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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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부사
정숙공(貞肅公)
류정현
柳廷顯

출생
1355년(공민왕 4)
사망
1426년 6월 29일[1] (향년 70 ~ 71세)[2]
(음력 세종 8년 5월 15일)[3]
재임기간
제15대 영의정부사
1416년 11월 29일[4] - 1418년 7월 17일[5]
(음력 태종 16년 11월 2일 - 태종 18년 6월 5일)
제18대 영의정부사
1419년 1월 11일[6] - 1424년 10월 8일[7]
(음력 1418년, 세종 즉위년 12월 7일 - 세종 6년 9월 7일)
시호
정숙(貞肅)
본관
문화 류씨
부모
부친 - 류진(柳鎭)
부모
부인 - 청주 정씨 정오(鄭䫨)의 딸
자녀
장남 - 류의(柳顗)
차남 - 류장(柳暲)

1. 개요
2. 생애
3. 수전노 재상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류정현(柳廷顯) 또는 유정현은 여말선초의 관료, 조선정승이다.

고려 원 간섭기 중찬(中贊)을 지낸 류경의 자손이며, 아버지는 류진(柳鎭). 태종세종 대의 재상이다. 주로 태종의 조종을 받아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운 일과 세종의 장인 심온의 국문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문화 류씨는 여말선초에 상당한 영달을 누린 가문으로,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는 75성관의 명문거족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8]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가 정도전의 일파라는 이유로 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당한 류만수는 그의 사촌[9]이고, 태종 때 우의정에 오른 류량(柳亮) 역시 류정현의 일족이다.


2. 생애[편집]


고려 말 음보로 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조선이 건국되고 정몽주 잔당을 숙청하는 과정에 관직을 회수당하고 태조가 즉위하자마자 귀양을 갔다가 자식 둘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1393년(태조 2) 관직을 돌려받았다. 1394년(태조 3) 상주 목사에 임명되었다가 각 도의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 의정부 참찬(參贊), 찬성(贊成) 등을 거쳐 1416년 좌의정이 되었고 같은 해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하고 새로운 세자를 세우려 할 때 충녕대군을 세우라고 주장하라는 태종의 언질을 받고 박은과 함께 '어진 이'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데 일조했다. 세종이 즉위하고 상왕이었던 태종이 추진한 대마도 정벌 당시 삼군도통사로 임명되어 이종무를 휘하에 두고 대마도 정벌을 총지휘했다.

태종이 심온을 숙청할 당시 옥사를 책임지고 박은과 함께 심온을 주도적으로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폭풍을 막기 위해 심온의 가족까지 처벌할 것을 주장하여 관노로 만든다. 하지만 태종 사후 세종에 의해 재상급 관직을 거치면서 궤장까지 하사받았다. 세종의 원수와 같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임을 맡긴 이유는 그가 건국 초 조선에서 제일가는 재정관리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이후 경시서(京市署) 도제조에 임명되어 하루종일 시전에 죽치고 앉아 물물거래를 단속하며 백성이 자살할 정도로 각박하게 법을 집행했으며[10], 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해 방만한 예산 운영을 개선하느라 필수 비품마저 구하기 힘들 정도로 예산을 줄였다. 이외에 개인의 토지와 노비의 소유를 제한하는 법안을 제시하고 관리의 녹봉도 화폐로 주자고 주장했으며 강물이 어는 겨울에는 조운을 육로로 바꾸자고 제안했으며 공신전이나 다름없는 별사전(別賜田)의 상속 금지를 제안해 관철하는 등 혁신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기반 공사가 많은 국초에 재정이 많이 필요한 토목 공사를 주도하며 비용을 상당히 줄였다. 70세가 넘자 꾸준히 치사(致仕)를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72세에 은퇴한지 4일만에 죽었다.

사직을 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때문에 죽을때까지 부려먹은게 세종의 복수라는 드립을 치는 역덕들도 있으나, 재상이 70세가 넘으면 주기적으로 사직을 청하는 것은 조선시대 정치판의 관례였기 때문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세종이 류정현을 끝까지 중용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능력있는 실무형 관료인데다가, 이원계의 사위였기 때문에 왕실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태종, 세종 모두에게 약점이 잡혀있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절대적으로 국왕 편에서 강경하게 일을 했고[11], 이 때문에 다른 신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국왕 입장에서는 매우 유용한 존재다.


3. 수전노 재상[편집]


사기식 분류법을 따르면 아주 전형적인 혹리(酷吏)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한결같았다.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의 사노가 그에게 돈을 빌린일이 있었는데[12] 납기일을 어기자 그 집으로 쳐들어가 가마솥을 압류해 왔으며,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자 어차피 콩을 수백 석씩 먹기만 하는 동물이니 섬에 귀양보낼 것을 주장했고,[13] 북방의 군인들은 어차피 수조권을 받으니 중앙에서 주는 급료를 없애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성 외관직의 하급 관료들의 임금을 체불하고 국가에서 지급하던 점심을 없애 세종을 경악하게 하기도 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조차 콩 한 톨 주지 않는 인색함을 보여 당시 백성들에게 "당장 굶어 죽어도 영상의 재물을 빌리지 않겠다"는 원성을 들었다.

그래서 실록의 졸기(卒記)에서도 그를 한나라 무제 대의 상인 출신 재정관료로 생활 필수품인 소금과 철의 전매를 주장해 재정을 늘렸지만 백성을 수탈했다는 비판을 들은 상홍양(桑弘羊)에 빗대어 비난하고 있다.[14]

게다가 생전에는 본인이 그토록 미신이라 디스해서 궐내에서 불경조차 못 외게 해 놓고서는 죽을 때가 되자 지옥가는 것이 두려워졌는지, 수륙재[15][16]를 5천 섬이나 되는 거액의 재산을 들여 시행하라고 아들들에게 간청해서 세종 본인에게 비웃음을 당했다.

그러나 재상으로서 이렇게 인심 잃을 짓을 많이 했음에도, 깐깐한 법치주의자라 불법으로 재물을 모으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뇌물 시비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인정사정없는 압류나 고리대는 일국의 재상이 체면상 할만한 일도 아니었고, 또 욕먹을 짓이긴 했으나 불법은 아니었으니.치사하게 뇌물받아먹는게 아니라 당당하게 고리대로 치부하기


4. 대중매체[편집]



4.1. 용의 눈물[편집]


신귀식이 맡아서 열연하는데, 수전노 에피소드는 안나오지만 인물 자체는 제대로 고증해서 유능하나 지독할 정도로 깐깐하고 각박한 성정의 신료로 등장한다. 양녕이 가례를 올릴 때 빈례도감의 소임을 맡는 것으로 처음 등장했으며, 태종이 민씨 형제를 제거할 때 대사헌으로서 그에 앞장섰다. 특히 민무회가 조정에 노비 출신이 부당하게 들어와 일을 하고 있다고 상소를 올리자 이를 두고 자중해야 할 죄인 집안 사람이 조정 일을 함부로 재단하여 왕실을 능멸했다며 마구 물어 뜯는데[17] 민무휼의 장인이었던 우의정 이직이 어떻게든 사위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소극적으로 변호하자 명색이 정승인 이직에게 죄인의 장인은 말씀하실 입장이 못 된다며 윽박지르다시피 하며 입을 막아 버린다.[18] 정승을 겁박하다시피 하는 모습에 왕실의 외척인 김한로와 심온이 보다 못해 한 마디 하고 황희도 좀 심한 것 아니냐고 중재하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일을 키운다.

은근히 욕심도 있어서 세종이 즉위한 직후 자신은 영돈녕부사로 물러나고 심온이 영의정에 오르자 고까운 심사를 내보였다. 태종이 심온 옥사를 시작하자 의금부 도제조에 임명되어 수사 지휘권을 받아서 심온과 그 관련자들을 혹독하게 추국하는데, 심온도 국문을 받을 때 평소부터 친분이 있었던 박은에게는 지독한 배신감을 드러냈으나[19] 류정현에 대해서는 ''원래 그런 인간"이라며 조금의 섭섭함도 내비치지 않는다[20]. 옥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태종 사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폐비론을 주장하는데, 일말의 가책이라도 보이는 박은과 달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밀어붙인다. 이수, 변계량, 최윤덕 등 대부분의 신료들이 반대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최윤덕이 인정상 할 짓이 아니라고 한 마디 하자 변방에 나가 있다가 막 조정에 들어온 무관들이 뭘 아냐면서 무시한다. 태종이 그만하라고 하는데도 계속 주장하다 세종이 옥사에 대한 정치 보복은 없을 것이나 한 번만 더 들고 나오면 그땐 대역죄로 다스리겠다며 역정을 내고 나서야 그만뒀다.


4.2. 대왕 세종[편집]


성우이자 배우인 김기현이 분했다. 태종의 선위를 돕기 위해 태종이 직접 데려와 영의정에 앉히는데, 충녕이 유배 중인 경성 지역에 경차관으로 다녀오고, 자기 멋대로 경성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키려 했던 세자의 행보와 이에 대비되는 충녕을 보고는, 태종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택현자. 장자를 폐하고 현자를 택하라'는 간언을 올리고, 현자가 누구냐는 태종의 물음에 충녕대군이라 답한다.

이후 태종의 지시로 의금부 제조가 되어 심온의 옥사를 박은과 함께 주도하게 되고, 후일 시간이 자난 뒤 심온의 가족을 노비에서 풀어 줘야한다며 간청하던 정소공주가 죽자 태종의 조치를 부정하며 심온의 옥사를 뒤집고 주요 관료들을 다 탄핵하려 하자 신진 관료들에게 공수까지 하면서 기존 관료가 탄핵되면 나라가 돌아갈 수 없다며 옥사를 뒤집을 수 없지만 심온의 가족의 처지는 반드시 해결하고 사과한다.


4.3. 태종 이방원[편집]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임호[21]가 분했다. 이성계의 보필을 맡는 역할로, 태종에게 검소하다는 칭찬을 듣는다. 여담으로 이때 타이밍이 하필 정몽주를 복권시키기로 결정한 때인 것으로 봐선 아마도 제작진이 대놓고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수전노라는 사실에 대한 고증으로, 첫 등장 때 낡아빠진 관복과 천을 덧댄 버선으로 태종을 알현하면서 태종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태상왕 이성계의 사망 후엔 판서와 의정부 고관을 역임하다가 하륜을 이어 영의정이 되었는데, 왕자들의 성인 배역 출연과 이성계의 사망 이후로는 황희와 더불어 이방원이 어명을 내릴 때 함께 받는 것으로 자주 얼굴을 비춘다.[22]

공교롭게도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류정현은 이방원의 사돈인 심온을 때려잡는 역할을 하는데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몽주가 자식에게 소소하게 보복하는 배우개그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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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6월 20일.[2] 연 나이 71세.[3] 세는나이 72세.[4] 율리우스력 11월 20일.[5] 율리우스력 7월 8일.[6] 율리우스력 1월 2일.[7] 율리우스력 9월 29일.[8] 유경래. "고려 후기 문화 유씨 가문의 가계와 통혼권." 국내석사학위논문 아주대학교, 2007. 경기도[9] 류정현의 아버지 류진은 류만수의 아버지 류총의 동생. 말하자면 태종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인물의 사촌을 영의정에까지 앉힌 것이다. 이러한 인사 기용은 상당히 관대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류정현 뿐만 아니라 왕자의 난으로 숙청당한 신료들의 다른 가족 구성원들 중에서 유사한 케이스가 꽤 많다. 정도전의 아들 정진, 심효생의 아들 심도원, 남은의 형 남재 등이 모두 태종의 핵심 정적들과 혈연관계에 있었는데도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않고 오히려 고위직에 오른 사례다.[10]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물물거래를 한 백성의 재산을 몰수한 후 장을 쳐서 수군으로 보냈다고 한다. 당시 수군은 매우 기피하는 곳 중 하나였으므로 그 백성의 자식들이 성벽에 올라가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11] 태종이 실권이 있을 때에 심온 사사를 강경하게 밀어붙인것도 사실 태종의 입장을 대변해 총대를 맨 것이고, 이후 세종이 완전히 친정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세종 편에서 세종의 정책을 강경하게 추진하는데 앞장섰다.[12] 돈거래를 부끄럽게 여기던 조선 양반들이 사노를 통해 돈거래했다는 사실을 보면 돈을 빌린 주체는 정역으로 봐야 할 것이다.그런데도 돈을빌려준 주체는 류정현으로 기록되있는걸 보면....[13] 다만 이는 이해가 될만도 한게 어쨌든 사람을 죽인지라 좌시할 수는 없고 또한 코끼리가 그 당시 조선에서는 정말 먹기는 많이 먹는데 어디 써먹을 데가 없는 동물인 것도 맞았다. 처음엔 중앙에서 길렀다가 섬으로 유배보냈다가 나중엔 육지로 옮겨 기르게 했다가 해당 도에서 도저히 감당 못하겠다고 하자 삼도에서 돌아가며 기르게 했다가 또 살인을 하자 다시 섬으로 보내는 등 코끼리 때문에 여러차례 골치를 썩여야 했다. 그래도 일본에서 보내온 외교적 선물이고 하니 결국 죽이진 않았지만...[14] 재밌게도 류정현의 4대조 할아버지인 류경은 생전에 치부에 능하고 재물을 밝혀 삼한거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알고보니 조상이 하던 일을 충실히 실천한 것이었다.[15] 문자 그대로 물과 뭍에서 죽은 아귀와 영혼들을 위해 지내는 재. 고려 시대부터 폭넓게 시행되었다. 오는 사람을 신분에 차별 없이 모두 받아 먹을 것을 베풀며, 당시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중요한 필수요소로 꼽혔다. 현재는 민간무형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다. 사실 백성에게 무료급식을 한다는 공익적 성격도 있어서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이지만, 류정현이 민간에서 비웃음을 사고 세종까지 이걸 언급하며 코웃음친 건 본인이 궐내에서는 불경도 외지 말고, 수륙재를 지내지 말자고 상소하며 앞장서서 불교 탄압에 나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죽을 때가 되니 본인이 지옥 가기 무서워서 수륙재를 거하게 열었으니 좋은 일 해놓고도 욕을 바가지로 먹은 것.[16] 민간에서 류정현이 비웃음을 받는다는 걸 언급하며 류정현을 디스한 세종은 실제 궐내에서 불경을 외지 못하게 하자는 상소는 받아들였으나 공익적 성격이 있는 수륙재를 금하자는 상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17] 심지어 조정도 아니고 조영무의 상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륜이 조영무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민무구, 민구질을 보다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는 식으로 민무휼, 민무회를 위로하자, '그러고 보니 참 사헌부에 상소가 하나 올라왔는데...' 식으로 말을 꺼낸 것.[18] 이직은 파직되어 거기서 끌려나간다.[19] 박은이 처음부터 심온을 몰아간건 아닌게, 최초 병사들 배치변경 관련으로 태종이 화를 낼때 현재 주상인 세종과 상왕 태종에 대한 안전을 위해 경비를 증강시키는 일상 의례적인 일이었다고 약간이나마 변호는 했다. 물론 곧바로 태종의 일갈에 입을 다물어야 했지만...[20] 다만 박은의 간청을 받아들인 태종이 국문을 멈추라고 지시했을 때는 더 이상 진행하기가 어려웠다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한 발언을 했다.[21] 배우 임호는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몽주를 연기했다.[22] 민무구와 민무질 숙청 이전까지 태종에게 가장 가까이 붙어 있던 신하는 하륜과 조영무였는데, 황희와 유정현의 등장 이후로는 이 둘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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