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국회의원 선거/정당별 결과/더불어민주당/승리의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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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정당 외부 요인
3. 정당 내부 요인
3.1. 통합적, 효율적 정당 운영
3.2. 효율적인 공천과 청년 신인 발굴
3.4. 책사들의 존재



1. 개요[편집]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체 300석 중 180석[1], 지역구에서 253석 중 163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을 서술한 문서다.


2. 정당 외부 요인[편집]



2.1. 코로나19에 대한 정부의 대처[편집]


우선 코로나 감염 사태에서 바이러스의 확산력을 우습게 본 서방 선진국들의 방역체계가 붕괴하면서 한국이 대부분의 서방 선진국들보다 선방했다는 평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천지 집단 감염으로 한국이 중국 다음 가는 코로나 확진자 보유국이었던 3월 초까지만 해도 중국인 입국금지를 비롯한 논란들은 민주당에게 최악의 악재였다. 실제로 이 시기에 문재인 대통령 및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눈에 띄게 하락했다. 그러나 점차 전통적인 선진국인 미국, 유럽연합 등이 바이러스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외신에서 한국의 대응을 잇따라 칭찬하자 여론이 변하기 시작하여 총선 직전에 와서는 정부 대응을 높이 평가하는 여론이 70% 이상을 차지하게 되어 전화위복이 되었다.

서구권 범유행이 시작된 뒤에도 잘 방역한 나라로 꼽히던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도 3,4월에 접어들자 전염자가 수백 명 가까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한국 정부의 대처가 더욱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나마 초기 방역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대만은 양안관계차이잉원 재선 후 워낙 나빠져 인적교류가 매우 적어서 쉽게 입국금지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은 우리나라보다 확진자 수는 적지만 락다운, 무역축소를 포함한 초강력 통제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이 정도면 상대적으로 선방했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실제로 감염 사태가 심각한 국가 대부분은 아예 국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시민의 활동을 강제로 차단하는 대응을 벌이고 있으나 한국은 종교, 집단 밀집 구역, 대중이용시설의 운영 중단을 제외하면 그 외 활동은 오로지 시민의식에 맡기고 대응하고 있다.

방역이 잘되었다고 평가받았던 국가들 중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경우 한국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웠던 점이 부각된 것도 한 몫을 했다. 대만의 경우 앞서 언급했듯이 양안관계라는 특수성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가 줄었기에 중국과의 차단이 쉬웠다. 또 홍콩과 싱가포르 같은 경우 인구 수나 국가 면적이 한국에 비해 매우 작은 도시국가 형태라 여러 지역이 나눠져 있는 한국과 달리 국경이 뚫리면 바로 국가 단위의 대규모 감염 사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입국 금지가 가장 유효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결국 확진자가 가파르게 증가하여 한국보다 6000명 이상의 감염자를 발생시켰다.

결국 한국이 코로나 감염에 대한 대응을 비교할 국가는 자연스럽게 서방 선진국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 입국금지라는 1차적 대응만 해놓고 그 뒤 대규모 감염에 대응할 2차→3차적 대응을 준비하지 못한 대다수의 선진국들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또한 그 과정에서 구멍이 뻥뻥 뚫린 허술한 의료체계, 현대화되지 못한 행정체계, 시민 개별의 수준 낮은 시민의식, 감염을 감당하지 못하자 국가권력을 이용한 초강력 통제 조치가 드러났다.[2] 이는 곧 한국의 확진자 정보 수집 및 동선 공개, 뛰어난 의료/행정체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단위 강력통제가 아닌 수준 높은 시민의식에 기댄 예방 조치와 비교된 것이다.

거기에 G7 국가 중 유일하게 코로나의 공격에서 무사하나 싶었던 일본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일부러 숨죽였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사실 일본의 확진자 수가 급증하기 이전에도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국을 비롯해 일본의 통계는 부정확, 투명하지 않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실제로 한국보다도 중국인 경유 사례가 월등히 높은데다 자민당 체제 하 일본 정부의 통계조작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통계에 손을 쓰지 않았겠냐는 예측이 많았다. 거기에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집단 감염 사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은 일본의 방역 능력에 대한 신뢰성을 충분히 깎아먹고도 남았다. 결국 도쿄 올림픽 연기가 확정된 후 대대적인 진단검사를 실시하자 확진자가 급증하며 서방 선진국들마냥 큰 혼란이 일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서방 국가들이나 한국의 1일 검사량보다 크게 부족한 수치이다.

2.2. 미래통합당 측의 엄청난 삽질[편집]


미래통합당 측에서 공천에서 엄청난 삽질을 한 것도 더불어민주당의 성공의 비결 중 하나이다. 아무런 지역 연고도 고려하지 않은 공천이 전국적으로 이뤄졌으며, 황교안 대표의 차기주자 견제 목적으로 홍준표 등의 거물을 공천에서 배제시켰다. 홍준표의 경우, 양산시 을 선거구에서 컷오프된 후 미래통합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대구 수성구 을 선거구에 출마해 미래통합당의 이인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한편 양산시 을에서는 민주당 김두관 후보가 박빙으로 당선되었다. 결국 홍준표 공천 배제 하나만으로 지역구 의석 2석을 날렸다. 미래통합당이 홍준표를 본인의 주장대로 양산에 내서 김두관과 붙였다면, 김두관에게 진 나동연이 아무리 양산시장 출신이라고 해도 홍준표의 무게감에는 못 미치기 때문에 양산에서 홍준표가 이기고 수성 을에서 이인선이 이겨서 지역구 2석을 추가했을 가능성이 크다.[3] 거기다가 차명진의 망언으로 공천 계획까지 말아먹은 것이 미래통합당의 발목을 잡았다.

결과적으로 공천을 먹는 것으로 알았던 미래통합당의 실책도 무시하지 못할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 실제로 비례대표에서 미래한국당이 유의미한 성과를 냈음에도, 지역구 성과가 처참한 것은 바로 같은 인물을 어디에 배치하느냐로 선거 결과가 크게 갈린 하나의 표본이 된 것이다.

또한 우파 유튜버들의 존재 또한 미래통합당이 삽질을 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원래 선거 직전에는 자신들의 정치색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자신들의 고정 지지층은 물론 중도층, 혹은 '상대 지지자'들도 끌여와야 하는 것이 중요한데, 미래통합당은 이 우파 유튜버들 때문에 여론, 민심에 대해 왜곡하여 해석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4] 예를 들어 미래통합당이 극우 유튜브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중도층으로 외연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는 곧 여론조사 불신론과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이어졌다.

결국 보수진영이 이번 21대 총선에서 참패한 원인이 우파 유튜버들을 맹신해 민심을 잘못 판단했다는 지적이 미래통합당 내부에서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며, 패배 이후 우파 유튜버들과의 손절 조치에 들어간 듯 하지만 아직까지 당선 혹은 낙선된 일부 의원들은 이 우파 유튜버들과 결탁하여 선거조작 음모론을 퍼뜨리는 등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5]


3. 정당 내부 요인[편집]



3.1. 통합적, 효율적 정당 운영[편집]


아무리 정부가 잘해도 여당이 엉망이면 선거에서 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이걸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입하면 문재인 정부가 대처를 잘해도 민주당에서 계파 갈등으로 말썽을 일으키면 후광 효과가 없어지게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미래통합당과는 반대로 계파 갈등이 확실히 덜했다. 현재의 민주당 의원들은 정치적 배경과 상관 없이 대부분이 친문을 자임하고 있으며, 심지어 비문이나 비주류로 분류되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친노, 친문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6] 그나마 비문 혹은 비주류의 대표주자로 분류되며 당내 갈등의 핵심축으로 꼽혀온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지자체장으로 빠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공천 과정에서의 잡음도 덜했다.[7] 특히 민주연구원양정철은 총선을 앞두고 이재명 지사, 김경수 지사와 교류하며 '원팀 선언'을 이끌어내는 등, 만에 하나라도 불거질 만한 갈등 요소의 가능성까지 차단하기 위해 철저한 사전 정지작업을 진행했다.

일례로 대표적인 당내 비주류로 분류되는 3선 중진의 정성호 의원까지 경기 북부 선대위원장직을 맡아 중앙당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북부 지역의 경기도당 조직을 총괄하고, 여러 지역에 지원유세를 다니며 경기 지역 압승의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친문+호남+DJ적통+차기 대권주자 버프를 받은 이낙연 전 총리[8]과 친문의 전신인 친노의 원로 이해찬 대표 체제 아래서 '시스템 공천'이 비교적 잘 실행될 수 있었다. 여기에 추가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구 후보 경선에서 컷오프 되거나 공천에서 탈락한 후보들까지 즉각 공천자의 선대위에 합류하여 하부 조직의 와해 없이 단합된 선거를 치르기도 했다. 이해찬 당대표 계열로 꼽혔던 인사들이 공천 및 경선에서 대거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대표는 '자기들이 못한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라며 쿨하게 받아들이고선거에서 지는 놈은 내 측근이 아니다[9] 탈락한 인사들도 비교적 반발이 덜한 채 공천 결과를 수용하고 당의 선거 운동에 합류한 것이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결과적으로 계파에 상관 없이, 같은 당의 이름 아래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공천이 많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매끄러운 공천뿐만 아니라 선거 전략이나 홍보 면에서도 경쟁 정당들에 비해 우월함을 보였는데, 정확한 여론조사 분석, 신속한 가짜뉴스 대응, 정책 및 공약 위주의 선거공보, 유튜브팟캐스트 등의 뉴미디어 플랫폼 적극 활용, 익명 빅데이터를 활용한 유권자 동선 분석 및 타겟형 선거운동 등이 강점으로 꼽혔다.[10]

물론 마찰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공천에서 컷오프된 오제세, 민병두, 차성수, 노관규, 문석균, 조일현, 이인숙의 탈당 후 무소속 출마 선언이었다.[11] 이에 대해 이해찬 대표는 '무소속 출마자는 영구 제명하고 복당을 불허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차성수와 문석균은 출마를 결국 강행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 다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고, 해당 지역구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나마 민병두는 사전투표 직전 장경태 후보 지지를 선언한 후 사퇴하며 비교적 잘 수습되었고, 오제세 또한 중앙당의 끈질긴 설득 끝에 후보등록 직전 탈당 및 무소속 출마 의사를 접었고, 이후 충북 선대본부장을 맡아 충북 지역의 선거 성과에 힘을 보탰다.

가장 심각한 사례는 문석균이었다. 문석균은 아버지인 문희상 국회의장의 지역구인 의정부시 갑에 출마를 원했는데[12], 일반 여론에서 '아빠 찬스', '세습 정치'라는 비판이 강했다. 당에서도 이를 의식하여 문석균을 공천에서 컷오프시키고, 소방관 출신의 영입 인재인 오영환을 전략 공천했다. 문희상은 민주당 내에서 동교동계친노를 잇는[13] 상당히 비중 있는 중진이었고, 특히 현역 국회의장이며, 무엇보다 해당 지역구인 의정부에서 '터줏대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역 영향력이 압도적인 인물[14]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문석균을 잘라낸 것[15].

이후 문석균은 자신을 따르는 지역당의 당직자 및 당원들과 함께 탈당해서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이 당시 의정부 지역당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고 한다. 400여 명에 이르는 지역당의 당직자[16] 중 문석균을 따라가지 않고 남은 사람은 고작 3명뿐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문희상계로 알려진 민주당 소속 안병용 의정부시장마저 전략공천된 오영환을 공개적으로 비토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더불어민주당 청년위원회에서 조리돌림에 가까운 정치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며 안병용 시장을 청년 정치를 짓밟으려는 시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안병용은 여론조사에서 오영환이 계속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민주당 중앙당과 경기도당에서는 베테랑 당직자와 경험 많은 보좌진들을 즉각 투입하였고, 당에 잔류한 지방 의원들도 재빨리 규합하여 오영환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마침 지역구에서도 '고생하는 청년' 오영환[17]과 '금수저 2세' 문석균[18]으로 굳어진 이미지가 너무나도 대비되었던 터라, 결과적으로는 지지율이 분산되지 않고 대부분 오영환 쪽으로 쏠려, 오영환이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될 수 있었다.

심지어, 오영환 후보가 획득한 득표율 53.03%는 의정부의 맹주 문희상 의장마저도 한 번도 기록하지 못했던, 1987년 민주화 이후 의정부 지역 민주당 후보의 역대 최고 수준의 득표율이었다.[19] 반면 문석균은 8.55%를 득표하고 낙선하였고, 선거비 보전도 전혀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의정부시 갑 지역위원회는 그 동안 문희상에게 줄을 대면서 새로운 인물인 오영환에게 잠재적으로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기존의 지역 조직과 당직자들까지 정리하고[20] 대규모로 인적 쇄신까지 완료한 셈이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이자 새옹지마.

그나마 조일현, 이인숙 정도가 민주당 후보의 표를 갈라먹어 통합당에 지역구를 넘기는 데 기여했다.

그 외에도, 경선에서 질까봐 아예 경선 대상으로 지정되었음에도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를 한 원주시 갑권성중의 사례도 있는데 이쪽은 선거 내내 전혀 유의미한 변수로서 작용하지도 않았다. 이 쪽은 복당 가능성도 제일 희박한데, 여론조사를 믿지 말라고 네거티브를 때리면서 주장하는 바람에...

결론적으로 253개 선거구에서 공천불복으로 탈당한 무소속 후보 여파로 낙선한 곳이 홍천횡성영월평창, 평택 을 선거구 딱 둘이라는 점에서 민주당이 얼마나 리스크 관리를 잘 했는지 알 수 있다.[21][22]


3.2. 효율적인 공천과 청년 신인 발굴[편집]


인위적인 중진 컷오프와 공천 돌려막기에 의한 당내 분란과 내홍으로 몸살을 앓았던 미래통합당과는 달리, 더불어민주당의 경우에는 지도부의 전략공천을 최소화하고 시스템 경선에 주력하여 공천 후폭풍을 최소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중진들이 대거 물갈이되었는데, 인위적인 컷오프는 별로 없었고, 대부분 지역구의 정상적인 경선 절차를 통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심재권, 유승희[23], 이춘석 의원 등이 탈락했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물로 교체되었다.

일례로 이런 시스템 경선에 의해 한 지역의 현역 의원과 지역위원장이 모두 한꺼번에 교체되어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공천된 곳이 바로 안양시였다. 안양에서는 대표적인 다선 중진 의원인 6선의 이석현 의원과 5선의 이종걸 의원, 만년 2등 이정국이 모두 당내 경선을 통해 자연스럽게 물갈이되었고, 미래통합당 5선의 현역 원내대표 심재철 역시 본선에서 비례대표 초선으로 지역위원장을 맡으며 기반을 다져온 이재정에게 밀려 낙선하면서 물갈이되었다. 여야를 불문하고 오랜 기간동안 같은 인물들만 계속 선출되었던 터라 지역 유권자들이 식상함을 느끼고 있던 차에 경선을 통해 자연스럽게 새 인물로 교체되어 민주당의 선거 전략에 도움이 되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 때문인지 몰라도 더불어민주당은 안양시 지역구 세 곳에서 모두 당선자를 배출했다.

고양시 역시 효율적인 공천을 통해 당선자를 배출한 지역이었다. 특히 고양시 병, 고양시 정 지역이 3기 신도시로 인한 반발이 심했던 지역이었기에 효율적인 공천과 당 지도부의 전략적인 판단이 만들어낸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상대인 미래통합당이 3기 신도시에 대한 반발과 이에 따른 유은혜 장관 및 김현미 장관에 대한 반감을 등에 업고 고양시 병 지역에서 당협위원장을 맡던 이동환과 김현아 의원이 열심히 지역기반을 다지고 있었고, 특히 김현아 의원의 경우 총선 1년 전부터 아예 탄현동으로 이사를 오고 주엽동에는 지역사무실을 차리는 등 주민들의 분노를 표로 연계시킬 구상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유은혜와 김현미에게는 내각에 전념하도록 하며 불출마라는 이름의 컷오프를 단행한 다음 그 자리를 경제분야 영입인사인 홍정민이용우로 채워넣은 다음 3기 신도시 철회를 넘어 자족시설 확충과 교통망 개선 등의 더 나은 대안을 보여주었고, 여기에 미래통합당이 대안 부재에다 고양시 정에서 김현아 의원을 공천한 것을 제외하고 막장 공천까지 보여주는 바람에 당초 예상보다 큰 격차[24]로 승리할 수 있었다.

또한 청년 정치인들의 당선도 두드러졌는데, 경기 의정부시 갑오영환[25], 의왕시·과천시이소영, 서울 동대문 을장경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을김남국, 대전 대전광역시 동구장철민 등이 모두 지역구에서 당선된 30대 신인 정치인이었다. 더불어시민당의 비례대표로 당선된 전용기, 용혜인[26] 의원까지 포함하면 30대 이하 청년 신인 정치인 당선자가 무려 일곱 명이나 배출되었다. 특히 장경태, 장철민, 전용기 당선자의 경우, 총선을 앞두고 외부에서 갑작스럽게 영입한 청년 인재가 아닌, 대학생 시절부터 당내에서 오랫동안 자체적으로 육성한 인재였던지라 더욱 주목을 받기도 했다.


3.3.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압승[편집]


공직선거법 제62조(선거사무관계자의 선임) ①제61조(선거운동기구의 설치)의 선거사무소와 선거연락소를 설치한 자는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자중에서 선거사무소에 선거사무장 1인을, 선거연락소에 선거연락소장 1인을 두어야 한다.

⑤제135조제1항 단서의 규정에 의하여 수당을 지급받을 수 없는 정당의 유급사무직원, 국회의원과 그 보좌관ㆍ비서관ㆍ비서 또는 지방의회의원은 선거사무원이 된 경우에도 제2항의 선거사무원수에는 산입하지 아니한다. <개정 2000. 2. 16., 2010. 1. 25.>[27]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정당별 결과/미래통합당/패배의 원인 및 지역별 결과에서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지방의원들과 광역의원들은 공직선거법 62조 5항에서 당연직 선거운동원으로 인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을 추가적으로 동원하여 선거운동원 수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수 있어 민주당 측이 더 쉽게 선거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4. 책사들의 존재[편집]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미래통합당의 큰 차이점은 바로 선거 전략을 냉철히 분석하고 지휘하는 책사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차이였다. 승자인 더불어민주당에는 양정철과 이근형이라는 선거 책사가 있었지만 패자인 미래통합당에는 딱히 책사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 없었다.[28][29] 양정철과 이근형 이 두 책사들은 이른바 '5인 TF(두 사람과 이인영 원내대표, 윤호중 사무총장, 최재성 전략기획자문위원장)' 를 통해 민주당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만들었다. 양정철과 이근형 이 두 사람은 확실한 역할 분담으로 선거 전략을 담당했다.

먼저 양정철은 지역구마다 성별·연령별 유동인구 동선 빅데이터를 시간대에 따라 분석해 선거운동의 효율화를 꾀했다. 실제 선거 운동을 언제 어디에서 할지를 근거와 함께 각 후보자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이근형은 여론조사 및 정치컨설팅 회사 대표 출신답게 ‘시스템 공천’과 정확한 판세 분석을 주도했고 누적 여론조사를 토대로 위성정당 추진, 영입 인재들의 지역구 선정 등의 전략을 수립했다.기사 참조 특히 이근형은 선거 이후에 인터뷰에서 나경원의 지역구였던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은 여론조사 결과 나경원에 대한 평판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중량감 있는 인물을 붙여놓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고 하며[30] 가장 어려운 상대로는 광진구 을에 출마한 오세훈 후보를 꼽았다.기사 참조[31] 그 정도로 이 두 사람이 구축한 선거 관련 데이터 양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근형은 획득할 지역구 의석 숫자까지 163석이라고 정확하게 맞추었다고 한다. 모두 구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내린 분석과 예측이었고 그걸 대성공으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더불어민주당은 선거를 지휘하는 이해찬이라는 사령관 아래에 양정철과 이근형이라는 두 책사가 선거 전략을 짜내며 일사불란하게 선거 준비를 했기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반면, 미래통합당은 속담 그대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를 보였다. 책사는 없고 김종인을 필두로 한 지휘관들이 책사 역할까지 떠맡으며 독단적으로 선거 전략을 구상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1] 위성비례정당 더불어시민당 포함.[2] 입국금지, 락다운, 집단면역으로 대표되는 이 조치들은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품고 있었던 선진국에 대해 갖고있던 관념들이 모조리 무너질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조치들이었다. 오죽하면 대중매체 속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선진국들이 왜 멸망하는지 알 것 같다는 재평가가 나오기도 했다.[3] 양산시 을에 속한 웅상 지역이 물금신도시 보다는 보수성향이 강해 통합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긴 했는데... 문제는 나동연이 시장 재임시절 이 지역을 홀대해서 시의원들과 다투는 등 평판이 좋지 못했다는 것이다.[4] 그러나 이 문제는 우파 유튜버들을 탓 할 필요가 없는 것이 그들을 공신력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미래통합당 당 차원에서 그들을 치켜세우는 엄청난 삽질을 벌였기 때문이다. 어짜피 이런 유튜브들만 시청하는 극우층들은 그 숫자가 변동될 여지가 없는 반면 상대편 지지층은 이를 보고 오히려 결집하고 중도층은 보수의 이런 행각에 환멸을 느끼고 반대편으로 대거 넘어갈 여지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선거 전략이 완전히 실패한 셈.[5] 다만, 선거조작 음모론은 미래통합당 뿐만이 아니라 우파 유튜버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다. 민경욱, 차명진, 김소연, 신의한수, 가로세로연구소, 공병호TV, 뉴스타운 등은 선거조작 음모론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이준석, 이병태, 이경전, 펜앤드마이크, 조갑제TV, 미디어워치, 호밀밭의 우원재 등은 선거조작 음모론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도 그럴듯이 만약 선거조작 음모론이 가짜뉴스라는 게 탄로날 경우 안 그래도 총선 참패로 인해 보수우파 진영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그보다 더 심한 타격을 입게 되어 보수우파 진영은 궤멸에 가까운 상태가 될 테니까...[6] 일례로 민주당 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 당직자 출신 비주류 계파인 박용진의 경우마저 문재인 당시 변호사와 함께 시민통합당을 통해 민주통합당에 합류한 경우이다. 비문으로도 분류되는 김부겸의 경우에는 19대 대선 때 대구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지원유세를 한 적도 있었고 문재인 정부의 초대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7] 그런데 정작 이재명 도지사는 '내가 왜 비문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터라 자신은 친문이지만 주변 지지자들은 비문인 복잡한 관계이다. 실제로 지난 대선에도 문재인이 후보로 확정되자 이재명은 문재인의 선거 운동을 도왔지만 이재명 지지세력인 손가락혁명단은 다른 민주당 지지자들과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다.[8] 엄밀히 말하자면 비문 출신이긴 하나,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서 역할을 잘 수행한 결과로 친문 인사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친문 자체가 문재인 대통령의 뒤늦은 정계 행보를 따라 천천히 확장하다 정권 출범에 이르러서야 형태를 갖춘 만큼, 다른 계파처럼 소위 "출신성분"을 엄격하게 따지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9] 농담이 아닌 게, 이해찬 대표는 자신이 출마한 모든 선거를 승리했던 불패의 화신이다. 당적을 옮긴 적이 있던 이시종을 제외하면 사실상 유일한 셈. 또한 본인의 계파로 손꼽히는 인사들이 탈락하더라도 당내 장악에는 별 영향이 없다는 자신감도 드러난다. 이번 문희상 국회의장의 지역구 세습논란과 같은 큰 이슈를 몰지 않는 이상 친노 원로로써 오랜 시간 민주당의 거물급 인사로 활동한 이해찬 본인을 공격할 당내 세력도 없다는 것을 본인도 잘알기에 할 수 있는 처사.[10] 박형준 미래통합당 선대위원장이 민주당을 이기지 못한 이유로 손꼽은 이유 중 하나다. 젊은 사람과 호흡하고 소통하며 정부의 정책까지도 활용하는 민주당의 지지세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고 고백했다.[11] 무소속 출마 선언을 하진 않았지만 영등포구 을의 19, 20대 국회의원인 신경민도 김민석에게 경선에서 패할 상황이 되자 권양숙 여사를 예방하는 작태를 보였다.[12] 지역구 세습은 문희상 의장의 의중이라는 게 중론이다. 경기 의정부갑 민주당 지역위원회는 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작년 문석균이 지역위 상임부위원장에 임명된 게 세습 논란의 시작이었다.[13] 참여정부의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이 바로 문희상이었다.[14] 숭문당이라는 서점이 있는데, 의정부 내에서 네임드 서점이다.[15] 상식적으로, 작년에 민주당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각해보자. 문석균 공천은 애초에 고려할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16] 실제 지역당의 당직자는 이보다는 소규모인데, 지역 대의원들의 규모까지 포함하면 이렇게 나올 수 있다.[17] 오영환이 소방관의 기도 저자이기도 하고, 대한민국에서 아마 제일 이미지가 좋은 공무원일 소방관 출신이라는 것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아내 김자인 또한 비주류 종목인 스포츠 클라이밍에서 세계적인 족적을 남겼고 개인사적인 논란이 없었기 때문에 이미지가 매우 좋다.[18] 그래도 능력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자기 입으로는 세습 아니라고 했지만 출판기념회 때 낸 책 제목이 《그 집 아들》 이었다... 같은 2세 정치인이지만 남경필, 장제원, 정호준의 경력과 비교해보면 문씨 부자가 얼마나 경기 의정부시 갑 유권자들을 호구로 봤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금수저인 곽상언 변호사는 일부러 험지이자 이용희를 제외하면 미래통합당이 계속 이긴 보은·옥천·영동·괴산에 지원했다. 곽상언은 서울 출신이고 영동군에는 본적만 가짐에도 불구하고 지원한 것이다. 보은·옥천·영동·괴산 선거구에서 영동군 출신이면 심규철처럼 낙선될 것을 감안하고 선택했다.[19] 역대 의정부시 민주당 후보 최고 득표율은 같은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의정부시 을김민철 후보가 기록한 55.98%이다. 지방선거로 확대하면 2018 지방선거에서 의정부시장에 당선된 안병용의 65.35%.[20] 415명 중 412명이나 문석균을 따라갔다.[21] 미래통합당은 공천불복 탈당자가 당선된 곳만 4곳이고, 충남 당진에서는 공천불복 탈당자와의 표분산으로 졌다.[22] 경기 하남의 경우도 현직 의원이 탈당하며 큰 격차로 지게 되었다.[23] 유승희 의원의 경우에는 본인의 공천 탈락에 불복하여 한동안 단식투쟁을 하였고, 상대 후보인 김영배 후보를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으나, 선거운동 직전에 단식을 풀고 승복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결국 당원권 정지 1년의 중징계를 당했다. 그리고 김영배에 대한 고발 건도 검찰의 무혐의로 불기소하면서 더욱 꼴사납게 된 건 덤이다.[24] 이용우 8.5%차 53.4%, 홍정민 9.6%차 54.3%[25] 제21대 국회의 지역구 최연소 국회의원이다.[26] 기본소득당 몫으로 공천되었다.[27] 이게 핵심 조항이다. 민주당쪽에서 하부조직을 끌어오기가 훨씬 쉬워서 이 방법으로 미래통합당의 유세를 쉽게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28] 오죽하면, 미래통합당 당원게시판에는 "왜 미래통합당은 양정철 같은 사람이 하나 보이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글이 다수 올라왔었다.[29] 굳이 꼽자면 박형준 전 의원이 있기는 했는데, 이쪽은 사실 본인 지역구 선거에서도 그닥 좋지 못했던 지라... 부산에서 손꼽히는 보수 텃밭인 수영구에서 유재중에게 2연패한 불명예를 안고 있다.[30] 실제로는 중량감이 크다고 볼 수 없는 정치신인인 이수진을 공천했음에도 나경원을 접전이라고는 하지만 7.1% 차이로 꺾었다.[31] 오세훈은 통합당의 대선후보로 꼽히기 때문에 민주당 입장에서는 반드시 낙선시켜야 하는 상대였다. 그래서 이해찬, 이낙연, 이인영과 같은 민주당 수뇌부 요원들을 광진 을에 지원 유세로 넣을 정도로 특별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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