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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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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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
魏延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igen_II.jpg}}}
위연석소상
작위
도정후(都亭侯) → 남정후(南鄭侯)
관직
전군사(前軍師) 겸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겸 가절(假節)
성씨
(魏)

(延)

문장(文長)
생몰
?년 ~ 234년
고향
형주 의양군(義陽郡)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촉한,(유비→유선),
아문장군(牙門將軍)
독한중(督漢中) 겸 한중태수(漢中太守) 겸 진원장군(鎭遠將軍)
진북장군(鎭北將軍)
진북장군(鎭北將軍) 겸 독전부(督前部) 영 승상사마(領 丞相司馬) 겸 양주자사(涼州刺史)
전군사(前軍師) 겸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겸 가절(假節)



1. 개요
2. 정사
2.1. 생애
2.2. 평가
2.2.1. 긍정
2.2.2. 부정
3. 연의
4. 기타
5.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는 문장(文長)이며 형주 북부 신야 의양 사람으로 등애, 등지와 동향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사졸을 잘 기르고 용맹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많은 공적을 쌓았지만, 성격이 지나치고 자만하였으므로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했고 최후에 화를 자초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발짝 더 나아가 등장부터 옛 주인을 배반하는 반골의 상으로서 제갈량의 죽음에 책임이 있도록 각색되었다.


2. 정사[편집]



2.1. 생애[편집]



2.1.1. 초기[편집]


위연은 본래 유비부곡(部曲)이었다.[1] 일개 병졸에서 시작하여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으므로 자수성가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입촉 후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아문장군(牙門將軍)에 오르고, 한중을 수비하는 독한중(督漢中)으로 발탁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장비가 될 것이라 보았고, 장비 또한 스스로 임명될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유비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여러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위연에게

"이제 경에게 중임을 맡기노니 어떻게 하시겠소?"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하고 물었다. 이에 위연은

"조조가 천하를 들어 쳐들어온다면 편장이 십만 군사로 삼켜버리도록 청합니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하였다. 이에 유비가 칭찬하고 사람들이 높이 여겼다. 발표 직전의 중론은 전공으로 보나 연공서열로 보나 어디로 봐도 장비가 마땅하단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어찌보면 파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는 일인데 이미 장비는 파서태수로서 익주 후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는 서주와 형주 시절 관우가 맡던 역할로 유비는 서주에 있을 때 처음에는 장비에게 서주를 진수시켰으나 그가 조표와의 불화 및 여포의 배반으로 서주를 잃은 후에 다시 서주를 찾은 2차 서주 시기와, 남군 공방전 후 형남 지역을 얻고 본인이 익주 정벌 때는 후방이 된 형주를 관우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 관우가 익주 점령 시점 때 형주를 진수받으며 형주는 후방이 아닌 전방 교두보 지역이 됐고, 이제부터 익주가 후방이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후방 담당을 할 인물이 빠지자 익주 정벌 때부터 장합 격파 등의 굵직한 활약을 보인 장비에게 다시 후방 담당을 일임하며 그에 대한 신뢰를 다시금 재확인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제갈량이나 마초를 제외한 다른 1세대 장수들이 모두 고령에 가까워지고, 담당할 영역도 늘어났는데 계속해서 그들만 부담시킬 수 없으니 2세대 장수들의 기용 비중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 점에서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눈도장을 찍은 위연을 적임자라고 판단해 파격 승진을 시킨 걸로 보인다. 조조가 한중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지만 한중 공방전 직후였던만큼 한중의 빠른 안정을 위해 유비군 본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에 위연이 한중을 완전히 책임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나, 독한중이 낮은 자리라고 볼 수는 없다.

이때까지 위연은 유비의 직속 부하로서 계급이 착착 올라가면서 중임을 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21년에는 진북장군(鎭北將軍)에 제수되었고, 223년에는 도정후(都亭侯)에 올랐다.


2.1.2. 제갈량의 북벌[편집]


223년에 유비가 사망하고 극적으로 촉한을 재건하고 남중을 평정하여 후환을 예방한 제갈량은 건흥 5년(227년), 위연을 독전부(督前部), 영(領) 승상 사마(丞相司馬), 량주자사(涼州刺史)로 삼았다. 이는 북벌을 위한 사전준비로 적국 영토의 자사나 태수로 임명하는 건 전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제갈량이 이 중요한 국가적 중대사업에 위연을 중용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쳤음을 알 수 있다. 위연이 군부의 중핵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건국자 유비를 비롯한 관장마황이 1차 북벌 이전 세상을 떠나고, 조운도 1차 북벌 후 세상을 떠나며 1세대가 모두 퇴장하자 북벌 종군 장수 중 자연스럽게 최고참 반열에 오르며 중핵이 된 위연은 입지가 상승하면서 발언권도 강해져서인지 위략에서는 이 무렵부터 제갈량이 출정할 때마다 자오곡 계책을 제안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제갈량이 매번 거절하였는데, 위연은 대놓고 제갈량에게 늘 겁이 많다고 디스를 날렸고(延常謂亮為怯)[2], 자신의 재주가 쓰이지 못함을 한탄했다.

촉은 229년까지 세 차례 북벌을 일으키고, 230년에는 에서 조진이 주도하여 남정하며 자오곡을 포함한 세 갈래로 공격해 왔으나 때마침 쏟아진 폭우로 아무것도 못하고 퇴각했는데, 이때 위연은 제갈량의 명을 받고 오의와 함께 강중으로 출진해 비요, 곽회 등의 군사를 대파하는 전공을 세운다.[3] 이 공로로 전군사(前軍師)) 겸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에 올랐으며 남정후(南鄭侯)에 봉해졌다.

231년 제4차 북벌 때, 제갈량은 농서로 진출하여 상규의 보리를 두고 대치하다 노성에서 한 차례 접전을 펼쳤다.『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의 명을 받고 위연이 오반, 고상과 함께 출진하여 사마의가 지휘하는 위군을 격파하고 3천의 수급을 얻었다. 이 공로 덕분인지 위연은 정서대장군에 오를때 받은 가절이 사지절로 승급되며 권한이 늘었다.[4] 이 전투의 결과는 『진서』 〈선제기〉와 『한진춘추』가 각기 전하는 바가 다른데, 『진서』 〈선제기〉는 위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기술한 반면 『한진춘추』에는 촉군이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성 전투 문서 참고.

그의 경력상 최고의 전성기였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인간관계는 최악이었는데 상술한 것처럼 상관인 제갈량을 모독하고, 앙숙인 양의와 논쟁 도중 화를 참지 못하고 칼을 꺼내 위협한 일, 유염이라는 유비의 예주 시절 때부터 따르던 인물과 불화를 일으키자 제갈량이 유염을 질책하여 사죄하게 하고 성도로 돌려보내는 등 사적으로는 제대로 된 처신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들을 보였다.



2.1.3. 최후[편집]


234년, 제5차 북벌 중 위독해진 제갈량은 장사 양의, 사마 비의, 호군 강유를 불러 자신이 죽고 난 뒤 철군할 것을 명했고, 위연에겐 후발을 맡도록 했다.[5] 제갈량은 위연이 명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바로 군을 출발하라고 말했고, 이 때문에 양의는 위연에게 비의를 보내 속마음을 떠보게 했다. 그런데 위연이 말하길;

"승상이 비록 죽었다고 하나 나는 건재하오. 승상부에 가까운 관속들은 곧바로 시신을 모시고 돌아가서 장례를 지내야 할 것이나, 나는 모름지기 제군을 이끌고 적을 공격해야 하오. 어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일을 그만두라 하시오? 더군다나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이기에 양의가 부륵[6]

하는 바에 따라 뒤를 끊는 장수 노릇이나 하겠소!"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하며 군령을 거스르고 비의와 함께 떠날 부대와, 남아서 자신이 이끌 부대를 나눈 뒤, 비의에게 친필로 서명하게 해 제장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단순히 앙숙 양의를 따르기 싫다는 핑계를 넘어 아예 제갈량의 최종 군령을 거부하는 걸로 부족해 군 통수권을 이양받은 것도 아닌데 마치 이미 자기가 군 통수권자가 된 마냥 이리했다는 것은 혼자 김칫국 마시는 행위나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파멸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연히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알아차렸을 비의는 동의하는 척하면서

"마땅히 자네를 위하여 가서 양 장사(長史)를 설득하겠소. 장사는 문관이라 군사(軍事)에는 어두우니, 반드시 자네의 말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라 말하며 위연을 속인 뒤 빠져나와 말을 타고 떠났고, 뒤늦게 위연이 후회하여 뒤쫓았으나 잡을 수 없었다.

위연이 척후를 보내 엿보게 했는데 여러 군들이 차례대로 군사를 물리고 있었다. 이때 위연은 화를 이기지 못하여 직속부대를 이끌고 양의보다 먼저 남하했고, 촉으로 통하는 잔도를 불태워 끊어 버렸다. 과거 초한전쟁 시기 유방항우의 의심을 피하려면 잔도를 불태우라는 장량의 진언에 따라 실제로 불태운 적이 있는데, 비록 항우를 속이는데 성공했지만 아군 제장들 중에도 정말 꼼짝없이 익주에 고립되어버렸다고 믿고 절망하거나 아예 이탈자들이 속출하는 일이 벌어졌고, 유방 본인도 낙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수백년 후 촉한의 북벌 역시 이 잔도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위연 때문에 7 ~ 8만의 본대가 적지에 고립되고 만 것이다.[7]

그리고 위연과 양의는 서로 반역했다며 표를 올렸는데, 누구의 서신이 먼저 도착했는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하루 차이로 도착했다고 한다. 유선은 시중 동윤과 유부장사 장완에게 진위를 물었는데 둘 모두 양의를 보증하고 위연을 의심하였고, 장완이 수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모아 출정하였다.

촉군 본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잔도를 급조해 침착하게 나아갔는데, 위연이 먼저 도착해 남곡구를 점거하고 군을 보내 본대를 역격[8]했다. 이미 아군의 길을 막아 고립시킨 것만으로도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닌데 아예 공격까지 함으로서 더 이상은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스스로 몸을 던져버린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촉군 본대와 위연의 직속부대가 대치하게 되자 양의 등은 왕평을 앞에 세워 위연을 막았다. 왕평이 위연의 선봉대를 만나자 이렇게 외치며 꾸짖었다;

"공(公: 제갈량)이 돌아가셔서 그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거늘, 네놈들은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그러자 위연의 사졸들이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고 명을 받들지 않으니 곧 온 군이 모두 달아났다. 여예전에 보면, 제갈량이 죽고 달아났던 병사들이 군에 가기 싫어 호적과 이름을 위조하다가 여예가 시정하였는데, 위연이 이끌던 군세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을 생각하면 이 병사들일 가능성이 있다.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위연은 아들들과 함께 자신의 세력권인 한중으로 달아났는데 양의가 마대를 보내 추격하게 하고 이윽고 붙잡아 참수했다. 양의는 위연의 수급을 보자 일어서서 짓밟으며

"이 하찮은 종놈아! 이래도 못된 짓을 할 수 있겠느냐!"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하고, 나서서 삼족을 멸했다. 양의가 선을 넘는 행동을 했지만[9] 어쨌든 촉군은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2.2. 평가[편집]


延旣善養士卒, 勇猛過人, 又性矜高, 當時皆避下之. 唯楊儀不假借延, 延以爲至忿, 有如水火。

위연은 일찍이 사졸을 잘 길렀고, 다른 이들보다 용맹하였으나, 지나쳐 성품이 거만하고 뽐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하고 양보했다. 오직 양의만이 위연에게 가차없어, 위연이 분노하니 마치 물불 같았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亮深惜儀之才幹,憑魏延之驍勇,常恨二人之不平,不忍有所偏廢也。

제갈량은 양의의 재간을 깊이 아끼고, 위연의 효용에 기대니, 언제나 두 사람이 화목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며 어느 한 쪽을 폐하지 못하였다.[10]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魏延以勇略任, ⋯ 覽其擧措, 跡其規矩, 招禍取咎, 無不自己也。

위연은 용략으로 임하였고, ⋯ 이들 모두가 귀중하였다. 행동거지를 살펴 예법을 되짚어 보건대, 화를 부르고 허물을 취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하지 않은 것이 없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11]



2.2.1. 긍정[편집]


위연은 부곡의 낮은 신분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입지전적한 인물이고, 사졸을 잘 길렀다는 평을 보아 군대 양성에도 능하였다.[12] 또 230년에 오의와 함께 양계에서 곽회, 비요를 격파하고 231년에 고상, 오반과 사마의를 대파하였는데, 이 두 전투는 만만치 않은 적장임에도 거둔 제갈량 생전 최대의 전공이었다.

중국의 근대 사학자 여사면은 "위연의 북벌 의지는 비교적 굳건한 것이었다. 오로지 제갈량이 죽을 날만 바라보며, 전군을 철수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만약 제갈량이 죽고 위연이 병권을 장악했다면, 장완이나 비의 같은 사람은 따르지 않았을 것이나, 그 성패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위연의 죽음은 촉한의 일대 손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정사의 저자 진수는 위연이 위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한중으로 달아난 행보가 그가 반역자는 아니라고 여겼는지 유팽요이위양유전에서 아래와 같이 변호해줬다.

原延意不北降魏而南還者,但欲除殺儀等。平日諸將素不同,冀時論必當以代亮。本指如此。不便背叛。

원래 위연의 뜻은 북쪽 위나라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고, 남쪽으로 돌아오되 다만 양의 무리를 죽이고자 할 뿐이었다. 평시 제장들의 뜻이 서로 같지 않았으므로, 시론[13]

이 반드시 (자기가) 제갈량을 대신하여야 하길 바란 것이다. 본뜻이 이와 같았으니 배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제갈량이 병들자 위연 등에게 말했다, “내가 죽은 뒤에 다만 삼가며 스스로 지킬 뿐 다시 (공격하러) 오지 말라.” 위연에게 자신의 사무를 섭행(攝行-대행)하도록 명하고 은밀히 상여를 지니고 떠나게 했다. 마침내 위연이 이를 숨겨 포구(褒口)에 도착하고 이내 발상했다. 제갈량의 장사 양의는 예전부터 위연과 불화했는데, 위연이 군사를 섭행(攝行)하게 되자 해를 입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부풀려서 말하길 위연이 군사를 들어 북쪽에 귀부하려 한다고 하고 마침내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본래 이런 마음이 없었으니 싸우지 않고 군이 패주했는데 이를 추격하여 위연을 죽였다.

위략[14]


정사 삼국지』와 『위략』 모두가 일관되게 위연의 뜻이 반란이 아니며 위국에 귀부할 생각도 없었다고 옹호해주고 있다.

더불어 『위략』에도 나와있듯 동정적인 여론이 셌던 것으로 보인다.[15] 군부 최고참이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몰락했다는 겉으로만 드러난 정보만으로는 적국에서 보아도 동정 여론이 생길 여지는 있다.


2.2.2. 부정[편집]


그의 성격 및 처세가 지적된다. 거만한 성격으로 주변과 매우 사이가 나빴다. 진수도 그가 반란할 뜻은 없었을거라고 변호해줬지만 성격과 처신 문제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스스로 자초했다는 지적을 남겼으며, 그의 이런 면모는 제갈량과 비의, 위연 본인, 앙숙 양의 등의 기록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양의와는 틈만 나면 서로 다퉈대다보니 제갈량은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공정하게 중립을 지키며 둘이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통제하면서 자기가 없을 때는 비의가 중재를 했고, 감척론이라는 글까지 지어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일렀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16] 물론 그냥 성격 및 인간관계만 나쁘고 군인으로서 역할을 제갈량 사후에도 충실히 했다면 경력과 위치를 감안했을 때 계속 중역을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의 최종 명령을 거부, 동료 납치 구금 시도, 탈영, 거짓 상서로 국가 내부에 혼란 유도, 아군의 퇴로를 끊고 팀킬 시도 등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위연은 돌이킬 수 없게 선을 넘어버렸다. 당연하지만 이런 행보를 보인 시점에서 적국에 투항을 하지 않았다지만 상기된 행보를 통해 내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가 결코 충의지사라고는 할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17]

비의가 오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손권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이때 손권은 위연과 양의를 나란히 디스한 적이 있다.

양의와 위연은 소치는 목동이어서 일찍이 당시 해야할 일에 있어서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정도의 보탬을 주었지만(=즉 활동이 미비했다는 말) 그들에게 일을 맡겼으니 가볍게 취급할 수 없다. 만약 어느날에 제갈량이 없게 되면 반드시 화란이 일어날 것인데, 제군은 심란하기만 하여 이런 일에서 생기는 염려를 막을 줄도 모르는데 어찌 자손에게까지 끼칠 꾀를 내겠는가?


비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양의와 위연이 협조를 하지 못하는 것은 사사로운 분노로 인한것 뿐이고 경포나 한신처럼 황제를 어렵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강적을 소제하고 화하를 하나로 하는데 있어서 공로는 재주를 가지고 이룩하고, 업적은 재주로 말미암아서 넓어지는 것이니 만약 이 사람들을 버리고 맡기지 않는다면 그들의 후환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풍파를 막으려다가 거꾸로 배를 못 쓰게 하는 것과 같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손권이 '둘 다 성격이 개판인데 당장은 급해서 제갈량이 써먹고 있긴 한데 제갈량 없어지면 문제 생기지 않겠냐?'고 묻고, 비의는 '두 사람의 문제는 단순 성격 탓일 뿐 당장의 강적(위나라)을 상대하는데 도움이 되는데 어찌 안 쓰겠나'라고 반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둘 다 맞는 말이었다. 당장은 저 둘의 재능이 중히 쓰이긴 했고, 제갈량이 없어지자 정말로 순식간에 둘 다 차례로 문제를 일으키며 피해를 입히고 자멸해버린 것.[18] 사실 둘의 대체제는 있었으나 그 둘보다 일찍 죽은 게 문제였다. 양의 대신 마량을 쓰면 되었지만 마량은 이릉대전에서 전사해버렸고 위연 대신 조운을 쓰면 되었지만 조운은 나이가 너무 많아 저 시점에서는 이미 노환으로 사망해서 천수를 넘어가 버린 상황이었다.[19]

양희는 『계한보신찬』에서 "문장[20]은 강직하고 용맹하며, 어려움에 임하여 명령을 받아 외적을 막아 싸우고 국경을 지켰다. 그러나 협력하지도 않았고, 조화를 이루지도 않았으며, 절개를 잊고 반란의 뜻을 언급했다. 그래서 최후의 행동은 증오를 받았고, 최초의 공적은 아낌을 받았는데, 이것은 실로 그의 본성이었다."라고 언급했으며, 호삼성은 『자치통감』에 음주를 달면서 "위연이 비록 반역할 뜻을 갖고 있지는 않았어도 그에게 보정(輔政)을 맡겼다면 촉한의 멸망을 재촉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위연은 군인으로서 능력은 우수했을지언정 치명적인 성격적 단점이 원인이 되어 스스로 화를 자초한 장단점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 인물이다. 위연의 기록이 적힌 유팽요이유위양전(劉彭廖李劉魏楊傳)에 포함된 인물들은 각자 역할 및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잘못된 처신이나 성격 문제 등으로 인해 화를 자초하여 죽거나 쓸쓸한 말로를 보낸 인물들을 엮어놓았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위연과 같은 이유로 최후를 맞이한 경우는 역사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니 조직활동은 개인의 능력과 지위만 아니라 인망도 중요하다는 사례 중 하나다.[21]


3. 연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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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 짤방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를 패러디한 위연이다.

생김새는 관우와 비슷하게 나오는데 얼굴이 대춧빛, 신장이 9척으로 묘사된다. 성격이 오만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가정본에서는 대놓고 관우와 닮았다고 묘사하지만, 모종강본에서는 반란분자인 위연이 충의지사인 관우와 닮았다는 사실이 불쾌했는지 이러한 문구를 삭제하고 신장도 8척으로 너프시켰다.

연의에서는 수혜자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피해자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평면적인 인물들과 차별화되는 이른바 반골의 상으로 인하여, 고전소설 답지않게 세심하게 복선을 깔고 묘사에 신경을 많이 쓴 입체적인 캐릭터다. 2세대 촉장들은 오호대장군과 그 후손들에 밀려 묻혀버린 케이스가 많은데, 조조를 활로 쏴서 이빨 몇 개를 부러뜨리고 낙마시킨 뒤 목을 베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휘하장수들의 반격으로 물러나는 장면도 있고, 일기토 전력도 꽤 화려한 버프를 받았다. 왕쌍을 베어버리는 등, 전반적으로 보자면 굉장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내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인물.

정사에서는 본래 유비의 부곡 출신이었다는 것과는 달리, 왠지 다른 진영에 있는데 뜬금없이 엄청난 유비빠 짓을 반복하면서 상당히 인상적인 등장을 반복한다.[22]

유표 사후 유비가 백성들을 이끌고 형주성 앞에 도달했을 때 유종군의 일원으로 첫 등장한다. 이때 채모와 싸우며 유비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하나 실패한다. 유비는 갈 길이 급하고 형주성을 놓고 싸우고 싶지 않아 장판파 쪽으로 도망가버리고, 위연은 유비를 따라가려고 하니 뒤쳐저벼렸고 반란을 일으킨 만큼 형주에 남을 수도 없어서, 남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선택한다.

여기서 장사태수 한현의 수하로 있다가, 유비가 형남 4군 평정에 나서자 관우황충의 대결이 벌어진다. 한현이 황충을 오해하여 처형하려 하자, 의로운 장군을 죽이려는 처사에 분개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한현을 죽이고 유비에게 투항한다.

관우군이 겨우 500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장사 함락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분명 위연이었다. 이렇게, 환대를 받으며 유비 진영에 합류하는 듯 했는데, 별안간 제갈량에게 "반골의 상이 있다."며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다. 제갈량은 위연의 불충불의한 배신행각(형주에 대한), 그리고 관상을 보니 훗날 반드시 반역을 꾀할 상이니,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비의 만류로 살아난다. 이는 범증유비의 일화를 합친 것으로 보인다.[23]

아무튼, 유비군의 일원이 되어서 입촉과 한중 공방전 때 공을 세우고 오호대장군 다음 가는 위치가 된다. 하지만 공격적이고 전공 욕심이 강해서 냉포와 싸울 때 황충과 공을 놓고 살짝 마찰을 빚기도 했고, 가맹관 전투 때는 마대의 계략에 말려 부상을 입었다. 또 제갈량이 자오곡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걸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래도 후기의 필두 명장으로 대접받아 공적도 많이 세운다.

삼국지연의 가정본에 달린 주석에는 제갈량이 상방곡에서 계획적으로 위연도 사마의 부자와 함께 죽이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연히 나관중이 만든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누군가가 덧붙인 팬픽 이야기에 불과하기에 모종강본에서는 당연히 그런 묘사를 무시했다.

그런데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자신의 목숨을 연장시키려고 북두칠성에 기도를 하는 가운데, 위군이 습격해오자 장막에 들어오지 말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헐레벌떡 들어갔다가 그만 기도를 망쳐버린다. 제갈량은 의식이 실패했음을 알고 안타까움에 한탄하며, 다른 촉장들은 위연을 죽여버리자고 분노하는데 제갈량은 결국 위연이 들어온 것도 하늘의 뜻이었다며 위연을 용서해준다. 제갈량 사후, 퇴각을 하다가 정사와 비슷하게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마대를 끌어들여서 일을 꾸민다.

최후도 굉장히 극적한데, 제갈량은 죽기 전 "위연이 모반하거든 열어보라."며 지령이 담긴 주머니를 양의에게 남겼다. 양의는 반란을 일으킨 위연을 만나러 가서, 주머니에 든 지령대로 위연에게 "누가 나를 죽이겠는가?"라고 세 번만 말하면 군권을 위연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위연은 코웃음을 치며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는가?"라고 소리치자, 제갈량의 밀명을 받고 위연의 부하인 척 위장잠입했던 마대"내가 너를 죽이겠다!"라며 득달같이 달려와서 목을 베어버렸다.

원래 반란을 일으킨 수장은 삼족을 멸해야 하나 유선은 역도인 위연의 과거 공을 보아 그를 장례지내주었는데, 급박한 상황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위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충절을 보아 사후 대접을 후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오나라 군주 손권도 정사와 동일하게 위연이 용맹하지만 마음은 바르지 못하다고 깐다.

여담으로 일기토로 사마의에게 패한 적이 있다. 물론 진짜 실력으로 패했다기보다는, 호로곡 전투 이전 사마의를 유인하려고 일부러 일기토를 건 뒤 달아난 것이지만, 연의상에선 문관의 이미지로 나온 사마의가 일기토에 직접 응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게다가 사마의는 후반부 촉나라 무력 원탑인 위연이 거짓패배해서 도망가자, 추호의 의심도 없이 추격하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마의는 자신의 무예에 자신이 있었던 걸까? 결국 결론은 이하 둘 중 하나로 귀결되는데: 1. 위연은 일기토로 사마의를 해치울 자신이 없어서 제갈량의 계책을 집행했으며 위연이 사마의에게 패배해도 납득이 갈 정도로 사마의의 무력이 높았거나 2. 사마의가 무력 허접인데 위연은 상바보라서 쉽게 사마의를 해치울 기회를 버렸고, 사마의도 상바보라서 너무 뻔한 유인책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전자든 후자든 둘다 말이 안된다. 하여 현대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삼국지 매체에서 일기토 부분을 삭제한다. 현대에서 굳혀진 문관 사마의의 이미지도 크고, 창작임을 감안해도 사마의의 일기토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4. 기타[편집]


"승상께서 돌아가셨을 때 내가 군을 이끌고 위씨(魏氏)에 갔다면 내가 어찌 이리도 몰락했겠소! 스스로 꾸짖어 봤자 다시 미칠 수 없소이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 뒷날 양의는 군을 이끌고 돌아왔으며 위연을 토벌했기에 스스로 공이 매우 크다고 여겼다. 그러나 제갈량은 위연과 양의의 능력을 아끼고 중재하며 신경써주기는 했어도 둘 중 어느쪽도 자신의 후임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자신의 후임을 장완으로 두었으며[24], 따라서 장완이 상서령, 익주자사를 겸했고 양의는 중군사에 임명되었으나 허울 뿐인 직책이었으므로, 양의는 스스로 장완보다 낫다고 생각하였기에 언제나 울분을 이기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양의의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인품이 후덕하며 제갈량의 중재대리 역할을 해주던 비의만이 유일하게 가서 위로하였다.그러나 정신을 못차린 양의는 비의를 만나서 원망하며 위처럼 얘기하였다가, 이런 헛소리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한 비의가 이를 일러서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유배 보냈는데, 이때 위씨(魏氏)가 위연을 뜻하는 것인지, 위나라를 뜻하는 것인지 논쟁이 있었다. 시체를 능욕하고 삼족까지 죽인 양의가 높은 자리에 못 올랐다며 느닷없이 위연을 따를까 후회했던 것은 개연성이 없으므로, 위씨는 위나라를 뜻한다는 것이 중론이다.[25] 결국 동족혐오로 서로를 싫어하던 두 앙숙은 똑같은 착각에 빠져 나란히 자멸이자 공멸했다는 공통점을 낳았다.

  • 한때 파성넷 등지에서 "반평생 중원을 떠돌다 주공을 만났고 이제야 그를 위해 죽는다. 미망이 있고 여한이 있겠느냐만, 다만 허도의 흙을 주공의 토봉에 뿌리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일 뿐이로다."라는 말이 위연의 유언으로 떠돌은 적 있었다.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해서 논란이 일었었다.[26]

  • 중국 현지에서도 꽤나 인지도가 있어서인지 그를 모신 사당도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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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신둥현에 있는 위연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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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있는 위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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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있는 위연상

  • 마오쩌둥은 군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양상쿤을 두고 "그는 위연이다!" 하면서 숙청했고, 양상쿤은 실각했다가 덩샤오핑 때 돌아와서 실권이 없는 국가주석을 맡는다. 여담이지만 덩샤오핑도 자신에게 버금갔던 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양상쿤을 엄청나게 견제했다고 한다.


5. 미디어 믹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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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곡의 뜻이 노예, 노비를 포함하기 때문에 천민에서 출세하였다고 오해할 수 있으나,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남북조시대 이후이고 후한 시기 부곡은 사병을 뜻한다.[2] 직속상관이자 군 최고통수권자에게 사실상 겁쟁이라고 말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3] 훗날 곽회가 관중을 총괄하면서 촉한의 북벌을 아주 순조롭게 상대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 곽회를 격파한 위연의 군사적 역량은 상당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4] 이엄을 탄핵하는 표문에서 확인된다.[5] 한편 『위략』은 제갈량이 위연 등에게 "내가 죽은 뒤에 삼갈 뿐 다신 오지 말라." 하며 위연에게 자신의 사무와 장례를 은밀히 맡겼는데, 위연이 이를 숨겨 포구에서 발상했다. 이때 사이가 좋지 않은 양의가 위연이 위에 귀부하려 한다고 모함하며 자신의 군사로 공격하였고, 위연은 배반의 뜻이 없었으므로 싸우지 않고 패주했는데 양의가 위연을 뒤쫓아 죽였다고 전한다. 배송지는 이는 적국에서 전해 들은 말로 보이니, 본전과 논하여 살펴 알 수는 없다고 하였다. 다만 『자치통감』에서는 본전의 기록을 따랐다.[6] 部勒, 부서를 정하여 인원을 배치하거나 혹은 부대를 나누어 인원수를 갖춤. #[7] 기록으로 미루어 제갈량이 지휘하는 촉군 본대와 연계를 위해 따로 주둔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8] 逆擊, 자기 편을 치려고 향(向)하여 오는 군사(軍士)를 맞받아 침. #[9] 위연이 내란을 획책했다가 실패하여 그 자신과 자식들이 죽임을 당한 건 자업자득이지만 남은 삼족에 대한 처분은 국가에서 진행하고 결정할 일인데 양의가 독단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건 그가 자기가 제갈량의 정식 후계자니까 그래도 된다는 대단한 착각에서 나온 만행이다.[10] 화양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어느 하나를 편들지 않고 감척론(甘戚論)이라는 글까지 지어 두 사람을 깨우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11] 출처: 파성넷[12] 위연의 사졸들은 왕평의 꾸짖음으로 흩어진 일, 그리고 전술했듯 여예전에서 제갈량이 죽고 난 뒤 군이 달아난 일에서 2번 언급되는데, 따로 언급될 정도면 규모도 상당하고 꽤 정예 부대였던 것 같다.[13] 時論, 한 시대의 여론. #[14] 출처: 파성넷[15] 물론 배송지가 말했듯 어느 것이 사실인진 알 수 없다. 그러나 적국인 위나라에서는 이렇게 알려져 있었다는 말이다.[16] 대표적으로 어느 날에는 앙숙 양의와 말다툼이 격해지자 칼을 뽑아 겨눈 적이 있다. 둘의 당시 위치를 감안하면 제갈량이 주도한 회의에는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을 테니 제갈량 앞에서 대놓고 이런 추태를 부렸다고 어렵지 않게 파악이 가능하다. 제갈량이 수틀린다고 동료에게 무기를 겨눈 위연이나 지지 않고 계속 개기며 어그로를 끌어대는 양의 둘 중 누구도 자기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상급자와 동료들 앞에서도 틈만 나면 다투는 이들이 신하들 중 으뜸 자리에 올라서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았을 테니 취한 판단이었고, 이는 결국 맞아떨어졌다.[17] 한중으로 달아나려고 했다는 점도 어떻게든 그곳에 가 끝까지 물고늘어지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위연이 한중에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면 사태는 더욱 커져서 이 상황을 알아차린 위나라가 개입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나올지도 몰랐다.[18] 이 대화에서 손권은 물론이고 비의도 그래도 능력은 있다고 말해줄지언정 인성 문제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 위연과 양의의 인성이 얼마나 형편없는지에 대해 뜻이 같다는 점이다.[19] 비록 지휘관으로서 경력이 전무했던 조운이나 관장마황이 모두 세상을 떠난 이후 홀로 남은 1세대 군부 최고참이자 모범적인 군인인 그가 제갈량을 도와 중심을 잡아줬다면 제 아무리 위연과 양의라도 대놓고 내부에서 트롤링을 할 엄두를 못냈을 거다.[20] 文長, 위연의 자이다.[21] 위연과 대비된 인물이 바로 그의 상관이던 제갈량으로 그는 마음을 잘못 먹으면 아예 나라를 뒤집을만한 자리에 있었지만 2대를 섬기면서도 끝까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충성하면서도 늘 모범적으로 처신하여 사후에도 존경을 받았다.[22] 바닥에 있던 자신을 사령관급까지 올려준 사람이 유비니 실제로 충성심이 대단하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의에서는 다른 진영에 있던 인물로 설정되었으니 무슨 유비의 패왕색에라도 홀린 것같은 묘한 묘사가 된 것.[23] 범증은 유방의 관상이 제왕의 상이라며 한사코 죽이려고 했고, 유비는 오왕(吳正)으로 임명될 때 난데없이 삼촌인 유방한테서 '네가 반란의 상이라던데?'라는 얘기를 들어서 식겁하고 거듭 충성 맹세를 했다고 한다. 유비는 진짜로 반란했지만.[24] 화양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자신이 잘못된다면 장완이 뒤를 이을만한 재목이며, 양의는 성정이 편협하고 성급하다는 표를 은밀히 올렸다고 나와있다.[25] 또 비슷하게 원술이 세운 중나라 역시 중씨(仲氏)라고 불렸다.[26] 물론 유언의 내용은 거짓이고, 저 거짓 유언을 작성했다는 인물은 나중에 자신이 만들고 조작했다는 걸 실토하면서도, 위연 정도면 저런 유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어울린다는 식으로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