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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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전직 농구선수. 안정적인 경기 운영능력을 가졌던 정통 포인트 가드였으나, 슛이 없고 피지컬이 약해 KBL에선 대부분 백업가드로 커리어를 보냈다.
2. 선수시절[편집]
2.1. 고교-대학 시절[편집]
대경상고 3학년 때 대통령기 결승전에서 현주엽, 윤영필(193cm, C)이 있던 당시 최강팀 휘문고를 상대로 30점을 폭발시키며 팀 우승과 대회 MVP에 올랐을 정도로 신기성, 김택훈(193cm, G[4] ) 등과 함께 94학번에서 유망한 가드였다. 허나 한양대 진학후엔 동기 정락영(183cm, G)과 로테이션으로 출전하며 둘다 고만고만한 활약밖에 못했고, 1997년 KBL 드래프트에도 정락영(2R 15순위)에 이어 바로 뒷순번(16순위)으로 인천 대우에 뽑혔다.
2.2. 프로 시절[편집]
데뷔시즌엔 외인 가드 스테이스 보스먼(190cm, G)과 조성훈(184cm, G)에 밀려 많이 출장하지 못했고, 99-00 시즌엔 주전 포인트가드 조성훈의 부상 공백에 깜짝 주전으로 출장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땐 팀 에이스 카를로스 윌리엄스(198cm, F/C)의 부상으로 팀 전체가 와장창이라 전시즌 정규리그 3위였던 팀이 전체 10위까지 추락한다. 백업으로 두 시즌을 더 뛰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공익근무를 다녀오는데, 소집해제 후 복귀한 팀은 강기중의 자리가 없다고 보고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해 버린다. 다행히 가드 부족에 시달리던 원주 TG삼보가 잽싸게 낚아채며 신기성의 백업을 확보하지만, 우승을 노리던 팀의 백업가드로 강기중은 많이 부족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원주에서의 첫 시즌인 04-05 시즌, 정규리그 MVP에 빛나는 신기성의 존재감에, 주전 혹사로 유명한 전창진 감독의 No 로테이션 정책, 거기에 슈팅 가드인 처드니 그레이(187cm)가 1번까지 소화할 수 있었던 덕분에 백업가드, 강기중은 정규리그의 반도 못 미치는 19경기에 출전, 평균 8분 정도 뛰는 존재감 없는 선수로 머물고 말았다.
하지만 시즌 후반 김주성의 체력을 보완해준다며 원주 동부가 처드니 그레이를 3-4번 포지션인 아비 스토리(192cm, F)로 교체하면서, 주전 포가 신기성이 정규리그 54경기 내내 평균 36분을 뛰어야만 했고, 체력이 바닥난 신기성은 챔피언결정전에 이르러 결국 퍼져버리고 만다.
전주 KCC와의 챔프전에서, 감기몸살로 제 컨디션이 아닌 신기성의 휴식시간을 주기 위해 전창진 감독은 울며 겨자먹기로 강기중을 써야만 했고, 첫 선발 출전한 4차전에선 팀 전체가 압박감에 무너지면서 팀의 대패를 막지 못했지만 5, 6차전에선 안정감 있는 플레이로 팀의 트리플타워 아비 스토리-김주성-자밀 왓킨스(204cm, C)를 적절히 활용하며 센터가 없는 전주 KCC를 공략함으로써 원주 TG삼보의 사상 두 번째 우승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특히 시즌 내내 단 한 개의 3점도 넣지 못했던 슛 없는 가드 강기중은 마지막 6차전에서 상대의 새깅 디펜스를 우습게 만드는 결정적 3점 두 방을 꽂으며 KCC의 수비를 멘붕시켰고, 6차전에서 12득점 7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치는 인생경기를 보여주었다. 이 때의 활약 덕분에 강기중은 FA 계약에서 원주 동부와 연봉 4500만원(18% 증가)에 재계약했고, 백업 가드로 두 시즌 더 뛰다 은퇴했다.
3. 지도자 생활[편집]
은퇴 후 원주 동부의 유소년 농구단에서 일하다 2016년부터 모교 한양대 코치로 부임, 대학 선배 이상영 감독과 정재훈 감독을 2018년까지 보좌했으며, 시즌이 끝난 뒤 후배 오창환에게 코치직을 넘기고 사임했다.
4. 시즌별 기록[편집]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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