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만

덤프버전 :


}}} ||

[ 펼치기 · 접기 ]
'''1군
70 박진만 [[코치(스포츠)#s-2.1|

]] · 75 손주인 · 76 타치바나 · 77 배영섭
· 78 강봉규 · 79 이병규 · 87 박희수 · 89 이정식
· 94 권오준 · 97 강명구 · # 이진영 · # 정민태 · # 정연창'''

2군
71 조동찬 · 74 박한이 · 90 박찬도 · 91 다바타
· 98 채상병 · # 정대현 · # 강영식 · # 김지훈


육성군
85 김정혁 · 88 정현욱 · 92 정병곤


컨디셔닝
72 나이토 · 80 황승현 · 81 권오경 · 82 김현규 · 83 윤석훈
86 한흥일 · 93 윤성철 · 95 박승주 · 96 류호인 · # 김용해 · # 염상철 · # 허준환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군입대선수등록선수
다른 KBO 리그 팀 명단 보기


박진만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체육훈장.png
연도
2005년
이름
박진만
분야
스포츠
사유
체육발전유공
체육훈장거상장(3등급)

박진만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펼치기 · 접기 ]

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4.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8
2000
2003
2004
2005
2006

파일:2000 시드니 올림픽 로고.svg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종목
동메달

2000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02

파일:2008 베이징 올림픽 로고.svg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종목
금메달

2008





파일:KBO 로고(세로형, 2013~2021).svg KBO 한국시리즈
2006 한국시리즈 MVP








보유 기록
통산 최다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1]
5개


박진만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7번
유영환
(1993~1995)

박진만
(1996~2004)


차화준
(2005~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번
김재걸
(2001~2004)

박진만
(2005~2010)


김상수
(2011~2022)
SK 와이번스 등번호 7번
김재현
(2005~2010)

박진만
(2011~2015)


박재상
(2016~2017)
SK 와이번스 등번호 74번
조원우
(2014~2015)

박진만
(2016)


최상덕
(2017~202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9번
이종두
(2013~2016)

박진만
(2017~2022)


이병규
(2023~)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0번
허삼영
(2020~2022)

박진만
(2023~)


현역


A대표팀 참가 경력
[ 펼치기 · 접기 ]




















삼성 라이온즈 No.70 [[감독#s-2|

]]
박진만
朴鎭萬 | Park Jin-Man

출생
1976년 11월 30일 (47세)
경기도 인천시 남구[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서화초 - 상인천중 - 인천고[2] - (경기대)[3]
포지션
유격수[4]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고졸우선지명 (현대)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 (1996~2004)
삼성 라이온즈 (2005~2010)[5]
SK 와이번스 (2011~2015)
지도자
SK 와이번스 1군 수비코치 (2016)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코치 (2017)[6]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2017~2018)[7]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작전코치 (2018)[8]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2019)
삼성 라이온즈 1군 작전코치 (2020~2021)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22)[9]
삼성 라이온즈 감독대행 (2022)[10]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23~)
병역
예술체육요원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부문 동메달)
계약
2023 - 2025 / 12억원[11]
연봉
2023 / 2억 5,000만원
등장곡
현대 유니콘스 시절
jamelia - superstar

SK 와이번스 시절
Maroon 5 - Payphone[12]
응원가
현대 유니콘스 시절
동요 - 우리 모두 다같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
[응원가 보기]
마오리족 민요 Pokarekare ana[1][2][3][4]
윌리엄텔 서곡[5][6]
코요태 - I Love Rock & Roll[7][8][9]


SK 와이번스 시절
비스트 - Beautiful[13]듣기
상훈
체육훈장 거상장
1. 개요
3. 플레이 스타일
3.1. 수비
3.2. 타격
3.3. 주루
4.1. 지도자 성적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PS12122500018.jpg


대한민국야구인. 現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유격수.

김재박-이종범-박진만으로 이어지는 KBO 리그 유격수 계보의 한 축이다. KBO 리그 역사상 150홈런을 쳐낸 최초의 유격수[14]이며, 현대 유니콘스 시절부터 SK에서 은퇴할 때까지 줄곧 7번을 달았다.

별명은 이름의 말장난인 박진'만두'에서 따온 만두.[15], 찐만두, 만두신, 명인만두를 거쳐 SK와 계약으로 탄생한 고향만두 등. 그 외에도 수비만, 삐삐밴드[16]가 있다. 중계진이나 언론에선 주로 '명품 유격수'라는 별명을 사용해 그의 수비를 칭찬했다. 삼성의 감독직을 수행하며 루징만, 스윕만, 남탓만 등 부정적인 별명이 많이 생겼다.

2023년 기준으로 KBO 리그 최연소 1군 감독이다.[17]

2. 선수 경력[편집]




3. 플레이 스타일[편집]


김태균: 유격수 쪽으로 공이 가면 아웃이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수비를 했어요. 수비로서는 대한민국 최고이지 않았나...


한국야구 역대 유격수 계보[18]의 한 축으로 한 시대를 대표했던 유격수로 꼽힌다. 특히 수비력에 있어서는 시대를 넘어 KBO 리그 역사상 최고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19] 또한 특유의 펀치력를 바탕으로 하는 준수한 타격 능력을 보였으며, 유격수로서 상위권의 공격력을 보이기도 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3.1. 수비[편집]




▲ 박진만의 삼성 유격수 시절 수비 하이라이트

발은 느린 편이었지만 타구 판단 능력이 뛰어나 수비 범위가 매우 넓었고, 어깨 역시 강견인 편으로[20] 15년 가까이 리그 최상위권의 수비능력을 보였다. 2010년을 기점으로 글러브질에서 조금씩 노쇠화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고질적인 무릎 부상[21] 때문에 포구할 때의 자세가 많이 불안해졌다. 2010년 잦은 수비 실책의 원인도 이 무릎 부상 때문이었다.[22]

수비 스타일은 김재박, 이종범의 사기적인 수비 범위와 당대 리그 최고의 송구 속도를 바탕으로 한 화려한 수비와는 다른 안정감을 주는 수비를 하였다. 기술로만 치면 역대 가장 뛰어난 수비기술을 가진 선수로 보기도 한다. 독보적으로 평가 되는 부분은 공을 잡고 빼내는 글러브질이며, 공을 던지는 후속 동작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역시 역대 최고로 평가 받는다. 어떤 자세나 상황에도 공을 잡으면 아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며, 공을 잡을 때도 여유 있는 느낌으로 전해진다. 어떤 자세로 송구를 하게 되어도 송구 정확도가 높았다. 참고로 초대 WBC에 참가했을 당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들이 가장 놀랐던 선수로 한국의 박진만을 뽑았으며, 이유로 그의 수비를 뽑았다.

3.2. 타격[편집]


최상위권의 수비 능력에 묻히지만, 타격도 충분히 준수했던 타자이다. 유격수 기간 동안 올타임급 퍼포먼스를 보였던 이종범이나 40홈런 유격수인 강정호엔 미치지 못하지만 통산 wRC+가 95.2로 리그 평균에 근접하여 유격수로선 부족함이 없고, 타격까지 받쳐준 전성기라 할 수 있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는 기복이 있긴 했지만, 특유의 펀치력을 바탕으로 리그 중상위권의 타격을 하였다. 또한 현대 유니콘스 시절인 2001 시즌엔 3할에 20홈런을, 삼성 라이온즈 시절인 2006, 2007 시즌엔 2년 연속으로 140대의 wRC+[23]를 기록하기도 하였다.[24]

3.3. 주루[편집]


주력은 무릎 부상으로 유격수치고는 느린 편에 가까웠다.[25] 도루의 경우 데뷔 시즌인 1996년과 삼성 이적 후인 2006년엔 두 자릿수 도루를 하긴 했지만, 커리어 전반적으로 성공률이 높지 않았고 도루 시도가 20번을 넘은 시즌이 없었다. 주자로서는 단점이었지만 이 부분은 오히려 박진만의 수비센스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워낙 타구 판단 능력이 뛰어났고 타자의 타격 유형을 보고 예측 수비를 했기에 스타트가 좋아서 부족한 주력을 커버했다.[26][27]


4.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진만/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1. 지도자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22
삼성 라이온즈
50
28
0
22
7위[감독대행]
-
2023
144
61
1
82
8위
-
통산
194
89
1
104
0.461


5. 여담[편집]


  • 현대 유니콘스삼성 라이온즈에서 우승반지를 무려 6개[28]나 먹은 반지의 제왕. 특히 2003년과 2004년에 현대에서 2년 연속 우승을 경험하고 삼성으로 이적해 2005년과 2006년에 또 다시 2년 연속 우승반지를 가져가면서 4년 연속으로 우승반지를 껴봤다. 2010년까지만 하더라도 8개 1명, 7개 3명, 6개 2명(박진만 포함) 뿐이라 6개만 되어도 충분히 반지캡터라 부를 수 있었지만, 2011~2014년 삼성이 4연패를 하면서 배영수, 박한이, 진갑용 등 삼성의 고참 선수들이 대거 6~7개의 반지를 갖게 되면서 다소 밀린 감이 있다. 그래도 서로 다른 팀 소속으로서 우승반지를 획득한 선수로는 최다였으나, 배영수가 2019년 두산에서 마지막으로 8번째 우승반지를 끼고 은퇴하면서 최다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도 2000년대 후반 SK의 최전성기와 2010년대 초반 삼성 왕조를 경험하지 못해서 겨우 6개인 것으로,[29] 만약 왕조 우승반지를 다 타갔으면 13개의 우승반지를 얻는 것이 된다.

  • 군 문제와 관련하여 2000년에 아버지가 병역비리를 위해 브로커에게 면제청탁을 부탁하며 뇌물을 건네 구속되었다는 흑역사가 존재한다. 그 해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아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는 한다.[30]


  • 현대 유니콘스서울특별시로 연고지 이전을 시도하던 당시 정민태와 함께 "서울특별시로 연고지를 옮기면 더 좋잖아요."라는 말로 인천 야구팬들의 속을 뒤집었다는 카더라가 있었다. 그런데 무려 14년만에 진실이 드러났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개최를 기념한 인천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진만은 "당시 수원으로 가면서 한편으론 상당히 아쉬웠다."라며 "인천에서 경기하면 편안했는데 고향을 떠나 선수 생활을 하며 안정감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설명했다. 인천 토박이로서 인천을 위해 꾸준히 야구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포부까지 전하면서 오랜 루머의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 은퇴 후, 박진만이 인천 야구에서 지니는 상징성과 그간의 활약상을 기념하자는 취지에서 그의 선수 시절 등번호였던 7번을 KBO 영구결번하자는 의견이 자주 나오고 있다. 다만 SK 와이번스에는 다른 레전드 7번 김재현도 있었고, 박진만이 그의 번호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명성이 조금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어서 더 지켜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5년 12월 현재 팀 공식 홈페이지 상으로는 박재상이 7번을 가져간 것으로 되어 있어 영구결번은 어려울 듯. 그리고 솩갤러들은 왜 저딴 놈이 7번을 물려받았냐며 가루가 되도록 까는 중... 이었는데 정작 개막하고 보니 그 물려받은 놈이 엄청 잘 하고 있다. 역시 인생만사 새옹지마. 참고로 이후 인천 야구 최초의 영구결번은 박경완이 되었다.[31][32]

  • 오지환이 삼진 1005개를 기록하기 이전에 유격수 중에서 통산 삼진 1위였다.(통산 1,003개)[33]

  • 종교는 확실치 않으나 한때 가톨릭 신자였다는 얘기가 있었다. 마침 후임 유격수 김상수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 아무튼 이 사실 때문에 불암콩콩코믹스에서 (가톨릭 신자라) 예배를 안나왔다는 이유로 이만수가 박진만을 향해 총을 쏴서 맞히는 장면이 나왔다. 이외에도 플옵 편에서 스파이라고 하면서 총을 쏴 맞히는 장면이 나왔다.


  • 야구를 시작하기 전 어렸을 때의 장래희망은 파일럿이었다고 한다.


  • 묘하게 최정을 닮았다.

  • 자신과 동갑내기 스타인 이승엽과도 매우 친한 사이다. 이승엽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 나이에 데뷔했지만 이쪽은 고등학교 때 1년 유급을 하여 데뷔가 1년 늦긴 했다. 선수 시절 때는 서로 삼성과 현대의 대표 선수로 경쟁했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매우 친한 사이였고 국가대표로 같이 뛰기도 했고 마침 둘다 포지션도 내야수라 서로 내야 수비를 보는 상황에 베이스로 출루를 하면 대화도 많이 나누었다. 아쉽게도 박진만이 삼성에서 활약했을 때는 이승엽은 일본에서 뛰었고 이승엽이 국내 복귀를 했을 때는 박진만은 이미 SK 선수로 활동 중이라 한 팀에서 뛰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이승엽이 커리어 말년에 접어들었을 때는 박진만이 팀의 코치가 되기도 해서 선수와 코치로 한솥밥을 먹긴 했다. 이후 이승엽은 두산 베어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박진만은 삼성의 정식 감독이 되어 2023 시즌부터는 한 팀의 감독으로써 마주하게 되었다. 이 둘은 각 팀 선수들에게 지독한 특훈을 시킨다는 것도 공통점이다.[34] 재미있게도 이승엽은 대구 야구의 상징격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구단인 두산의 감독이고, 박진만은 인천 야구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대구 구단인 삼성의 감독이다.

  • 2022년 8월 18일 한화전에서 원형탈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카메라로 보여주었다.[35]


  • 팬 서비스는 매우 좋은 편. 사람도 좋고 야구도 잘한다는 말을 듣던 선수 시절에는 매우 좋았고, 감독으로서 평가가 극심하게 떨어지고 비호감 행동을 반복해 민심을 잃은 현재까지도 팬 서비스는 상당히 좋다.

  • 나이에 비해 상당히 동안이다. 4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피부에 주름이 없고 매끈해서 모자를 쓰면 선수 시절과 큰 차이가 없어보일 정도. 다만 이는 모자를 쓰고 있을 때 한정이고, 모자를 벗으면 원형탈모가 꽤 진행된 게 보인다.

  • 2023년 삼성 감독을 맡으면서 김헌곤과 비슷하게 부정적 별명이 우후죽순 붙는 편이다. 감독대행 시절 좋은 성적으로 호평받았으나 2023년 5월부터 루징시리즈를 반복하고 한달 반의 짧은 기간 동안 승패마진 -10을 달성하는 괴랄함을 보여주자 루징만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외에도 데이터를 전혀 보지 않는 감야구를 통한 투수 교체를 한다는 점에서 다트야구, 성급한 교체판단에 따른 조급만, 심판의 오심에 대한 부족한 항의라는 점에서 박수만이라는 부정적 별명도 생겼다. 스윕을 많이 당해서 스윕만, 인터뷰로 선수탓만 해서 남탓만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대체로 ~만으로 별명이 붙는다.


6. 관련 문서[편집]


[1]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천시가 직할시로 독립한 것은 박진만 출생 후인 1981년, 남동구가 남구에서 분구된 건 1988년으로 모체였던 남구는 2018년에 현재의 미추홀구로 변경되었다.[2] 인천고 2학년 시절 무릎 부상으로 1년 유급[3] 체육학과 03학번, 프로생활 중 입학했으며 졸업여부는 불명기사[4] 20년의 선수생활 중 마지막 시즌인 15시즌을 제외하면 모든 시즌을 유격수로서 가장 많은 경기에 나왔고 마지막 시즌도 유격수로 150이닝 가까이 소화했다. 데뷔시즌인 96시즌부터 09시즌까지 거의 15년 동안 유격수로만 출전했다. 통산 1993경기 중 1861경기를 유격수로 출전했다.[5] 선동열 감독 재임 기간과 일치한다.[6] ~4월 27일[7] 2017년 4월 28일~2018년 6월 25일[8] 6월 26일~[9] ~7월 31일[10] 8월 1일~[11] 계약금 3억원 / 연봉 총액 7억 5,000만원 / 옵션 1억 5,000만원[12] I'm at a payphone trying to call home All of my change I've spent on you (SK! 박진만!)
Where are the times gone baby It's all wrong, where are the plans we made for two (SK! 박진만!)
[13] 와이번스의~! 박진만~ 박진만~ 시간이 지나도~ 대한민국 최고 유격수! SK 와이번스 박진만~ 최고의 박진만~[14] 이종범장종훈이 유격수 출신이긴 하지만 포지션 변경으로 인해 유격수로서 쳐낸 홈런은 150홈런에 미치지 못한다. 대형 유격수라 불렸던 홍세완은 무릎부상으로 인한 짧은 커리어로 인해, 김하성강정호는 해외진출로 인해 달성하지 못하였다. 오지환이 2022 시즌 종료 기준 146홈런으로 역대 두번째 유격수 150홈런을 앞두고 있다.[15] 그래서인지 삼성 감독 취임식 때 구단에서 준비한 음식이 만두, 그것도 찐만두이다.[16] 신인시절 수비와 더불어 2할8푼을 치는 준수한 활약으로 당시 신인왕을 수상해 차기 프랜차이즈로 거론되던 박재홍과 엮어 만든 별명. 둘 다 박씨라 이니셜의 P를 딴 것.[17] 동갑인 이승엽 두산 베어스 감독보다 50일 늦게 태어났다.[18] 김진영-박정일-하일-김재박-류중일-이종범-유지현-박진만-강정호-김하성[19] 현역 시절에는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라는 평가도 받았다. 현재는 KBO에는 MLB 대수비 출신인 딕슨 마차도와 현재 전세계 최고의 내야수비를 보여주는 김하성이 있어서 그러한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물론 현재까지도 올드 야구팬덤은 내야수비하면 박진만을 일컬을 정도로 대단한 임팩트를 자랑했으며 지명수비 제도가 있었다면 박진만은 꽤 오래 현역이 연장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20] 어깨가 약했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위의 동영상 같이 어깨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수비를 보이며 완전 빠지는 코스를 처리한 6분 19초의 수비는 승부를 포기했거나 악송구가 되었을 것이다. 김재박이종범이 던지는 유형의 빨랫줄 송구와는 느낌이 다소 다르다. 신인 시절 송구는 이종범과 같은 류의 빨랫줄송구를 보이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여유가 붙는다.[21] 이는 본인의 노쇠화도 있지만 그가 뛰었던 삼성 라이온즈의 옛 홈구장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그라운드에 악명 높은 카페트식 인조잔디가 깔렸던 것도 한 몫 했다. 당시 대구 시민야구장은 KIA 타이거즈의 홈구장인 무등 야구장과 더불어 최악의 야구장이라고 까였다. 박진만과 같은 시대에 공수겸장 유격수로 평가 받았던 홍세완도 2004년 무등경기장 그라운드가 인조잔디로 바뀐 후 고질적 무릎 부상이 심해졌고 결국 그 여파로 빨리 은퇴하게 되었다.[22] 박진만의 현역 시절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던 현대 시절 홈 그라운드는 모두 흙바닥 내야였다. 신인 시절 뛰던 숭의야구장한신 고시엔 구장처럼 내야 전체가 흙으로만 이뤄진 구조였고 삼성 이적 전까지 뛰던 수원야구장은 외야와 내야 가운데에 천연잔디가 깔린 야구장이었다.[23] 이는 인상 깊은 활약을 했던 후배 구자욱의 데뷔 1, 2년차와 2023년 wRC+와 유사한 것으로, 유격수라는 것을 빼고 보더라도 굉장한 불방망이를 휘두른 셈.[24] 다만 팀 내에 쟁쟁한 타자들이 많았고, 포지션이 체력 소모가 심한 유격수였기에 주로 하위타선, 그 중에도 9번 타자에 배치되곤 했다. 삼성 시절엔 간혹 5번에 위치했던 적도 있다.[25] 일반 야수들과 비교하면 평균을 살짝 넘은 정도.[26] 데뷔 시절 현대 감독이었던 김재박 감독이 박진만의 느린 발 때문에 프로의 빠른 타구에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경기가 끝나고 밤마다 펑고를 시켜 타구 반응 속도를 높이려 했다.[27] 비슷하게 수비력이 좋은 유격수이지만 주력이 느린 사례로 손시헌이 있다.[감독대행] [28] 권혁, 선동열, 조동찬과 우승반지 개수가 동일. 참고로 이 분야 최강은 해태의 김정수로 해태에서 8번 진출하여 8번 우승반지를 꼈다. 뒤이어 배영수도 삼성 7회, 두산 1회로 총 8개의 우승반지를 달성하고 은퇴. 그 다음으로 역시 해태의 김성한, 이순철, 한대화, 그리고 삼성의 진갑용, 박한이의 7개다.[29] SK의 최전성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삼성에서 SK로 이적했는데 그때부터 삼성이 왕조를 시작했다.[30] 박진만 외에 이 때 병역특례를 받은 선수는 손민한, 정수근, 장성호, 이승호(SK)가 있다. 유일한 아마추어 선수였던 정대현은 이미 병역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병역특례와는 무관하다. 당시의 몇몇 기사에서는 정대현이 병역특례를 받았다고 나온 것도 있으나 이후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는 기사가 전혀 없었다. 당시 기자들이 유일한 아마추어 팀 소속 선수이니 미필이겠지 지레짐작한 것이 컸다. 나중에는 김수경도 병역특례가 아니라고 나온다.[31] 박경완이 인천 출신은 아니지만 (전주 출신), 쌍방울 레이더스 - 현대 유니콘스 - SK 와이번스로 이어지는 커리어로 봤을 때 인천 야구의 상징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완전한 프랜차이즈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현재까지는 인천에 영구결번을 받을 만한 프랜차이즈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은퇴 후의 김광현최정이 현재로서 확정적이지만, 출신 팜까지 따지면 김광현은 안산공업고등학교 출신, 최정은 수원 유신고등학교 출신으로 둘 다 인천 출신은 아니다. 애초에 출신까지 인천 순혈이기가 힘들다는 이야기. 그러므로 박경완 정도면 충분히 인천 레전드로 인정받을 만 하다. 은퇴 후 커리어도 SK에서 이어가고 있다.[32] 사실 가장 인천 순혈주의에 맞는 것은 박진만이 맞는데 박진만은 선수 경력 중간에 삼성에 왔었고 코칭스태프로도 주로 삼성에서 뛰었다. 첫 감독 경력 역시 삼성 라이온즈에서이다.[33] 다만 오지환은 매년 100개 이상의 삼진을 기록하는데다 겨우 10시즌만 뛰고 박진만의 통산 삼진 기록을 넘겨버렸다. 반면 이쪽은 무려 20시즌이나 뛰었다 보니 그만큼 누적 기록도 높을수밖에 없고, 적게 나온 시즌을 감안해도 대략 한 시즌당 60~70개의 삼진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삼진이 많은 타입은 아니다.[34] 실제로 이승엽은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와 같은 명언을 남기며 훈련과 노력을 중시하는 대표적 선수였고 박진만은 현대 시절 김재박의 특훈으로 리그 최고의 유격수로 각성했다.[35] 다만 현역 선수 시절부터 탈모의 기미는 어느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은퇴 후 코치 시절이던 2020년의 모습을 보면 탈모가 꽤나 진행됐다는 게 느껴질 정도.#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23:05:04에 나무위키 박진만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