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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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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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
||<width=20%> 초대
김병로 ||<width=20%> 제2대
조용순 ||<width=20%> 제3-4대
조진만 ||<width=20%> 제5-6대
민복기 ||<width=20%> 제7대
이영섭 ||
|| 제8대
유태흥 || 제9대
김용철 || 제10대
이일규 || 제11대
김덕주 || 제12대
윤관 ||
|| 제13대
최종영 || 제14대
이용훈 || 제15대
양승태 || 제16대
김명수 ||<bgcolor=#e0ffdb,#073300> 제17대
조희대 ||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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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4대 대법원장
조진만[1]
趙鎭滿 | Jo Jin-man


출생
1903년 10월 20일
경기도 인천군 영종면 예단포마을#
(現 인천광역시 중구 예단포1로 6)
사망
1979년 2월 12일 (향년 75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묘역-8
본관
배천 조씨
재임기간
제5대 법무부장관
1951년 5월 7일 ~ 1952년 3월 4일
제3대 대법원장 (박정희 의장 임명)
1961년 7월 2일 ~ 1964년 1월 31일
제4대 대법원장 (박정희 대통령 임명)
1964년 2월 1일 ~ 1968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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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조성만
형제자매
2남 중 차남
학력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
경력
해주지방법원 판사
평양지방법원 판사
평양복심법원 판사
대구복심법원 판사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
제5대 법무부장관
초대 서울제일변호사회 회장
법무부장관 고문
제3·4대 대법원장 (1961.07. ~ 1968.10.)
한국합동법률사무소 대표
서훈
1등 근무공로훈장 수훈
청조근정훈장 수훈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법조인, 제3•4대 대법원장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편집]


1903년 경기도 인천군 예단포마을(현 인천광역시 중구 운북동)에서 태어났다. 1923년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를 졸업하였다.

1925년 조선인 최초로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2]하였고 일제강점기판사로 근무하였다. 1943년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51년 5월부터 1952년 3월까지 법무부장관을 지냈다. 1952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60년 서울제일변호사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에 의해 제3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에는 정식으로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제4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어 1968년까지 임기를 수행하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법률신문


3. 여담[편집]


대법원장 재임시절 한문으로 쓰이던 판결문을 한글로 쓰도록 개혁한 사람이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법원에서 사용하고 법봉을 권위주의 탈피를 위해 1966년 없앤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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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씨개명 당시 썼던 이름은 초오케 미치오.(趙家庸夫)[2] 행정과의 경우 2년 앞서 1923년 메이지대학 출신의 이창근이 최초로 합격했다. 외교과는 1933년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장철수가 유일한 합격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