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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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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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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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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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 우승 반지
1997
(선수)

2003
(선수)

2009
(감독)

2011
(감독)












허재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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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등번호 9번
창단

허재
(1997~1998)


표명일
(1998~2000)
원주 TG삼보 엑써스 등번호 9번
이인규
(1997)

허재
(1998~2004)


영구 결번

허재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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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허재TG.jpg
원주 DB 프로미 영구 결번
No. 9 허재













원주 DB 프로미 No. 9
WONJU DB PROMY

허재
許載|Hur Jae
[1]
출생
1965년 9월 28일 (58세)
강원도 춘천시
(現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양천 허씨 (陽川 許氏)
신체
188.3cm[2]|98.2kg[3]|190.5cm[윙스팬]O형왼손잡이[4]
직업
농구 선수 (슈팅 가드 / 은퇴)[5]
농구 감독[6]
방송인
종교
개신교불교[7]
학력
상명초등학교 (졸업)[8]
용산중학교 (졸업)
용산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9]
실업 입단
1988년 기아산업 농구단
현역 시절 등번호
9
소속
선수
기아산업-기아자동차-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1988~1998)
원주 나래-삼보-TG-TG삼보 (1998~2004)
감독
전주 KCC 이지스 (2005~2015)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2011, 2016~2018)
프런트
고양 캐롯-데이원 점퍼스 (2022~2023 / 구단주)[10]
가족
아버지 허준(1930년생)[11], 어머니 박옥기[12]
아내 이미수(1966년생, 1992년 결혼 - 현재)
장남 허웅(1993년생), 차남 허훈(1995년생)
병역
예술체육요원[13]
소속사
스타잇엔터테인먼트 (2019.12~2023.5)
이엘파크 (2023.5~현재)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MBTI
ESFJ[14]

1. 개요
4. 프런트 경력
5. 성격
7. 여담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농구 선수 출신 前 감독[제명], 現 방송인. 소속사는 이엘파크.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 - 슈팅 가드였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스몰 포워드 - 파워 포워드, 대학 시절에는 센터도 소화했다. '농구 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을 만큼 한국의 마이클 조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러 부분에서 뛰어났었지만 특히 자로 잰듯한 슛 폼이 탁월했었는데 점프 후 슛 릴리즈가 굉장히 빨랐고, 공이 몸에 붙어다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드리블러였다.

징크스, 슬럼프 없이 선수 생활 시작부터 39살의 노장으로 은퇴할 때까지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으며 현역 은퇴 후 지도자로서도 성공해 한국프로농구 출범 후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맛본 최초의 인물이다.[15]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특유의 입담과 예능감 등을 앞세워 예능 프로그램에서 방송인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2022년부터 한국프로농구 신생 구단 고양 캐롯-데이원 점퍼스의 대표(구단주)로 선임되어 4년 만에 농구계에 복귀했으나 구단과 본인이 저지른 사건으로 인해 시즌 종료 이후, 향후 리그의 대표나 임원, 코칭스태프직이 불가능한 제명 조치를 받으며 농구계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2. 선수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허재/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허재/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프런트 경력[편집]


시작은 화려했으나 끝은 고양 데이원 점퍼스 부실 경영 및 리그 제명 사건이 되었다.

2022-23 시즌부터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선수단을 인수해 재창단한 캐롯 점퍼스의 구단주로 선임되어 4년 만에 농구계에 복귀했다. 여기에 초대 감독으로 용산고-중앙대 출신 선후배 사이고 원주 TG 시절 팀 메이트였던 前 안양 KGC인삼공사 감독 김승기를 선임했다. 선수 중에서는 FA시장에서 안양 KGC인삼공사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전성현을 계약기간 4년, 첫해 보수총액 7억 5천만원의 조건으로 데려와 부족했던 슈터 자리를 보강했고 동시에 이대성을 현금 6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가스공사에 트레이드 시켰다.

또한 팀 홍보를 위해서는[16] 시즌 중에라도 예능 프로 출연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실제로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출연했지만 후술된 논란으로 인해 하차했다.[17]

그러나 점퍼스가 KBL 가입비 체불, 구단 인수 대금 미지급, 상습적 월급 체불, 오리온스 역사 지우기 등 KBL 역사상 최악의 행보를 보이면서 점퍼스의 구단주인 허재에 대한 비판 여론도 강해졌다.[18]

KBL이 데이원 스포츠의 구단 운영 계획안에 의문을 가지며[19] 가입 승인을 보류시키자 허재가 '내가 있는데 왜 보류시키냐? 나 못 믿냐? 승인해라!'라며 격노한 사실이 드러나 굉장한 비난을 받았다. 또한 그런 허재로 인해 금전적, 생계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은데 허재와 박노하 대표는 되려 구단 운영에 본인들 사비를 일부 썼다는 이유로 동정을 호소하는 언플을 해대 더욱 욕을 먹었다.

허재를 쉴드쳤거나 동정했던 사람들은 무지성 허재 팬이었거나, 허재가 이용당했다고 잘못 알고 있었던 사람들 뿐이다. 프런트 단장과 감독직 역할 구분을 못했던 본인이 자초한 논란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단장이 선수 영입에 관여 할 수는 있지만, 단장은 구단의 전반적인 운영을 신경써야 하는 자리였는데도 가장 중요한 자금부터 소홀히 다뤘다.

또한 시즌 전 분할 가입비 5억도 제때 못 낼 정도로 자금난에 허덕였지만 허재와 김용빈은 자기과시용 창단식에만 3억을 태웠고, 허재는 등기이사가 아님에도 중앙대 후배들을 요직에 꽂아넣고 데이원 스포츠 농구단 구단주라고 속여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출연해 이득을 본 꼴이 되었다.

데이원 스포츠의 등기 이사는 박노하 대표 1인이며 농구단 실제 구단주는 김용빈이다. 즉, 허재는 예능에서 인기가 떨어지자 화려하게 농구계에 복귀하고픈 욕심에 이름뿐인 감투를 써서 리그 파행을 일으키고 예능까지 한 셈이다. 농구가 비인기 종목이고 모기업이 듣보잡이었다 보니 생각보다 이번 사태가 일반 대중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만약 농구가 인기 종목이었으면 허재는 이미 매장되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4월 20일 기사에서 새로운 인수 기업이 있는 경상북도 포항시를 찾아 연고지 협약 유치에 긍정적인 뜻을 나타냈으나 실질적으로 운영자금을 부담하겠다는 기업이 없어 무산[20]되었고, 5월 24일 기사에서 하루 전 부산시가 전자정부 누리집 정보공개포털에 '남자농구단 유치를 위한 의견 알림'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작성한 게 확인된 것과 관련해 부산시 관계자가 "데이원 측에서 구단 유치 제안이 온 게 맞고 현재 검토 중"이라고만 밝혔을 뿐 이에 대한 답변은 없었다.[21]

5월 31일, KBL 이사회를 통해 선수 및 직원 임금 체불을 비롯해 각종 부채 등을 갚기 위한 구체적인 운영 조치를 6월 15일 오후 6시까지 해결하라고 약속했다.[22] 하지만 6월 16일에 열린 임시총회 및 이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운영할 의사나 능력이 없다"며 "선수 연봉 체불 등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거짓과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해 리그 신뢰와 안정성을 크게 훼손했다"는 김희옥 총재의 판단 아래 한국프로농구 출범 이후 사상 최초로 리그에서 제명시키며 창단한지 불과 한 시즌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심정을 밝혔는데, 본인은 농구가 좋아서 제안을 받고 들어갔었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면서 공사로 따지면 부실공사였다며 본인 책임은 사실상 없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했다.[23] 그러면서 자신도 월급 사장이었고 그마저도 2번 밖에 못받고서 나머지는 자기 사비로 썼다며 애초부터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뉴시스와의 추가 인터뷰에서는 선수들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본인도 급여를 거의 받지 못했다 보니 책임전가를 하는것이 아닌 피해자라고 토로했다. # SBS와의 인터뷰에서는 데이원 대표 제안을 받았을 때 농구가 그리워서 들어왔는데 잘못된 바람에 결과가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며 선수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했다. #

6월 20일, KBL이 허재에게 데이원 사건의 책임을 물어[24] 허재는 앞으로 어느 소속팀 구단의 대표나 단장, 코칭스태프, 방송사 해설위원 등 KBL과 관련된 어떠한 직책도 맡을 수 없게 됨에 따라 사실상 농구계에서 퇴출되었다.[25] 다만 KBL의 법률적인 조치가 당황스럽다고 했던 반면 선수들의 급여 체불 문제 해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5. 성격[편집]


  • 성격 자체는 비교적 좋은 편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농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허재는 알 정도의 다혈질이며[26], 젊었을 때는 음주운전 위반으로 무려 5번이나 적발이 되는 등 술과 관련된 문제와 논란에 자주 휘말리곤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팬서비스가 좋으며 젊을 때도 고정은 아니지만 방송 출연을 해 오면서 어느 정도 망가지는 것도 쉽게 응할만큼[27] 농구 자체와 무관한 부분들에서는 부드러운 성격이다. 상황이 농구와 관련이 있고 없고에 따라 보여주는 성격이 상당히 극과 극[28]이다. 예능 출연도 하고 나이와 여러 역경[29]을 겪은 후 크게 성장한 건지 성격이 유해졌다고 한다. 강한 자존심은 후술. 거기에다가 꼰대끼도 없는 편이라[30] 선수들 사이에서 평도 괜찮고 다가가기도 쉽다고 한다. 팬 서비스 또한 훌륭한데, 만일 당신이 흡연자라면 가볍게 얘기하며 담배를 물거나 조용히 피워보자. 어느새 옆에서 같이 피우고 있다고 한다(...). 단 아닐 때도 있다. 참고로 허재에게 불도 빌려줬다는 사람도 있다.[31] 굉장한 애주가이며 일례로 인터뷰를 한 기자가 인터뷰시 계속 허재가 눈치를 보길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 하니 "술 한 잔 하면서 인터뷰하면 안 되겠냐"는 대답에 수락하고 술자리를 가졌으나 저녁까지 자리가 이어지고 기자는 필름이 끊겼다는 일화가 있다.

  • 허재 감독은 평소에 다른 감독들과 달리 자존심이 상당히 강하여 불이익을 볼 때 거침없는 발언을 내뱉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2011년 농구국가선수권대회 도중 중국 기자들이 여러 차례 허재 감독에게 아래와 같은 치욕적이고 몰상식한 질문을 던지자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욕을 하며 기자 회견장을 나갔다. 허재 중국 기자회견 사건 참조.[32] 이 사건의 임팩트가 너무나도 커서 그런지, 2021년 현재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씨발'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할 정도로 매우 유명한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기자들이 이상한 질문을 하게 되면 "허재 감독 어디있냐?" 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중국 기자 : "왜 한국 선수들은 중국 국가가 나오는데 국기를 향해 서지 않았습니까?"[33]
허재 : 뭔 소리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그래 씨팔 진짜 짜증 나게!
통역사 : He said no comment(대답하지 않겠습니다)
허재 : "말 같지도 않은(중략)"
마지막에 허재 감독이 퇴장하자마자 중국 기자들이 허재 감독에게 "Go back home!"을 외치며 야유를 한다.

  • 2010년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 그야말로 미친 듯이 울었다고 한다. 선수 시절의 일화[34]와 후술할 강동희 썰까지 합쳤을 때 의외로 마음이 약한 성격으로, 내유외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선수 시절 허재를 막기 위해 상대팀에서 폭력을 불사하는 거친 수비를 한 일이 많고 그 때문에 코트 위 폭력 사건에 휘말린 일이 많다. 한데 때린 일은 없고 맞기만 많이 맞은 편. 다혈질로 정평이 나 있지만 항상 농구 실력으로만 승부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동반 퇴장을 당하지 않기 위해 참아냈었다. 결정적으로 허재는 타팀에게 도발하거나 어그로를 끄는 발언을 하진 않는다.

  • 특유의 솔직한 성격으로 할 말을 다 해야지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35]

  • 위에서도 적혀 있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불같은 성격이지만 의외로 꼰대끼가 없다. 어느 정도냐면, 서장훈한때 본인의 팀 감독이었던 허재를 감독님 또는 선배가 아닌 그냥 '형'이라고 부른다. 선후배 간 경직도가 심한 예체능에서, 그것도 자신의 소속팀 감독이었던 선배에게 그냥 형이라고 부르는 건 정말 특이한 케이스다. 하승진은 사회에서 만났지만 인생의 은사라고 표현할 정도로 멋있다고.[36]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외국에서 쭉 선수 생활을 하다가 귀화 후 한국에서 농구 생활을 하며 한국 특유의 유교 문화 때문에 많은 고충을 겪었던 전태풍 또한 허재는 자신의 마인드나 농구 스타일을 한국식으로 바꾸려고 했던 많은 감독들과 달리 전태풍이 가진 농구 스타일과 성격을 존중해 주었고 허재가 본인한테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는 것을 한국에서 만난 첫 감독이었던 허재가 떠나고 다른 감독을 만나자마자 바로 알게 되었다는 전태풍은 현재도 허재를 친형같은 사람이라고 부르며 따른다. 친화력도 괜찮은지 뭉쳐야 찬다로 알게 된 김요한도 허재를 형이라고 부른다.[37] 또한 선수 시절 출연했던 다큐멘터리들을 보면 아들 허웅,허훈에게도 자상하고 다정하며 편하게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38] 그래서 그런지 허웅,허훈이 어린시절 허재와 같이 출연했던 프로그램에서는 항상 허재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보이며 좋아하는 모습이 나온다.

  • 선출이라지만 기본적으로 농구에 대한 애착이 강하며 지속적으로 농구 관련 TV 프로그램에 나온다.[39]


6. 활동 내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허재/활동 내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여담[편집]


파일:20211009_kbl_legend.jpg
  • 2021년 10월, KBL 개막 특집으로 네이버에서 실시했던 <12명의 KBL 레전드, 현역으로 가장 보고 싶은 선수는?> 설문 조사에서 46.9%의 득표율로 1위를 하였다.

  • 2018년 3월, 체육계 인사 100명을 대상으로 한 <4대 프로 스포츠 종목별 최고의 스타> 설문 조사에서 박찬호(야구), 차범근(축구), 김연경(배구), 허재(농구)가 뽑혔다.

  • 2013년 10월, <여러분이 생각하는 역대 프로 농구 판타지 스타는 누구인가요?> 설문 조사에서 54%의 득표율로 1위를 하였다.

  • 2011년 9월, <대표팀에서 다시 보고 싶은 농구 레전드는?> 설문 조사에서 58.9%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였다.

  • 2006년 8월, 남자 농구 국가대표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의 전설적인 농구 선수는 누구인가?> 설문 조사에서 75%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였다.

  • 2004년 5월, 한국 갤럽에서 실시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 설문 조사에서 6위를 차지하였다.[40]

  • 2002년 12월, 패션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2002 베스트 드레서 백조상 - 스포츠 부문>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 1999년 12월, <20세기를 빛낸 스포츠 스타> 설문 조사에서 축구 선수 차범근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20세기 최고의 한국 농구 선수> 설문 조사에서 1위에 뽑혔다.

  • 1999년 12월, 한국 프로농구 10개 구단 외국인 선수 20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 프로농구 최고의 선수는? - 공격수 부문> 설문 조사에서 절반인 10표를 획득하여 1위를 차지하였다.

  • 1999년 9월, 제일기획에서 실시한 <가장 좋아하는 농구 선수>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 1994년 6월, 서울의 20대 직장 여성 833명을 대상으로 한 <가장 좋아하는 운동 선수>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 1994년 4월, 여론 조사 기관 R&R에서 실시한 <가장 좋아하는 농구 선수>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 1993년 9월, 연예인 202명을 대상으로 한 <가장 좋아하는 운동 선수>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 1993년 4월, <한국의 100대 스타> 설문 조사에서 김영삼 대통령, 배우 최진실에 이어 3위를 차지하였다.

  • 1987년 10월, 제일기획에서 실시한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스타>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 선수 시절 각종 인기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였다. 그러한 불세출의 슈퍼스타였던 탓에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인공의 우상으로 나오기도 했다.

  •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에서도 인기가 굉장히 많았고, 대만 현지 농구팬들은 제발 허재가 자국 프로 리그에서 뛰기를 바랐을 정도.[41] 일본에서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도 순위권 안에 들었던 유일한 한국 선수였다.

파일:88olympic hur jae.jpg

  • 1988 서울 올림픽 때 남자 선수 대표로 페어플레이 선서를 했던 사람이 바로 사진 오른쪽에 있는 허재이고 왼쪽은 여자 핸드볼 선수 손미나이다. 허재의 경우 당시 훤칠한 외모에다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스타였기 때문에 선수단 대표로 선정되었다. 원래는 허재 혼자 선정되었으나 남녀평등을 위해 손미나 선수도 함께 하게 되었다.

  •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 시절 당시에 올린 기록은 상당했으며, 특히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가 인상적이었다. 블라디 디박, 디노 라자, 토니 쿠코치, 드라젠 페트로비치 같은 불세출의 NBA 리거들을 앞에 두고 1, 2번을 넘나드는 활약을 펼쳤다. 한국 농구에서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재능이었고, 당시에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신동파와 이충희 계보를 잇는 한 마디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였다. 당시 훗날 시카고 불스 왕조의 키식스맨이 되는 토니 쿠코치가 유고의 벤치 멤버였으니 말 다했다. 당시 경기는 유튜브에 존재하며 중계가 없는 방송으로 선수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허재의 "기범이형~!" "유택이형~!", "아오 씨X~!" 등 재미있는 요소가 많은 경기. 당시 유럽산 외국인 선수로 막 NBA를 평정하다시피 하던 드라젠 페트로비치는 의외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경기다. 현재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나라로 쪼개져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으로 나누어져있지만 이때는 한 팀으로 출전해서 경기력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농구 강호인 지역이며, 현재도 세르비아 국적의 니콜라 요키치, 보그단 보그다노비치, 보반 마르야노비치나 슬로베니아 국적의 루카 돈치치, 고란 드라기치, 몬테네그로 국적의 니콜라 부세비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적의 유서프 너키치까지 쟁쟁한 NBA 리거들이 가득하다.

  • 실력 뿐만 아니라 술에 있어서도 농구계의 전설인데, 야구계에도 실력과 술의 전설인 선동열과 친분이 있었다. 당연히 둘이 대작을 했는데, 허재의 패배. 그 술이라면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허재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도망친 것이다.[42] 허재는 이 때 일을 회상하며 난생 처음 '술 먹고 죽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두 사람이 술을 진탕 마시고 선동열 집에서 잠들었는데 숙취 때문에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나서 TV를 켰더니 선동열이 마운드에서 던지고 있었다고... 또 박한 전 고려대 감독과도 일본에서 술내기를 했다가 진짜로 죽을 뻔했다고. 주신은 따로 있었다나. 오랫동안 허재와 선동열이 광주에 허재가 오면 둘이 밤새도록 술을 퍼마신 후 다음 날 허재가 30득점을 해서 스스로 흡족하게 여기는데 선동열이 완봉을 하자 허재가 혀를 내둘렀다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돌았는데 허재 본인이 직접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43] 또한, 배우 박중훈과는 동갑내기에 용산고 - 중앙대 동문인지라[44] 주당으로 유명한 두 사람과의 일화도 있다. 그리고 그 허재조차도 주량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북한의 농구선수 리명훈이다. 아시아 대회 후에 허재와 대작을 펼친 일이 있었는데, 다음 날 출국 전에 남북한 선수들이 가볍게 인사하고 떠나려 하는 상황에서 허재는 숙취에 제대로 인사도 못한데 반해 리명훈은 취기 전혀 없는 모습으로 "안녕히 가시라요"라며 한국 선수들을 배웅해줬다고 한다. 뭉쳐야쏜다에 출연한 후배 문경은에 의하면, 태릉선수촌에 국가대표 훈련을 위해 입촌하면 "갔다 와."라고 사인을 주면, 그 즉시 후배들은 바로 옆의 석계역의 포장마차로 향해 오돌뼈와 각종 안주를 사들고 왔다고,[45]

  • 고등학교 동창이자 평생 절친인 영화배우 박중훈과 40년의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허재가 뭉쳐야 쏜다의 감독이 되자 박중훈이 사비로 그에게 음료차를 보냈다. 고교 시절에 허재는 이미 고교 최고의 농구 선수였지만, 박중훈은 노는 게 심해서 약간 문제아였다고 한다. 대신 허재를 유흥의 길로 가게 해준게 절친인 박중훈이라고.


  • 아내 이미수는 "슛 타이밍 때, 못 올라가고 하면 화가 많이 난다. 남편은 워낙 잘했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었지만 애들 경기를 보면 화가 날 때가 많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차범근 차두리 평행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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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전자전으로 두 아들 역시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그의 뒤를 이어 둘 다 프로농구팀에 입단하여 KBL 선수가 되었다. 축구계에 차범근, 차두리가 있고 야구계에는 이종범, 이정후가 있다면 농구계엔 이들이 있다. 왼쪽이 장남 허웅, 오른쪽이 차남 허훈. 허웅은 슈팅가드로 아버지가 나온 용산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에 진학했고, 두 살 아래인 허훈 또한 형과 똑같이 용산고를 거쳐서 연세대에 진학하게 됐다. 둘 다 가드인데 아마 시절 커리어는 형인 허웅보다 동생인 허훈이 더 커리어가 뛰어나며, 객관적인 평가에서 허훈이 앞선다는 평을 받았었다.[46] 한국 농구 역사상 명선수 출신에 감독을 하고, 두 자식들이 모두 아버지를 따라 프로 선수가 된 몇 안 되는 케이스다. 잘 하는 아들이 내 아들이다 여담으로 이 바로 위에 있는 왼쪽 사진은 훗날 허섬세월의 포스터로 리마스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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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가 군인 출신이라고 한다. 아버지와 관련해서 이야기는 # 여기 참조.[47]

  • 야구선수 이종범과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두 아들이 훌륭한 선수로 자랐다는 점과 더불어 친구 같은 아버지라는 점이다. 보통 허재의 다혈질적인 모습과 이종범의 카리스마를 생각하면 엄한 아버지였을 것 같지만 실제로 허재는 매는 커녕 따끔한 훈육도 못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실제로 무서운 사람은 어머니였다고... 이는 이종범 역시 마찬가지로 큰맘 먹고 매를 들려고 했을 때, 아들 曰 "아버지한테는 도저히 못 맞겠다."는 배짱을 시전, 결국엔 때리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종범, 허재 둘 다 왼손잡이이고, 필기만 오른손으로 한다. 젓가락을 왼손으로 집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 농구계 은퇴 이후 예능 프로그램에 간간이 출연했는데, 농구 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이 낚시라고 한다. 도시어부 게스트로 출연해 볼락을 잡으며 '이게 볼락이야!' 개그를 한다. 이후에 무서운 집중력으로 낚시에 대한 승부욕이 대단하다. 이경규가 예능식으로 고기 안 잡힌다고 분노하는 것과 달리 이 쪽은 정말 안 잡혀서 분노를 퍼붓는 스타일. 이전부터 허재가 낚시를 즐긴다는 뉴스는 많이 나왔는데, 1999년 신문 기사를 보면 허재 본인을 포함해 유재학, 신선우, 이훈재 등이 낚시터를 자주 찾는 농구인들로 유명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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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송 촬영 때문에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한 적이 있다.

  • 가수가 될 뻔한 사연도 있었는데 대학교 4학년 때 11월 말에 개최된 방콕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 대회가 끝난 직후 곡 작업에 들어가 늦어도 연말까지는 앨범을 발표할 계획이었지만 아쉽게도 입단이 확정된 기아자동차 구단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

  • 차남 허훈하고 예능 방송에 동반 출연하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현역 KBL 출신 선수들 게스트 출연이 거의 없다 보니 KBL 휴식기 동안 일부러라도 아버지 찬스로 홍보 차 같이 출연하는 듯하다. 허웅 역시 아버지랑 간간히 동반 출연하긴 한다. 다행히도 허훈이 워낙 19-20 정규 시즌 최우수 선수로 뽑히는 등 개인 성적이 좋다 보니 동반 출연에 대해서는 민감한 여론은 없지만, 부자가 같이 출연하다 보니 아무래도 허재나 허훈이 단독으로 출연을 했을 때보다 텐션이 서로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허재가 정장을 입을때 자주 매는 주황색 넥타이가 있는데[48] 이 넥타이는 다름아닌 허재가 처음 감독이 되었을때 아들 형제가 처음으로 허재에게 선물한 넥타이라고 한다. 이 때문인지 어지간한 정장을 입는 자리에서는 해당 넥타이를 매려고 한다.

  • 아들 둘 모두 굉장히 아끼는 부성애 넘치는 아버지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자기 팀 반칙을 얻어낸 허웅을 보고 웃는 모습. 예능 프로그램에 삼부자가 출연하면 항상 아들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보인다. 집에 놀러온 허훈이 자신 침대에서 잘 수 있게 자신은 바닥에서 자거나 밤새 두 아들에게 줄 낙지탕을 홀로 끓이거나 장어를 아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맨밥에 김치 위주로만 먹는 등 굉장한 아들 바보이다. 과거 선수 시절에도 경기를 지고 우울해도 아들과 전화를 할 때는 미소를 보이고, 걷기 힘들 정도로 타박상이 생겨도 두 아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갈 정도로 부성애가 넘쳤다. 하지만 선수 생활에 이어서 감독 생활까지 하다 보니 두 아들의 유년 시절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 후회를 많이 토로하는 편이다. 사실 허재 특유의 이미지나 농구 경기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굉장히 다혈질이라 가족 내에서도 위계질서를 따지거나 엄한 아버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말 예민해보이던 선수 시절에도 가족들에게 다정하고 친근하게 대했다. 어린 시절 아들이 자신에게 발을 올려도 장난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공을 던져도 좋아하면서 웃고 넘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능에 진출한 뒤 장성한 두 아들과 방송에 출연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주변 방송인들도 부자 관계보다는 친구같은 아버지라고 칭찬하거나 놀라는 모습을 많이 보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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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재 농구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유소년 선수 육성에 힘쓰고 있다.

파일:2019 sbs 연예대상 챌린저상.jpg
  • 2019년 12월 28일에 개최된 SBS 연예대상에서 챌린저상을 수상했다.


파일:2021-22 시즌 프로농구 개막전 허재 KBL 명예부총재의 시투.jpg
  • 2021년 10월 9일, 안양 KGC 인삼공사와 전주 KCC 이지스의 경기가 진행된 안양실내체육관에서 개막전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3점슛 시투자로 참가했지만 3개 모두 들어가지 못했다.

파일:사랑의열매 홍보대사에 위촉된 허재.jpg
  • 2021년 11월 26일, 사랑의 열매 홍보대사 위촉과 동시에 허웅, 허훈과 함께 가족 단위 정기 기부 프로그램인 4000번째 착한가정 회원이 되었다.

파일:2021 KBS 연예대상 리얼리티 부문 최우수상 허재.jpg
  • 2021년 12월 25일에 개최된 KBS 연예대상에서 리얼리티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파일:20220116 허재 특별심판.jpg
  • 2022년 1월 16일에 개최된 2021-22 KBL 올스타전에서 특별심판을 맡았다. 1쿼터의 점프볼을 올리며 경기를 시작하고 주심도 보긴 했는데 나이가 나이였는지 체력이 딸려서 1쿼터 도중에 진짜 심판으로 교체되었다. 그러고는 허훈 팀 선수들이 있는 잎에서 차남 허훈에게 야, 야! 슛 종 쏴.라고 말한 뒤 욱하는 모습이 화면에 집혔고, 이내 장남 허웅의 곤에 이끌려 퇴장했다.[49]

파일:희망 2022 나눔 캠페인 폐막식 허재.jpg
  • 2022년 2월 3일, 희망 2022 나눔 캠페인 폐막식 행사에 참석했다.

  • 현역 시절 등번호는 9번이었는데 방송인으로서 스포츠 관련 프로그램에서 등번호가 있는 유니폼을 입을때는 9번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시로 뭉쳐야 찬다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90번을 달았는데[50] 9번을 달고 농구선수로 승승장구한 만큼 다른 번호를 달고 뛰기를 희망했다고 하며, 뭉쳐야 쏜다에서는 감독이라 유니폼을 입을일은 많지 않았지만 허가네팀이나 불낙스 비공식전에서 출전할때 모두 1번을 달았다.[51] 9번은 김동현이 달았는데 자신의 번호임을 강조하는 모습은 보였다.


  • 농구화에 대해선 전혀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12/17/1997121770352.html) 아마추어 시절에는 르까프 터보Z, 프로 초창기 기아 시절에는 팀조던1을 자주 신었다. 특히 팀조던 1은 기아에서 부상투혼으로 챔피언 결정전 MVP를 받았던 신발이라 허재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농구화. 말년 TG삼보 엑서스 시절에는 팀 스폰서가 아디다스라서 티맥2와 티맥3를 신었다.


8.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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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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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선서했을 때는 자막에 'Huh Jae'로 나왔다.[2] 뭉쳐야찬다의 신체 검사를 통해 병원에서 맨발 188.3cm로 측정했다. 인치 단위로 6ft2다.[3] tvN 예능 업글인간에서 측정[윙스팬] 뭉쳐야 쏜다 3화에서 측정[4] 필기만 오른손으로 쓰고 나머지는 다 왼손이다.[5] 주 포지션이 슈팅 가드였을 뿐, 포인트 가드부터 대학 시절엔 센터까지 소화했던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6] 해당 사건으로 KBL은 허재를 KBL 구단의 대표, 단장, 지도자 등의 모든 활동을 불허하는 퇴출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7] 불교로 개종한 이유는 아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2019년 중앙신도회 부설 법인 사단법인 날마다좋은날 행복바라미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불자 대상 수상 외에 2020년 9월 3일, 같은 불자인 아내 이미수 씨와 함께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찾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예방했고 2020년 5월에 봉행된 불기 2564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서 받은 불자대상 상금의 일부를 종단에 회향하고 싶다는 뜻에서 500만원을 기탁하기도 했다. 2023년 5월 23일, 대한불교조계종 신도등록 홍보대사에 위촉되었다. 여담으로 2004년에 선수 은퇴 후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던 중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과거 선수 시절과 허재 농구 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는 개신교로 표기했다.[8] 동북초등학교 3학년 때 농구부에 들어왔지만 불과 1년 만에 해체되는 바람에 상명초로 전학을 갔다. 기사[9] 원래 연극영화과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당시 연극영화과는 안성캠퍼스에 있었기 때문에 농구부 훈련 문제로 체육교육과에 들어가게 되었다.기사[10]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한국농구연맹으로부터 향후 리그 소속 구단의 대표나 임원, 코칭스태프 등 구성원으로 등록이 불가능한 제명조치를 받았다.#[11] 갓파더에서 이순재와 4살 차이 난다고 밝혔다. 2010년 6월 8일 별세.[12] 2022년 4월 3일 별세.[13] 1984년에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 우승으로 병역 특례를 받았다.[14] 해방타운에서 밝혔다.[제명] [15] 선수 - 1997 원년 기아 엔터프라이즈, 2002~03 TG 엑써스, 감독 - 2008~09/2010~11 KCC 이지스. TG엑써스 시절에는 명목상 플레잉 코치였지만, 이는 샐러리 캡 제도를 우회하려는 꼼수였고 코치보다 선수로 활동하는 시간이 더 많아서 본인도 타인도 코치 경력으로는 쳐주지 않는다. 따라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 모두 우승한 최초의 인물은 김승기이며 전희철이 그 뒤를 이었다. 허재는 코치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감독이 되었다.[16] 말은 팀 홍보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제론 허재 자기 자신의 홍보와 자기 과시가 더 컸다.[17] 애시당초 허재는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존재감이 없는 병풍 MC였고 농구단 구단주로 복귀한 이유 중 하나도 이 프로그램의 보스 역할로 출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재의 목표는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타는 것이었다.[18] 물론 허재는 스포츠 부분 총괄이고 급여와 관련된 부분은 박노하가 담당하지만 예능 출연할 시간에 선수 급여부터 먼저 신경쓰라는 여론이 계속 늘어났다.[19] 김용빈 회장과 허재, 박노하 대표는 데이원 스포츠가 타 구단과 달리 모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생력을 갖추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고, 다른 구단들이 이에 대해 비웃으며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허재는 데이원 스포츠 기자 간담회에서 자금력에 의문을 갖는 기자들에게 '누가 시작할 때 곳간을 열어보고 하냐? 믿고 하는 거지'라는 주먹구구식 마인드를 내비쳤었다.[20] 포항을 모태로 두고 있는 포스코조차도 축구단 포항 스틸러스, 전남 드래곤즈의 지원을 줄이는 마당에 농구단까지 운영하기에는 버거우니 당연히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데이원을 완전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있었는데도 끝까지 네이밍만 고집했다.[21] 데이원스포츠 관계자는 "박형준 부산시장이 워낙 스포츠를 좋아하시지만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부분은 아니다. 그래도 부산에 남자프로농구단이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22] 이사회 개최 하루 전인 6월 14일에 데이원 선수단 대표와 팬들 대표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주장인 김강선은 이날 기자와의 질의응답을 통해 구단과의 소통 수단이 이미 끊긴 상황이라고 밝히면서 허재에 대한 비판 여론이 더 커졌다. 특히나 같은 날 오전에 TV조선 새 예능프로그램 조선체육회의 런칭 소식이 알려졌다 보니 천하태평하게 예능이나 찍는다는 비판이 많았다.[23] 하지만 윗 문단에서 가입승인보류 당시 보인 행태를 보면 허재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보니 일정부분 변명의 요소가 있다. 특히 곳간보고 하나 발언은...[24] 좋든 싫든 김용빈 회장 일가가 발을 뺀 이후 실질적 구단주가 허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25] 스포츠조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살짝 떨린 목소리로 "임금이 밀린 선수들에게 정말 미안하면서도 KBL의 법적 조치 결정은 약간 당황스럽다. 데이원 스포츠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나도 월급 한 푼 받지 못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26] 농구 모르는 사람들은 욱허재, 욱재라고 많이 불렀다고. 사실 농구에 있어서 굉장히 불 같고 승부욕이 세서 그렇지 꽤 시원시원한 성격이고, 뒤끝이 없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툴툴거리면서도 은근 챙겨주는 츤데레적인 면도 있다. 딱, 이경규나 박명수의 거친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사실 운동선수 중에 승부욕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27] 젊을때부터 중년까지 계속 농구계 내에서도 농구와 무관한 상황에서 유머 감각은 있던 편으로 알려져 있었다. 본인 자체가 코미디 프로그램도 좋아했고(농구를 시작하기 전 어린이였을 때는 장난기도 많았고,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선수시절에 비시즌에 코미디언들과 사석에서 술자리 친분도 쌓기도 했다. 코미디 자체를 어느정도 좋아하는 편. 뭉찬에서 보여 준 드립감각은 중년에 갑자기 생긴게 아니다.[28] 어쩌다 한 번씩 두 아들과의 방송 출연을 할 때도 농구와 무관하게 한 웬만한 디스성 농담은 다 웃으며 받아주다가, 키가 작은 편인 두 아들이 웃으며 "우리가 아빠보다 키가 컸다면 농구 수비를 훨씬 잘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자 갑자기 화를 낸 적도 있다. 웃던 표정이 돌변하면서 "야 그걸 다 이겨내야 농구선수지 이 X끼야. 키 작아서 못한다 그러면 그게 농구 선수냐?"고 화를 냈고 장난치던 두 아들도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기가 죽었다. 그만큼 장난기와 무관하게 농구에 대한 승부욕과 신념은 누구보다 강하다. 농구는 신장이 아니라 근성으로 한다[29] 부친상, 강동희 감독의 제명 등등[30] 뭉찬에서도 막내격이였던 김요한과 모태범과도 사석에서도 서슴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목격되며 뿐만 아니라 감독이었던 당시 소속팀 선수였던 하승진과 전태풍도 허재가 나이나 이미지와 달리 꼰대끼 없이 선수들의 의견을 잘 수용해준다고 여러번 언급했을 정도.[31] 야구나 농구는 흡연자들이 많아 팬 서비스로 맞담을 하는 선수나 감독들도 많다. 다른 종목에서도 야구인 이진영도 그랬다고 한다. 물론 선수 생명에 있어서 좋은 영향을 주진 않으니 근래에는 선수들의 금연을 적극 권장하는 추세이긴 하다. 단 축구는 아무래도 맞담 팬서비스를 기대하긴 힘들다.[32] 이후 밝혀진 여담으로 인터뷰 종료 후 허재 감독이 인터뷰실에 다시 들어가서 그런 질문을 한 기자에게 "XX 너 이리로 와봐!" 라고 해서 공안이 끌고 나간 후일담이 있다고 한다. 이후에도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K리그 팀 감독들을 향한 중국 기자들의 모욕성 질문 공세가 심해지자 이 발언이 다시 재조명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 외적으로도 개소리를 뱉어내는 사람들이 생기면 "허재 감독 데리고 와라!"며 유행어처럼 자리잡게 되었다.[33] 실제 중국 기자의 질문은 "스포츠 경기 전 모든 선수들은 상대방 국가가 나올 때에도 엄숙함을 유지하고 있어주는 게 예의고 국제 관례라고 알고 있는데 중국 국가가 나올 때 대한민국 선수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나요"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물론 굳이 공식 인터뷰에서 저런 질문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한국 선수들은 중국 국가가 나올 때 무례하게 굴었는데 너희들은 예의도 없느냐?"를 돌려 말한 것이고, 당시 통역은 그 말뜻을 직접 말해줬을 것이기에 허재 감독이 화를 낸 거다.[34] 챔피언 결정전 도중 갈비뼈 골절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뛰어 결국 끝나고 나서 통증과 기쁨을 못 이겨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눈물을 흘렸다는 에피소드가 은근히 존재한다.[35] 허재, 전창진은 유독 작전타임에서의 불 같은 성격이 나온다. 그 유명한 불낙이 대표적.[36] 후에 아이콘택트에 둘이 같이 출연했을 때는 허재가 앞으로는 자신을 형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하승진은 거절했는데 존경심 때문에 차마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고 했다.[37] 하승진이 비디오스타에 출연할 당시 허재와 김요한도 같이 출연했는데 하승진이 본인의 채널에서 비하인드 영상을 올리면서는 대놓고 하승진 앞에서 김요한이 허재를 형이라고 부르자 여전히 허재를 감독님이라고 부르는 하승진은 기분이 묘하다고 했다. 참고로 김요한과 하승진은 1985년생 동갑이다.[38] MBC 스타다큐 허재 편을 보면 고작 5살밖에 안된 허훈이 자신이 블록으로 만든 것을 보여주며 '날개 있잖아! 이거 제트기야!' 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야 이게 뭐가 제트기야 이게 뭐가...' 라며 어린 아들에게도 굉장히 편하게 자신을 대할 수 있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신 동생인 허훈이 형 허웅의 농구공을 빼앗아가서(엄마가 동생 주라고 하는 바람에) 허웅이 크게 울자 아빠 허재가 당황하는 모습도 있었다.[39] 뭉쳐야 찬다 합류 조건도 다음 시즌은 농구로 해달라고 해서 한 거였다.[40] 역대 갤럽 조사에서 순위권 안에 든 유일한 농구 선수가 허재다.[41] 1995년 대만 프로 구단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으나 소속팀인 기아자동차에서 필사적으로 막은 탓에 무산되었다.[42] 광주광역시 바닥에서 선동열이 술로 제대로 한가닥 했는지라, 어느 정도냐면 허재랑 술을 4차째 마시고 문을 연 술집이 없자, 한 술집 셔터를 두들기며 "나 선동열이오."하니 주인이 환영을 하며 셔터를 다시 올렸다고 한다.[43] 당연히 거짓말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농구대잔치는 겨울에 한다(...) 프로농구 출범 이후엔 야구 시즌과 농구 시즌이 겹칠 수도 있지만 선동열은 KBL 출범 이전인 1996년에 일본으로 진출했다. 선동열과 선동열의 고려대학교 동기인 정삼흠이 선발 맞대결 전날 술을 퍼마시다가 정삼흠은 7이닝 5실점했는데 선동열은 완봉승을 거둔 일화가 와전되어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44] 단, 박중훈은 재수하여 입학하였으므로 대학교 기준으로는 허재가 박중훈의 1년 선배이다.[45] 허재는 손꼽히는 나이트 광이었기 때문에, 강호동의 언급으로도 "우지원보다 더 자주 보이는 사람이 허재다!"라고 말할 정도라고.. 본인의 언급에 의하면 착착 정리를 해서 먹는 김유택과 다르게 대충 먹고 나이트로 간다고. 참고로, 김유택, 한기범, 허재가 말단일 때 이충희가 국대 고참이라 종종 방쫄을 했다고.[46] 허훈은 허재의 DNA를 많이 물려받아 타고난 재능이 크고, 허웅은 타고난 재능보다는 노력파다.[47] 임종도 못 지켰다고 한다. 자식이 부모 임종을 못 지키는 건 최악의 불효 중 하나라 죄스러운 마음까지 섞여 미친 듯이 울었다고.[48] 일명 불낙 정장의 상징인 주황 넥타이 그거 맞다.[49] 이때 허웅이 아빠가 있으면 진다.고 말했고, 허재는 그런 허웅에게 알았으니 가라.고 답했다.[50] 당장 양준혁도 자신의 영구 결번 등번호인 10번을 달았으며 입찰 경쟁을 이겨내며 지켰다.[51] 이 프로의 마지막 시리즈인 어게인 농구대잔치에서 기아팀 선수로 출전할때 한정으로 9번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