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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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한국-대만 관계
대한민국이 대만에 설치한 외교공관으로 주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사관의 전신이다. 일단 하나의 중국 문제로 인해 타국의 대사관과 동급이기는 하지만 대표부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한다.[2]
'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대사관'이 아니라 '대표부'이므로 다른 여타 대사관에 비하면 명목상 지위가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요구인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1992년 한국 - 중화인민공화국 수교와 동시에 한국 - 중화민국 국교 단절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주타이베이 대표부는 외교부 직속이며 주타이베이 한국 대표부장은 차관급 대사와 같은 직위의 외교관이며 대만 내에서 영사 업무, 정무 업무를 하고 있으며 사실상 대사관과 같다.
1882년 조선과 청나라가 외교를 맺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단절되었고 을사조약으로 관계가 끊겼다. 후에 청나라마저 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했고, 1948년에 한국과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부터 가까운 관계를 가졌으며 1949년에 정식으로 국교를 체결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국공내전이 진행 중이었고, 중화민국 정부는 중공에 세가 밀리고 있었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화민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화민국 관할로 반환받은 대만으로 대피했고, 한국 대사관도 남경 - 광주 그리고 최종적으로 대북으로 대피했다. 당시 한국 대사관의 이동거리는 1만 킬로미터에 이른다.
국부천대 이후에도 한국은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지속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1992년까지 주중대사관이나 주중대사라 하면 타이베이에 있는 주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사관과 주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국군의 퇴역 장성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던 군사정권 시절이라 주중대사는 예비역 대장들이 가는 자리라는 인식이 강했다. 백선엽과 김신[3] 등이 주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사를 거쳤다. 중화민국이 주요국과 수교가 끊기면서 주중대사는 대만에서 거의 국빈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냉전 종식의 물격 속에서 독일 재통일, 동유럽 혁명 및 소련 해체라는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한중수교를 시작하게 되고, 중화민국과의 공식적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단교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외교관계를 단절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듬해인 1993년 양국이 따로 협정을 맺어 대표부를 설립하게 되었고, 이중 한국이 대만에 세운 것이 바로 주 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이다.
반대로 대만이 한국에 세운 것은 서울에 있는 주한국대만대표부과 총영사관 포지션인 주한국대만대표부 부산 사무처이다.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이 대만에 설치한 외교공관으로 주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사관의 전신이다. 일단 하나의 중국 문제로 인해 타국의 대사관과 동급이기는 하지만 대표부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한다.[2]
2. 외교공관으로서의 지위[편집]
'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대사관'이 아니라 '대표부'이므로 다른 여타 대사관에 비하면 명목상 지위가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요구인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1992년 한국 - 중화인민공화국 수교와 동시에 한국 - 중화민국 국교 단절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주타이베이 대표부는 외교부 직속이며 주타이베이 한국 대표부장은 차관급 대사와 같은 직위의 외교관이며 대만 내에서 영사 업무, 정무 업무를 하고 있으며 사실상 대사관과 같다.
3. 역사[편집]
1882년 조선과 청나라가 외교를 맺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단절되었고 을사조약으로 관계가 끊겼다. 후에 청나라마저 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했고, 1948년에 한국과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부터 가까운 관계를 가졌으며 1949년에 정식으로 국교를 체결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국공내전이 진행 중이었고, 중화민국 정부는 중공에 세가 밀리고 있었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화민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화민국 관할로 반환받은 대만으로 대피했고, 한국 대사관도 남경 - 광주 그리고 최종적으로 대북으로 대피했다. 당시 한국 대사관의 이동거리는 1만 킬로미터에 이른다.
국부천대 이후에도 한국은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지속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1992년까지 주중대사관이나 주중대사라 하면 타이베이에 있는 주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사관과 주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국군의 퇴역 장성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던 군사정권 시절이라 주중대사는 예비역 대장들이 가는 자리라는 인식이 강했다. 백선엽과 김신[3] 등이 주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사를 거쳤다. 중화민국이 주요국과 수교가 끊기면서 주중대사는 대만에서 거의 국빈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냉전 종식의 물격 속에서 독일 재통일, 동유럽 혁명 및 소련 해체라는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한중수교를 시작하게 되고, 중화민국과의 공식적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단교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외교관계를 단절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듬해인 1993년 양국이 따로 협정을 맺어 대표부를 설립하게 되었고, 이중 한국이 대만에 세운 것이 바로 주 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이다.
반대로 대만이 한국에 세운 것은 서울에 있는 주한국대만대표부과 총영사관 포지션인 주한국대만대표부 부산 사무처이다.
3.1. 역대 대사 / 대표[편집]
4. 이용가능한 대중교통[편집]
4.1. 버스[편집]
- 타이베이 버스 棕6
- 타이베이 버스 棕7
- 타이베이 버스 棕18
- 타이베이 버스 綠1
- 타이베이 버스 藍5
4.2. 철도[편집]
5.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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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상적으로 본국과 주재국의 국기가 동시에 게시되는 것과 달리 대만 대표부 홈페이지에는 태극기만 있고 대만 국기가 없다. 홍콩 특별행정구의 구기를 게시한 홍콩 총영사관과 팔레스타인의 국기를 게시한 팔레스타인 대표부 홈페이지와는 대조적이다.[2] 엄밀히 따지면 '외교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에 규정되지 않은 비직제 조직으로, 공식적인 외교 공관은 아니지만 관행적으로 외교 공관으로 인정되며 여타 공관처럼 외교부 소속 외교관들이 근무한다.#[3] 김구 선생의 장남이며 아버지와 장제스와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다보니 신임장을 수여받을 때도 장제스 - 장징궈 부자가 우리는 김신을 외부인이 아닌 동지로 여긴다고 했다.[4] 1949년 1월 4일 한국-중화민국 수교[5] 1949년 12월 7일 국부천대[6] 한중수교에 대한 대만의 단교[7] 11대 주중화민국 대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