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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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성의 수상 및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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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5











파일:SPOTV 로고.svg 파일:한국프로농구 심볼.svg 중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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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bgcolor=#000000><|3> 캐스터 ||<width=25%> 최두영 ||<width=25%> 조주영 ||<width=25%> 이승현 ||<width=25%> 손상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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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TV 농구 해설위원

SPOTV

파일:신기성 SPOTV 해설위원.jpg

신기성
申基成

출생
1975년 4월 30일 (48세)
파일:인천광역시 휘장.svg 인천광역시 부평구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신체
180cm|체중 78kg|혈액형 B형
직업
농구선수(포인트 가드 / 은퇴)
해설자
학력
산곡북초등학교 (졸업)
송도중학교 (졸업)
송도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졸업)
종교
불교[1]
프로입단
1998 드래프트 (1라운드 7순위, 원주 나래)
현역 시절 등번호
9[2], 5[3]
병역
파일:attachment/sangmu.png 상무 농구단 (2001~2003)
소속
선수
파일:원주 TG삼보 엑써스 로고.png 원주 나래-삼보-TG삼보 (1998~2005)
파일:external/s20.postimg.org/kt_sonicboom.png 부산 KTF-kt (2005~2010)
파일:external/s20.postimg.org/Elephants_eng_emblem.png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2010~2012)
코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Korea_University_Global_Symbol.svg.png 고려대학교 농구부 (2013~2014)
파일:external/oi68.tinypic.com/2m5as21.png 부천 KEB하나은행 (2014~2016)
감독
파일:external/s20.postimg.org/sbird_logo.png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2016~2019)
방송해설
파일:MBCSPORTS.png (2012~2014)
파일:SPOTV.png (2019~ )

1. 소개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2.2. 프로 선수 시절
3. 플레이 스타일
4. 은퇴 후
4.1. 지도자
4.2. 방송해설위원
5. 기타
6. 관련 문서




1. 소개[편집]


대한민국의 농구인. 2000년대 KBL을 대표하는 포인트 가드였고, 원주 TG삼보 엑서스의 우승에 기여했던 선수다. 선수 시절 별명은 트레이드마크였던 빠른 스피드를 알리는 총알탄 사나이. 현재는 SPOTV의 농구 해설위원이다.

2. 선수 시절[편집]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편집]


송도고등학교 시절에는 초중시절 한솥밥이었던 전일우와 함께 제48회 전국종별농구선수권대회에서 휘문고등학교를 누르고 12년만에 우승을 이끌어 냈다.

고려대학교 1학년 시절부터 부동의 주전 가드로 군림하기 시작하더니, 졸업 내내 포인트 가드 자리를 지켰다. 그에 밀려서 자리가 없다고 판단한 1년 후배 주희정고려대학교를 중퇴 후 프로로 직행한 것은 유명한 일화. 하지만, 리딩에 능한 가드라기보다 슛이 좋고, 돌파력이 좋은 타입이었다.


2.2. 프로 선수 시절[편집]


파일:external/432a192a4a58fd4355a0a2aaaf1fb4913e3fa05c474119e5675770afa11be375.jpg
전성기였던 원주 TG삼보 엑서스 시절.

파일:신기성 KTF 시절.jpg
KTF의 준우승을 이끈 부산 KTF 매직윙스 시절. 전화 찬스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빅맨이 인기가 많던 KBL 역사상 첫 드래프트인 1998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7번으로 지명되어 원주 나래에 입단하였다. 주희정을 트레이드시킨 팀은 신기성에게 주전 포인트 가드 자리를 맡겼고, 신기성은 12.9득점 4.1어시스트라는 뛰어난 성적을 내면서 신인상을 탔다. 사실 당시 서장훈이 리바운드 왕을 차지하고 현주엽도 빼어난 성적을 올렸지만 불필요한 기록경쟁으로 둘이 함께 있던 청주 SK가 6강 플레이오프도 못 가는 바람에 팀을 4위로 이끈 신기성이 현주엽을 누르고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4]

파일:조상현,신기성,임재현,현주엽.jpg

그 뒤로 꾸준히 활약했지만, 어시스트가 많지는 않았다. 군입대 전인 2000-2001 시즌까지 리딩은 오히려 허재가 주로 담당하고 신기성은 슛에 더 집중하는 편이었다. 데뷔 후, 꾸준히 평균 득점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2000-2001 시즌에 평균득점 15.1점을 기록하고 입대. 물론 그렇다고 어시스트가 적은 것은 아니라서 평균 6.0개를 기록하기는 했다. 상무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2002-03 시즌에 팀이 첫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TV로 봤다(...).

전역 후에는 다시 팀의 주전 포인트 가드로 자리잡았다. 허재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리딩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 단계 더 성숙한 모습을 보이면서 호평을 받았다. 팀의 주축 포인트 가드로 맹활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제대 후 첫 시즌인 2003-04 시즌 어시스트 5.9개, 그리고 2004-05 시즌에 어시스트 7.1개를 기록했다. 득점도 과거의 15점 가량은 아니라도 평균 두 자리수 득점은 기록해 줬다. 이 때의 활약으로 대학 동기 현주엽을 제치고 2004-05 시즌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다. 현주엽 킬러.[5]

김주성자밀 왓킨스를 가지고 있던 팀의 특성을 볼 때, 적절하게 볼을 배급해 주기만 하면 되었고, 득점력이 괜찮기 때문에 외곽에서 활약해주는 그의 슈팅력은 팀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다만, 2004-05 시즌 챔피언결정전에는 감기 몸살에 걸리면서 이렇다할 활약은 못했지만, 우승을 차지하는데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팀에 마땅한 백업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좋지 않은 몸 상태에서 긴 출장시간을 소화했고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

시즌 종료 후, 가드진이 두텁지 않은 팀 특성 상 포인트 가드 신기성을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신기성은 다른 뜻을 품고 있었고, 결국 신기성은 부산 KTF로 이적한다. 거기서 팀의 주축 포인트 가드로 자리잡으며 맹활약 하는데, 특히 2006-07 시즌에는 팀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이끌기도 했다. 다만, 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7차전 접전 끝에 아깝게 패배.[6] 하지만 첫 두 시즌 동안에는 리그 톱 가드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활약을 보여줬다. 반대로 원주 동부는 포인트 가드 문제를 드러내며 하향곡선을 그렸다.[7]

그러나 점차 나이를 속일 수 없는지, 2007-08 시즌부터 득점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어시스트 개수도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출전 시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족저근막염 증상도 신기성을 힘들게 하였다. 결국 KTF/kt와의 마지막 3년 간은 리그의 평범한 가드로 전락했다. 두 번째 FA에서는 아예 kt가 그를 포기했고, 앞 길을 열어주기 위해 보상선수도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 자리를 표명일이 4억을 받은 게 문제지만.

파일:강주작&신기성&김주성.jpg

결국 고향인 인천이 연고지인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 계약을 맺었다. 준주전급의 포인트 가드로 뛰는데, 과거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식스맨으로서는 괜찮은 편. 2시즌을 뛴 후, 다시 FA 자격을 얻었지만, 가드진이 넘쳐나던 전자랜드가 신기성을 잡지 않았고, 결국 은퇴를 선언하며 프로 선수로서의 경력을 마무리했다. 2012년 6월 4일 공식적으로 은퇴 기자회견을 가졌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신장이 크진 않지만 총알탄 사나이 라는 별명을 가졌을 만큼 빠른 발을 지니고 엄청난 슛팅력을 가졌던 공격형 포인트 가드. 통산 필드골이 48.4%가 되며 통산 3점슛 성공률이 42.8%에 좋은 슛터의 기준이라는 170클럽을 4번이나 달성했을 정도로 슛팅력이 뛰어났다. 과소평가되는 부분인데, 경기당 5.3 어시스트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어시스트도 제법 하는 가드였다.

빠른 발을 이용한 돌파로 만드는 득점, 돌파하는 척 하다 멈추고 쏘는 미들슛을 자주 구사하였고 성공률이 매우 높았다. 골밑과 주변에서 넘어오는 패스를 정확한 슈팅으로 마무리하는 능력은 역대급 수준.

이상민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지만, 거의 유일하게 전성기 김승현을 맞상대 하여 우위를 점했던 포인트 가드이기도 하였다. 김승현, 신기성, 이상민 당대를 호령했던 이 3명의 가드는 물고 물리는 관계였는데, 김승현은 스피드가 무척 뛰어난 선수인 것은 맞으나 신기성에 비해서는 반발자국 느린 편이었고, 신기성은 스피드가 뛰어났지만 높이와 힘에서 이상민에 밀렸고, 이상민은 높이가 뛰어났지만 스피드와 힘을 고루 갖춘 김승현에게 밀리는 형국이었다. 반대로 신기성은 김승현에 비해 힘은 부족했지만 스피드가 더 뛰어나서 속도로 공,수에서 김승현에 앞섰고, 이상민은 신기성에 비해 스피드는 느릴지언정 신장과 탄력면에서 앞섰다. 김승현 역시도 이상민에 비해 높이가 크게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스피드와 힘에서 모두 이상민에 비해 뛰어난 편이었다.

이상민의 경우 우월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신기성의 장기인 외곽포와 아울렛패스를 적절하게 제어했고, 공격시에도 몸으로 밀고 들어가 손쉽게 득점에 성공하곤 했다. 반면 김승현에게 상당히 강한 편이었는데, 김승현보다 스피드가 빨랐고 조금이라도 큰 편이었기 때문에 특히 공격상황에서 외곽슛과 아이솔레이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김승현을 요리하였다.

역대 기록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1998-99
TG삼보
45
112/186
(60.22%)
88/197
(44.67%)
92/112
(82.14%)
580
164
185
86
4
1999-00
45
109/189
(57.67%)
94/211
(44.55%)
114/140
(81.43%)
614
179
272
115
8
2000-01
45
113/199
(56.78%)
117/254
(46.06%)
104/129
(80.62%)
681
178
274
69
5

2001-02
군복무(상무 농구단)
2002-03

2003-04

54
147/246
(59.76%)
85/213
(39.91%)
69/83
(83.13%)
618
201
317
81
3
2004-05

53
134/270
(49.63%)
94/200
(47.00%)
65/86
(75.58%)
215
216
376
78
7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2005-06
KTF
54
132/269
(49.07%)
92/212
(43.40%)
92/121
(76.03%)
683
183
372
96
3
2006-07
52
127/232
(54.74%)
102/206
(49.51%)
118/146
(80.82%)
678
195
337
60
6
2007-08
53
113/262
(43.13%)
67/162
(41.36%)
83/101
(82.18%)
510
120
284
68
3
2008-09
52
109/214
(50.93%)
49/148
(33.11%)
58/73
(79.45%)
423
117
291
64
2
2009-10
54
108/198
(54.55%)
43/111
(38.74%)
31/45
(68.89%)
376
115
251
60
8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2010-11
전자랜드
52
45/103
(43.69%)
33/94
(35.11%)
22/25
(88.00%)
211
65
167
39
1
2011-12
54
101/184
(54.89%)
39/100
(39.00%)
25/32
(78.13%)
344
74
141
45
2
KBL 통산
(12시즌)
613
1350/2552
(52.90%)
903/2108
(42.84%)
873/1093
(79.87%)
6,282
1,807

3,267
681
52


4. 은퇴 후[편집]



4.1. 지도자[편집]


2013년 11월 말 모교인 고려대의 코치직의 부름을 받았으며 해설직은 2013-14 시즌까지만 병행했으나 고려대 코치 생활은 길지 않았고, 2014년 4월 1일 부천 하나외환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2015-16 시즌 후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의 감독으로 내정됐다.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0000010357_001_20161229195519179.jpg
흑역사로 남게 된 신한은행 감독 시절. 그 와중에 살이 더 찐 거 같다.

허나,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감독으로서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다. 어찌 보면 농구계 한정으로 박수교, 박종천, 이충희, 정인교, 조동현, 추승균 그리고 대학동창 친구인 현주엽 등과 더불어서 해당 케이스의 적절한 예시 중 하나. 특히 인성적인 면에서 많이 까이고 있는데, 타임아웃 때에도 툭하면 선수들에게 화를 내는 듯한 말투로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며 팬들에게 크게 까이고 있다. 더욱이 경기 운용 및 선수 기용 면에서도 원활하게 보여주지 못하면서 전임 감독보다 잘하는 게 도대체 뭐냐며 까이기 일쑤. 그러나 2017-18 시즌에는 3년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바로 다음 시즌인 18-19 시즌에 최하위로 처지면서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2018년 12월 15일 삼성생명전에선 김보미를 막지 못하며 20점차 리드를 역전당하며 막장 경기로 팬들의 혈압만 올려 놨다. 결국 2018-2019 시즌을 끝으로 신한은행 에스버드 감독직을 내려놓는다는 기사가 떴다.

후임으로는 박성배 전 우리은행 코치가 내정됐으나, 동생인 박성훈 코치의 현역 선수 폭행 사건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퇴하게 된다. 결국 새로운 후임으로 전 OK 읏샷 감독이었던 정상일 감독이 새로 선임됐다.

이외 80년대부터 모교 농구부의 가드는 거의 재앙 수준이다.

80년대로 보면 그나마 체력과 수비로 팀에 보탬이 되는 양우섭은 그래도 U 리그 어시스트 왕이었던 정창영도 고전하게 된다.

특히, 90년대는 거의 재앙 수준이다.

패스와 슈팅이 딸리는 박재현과 드리블과 움직임이 둔한 이동엽을 보면 모교 출신 후배 가드들이 삽질을 거듭하고 있다

이외 드래프트를 앞두고 있는 최성모김낙현 등에 대한 기대치도 높지 않은 와중에 고대 출신 프로 가드들 중에서는 주희정, 김병철 등과 함께 가장 독보적인 커리어를 가지고 있기에 고대 출신 가드 유망주가 나오는 기사 때마다 믿고 거르는 고대가드(...)라는 표현과 함께, 그 대척점의 대표주자로 계속 언급이 되고 있다. KBL 출범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드래프트로 지명된 고려대 출신 가드 중에 동세대의 김병철과 주희정 그리고 신기성을 뛰어넘은 가드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4.2. 방송해설위원[편집]


선수 은퇴 후 2012-13 시즌부터 2년간 MBC SPORTS+에서 해설을 했다. 이때는 딱히 존재감이 크지 않았고 재미없는 해설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이후 WKBL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엠스플에 후임 해설자로 대학 동기 현주엽을 추천해주었다고 한다.

신한은행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뒤 2019-2020 시즌부터는 SPOTV의 KBL 해설위원을 맡고 있다. 말을 버벅거리는 탓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다는 팬들의 비판이 많다.

엠스플 시절 자주 쓰는 말은 이것이 제가 원하는 농구입니다!였고, 본인이 원하는 농구를 구현하지 못한채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SPOTV에서 해설할 때는 이것이 OO팀의 농구입니다라는 멘트를 자주 쓴다. 멘트 자체는 딱히 문제가 없지만,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을 충분히 해주지 않아 도대체 그 농구가 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2020년부터는 농구 팬들 사이에서 ‘이것이’가 하나의 밈으로 자리 잡았다. 신기성이 해설하는 경기의 유튜브 채팅 창에는 ‘이것이’[8]가 거의 도배 수준으로 올라올 정도. 박지혁 기자는 이것이 신기성의 해설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신기성 인터뷰 기사를 쓰기도 했다.

서울 SK 나이츠 편파가 심하다는 논란까지 더해져 전반적으로 팬들의 선호도가 높지 않다. 2020-21 시즌에는 김도수, 추승균이 해설로 영입되어 신기성의 존재감은 줄어들었다.

5. 기타[편집]


파일:코재하우스를 방문한 신기성, 김상준, 김승기, 정경호.png

2019년 12월 30일에 방송된 MBN 자연스럽게에서 정경호, 김승기, 김상준과 함께 선배 허재의 친분으로 출연했다.

팬서비스는 좋은 편이라고 한다. 선수 시절 팬들에게도 매너있게 대하다보니 별명도 '매너 신'이었다. 현재 해설로서 평이 좋지 않음에도 해설위원으로서의 생명을 연명할 수 있음은 팬들에게 친절히 대하기 때문이래도 무방하다.


6. 관련 문서[편집]



[1] #[2] 고려대 시절[3] KBL 시절[4] 당시 KBL 초창기의 시상식 기준이 아주 엉망이었다. 루키 시즌인 97-98 시즌에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던 이상민이 신인상을 못타기도 했으며(MVP보다도 뛰어난 신인이 있다는게 말이나 되는지) 99-00시즌 SK 나이츠의 서장훈이 정규리그 MVP와 파이널 MVP를 차지하자 '같은 팀에서 MVP와 신인왕을 독점해선 안 된다'는 기자들의 암묵적인 합의로 인해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던 조상현이 신인왕 수상에 실패했다. 몇 년 후 기준이었다면 당연히 조상현이 신인왕을 탔을 것이다.[5] 이후 2006-07시즌 플레이오프 4강에서도 신기성의 부산 KTF는 현주엽의 창원 LG를 꺾고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다.[6] 당시 모비스가 정말 강했다. 양동근이 신기성을 상대로 상당한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신기성도 16.6점 4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대단한 존재감을 보였다.[7] 다만 김주성을 잡는데 성공하고, 강대협, 표명일이라는 로또가 터지면서 다시 우승에 성공한다.[8] 소리 나는 대로 써서 '이거시'라고 쓰이기도 한다. 신거시, 킹거시, 이거시스트, 오늘 몇 거시냐 등 배리에이션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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