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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전쟁(제2차 혁명)
Second Revolution
第二革命

기간
1913년 7월 12일 ~ 9월 12일
장소
중국 대륙 남부
원인
위안스카이의 독재시도 및 지속적인 반대파 탄압
교전세력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북양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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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민당기.png 중국국민당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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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민당기.png 황싱
파일:중국 국민당기.png 천중밍
파일:중국 국민당기.png 천치메이
파일:중국 국민당기.png 후한민
파일:중국 국민당기.png 리례쥔
결과
혁명 실패 및 위안스카이의 체재 유지
영향
중국국민당원들의 대규모 망명, 위안스카이중화민국 국회 해산, 위안스카이의 독재 시작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토원군의 거병
3.2. 혁명의 진압
3.3. 쑨원의 망명과 백랑기의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1.1. 북양정부
6.1.2. 국민당
6.2. 사건



1. 개요[편집]




1913년 7월 위안스카이의 독재에 맞선 중국 국민당의 토원운동. 계축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계축전쟁이라고 하며 흔히 제2차 혁명이라 불리며 강서와 난징[1]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강녕전쟁(江寧戰爭)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준비없는 봉기였는데다가 호응이 부재하여 압도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2개월 만에 진압당하고 쑨원을 비롯한 국민당원들은 일본 등 해외로 대거 망명해야만 했다.


2. 배경[편집]



2.1. 쑹자오런 암살 사건선후대차관 사건[편집]


1913년 4월 8일 중화민국 초대국회가 개막했다. 초대국회를 선출하는 선거에서는 국민당이 약진하여 참의원 정, 부의장에 국민당 소속 장쥐, 왕정팅이 당선되었고 중의원 596석 중 269석, 참의원 274석 중 123석을 차지하는 등 절대 다수의 의석이 국민당에게 돌아갔다. 이에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하며 국민당에 대립하고 있던 임시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당황했다. 국민당의 영도자이며 국민당 이사장 대리를 맡고 있는 쑹자오런은 내각 책임제, 지방자치제, 중의원에서 국무총리 선출, 헌법 제정을 주장하며 위안스카이에게 맞섰고 이 때문에 위안스카이와 총리 자오빙쥔은 쑹자오런과 적대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국무총리 자오빙쥔을 시켜 쑹자오런을 제거할 것을 지시했고 자오빙쥔은 비서 홍술조에게 쑹자오런 암살을 맡겼다. 홍술조는 무사영을 매수하여 1913년 3월 20일 밤 10시 40분 쑹자오런이 베이징으로 가기 위해 상하이역에 나타나자 저격했다. 쑹자오런은 3월 22일 사망했다.

4월 24일 무사영이 체포되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위안스카이는 무사영과 무사영을 매수한 응기승 역시 암살해버렸고 홍술조가 독일 조계지로 달아나는 것을 방관했다. 또한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견제하기 위해 집익사, 정우회, 계축동지회 등의 조직을 지원하여 국민당 분열 공작을 획책하는 한편, 공화당, 통일당, 민주당이 국민당에 대항하기 위해 1912년 4월 24일 합당을 결정, 5월 5일 진보당을 결성하자 여기에 자금을 지원했다. 진보당은 대총통 중심제를 주장하며 내각제를 주장하는 국민당에 맞섰다.

이어 1913년 4월 26일 국회의 허락 없이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5국 은행단으로부터 염세를 담보로 2500만 파운드의 차관을 빌리려 한 선후대차관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왕정팅장쥐의 면담 요구를 일방적으로 거부하고 국민당 의원들의 저지를 무시하고 협정을 체결해버렸다. 쑹자오런 암살과 선후대차관 사건이 있자 국민당과 위안스카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위안스카이의 자금 지원을 받던 량치차오의 진보당은 일단 차관을 승인하였으나 위안스카이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350만 파운드의 차관을 또 빌려온 것이 밝혀지면서 정부 탄핵 여론이 일었다. 위안스카이는 총리 자오빙쥔과 재정부장 주학희를 경질하여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자오빙쥔은 직예총독으로 좌천되어 1914년 2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더군다나 1913년 5월, 러시아 제국과 외몽골 문제로 협약을 맺은 것 역시 문제가 되었다. 외몽골은 복드 칸이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사실상의 독립국 상태였고 러시아 제국의 몽골의 독립을 지원했다. 중화민국은 몽골의 독립을 불허하고 있었으나 1913년 5월 20일, 중러선언이 발표되면서 외몽골의 자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진보당은 외몽골이 실질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벗어났으니 중러선언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국민당은 이를 승인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국민당의 반발로 중러선언은 국회에서 부결되었지만 선후대차관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안스카이는 국회의 거부를 묵살했다.


2.2. 3독 해직 사건[편집]


사태가 이쯤되자 국민당 내부에서 무력으로 위안스카이를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쑨원은 나가사키에서 쑹자오런 암살 소식을 듣고 이를 철저히 추궁하도록 했다. 위안스카이가 황싱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공안사건을 조작하는 한편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국민당을 무시하자 쑨원은 무력 토벌을 결심하고 일본 정부를 설득하여 위안스카이를 고립시키고 후한민, 탄옌카이 등이 이끄는 병력을 바탕으로 혁명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지만 황싱, 후한민이 법을 통해 위안스카이를 타도하자고 반대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미 무력을 동원하여 국민당을 분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13년 기준으로 전국의 21명의 도독 중에서 위안스카이 지지파가 12인, 국민당 지지파가 9인이었는데 위안스카이는 강서도독 리례쥔, 안휘도독 백문울, 광동도독 후한민, 호남도독 탄옌카이 등이 자신에게 격렬히 반대하는 것을 알아 경계하고 있었다.

1913년 5월 5일 위안스카이는 리춘이 지휘하는 제6진을 하남성 신양으로 파견했고 5월 6일 총통부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남방작전을 정했다. 그리고 장쉰의 제5진도 진포선에 배치하여 강소와 강서의 국민당 진압을 준비했다. 5월 15일 위안스카이는 황싱이 가지고 있던 육군상장 계급을 취소해버리고 섬서도독 장봉홰, 산서도독 옌시산, 직예도독 펑궈장을 시켜 황싱을 비애국자라고 공격하게 했다. 5월 21일, 위안스카이는 비서장 량스이를 시켜 국민당에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을 전했다.

"지금 보니 쑨원과 황싱은 난동을 피우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있다. 이쪽에서도 난동이고 저쪽에서도 난동이다. 나는 4억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중임을 맡은 사람으로 이런 난동을 내버려둘 수 없다. 나는 정치, 군사 경험 면에서 또 외교적 신용 면에서 누구 못지 않다고 자신한다. 만약 그대들의 능력이 나를 대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 역시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들이 감히 다른 정부를 조직한다면 나는 군사로 그대들을 토벌할 것이다.


천춘쉬안, 오정방 등은 남북분열을 우려하여 평화해결을 조언했지만 위안스카이는 무력 토벌의 뜻을 굳힌 후였다. 이어 6월 9일 강서도독 리례쥔이 본직을 망각하고 선동을 하여 혼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면직시켰고 리위안훙에게 강서도독을 겸직하게 했다. 위안스카이는 리례쥔에게 거액의 금전을 주며 서둘러 강서성을 떠날 것을 종용했으나 리례쥔은 거부했다. 또한 구양무를 강서호군사로 임명하고 6월 14일 후한민을 광동도독에서 면직시켜 서장선무사로 옮기게 했는데 후한민은 서장선무사 취임을 거부하고 상하이로 떠났다. 6월 30일 위안스카이는 안휘도독 백문울 역시 면직시켜 섬감주변사로 옮겼으나 백문울 역시 취임을 거부하고 난징으로 떠났다. 위안스카이는 신임 안휘도독으로 손다삼을 임명하고 안휘에 주둔한 장군 호만태에게 10만냥을 주어 매수하여 안휘성을 장악했다. 이로써 강경한 국민당 지지파 3인의 도독이 해임되면서 국민당의 무력기반이 와해되었다.


3. 전개[편집]



3.1. 토원군의 거병[편집]


사태가 이쯤되자 위안스카이를 무력으로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일어났다. 선후대차관 사건 다음날인 4월 27일 '정부의 차관이 의원의 결의를 거치지 않고 조인되었음은 입헌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항의전보를 타전하며 격렬히 저항했던 안휘도독 백문울이 제일 먼저 상하이의 천치메이 집을 방문해서 쑨원에게 자신이 거병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쑨원은 위안스카이의 기반에 가까운 안휘성에서 먼저 거병하는 것은 조기진압당할 가능성이 커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만류했다. 이 때문에 쑨원은 백문울을 만류하는 한편 광동의 후한민과 호남의 탄옌카이를 거병시키려 했지만 위안스카이가 선수를 쳐서 이들을 모두 해임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쑨원은 열강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차관 지급 중지를 호소했고 일본을 방문하여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위안스카이가 측근 쑨바오치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이 쑨원을 지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상하이에서 쑨원이 회의를 소집하여 다시 토원을 주장했고 리례쥔이 남방 각성이 호응하면 기의를 일으키겠다고 하였다. 이에 쑨원은 리례쥔을 토원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각성의 호응에 맞추어 위안스카이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구강요새사령관 진정훈이 리위안훙에게 군대 지원을 요청하였다. 리위안훙은 리춘을 파견해 1913년 7월 7일 구강 사하진에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이로 인해 강서의 민심이 동요하자 리례쥔이 그때를 틈타 7월 8일 호구에서 부하들을 규합하여 호구요새를 점령했다. 7월 9일 리례쥔은 강서호군사와 각 기관에 북군을 막기 위해 있는 힘을 다 하겠다고 타전했고 7월 12일 강서성의 독립을 선포, 토원군을 조직하고 7성 토원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계축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강서호군사 구양무를 설득해 강서도독의 명의로 북양정부 이탈을 선포하도록 설득하였다.

리례쥔의 봉기에 호응하여 7월 15일 황싱이 난징에서 강소성의 독립을 선포하고 강소토원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7월 16일 천치메이가 상하이토원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제조국 본부를 공격했다. 천치메이는 조카 천궈푸에게 권총으로 무장한 결사대 200명을 지휘하여 상하이 제조국을 점령할 것을 지시했다. 7월 17일 백문울이 안휘성의 독립을 선포하고 토원군을 조직했으며 7월 18일 천중밍이 광동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7월 18일 유영건의 부대가 상하이의 토원군과 합류하여 상하이 남부 용화 일대를 점령했고 7월 22일 상하이에 대한 총공격을 실시했다.

7월 25일에는 국민당의 압력으로 호남성의 탄옌카이가 독립을 선포했으며 8월 4일에는 웅극무가 충칭에서 사천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3.2. 혁명의 진압[편집]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빠른 대응과 호응 부진으로 혁명은 곧 위기에 처했다. 상하이의 경우, 이미 위안스카이가 5월 28일 부하 서기문에게 공안사건을 조작하게 하여 그걸 구실로 정여성에게 해군 부대를 이끌고 상하이 제조국을 수비하게 한 후였다. 또한 해군 총사령관 이정신에게도 많은 돈을 주어 매수했다. 7월 22일의 총공격에 61단과 37단 등 일부 군부대가 혁명군에 호응하여 제조국에 맹공을 퍼부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는 해군이 포격으로 응수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고 18문의 대포와 탄약 170여 상자등 많은 물자를 잃고 퇴각했다. 정여성은 남시의 상단에게 천치메이를 추방하지 않으면 시가지를 폐허로 만들겠다고 위협했고 이 때문에 상인들은 혁명군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천치메이는 사령부를 북쪽으로 후퇴시켰다.

다른 지역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라서 강소성 독립에 마지못해 동의했던 강소도독 정덕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을 취소해버리면서 황싱이 난징에서 피신해야 했고 8월 3일 천중밍도 부하들의 배반과 광서군벌 루룽팅의 공격으로 광동에서 쫓겨나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2] 8월 6일 백문울도 무호로 퇴각하면서 안휘성의 독립이 취소되었으며 쉬충즈의 압력으로 독립을 선포한 복건도독 손도인도 쉬충즈가 8월 9일 복건성을 떠나자마자 독립을 바로 취소했다. 천치메이는 육군 93단을 포섭하여 혁명군에 가담시키려 했지만 93단 단장 진기울은 이미 위안스카이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그나마 1개 대대가 혁명군에 합류하여 유영건의 부대와 함께 제조국을 공격했지만 역시나 해군의 견고한 저항에 혁명군 대대장 장소량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이어 적십자사, 상단, 조계지가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면서 천치메이에게 상하이 퇴거를 요구했다. 갑북 호주회관의 혁명군은 조계지에서 출동한 영국군에게 포위되어 무장해제당했고 천치메이는 쥐정이 지키고 있던 오송 포대로 퇴각해 저항했으나 8월 13일 정부군의 반격에 오송포대를 포기하면서 상하이 방면도 패주했다.[3] 8월 18일 난창이 함락되어 9월 1일 강서성에서도 혁명군이 패주했다. 쩌우루의 독립 시도는 아예 성사되지도 못했다.

호남의 탄옌카이도 사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8월 13일 독립을 취소했으며 적극적으로 위안스카이 타도를 주장하던 청첸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9월 12일 사천성의 웅극무마저 패주하면서 계축전쟁은 완전히 국민당의 패배로 끝났다. 위안스카이는 반란을 일으켰던 각 지방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지방관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는 한편 많은 부대를 파견하여 각 지방을 장악하고 각 지방의 국민당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3.3. 쑨원의 망명과 백랑기의[편집]


상하이에서의 궐기가 실패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쑨원은 일본 망명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타이완을 경유하여 고베에 도착한 8월 9일에는 이미 위안스카이의 요청에 따라 일본 정부가 쑨원을 체포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아먀 미쓰루[4] 등의 도움으로 고베에 은둔하며 후한민, 랴오중카이 등의 측근들과 합류했다. 이후 이누카이 쓰요시 등이 쑨원을 옹호하면서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는 쑨원 체포령을 취소했다. 이후 천치메이, 쥐정 등이 속속 쑨원에게 합류했다. 쑨원은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여 토원의 기회를 엿보았다.

한편 2차 혁명과는 무관한 반원운동이 하남성에서 일어났다. 위안스카이의 친척 장진방은 하남도독으로써 갖은 횡포를 부렸는데 이에 신해혁명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군이 조직되었다. 왕천종이 지도하는 하남성 민군은 재물을 털어 빈자를 구원하자는 구호를 걸고 세력이 확장되었고 중원부한군, 혹은 공민토적군으로 스스로를 일컬으며 위안스카이 타도를 외쳤다. 이를 백랑기의라고 한다. 이들이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에 혁명당도 지원을 하였고 쑨원은 능월을 파견해 왕천종과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큰 도움을 주진 못했다. 민군은 하남, 호북, 안휘, 섬서 감숙 등 5개 성까지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위안스카이가 돤치루이와 육건장에게 25만의 병력을 주어 돤치루이에게 안휘도독을 겸하게 하고 자오티를 초비독판에 임명하여 투입하자 백랑기의도 완전히 진압, 실패로 끝났다.


4. 결과[편집]


한편 위안스카이는 중의원 오한지와 서수균을 암살하고 국민당 의원 정상겸 등 8인을 체포하는 등 공포정치를 이어나갔다. 국민당의 소요를 진압한 위안스카이에 대한 열강의 지지는 최고조에 달했고 쑨원은 지금까지의 고평가가 터무니없던 폭도로 비난받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믿을 수 없는 도독과 장군들을 대거 해임하는 한편 강서, 강소, 안휘, 호남에 심복들을 배치하고 호북도독을 겸하던 부총통 리위안훙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9월 11일에 진보당 웅희령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소위 '일류내각'을 조직하였고 공민단을 동원한 부정선거에서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가 정식 대총통에 선출되었고 위안스카이는 쑨원, 천치메이, 장계, 리례쥔, 백문울 등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했다. 이어 국민당을 반역정당으로 몰아 해산하고 1914년에는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1915년, 위안스카이는 아예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의 자리를 엿보았으나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때 미쓰이그룹을 통해 쑨원과 황싱에게 만약 혁명 성공 이후 만주를 일본에 할양한다면 2천만 엔의 군사비와 2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사장비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쑨원과 황싱은 이에 동의했지만 최종적으로 일본 정부가 이 계획을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고 하는데... 이 일화를 소개하는 해롤드 시프린부터가 이 일화가 '검증되지 않은 한 자료'에서 나온 것으로 지적하니까 말 그대로 썰로 보면 되겠다.


5. 참고문헌[편집]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호승, 인간사랑.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중국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6. 관련문서[편집]



6.1. 인물[편집]



6.1.1. 북양정부[편집]




6.1.2. 국민당[편집]




6.2.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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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청시대 난징의 공식명칭은 강녕(江寧)이었다.[2] 천중밍은 이 일로 원한을 품게 되어 2차 호법운동에 반대했고 급기야 1922년 영풍함 사건을 일으킨다.[3] 이때 천치메이장제스는 체포 직전까지 갔으나 천치메이의 조카 천궈푸가 기지를 발휘해서 탈출할 수 있었다.[4] 한국에는 두산만으로 흔히 알려진 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