낮았다. 의외로 서울의 1984년 12월 하순 평균 기온이 -6.8℃하위 4위이며 이 한파 때문에 그전까지 2019년 12월보다 더 심한 이상 고온으로 한참 높았던 월평균 기온을 매우 떨어뜨려서 평년보다 살짝 낮은 값이 나왔다.[110]
이후 1985년 1월까지 평년 수준에 머무는 듯했으나 곧바로 다시 추워지며 1월 한 달 동안 장기 한파가 시작된다. 특히나 1월 중순에는 추위가 가장 강해 1월 13~17일까지 나흘 연속으로 -12℃ 아래였고, 1월 14일에 최저 기온 -16.7℃로 가장 한파가 강했다. 그 뒤 1월 하순에도 여전히 한파의 기세는 가시지 않았고, 몇몇 날에는 오히려 강해져서 1월 30일에 -16.3℃를 기록하여 장기 한파의 위엄을 보여주었다. 특히 낮 최고 기온도 낮은 편이었는데, 거의 한 달 내내 영하였던 2011년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영상의 기온을 기록한 날이 그닥 많지 않았으며, 높아도 2~3℃대였다.[111] 이렇게 해서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은 전년도와 같은 -5.9℃를 기록하였다.
이후 2월에는 갑자기 기온이 크게 올라서 1월 31일과 2월 1일의 최저 기온 차가 10℃ 가까이 벌어졌다. 다만 중순부터 다시 추워졌고, 사실상 에 가까운 2월 하순인 2월 21~24일에 -10℃ 이하인 날이 연속으로 기록되며[112] 강한 뒤끝을 보여주었다. 그 뒤 2월 끝자락으로 향하며 날씨가 그럭저럭 풀렸지만 3월 초중순까지 꽃샘추위가 잦았다. 2월 평균 기온은 -0.3℃로 평년과 비슷하거나 약간 포근한 편이었다.

  • 1985년 11월~1986년 2월 한파
    2017~2018년 겨울의 상위호환 겨울로, 진행 양상도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1~2월은 2018년이 더 높고 한파의 절정 시기도 다르지만 11~12월은 2017년과 판박이였다. 1985년 11월 상순은 최저 기온이 10℃ 이상인 이상 고온이 있었으나 11월 10일부터 기온이 크게 떨어지면서 겨울에 돌입했다. 11월 12일에 최저 기온 -3.0℃를 기록했으며, 11월 20~22일에는 다시 기온이 올라가는 듯 보였으나 또 다시 급락하여 11월 29일에는 -4.6℃를 기록했다. 이로써 1985년 11월의 서울 월평균 기온은 5.6℃로 2017년 11월과 같았다. 이후 12월 상순까지 애매하게 낮다가 중순부터 강한 한파가 지속되는데, 12월 10일에 -13.6℃, 서울 관악산에서는 -17.4℃의 기록을 보여 12월의 최저 기온 극값을 기록했다. 한파는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져서 12월 중순 동안 낮 최고 기온도 영하권을 맴돌았고 12월 14~18일에는 다시 한기가 몰려와 12월 16일에 -13.4℃로 다시 -13℃ 이하로 떨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연속으로 최저 기온이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중순의 강한 한파로 인해 서울의 12월 중순 평균 기온이 -6.8℃로 기상 관측 역사상 하위 4위를 기록했다. 하순에도 다소 추웠으나 월말로 갈수록 점점 최저 기온이 높아졌다.
하지만 1월부터는 다시 급락하며 1월 4일부터 1월 6일까지 사흘 연속으로 -16℃ 이하를 기록하였고 1월 5일 서울의 최저 기온은 -19.2℃,[113] 최고 기온조차 -13.6℃를 기록했다. 특히 이날 평창 대관령면의 최고 기온이 -19.1℃로 역대 가장 낮은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114] 이 시기에 관악산 기상 자료도 있는데, 한파의 극점이었던 1월 5일 최저 기온이 -22.8℃, 1월 4일부터 1월 6일까지 연속으로 -20℃ 이하, 1월 3일과 1월 7일을 제외하고 -14℃ 이하는 가볍게 밑도는 정신나간 기록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울 공식 기상 자료에도 1월 3일과 1월 7일을 제외하고 -11℃는 가볍게 밑도는 최저 기온으로 인해 서울의 1월 상순 평균 기온이 -9.6℃를 기록해 사실상 1월 상순 평균 기온으로서 압도적인 최저 기록을 가진 1917년(-11.5℃), 1918년(-10.8℃) 다음으로 하위 3위에 속하는 값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해를 끝으로 서울이 -19℃ 이하로 떨어지는 극단적인 한파는 현재까지 찾아오지 않고 있으며[115] 수원도 이해 1월 6일의 -20.1℃를 끝으로 -20℃ 이하의 기온이 찾아오지 않고 있다.[116]
이 강력한 한파는 중순인 1월 15일부터 점차 풀려서 이상 고온을 보였으나, 1월 하순에도 -11℃ 정도의 반짝 한파가 존재하여 1월 26일 -11.5℃, 1월 27일 -11.3℃로 잠시 내려갔다. 서울의 월평균 기온은 -5.4℃를 기록해 1984년과 1985년 1월보다는 높았으나 1월 상순의 엄청난 한파가 지속되었을 경우에는 진짜로 일제강점기의 어지간한 한파를 압도하는 월평균 기온을 세웠을 수도 있다. 이후 2월 상순에는 -8~-12℃의 장기 한파가 기승을 부렸으며, 중순에는 날씨가 풀렸지만 그닥 이상 고온이 아니었고 사실상 이나 다름없는 2월 하순에는 오히려 한파가 강해져 2월 27일에 -9.2℃를 기록해 강한 뒤끝을 보였으나 3월 3일부터 풀리며 겨울이 끝났다. 서울의 2월 평균 기온은 -3.3℃로 1980년과 1984년의 중간에 속하지만 2월 치고 매우 낮은 수준의 월평균 기온을 기록했다. 이후 1986년 한 해 동안 1936년을 연상케하는 이상 저온 현상을 보인다.[117] 그리고 이 1985년 12월~1986년 2월 겨울은 마지막 대한파(大寒波)이기도 했다. 또한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2월 평균 기온이 -3℃대를 기록한 해이기도 하다.

  • 1986년 12월 하순~1987년 1월 한파
    한반도 최한지인 북한 삼지연의 최저 기온이 1월 10일 -40.0℃를 기록했으며, 1월 13일에도 -38.4℃를 기록하였다. 동시기에 서울 최저 기온은 -10~-15℃ 정도로 그리 기록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118], 당시 한기가 북한 지역을 강하게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 1987년 11월 28일~12월 4일, 1988년 1월 9~11일, 1월 23~25일, 2월 상순 한파
    전반적으로 포근했던 겨울이지만 산발적으로 한파가 찾아왔다. 11월 28일부터 한기가 급속도로 내려와 기온이 떨어져 11월 29일에는 -9.2℃로 매우 크게 낮았다. 이 한파는 12월 4일까지 이어졌고, 특히 12월 2일에는 -10.1℃까지 떨어져 강한 이상 저온을 보였다. 이후 12월 중순~하순에는 포근해졌다가 12월 31일에 세밑 한파가 찾아와 -10.6℃를 기록하였고 다음 해 1월에는 평범했으나 1월 9일과 1월 23일에 두 차례 급락해 1월 24일에 -12.1℃를 기록했으며 2월 상순까지 이어졌다. 특히 2월 3일에는 -12.9℃까지 떨어졌고 중순에도 2월 16일에 -10.0℃를 기록한 후 겨울이 끝났다.


2.10. 1990년대[편집]


1980년대까지는 한파 겨울이 우세한 날씨였으나, 1990년대 들어 2000년대까지는 고온 겨울이 더 우세한 날씨가 찾아오게 된다.서울 기준으로 1970년대, 2000년대와 함께 1월이 가장 따뜻했던 연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010년대에 들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이상 고온이 잦아지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오히려 1990년대에 비해 더 추워졌기 때문이다.

  • 1990년 1월 한파폭설
    강원도 강릉에서 최고 적설량인 138.1cm가 기록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성산읍에서는 1월 23일에 최저 기온 -7.0℃를 기록, 제주도 한정으로 역대 최저 기온 1위이다. 서울에서도 1990년대에는 한파가 적고 비교적 따뜻한 경향을 보였지만 예외적으로 1990년 1월 25일에는 -17.1℃까지 떨어진 강한 한파를 기록했다. 다만 다음 달에는 다시 이상 고온이 찾아왔다.

  • 1991년 2월 21~24일 한파
    2월 23일 전라북도 장수에서 -25.8℃로 전국 최저 기온을 기록하였고[119], 전주는 2월 23일 -15.5℃를 기록했으며, 서울 기준 2월 22일 최고 기온 -8.4℃, 2월 23일 최저 기온 -15.0℃를 기록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서울에서 2월 하순에 -15℃ 이하를 기록한 것은 1925년 2월 25일(-15.2℃)이 유일하며 일제강점기 이후를 포함해도 1981년 2월 26일(-15.6℃)로 단 두 번 뿐인데, 지구 온난화와 도시화에 따른 열섬 현상이 상당 부분 진행된 1990년대에 이러한 기온을 기록한 것은 이 당시의 한파가 2월 하순 기준으로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준다. 2월 하순에 -12℃ 이하의 기온이 나타난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120]

  • 1993년 12월 중순, 1994년 1월 하순, 3월 한파
    이상 고온이 있었던 겨울이지만 한파가 없지는 않았다. 12월 중순에 몇 번의 한파가 찾아와서 12월 16일에 서울 최저 기온이 -11.2℃까지 떨어졌다. 몇 번의 반짝 추위가 있어서 12월은 평년 수준이었다. 1월은 이상 고온을 보여서 서울 월평균 기온 -0.9℃였으나 한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 무렵에 최저 기온 -10℃를 밑도는 한파가 약 5일 정도 찾아왔으며, 그중 1월 19일에 최저 기온 -12.3℃로 한파일수가 기록되었다. 2월에도 설날에 한파가 찾아왔다. 다만 전체적으로 1993~1994년 겨울은 따뜻했으나 3월에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서 이상 저온이 찾아왔다. 그러나 4월에는 초이상 고온이 찾아왔으며 1994년 폭염으로 이어졌다.

  • 1996년 11월 30일~1997년 1월 한파
    11월 30일부터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더니 12월에는 첫날부터 강력한 한파가 나타났다. 서울의 경우 11월 30일에 -8.0℃를 기록했으며 12월 1일에는 -10.5℃를 기록했다. 전라북도 장수의 경우 12월 1일에 -21.0℃, 12월 2일에 -22.1℃를 기록했다. 하루만 더 빨랐다면 많은 지역에서 11월 역대 최저 기온을 달성했을 것이다. 중순부터 12월 31일까지는 일시적으로 이상 고온을 보였으나 다음 해 1월부터는 서울 최저 기온 -10℃를 밑도는 한파가 다시 시작되었고, 새해 첫날인 1월 1일 북한백두산 천지에 도토리만한 크기의 우박들과 직경이 1.8cm에 달하는 눈송이들이 퍼부으면서 적설량 2m를 넘기다가, 이튿날인 1월 2일이 되자 눈과 우박이 그치면서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해 -51.0℃를 기록하였다. 이는 한반도에서 기록된 역사상 공식 최저 기온인 중강의 -43.6℃보다 낮은 기록이자, 한반도 역대 비공식 최저 기온 중 하나이다.[121] 서울은 1월 22일에 -13.7℃로 절정을 찍었고, 월평균 기온도 -3.3℃로 평년과 비슷했으나 1990년대에서는 가장 낮다.

  • 1997년 12월 상순, 1998년 1월 한파
    전체적으로 이상 고온을 보이며 온난한 겨울이었으나, 가을이 끝나고 날씨가 추워지는 무렵부터 빠르게 한기가 찾아와서 겨울 시작은 다소 추웠다. 서울은 11월 30일의 최저 기온이 3.1℃로 포근했지만 12월 1일이 되자 10℃ 가까이 하강하여 -6.2℃를 기록하였으며, 특히 12월 3일과 12월 10일에는 -11℃ 이하로 내려갔다.[122] 하지만 중순이 되자 온기가 고속으로 복귀했고, 이 이상 고온이 1월 17일까지 이어졌으나, 1월 18일에 갑작스럽게 최저 기온이 돌연 12℃ 이상 떨어지는 기습 한파가 와서 1월 24일 서울의 최저 기온이 -15.4℃, 최고 기온은 -7.9℃를 기록하여 일평균 기온이 -11.9℃였으며, 같은 날 북한삼지연은 최저 기온이 -39.2℃에 달했다.

[1] 해당 블로그에 기재된 월평균 기온의 경우 산출 방식이 현대와 달라서 현대의 방식으로 계산된 월평균 기온보다 0.5~1℃ 정도 높게 적혀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19세기 당시에는 오전 9시, 오후 3시, 오후 9시로 일 3회 측정에 대한 평균치가 바로 일평균 기온을 산출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는 오전 3시, 오전 6시, 오전 9시, 오후 12시, 오후 3시, 오후 6시, 오후 9시, 오전 0시로 일 8회에 걸쳐 측정된 시간대별 기온을 합산하여 일평균 기온을 산출해낸다. 하루 중 기온이 대체적으로 가장 낮은 시간은 늦은 밤~새벽 사이인 오전 0~9시 사이인데, 19세기 일평균 기온 산출 과정에서는 오전 0~9시 사이(0시, 3시, 6시)를 모두 빼먹었으니 당연히 현대와 같은 산출 방식보다는 수학적으로 높게 산출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월평균 기온도 실제보다 다소 높게 계산될 수밖에 없는 방식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2] 1928년 1월 5일 서울이 -22.2℃였을 때 인천이 -16.4℃였고, 1월 7일 서울이 -21.7℃였을 때 인천이 -14.5℃였다. 1918년의 경우도 1월 3일에 서울이 -21.8℃였을 때 인천이 -14.4℃였고, 1920년도 1월 4일에 서울이 -22.3℃였을 때 인천이 -16.4℃였다.[3] 공통적으로 1월 하순에 크게 추워지다가 1월 26~27일에 맹추위의 절정에 달했다.

1월 26일: 교토 -11.0℃, 기후 -7.3℃, 사가 -6.4℃, 군마 -8.9℃, 구마모토 -9.2℃, 미야자키 -7.5℃, 나가사키 -5.2℃, 가고시마 -5.1℃, 후쿠오카 -4.6℃, 오카야마 -6.1℃

1월 27일: 도쿄 -6.4℃, 도쿠시마 -5.2℃, 나가노 -14.8℃, 미에 -7.8℃, 아이치 -7.5℃, 시마네 -5.4℃, 효고 -5.5℃, 오이타 -5.1℃

등. 예외적으로 고치는 1월 24일에 -5.8℃를 기록한 뒤 점점 풀렸다.
[4] 그래도 겨울이라고 얼마 동안은 영하가 기록되었지만 고작 -3℃ 전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추위의 강도가 너무나도 약했으며, 그마저도 1월 16~25일에는 아예 영하가 기록되지 않았다.[5] 3월 1일 -5.7℃, 3월 2일 -5.0℃, 3월 5일 -5.2℃, 3월 6일 -5.2℃[6] 그리고 현재는 서울의 11월 5일 극값 기록을 1917년과 1909년이 가지고 있지만, 원래는 1905년이 3개 항목을 모두 꿰찼을 가능성이 크다. 11월 5일 서울의 극값 기록(MIN)이 각각 3.0℃, -0.8℃, -5.2℃인데, 1905년 인천의 기록만으로도 서울에 이 기록들을 압도하는 추위가 찾아왔음을 짐작케 하기 때문이다. 가을철에는 인천보다 기온이 약간 더 들쑥날쑥한 서울의 날씨 특성상 인천의 기록보다 더 낮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기존 기록보다 2~3℃는 더 낮게 경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하튼 잘 알려지지 않은 기록인 것은 사실이다.[7] 최고 기온 -3.9℃, 최저 기온 -6.9℃[8] 이후 116년 뒤인 2023년 12월 21일과 22일에 낮 최고 기온이 -8.0℃에 그쳤고, 최저도 -14.4℃까지 내려가 116년 전 이맘 때의 한파의 위력을 재현하였다. 그러나 21일조차 한끗발로 밀렸던 수준이라 22일의 추위는 1907년 12월 22일에 확실히 밀린다.[9] 12월 하순으로는 세번째로 낮다. 가장 최근 한파인 22일에도 낮 최고 기온이 -8.0℃에 머물렀음에도 그 체감 온도에 경악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으니, 이 때의 한파와 체감 수준이 어땠을지는 설명 생략.[10] 앞 주석에 언급된 2023년 12월 21일, 22일 낮보다도 한술 더 뜰 정도이다.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방한 장비로 후세의 추위보다 한술 더 뜨는 추위를 꼬박 견뎌야 했던 그 시절 한파는 도대체.[11] 기상자료개방포털에 들어가보면 1월 30일의 최고 기온은 -1.6℃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전날이 따뜻해서 이제 막 기온이 떨어지는 과정에서 새벽 0~1시 쯤에 기록된 것일 뿐이고, 실질적인 낮 최고 기온은 -14~-15℃ 사이일 것으로 보인다.[12] 서울의 기온 타임라인을 볼 때 아침이 아니라 자정이 다 되어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13] 12월 4일 -4.7℃, 12월 5일 -4.7℃, 12월 19일 -2.8℃, 12월 25일 -4.1℃, 12월 26일 -4.8℃[14] 이는 이례적으로 최저 기온이 빨리 떨어져서 그런 것으로, 9월도 중하순 대부분이 최저 기온 한 자릿수를 기록했고 10월 중순부터 영하로 떨어지며 11월에는 2020년 1월보다 월평균 기온이 낮았을 정도이다. 그 영향으로 1912년 서울의 9월, 10월, 11월 평균 기온이 모두 역대 최저 1위를 기록하며 강한 이상 저온을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저온/사례/20세기 문서 참조.[15] -20.6℃는 인천의 역대 최저 기온 공동 3위 기록이다. 참고로 아침 최저 기온이 아니라 일 최저 기온이라고 적은 이유는 이 역시 서울의 경우처럼 아침이 아니라 자정이 다 되어서 기온이 떨어지는 과정에서 찍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이 -20~-23℃ 정도로 매우 추워도 바다에 붙어있는 인천 특성상 인천의 최저 기온은 -20℃가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오후 11시~자정 사이에 이미 -20.6℃를 찍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16] 1월 12일과 함께 역대 최저 기온 3위.[17] 대구 역대 최저 기온 3위. 1~2위는 모두 1923년 1월에 기록되었다.[18] 2월 4일 -13.6℃, 2월 5일 -16.3℃, 2월 6일 -15.7℃, 2월 7일 -13.5℃[19] 1917년은 1월의 월평균 최저 기온 -14.4℃로 역대 최하위이자 월평균 기온 -9.0℃로 역대 최저 2위, 1936년 1월은 일 최저 기온 -10℃ 이상인 날이 3일로 역대 최하위이자 월평균 기온 -8.8℃로 역대 최저 3위, 1963년 1월은 월평균 기온 -9.2℃로 역대 최하위이다. 사족이지만 만약 1917년 1월 중순에 몇몇 날이 최저 기온이 높지 않았다면 월평균 기온 -10℃ 이하, 월평균 최저 기온은 -15℃ 이하를 기록했을 수도 있다.[20] 특히 그 전에 있었던 1915~1916년 겨울은 그때 당시에 비하면 2019~2020년 겨울만큼 심한 이상 고온 현상을 보였다. 이는 열섬 현상이 없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지금까지도 서울의 1월 평균 기온 상위 6위로 평년보다 굉장히 높은 기온을 보였다. 1971년까지는 아예 1월 평균 기온 최고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서울의 월평균 기온은 12월 0.8℃, 1월 0.0℃, 2월 0.8℃로 이상 고온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916년 3월에는 꽃샘추위가 심해서 전년도 12월과 2월보다도 월평균 기온이 낮은 기현상이 발생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저온/사례/20세기 문서 참조.[21] 이는 아마도 오전 7시 사이(해 뜨기 직전)에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상청의 시간별 자료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오전 6시에 -18.5℃라면 기온 하강이 더욱 진행되면서 해 뜨기 직전인 약 오전 7시경에 -19.0℃를 기록한 듯.[22] 특히나 서울은 1월 2일 단 하루를 제외하면 1월 1~12일까지 모든 날이 최저 기온 -13℃ 이하였으며, 1월 3~12일까지 열흘 동안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최저 기온 -15℃ 이하, 1월 4~11일로 축소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최저 기온이 -17℃ 이하를 기록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한파가 이어졌다(정확히는 1월 7일이 -16.9℃이므로 반올림 -17℃ 이하이다).[23] 2월 1일 -17.6℃, 2월 2일 -16.9℃, 2월 3일 -16.8℃[24] 은산의 -37.6℃ 기록은 그렇다 쳐도 황해도 지역인 신계에서 -31.4℃를 기록했다는 것은 의아할 수 있는데, 신계는 북한 강원도 이천과 접하고 있으므로 철원과 비슷한 기후를 보이는데다 당시 일제강점기임을 감안하면 이해되는 부분이다. 또한 두 지역이 산으로 둘러싸이다시피 한 지형이고, 그 전에 내린 이 태양열을 반사해서 기온이 더욱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25] 12월 26일이 가장 한파가 강했으므로 아마 12월 26일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16년 12월 26일 오전 6시 일기도를 보면 중강과 같은 북부 내륙 지방에 -35℃ 기온선이 보인다.[26] 이는 아마 1월 8일이나 1월 22일 두 날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국적으로 한파의 강도가 이날에 가장 강했으므로 이를 추측해보는 것이다.[27] 인천의 이 기록은 월 상관없이 1915년 1월 13일, 1931년 1월 10일에 이은 낮 최고 기온 역대 최저 3위이다. 12월에 이러한 낮 기온을 보였다는 점이 경이롭다.[28] 이때는 열섬 현상 같은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추웠고, 서울의 12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 2위이며 1위는 1944년 12월(-5.8℃). 사사오입을 하지 않으면 1944년 12월과 함께 공동 최하위이다. 무엇보다 1917년 12월 한파가 놀라운 점은, 12월 시작부터 강력한 한파가 지속되어 한 달 내내 추웠던 1944년 12월과 달리 1917년은 중순까지 별다른 한파 없이 평년과 비슷한 기온을 보이다가 12월 15일부터 본격적인 한파가 시작되었는데, 한파의 기간이 1944년 12월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월평균 기온이 1944년 12월과 거의 같았다는 점에서 1917년 12월 한파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29] 통계청 참고 자료에 따르면 1917년 12월 평양의 월평균 기온이 -10.8℃를 기록했고 최저 기온은 -24.3℃를 기록했다고 한다.[30] 실제로 라니냐의 강도는 1917년 1월이 가장 강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11~12월 들어 다시 낮아졌다. 슈퍼 엘니뇨로 평년보다 매우 높았던 2015년 12월과는 정반대 관계이며 이후 급속도로 약화되어서 1918년 2월에 정상 범위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원래 추운 겨울이 예상되었는데 매우 기록적인 라니냐까지 겹치면서 1917년 12월의 비현실적인 한파가 닥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18년 1월은 1917년 12월에 종속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1월 10일 이후부터는 추위가 점차 약해졌으며 1월 하순까지 이렇다 할 한파가 없었고 2월 상순에는 오히려 이상 고온까지 일어났다. 2월 중순에 다시 추위가 오기는 했지만 심하지 않았고 2월 하순은 아예 대놓고 이상 고온을 보였다. 지금 기준으로도 꽤 높다.[31] 하지만 1919년 2월 5일의 -18.3℃ 기록은 2월 역대 최저 기온 4위에 해당하는 만큼 의미가 크다.[32] 1월 1일 -7.3℃, 1월 9일 -5.5℃, 1월 12일 -4.7℃, 1월 14일 -7.4℃, 1월 15일 -1.5℃[33] 단 1909년 이전에는 월평균 기온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띄엄띄엄 관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4] 수상당량비는 1mm당 적설의 를 의미한다. 기온이 낮고 습도가 낮을수록 수상당량비가 커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예를 들어 수상당량비가 10이라는 의미는 1mm의 강수량이 10mm=1cm의 으로 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5℃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는 수상당량비가 15 이상에 달한다. 예시로 2010년 중부권 폭설 사태 때 -6℃ 안팎의 낮은 기온에서 눈이 내렸는데 당시 서울의 하루 강수량은 14.2mm밖에 안 되었지만 총 25.8cm의 눈이 내려 수상당량비가 18.2에 달했다.[35] 아무리 추운 한파여도 -16℃ 이하는 자정이 다 되거나 새벽이 되어서 나오는 기온인데 해가 지자마자 오후 6시에 -16℃ 이하를 기록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온이 떨어지는 페이스가 엄청나게 빨랐던 것.[36] 대구 기준으로 1915년 1월 13일(-11.3℃)과 1월 14일(-9.5℃) 다음으로 낮은 최고 기온 기록이다.[37] 1월 역대 최저 기온 5위[38] 게다가 1910년 12월 11일경에 -16.8℃를 기록한 것보다도 이틀 더 빠르다![39] 사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신문 기사에도 나와있듯이 -23.1℃라는 수치는 진짜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1927~1928년 겨울 사이에 서울 공식 기상관측소의 온도계 자체가 오작동 등의 이유로 지나치게 기온이 낮게 찍혔을 가능성이 유력하다.[40] 그러나 1930년 12월과 1931년 1월 상순이 당시 기준으로 평년보다 따뜻했을 뿐 이상 고온일 정도로 기온이 높은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서울은 1930년 11월에 매우 기록적인 이상 저온을 보여서 월평균 기온이 3.1℃로 역대 최저 2위였다. 게다가 1931년 4월도 후술하다시피 이상 저온이 매우 심해서 월평균 기온 역대 최하위를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1930~1931년 겨울은 11월 2일부터 시작되어 이듬해 4월 19일까지 169일간 이어졌으며, 이는 서울에서 역대 가장 긴 겨울로 남게 되었다.[41] 시간대별로 보면 알겠지만 낮 최고 기온은 이보다 훨씬 낮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월 9일 오후 11시~자정이 다 되어서 -14.2℃를 기록했으므로 1월 10일 오전 0~1시 사이 새벽 근처에 잠시 올라 1월 10일의 일 최고 기온 -13.0℃를 찍은 듯하다.[42] 3월 1일 -10.7℃[43] 최저 기온은 4월 8일의 -1.0℃[44] 1963년 1월(-9.2℃), 1917년 1월(-9.0℃)에 이은 1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 3위다. 심지어 중강은 1936년 1월 월평균 기온 -25.3℃로 역대 최저 3위 기록을 세웠다.[45] 1월 2일 -9.4℃, 1월 25일 -9.5℃, 1월 28일 -7.5℃[46] 여담이지만 링크에 들어가면 쇼와 6년(1931년) 1월 11일에 서울이 -22.0℃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타이다. 1931년 1월 11일에 서울은 -22.5℃를 기록했다. 또한 서울의 역대 최저 기온이 쇼와 2년(1927년) 1월 31일에 기록되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그해 12월 31일에 -23.1℃로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47] 정확한 값은 -0.25℃인데, 기상자료개방포털에는 음수를 오사육입하기 때문에 -0.2℃로 기록되어 있다.[48] 4월 1일 -2.0℃, 4월 3일 -0.5℃, 4월 10일 -0.1℃[49] 12월 11일 -11.4℃, 12월 12일 -11.4℃, 12월 15일 -13.6℃, 12월 19일 -11.4℃[50] 그러나 그 뒤에도 4월 15일까지 0℃ 전후를 기록한 날이 있었고, 심지어 영하로 떨어진 날도 있었으며, 5월의 경우 5월 4~6일에는 3~5℃까지 떨어지고, 6월 상순에는 11~13℃를 계속 유지하였으며 6월 7일에 10.2℃까지 떨어지는 등 이상 저온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1940년은 뒤끝이 강해서 9월까지 이상 저온이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저온/사례/20세기 문서 참조.[51] 하지만 이는 통계 오류 혹은 온도계 오작동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같은 날 서울은 불과 -15.5℃, 전주는 -12.6℃를 기록했는데 광주 혼자서 -19.4℃까지 떨어졌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런데 광주 기준으로 동년 1월 12일에 -18.2℃가 또 나왔으며 1940년대에 -17℃ 이하가 여러 번 나온 것으로 보아 관측을 처음 시작한 1939년 5월 1일부터 1945년까지 유난히 낮은 기록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당시 광주 기상관측소 온도계가 추운 날씨에 오작동을 일으켰던 것 같다. 반면 1946년 이후의 기록은 광주 관측소도 신뢰성이 높으며 정상적으로 작동된 것으로 보인다.[52] 기상자료개방포털에는 -5.7℃로 적혀있으나 음수 기준으로 사사오입이 반영되지 않은 값이다. 엑셀이나 기상청처럼 사사오입을 반영하는 프로그램에서는 이해 12월을 -5.75℃로 계산, 사사오입을 반영하여 -5.8℃라는 값을 도출하여 1944년 12월을 관측 사상 가장 낮운 12월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53] 재미있게도 동시기에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의 12~2월 평균 기온이 각각 -4.8℃, -7.9℃, -5.9℃로 겨울 전체 평균 기온이 -6.2℃라는 값을 기록했다. 당연히 이쪽도 관측 사상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12월과 2월이 뒤바뀌었을 뿐 서울 기록과 거의 똑같다. 이는 역으로 말하자면 하코다테(북위 41° 46′)보다 한참 남쪽인 서울(북위 37° 34′)이 하코다테처럼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는 뜻이다. 다만 하코다테의 1월 평균 기온은 -2.6℃로 현대의 서울(-2.0℃)과 별 차이는 없다.[54] 1935~1936년 겨울과 비교하면 겨울 전체 평균 기온은 1944~1945년이 더 낮으나, 겨울 전체 최저 기온과 3~4월 평균 기온은 1935~1936년이 더 낮았다(1944~1945년 겨울의 최저 기온은 -19.1℃이며, 1935~1936년 겨울은 -20.1℃이다. 그리고 1936년 3월, 4월 평균 기온은 각각 -0.2℃, 9.1℃를 기록했고, 1945년 3월, 4월은 각각 2.3℃, 11.0℃를 기록했다).[55] 전란이 한창인 중부 지방에 있음에도 11월 1일~12월 31일까지 2개월 분량의 기온 기록이 남아있는데, 인천 상륙작전 이후 남한의 영토 회복의 영향으로 다시 관측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는 북한군중공군의 남진 때문인지 다시 끊겼다가 1951년 9월 1일에 재개되었다.[56] 예외적으로 12월 7일에는 최저 기온 6.3℃, 최고 기온 10.9℃의 따뜻한 날씨가 찾아왔다.[57] 기상자료개방포털에 들어가서 확인해보면 이날 최저 기온 시각이 24:00으로 적혀있다. 즉 아침에 기록한 것이 아닌 밤 12시경에 기록된 것.[58] 눈으로 인한 태양빛의 반사도. 반사율이 클수록 흡수 복사열이 적어져서 기온 하강이 심해진다.[59] 대한파가 약간 풀릴지라도 -10℃ 이하가 계속되어 사실상 계속 한파였다.[60] 못 믿겠다면, 몇 주 이상 장기 한파가 이어진 1917년 12월~1918년 1월, 1936년 1~2월, 1940년 1월, 1944년 12월~1945년 2월, 1947년 12월, 1963년 1월, 1977년 1월, 2011년 1월 등의 일별 강수량과 적설량을 살펴보자. 간혹 폭설이 내리기도 했지만 강수일수가 적고 흔치 않다. 1917년 1월처럼 장기 한파에 눈도 많았던 겨울은 매우 드물다.[61] 일별로는 1월 1일 5cm, 1월 3일 2.3cm, 1월 4일 4.8cm, 1월 5일 0.2cm, 1월 13일 9.8cm, 1월 14일 2.4cm, 1월 15일 5.5cm, 1월 20일 2.4cm, 1월 21일 9.1cm, 1월 26일 18.9cm[62] 5cm 이상 최심신적설을 기록한 날을 대설일수로 정의하는데, 최심신적설은 그날 새로 내린 눈을 의미한다.[63] 광복 이후 역대 최저 기온 2위이다. 3위는 후술할 1986년 1월 5일이고, 1위는 후술할 1970년 1월 5일이다. 여담이지만 공교롭게도 1~3위 모두 1월 5일이라는 같은 날짜에 기록되었다.[64] 광복 이후가 아닌, 서울 최초 기상 관측 이래로 확대해도 1936년 1월 17일, 1986년 1월 5일과 공동으로 역대 최저 5위에 해당하는 값이다. 심한 혹한이 널리고 널린 일제강점기의 웬만한 한파보다도 낮았던 것. 1~4위는 1915년, 1931년 두 해가 전부 싹쓸이했다.[65] 이조차 4년 뒤인 1963년에 비하면 4.1℃나 높은 값이며 1958~1959 겨울은 1월 초중순을 제외하면 큰 추위가 없는 겨울이었다.[66] 2000년대와 2020년대에서 가장 낮은 기온은 -18.6℃(2001년 1월 15일과 2021년 1월 8일 기록)이고, 2010년대에서 가장 낮은 기온은 -18.0℃(2016년 1월 24일 기록)이다.[67] 1962년 12월에도 한파가 있기는 했지만 앞/뒤 연도에 비하면 그나마 덜했고 평년보다 높았다.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야 최고 기온 -5.5℃, 최저 기온 -11.5℃를 기록하여 1년 중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12월에 이상 고온이 있어서 1월은 전달보다 무려 10℃ 이상 떨어지게 되었다.[68] 기상자료개방포털에는 -9.1℃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값은 -9.154℃ 이다. 하지만 음수 반올림의 특성상 -9.1°C 이 맞다.[69] 이는 악명 높은 추위를 기록했던 1917년 1월(-9.0℃)보다도 약간 낮고, 기상 관측 사상 서울 역대 최저 월평균 기온이다. 다만 1917년 1월은 최저 기온이 -21.1℃로 1963년 1월의 -18.4℃보다 더 낮았고, 월평균 최저 기온도 1963년 1월보다 낮았다. 후술하듯이 1963년 1월은 최저 기온은 당시 치고 그렇게까지 낮지 않았으나, 한 달 내내 일 최고 기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역대 최저 월평균 기온을 기록한 것이다.[70] 1월 1일 0.5℃, 1월 3일 0.8℃, 1월 4일 0.8℃, 1월 17일 1.6℃[71] -10℃ 이하의 날씨는 현대에도 1월에 한파가 왔다 하면 일상적인 기온이지만, 1963년은 대부분의 날의 최고 기온이 -3~-10℃ 정도로 매우 낮았다. 이러한 날씨가 거의 한 달 가까이 이어진 것이다. 첫 한파의 극점인 1월 16일 이전의 1월 15일 기온은 최저 -15.9℃, 최고 -11.0℃를 나타냈다. 다른 날에도 여전히 최고 기온이 -5~-8℃로 매우 낮았기 때문에 -10℃ 이하의 일평균 기온이 며칠씩이나 기록되었다.[72] 공식 기상 관측은 1964년 1월 1일이나, 1951년 3월부터 비공식 관측이 이뤄지고 있었다.[73] 12월 26일 -12.1℃, 12월 27일 -13.2℃ 기록[74] 1월 4일 기록[75] 월평균 기온은 서울 기준으로 12월, 1월, 2월이 각각 -2.0℃, -4.7℃, 0.1℃. 12월과 1월은 다소 추웠으나 2월은 포근한 편이었다.[76] 월평균 기온은 서울 기준으로 12월, 1월, 2월 각각 -3.0℃, -4.5℃, -2.4℃로 12월과 2월은 상당히 추웠고 1월도 당시 기준으로는 약간 낮지만 현대에 비하면 매우 추운 편에 속한다.[77] 12월 -5.7℃, 1월 -7.8℃, 2월 -4.9℃[78] 다만, 1935~1936년 겨울은 12월이 -3.9℃인 대신 1월 -8.8℃, 2월 -4.4℃ 등 1월이 매우 기록적으로 추워서 겨울 전체 평균 기온이 무려 -5.7℃로 역대 최저 2위를 기록해, 사실상 1967~1968년 겨울과 비교하면 훨씬 심하게 추웠다. 단지 1967~1968년 겨울은 3개월 연속 -4℃ 이하인 점이 대단한 기록일 뿐.[79] 1위는 1944~1945년 겨울(-6.1℃), 2위는 1935~1936년 겨울(-5.7℃), 3위는 1916~1917년 겨울(-4.6℃), 공동 4위는 1937~1938년 겨울과 1946~1947년 겨울(-4.5℃)[80] 서울의 월평균 기온이 3.1℃로 12월 평균 기온 역대 최고 3위이다. 특히 12월 7~9일에는 서울의 최저 기온10℃ 이상을 연속으로 기록했다. 심지어 12월 9일은 최고 기온이 17.7℃를 기록했는데 이는 서울의 12월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이다. 이후 12월 11일에도 14.5℃를 기록했으며 12월 13일까지 최저 기온조차 영하로 떨어진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나마 12월 14~16일, 12월 22~23일에 잠시 -7~-9℃로 떨어지는 한파가 있기는 했으나 금세 이상 고온으로 돌아갔고 12월 30일까지 평년 수준이거나 이상 고온을 유지하다가 12월 31일에 기온이 -11.0℃로 급격하게 떨어지는 현상을 보였다.[81] 사실 이것은 2020년대 기준으로 보면 1도 이상 추운 편이지만, 1960년대에서는 평년보다 오히려 높은 것이었다. 1960년대 서울의 1월 평균 기온은 -4.7℃였으므로. 즉 반대로 말하면 한파가 와도 한기가 약해 평년보다 따뜻한 1월이었다. 다만 2월의 -2.7℃는 평년보다 낮은 것이다.[82] 1968년 12월 19일에 관측이 개시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1969년 1월 1일에 처음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다른 대도시에 비하면 상당히 늦게 시작된 것이다.[83] 수원은 1970년 당시 인구가 16만 7천 명, 청주는 14만 3천 명 정도로 소도시 수준인데 비해 서울은 1965년에 340만 명, 1970년에 540만 명으로(1969년 2월 당시 470~490만 명으로 추정됨) 이미 과포화 상태였다. 하지만 이들 지역도 당시 온도계의 부정확성이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84] 심지어 12월 13일에는 -12.0℃로 한파일수를 기록하였고 1972년의 최저 기온 극값이 되었다. 이는 1972년 1월이 초이상 고온을 보여 서울 최저 기온 극값이 -9.1℃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 고온/사례 문서 참조.[85] 서울 7.6cm, 인천 30.0cm(인천의 최심신적설 공식 관측이 시작된 1937년 이래, 해당 지역 최심신적설에서 압도적인 1위 기록에 해당한다. 단, 비공식적으로는 1922년 3월 23일에 43.8cm라는 엄청난 값을 기록한 적이 있다), 수원 19.2cm, 이천 17.6cm, 원주 19.2cm 등 손에 꼽을 만한 대설이었다.[86] 기상자료개방포털에는 -2.4℃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값은 -2.458℃이므로 사사오입해서 -2.5℃이다.[87] 서울 역대 공식 최저 기온보다도 낮다.[88] 대관령면의 역대 공식 최저 기온 중 압도적인 1위.[89] 이후 대관령면은 3월 상순에 다시 한파가 맹위를 떨쳐서 3월 4일에 최고 기온 -12.2℃를 기록하는데, 정확히 1년 전인 1976년 3월 4일에는 최저 기온 -12.1℃를 기록하였다. 이후에도 한파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4월에 영하를 기록한 날이 은근히 많았고, 급기야 5월 16일에 -4.7℃, 5월 23일에 -2.1℃를 기록하였다. 5월 24일에 곧 기온이 큰 폭으로 오르며 한파가 완전히 끝났다.[90] 2월 14일 -12.0℃, 2월 15일 -13.2℃, 2월 16일 -12.1℃[91] 2월 14일 -0.7℃, 2월 15일 -1.7℃, 2월 16일 -1.9℃, 2월 17일 -1.4℃, 2월 18일 -1.3℃[92] 우연찮게도 당시 10.26 사건과 여기서 파생된 혼란이 집중된 1980년에 이상 저온이 특히 집중된 경향이 보인다. 당시 혼란스러운 시국에 불어닥친 살인적인 한파와 이상 저온은 안 그래도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더욱 가중시켰을 듯하다. 1980년의 이상 저온에 대한 내용은 이상 저온/사례/20세기 문서 참조. 11월 중순이라는 시기를 고려하면 거의 1927년 12월 31일과 맞먹는 한파가 찾아온 셈.[93] 1884년 11월 하순에 서울에서 -12℃ 이하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1891년 11월 27일에도 신빙성은 다소 의심되지만 -13.5℃를 기록했다는 자료가 존재하지만 공식 기상 관측이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이다.[94] 1월 26일 8.4℃, 1월 27일 8.1℃, 1월 28일 8.9℃[95] 2월 25일 12.0℃, 2월 26일 10.5℃, 2월 29일 12.0℃[96] 물론 후술할 1984년이 더 낮기는 하지만 하순의 이상 고온으로 인한 것이며 중순까지는 1984년보다 오히려 더 추웠다.[97] 사실 서울은 5~6월이 이상 저온이었지만 5월의 동해안, 6월의 동쪽 지역은 이상 고온이 심해서 폭염이 강했다.[98] 1월 9일 0.8℃, 1월 18일 0.6℃, 1월 28일 0.4℃, 1월 29일 0.6℃, 1월 31일 1.3℃[99] 이는 1963년 1월의 -9.2℃ 이후 서울의 1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였으나 후술할 2011년 1월에 기록이 깨졌다.[100] 비공식적으로는 1942년 1월 5일 철원 김화읍에서 -33.4℃가 기록된 적이 있고, 1965년 1월 12일 화천 대성산과 설악산 향로봉에서 -33.0℃를 기록, 2001년 1월 16일 횡성 안흥면에서 -33.0℃를 기록한 적도 있었으나 이들은 공식 기상관측소에서 측정된 기록이 아니라 대부분 AWS(자동기상관측장비)를 통해 측정되었기 때문에 비공식 기록이다.[101] 1월 2일 -21.1℃, 1월 3일 -30.2℃, 1월 4일 -31.0℃, 1월 5일 -32.6℃, 1월 6일 -31.0℃, 1월 7일 -27.8℃, 1월 8일 -24.8℃, 1월 11일 -22.0℃, 1월 13일 -23.6℃, 1월 14일 -26.0℃, 1월 17일 -21.8℃, 1월 18일 -21.8℃, 1월 20일 -25.4℃, 1월 21일 -25.4℃, 1월 22일 -27.2℃, 1월 23일 -25.2℃, 1월 25일 -20.5℃, 1월 26일 -24.2℃, 1월 27일 -27.4℃, 1월 28일 -23.8℃, 1월 30일 -22.8℃, 1월 31일 -22.4℃[102] 당시 양평의 기온 추이를 보면 1월 3일 -30.2℃, 1월 4일 -31.0℃, 1월 5일 -32.6℃, 1월 6일 -31.0℃를 기록했는데, 사흘만 더 빨랐더라면 공식 기상 관측 최초로 12월에 -30℃ 이하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103] 충주는 바로 전날과 바로 다음 날인 1월 4일과 1월 6일에도 -27.9℃까지 내려갔다.[104] 홍천은 바로 전날인 1월 4일에도 -28.0℃였다.[105] 원주도 바로 전날인 1월 4일 -27.4℃였다.[106] 역대 2월 하순 중 가장 낮은 기온이다. 1925년 2월 25일(-15.2℃)의 기록을 56년만에 경신. 그리고 시기를 보면 정말 대단한 한파인데, 2월 26일과 3월 1일 사이의 기간이 불과 이틀이다. 만약 사흘 더 늦었으면 이 -15.6℃가 2월 하순이 아니라 3월 1일에 기록될 뻔 했다.[107] 1월 5일 -23.2℃, 1월 6일 -21.9℃, 1월 7일 -25.7℃, 1월 11일 -20.5℃, 1월 16일 -20.4℃, 1월 18일 -20.2℃, 1월 19일 -20.4℃, 1월 20일 -21.7℃, 1월 24일 -21.8℃, 1월 29일 -25.8℃[108] 1위는 1980년 2월의 -8.8℃이다. 비슷하게 1월 하순도 -7.1℃로 하위 12위를 1941년과 공동 기록하며 추웠다.[109] 특히 12월 9~11일에는 이상 고온이 매우 심했다. 12월 9일 최고 기온은 14.5℃, 12월 11일 최고 기온은 13.1℃까지 올라갔다.[110] 12월 하순 평균 기온이 이보다 더 낮은 해는 낮은 순서대로 1917년, 1967년, 1927년이다. 1984년 12월은 중순까지 최저 기온이 특히 높아서 엄청난 이상 고온을 보였지만 하순에는 영하 두 자릿수 이하의 한파가 지속되고 최고 기온조차 낮았기 때문에 이렇게 평균 기온이 급락했던 것이다.[111] 1월 1일 3.0℃, 1월 2일 3.4℃, 1월 3일 3.5℃, 1월 9일 2.0℃, 1월 15일 3.0℃, 1월 18일 2.8℃, 1월 19일 0.7℃, 1월 22일 2.0℃, 1월 25일 0.0℃, 1월 26일 2.9℃, 1월 27일 1.8℃, 1월 31일 1.8℃[112] 2월 21일 -10.6℃, 2월 22일 -10.8℃, 2월 23일 -10.9℃, 2월 24일 -11.0℃[113] 지금까지도 여전히 서울의 광복 이후 역대 최저 기온 3위에 해당된다.[114] 최저 기온은 -24.4℃를 기록했다. 또한 대관령면의 월평균 기온조차 -9.9℃로 거의 -10℃에 근접하였다.[115] 2001년, 2021년에 근접하게 찾아오긴 했다.[116] 다만 이는 서울 도심의 열섬 현상이 심화된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열섬 현상이 비교적 덜한 도심 외곽 김포국제공항 일대의 경우 2020년대까지도 여전히 AWS로 -20℃ 안팎의 기온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공식 기상관측소에서 측정되는 기온이 아니라서 비공식 기록이다.[117] 단 1986년은 3~6월은 평년에 가깝고 12월은 이상 고온을 보여서 1980년보다는 높았다.[118] 가장 낮았던 날은 1월 14일의 -15.1℃이다.[119] 이 기록은 장수의 역대 최저 기온 극값이자 전국 2월 하순 역대 최저 기온 극값이기도 하다.[120] 이후 2005년, 2022년 2월 하순에 -10℃대로 근접하게 나오긴 했다.[121] 관측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두산 정상 일원에서 비공식적으로 -54.7℃가 기록된 적도 있었다.[122] 12월 3일 -11.0℃, 12월 10일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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