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1980)/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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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정재훈(1980)


1. 아마추어 시절
2. KBO 리그 시절
2.1. 두산 베어스 1기 시절
2.1.1. 2003 시즌 ~ 2007 시즌
2.1.2. 2008 시즌 ~ 2009 시즌
2.1.3. 2010 시즌
2.1.4. 2011 시즌
2.1.5. 2012 시즌 ~ 2013 시즌
2.1.6. 2014 시즌
2.3. 두산 베어스 2기 시절
2.3.2. 2017 시즌
3. 국가대표 경력


1. 아마추어 시절[편집]





서울역삼초등학교, 휘문중학교 2학년 때 청룡기중학대회에서 투수로 우승한 경력이 있으나 휘문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주로 유격수로 뛰었던 선수로 1999년 드래프트에서 5라운드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팀명 변경)의 지명을 받았지만,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1] 그리고 대학 무대에서 투수로 완전히 정착해 4년간 13승 3패 평균자책 1.88을 기록하고, 프로에 입문하기에 이른다.


2. KBO 리그 시절[편집]



2.1. 두산 베어스 1기 시절[편집]



2.1.1. 2003 시즌 ~ 2007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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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두산 베어스 선수시절 [2]

2003년에 데뷔했지만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그러다가 2004년에 조금씩 이름을 알리면서 두산 베어스의 좋은 불펜 투수 1 정도로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했다. 특히 기존 불펜의 핵이었던 이재영이 병역비리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많은 기회를 잡은 것이 컸다. 그리고 2005년 원래 마무리로 낙점했던 서동환이 개막부터 거하게 불을 지르면서 부랴부랴 마무리로 낙점한 선수가 정재훈이었다. 그리고 이 해부터 각성하여 3년간 30세이브 - 38세이브 - 25세이브를 올리면서 마무리 투수로서 눈에 띄는 활약을 선보였다. 특히 2006년에는 마무리로서 빛나는 활약을 보여 무려 15경기 연속 세이브를 기록하면서 KBO 역대 최다 연속경기 세이브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기록은 2011년 오승환에 의해 깨졌다.

다만 이 시절 최고의 마무리로 활약했지만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 2차전 2:1 리드 상황에서 김대익에게 동점 홈런을 맞은 것은 살짝 옥의 티가 될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의 맹활약으로 2006년 WBC 국가대표가 되어 병역 특례의 행운을 얻기도 했다.


2.1.2. 2008 시즌 ~ 2009 시즌[편집]


2008년 마무리 투수로 활동하면서 총 5번의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불안한 모습과 두터운 계투진 때문에 잠시 선발로 뛰었다.

2009년 시즌에는 마무리를 이용찬에게 넘기고 선발 투수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어깨 부상으로 인한 공백 이후 불펜으로 복귀했다. 이 해 이대형에게 3호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내준데 이어 부상 복귀 후 끝내기까지 맞는 불운을 겪었다.


2.1.3. 2010 시즌[편집]


마무리였던 이용찬이 음주운전으로 인해 2010년 준플레이오프 명단에 들지 못하면서 셋업맨이었던 정재훈이 마무리 역할을 맡게 된다.

2010년 9월 29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4:5로 앞선 7회초에 3번째 투수로 등판했으나 선두 타자이자 9번타자인 황재균에게 유격수 왼쪽 내야안타, 김주찬에게 희생번트를 허용했다. 그리고 다음 타자인 손아섭의 타구를 직접 잡아 런다운에 걸린 2루주자 황재균을 잡아냈으나 그 과정에서 손아섭이 2루를 갔는데, 결국 조성환에게 1타점 적시타를 맞으며 블론세이브를 시전했다. 그리고 스코어 5:5 동점이던 9회초에도 등판하여 선두 타자이자 8번타자인 전준우에게 솔로홈런을 맞고 임태훈과 교체되었다. 팀이 9회초에만 5점을 실점하며 스코어 5:10으로 패하여 정재훈은 2이닝 32투구수 3피안타 1볼넷 1피홈런 1탈삼진 2실점 2자책점, 블론세이브를 기록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2010년 9월 30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스코어 1:1이던 연장 10회초에 4번째 투수로 등판했는데, 선두 타자이자 1번타자인 김주찬에게 안타, 정보명에게 희생번트를 허용한 뒤 이날 3타수 2안타 1볼넷을 기록하고 있던 조성환을 고의사구로 거르고 이날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고 있던 이대호와의 승부를 택하며 턱거돼를 시전했다가 결국 이대호에게 쓰리런 홈런을 맞고 강판되고 말았다. 정재훈은 이날 ⅓이닝 11투구수 2피안타 1볼넷 1피홈런 3실점 3자책점을 기록했고, 팀이 스코어 4:1로 패해서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렇게 1, 2차전에서 홈런을 맞으며 패전투수가 되는 바람에 두산의 준플레이오프 탈락의 역적이 될 뻔 했었지만, 10월 3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4차전, 팀이 스코어 3:2로 앞선 7회초 1사 2, 3루 상황에서 5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번타자 김주찬을 유격수 땅볼로 아웃시켜 이닝을 끝냈다. 팀이 9회초에 8점이나 뽑아서 스코어 11:2가 된 9회말에도 등판했는데, 선두 타자이자 6번타자인 카림 가르시아, 전준우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하고 강민호를 삼진 처리한 뒤 김승회와 교체되었다. 그런데 김승회가 완벽하게 분식회계하고 경기를 끝내는 바람에 정재훈은 이날 1⅔이닝 33투구수 3피안타 1탈삼진 2실점 2자책점, 홀드를 기록했다.

2010년 10월 5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5차전, 팀이 스코어 4:11로 크게 앞선 8회초 2사에 4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4타자를 상대로 18투구수 2탈삼진으로 모두 범타 처리하며 경기를 끝냈다.

정재훈은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4경기 5⅓이닝 9피안타 2볼넷 2피홈런 5탈삼진 7실점 7자책점 평균자책점 11.81, 2패 1홀드 1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2010년 10월 7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팀이 스코어 5:2로 앞선 8회말 1사 1루 상황에서 6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7번타자 신명철의 대타로 나온 박진만을 삼진 처리하여 이대로 이닝을 끝내나 싶었지만, 이영욱김상수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하여 스코어 5:3을 만든 것도 모자라, 1번타자 박한이에게 쓰리런 홈런을 맞고 블론세이브&역전 허용을 동시에 시전함과 동시에 강판당하며 준플레이오프 1, 2차전의 악몽을 재현하였다.

이날 정재훈은 ⅓이닝 20투구수 3피안타 1피홈런 1탈삼진 3실점 3자책점, 블론세이브를 기록했고, 팀이 스코어 5:6으로 패하여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준플레이오프 5경기 ~ 플레이오프 1차전까지 두산 베어스가 기록한 3패가 모두 정재훈이었기에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임경완과 작가로 나왔다.

시리즈 전적 1승 1패인 2010년 10월 10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3차전, 팀이 스코어 4:6으로 앞선 8회초에 4번째 투수로 등판했는데, 선두 타자이자 6번타자인 박진만을 삼진으로 잡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7번타자 현재윤의 대타로 나온 조영훈에게 솔로홈런을 맞고 강판되면서 임작가를 밀어내고 다시금 작가로 거듭났다. 이날 팀은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스코어 8:9로 승리했고, 정재훈은 ⅓이닝 11투구수 1피안타 1피홈런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을 하고도 홀드를 기록했다.

정재훈은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 ⅔이닝 4피안타 2피홈런 2탈삼진 4실점 4자책점 평균자책점 54.00, 1패 1홀드 1블론세이브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정재훈은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6경기 6이닝 13피안타 4피홈런 2볼넷 7탈삼진 11실점 11자책점 평균자책점 16.50, 3패 1홀드 2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비록 결과적으로 두산이 한국시리즈 진출에 좌절된 후 그의 2010 시즌을 정리해볼 때 그가 작성한 '가을 창작시집'의 완성도는 극히 높다는 점은 이미 인정되어 버려서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의 이미지는 바뀌기 힘들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2010 시즌에 정재훈은 63게임에 등판해 78이닝을 소화하며 8승 4패 2세이브 23홀드를 기록한 홀드 1위의 투수였다. 이용찬이라는 든든한 마무리가 있었기에 정재훈의 올 시즌은 철저한 셋업으로 준비되었으며, 그가 없었다면 과연 두산이 포스트시즌에 출장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정재훈이 본격적인 전업 마무리 투수로 뛰기 시작한 2005년부터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2005년~2007년까지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철벽에 가까운 마무리로 군림했었다. 즉 포스트시즌에서의 그 맥없는 모습은 정규시즌 동안의 막대한 피로 누적의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62경기로 환산하면 정재훈은 2010년에 무려 95이닝이나 던진 셈이다.

여하간 정규시즌을 두고 볼 때 그가 데뷔한 이후로 가장 든든한 계투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실력적으로 보나 내구적으로 보나 풀타임데뷔인 2004년 이후 그 대단한 오승환도 약 2년은 공쳤으며 그 외에도 많은 계투들이 몇 년씩은 부상이나 부진으로 고생했지만 그만큼은 언제나 두산의 허리를 책임졌다. 다만 그도 한계는 있는것인지 비단 2010년뿐만 아니라 정규시즌엔 솔리드한 계투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어느 정도 피로가 축적됐을만한 포스트시즌에서는 말 그대로 한 순간에 '훅 가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튼 정규시즌만 보면 홀드 2위인 팀내 동료 고창성의 22홀드보다 1개 많은 23개의 홀드를 기록하며, 2010년 프로야구 홀드왕을 거머쥐었다. [3]


2.1.4. 2011 시즌[편집]


5월 27일 경기에서 용덕한에 의해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6월 2일의 SK와의 원정 경기에선 치열한 혈투 끝에 9회 말 5:4 상황에서 마무리 등판, 김연훈에게 멋지게 끝내기 역전 2점 홈런을 허용하며 필력을 과시했다. 게다가 김연훈의 개인 커리어 2호 홈런이었다.

게다가 6월 17일에는 2010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 때처럼, 최진행을 고의사구로 거르고 카림 가르시아를 상대했다가 홈런을 맞았다. 본인에게도 2010년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을지도..

9월 8일 LG와의 원정경기, 많은 두산 팬들이 오랜만에 보는 두산의 상승세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고 두산 선수진도 그에 보답하듯 2:1로 앞서고 있었다. 김상훈이 내려가고 7회 초 등판한 노경은은 영 좋지 않은 피칭 내용을 보여주며 곧바로 정재훈이 교체 투입되었고 많은 팬들이 정재훈이 이 상황을 해결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정재훈은 등판 후 조인성에게 안타 허용 후 1아웃을 오지환의 쓰리번트로 잡아내고, 정성훈에게 멋지게 역전 3점 홈런을 허용하며 역시 가을은 문학의 계절임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고창성-임태훈-이재우-이용찬으로 이루어진 KILL 라인의 몰락으로 대표되는 두산 불펜진의 몰락에서 두산 팬들의 희망이였으나 본 문서 2011시즌의 피칭 내용 기록이 전부 패전이고, 그중 3개가 역전 결승홈런임에서 보이듯 많은 작품을 집필해내며 많은 팬들을 실의에 빠지게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2011년 완전히 망했던 두산 불펜진에서 셋업과 마무리를 넘나들며 가장 호투한 선수였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즌 종료후 FA를 신청하였고, 의외로 빠르게 11월 16일 4년간 총액 28억 원(계약금 8억 원, 연봉 3억 5천만 원, 옵션 1억 5천만 원)의 대형 계약을 맺었다. 참고로 두산은 김동주를 제외하면 20억 넘는 계약을 한 적이 없는 구단이었다. 이를 아는 두산팬들은 굉장히 어리둥절해 하는 분위기였다.


2.1.5. 2012 시즌 ~ 2013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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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즌은 어깨부상으로 인해 4경기밖에 나오지 못했고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도 들지 못했다.

2013년 5월 10일 에서 열린 NC전에서 팀이 스코어 3:0으로 지던 2사 1, 3루 상황에서 선발 투수 더스틴 니퍼트의 다음 투수로 등판하여 1번타자 김종호를 2루땅볼로 아웃시켜 이닝을 끝냈고, 스코어 3:3 된 8회초에도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았다.

정재훈은 이날 1⅓이닝 17투구수 1피안타 1탈삼진을 기록했고, 팀이 8회말에 결승점을 올려 스코어 3:4로 이긴 덕에 승리투수가 되었는데, 2011년 5월 29일 한화전 이후 712일 만에 승리투수가 됐다.

이 후 홍상삼 마무리가 사실상 실패로 끝나면서 다시 마무리로 돌아갔고 이 후 한동안 두산은 승승장구하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홍상삼, 오현택보다 훨씬 적은 경기수를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이브를 쌓는 페이스가 압도적이었다.

8월 24일 한화전에서 팀이 스코어 2:1로 앞선 상황에서 올라와 송광민의 타구를 잡고 말도 안되는 악송구를 범하며 시즌 첫 블론세이브를 기록하였다

9월 6일 KIA전에서 신인 함덕주가 올린 주자를 전부 분식하며 스코어 6:5까지 가는 위기상황을 만들었으나 끝내기 견제사로 시즌 13세이브를 수확했다.

2013년 10월 8일 목동에서 열린 넥센과의 2013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 스코어 3:3인 9회말 1사 1, 2루 상황에서 4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2번타자 장기영에게 1루 땅볼, 다음 타자 이택근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말았다. 이날 정재훈은 ⅓이닝 8투구수 1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했다.

정재훈은 2013년 준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1⅔이닝 3피안타 1피홈런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5.40을 기록했고, 팀은 2연패 뒤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시리즈 전적 1승 1패인 10월 19일에 잠실에서 열린 LG와의 2013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스코어 4:5로 팀이 앞선 9회초 1사 2루 원볼에서 4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두 타자를 상대로 모두 안타를 맞았지만 최재훈의 살신성인으로 팀의 승리를 지키고 세이브를 따냈다. 이날 정재훈은 ⅔이닝 7투구수 2피안타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다.

정재훈은 2013년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 2⅔이닝 3피안타 1탈삼진, 1세이브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1승으로 앞선 10월 25일에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포스트 시즌 최장 시간 경기 기록을 세운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스코어 1:1이던 11회말 1사 1, 3루에 6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2번타자 정형식을 삼진으로 잡은 뒤 박석민을 고의사구로 내보내고 4번타자 강명구와의 승부를 택했는데, 결국 3구만에 강명구를 2루땅볼로 아웃시켜 실점위기를 막아냈다. 정재훈은 이날 1⅔이닝 30투구수 1볼넷 3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이 13회초에 4점을 뽑아 스코어 5:1로 이기면서 정재훈은 승리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팀이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앞선 10월 29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에 스코어 5:5인 8회초 무사 1루에서 4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9번타자 정병곤에게 안타, 정형식에게 희생번트, 박한이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고 홍상삼과 교체되었다. 홍상삼이 정재훈의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덕에 실점이 더 늘어나진 않았고, 정재훈은 이날 ⅓이닝 6투구수 2피안타 1실점 1자책점을 기록했으며 팀은 스코어 7:5로 패했다.

정재훈은 이후 나머지 경기에 등판하지 못하면서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4경기 3⅔이닝 3피안타 4볼넷 4탈삼진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4.91, 1승 1홀드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4패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정재훈은 2013년 포스트시즌 16경기 중 9경기에 등판하여 8이닝 9피안타 1피홈런 4볼넷 5탈삼진 3실점 3자책점 평균자책점 3.38, 1승 1홀드 1세이브를 기록했다.


2.1.6. 2014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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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이용찬 덕분에 마무리 대신 계투로 전업했다.

4월 10일 SK전에서는 윤명준이 만들어놓은 무사 만루의 위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클래스 입증. 간만에 희극 작가 모드였다고 팬들 사이에서는 추앙 중이다.

4월 내내 꾸준히 나와서 홀드를 쌓고 있다. 마무리 이용찬 앞에서 8회를 책임지는 셋업맨을 맡고 있으며, 3,4월간 정재훈의 피칭은 심지어 이용찬보다도 더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

4월 26일 기준으로 10경기 11.1이닝 4피안타 1피홈런 11삼진 3자책점, 6홀드(2위), 평균자책점 2.38을 기록 중이다. 3월 29일 LG전에서 1실점, 4월 19일 롯데전에서 2실점한 경기를 제외하고는 나오는 경기마다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아스정에서 메시아정으로 진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년에 비해 두산의 불펜자원이 그나마 풍족해진 덕분에 혹사도 당하지 않으며 홀드를 쌓아가는 중.

5월 5일 LG와의 어린이날 더비에 8회 등판하여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7홀드를 올렸다.

5월 13일 SK와의 경기에 7회 구원등판하여 2이닝 2K 무실점을 기록하며 시즌 8홀드를 기록.

홀드는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지만 5월 7일 롯데전에서 3실점(3자책)하는 바람에 ERA는 3.06을 기록중이다.(5월 14일 기준)

5월 28일 KIA와의 경기에서 1.1이닝 무실점 완벽투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6월 8일, 선발진 연쇄 붕괴로 무너진 두산 투수진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유일하게 투수다운 피칭을 선보이고 있다. 25경기 29이닝 1승 1패 9홀드 ERA 3.10 (FIP 2.80) WHIP 0.90 피안타율 0.196 피OPS 0.525 30K / 6BB, 20이닝 이상 던진 불펜중 유일하게 WHIP 0점대, 피안타율 1위, 피OPS 1위 그리고 리그 불펜 중 유일하게 FIP 2점대를 기록하고 있다.

10년보다 더 심한 타고투저와 30대 중반의 나이, 그리고 회전근 수술에도 불구하고 클래스를 되찾아가는 중.

그 뒤 7월 4일부터 마무리 이용찬이 약물 복용 징계로 10경기 출전 정지를 당하자 임시 마무리 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날 삼성 라이온즈 전에서 1이닝 동안 볼넷 2개를 내주기는 했지만 무실점으로 막으며 시즌 첫 세이브를 올렸다.

8월 1일 한화전에서는 팀이 6-5로 리드하던 중 8회 말에 등판했는데, 고동진은 땅볼로 잡아냈지만 연속으로 안타를 맞더니, 정근우에게 1타점 적시타를 내주고 강경학에게 데뷔 첫 안타를 역전 쓰리런으로 내주며 정작가의 명성을 보여줬다. 결국 팀은 6:9로 패배했고, 본인은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 날 기록이 0.1이닝 4실점으로 방어율이 108.00.

그 뒤로는 안정적인 피칭을 했다. 하지만 8월 23일 NC전에서는 7회 2아웃부터 등판해서 7회를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8회에 계속해서 안타를 맞으며 한 이닝에만 5실점을 하는 방화를 저질렀다. 이 실점으로 팀이 역전을 당해서 패배해 시즌 5패째를 기록했고, 기록은 0.2이닝 5실점, 방어율이 67.50이다.

아시안게임 휴식기 전까지의 성적은 49경기 49.1이닝 1승 5패 2세이브 15홀드 방어율 5.11. 크게 털린 적이 몇 번 있어서 방어율은 영 좋지 않다. 하지만 정재훈과 윤명준, 이현승 밖에 없는 불펜진에서 그나마 자기 역할을 해주고, 나이와 역대급 타고투저를 감안한다면 나쁘지 않은 수준의 피칭을 하고 있다.


2.2.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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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9~2017).svg 롯데 자이언츠 선수시절

2014 시즌 종료 후인 12월 9일, FA로 영입한 장원준의 보상선수로 지목되어 롯데 자이언츠로 가게 되었다. 여론은 지명 자체는 다소 의외고, 선수에 대해서는 롯데가 이득이다, 두산이 이득이다는 의견이 반반씩 교차하고 있다. 영입이 탐탁치 않은 롯데팬들의 의견으로는 리빌딩을 하겠다는 롯데가 30대 후반의 투수를 영입한 것이 모순이라는 것이고, 영입을 환영하는 의견으로는 베테랑 필승조를 영입하며 필승조 라인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롯데의 경우, kt로 이적한 김사율의 전력공백을 한번에 메우면서, 정재훈을 마무리로 기용하고, 현재 마무리 보직으로 등판중인 김승회를 5선발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정재훈은 2012년 부상의 공백 때문에 2년 후 FA 시장에 나오게 되는데, 이 때는 kt wiz의 신생팀 혜택이 사라지면서 어느 팀을 가도 보상선수를 받을 수 있다!! 38살의 불펜투수를 어느 팀이 계약할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2년간은 확실히 사용할 수 있는 즉시전력 불펜 필승조를 얻었다는 점에서는 큰 수확을 거둔 셈.

두산의 경우, 미완의 유망주들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11년간 묵묵히 팀에 헌신해왔던 프랜차이즈 투수를 헌신짝같이 내팽겨쳤다. 이 팀은 프랜차이즈라는 개념이 없는 건가'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두산의 선수 풀이 워낙 좋다보니 지켜야 할 선수도 많았고,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드는 불펜 투수를 풀어봐야 누가 데려가려고 생각이나 했을 지가 문제다. 즉, 두산에서도 "설마 데려가겠어?"라 생각했는데 진짜로 데려갔다는 것. 실제로 두산 프런트에서도 보상선수로 정재훈이 지명되자 상당히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이듬해 2차 드래프트에서 정재훈을 다시 데려오면서 2015년 우승반지까지 선물로 줬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투수조 최고참이었던 정재훈이 떠나면서, 졸지에 투수조 최고참이 이재우, 이현승, 노경은, 오현택, 장원준이 되어버린 것은 덤. 거기다 당장 두산의 투수진 구상이 꼬여버렸는데, 함덕주, 윤명준, 변진수는 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이용찬상무, 홍상삼경찰 야구단에 입대한 상황. 현재 군필 불펜이 이재우, 오현택밖에 없는 상황이 와버렸다. 안 그래도 최약체로 평가받던 두산 베어스의 불펜이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 다만, 투타 유망주들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으니 거기서 위안을 찾아야 할 듯 하다. 결과적으로는 마지막까지 박건우와 저울질했다가 정재훈을 선택한 롯데 자이언츠는 실패했고, 두산은 롯데가 박건우를 데려가지 않은 덕분에 7번의 한국시리즈 진출, 3번의 우승을 거뒀다.

그래도 나름 특급 불펜 출신이라 롯데에서도 기대를 했는지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불펜 필승조로 기용되었으나, 나올 때마다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4월 16일까지 7번 등판해 4이닝 3실점 평균자책점 6.75에 그쳐 결국 1군에서 말소되었다. 한 마디로 배팅볼 머신이 되었다. 회전근 재활 경력이 있는 투수이기도 하고, 나이가 더더구나 36살이라는 점은 더 이상 그가 중간계투 투수로서 경쟁력을 잃어감과 동시에 선발로도 안 되고 한 마디로 이제는 거의 선수 생활에 막다른 골목에 선 느낌이다.

그래도 실력은 있는지 퓨처스로 내려가서는 1점대 ERA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팬들의 의견은 그의 2군 성적이 대부분 퓨처스 타자들은 직구에는 자신이 있으나 나름대로 10여 년 동안 1군 최상위 불펜으로 활약했던 그의 포크볼을 처음 보는 등 변화구에 약한 타자들이 수두룩하니 믿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는 동시에, 진작에 쓸 의도도 없었는데 굳이 36살 고령인 투수를 왜 데려와서 자원 낭비를 하고 선수단 연봉만 쳐 올리냐는 등 이종운 감독을 욕하는 말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당시 롯데에서 마땅한 좌익수가 없었는데 보호명단에 빠져 있었던 선수 중 두산의 미래가 있었다는것이 알려지면서 불을 더 지폈다.

어쨌거나 2015년 퓨처스리그 성적은 28경기 1승 6세이브 4홀드를 기록하며 43이닝 1피홈런 8볼넷 1사구 44탈삼진 10자책점 ERA 2.09로 마감지었다. 참고로 28경기는 롯데 퓨처스 팀에서 허준혁 다음으로 2번째 최다 등판 투수다. 이렇듯 대부분의 시간을 2군에서 보내면서 꾸준히 등판은 했지만, 정작 1군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10경기에서 6⅓이닝 동안 ERA 7.11을 기록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롯데 팬들은 2015년에 있을 2차 드래프트를 앞두고 반드시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시키든가, 트레이드 블록에 올려서 어떻게든 정재훈을 이적시켜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었다.


2.3. 두산 베어스 2기 시절[편집]




파일:external/ph.spotvnews.co.kr/41760_61210_1600.jpg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svg 두산 베어스 선수시절 [4]

결국 2016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 때 친정 팀 두산 베어스로 1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정재훈 본인의 입장에선 아쉬울 수도 있는 게, 잠깐 1년 동안 다른 팀으로 갔다온 격인데, 문제는 2015년에 두산이 우승했다는 것... 2016년에 돌아왔지만 박용택의 타구에 맞고 부상으로 빠져 우승반지를 끼우지 못했다.


2.3.1. 2016 시즌[편집]



파일:16정재훈.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재훈(1980)/2016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3.2. 2017 시즌[편집]


부상으로 인해 육성선수로 시즌을 시작하게 됐다.

안타깝지만 상당히 큰 어깨 부상을 당했고, 나이를 감안했을 때 사실상 거의 반 은퇴가 되지 않겠냐는 평가를 받았다. 젊은 선수가 어깨 부상을 당했을 때도 재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37세의 노장인 데다 이미 2012년 어깨 부상으로 인한 시즌아웃 이력도 있다.

사실상 어깨 부상의 가장 큰 이유가 이미 노장인데도 불구하고 행해진 작년의 혹사일 텐데 절묘하게(?) 팔뚝에 타구를 맞는 부상을 당했고, 그 때문에 혹사와 그로 인한 부상이 가려진 면이 크다. 불펜 혹사의 넘사벽 때문에 크게 주목을 안 받고 있는데, 김태형 감독의 2016시즌도 초반엔 정재훈을 퍼지도록 굴렸고, 정재훈의 부상 이후엔 윤명준을 굴려 성적을 냈다고 할 수 있다. 2017시즌 들어서는 선발 전환 전의 김명신김강률, 김승회를 살인적으로 굴렸고 대전의 금지어의 경질 후 큰 비판을 받을 위기에 처했으나 차기 대구의 금지어혹사로 위의 두 인물을 이길 정도로 막장스러운 투수 운용을 하고 있느라 주목받지 않았다.

11월 8일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코치 제의를 받았지만 최종 결정은 미루고 있다고 밝혔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3.1. 2006 WBC[편집]


2006 WBC
파일:wbc정재훈.jpg


대한민국 대표팀 개인별 성적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자책점
4구
삼진
상세
1
0
1
9.00
0
0
0
0
1
1
1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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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12:22:17에 나무위키 정재훈(1980)/선수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다른 대학들은 유격수 포지션을 원했지만 성균관대에서 투수로 기용하겠다고 하여 입학하게 된다. 또한 성균관대 출신 운동선수 중에서 김병현과 함께 국제대회로 병역특례를 받은 희귀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정성룡, 이승엽(1982)은 입학 전, 설기현은 감독 부임 전 이미 병역특례로 해결한 케이스.[2] 세이브 왕 타이틀을 획득한 2005년의 모습 [3] 4월에 김경문 감독이"늘 고생한 만큼 세이브를 주고 싶었다"며 정재훈을 8회에 이어 9회까지 던지게 해 홀드 대신 세이브를 올린 경기가 하나 있었기에, 시즌 중반 두 사람이 홀드왕 경쟁을 벌일 때는 배려한다고 챙겨준 세이브 때문에 홀드왕이 바뀌는 것 아니냐 하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결과적으론 정재훈의 1개차 승리로 해당 경기와 상관없이 홀드왕은 정재훈에게 돌아갔다.[4] 1년만에 다시 친정팀 두산 베어스로 돌아온 직후, 구단 시무식에 참석해 밝게 웃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