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환(1976)/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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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1. 1999~2004 시즌
2.3. 2008 시즌
2.4. 2009 시즌
2.5. 2010 시즌
2.6. 2011 시즌
2.7. 2012 시즌
2.8. 2013 시즌
2.9. 2014 시즌
2.10. 은퇴
3.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편집]


조성환의 선수 경력을 기록한 문서.

데뷔 초에는 유격수로 출장한 적도 있고, 처음 3할 타율을 기록하며 포텐이 터진 2003년에는 3루수로 뛰었지만, 그 이후 주 포지션이 2루수로 고정되어 골든글러브도 2회나 수상할 정도로 인상적인 활약을 해 줬다. 선수생활 말년엔 1루수로도 많이 출장하였다.

라운드픽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프로 데뷔 전에는 그저 그런 타자였다. 하지만 롯데 프런트는 조성환의 성실한 모습을 보고 '저런 선수가 팀내에 있다면 다른 선수들도 보고 느끼는게 많을 것'이라는 이유로 뽑았다고 한다.[1] 결국 다른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정도의 선수를 넘어 롯데에서 박정태의 뒤를 이은 주전 2루수이자 근성의 아이콘이 된다.

2000년대 롯데 자이언츠의 클럽 하우스 리더이자 주전 2루수로 활약한 선수로, 두 차례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2000년대 롯데의 기둥 역할을 하였다.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의 흑역사가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 인기도 면에서는 동시기에 펠릭스 호세, 이대호, 홍성흔, 강민호 등이 있어서 밀리기는 하지만, 근성있는 플레이와 팀사랑 덕택에 롯데 팬들에게는 명실상부한 팀 레전드로 대우받는다.


2.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2.1. 1999~2004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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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토로)
그의 프로 데뷔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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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토로)
살기어린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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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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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토로)

1999년 데뷔 첫 타석을 홈런으로 장식하며 데뷔했다.[2][3] 2000년부터 유격수와 3루수를 오가며 조금씩 출장 빈도를 높여갔으나 아래 역대 성적에서도 볼 수 있듯이 2할대 초반에 그치는 방망이가 문제였다.

그러던 중 2003년 풀타임 3루수로 129경기에 출전해 3할 타율을 기록하며 기량이 스텝업,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했다.[4] 백인천이 조경환 등 팀 내 중심타자들을 말 안 듣는다는 이유로 쳐내고,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육성하려고 한 젊은 타자들[5] 중 한 명이었다. 3할 타율에 도전하고 있었던 2003 시즌 후반, 삼성전에서 안타를 치고 진루했을 때 1루 수비를 보고 있었던 양준혁이 조성환에게 "반드시 3할을 쳐라. 3할을 쳐본 타자와 못쳐본 타자는 다르다."고 조언해줬고, 이에 힘입었는지 결국 3할 타율 달성에 성공했다. 훗날 병역을 마치고 복귀시즌인 2008년에서 대활약하는데 당시 양준혁의 조언 때문에 잘 할 수 있었고 그 말에 동감한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4년 연속 꼴지를 기록하며 막장의 끝을 달리던 이 당시 롯데는 이대호김주찬, 박기혁같은 유망주들이 죄다 거하게 삽을 푸며 롯데팬들 뒷목을 잡게하던 시기였기에, 이 당시 롯데팬들 입장에선 유일한 볼거리이자 위안이 조성환의 예상치 못한 활약과,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노장 박정태의 마지막 투혼이었을 정도.

이듬해인 2004년은 박정태와 신명철을 제치고 주전 2루수로 낙점받았고, 그 해 롯데로 영입된 정수근에 이어 2번타자로 테이블세터의 한 축이 되었다. 그러나 고작 19경기를 치른 4월 24일 사직 LG 트윈스전에서 상대투수 박만채의 공에 맞아 손등 골절이 되어버렸다. 전치 7주 진단이라 회복 후 재활기간까지 감안하면 후반기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 처럼 보였으나, 회복이 늦었던지 결국 그대로 시즌 아웃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시즌 막판에는 후술할 영 좋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임수혁 선수가 2루에서 쓰러질 때 당시 타석에 들어서 있던 선수가 바로 조성환이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길, 그 당시에 상당히 충격이 컸었다고 한다.


2.2. 병역비리 사건[편집]


2004년 무려 70명의 선수가 연루되었던 병역비리사건에 연루되었다. 병역면탈 혐의로 경찰의 출두 요구를 거부하고 6개월 가량 으로 도피했다. 당시 공소시효를 불과 2주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시효를 넘겨 형사 책임을 피한 뒤 병역을 피할 생각으로 공소시효가 며칠 안 남았던 시점이어서 변호사의 충고로 도피하였다고 본인은 말하고 있다.[6] 대체 어느 섬에 도피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속임수를 눈치 챈 검찰 측에서 기소하여 공소시효가 정지[7]되자 결국 자수하여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이미 기소된 뒤였기 때문에 자수는 인정되지 않았다. 출소 후 부산광역시 동래구청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였고 2008년 소집해제 후 팀에 복귀했다.

조성환 본인에게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과거이자 흑역사이며 평생 벗어나지 못할 굴레인데, 당시 병역비리가 터진 시점이 프로야구가 한창 인기가 없던 시절이다 보니 신생 팬들이 잘 모르는 이유도 있고, 훗날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하기 시작한 2008년 이후 채병용/윤석민 빈볼 사건으로 그냥 묻혀버렸다. 때문에 이 일을 알고 있는 일부 롯데 안티들은 조섬환, 섬전드 등의 별명으로 까기도 한다. 후일 2012년 올스타전 롯데 선수 전원 몰표 논란으로 재점화되기도 했다.


2.3. 2008 시즌[편집]



시즌 초반 로이스터의 감독은 07년에 .325의 타율로 커리어 하이를 찍은 박현승을 3번타자로 생각하고 있었다.조성환은 처음에는 주로 8번 타자로 출장했지만 3할이 넘는 고타율을 기록하면서 언론에 '공포의 8번타자' 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박현승의 부진 등이 겹치자 단숨에 3번타자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3번으로 올라간 후 4월 25일 삼성전[8]에서, 10회말 2사 1,3루 상황에서 오승환으로부터 주자 일소 좌중간 깊숙히 가르는 끝내기 2루타를 쳐냈다.[9] 시즌 후 MBC ESPN과의 인터뷰에서 오승환 말만 많이 들었지 타석에서 상대해본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자기도 안타치고 얼떨떨 했다고. 설명 그대로 이 안타의 임팩트가 워낙 컸기 때문에 팬들에게는 조성환의 야구인생을 대표하는 순간으로 남아 있다. 이 끝내기가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첫 끝내기 안타였다고 한다. 반면 오승환은 2008시즌 1패만을 기록했는데, 1패를 기록한 경기가 바로 이 경기이다. 이 기회는 다름아닌 마해영과 당시 손광민이었던 손아섭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회였다. 롯데에겐 큰 의미가 있는 경기였던 셈.

늦여름에 전 주장인 정수근이 폭행 사건 이후 중징계를 받아 팀 전력에서 이탈하게 되자 주장을 맡게 되었다. 말은 안 하지만 뒤에서 선수들을 단체로 조진다고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2008년 시즌 타율 0.327(4위), 10홈런, 81타점(7위), 31도루(6위)[10], OPS 0.845(리그 12위)를 기록하여 롯데 자이언츠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기여하였고 KBO 골든글러브 2루수 부문의 수상자가 되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3할 타자 겸 군기반장. 최고의 시즌을 보낸 덕택에 연봉도 7,000만 원에서 1억 3천만 원으로 대폭 인상되었다. 08시즌에 팀 타자부분 고과 1위였다고 한다.


2.4. 2009 시즌[편집]



2009년 4월 23일, 인천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서 채병용 투수의 몸에 맞는 공이 광대뼈 부근에 맞아 안와골절[11]이라는 부상을 입게 되었다. 몸에 맞는 공으로 나간 이후, 그 경기 날, 사상 최초의 250-250 기록을 달성한 박재홍의 타석 때에 8회 말 롯데의 투수 김일엽이 던진 변화구가 무릎 쪽으로 날아가자 박재홍은 이를 보복성으로 해석, 마운드로 올라간다. 이때 롯데 공필성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가 언쟁을 벌이며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후 사실상 시즌 아웃이라는 반응이었지만, 본래 안와골절이란 게 한 달 정도 지나면 완치가 되는 골절이라, 한 달 조금 더 지난 6월 2일 경기에 바로 복귀를 했다. 또한 검투사 헬멧을 착용하지 않고 바로 일반 헬멧을 차는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팬들을 감격시켰다. 다만 이때 부상 휴유증으로 몸쪽 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몸쪽 공에 대한 공략이 힘들었고, 부상당한 왼쪽 눈의 시력이 계속 떨어져서 결국 은퇴를 결심하게된 계기가 되었다고 은퇴후 인터뷰에서 밝혔다. 본인 말로는 몸에 맞는 볼에 대한 트라우마는 은퇴순간까지 극복하진 못한 듯 하다.[12]

09시즌에는 타율 0.294, 홈런 8, 타점 36, OPS 0.795 를 기록했다.


2.5. 2010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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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전홍성흔, 이대호와 300타점 합작을 목표로 설정했다.

4월 27일 복귀, 첫날부터 홈런을 쳐내는 등 맹타를 휘둘렀다. 잔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홍성흔의 엄청난 활약 및 각종 부상으로 인해 2010 시즌부터는 3번 타자가 아니라 주로 6~7번의 하위타선에 출장하고 있다. 하지만 5월 이후로 홍성흔의 부진으로 다시 3번 타자로 복귀하였다가 이번에는 손아섭의 부진으로 6월 부터는 2번 타자로 1번인 김주찬/손아섭과 함께 테이블세터진을 형성하고 있다.

어느 타선에 배치해도 제 몫을 해주는 공격면은 물론이요, 시즌 초에는 09 시즌 부상의 여파로 수비가 불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시즌이 지나가면서 무척 준수한 2루 수비를 보여주고있다. 사실 현재까지는 최고 시즌이었던 2008시즌보다 올 시즌 성적이 더 좋은데도 이대호홍성흔의 광분 때문에 은근히 묻히고 있다. 2008년에도 시즌 내내 3할4푼 가까이 치다가 체력저하로 시즌 막판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진걸 감안하면 올 시즌도 시즌 막판 타격감 관리가 중요할 듯.

7월 03일 vs LG전, 전대미문의 경기에서 4개의 2루타를 기록하여 역대 한 경기 최다 2루타 타이기록을 세웠다.

8월 24일 KIA전에서 윤석민의 공에 머리를 맞았다. 다행히 헬멧 위를 맞기는 했으나 며칠간 입원 치료를 해야 했다.

8월 28일에는 덕아웃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뇌진탕의 후유증[13]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설상가상으로 9월 1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또 헤드샷을 당해 모자챙이 박살났다.

2010시즌 정규시즌 기록은 타율 0.336, 홈런 8, 타점 52, OPS 0.859. 현재까지의 커리어 하이에, 무엇보다 이전까지는 강습타구 등에 문제를 보였던 수비도 시즌 에러 3개라는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2루수 겸 3번타자로 출장하여 20타수 10안타 4볼넷 1도루 5타점 2득점, 타율 .500, 장타율 .600, 출루율 .583으로 맹활약했으나, 팀은 2연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페넌트레이스 성적이 월등해 2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수상소감으로 아내인 박안나씨를 향해 "당신을 만난 것이 내 생애 최고의 골든 글러브였습니다" 라며 모든 롯팬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2.6. 2011 시즌[편집]


2년 연속 헤드샷을 당했던 후유증이 왔던 것인지 개막 2연전에서 2경기 연속 실책을 저질러버렸다. 게다가 만 34세라 벌써부터 노쇠화 조짐이 오는 것이가 하고 팬들이 걱정하였다. 게다가 조성환의 뒤를 이을 마땅한 2루수감이 없는 것도 문제였다. 그나마 2군에서 주전 2루수로 뛰고 있던 게 정훈이었다.

결국 4월 중순부터는 3번 타자가 아닌 7번 타자로 타순이 조정되었다. 도중에 통증으로 2군에 갔다가 6월 18일 넥센전에서 다시 복귀했다. 7월 12일 안경을 끼고 대타로 타석에 등장했다. 타격부진이 시력때문이라는 결과가 있었다고 한다. 근데 이건 웬일? 안경위력인지 타석에 들어서자 마자 쓰리런을 날려버렸다. 옆동네 잉긍님이 생각난다면 그건 착각이다.

9월 9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역적으로 지목되었다.

페넌트레이스 성적은 타율 0.243, 홈런 6, 타점 36, OPS 0.644였다.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15타수 4안타 1볼넷 1타점 1득점 타율 .267, 장타율 .267, 출루율 .313을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2.7. 2012 시즌[편집]


4월 7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개막전에서 4타수 2안타 2타점 1홈런[14]을 기록했는데 1회말에 류현진을 상대로 친 솔로 홈런이 결승타가 되면서 스코어 1:4로 팀의 첫 승리를 만들었다. 2011년과 달리 시범경기부터 타격감이 좋아진걸 보니 훈련을 많이 한 듯. 아마도 들 덕분인가 보다. 롯데팬들은 눙물을 흘리고

4월 8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5타수 3안타 2득점으로 타점은 못 올렸지만 테이블세터 답게 출루를 잘 해주면서 팀의 스코어 5:10 승리에 기여했다. 이날까지 5할의 타율을 기록. 또 한번 롯데팬들은 눙물을 흘리고

4월 10일 경기는 우천으로 취소가 되었고, 4월 1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5타수 4안타 2루타 2개 1득점 0타점을 기록하며 주루사 2개는 덤''' 맹활약했다. 팀도 이날 스코어 8:3으로 승리하였다.

4월 24일 삼성 라이온즈 전에서는 9회초 극적인 4-2 리드 상황에서 안지만을 상대로 2타점 적시 2루타를 기록하며 오승환의 자책점을 6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7월 4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9회초 김재현의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잡으려다 왼쪽 어깨에 부상을 당했다. 정밀검진 결과 왼쪽 어깨 물렁뼈 손상으로 판명되었고 2~3주 동안 결장하게 될것이라고 관계자가 밝혔다. 원문기사 이 날 조성환은 4타석 3타수 1안타 1득점 1볼넷 1삼진을 기록하였다.

10월 8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KBO 준플레이오프/2012년/1차전에서 선발 2루수 겸 7번타자로 출장하였는데, 포구 실책과 연속 병살 송구 에러로 팀의 스코어 3:0 리드 상황을 3:4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면서 아주 X맨 인증을 제대로 하였고 결국 타석에서도 2타수 무안타 1볼넷 1득점에 그치면서 대수비 손용석으로 교체되었다. 그나마 팀이 스코어 8:5로 재역전승한 게 조성환에게 다행이었다.

다음날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2차전 경기에선 스코어 1:1, 7회초 1사만루 찬스에서 바뀐 투수 홍상삼을 상대로 깨알 같은 유격수 병살을 쳤다. 두산의 스파이 포스트시즌 경험도 많고 팀내 고참급 베테랑인데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대수비 황성용으로 교체되었다. 이 날 조성환은 3타수 무안타 1볼넷을 기록했고 팀이 그나마 2:1로 역전승하여 다시 한 번 조성환에게는 다행이었다.

10월 11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선 스코어 0:0, 1회말 만루 찬스에서 박종윤이 친 타구가 우익수 쪽 안타가 될 줄 알고 미리 스타트를 끊었다가 우익수 플라이가 되는 바람에 3루 베이스를 다시 밟고 홈으로 뛴 바람에 홈에서 아웃되어 선취점을 올릴 수 있는 찬스를 무산시켰다. 게다가 스코어 3:2로 팀이 추격한 2회말 2사 2루에서 삼진아웃까지 당하는 바람에 다시 까이고 말았다. 이 날 조성환은 4타수 2안타를 기록했으나 팀은 스코어 7:2로 패했다.

10월 12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스코어 0:0이던 1회말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3루 땅볼을 아웃당하고, 그 과정에서 발목을 접질러 3회초에 대수비 손용석으로 교체되었다.가지가지하신다 다행히도 팀이 스코어 3:4로 역전승하며 3승 1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조성환은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에서 1차전은 선발 2루수 겸 7번타자, 2, 3, 4차전은 선발 2루수 겸 2번타자로 출장하여 10타수 2안타 2볼넷 1득점, 타율, 장타율 .200, 출루율 .333을 기록했는데, 사실상 준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준 건 아무것도 없었으며 오히려 실책과(1차전), 병살타(2차전), 주루사(3차전)에 부상 크리(4차전) 등 좋지 않은 것은 다 나온, 말 그대로 멘붕의 종합세트를 그대로 선보였다. 다행히 롯데가 가을 야구 2라운드(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망정이지, 예년처럼 또 1라운드(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면 꼴리건들에게 평생까임권얻었을 지도 몰랐다. 아무튼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만큼 남은 기간 동안 몸과 마음을 다 추스리고 플레이오프에서 속죄의 활약을 펼칠 수 있을지가 주목되었다.

이렇게 까이던 와중에 팀이 시리즈 전적 1패로 지던 10월 17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3:4로 지던 7회초 1사 2루 상황에서 천금같은 동점 적시타를 때리면서 팀 승리에 공헌함으로써 준플레이오프에서의 오명을 조금이나마 씻어내게 되었다. 그것도 2012년 무시무시한 포스를 뽐내던 SK의 셋업 박희수한테서 뽑아낸 것이었기에 더 큰 가치가 있었다. 이 날 조성환은 대타로 출장하여 1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했고, 팀은 연장 10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스코어 5:4로 이겼다.

조성환은 2012년 플레이오프에서 1, 5차전은 선발 2루수 겸 2번타자, 2, 4차전은 대타로 출장하여 7타수 2안타 2타점 1득점, 타율&장타율&출루율 .286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조성환은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 17타수 4안타 2볼넷 2타점 2득점, 타율&장타율 .235, 출루율 .316를 기록했다.


2.8. 2013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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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흔FA를 통해 두산 베어스로 귀환하면서 다시 주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2루수로 경기에 출장하였으나 부상으로 2군행. 그 사이 2루수 자리는 박준서정훈이 경쟁을 하다 박준서가 최강의 대타가 되고 정훈은 주전 2루수로 자리를 잡았다.

부상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1군에 돌아왔지만 노쇠화 때문인지 성적이 좋지는 않다. 대부분은 대타로 나오고 있고, 어쩌다가 선발로 나와도 지명타자 아니면 1루수로 출장하고 있고 2루수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어쩌다 후반에 수비 보직의 조정에 따라 2루로 가는 경우가 대다수. 하지만 롯데팬들이나 선수들의 입장에서는 주장이 1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 롯데의 현 주전 선수들이 굉장히 젊기 때문에 주장의 역할은 더 중요하다.


2.9. 2014 시즌[편집]


전년도에 굉장히 부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이 차기 레전드를 예우해 준다며 연봉을 동결해줬다. 심지어, 13시즌 야수들의 고과 반영에서 조성환만큼은 예외로 쳐줬다.

주장직과 1군에서 수행하던 룰은 박준서에게 승계되었지만, 여전히 팀 내에서는 최고참의 지위다.

2014년 시즌도 조성환은 여전히 부진했다. 4월 5일 울산 삼성전때 병살타를 치고 4월 8일 사직 LG전에서도 연장 11회말 삼진을 당하는 등 팀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4월 10일 장성호, 용덕한과 함께 2군행...

그 후 5월 15일 오승택의 부상으로 다시 1군에 복귀했고 5월 16일 사직 넥센전에서 5회말 무사 만루에서 김문호의 대타로 타석에 서지만 앤디 밴 헤켄에게 루킹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조성환의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1군에 복귀한날 최준석을 대신해 대주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팬들은 캡틴의 등장에 대주자임에도(!) 조성환의 응원가를 불러주는 감동을 연출했다.

2014년 6월 16일, 언론을 통해 조성환의 은퇴가 알려졌다.[15] 더 이상 현역처럼 뛸 수 없음을 실감하고 은퇴를 선언했으며,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시력이 점차 떨어져 투수를 더 이상 상대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이유였다.

구단 측에선 8월경에 조 선수를 레전드로 예우하고 은퇴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후 남은 시즌 내내 팀의 원정기록원으로서 마지막까지 롯데와 함께 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이로서 16년간 오직 한 팀에서 불꽃처럼 달려왔던 조캡의 선수 생활은 팬들의 가슴속에 전설로 방점을 찍게 되었다.

2014년 8월 23일 사직 LG전에서 공식 은퇴식을 치뤘으며, 두 아들이 시구와 시타를, 조성환 본인은 2루수 시수비를 보여줬다.

하지만 정작 팀은 0:3으로 패하면서 찝찝하게 은퇴식를 치뤄야만했다.


2.10. 은퇴[편집]


2014년 6월 16일, 은퇴선언을 하였다.기사. 2루수에 정훈이 잘 버텨주고 있었고 나이에 따른 성적 하락이 눈에 띄게 보여서 사실 대주자 혹은 대수비 정도로 밖에 기용할수가 없기에 선수생활을 더이상 지속할 이유가 없기에 은퇴 선언을 한것. 이번 시즌동안에는 선수단과 같이 움직이며 원정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한다고 밝혔다.유먼이나 손아섭이 그에게 감사의 표시를 했다. 장성호도 페이스북으로 감사의 글을 올렸는데 눈물 셀카 때문에 팬들에게 놀림 받았다. 이런거나이런거

2014년 8월 23일 사직 LG전에서 구단에서 마련해준 공식 은퇴식을 치뤘다. 두 아들이 시구와 시타를, 조성환 본인은 2루수 시수비를 맡았다. 하지만 정작 팀은 LG에게 0:3으로 영봉패를 당하고 만다.

조성환은 가장 끔찍하고 암울한 흑역사를 딛고 영원한 캡틴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행복한 은퇴식을 한 축복받은 선수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절대 하늘에서 내준게 아니다. 본인이 진심으로 반성하고[16]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후배들에게는 좋은 길만 가기를 이끌어주며 훌륭하게 야구선수 생활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여러 문제에 휘말린 야구선수들이 있지만 조성환처럼 뼈저리게 반성하고 야구를 위해 팀을 위해 동료들을 위해 팬들을 위해 그라운드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정신을 보여준다면 그에 맞는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약물, 승부조작은 빼고 물론 이처럼 모두가 할 수 있다면 비난받는 야구선수는 없을 것이다. 조성환이 대단한 사람인 이유다.


조성환의 은퇴식



3.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출루율
장타율
1999
롯데
25
10
.400
4
1
0
1
1
6
0
3
2
.539
.800
2000
57
93
.226
21
3
0
1
4
15
5
9
17
.305
.290
2001
88
92
.196
18
4
2
0
14
23
6
10
16
.295
.283
2002
104
255
.235
60
14
0
0
21
38
10
18
42
.300
.290
2003
129
486
.307
149
25
2
6
38
73
23
37
57
.369
.403
2004
19
70
.257
18
4
0
0
1
3
3
8
16
.366
.314
2005
병역 파동 및 군 복무
2006
2007
2008
123
462
(5위)
.327
(3위)
151
(3위)
27
(2위)
3
10
81
79
31
37
81
(5위)
.382
.463
2009
76
269
.294
79
19
0
8
36
35
13
19
33
.341
.454
2010
111
414
.336
(3위)
139
31
(1위)
0
8
52
83
8
35
58
.390
.469
2011
117
407
.243
99
19
0
6
36
45
9
37
87
.310
.334
2012
103
345
.278
96
14
0
3
33
40
5
28
58
.332
.345
2013
74
167
.240
40
6
0
1
12
15
3
17
23
.312
.293
2014
6
7
.000
0
0
0
0
0
1
0
1
2
.125
.000
KBO 통산
(13시즌)
1032
3077
.284
874
167
7
44
329
458
116
259
492
.347
.386
[1] 실제로 한 스포츠신문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프로야구 용된 선수가 누구냐라는 설문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조성환 선수가 5표로 1위를 차지했으며, 조성환 선수는 스스로도 '내가 가장 용된 것 같다'고 답변했다.http://foto.sportschosun.com/news/ntype2_o.htm?ut=1&name=/news/sports/201007/20100724/a7x74121.htm. 조성환과 같이 학창시절을 보낸 신윤호나 박명환도 조성환이 고등학교 때 결코 잘하는 선수는 아니였다고 증언했다. 반대로 장성호는 방황했지만 의외로 천재과였다고.[2] 7월 7일 인천 현대전 8회. 당시 상대투수가 최영필이었다. 중계중에 직접 언급하였지만 이 기록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데뷔 첫 홈런이 데뷔 첫 타석에서 나온것은 아닌듯 하다.[3] 2019년 5월 15일 기준 7명(이석규(롯데), 윤찬(LG), 조경환(롯데), 허일상(롯데), 황정립(KIA), 강백호(KT), 신용수(롯데)만 달성한 기록인데, 당해 입단한 신인선수 기준이며, 비신인선수까지 범위를 넓히면 13명, 외국인 선수를 포함하면 17명이다.[4] 물론 장타력은 없었지만 당시 팀의 상황은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김주찬, 이대호 등의 유망주들은 전부 삽을 퍼던 시절이었고 노장이라고 불리는 박현승, 김응국은 냉정히 1군 수준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해서 강제로 중심타선에 들어선 것이다.[5] 김주찬, 신종길, 이승화 등 발 빠른 젊은 선수들 위주로 기회를 부여했는데, 가장 먼저 터진 선수가 조성환이었다. 나머지는 백인천의 마수에서 벗어난 후에야 포텐이 터진다 이승화는???[6] 병역비리에 연루된 70명의 선수들 중 실제로 19명은 공소시효가 지나 사법처리를 면했다.[7] 기소된 순간부터 공소시효는 정지된다. 신병은 확보하지 못했으나 공인이고 혐의가 너무 명확한지라 그냥 기소해버린 것.[8] 조성환은 나중에 이 날이 3번으로 올라간 첫 경기였다고 방송 인터뷰에서 말했는데 사실은 3번째 경기였다.[9] 이 영상은 전체 하이라이트고, 6분 20초쯤부터 보면 된다. 롯데팬은 눈물없이 못본다 이 안타를 치고 정수근이 무동을 태웠줬다.[10] 도루 실패는 단 3개로 무려 90%가 넘는 성공률을 기록했다.[11] 쉽게 설명하자면 안구를 둘러싸고 있는 얇은 뼈가 골절되는 부상. 너무 얇은 뼈라서 인공뼈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12] 사실 몸 맞는 공으로 인한 부상경력이 있는 선수들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을 때 몸쪽으로 공이 날아오면 트라우마가 생겨, 타석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 한다. 몸에 맞는 공이 의외로 많은김동주는 몸쪽공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몸에 맞는 볼을 던진 투수를 상대하기만 해도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훗날 자신과 비슷하게 안와골절을 당한 박세혁을 보고 남의 일 같지 않아 격려와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13] 실제로 최희섭, 김태균 은 뇌진탕의 후유증으로 상당히 고생했다. 거기다 조성환은 09시즌에도 머리에 부상을 입은적이 있으니 더더욱 지켜봐야 할 일이다.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에 헤드샷을 당했던 채태인신항로 개척이나 산책수비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2년도 더 지난 2013년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14] 것도 2012 프로야구 시즌 1호.[15] 팬들은 이미 3일전 페이스북 소식 등을 통해 알고 있었다.[16] 일간스포츠 최민규기자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에 따르면, 조성환이 복귀한 2008년 당시 후배기자에게 병역비리와 관련된 취재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 때 조성환이 후배기자에게 감사를 표하며, 병역비리에 대해 사죄하고 싶었는데 자신에게 병역비리에 관한 질문을 해 준 기자가 없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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