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 이사금/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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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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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
생애 · 황산진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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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탄생 신화
3. 고향 용성국/다파나국의 위치 비정
4. 재위기간
5. 사후



1. 개요[편집]


신라 탈해 이사금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탄생 신화[편집]


등장부터가 전설이다. 석씨가 신라 3대 국성 중 존재감은 가장 적은데도 정작 등장 설화의 분량은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 김씨의 시조 김알지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가야와 신라의 전설을 조합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석탈해는 왜국 동북쪽 1,000리 바깥에 위치하는 용성국(龍成國) 혹은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자로, 왕비가 임신 7년 만에 큰 을 낳았고, 아버지인 함달파왕이 불길한 것이라고 생각해 배에 실어 내버렸다. 이후 배를 타고 신라 동해안의 아진포에 떠내려온 걸 노파가 건져내 알에서 깨어난 탈해를 키웠다. 탈해는 물고기를 잡으면서 어머니를 부양했지만 양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짐작해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장성한 뒤에는 금관가야에 가서 왕위를 내놓으라고 했다가 수로왕에게 실패하고 신라로 가서, 토함산 정상에서 정찰을 해 보니 반달 모양의 낮은 봉우리[1]

가 괜찮아 보여 거기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던 호공의 집을 속임수로 강탈하고[2], 그 소문을 들은 남해 차차웅이 그가 지략가임을 알고 딸 아효부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았다.


용성국(龍成國)은 정명국(正明國), 완하국(琓夏國), 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했으며,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로왕과의 승부에서 진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3]

이요 머리 둘레가 1척[4]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금관국)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


설화적인 기록이고, 실제 역사속에서 도술 대결을 벌이지는 않았겠지만, 위 석탈해 신화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석탈해는 박혁거세김알지와 달리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존재는 아니며, 석탈해(혹은 석씨 집단)는 외부 어딘가에서 동해 바다를 건너서 신라에 도달했고, 탈해가 신라에 가기 전에 먼저 가야에 들러 정권을 잡기 위해 도전했으나 패배해 신라로 갔고 신라에서는 큰 충돌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석씨 집단이 어업이나 야금술과 관련이 있었다는 단서도 들어있다.


3. 고향 용성국/다파나국의 위치 비정[편집]


이러한 탄생 및 출세담에는 탈해의 출신에 대한 여러 가지 단서가 담겨져 있는데 일단 '함달파'는 불교음악 신이므로 용성국/다파나국은 서역(西域)에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당시 시점은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방위상으로도 왜국의 동북쪽이라 해서 일단 서역과는 반대편인 동쪽 방위를 가리키고 있어 모순이다. 따라서 실제 서역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군은 다음과 같다.


3.1. 울릉도[편집]


파일:yamatoouken_nanokuni.png
한위노국왕 금인(金印)이 발굴된 지역으로부터의 거리를 표시한 지도.
진한 회색은 고훈 시대 이후 야마토 왕권의 세력 범위를 나타낸다.
당시 왜국의 위치를 규슈로 보는 규슈 왕조설에 기반해 그 왜국의 동북쪽 1,000리 지역인 우산국, 즉 울릉도에서 왔다는 설.


3.2. 한반도 북동부[편집]


'도이의 입구'처럼 만주 남쪽 지역의 고려인과 여진족 계열의 해적신라구처럼 일본의 이키섬과 규슈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많은 일본인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끌고 간 일이 있었던 점에 착안해 당시 고구려 지역 근처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석탈해의 모계인 여국(女國)이 《후한서》 <동이전>에서 옥저의 노인이 언급한 여인국과 같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3.3. 중국 중남부 해안 지역[편집]


북방적인 야장설화(冶匠說話)와 남방적인 난생설화(卵生說話)가 모두 들어 있는데 두 요소가 함께 들어올 수 있는 경유지가 중국 중남부 해안 지역이라는 설이 있다. 수로왕의 부인이며 중국 산동을 거치는 항로로 인도의 아유다국에서 왔다고 추정되기도 하는 금관가야허황옥의 예와 탐라국삼성혈 신화에서 부인들이 온 것의 예를 볼 때, 의외로 남부에서 배를 타고 유입된 인물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는 지리적인 이유와 더불어 당대 항해 기술의 한계에 의한 것이 크다. 고대까지만해도 기술의 한계로 인해 연안 항해가 원양 항해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때문에 연안 항해로 접근하기 좋은 한반도 남부가 동북아시아 문물 교류의 허브로 기능했다.[5]

다만 '왜국 동북쪽'이라고 사서에서 제시된 방향과 완전히 반대 방향이란 것이 약점이다.


3.4. 일본 열도[편집]


또한 당시 왜국의 위치를 가지고, 일본 열도의 어느 한 지역 출신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왜국에서 왔다면 굳이 왜국의 동쪽 멀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반론이 있지만[6] 초기 삼국시대 당시 왜국의 범위는 좁게는 규슈 인근, 최대한 멀리 잡아봤자 혼슈관서 지방(지금의 나라현)으로 한정된다. 그보다 더 동쪽, 동북쪽인 혼슈 동부 간토 지방, 동북부 도호쿠 지방이나 홋카이도는 아직 왜국이라는 나라의 영역이 아니었다.[7] 따라서 석탈해 탄생 설화의 "왜국에서 동북쪽으로의 1,000리 멀리 바깥에 있는 나라"라는 기록만을 토대로 보았을 때 왜국 정부의 영역 바깥, 에미시아이누일 수도 있고 일본 열도라는 지리적 범위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석탈해 고향 일본 열도설의 경우, 일제강점기의 교과서인 《국어독본》에서 다파나국이 내지(일본 본토)라고 정설인 것처럼 못 박아 내선일체의 근거 중 하나로 이용하기도 했다.


3.5. 캄차카 반도[편집]


또는 더 동북쪽으로 나아가 캄차카 반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대의 지리 조건으로 생각해 보면 연해주 이북까지 올라가 버리면 너무 척박하고 문명 발달에 불리한 지역들이 아닌가라고 지레짐작하기 쉽지만, 예를 들어 연해주 지역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숙신-읍루-물길로 비정되는 아무르 지역의 경우, 러시아 학계에서는 구리의 매장이 거의 없고 소택지와 같은 풍부한 철광석이 존재한다는 환경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제철 기술이 매우 빠른 시기에 널리 사용됐다고 보았다.[8]

그리고 캄차카 반도에는 까치에 관한 전설이 고대부터 전해져 온다.[9]

해안가에서 어로 작업을 하며 생활하는 미티는 남편인 쿠이키나쿠(큰까마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정부(情夫)인 바크팀티란(까치인人)을 불러들여 밀회를 즐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티와 바크팀티란이 은밀한 만남을 즐기는 사이에 쿠이키나쿠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미티가 나오지 않자, 이를 이상히 여긴 쿠이키나쿠는 불을 지펴 침실로 연기가 들어가도록 했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외간남자인 바크팀티란이 숨을 헐떡거리며 침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미티는 두 개의 알을 임신했고 그것이 두 명의 인간으로 바뀌었다. 쿠이키나쿠의 집에서 바크팀티란의 두 아이를 양육하던 미티는 쿠이키나쿠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두 아이를 가방에 집어넣고는 바크팀티란의 집으로 떠나버렸다.

미티는 두 아이를 마루에 던져버리고는 아이들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하였다. 이후 쿠이키나쿠는 외로워질 때마다 미티를 찾아가 음식을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석탈해 신화와 비슷하지는 않지만 북방 난생 설화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캄차카 반도에서 당시 일본의 영역까지는 너무 먼 데다 석탈해가 진짜 캄차카 출신이라 해도 일본과 캄차카 사이에 있는 에미시아이누의 영역은 어떻게 뚫고 나왔는지 의문. 또한 캄차카 지방은 너무 멀었기 때문에 홋카이도 인근의 사할린 섬 또는 쿠릴 열도로 추정되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


3.6. 영남 동해[편집]


한편 신라에 도착한 후에는 계림 동해안에서 거주했다는 점을 봐서 동해안에 거주하던 집단의 수장이라는 설도 있는데 용왕의 신화를 이용하기 위한 석탈해나 석씨가 자신 및 조상을 신격화하기 위해 동쪽 바다 멀리의 나라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석탈해가 죽은 뒤 동악(東岳)의 신으로 여겨진 것과도 연결된다. 신라의 오악 중 동악이 토함산인 것을 보면 토함산의 이름 또한 탈해의 이명인 '토해'의 이름을 땄을 가능성이 높다.

  • 이외에 호공 또한 당대에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석탈해와 사이가 좋았음을 들어 호공이 집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석탈해가 호공의 집에 얹혀 살았으며, 마찬가지로 신라 외부에서 온 자로서 신라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호공의 도움을 받아 석탈해가 신라 귀족 사회에 편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탈해 이사금 2년(57년), 호공을 대보(大輔, 총리대신)에 앉혀 자신의 후임을 맡겼다. 대보라는 관직은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의 기록에도 나온다. 탈해 이사금 이후로 대보는 이벌찬이찬의 업무로 변경되는 듯하다. 이 때문에 신라에서 대보를 맡은 인물은 탈해 이사금, 호공, 김알지 등 총 세 명뿐이다.[10]

  • 가야의 성립 연도는 서기 42년으로, 이때는 기록상 이미 석탈해가 남해 차차웅의 사위였다. 역사와 전설의 이러한 모순점은 당시 국제 정세를 비추어 볼 때 세력을 확장하던 신라가 가야의 성립을 반대하여 석탈해가 가야로 침공했다가 패배했음을 시사한다는 주장이 있다.

정리하면 현재의 학계의 대체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탈해가 바다를 통해 들어와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이야기와 죽은 뒤 동악(토함산)의 신으로 숭배되었다는 이야기 등으로 볼 때 탈해 집단은 바다를 끼고 이동해 들어와 경주 동쪽에 자리 잡아 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탈해는 동해 지역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성장한 후 왕경으로 들어와서 자신의 출신이 야장(冶匠) 집안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었고, 이후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아마도 경주 평야를 중심으로 했던 사로국이 점차 주변 지역과 접촉을 하면서 교섭을 확대해 가는 가운데 울산이나 감포 방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이 지역의 해산물과 철 등을 교역하면서 마침내 이 지역 세력이 경주 지역으로 진출해 혼인 관계를 맺으며 사로국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였던 사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때문에 탈해 집단을 해양 세력으로 상정하기도 한다. 탈해가 혁거세 해척지모에 의해 발견되고 양육되었다는 이야기는 동해 쪽으로 교섭을 확장해 가던 박씨 집단과 석씨 집단과의 교류와 결연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탈해가 야장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치세 기록에 처음으로 기마 전투가 나타나는 점 등을 들어 탈해 집단을 북아시아의 기마 민족 계통으로 보기도 한다. 시베리아부르야트족에서는 야장이면서 무인 최고 통치 계급을 ‘타르간’, ‘타르하르’라 해서 ‘탈해’와 비교가 된다는 것도 그 방증으로 삼는다.

이렇게 본다면 탈해 신화가 흔히 남방 신화적 요소로 이해하고 있는 해양 신화의 요소를 가짐과 동시에 야장과 기마 전통을 가진 북방 신화의 요소도 가지고 있는 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원래 북아시아에 기원을 둔 탈해 집단이 해로를 통해 남쪽으로 이동해 남해안을 돌아 동해안에 상륙해 성장하면서 경주로 들어가 사로국의 왕실 집단으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삼국사기》에 나오는 탈해 이후의 다른 석씨 왕들이 소백산맥 일대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탈해와 이후의 석씨 집단을 두 계통으로 분리시켜 후자는 한반도 중부 지방으로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경주로 이주해 온 다른 집단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탈해 신화에서는 탈해가 한 집단의 시조이자 위대한 왕이었음을 수식하기 위해 여러 신화적 요소가 개재되고 있다. 보통 인간과는 다른 난생의 요소도 그렇고, 세계 각지의 영웅 신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아(棄兒)의 요소도 그렇다. 고구려동명성왕유리명왕, 그리스오이디푸스, 유대의 모세 등이 모두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고난을 당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위대한 영웅이자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탈해 역시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신라의 왕위에 올랐다. 많은 신화에서 신이나 영웅들은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제를 해결하고 수수께끼를 푸는 등의 활약을 한다. 탈해의 경우는 남을 속이는 꾀를 내는 등 지혜 겨루기를 통해 승리함으로써 그의 신성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시조 신화에서 우리는 세계 각 지역의 신화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찾아 읽을 수 있다. 신라인들의 신화적 사고에 인류적 보편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라의 시조 신화들을 통해 역사적 특수성과 아울러 인류 보편적인 신화적 사고의 흥미로운 흔적들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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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4. 재위기간[편집]


장인어른이었던 남해 차차웅은 아들 박유리와 사위 석탈해 중 누가 왕위에 오르라고 명확하게 정해주지 않고 둘 중 현명한 사람이 왕위에 오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유언했다. 석탈해는 아직 왕위에 오를 의사가 없었는지 굳이 유리 이사금과 잇자국 대결을 제안해서 남해의 아들 유리에게 우선 왕위를 양보했다. 이사금이라는 칭호 또한 이 잇자국 대결에서 나왔는데 이때 잇자국의 수 비교를 먼저 제안한 것은 탈해 이사금이었다. 부처의 상 중에 이가 많다는 것이 있다던지, 이가 많으면 현명하고 귀한 인물이라는 인식은 고대 중국에도 있었던 것을 볼 때 탈해 이사금은 한반도 외부에서 온 집단의 수장으로 추정할 근거가 된다. 유리 이사금이 사망한 뒤에야 결국 석탈해는 신라 제4대 왕이 되는데 이 때가 57년이며 이후 80년까지 재위하고 사망했다. 나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이 같은 책 내에서도 묘하게 다르다. 출생 연도가 기원전 19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즉위년인 57년에 62세라고. 그런데 유리 이사금 재위기의 후기 14년 기록이 없고, 기록이 없기 시작하는 43년에 그가 62세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때쯤 유리 이사금이 권좌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었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즉위 후 백제에 위협에 대비하여 왜와 수교하는 등 외교에 힘을 기울였고 백제, 가야와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63년 백제의 외교 요청을 거부
  • 64년 백제의 침공을 격퇴
  • 66년 와산성의 함락과 탈환
  • 70년의 백제 침공
  • 73년 왜의 침략
  • 74년의 백제의 노략질
  • 75년 와산성 함락, 76년 탈환
  • 77년 가야와의 교전

재위 기간 내내 백제가 쳐들어왔는데 고고학적으로 따져보면 이 시기의 백제는 한강 하류는커녕 위례성 일대에 겨우 환호와 목책이나 구축한 일개 마을 수준이었고, 신라도 서라벌 일대도 제대로 통합되어서 돌아가고 있었는지 의문시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들로 따져도 석탈해 때는 경주 바로 옆 울산광역시 등을 정복하고 다음 왕인 파사 이사금대구광역시, 경산시 등의 지역을 정복한다고 되어 있는데, 경주에서 대구까지도 못 미치는 시기에 한강 하구 위례성에 있는 백제와 맞붙을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목지국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점에선 더더욱. 때문에 석탈해 때 백제와 싸웠다는 기록은 적어도 《삼국사기》 기년을 신뢰할 수 없는 건 이미 정설의 영역이다.

다른 역사서와의 기록 충돌도 있는데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훨씬 이후 시대인 4세기 걸해 이질금(흘해 이사금, 제16대) 때 백제와 신라가 처음으로 군사적인 충돌을 했다고 쓰고 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정말로 한성백제가 신라와 싸운 것이 아니라 후에 백제에 합병되는 마한계 소국 가운데 하나와 역시 훗날 신라의 영토가 되는 진한계 소국 가운데 하나가 전쟁을 벌인 것이 백제와 신라로 기록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아니면 실제로는 몇백 년 뒤에 일어난 사건인데 삼국의 역사를 늘리기 위해 시대를 앞당겨 기록하다가 생긴 오류로 보기도 하고. 삼국시대 초기 왕들의 수명이 인간의 평균 수명에 비해 지나치게 길다는 점을 해결해 보기 위해 나온 가설인데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마음대로 역사를 왜곡해 시대를 앞당긴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김부식이 고려 당시에 참고하고 지금은 없어진 더 오래된 책들에서도 이미 아귀가 안 맞게 써 있는 부분이 가득했다. 가령 백제 관련 기록에서는 온조왕 때 복속한 마한이 나중에 또 튀어나오는 부분이나 온조왕의 출신 등 김부식도 일단 쓰기는 쓰지만 고기록에 혼란을 느끼는데 일단 옛 기록대로 다 적어둔다는 식의 부분이 많이 보인다.

왜도 오고 가야와도 교전했지만 덤 같은 느낌. 77년 6월 가야군 1,000명이 낙동강을 통해 황산(양산시)으로 쳐들어오자 장군 길문(吉門)을 싸우게 해 승리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안 나오지만 <거도 열전>에는 탈해 이사금 때 장군 거도거칠산국(지금의 부산광역시)과 우시산국(지금의 울산광역시)을 상대로, 당시 신라에서 1년에 한 번 개최했던 말타기 행사 마숙(馬叔)을 하는 것으로 위장해 두 나라를 방심시킨 뒤, 모인 기병으로 기습 공격해 복속시키기도 했다. 《삼국사기》기록상에 나오는 신라의 첫번째 경주 바깥 외국 정복 기록이다.


5. 사후[편집]


이후 80년 8월에 승하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후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를 새로 수습했는데 머리 둘레가 3척 2촌, 키가 9척 7촌[11]이라는 무시무시한 수치였다고 한다. 당시 1척의 단위인 한척이 23cm가량이었음을 감안해도 머리 둘레만 74cm에 키는 223cm... 고대인들의 평균 키를 감안하면 우리가 최홍만을 보는 것 이상의 위압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도 사열식을 그린 그림을 보면 군사들에 비해 머리가 삐쭉 나와있었고 자식도 귀했던 것을 생각하면 두 사람이 비슷한 질병을 앓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것보다 머리 크기가 더 공포스럽다. 무슨 날씬한 사람들 허리둘레보다 머리둘레가 더 크냐...[12]

뼈를 수습하여 부순 뒤 흙과 섞어 소상으로 만들어 동악(東岳, 동쪽의 큰 산)에 모셨다고 한다. 시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후 신라 왕조에서 동악신으로 숭상되었다. 신라의 동악이 토함산인 것을 보면 탈해의 이명인 '토해'의 이름을 땄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명을 땄다기보다는 탈해, 토함, 토해 어느 쪽이든 원래의 고대어 발음을 한자로 음차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로 읽었을 때 발음이 약간 다른 것이지 당대에는 어느 쪽이든 적당히 엇비슷하게 읽혔다.

탈해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은 경주 시가지 북동쪽의 동천동에 있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174호로 옆에는 조선시대에 탈해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사당인 숭신전이 있다. 그런데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신라 후기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이라서 진짜로 탈해왕릉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수준이지만 석씨 문중과도 얽혀있는 등 어른의 사정으로 지금도 탈해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모순에 대해 신라 후기에 오래된 무덤이 북천의 범람으로 훼손된 것을 수리하면서 신라 후기 양식으로 다시 세웠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1] 나중에 신라의 왕궁 경주 월성이 세워지는 곳이다.[2]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조상이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마을에 간 동안, 호공의 조상이 그 집을 빼앗아 살고 있는 것이라는 거짓말로 호공의 집을 차지했다. 나중엔 왕으로 즉위한 후 호공에게 벼슬을 내려주었다고 한다.[3] 약 0.69m[4] 약 23cm[5] 하지만 15세기 이후로 원양 항해 기술이 발전하면서 선박의 크기도 대형화되었는데 한반도 일대는 남해동해의 경계선상에 걸쳐있는 부산항울산항 일대 정도를 제외하면 이 많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이런 대형 함선들의 접안에 극도로 불리해서 그나마 이런 배들이 정박하기 쉬운 지리적인 이점이 있던 일본으로 물류의 중심이 옮겨 간 것이다. 이미 이때쯤이면 당시 기술로 일본까지 항해를 못할 이유도 없으므로 접근성이 훨씬 좋아졌던 것이 이런 상황을 더욱 부추겼다.[6] 석탈해의 후손인 석우로가 왜국의 사신에게 "왜왕소금쟁이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막말하다 왜왕의 화를 돋구어 결국 화형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상황이 이러한 점을 반증한다.[7] 혼슈 동북쪽이 일본 치하로 들어간건 헤이안 시대였고, 홋카이도는 센고쿠 시대 때 남부 지역을 지배하는 정도였지만 완전히 일본 치하로 들어간 건 에도 막부 말기 때부터였다.[8] 《시베리아의 선사고고학》, 최몽룡 이현종 강인욱, 도서출판 주류성.[9] 캄차카 반도의 이야기인 걸로 볼 때 축치캄차카어족 계열의 민족들로 추정된다.[10] '대보'라는 직책 자체가 외부 유이민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가설도 있다.[11] 《삼국사기》에서는 탈해 이사금의 키가 9척(207cm)이라고 나왔다.[12] 그러나 이러한 과정된 신체 수치는 실제 수치라기보다는 왕권이나 신성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비슷한 일례로 지증왕(제22대)의 성기 수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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