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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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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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과의 관계
1.1. 대한반도 정책
1.2. 이승만과의 관계
1.3. 건국훈장 수여
1.4. 6.25 전쟁 시기 한반도 파병 시도
1.5. 박정희 시기
1.6. 이후 행보
1.7. 한국 관련 어록
1.8. 참고 문헌


1. 한국과의 관계[편집]



1.1. 대한반도 정책[편집]


명·청시대 조선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한국을 보다

중국(혹은 타이완) 학계나 한국 학계에서 강조해왔던 것과는 달리, 중화민국 정부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은, 식민지로 전락한 이웃나라에 대한 순수한 지원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부정적인 측면들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다.

(중략) 1942년 11월의 카이로회담을 통하여, 미국의 외교 전략에 따라 강대국의 지위를 갖게 된 중국은 신탁통치에 의한 전후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미국 주도의 방안에 동조하면서 사실상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중국 측에서는 종전을 앞두고 동맹군의 한국 진공 시에 중국군도 참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었고 재정적 원조와 민간투자의 확대 등을 포함한 한국에 대한 지원책을 검토하면서 영향력 확대를 노리기도 했다. 아울러 국민정부 측에서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이전에 거치도록 규정한 적당시기에 대한 방안으로 외교와 국방을 중국인 고문이 담당하는 고문정치를 검토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요컨대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나 국민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은, 전후 강대국으로 부상할 중국이 구상하는 아시아 국제질서의 일부로서 중국의 주변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한 것이었으며 그런 점에서‘약소민족에 대한 호혜적 지원’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장제스나 국민정부의 이러한 한국 인식이나 대 한반도 정책은 앞세대 중국의 정치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쑨원이나[1]

위안스카이[2]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멀게는 책봉조공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는 명·청시대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과 그 맥락이 닿아 있다.

이런 시점에서 바라보는 장제스의 한국 인식은 우리에게 중국은 과연 어떤 존재이며 이런 중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심각한 문제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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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장제스의 한국 인식에 대한 진실, 배경한, 동북아역사재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은 베이징과 난징을 일본에 모두 점령당하고 충칭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여력이 없음에도 중국은 주변국 문제,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당시 미국은 동북아 평화체제라는 큰 그림 속에서 한국을 바라봤지만, 중국은 구체적인 목표 아래 접근했다. 그 목표는 작게는 미국 영국과 손잡고 한반도내 소련의 영향력을 줄이자는 것이었으며, 종국적으론 과거처럼 한반도를 중국의 절대적 지배 아래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대 한반도정책은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로 물들어 있었다. 결국 전쟁이 끝나면 한국을 오랑캐로 규정하던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끝내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는 알려진 것처럼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임정을 인정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임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국 독립당의 임시정부, 즉 일개 정당의 임시정부로 호칭한 데서도 이런 의도는 드러난다.

국민당 정부는 미국과 영국에게도 “경기도 충청도 출신 독립운동가와 황해도 평안도 출신 독립운동가 사이에 분열이 심하다, 한국은 독립운동 단체들 간 반목이 심해 임시정부만 승인하기엔 어려움이 있다”면서 지역 분열을 부각시켰다.

중국은 광복군을 교묘하게 통제하고 그 활동을 제약했다.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줄여 반쯤 굶주리게 함으로써 새로운 세력 영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 국민당 군사위원회는 임정과 맺은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을 통해 광복군이 중국 군사위원회의 직접 통치를 받도록 규정했고, 광복군 사령관인 이청천을 충칭에 남아있게 함으로써 광복군과의 합류를 막기도 했다.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중국은 한국 관련 정보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미국과 영국에 대해 ‘한국은 독립 자격이 없다’는 식의 심리적 선전을 강화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재정 , 영국은 수송, 소련은 보건 문제를 분담하는 대신 중국은 치안 등의 문제를 전담한다는 역할분담론을 주장하면서 한국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렇듯 중국은 한국이 신탁통치로 이어지게 하는데 결정적은 아니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가 국공내전으로 지금의 대만으로 쫓겨 가게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중국은 한반도 분단 문제에서 면죄부를 받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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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국제관계


장제스는 (중략) 조선을 대만과 똑같이 수복하여 중화질서를 철저히 수호하는 것이 쑨원의 가르침이라 믿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다만 이를 실현시킬 힘이 미약하였기에 실패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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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사이번속(四夷藩屬)을 중화영토(中華領土)로, 민국시기 중국의 영토상상과 동아시아 인식, 225p, 유용태, 서울대학교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국인 후원자로 1932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남의사 계열이나 CC파를 통해 지원하였고, 난징 중앙 군관 학교 분교 지원금을 김구에게 보내줘서 이범석 등 독립운동가 양성과 한국광복군 창설도 많이 도와줬고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고 얄타 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해 주었으며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 독립에 관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조차도, 카이로 회담 직전의 비공식 협의 과정 중에 한국의 독립을 먼저 주장한 것은 장제스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으며,[3] 장제스가 카이로에 오지 않았다면, 한반도 문제는 언급될 기회가 적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며,[4] 한국 독립의 은인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겉으로만 한국은 동지의 나라니까 독립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한반도를 중국의 영향권으로 여겼으며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대가로 한국을 중국의 패권 아래 두려는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평가도 있었다.[5]

1938년 말과 1939년 초에 우파 독립운동가 김구와 좌파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각각 만나 한국 독립운동 좌우파의 합작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곧 해체되기는 했지만 그 결과로 5월 김구·김약산 연합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장제스는 국민당 중앙당부 조직부에 조선국권회복운동협력 지도방안을 제정할 것을 지시하고 이를 실시할 것을 승인했다.

1938년 8월 12일,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천청(陳誠) 부장은 장제스에게 한국 광복군과는 성향이 다른 좌파 성향의 조선의용대를 조직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장제스는 “먼저 인원이 얼마나 되며 그들의 출신과 성분이 어떠한지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1938년 9월, 정치부 비서장 겸 제1청의 허중한(賀衷寒) 청장은 조사결과와 편성방안을 올렸다. 10월 10일, 우한 외성을 수호하는 격전이 벌어졌을 때 조선의용대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즉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은 한국광복군보다 조선의용대가 먼저였다. 지도자였던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국민당에 인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중경으로 이동하고 나서 한국 독립당의 주도로 광복군 창설을 추진했지만[6] 임시정부가 중국 영토 내부에 있었으므로 국민당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1940년대 초부터 국민당과 교섭을 시작했지만 장제스는 광복군을 임시정부나 한국독립당이 지휘하는 게 아니라 군사위원회가 지휘하게 하는 등 자국 군대 하에 두려고 했지 독립적인 부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당연하게도 이런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1940년 9월 17일에 단독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대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장제스와 국민당과 갈등,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장제스는 1941년 11월에 광복군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휘하는 게 아니라 군사위원회가 지휘하게 하고 광복군이 한반도 국경에 들어가서도 중화민국의 지휘를 받는다는 내용의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이라는 지침을 만들어 광복군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가 아니라 중국 국민당의 외인부대의 성격을 가지고 중국이 지휘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확실하게 내보였는데 임시정부는 이 지침을 수정하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장제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7]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장제스와 면담을 하는 등 여러차례 9개준승을 철폐하라고 요구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군사위원회가 9개준승의 폐지를 알린 것은 1944년 8월이 되어서였으며, 새로운 군사협정이 맺어져 실질적으로 철폐된 것은 전쟁이 거의 끝난 1945년 5월이었다. 이는 자국에 타국의 군대가 있는 것이 부담되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결국은 광복군을 중국의 지휘체계 아래에 두어 통제하고 향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한 포석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런 광복군의 창설을 둘러싼 임시정부와 국민당 정부와의 갈등은 국민당 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통제와 이용 의도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광복군 문제로 임시정부와 국민당 정부가 갈등하고 있을 때, 임시정부 승인 문제도 생겼다. 1940년대, 특히 종전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전후 한반도 처리 문제를 고려한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문제가 양 정부 간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임시정부 측은 국민당 정부에 승인을 요청한 바 있다. 이에 대하여 국민당의 여러 지도자들은 긍정적인 발언을 하였지만 장제스의 입장은 소극적이었으며 임시정부 승인을 되도록 늦추도록 지시를 하였다. 한국 독립운동 세력이 단결이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 임시정부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나중에 이를 다시 승인함으로써 전후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계산된 의중이 담긴 것이다.

이러는 한편 국민당 정부는 1942년 4월에는 "임정을 지체없이(without delay) 승인하길 희망한다"고 주중미국대사에게 전하는 등 미국에는 오히려 임시정부 승인 의사를 언급하는 양면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오히려 미국 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대표성에 대한 의구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국민당의 이러한 양면성은 카이로회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개최된 미·영·중 삼국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중국을 강대국의 일원으로 대우하면서 전후 아시아질서의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기회를 중국에 부여하여 아시아 지역에서의 자신들이 이익을 확보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장제스는 한반도를 포함하여 아시아에서 중화패권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미국의 군사적·경제적인 지원을 적극 필요로 하는 입장에서 미국 측의 한반도 국제신탁통치구상을 부정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미국에 끌려가는 형세를 보였다. 중일전쟁에 밀려 1938년 충칭으로 피신해 있던 국민당 정부는 태평양전쟁 발발을 계기로 동아시아 지역의 맹주 위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일례로 장제스는 진주만 공격 직후 곧바로 일본·독일·이탈리아 등의 추축국에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종래의 고립상태를 탈피하고 연합국 대열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으론 중국이 열강이 되기 위해서는 미국이 구상하던 전후 신질서맹주 중 하나로 인정받는 것이 최선이기도 했다.

카이로 회담을 앞두고 중국의 장제스는 수많은 항일운동가들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과 대한민국 독립에 대한 요구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카이로회담에 장제스가 참석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일어난 현상이었다. 장제스 역시 국경을 맞댄 지역에 소련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것보다는 독립된 한국의 존재가 중국에게 더욱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회담장에 먼저 도착한 루즈벨트가 만찬회동을 하던 중 장제스가 대뜸 한국의 독립 필요성을 강조하자 루스벨트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왜냐하면 루스벨트는 1943년 3월 워싱턴 회담에서 장제스가 자신이 구상하던 신탁통치안에 이미 동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풍문에 따르면 루즈벨트는 장제스의 의도가 한국에 대한 확장 의도라고 판단하고 "당신은 만주, 펑후 제도, 대만을 가질 수 있지만 한국은 가질 수 없소."라고 논박했다고 한다. 양측의 의견을 반영해 한국조항의 초안은 "일본의 몰락 후 가장 빠른 시기에 자유 독립국가가 된다"로 작성되었다. 그러다가 영국 외교차관 캐도건이 "~적절한 시기에 일본의 통치에서 이탈한다"는 비교적 애매한 문언으로 수정할 것을 주장하자 중국 외무부장 왕충후이와 의견충돌이 일어났고, 결국엔 처칠이 제시한 "적절한 시기에 자유 독립 상태가 됨"으로 최종 결정된다.[8]

이처럼 장제스의 중화민국의 야심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중화민국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약속받지 못하고 미국의 신탁통치안에 순응했다. 사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직전까지만 해도 중국이 미·영의 지원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참석해봐야 유명무실한 결과일 것이고 (자신이) 4거두의 하나가 된다는 것도 허영에 불과하여 실제적으로 도움 되는 것이 전혀 없을 것"이라며 소련과의 관계를 핑계대며 빠져서 자존심이라도 지키려고 했다.[9] 즉, 카이로 회담 당시의 장제스의 태도는 처음부터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미래의 4대 열강으로 대우하고는 있었으나 중국이 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는 것에는 여전히 부정적이었으며, 특히나 미국은 대서양 헌장으로 영토 불확장과 민족 자결주의를 천명한 상태였으니 더더욱 강하게 주장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에서 비록 한반도의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했지만, 전후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하였다. 1944년 9월, 충칭 주재 미국대사와 영국대사의 공동 요청으로 삼국이 함께 한국문제를 연구 토론하기로 협정하였는데 국민당 정부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를 위한 협상이 이루어지자 중국은 적극적으로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팀을 구성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중국은 전쟁이 끝나고 한반도에 연합군을 파견할 때, 중국군도 함께 원정군으로 파견하되 미군과 영국군이 동시에 진격하는 경우, 한강 이남은 영국군과 미군이, 한강 이북에는 중국군이 진주하고 숫자에서도 중국군과 영·미군이 각각 4:1이 되는 정도로 중국군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새로 창설된 한국군도 중국의 지원하에 조직과 훈련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전후 한반도에서 중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확고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광복 이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하는 체제를 갖춰서 중국이 개입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장제스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 줬고, 대외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는 문제에 있어서도 중간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해 준 것은 맞지만 그 이면에는 중화사상과 과거 책봉조공질서에 근거한 한반도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고.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 측의 한국 독립 의견제시 검토는 전후 한반도를 친중국가로 독립시켜 중국 측의 영향력을 확보하며 일본과 소련의 진출을 견제하겠다는 측면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후술할 김신과의 일화를 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면서 몇몇 독립운동가들과 인간적인 친분을 쌓았고 그것이 한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줬던 측면도 없진 않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미래의 패권국가'인 중화민국의 정치가로서 전후 한반도에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하려는 의도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역설적으로 그런 장제스의 강한 야심과 부족한 능력 때문에 한국의 독립 문제가 국제화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일반적으로 전후처리의 원칙 중 하나인 전전복귀(戰前復歸)를 적용하면 한국의 독립은 생각보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당시 연합국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합법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으며[10] 중일전쟁의 개전을 아무리 소급한다고 해도 1931년 만주사변이니 그보다 한참 전인 1910년에 병합된 한반도가 독립이 승인받은 강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지역인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연합국에서 중화민국의 발언권이 매우 강했다면 장제스의 꿈처럼 1894년 청일전쟁 이전의 조공책봉관계가 부활한 back to the 조선이었을 것이고[11] 반대로 중화민국이 연합국에게 무시당했다면 아예 독립하지 못한 상태로 남았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한반도에 대한 야욕에도 불구하고 종속국을 거느리기는 커녕 본토 통일조차 버거웠으며 탈식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승해 최소한의 강대국 지위를 인정받으려 했던 중화민국의 대한반도정책이 결과적으로는 한반도 독립 승인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12]

1.2. 이승만과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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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쑹메이링 부부와 이승만. 1953년 이승만대만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이승만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좋지 않았다. 해방 직전에 한국이 해방되면 누가 한국의 대표로 UN에 출석할 것일까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장제스의 처남이자 중국의 외교 부장인 송자문(쑹쯔원)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로 나섰던 김구, 이승만, 한길수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한길수야 처음부터 송자문에게 줄을 대고 있었고 김구는 장제스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니 당연히 응했지만 이승만은 이 요청을 씹었고 기분이 상한 송자문은 이승만에 대해 장제스에게 안 좋게 말했다. 당연히 장제스는 이승만은 무시하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김구를 지지했다. 장제스가 김구에게 준 20만 달러의 독립 자금의 사용처를 두고도 두 사람은 충돌했었다.

이후 기선을 잡은 것은 이승만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49년 8월에 이승만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장제스가 방문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당신처럼 분열이나 조장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차라리 마오쩌둥이 훨씬 믿음직하니 앞으로 한반도 문제는 마오쩌둥 주석하고만 논의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고. 이에 장제스는 송자문 탓을 하며 이승만을 대형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사과했다는 말이 있다. 근데 이 일화에 너무 의미를 둘 것은 없는 것이 대형이란 칭호 자체가 당시 중국에선 굉장히 헤픈 칭호였다. 장제스가 형제 운운했던 사람들 중에선 그와 적이 된 사람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펑위샹이나 리쭝런. 그 둘과도 의형제 결의를 맺고 하하호호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중국에서 유학이나 사업차 인간관계 맺으며 꽌시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중국에서 형님 아우 운운하는건 진짜 그만한 친밀감의 표현이라기보단 캐쥬얼하게 친한척 하면서도 그만큼 거리를 두는 표현에 가깝다.

그래도 1947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 전 중국 난징을 방문했을 때 장제스에게 직접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을 지지한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고 쑨원의 중산릉을 직접 방문해서 참배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신탁통치건으로 인한 미군정과의 사이 악화 때문에 한국으로의 귀국길이 막히자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 귀국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런데 주한중화민국대사를 역임했던 사오위린(邵毓麟)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과 달리 장제스는 이승만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의도가 어쨌건 현실에서는 중화민국이 대륙에서 밀려난 결과, 한국을 위성국화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선 물 건너간 소리가 되어버렸다. 한국도 물론 결코 큰 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화민국의 남은 영토인 타이완 섬은 거리도 멀뿐더러 한국의 1/3을 조금 넘는 수준의 섬이 영토의 거의 전부인, 한국보다 많이 작은 나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


1.3. 건국훈장 수여[편집]


파일:external/cfs1.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EJHaGhAZnMx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NjIuSlBHLnRodW1i&filename=62.jpg
장제스에게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정 기념당에 전시되어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공헌을 기려서 건국 훈장을 수여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그의 부인 쑹메이링, 쑨원, 천궈푸, 천치메이와 같이 임시 정부와 한국의 독립 운동을 도운 중화민국의 정부 요인들에게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1.4. 6.25 전쟁 시기 한반도 파병 시도[편집]


장제스는 6.25 전쟁 발발 당일 자신의 일기장에 "我預料也."[13]라는 글을 썼고 이승만에게는 '소련이 획책한 음모 중 하나'라고 분석하는 전문을 보냈으며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에는 대한민국국부군 3개 사단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유엔에 파병허가를 요청했다. 3일 후 유엔 안보리가 유엔 회원국의 한반도 파병들 결의하자 장제스는 미국에 있는 구웨이쥔과 후스에게 트루먼을 만나 6월 26일에 유엔에 보냈던 한반도 파병건의안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트루먼은 장제스의 제의를 수용해 한국전에서의 미군의 희생을 줄일 생각을 했으며 한국에서 전쟁 상황을 시찰한 맥아더도 트루먼에게 장제스의 제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애치슨이 국부군을 파병해도 대한민국 국군보다 전력이 강한 것도 아니며[14] 중공이 그걸 트집잡아 북한 편으로 한반도에 개입할 수 있다고 반대해서 트루먼은 장제스의 요구를 거절했다.[15]

국제적 분위기 역시 장제스의 국부군 파병 제의를 좋게 보지 않았다. 미국은 유럽대륙과 한반도 두 곳에서의 양면전쟁을 치르길 원치 않았으며, 연합국도 한국전쟁이 세계 대전으로 확산되지 말고 조기 종전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장제스는 1952년 11월 29일에 대만을 방문한 라이프지(誌)의 편집장인 헨리 루스(Henry Luce)를 초대한 연회석상에서도 미국의 새 정부가 중공을 원조하는 소련처럼 국민당을 도와주길 희망한다거나 국민당과 국부군이 한국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국부군의 한반도 파병을 주장했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에서 국부군 운용을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장제스는 포기하지 않고 국부군의 한반도 파병을 계속 건의했지만 미국은 반응하지 않았고, 대만이 6.25 전쟁 UN 참전국 목록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16]

1.5. 박정희 시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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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타이베이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오른편의 군복을 차려입은 하얀 수염의 노인이 장제스이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이념적 반공 동맹을 유지하는 우호 관계였다. 대만이 국제 연합에서 추방당하고 미국에게도 버림받자 박정희 정권도 슬슬 중국과 접촉을 시도하는 등 장제스의 애간장을 태웠지만 한중 수교 때까지 한국과 대만은 현실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됐을 때도 김신 대만 대사를 통해 미국은 대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 달라고 박정희에게 친필 편지를 보낼 정도로 대만은 미국과 소통하려면 한국의 도움이라도 있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회담에서 이에 대해 물어보자 리처드 닉슨은 "대만은 중국 대륙의 마지막 자유의 보루"라고 대답했고, 이를 전해 듣고 장제스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6. 이후 행보[편집]


김구와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고 김구의 아들인 김신의 안가를 주선해 주는 등 인연이 깊었다. 1962년 김신이 공군에서 예편하여 대만 대사로 부임하자 몹시 반가워했으며 김신에게 "나는 자네를 일개 대사로 생각하지 않네. 자네 부친과 나는 항일 투쟁 동지였으니 자네는 나의 집안 사람이나 다름없네."라고 환대했으며 복잡한 의전을 생략하고 김신과는 정말 가족을 불러올 때처럼 허물없이 자주 대화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장징궈(장제스의 아들)와 너는 의형제와 다름 없지 않냐"며 상당히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장제스는 김신에게 털어놓길, 중국 대륙에서 패배한 이유는 주변에서 좋은 얘기만 하고 안 좋은 나라 상황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서라고 후회하며 대만에 고칠 점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거나 자주 대만 내정에 대해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김신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내정 간섭이라고 말을 자주 피했고 김신에게 뇌물을 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과묵하고 웃지도 않는 장제스였지만 김신과 함께 있을 때는 자주 웃고 떠들었으며 장제스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경호원들이 김신을 데려와서 장제스의 기분을 풀어줄 정도였다 한다. (1975년 4월 7일자 장제스 사망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물론 국내 기사인만큼 어느 정도 과장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임시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여 1969년(김구의 서거 20주기이기도 했다) 남산 공원에 세워진 김구 동상에는 장제스가 현직 총통 자격으로 보낸 추모 글귀가 조각되어 있다.

1946년 광복 이후 제작된 한국 영화「자유만세」를 보고 "自由萬歲 韓國萬歲(자유만세 한국만세)"라는 휘호를 썼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1963년 한국에 대흉년이 들어서 긴급히 쌀을 사와야 할 일이 있었는데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 의장은 김신 대사에게 대만에서 쌀 5만 톤을 사올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대만에서도 흉년이 들어서 한국에 쌀을 팔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대만 행정원장은 쌀을 팔 수 없다고 김신을 돌려보내야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장제스가 즉각 국무 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에 쌀을 팔 것을 지시했다. 장관들이 반대했지만 장제스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김신을 쌀 5만 톤을 사서 한국에 보낼 수 있었다. 이에 김신이 장제스에게 감사를 표하자 장제스는 우리가 대륙을 아직까지 갖고 있었다면 그까짓 5만 톤이 아니라 55만 톤 정도는 거저로 주었을 것이라고 한국 같은 각별한 나라에게 쌀을 돈 받고 팔아야 하는 것이 애석하다며 오히려 미안해했다고 한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는 박정희의 손을 잡으면서 "내 나이가 이제 80이 다 되어가니 아시아의 반공 지도자는 박 대통령이 이으시오"라고 말했다 한다. 둘 다 반공을 명목으로 점점 독재자가 되는 과정을 보면 웃프기도 하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하자, 한국 정부에서는 당시 국무 총리였던 김종필을 대표로 조문단을 파견했다. 관련 영상.

중정기념당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건국훈장이 전시되어 있다.

결론적으로는 중국을 통치했을 당시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최대 물주였으며 김구, 이승만, 김규식, 이시영, 이동녕 등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도와주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도 공헌을 했지만 속내는 독립운동 지원의 대가로 임시정부를 친중화하여 중화민국의 위성국으로 만들려던 것이었다.[17] 광복 이후에도 신탁통치에 끼어들어 한반도 통제권을 노리는 등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인물이며, 결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지금의 대만으로 쫓겨난 다음 반공동맹이라는 명분으로 한반도 분단 문제에서 면책을 받게 된 셈이다.


1.7. 한국 관련 어록[편집]


“우리는 동북 4성의 실지를 회복할 뿐 아니라 조선도 옛날부터 중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18]

1934년 4월 강연에서. 장중정총통당안(蔣中正總統檔案)25권, 대만 국사관(國史館), 2010, 33p.[19]


“일본에게 빼앗긴 (중략) 조선을 탈환해야 한다, (중략) 쑨원이 남긴 과제 중 하나는 조선과 타이완을 회복하여 중화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20]

1938년 8월의 강연에서. 장중정총통당안(蔣中正總統檔案) 41권, 대만 국사관(國史館),2010, 321p ~ 322p.


오늘 훙커우신화원(공원을 칭하고 있음)에서 왜놈(倭寇) 중요 관리들 모두 중상 입음(今日上海虹口新花园倭寇重要官吏皆受重伤)[21]

장제스 일기, 윤봉길홍커우 공원 의거 하루 뒤


중국혁명 최후 목적의 하나가 조선을 도와 완전독립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일은 아주 힘든 일이므로 한국 혁명동지들은 일심단결하여 복국운동을 완성하기를 희망한다.

확실히 영국미국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니 장래 필경 쟁의(爭議)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한국(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 성심성의로 통일된 모습을 보이기 위한 노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중국도 이 문제(한국의 완전독립)를 쟁취할 수 있고 이 일에 착수하기도 쉽지 않겠는가.

카이로 회담김구와의 회담에서


조선 혁명당 영수 김구 등을 만났다. 그들한테 내부 단결에 힘써(勸勉內部團結) 달라고 권하고 격려하였고 우리 정부가 주장하려 하고 있는 전후 조선독립 주장을 실현하는 데 협력해 달라고 했다.

장제스 일기, 카이로 회담 직전


조선 독립 문제에 대해 나는 특별히 루스벨트의 중시를 끄는 데 힘을 넣었다. 나는 루 씨한테 (조선 문제에 관한) 나의 주장에 찬동하고 도와줄 것(贊助)을 요구했다.

1943년 11월 23일 장제스 일기


“한국 혁명당 김구에게 불화(佛貨) 1억5000만 프랑, 미화(美貨) 20만 달러를 지원함 ~ 우리 정부가 비록 가난하기는 하나 한국에 대해 어찌 후하게 대하지 아니하랴.

장제스 일기, 1945년 1월 4일 ‘전번 주의 반성록’


한국의 혁명당원들이 오늘과 같이 조국에 돌아갈 날이 왔으니 이것은 내가 (그들을) 받들고 세워서(扶掖) 이루어진 일이어늘 그 영광이 어찌 하나님을 빛내지 아니하랴. 그냥 기도할 뿐이오니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기를.

1945.11.12 장제스 일기


우리가 대륙을 아직까지 갖고 있었다면 그까짓 5만 톤이 아니라 55만 톤 정도는 거저로 주었을 것...한국 같은 각별한 나라에게 쌀을 돈 받고 팔아야 하는 것이 애석하다.

1963년 김신과의 회담


내 나이가 이제 80이 다 되어가니 아시아의 반공 지도자는 박 대통령이 이으시오.

1965년 한중정상회담



1.8. 참고 문헌[편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화민국의 관계, 공유식, 현대사광장 제4호
  •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대한반도 정책 비교, 모준영, 고려대학교
  • 사이번속(四夷藩屬)을 중화영토(中華領土)로 - 민국시기 중국의 영토상상과 동아시아 인식 - 유용태, 서울대학교
  • 쑨원과 한국, 중화주의와 사대주의의 교차, 배경한, 한울아카데미
  • 1945년 광복 전후 중국국민당정부의 한반도 구상과 한국, 김지훈, 군사지 제 96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1] 청일전쟁에서 중국은 패배의 결과로 조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 조선의 독립을 침해하고 있다는 일본의 정의로운 주장에 승복하여 조선에서 손을 뗀 것이었고 중국인들은 그 때문에 일본을 숭배까지 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출처: 쑨원과 한국, 중화주의와 사대주의의 교차. 배경한, 한울아카데미 출판. 145p[2] “조선은 본래 중국의 속국이다. 중국을 버린다면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조선을 청나라의 반식민지로 전락시키고 근대화 기회를 빼앗아 경술국치를 맞게 한 원흉이다.#[3] 카이로회담에서의 한국문제와 蔣介石, 배경한, 역사학보 제224호, p. 318[4] 카이로선언의 국제정치적 의미, 최영호, 영토해양연구, p. 72[5] 장제스의 학설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쑨원이나 다이지타오가 그러했듯이 장제스는 근대국가를 추구하면서도 유가사상에 따른 이상향을 꿈꾸는, 어찌보면 모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성향에서 기초했든 한반도를 영향권 안에 두는 것을 중국의 주권 회복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으며, 임시정부나 독립후의 한국을 대등한 현대국가 간의 관계로 보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6] 당초에는 임시정부 내부의 분열과 먼저 지원을 받고 있던 조선의용대와의 관계설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정부 산하가 아닌 한독당 소속의 군대로 창설되었다.[7] 3ㆍ1운동.임정 100주년(38)장제스의 임정 지원, '선의'뿐일까?[8] 출처: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 과정, 정병준, 역사비평 통권 107호, p.329 - 338[9] 출처: 카이로회담에서의 한국문제와 蔣介石, 배경한, 역사학보 제224집, p.309[10] 조선과 한국:두 지정학적 관념의 연속과 분화, 김명섭, 연세대학교 125p[11] 물론 현대 국제사회에 맞도록 수정은 조금이라도 했을 것이다.[12] 출처 장개석 국민정부의 미국 편승 전략과 한국의 독립 문제, 1942-1945, 김용신, 사회과학논집 제49집 1호[13] '내가 예상했던 대로 되었다'는 뜻[14] 실제로 당시 국부군의 전력은 장비 상태 불량, 정비되지 않은 조직, 사기 저하 등의 문제가 쌓여서 파병 이전에 타이완 섬 방어도 버거웠다. 그래서 맥아더가 7월 31일 대만을 방문했을 때 장제스가 국부군의 파병을 또 제안하자 맥아더는 중공과의 대치 상황에서 타이완의 전력공백을 고려했을 때 바람직하지 않고 미군의 전력분산을 초래할 수 있으며 국부군을 무장시킬 무기 부족 문제와 병력 수송 능력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거절했다.[15]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Chinese Ambassador, 1 July 1950 FRUS 1950, vol.8, 276p ~ 277p[16] 당시 미국은 장개석이 중공과의 대치 상황에서 타이완 섬을 지키기도 버거울 상황일 텐데도 계속 파병을 시도했던 이유에 대해 6.25 전쟁을 양면전쟁으로 이끌어 중공의 개입을 유도한 다음 그 틈을 타 대륙을 완전수복하기 위한 계획 정도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냥 한반도 문제는 중국이 개입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철저히 중화사상에 기반한 국제관계 인식 때문이었다.[17] 예를 들어 조소앙은 장제스가 지원을 미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자신의 사상과 영향력을 너무 주입하려 한다며 미국에 호소할 정도로 한반도를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 아래 두고 싶어했다.[18] 장제스가 한국을 속으로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가장 잘 나타낸 발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한국 좋은 일만 하고 대만으로 갔지만 한국에 대한 여러가지 선행이 한국을 조선 시절처럼 최소한 형 아우 하는 상하관계 내지 현대판 조공책봉관계로 만드는게 목적인 셈이다.[19] 장제스의 일생 동안 관련된 중요 문건들을 모은 자료인데 총 29만 건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하여 대만 정부 기관이 크게 10부류로 분류했다.[20] 장제스 이전의 국민당 지도자였던 쑨원은 한반도가 옛날부터 중화대륙의 속국이었지만 사악한 서양오랑캐들과 결탁한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탈환해야 할 중국의 영토로 생각했는데, 그 예시로 1921년에 중국이 잃어버린 영토는 가장 최근의 것부터 말하자면 웨이하이웨이와 뤼순, 다롄, 칭다오, 홍콩, 그리고 광저우 만이 있고 그 전의 것으로는 조선, 타이완, 펑후열도가 있다고 연설했으며 1923년 8월과 1924년 2월에는 중국이 다시 강력해지면 조선이 저절로 중국 밑에 다시 들어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그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였던 박은식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단은 중국과 협력해야겠지만 그와 같이 "만일 중국이 강성해진다면 교만해질 것이며 한반도에 대한 야심이 생겨 중국의 동정은 얻을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날카롭게 경고했다. (출처: 쑨원과 한국, 중화주의와 사대주의의 교차, 배경한 지음. 한울아카데미 출판. 243p)[21] 당시 장제스는 만주사변으로 중국 본토였던 만주땅 전체가 일본 제국한테 넘어가 대단히 분노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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