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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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갈량의 삼국지연의에서 나오는 모습.
2. 특징[편집]
정사에는 엄정한 정치가의 면모가 주로 부각되지만 연의에서는 천재 군략가의 면모가 주로 부각된다. 정사의 제갈량이 원칙에 충실한 청렴한 정치가라면 연의의 제갈량은 남보다 우월한 두뇌로 상대를 농락하는 천재형. 다만 그 때문에 야전 사령관으로 나가서 계략을 사용해 승리를 이끄는 모습에만 편중되어 제갈량의 매우 뛰어났던 정치수완 등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연의에서 제갈량 북벌 이야기는 많지만 제갈량이 내정에 힘쓴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면서 연의의 탓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연의도 제갈량의 뛰어난 내정능력에 대해서 서술한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삼국지를 논하는 이들이 연의조차 읽지 않고 무조건 연의 탓 얘기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은 유비 승하 이후 공명이 승상으로서 촉한을 통치할 때의 모습을 묘사한 연의의 한 구절이다.
한편, 제갈 승상이 성도에 머물며, 큰 일 작은 일 가리지 않고, 모두 몸소 공무를 처리하고 결단한다. 양천(동천과 서천, 측 한중과 파촉) 백성들이 기쁘게 태평성대를 즐기니,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다행히 여러 해 잇달아 크게 풍년이 들어, 늙은이나 어린이나 모두 배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나라에서 노역을 시켜도, 서로 앞다퉈 부지런히 일한다. 이리하여, 군수물자, 무기, 여러가지 쓸 것들이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쌀은 곳간에 가득하고, 재물은 곳집에 들어찬다.
삼국지연의 87회 - '남쪽의 도적을 정벌하러 승상이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천자의 군대에 항거하던 오랑캐 왕이 처음으로 잡히다.' 中
어쨌거나 연의에서는 이릉대전의 줄초상 이후 후반을 책임지는 스타 캐릭터다. 사마의는 당시에는 위나라의 장군 중 하나일 뿐인데다 안그래도 조비에게 의심받아 혼자 활약하지도 못하고 크게 이곳 저곳에 개입하기 힘든 데 비해, 제갈량은 승상이라는 위치 때문에 엮일 이벤트가 상당히 많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독 제갈량이 지략 면에서 세계관 최강자급으로[1] 엄청나게 띄워지는 것도 어쩌면 이야기의 후반부를 책임져야 할 주인공이기 때문인지라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3. 설전[편집]
삼국지연의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설전을 벌여 작살내곤 한다.
3.1. 오나라 호족들과의 설전[편집]
이중 가장 격렬했던 설전은 역시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나라에 가서 손권과 동맹을 맺으려다 오나라의 호족들의 조롱과 인신공격에 맞서 독설로 응수하는 장면.[2]
- vs 장소
- vs 우번
공명: 비록 우리 군 숫자가 조조군보다 많이 적어서 패퇴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유비님 밑에서 단결하여 조조군과 맞설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런데 넓은 강동 땅과 장강 방어선과 강력한 수군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조조군이 두려워서 나라를 들어바치자 하는 당신이 내 앞에서 큰 소리를 치는 것은 말이 되는가?
- vs 설종
- vs 육적
- vs 엄준
- vs 정병
여기에 장온과 낙통이 나서서 다시 제갈량에 이의를 제기하고, 제갈량은 또 여유롭게 받아칠 준비를 하다가 보다못한 황개가 끼어들어 "적을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입씨름만 하겠는가"고 꾸짖어서 종결된다.
엄밀히 따지면 제갈량은 자신이 주군으로 섬기는 유비측의 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나마 여력이 있는 측에게 도움을 청하는 불리한 입장이지만, 단순히 "조조때문에 망하게 생겼으니 제발 도와달라"며 구걸하기는 커녕 "우리를 돕는 것이 오나라에게도 이익이고, 조조를 상대로 이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설득력 있고 당당한 태도로 임하여 결국 오와의 동맹을 성사시킨다. 말하자면 상대적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어떻게 협상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장면인 셈.
이 설전에서 오측은 초반에는 주로 제갈량을 돌려서 까고 설종부터는 조조를 추켜세우고 유비를 까내리고 엄준에 이르러서는 아예 아무 관련도 없는 얘기까지 꺼내가며 어떻게든 제갈량을 굴복시키려 들려고 안달이 났다. 그럼에도 제갈량에게 조목조목 반박당해 꿀먹은 벙어리 꼴이 되어버렸으니 제갈량의 언변의 위력을 잘 보여준 에피소드.
3.2. 왕랑과의 설전[편집]
설전으로 왕랑을 죽여버리는 실로 괴상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 vs 왕랑 참고.
이에 대해서 김홍신은 자신의 평역판에서는 "본래 설전의 주제는 '어느 쪽이 한나라의 정통 후계자인가'인데, 이렇게 되면 위나라에는 위나라의 주장이, 촉나라엔 촉나라의 논거가 있어서 장군하면 멍군하는 의미없는 싸움이 되었다. 이에 공명은 이념의 싸움을 피하고 뭇 사람의 정서에 호소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비록 왕랑과의 설전 일화는 연의에서만 등장했지만 정사의 주석 제갈량집에 비슷한 일화가 있다. 화흠, 왕랑, 진군, 허지, 제갈장(諸葛璋) 등의 위나라 대신들과 명사들이 제갈량에게 촉나라는 거짓 황제놀음은 그만두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나라에 항복을 하라는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제갈량은 서신에 대한 답장은 보내지 않고 정의(正議)라는 반론의 글을 써, 역사의 사례를 열거하여 항복하지 않고, 되려 약으로 강을 제압해 통일을 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주석 제갈량집에 남은 정의(正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옛날 항우는 인덕에 의거하여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에 비록 중원을 차지하고 제왕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여 후세의 영원한 경계가 되었다. 위나라가 이를 거울로 삼지 않고 그 전철을 밟고 있으니, 만약 그 자신은 화를 면한다 하더라도 자손들에게는 타일러주어야 할 것이다. 헌데 몇몇 선생들이 기애(耆艾)[11] 의 나이임에도 적의 의사를 받들어 내게 서한을 보내왔으니, 이것은 마치 진숭과 장송이 왕망의 공적을 칭송하고서도 큰 재화가 박두하자 죄를 모면할 요행을 바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
세조께서는 한나라 제업을 중흥시킬 때 불과 수천 명의 여위고 쇠약한 병사들을 분발시켜 곤양의 들에서 왕망의 강대한 40만 대군을 물리치셨다. 정도(正道)에 의거하여 사악한 자들을 토벌하는 것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조맹덕은 간교한 수단으로 병력을 얻어 수십만의 군사를 출동시켜 양평에 이르러 장합을 구하려 했으나, 힘이 다하게 되자 후회하면서 겨우 자기 한 몸으로 도망쳐 정예선봉을 욕되게 했고, 마침내 한중을 잃고서야 황제의 자리를 함부로 얻을 수 없음을 깊이 깨닫고 급급히 돌아오다가 허창에 이르기도 전에 통한으로 병이 나 죽고 말았다. 조자환은 황음무도하여 그 뒤를 이어 황위를 찬탈했다. 설사 몇몇 선생들이 소진과 장의의 허황되고 기만적인 유세를 찬양하고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환두의 언사를 들고 나와 당제를 헐뜯고 하우와 후직을 비웃어 흩어지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문채를 헛되이 쓰고 필묵을 허비할 따름이다! 이런 것은 대인과 군자들이 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 군계 」에서는 "만 사람이 죽음을 결심한다면 천하를 종횡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옛날 헌원은 수만의 군사를 정비하여 사방을 제압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는데, 하물며 우리(=촉한)는 수십만 군사로써 정도에 의거하여 죄 있는 자들을 물리치려 하거늘, 이를 감히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정사 쪽이 더 초전박살로 때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좀 뜬금없기는 하지만 조식이 한 주장에 대해 서신으로 반박하면서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한나라의 두 시조(한고조 유방/광무제 유수)는 모두 포의布衣(=서민) 신분에서 일어났다. 고조는 거칠었으나, 광무제는 예의를 알았다. 고조에게는 군자의 풍도가 없었으니, 유자의 관(冠)에 오줌을 눈 것을 존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벽양후(=심이기)가 음란하니 고조와 궁인들도 함께 휩쓸렸다.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은 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린 근본이었으나, 고조는 이를 경시했다. 문왕은 많은 문인을 등용하여 나라를 안정시켰으나, 고조는 이를 멸시하여 등용하지 않았다. 또한 척희의 간사한 아첨을 들어 여후의 포락을 초래했고, 종국에는 영악한 여자가 제 마음대로 악독하고 잔혹한 궤계를 펼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모든 일들이 어찌 지모와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없음이 초래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은 고조를 필부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에 반해) 광무제는 견식이 넓고 인덕이 있으며 지혜로움이 뛰어났다. 무용과 계략을 펼쳐 반란을 제거했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잔적을 소탕했다. 곤양에서는 두 공(公)을 깨뜨렸고(왕읍과 왕심을 물리친 곤양대전), 한진(漢津)에서는 진부와 양구사를 쳐부쉈다. 당시 구주(九州, 천하)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으며, 황제를 칭한 자가 두셋이었고 왕을 칭한 자들이 네다섯이었는데, (광무제는) 동쪽의 제나라 땅에서 난적을 물리쳤고(경감의 장보 토벌), 계략이 없는 적미군을 굴복시켰다.
팽총은 남들과 다른 것을 바라다가 수하에게 목숨을 잃었고, 방맹은 군주를 배반했다가 살해당했으며, 외효는 신의를 저버렸기 때문에 주검이 되었고, 공손술은 다른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광무제에게) 머리를 바쳐야 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광무제의) 면밀한 계책과 계략이 정해진 다음에 출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승리였다. 전투에 임한 장수나 계략을 결정한 모신들 중 명령을 따른 자는 총애를 받았고, 명령을 위반한 자는 목숨이 위태로웠다. 광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싸운 것은 그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계략을 세운 것이고, 승리는 조정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당시 유수 세력이 거둔 모든 승리가 광무제 한 사람의 재능과 위업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말). 이 때문에 두융은 그의 명성을 듣고 귀순했으며 마원은 그를 한번 만나보고는 탄복하였다.
조자건(조식)은 광무제를 논하면서 그의 무장들이 한신, 주발과 비기기 어렵고, 그의 모신은 장량과 진평을 당해내지 못한다고 했으며(광무제 한 사람의 재능만을 부각시킨 조식의 논점을 지적하는 것) 또한 당대의 사람들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러한 논리가 광무제의 덕을 찬미하기 위해 당대의 준걸들을 말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광무제에게는 운대 28장은 물론이고, 마원 등에 이르기까지 충성스럽고 지혜로우며 용맹한 인재들이 모두 갖춰져 있었으므로, 결코 고조 때보다 못하지 않았다. 장량과 진평이 특별히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본래 고조의 일처리가 거칠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장량과 진평은 넓은 충의와 신의를 표현할 수 있었고, 팽월과 주발은 외부에서 전장을 종횡할 수 있었다.
'굴뚝을 구부리고 땔감을 옮기게 한 사람은 잊었으면서 불을 끄다 머리를 태우고 이마를 데인 사람만 상객으로 여긴다'는 말이 있다(<한서>의 <곽광전>이 출처. 앞서 옳은 말을 한 사람은 잊고 뒤에 고생한 사람만 대우하는 사람의 심리를 지적한 고사). 이 말이 비록 작은 일을 두고 한 말이지만, 두 시조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광무제의 신묘한 계책은 천심(天心)에서 나온 것이었다. 때문에 전략과 전술을 결정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근심할 필요가 없었고, 여섯 가지 기책(진평의 여섯 기략을 의미하는 듯)을 따로 내놓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부합시킬 필요가 없었으며, 모두가 함께 제왕의 공업을 이룩하기만 하면 되었다.
광무제가 등우를 칭찬하여 말할 제 "공자에게 안회가 있었기에 문인들이 더욱 가까워졌다"고 하였고, 오한을 칭찬하여 말할 제 "장군은 나의 뜻을 이해하니, 그의 무력에 비할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그의 충심에 비할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신하들과 계략을 결정할 때는 마원의 의견을 마지막에 들었는데, 이는 마원의 생각이 늘 그의 생각과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지혜로운 신하를 알아보는 명군의 현명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광무제의 상장들은 결코 한신, 주발보다 못하지 않았고, 모신들도 장량이나 진평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광무제는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나쁜 일을 조기에 방지하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조는 일처리가 거칠었기에(광무제에 비해 개인의 재능이 다소 떨어졌기에) 진평, 장량, 한신, 주발 등이 힘을 다하여 그들의 공로를 세울 수 있었다.
제갈량
1차 원전은 남북조시대의 저작인 <금루자金樓子>라는 문집이다. 조식과 제갈량 두 사람은 각기 위나라의 황족과 촉한의 재상이라는, 단순히 지리적인 문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음에도 이런 논쟁이 벌어졌다는 게 좀 특이하긴 한데, 두 사람의 글이 사적으로 쓴 논찬이 아닌 대외에 공표하기 위한 '언론문'이었다면 (몇 년 정도의 시차를 감안한다면) 논쟁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아 보인다.
두 사람이 아무래도 좋을 유방과 유수의 논찬에 대해 왜 이런 논쟁을 했는가 하면 이 논쟁은 단순히 두 황제의 재능이나 인덕에 대한 평가에서 그치지 않는, 조식과 제갈량 두 사람이 산 시대의 정치적, 사상적 패러다임을 꿰뚫고 있는것이라 할 수 있다.
한고조 유방은 조식의 말마따마 돈도 땅도 없는 맨주먹 신분으로 일어나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갈 한(漢) 제국의 기틀을 다진, 전설적이기까지 한 건국 황제다. 비록 당대에도 여러 식자들로부터 문제시되긴 했지만, 통념에 가까운 그의 거친 성품과 유자들에 대한 멸시를 새삼스럽게 끄집어 낸 것은 유방, 나아가 한 제국 자체의 위신과 명망을 깎아 내리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지모와 식견이 없어 여후의 포락을 초래했'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일 수 있고.
그에 반해 광무제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한 찬탄을 늘어놓고 있는 조식인데, '불편한 사실'이긴 하지만, 광무제는 한때나마 주군이자 그가 모시는 황제였던 경시제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립하여 세력을 구축한 사람이다. 이는 결국 재능과 공로만 충분하다면 그 사람이 황제의 자리에 오름이 마땅하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광무제는 중원의 싸움에서 명성을 올리고, 하북을 석권함으로써 중국의 최강자가 되었다. 조식의 아버지 조조도 마찬가지로 중원의 싸움에서 세력을 구축했고, 관도대전, 나아가 하북을 정벌하며 원소 세력을 절멸시킴으로써 최강의 세력을 확립한 역사가 있다. 결국 조식의 논지는 결국 '현 시대의 광무제와 같은 조조가 황제가 됨이 옳다' 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공무에 쫓겨 과로사로 죽었다는 기록까지 있는 제갈량이 왜 굳이 아무래도 좋을 조식의 논평에 반박을 했는가, 조식의 글이 한나라의 위명을 깎아내리고 조조 세력의 찬탈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서술된 것이라면, 그 한나라의 복원과 재흥을 명분으로 삼고 있는 유비 세력으로서는 묵혀두기 껄끄러웠을 것이다. <정의正議>나 <출사표> 등의 글들이 모두 한나라의 정통성과 촉한 건국의 정당성, 위나라의 찬탈 합리화에 대한 비판을 주 내용으로 삼고 있으니, 조식이 광무제와 조조를 같은 그릇으로 놓으려 했다면, 제갈량은 유비를 또 하나의 유방으로 만들기 위해 행동했다고나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곳 참고.
4. 작중행적[편집]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과 관련된 일들은 현재까지도 굉장히 자주 쓰이는 것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삼고초려와 읍참마속이다.[12]
삼고초려는 유비가 제갈량을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인데, 제갈량은 유비의 정성에 감동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읍참마속은 원칙을 위하여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린다는 뜻이다. 북벌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가정에서 마속이 부장이었던 왕평의 말을 무시하고 산 봉우리 정상에 진채를 세웠다가 대패하여 촉군이 북벌을 포기하게 된다. 후에 제갈량이 군율을 위해 마속을 참하였다. 이것이 바로 읍참마속의 유래다. 과거에 유비가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하게 쓰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기도 하였다.
연의의 후반부의 주인공은 사마의와 제갈량이다.[13] 정사에서는 사마의의 우주방어로 인해 재미없는 부분을 제갈량과 사마의의 두뇌 싸움대결로 꾸며 놓았다.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대부분의 작전 대결에서 패하지만 이후로는 계속 우주방어.
102회~103회에서 제갈량은 장기전으로 끌고 가던 사마의를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호로곡에 농사를 짓는 것처럼 위장한다. 이후 계속해서 호로곡에서의 무력한 모습을 보여준 후, 사마의가 호로곡을 점령하러 올 것을 예측한 공명은 호로곡에 화약을 설치[14] 한다. 이후 자신에게 불만을 품는 위연을 미끼로, 사마의를 호로곡에 유인하는 데 성공, 바로 바위를 굴려 골짜기의 입구를 막아버리고 화약을 작동시켜 사마의는 공명의 함정에 걸려든다.
사마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빠져나갈 방도가 없어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공명은 처음에는 드디어 사마의를 잡은 줄 알고 기뻐했으나, 골짜기 위로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침울해하더니, 결국 사마의가 탈출했다는 보고를 듣고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라는 말을 한다. 공명 입장에서는 무심하기 그지없는 하늘이었을듯.
호로곡 패배 이후 사마의는 정말 진채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공명은 사신을 시켜 여자 옷이나 장신구 등을 사마의에게 보내 도발하지만, 사마의는 참아내고 사신과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사마의가 공명은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사신은 "잠을 적게 자고 식사를 잘 하지 않으시며 작은 형벌까지도 직접 살피신다"고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나라의 협공도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갈량은 그 충격에 쓰러진다. 그날 밤 제갈량은 별자리를 보고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 하고, 이에 강유가 하늘에 기도하여 천명을 늘일 수 있는 주술이 있는데 써보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제안한다. 제갈량도 이를 진작에 알고 있었으나 하늘이 허락할지 모른다, 7일 동안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수명도 12년동안 연장될 것이라며[15] 기도 의식에 들어간다. 그러나 6일째, 우연히 밤 하늘을 보고있던 사마의가 제갈량의 별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제갈량의 건강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16] 야습을 가한다. 위연이 적의 기습에 급하게 제갈량의 침소에 들어가다 촛불을 떨어뜨려 제갈량의 수명 연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강유는 분노하여 참살하려 하지만 이것은 하늘의 뜻이라며 제지한다. 그리고는 위연에게 반격을 명령하여 자신에게 건강이상이 없음을 알린다.
제갈량은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하늘을 보면서 너르고 너른 하늘아, 너에게도 끝간 데가 있더냐?[17] 라는 슬픈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제갈량은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들을 모아 만든 책을 강유에게 물려주고, 자신이 죽은 후에 후계자로 장완과 비의를 지명하며, 위연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제압할 계책까지 알려준 후, 숨을 거둔다.
제갈량이 죽자, 제갈량의 장성이 떨어치고 이를 보고 제갈량의 사망을 눈치챈 사마의는 바로 추격해오지만, 제갈량이 미리 만들어놓은 목상을 세우고 강유가 공세로 나오자 사마의는 공명이 주술을 써서 별을 떨궈 자기를 나오게 한 줄 알고 그대로 도주, 몇 십리 동안 겁먹은 채로 도망간다.
여기서 나온 말이 사공명주생중달,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하다'이다. 이 때 사마의는 "내 목, 내 목이 붙어 있느냐?"며 겁먹은 채로 말을 하였고 이내 하후패가 상황을 일러준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마의는 탄식하고 다시 추격해보지만 이미 촉군은 멀리 퇴각한 상태.
이후 사마의는 돌아오며 제갈량의 진채를 보며 "공명은 참으로 기재였다!"라는 말을 한다.
여담으로 제갈량을 가장 고생시킨 건 북벌이 아니라 남만 정벌이었다. 기본적으로 전쟁은 자신과 상대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수록 승산이 높아지는데 남중이 워낙 중원인들 입장에서는 기묘한 땅이라 천하의 제갈량도 예측 못하는 사태가 자주 일어난 것.
5. 기타[편집]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죽자 유선이 제갈량의 관 위에 엎드려 '하늘이 나를 멸망케 하려 한다.'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문열 삼국지에도 차용된다. 제갈량이 있었던 기간은 11년, 사후 유선의 통치기간은 29년으로 훨씬 더 길어서 제갈량의 죽음이 촉한의 멸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보단 제갈량 사후 제갈량의 후계자들이 워낙 일을 잘해줬고 유비가 생전 준비해준 한중방어선 대로 흥세 전투 등의 대승을 거두어 촉한이 30여 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후일 다른 나라의 대신들이 촉한이 멸망할 때 유비의 다스림이 있어서 더 버틸 줄 알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이 두 사람이 쌓아놓은 기반으로 촉한이 버텼다고 당시에도 보았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