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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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琬
장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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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공후(恭侯)
작위
안양정후(安陽亭候)
최종직위
녹상서사(錄尙書事)
성씨
(蔣)

(琬)

공염(公琰)
생몰 기간
? ~ 246년
고향
형주 영릉군 상향현
아들
장남 장빈(蔣斌)
차남 장현 (蔣顯)



1. 개요[편집]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이며 자는 공염(公琰)으로 장빈장현의 아버지다. 형주 영릉군 상향현 사람.

제갈량의 뒤를 이어 약 12년간 촉한의 실질적 1인자 역할을 하였으며, 사후엔 비의가 그 역할을 이어받게 된다. 이 세 사람에 동윤을 더해서 촉한의 사상(四相), 사영(四英)이라고 불렸다.


2. 정사[편집]


약관의 나이에 천릉에 사는 외종제 유민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으며 장완은 주서과의 신분으로 유비를 따라 촉 땅으로 들어가 광도현의 장이 되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유비가 일찍이 유람하다가 갑자기 광도현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장완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노여워하며 처형하려고 했다. 그러자 군사장군 제갈량이 유비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장완은 국가의 그릇이지, 백리를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그의 정무 처리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겉모습을 장식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주공께서는 다시 살펴 주십시오."[1]

유비는 제갈량을 아꼈으므로 제갈량의 말을 들어 장완을 벌하지 않는 대신 관직을 박탈했다. 장완은 면직된 후 한밤중에 소 한 마리가 문앞에서 머리에 를 철철 흘리는 꿈을 꾸자, 매우 언짢아하여 해몽가인 조직[2]을 불러 물어보았다. 조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피를 보는 것은 일이 분명해졌음을 의미합니다. 는 '(公)' 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당신의 지위는 반드시 공(公)에 이를 것입니다. 아주 길한 징조입니다."

오래지 않아 장완은 십방현의 현령이 되었다가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성도로 들어가 상서랑이 됐다.

하지만 유비에게 광도현 사건으로 밉보였는지 중용되지는 못했다. 장완은 오에 항복한 반준과 인척 사이였다. 관우의 죽음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오에 항복한 배신자의 인척을 중용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비 사후 제갈량이 승상이 되었을 때 초빙되어 본격적으로 촉한의 핵심인재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완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이릉대전을 전후해서 촉한의 인재가 많이 죽었던 점도 이유라면 이유였을 것이다.

건흥 원년(223)에 승상 제갈량은 막부를 열고, 장완을 초빙하여 동조연(東曺椽)으로 임명했다. 장완은 무재에 천거되었지만 유옹(劉邕), 음화(陰化), 방연(龐延), 요순에게 간곡하게 사양했다. 제갈량은 장완을 깨우치며 말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까이 있는 자를 배반하고, 도덕을 버리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동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또 멀고 가까운 사람들 에게 그 사퇴하려는 뜻을 이해시키지 못합니다. 때문에 그대는 자신의 공업과 덕행을 나타내어 이 선발의 타당함과 중요함을 밝혀야만 합니다.


건흥 5년(227)에 장완은 참군으로 승진했다.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고 있을 때, 장완은 유부장사(승상대리) 장예와 부에 남아 일을 총괄했다. 8년(230)에 (장예가 죽자) 장예를 대신하여 장사가 되었고, 무군장군(撫軍將軍)을 더했다. 제갈량은 자주 밖으로 출정 나갔지만, 장완은 매번 식량과 병사를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제갈량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공염은 뜻을 충성과 고아함에 두고 있으니, 나와 함께 제왕의 대업을 도와줄 사람이다."

제갈량의 북벌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자리를 비운 승상을 대신하여 각종 사무를 총괄하였다. 더불어 식량과 병사를 모집하여 후방보급 임무에 충실하였다. 덕분에 제갈량은 장완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였으며 후주 유선에게 은밀히 표를 올려 자신이 만약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을 대신할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화양국지 유후주지에 더 자세한 정황이 나오는데 제갈량이 은밀히 후주에게 상주하기를 "양의의 성정은 성급하고 마음이 좁으니, 혹시 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장완에게 신을 대신케 하소서."라 하였다. 즉, 승상부에서 높은 직위에 있던 양의가 자신의 사후 조정을 전횡하지 못하도록 배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3]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고제 유방이 전선에서 항우와 싸울 때, 그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소하에게 후방을 맡겨 보급을 담당하도록 했다. 유비 또한 한중에서 조조와 격돌할 때 제갈량을 성도에 남겨 보급을 담당하도록 했다. 가장 믿음직한 수하는 오히려 내 곁에 두지 않는다. 대신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나를 대신하도록 하는 법이다. 그러니만큼 제갈량에게 있어 장완은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장원에서 제갈량의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유선은 이복을 보내어 제갈량에게 나랏일을 묻게 했다. 그때 이복이 국가의 일을 맡겨야 할 사람을 묻자 제갈량은 장완이 적임이고 그 다음에는 비의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이후를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제갈량은 오래 전부터 장완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걸로 보인다.

한편 삼국지연의의 영향인지 강유를 제갈량의 후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당시 강유의 위상이 결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또 본래 위나라에 있었다는 출신 문제도 있었고, 병법 24편을 넘겨주었다는 묘사도 연의의 창작이다. 물론 제갈량이 강유를 무척이나 아꼈던 건 사실이며, 제갈량 자신과는 달리 군사적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한 장완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겼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제갈량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제갈량이 죽자 유선은 장완을 상서령으로 임명했으며, 오래지 않아 관직을 더하고 도호를 대행하도록 했다. 이어 장완에게 부절을 주고, 익주자사를 겸임시켰다. 장완은 승진하여 대장군,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으며 안양정후(安陽亭候)로 봉해져 사실상 촉한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무렵 제갈량의 사망으로 촉한 내부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장완만큼은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맡은 일을 충실히 살피며 내부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나라 요동에서 공손씨들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인 연의 원년(238)에 유선이 장완에게 조서를 내렸다.

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고 있고, 조예(曹叡)는 교만하고 흉악한 사람이다. 요동의 세 군은 그의 포학함으로 고통 받아 서로 규합하여 그와는 떨어져 거리가 있게 되었다. 조예는 대군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또 서로 공격하여 토벌하도록 했다. 옛날, 진(秦)이 멸망한 것은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반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러한 변란은 하늘이 내려 준 좋은 기회이다. 그대는 전쟁 준비를 하여 군사들을 통솔해 한중에 주둔하고, 오나라의 행동을 기다렸다가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호응하여 틈을 타서 행동하라.


또 장완에게 부서를 개설하도록 명령했다. 다음해에 장완에게 대사마로 승진시켰다.

다만 장완은 제갈량과 같은 방식으로 북벌을 재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치가로서 장완의 재능은 제갈량에 버금갈 만했지만, 안타깝게도 실전 지휘관으로서는 크게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장완이 제갈량을 흉내내어 직접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농서를 침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북벌에 관하여 장완은 제갈량과는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기존의 북벌 루트는 워낙 길이 험하다보니 육로 보급이 어려웠다고 판단하여, 배를 많이 만들고 수로로도 보급이 가능한 위흥과 상용 쪽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말인즉 한중에서 농서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어 군량을 수송하기가 어려웠지만, 상용으로 가는 길은 한수(漢水)와 면수(沔水)의 물을 타고 내려갈 수 있으므로 군량을 보급하기가 비교적 쉽다는 것이다. 병력의 이동과 배치 및 수송을 인력이 아닌 선박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4]

제갈량 본인도 제1차 북벌 전 적의 방비가 굳세진 육로로 북벌을 행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어떻게든 상용을 얻으려고 하였고, 무력진압은 당시 촉의 사정으로는 어려웠었기에 그는 맹달을 회유했지만, 맹달은 차일피일 난을 일으키길 주저하면서 말을 바꾸고 있었기에 제갈량이 일부러 배반모의를 흘려 촉 쪽으로 확실히 배반하게 만들려 했음에도 배반시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사마의에게 걸려 전격전으로 초전박살나고 상용군을 얻으려는 계책은 단념되고 말았다. 장완은 그걸 직접 무력으로 탈취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더하여 장완 역시 공명과 뜻을 같이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손오에서 적절히 호응을 해준다면 조위의 세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다른 각료들이 강을 타고 올라간 후에 거슬러 퇴각하는 것이 어려워 패배했을 때 퇴로확보의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무엇보다 장완 본인의 지병이 심해져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였다.[5]

그리하여 후주는 장완에게 상서령 비의와 중감군 강유 등을 파견하여 조정에서 논의된 의견을 알렸다. 장완은 조정에서 논의된 의견을 접수한 이후에 비의 등과 상의하여 후주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였다. 이후 그는 후주에게 표를 올려 양주를 우선 공략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양주로 파견하여 이 지역을 도모하게 한 다음, 자신이 부에서 호응한다면, 반드시 양주를 점령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실제로 이러한 책략은 장완의 의지에 따라 추진 직전까지 갔으나 지병이 악화되어 그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되었다.

다음은 장완의 계획을 장완 본인이 설명한것이다.

세상에 만연한 독을 제거하고 재난을 없애는 것은 신의 직책이 처리할 일입니다. 신이 명령을 받아 한중에 주둔한 지 벌써 6년이 되었습니다. 신은 어리석고 무능하며 열병이 겹쳐 계획한 일을 실행할 수 없어 아침저녁으로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는 아홉 주를 차지하여 세력을 뻗히고 있어 제거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만일 동쪽과 서쪽이 힘을 합쳐 앞뒤로 호응한다면, 설령 뜻대로 신속하게 얻을 수는 없을지라도 잠시 영토를 분열하여 잠식하여 우선 그들의 부분적인 힘을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나라와는 출병 약속을 두세 차례 계속하여 연이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전진하는 것도 후퇴하는 것도 어려워 실로 침식을 잊게 합니다.

저는 비의 등과 이렇게 상의하였으므로 적군이 아끼는 곳이고, 게다가 강족과 호족은 갈증이 나는 한을 그리워하며, 또 과거 한 부대가 강족을 침입했을 때, 위의 옹주자사 곽회(郭淮) 가 패배하여 달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의 장, 단점을 헤아려 보면, 양주 점령을 우선으로 해야 되므로 응당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야만 합니다. 만일 강유가 출정하여 가서 하우(河右= 황하의 서쪽지역)를 제압한다면, 신은 군대를 인솔하여 강유의 뒤에서 계속 따라야 합니다. 지금 부현은 물길과 육로를 통해 사방으로 길이 통해 있으니,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호응할 수 있을 겁입니다. 만일 동북쪽으로 어떤 마비가 있다면, 앞으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서 장완이 북벌을 실행하기 위해 고려한 두 가지 요소를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농서 현지의 강족들과 연계한다는 책략이다. 이 당시 위나라의 통제를 받고 있던 강족들은 엄격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탓에 촉한과 협력하여 위나라를 공격할 의사가 있었다. 실제로 촉군과 강족의 협력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는 상황이 훗날 발생하기도 했는데, 바로 뒤에서 얘기할 강유가 강족과의 강한 연결을 가지고 있엇다.

두 번째는 실전 지휘에 임할 때의 촉군의 배치 문제였다. 이 당시 촉한에서 가장 출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장수를 대라면 강유가 있겠지만, 강유의 출신이나 관직 같은 여러 배경을 생각하면 그가 제갈량처럼 대군을 지휘하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가 따른다. 촉한의 전군을 통수할 수 있는 장완의 직권,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강유의 지휘능력.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점을 겸비하지 못한 탓에 북벌의 실행 여부와 규모에도 제동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에 장완은 실전 지휘를 강유가 전담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그의 뒤를 받치는 형태로 전쟁을 수행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지휘능력이 뛰어난 강유가 위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면, 대군을 거느린 장완이 해당 지역을 점거하고 촉한의 영토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전투로 인해 발생할 강유 휘하 부대의 손실은 장완이 지속적으로 메워줄 수 있어야 하는데, 다행히 지원 및 보급 업무에 대해서는 제갈량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은 만큼 아주 불가능한 작전은 아니라 할 것이다.

위의 표문이 올라간 뒤 강유가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양주자사(涼州刺史)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이번 건의는 유선이나 다른 신하들로부터도 현실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6] 이렇게 전략을 준비할 시기가 되자 왕평을 전감군(前監軍)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으로 임명하여 한중을 맡긴 뒤 장완 자신은 표문에 적었던 대로 부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장완이 심혈을 기울여 수립한 전략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앞서 상용을 공격하자는 계획을 내놓았을 때도 그의 발목을 잡았던 고질병이 부현에 주둔 한 이후 또 재발한 것이다. 병이 나으려는 기색도 없이 점차 심해지기만 하자 장완은 자신이 주도하는 군사행동을 전면 중단시키고, 상서령 비의를 대장군(大將軍)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아 자신을 대신해 군무와 정무를 총감독하도록 했다. 이렇게 장완 시절에는 대규모 북벌에 대한 계획이 여러차례 준비되고 있었지만 단 하나, 장완의 병이 문제였다.

연희 9년(246)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공(恭)이라 했다.

장완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실질적인 촉 내의 군정 1인자로서의 권력은 비의에게로 승계되었다. 장완의 작위는 장남인 장빈이 뒤를 이었는데, 훗날 위에서 촉 정벌을 단행했을 때 종회는 장빈에게 서신을 보내어 장완의 묘소에 예를 표하고 싶다면서 묘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장완의 묘가 있는 부현을 점령한 이후 정말로 묘에 직접 찾아가 예를 표하며 주변을 청소하였고 장완의 아들들도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의 인물됨과 관련하여 하나의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는 성격이 온화함을 넘어서 상당한 대인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농업 관련 관직을 맡고 있던 양민이란 사람이 농사 관련된 일로 그와 갈등이 생기자 "일하는 것이 어리석어 실로 이전 사람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비방했는데, 장완은 화를 내기는커녕 맞는 말이라 추궁할 수가 없다고 인정하였고, 휘하 관원이 과연 그가 일을 함에 있어서 어떤 점들이 어리석은지 따져보자는 제의도 거절했다. 게다가 후에 양민이 본인의 업무 실책으로 감옥에 가자 사람들이 평소의 그과 장완 사이의 관계를 미루어 그가 곧 죽을 것이라 했으나, 장완은 사심없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였고 양민은 중죄를 면하였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동조연 양희는 장완이 말을 걸어도 장완을 무시하였고, 이를 본 어떤 이가 양희에게 벌을 주자는 의견을 냈는데, 장완은 이에 대해서 자신(장완)과 찬성하면 양희 본인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반대 의견을 내면 장완의 허물을 드러내는 셈이되니 양회의 행동은 도리어 옳은 행동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화양국지에 따르면 장완의 치세에 촉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선정이 펼쳐졌다.

여담으로, 제갈량과 주고받은 글이 꽤나 된다. 사실 제갈량이 "강유마량 이상의 재능을 가진 양주(량주) 최고의 인물"이라고 칭찬하는 것도 장완한테 보낸 편지들 중에 있는 내용이다.


3. 연의[편집]


제갈량이 장완은 백리를 다스릴 인재가 아니라고 말한 대사가 방통을 두고 한 것으로 바뀌었다.

연의에서 장완은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는 동안 성도에서 후방 지원에 힘썼다. 그리고 읍참마속 에피소드에서도 마속의 처형을 말리려다가 실패하는 모습도 그대로 나오며, 이후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서 제갈량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다. 참고로 정사에서도 장완이 제갈량의 뒤를 이은 것은 맞지만 승상까지 되지는 않았다. 촉한에서 승상은 제갈량이 유일했고 이후 승상 자리는 공백이었다.


4. 미디어 믹스[편집]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편집]


장완(삼국지 시리즈) 문서 참조.


4.2. 영걸전 시리즈[편집]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비의와 함께 30레벨 발석차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무력 60/지력 85/통솔력 73이다. 제갈량이 주유의 조문을 간 직후에 양양에서 등용할 수 있다. 레벨이 상대적으로 등장 시기에 비해 낮은 편이지만 능력치가 상당히 준수하다. 이엄과 비슷한 만능형인데 무력이 좀 더 낮지만 지력이 더 높다. 하지만 노가다를 했을 경우 레벨이 낮아서 버려지고, 노가다를 안 할 경우에도 36레벨로 등장하는 이엄에게 레벨로도 능력치로도 밀린다. 지력이 85로 유비군 내에서 7번째로 높은 무장이지만 아쉽게도 영걸전에서 지력은 그리 중요한 능력치가 아니다. 필수적으로 참가하는 전투도 없는데다가 장완을 등용할지 말지 선택도 가능하는 등 여러모로 푸대접이다. 심지어 개인조형이 산적이다. 세트로 엮이는 비의보다야 낫지만.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식량대로 등장한다. 늦게 나오는 데다가 레벨이 꼴랑 25이고, 결정적으로 공명전에서는 식량대 자체가 별로 쓸모가 없다. 물론 노가다가 귀찮을 경우엔 쓸만 하지만, 노가다로 키울 경우 먼저 등용된 등지가 무력이 준수하고 잘 키울 경우 이미 20대 중반의 레벨일 가능성도 높다. 노가다를 막 했더라도 여개보다 훨씬 능력치가 좋은 물자대 비의에 비해 가치가 적다.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책사로 등장한다. 비의가 풍수사로 나오는 것과 대조된다. 비의(지력 80)와 마찬가지로 지력 미특화(지력 82)다.


4.3. 진삼국무쌍 시리즈[편집]


대대로 클론 무장. 후반기 인물들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6, 7편조차 촉 시나리오는 오장원에서 끝내버리는지라 나올 틈이 없다.

블라스트에서도 비의는 등장했지만 장완은 등장하지 못해서 언제나 정식 참전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사실 제갈량의 북벌 전선에 직접 참전하곤 했던 비의와 달리 장완은 대장군이 된 뒤에도 지병때문에 북벌 계획만 세우고 실행에는 옮기지 못해 결과적으로 전선에 직접 나간 적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코에이 게임 전체로 놓고 봐도 장완의 상용 기습책이 나온 건 미션이 빼곡한 삼국지 8 한 작품밖에 없다.


4.4.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편집]


파일:전략장완.png

여기에서도 등장한다.


4.5. 삼국전투기[편집]


달타냥의 모험의 아토스로 등장. 오장원 전투 (5)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소개컷에는 능력치 자체는 떨어지지만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성품을 지녔다고 묘사된다.

남만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양옹의 조언으로 보좌관들을 구하기로 한 제갈양에 의해 본격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석양 전투~상용 전투 편에서는 제갈양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맹달을 다시 끌어들여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배신자라고 치를 떠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제갈양이 상용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자 납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한 번 배신했던 맹달이 다시 돌아오려 할 지 의문을 표하기도 했으며, 이에 제갈양이 그의 포지션이 불안해졌으니 충분히 돌려세울 수 있다고 설명해 주기도 했다.

오장원 전투 편에서는 제갈양의 사망 당시 제갈양이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오히려 체계가 안정됐다고 놀라워하는 모습으로 1컷 등장했다.

이후 위연과 양의가 서로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거의 동시에 성도에 표를 보냈을 때는 유선이 도대체 누구 말이 옳냐고 황당해하자 동윤과 더불어 위연의 주장은 너무 앞뒤가 안 맞는다고 말했다. 위연의 선봉대는 어차피 최정예라 양의가 정말 반란을 일으켰다면 그냥 정면으로 때려잡아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이에 유선이 그럼 위연이 반란을 일으킨 거냐고 당황하자 동윤과 더불어 위연의 행보는 반란을 생각한 것 치고는 애매하다고 말한 뒤 일단 양의에게 위연과 이야기해 보라고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는 일단 이야기해보고 안 되면 토벌하라고 썼지만 양의는 이야기해보라는 부분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토벌을 결정했다.

위연이 잡히며 상황이 종료된 후에는 양의를 중군사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 모두 양의의 편협함을 파악했기에 병사는 주지 않았다.

제갈양 사후 촉의 국사를 책임지게 되었으며, 그는 특출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제갈양의 유지를 잘 수행할 수 있었고 제갈양 사후 어지러운 정세를 금방 바로잡으며 민심을 수습했다고 묘사된다.

전투외편 2편에서는 239년 기준 대사마로 황제 유선에 이은 촉의 파워 랭킹 2위로 묘사된다.

작피 전투 편에서는 위가 개판이 된 틈을 타 다시 한 번 북벌에 시동을 걸기로 하고 강유와 함께 북벌에 대해 논의한다. 이제까지의 한중 방면을 통한 북벌에서는 험난한 지세로 인한 보급 곤란이 문제가 되었었다는 점을 인식하였기에 아예 방향을 바꿔 수로를 통해 성도에서 직접 상용과 위흥을 노려 보자고 강유에게 제안했다. 강유는 자신들 쪽이 불리할 거라며 난색을 표했지만 장완은 이미 한중 쪽에서 수 차례의 실패를 거듭했으니 변화를 가질 이유는 충분하다고 말하였고, 동시에 다른 방면으로도 공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면 한중 쪽에서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다고 강유를 설득했다.

그리고 제대로 허를 찌르려면 노선의 변화가 없음을 보여 줘야 하니 강유에게 지금까지의 루트대로인 천수, 농서 방면으로 위를 한 번 찔러 보라고 명했다. 수비가 허술해 보이면 갈 수 있을 때까지 가 봐도 좋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게 낙곡 전투 편에서 수로를 통한 북벌을 진행하려 했으나, 장완의 지병이 도지는 바람에 계획이 계속 지연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고 묘사된다.

장완이 쓰러진 틈을 타 위군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기도 했고, 왕평 등의 활약으로 이는 잘 막아냈지만, 장완의 상태는 더 나빠져 오늘 내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승을 거둔 촉에서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고 묘사되기도 했다.

그리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전투외편 3편에서 사망처리 된다.


5. 둘러보기[편집]


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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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토리는 물론 백리지재 운운까지 연의에서 방통의 등용 일화로 알려진 바로 그 대목이다![2] 연의에서 위연이 '머리에 뿔이 돋는 꿈'을 해몽해달라고 부탁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3] 제갈량 사후 촉군의 퇴각을 지휘했던 양의는 자기가 제갈량의 후계자라고 단단히 착각했고 이 때문에 불손한 발언을 하다 제거된다. 양의와 사이가 나쁜 위연 역시 똑같은 착각을 하고 퇴각을 반발하다 촉군을 전멸의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장완이 신속히 토벌군을 이끌고 나섰으며, 왕평이 위연의 군사들을 꾸짖어 순식간에 부하들에게 버림받은 위연은 기반이 있는 한중으로 달아나다 마대에 의해 자식들과 같이 죽임을 당한다.[4] 상용 급습 계획은 결국 천 년 후 몽골제국이 써먹는다. 금나라가 우주방어를 하며 하남을 수비하였기 때문에 뚫기 어려워지자, 오고타이는 동생 툴루이를 보내어 안강(상용의 당시 이름) 을 거쳐 한수를 거슬러내려가 금나라의 뒤를 치게 했고, 금군은 이를 막으려다 정예병이 모두 녹아내리면서 사실상 그것으로 멸망한다.[5] 화양국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희 5년(242년) 봄 정월 강유가 한중으로부터 돌아와 (장완이 있는) 부현(涪縣)에 주둔했다. 대사마 장완은 승상 제갈량이 수차례 진천에 들어가서 이기지 못한 것을 이유로 면(沔)수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서 3군(상용)을 정벌하려고 했다.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안남장군 마충이 건녕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이로 인해 한중에 이르러 장완에게 황제의 조서를 선포했다. 장완 또한 연이어 병에 걸리자 계획을 그만뒀다.'[6] 몇몇 이들은 제갈량 사후 촉한이 한조계승의 대의가 약해지고 따라서 장완의 계획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장완이 상용급습을 포기하고 새로 세운 이 계획 자체가 실질적으로 제갈량의 옹양주 겸병 계획과 같다는 점에서 그것은 그들 몇몇 이들 만의 착각일 뿐이고 단지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단 촉한내에서 절대적 위상을 가지고 있던 제갈량의 북벌 정책을 계승하는게 더 낫다는 당시 촉한 신료들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으로 봐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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