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재/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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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문선재


1. 학창 시절
2. 프로 입단
2.1.1. 데뷔 초
2.1.3. 2014 시즌
2.1.4. 2015 시즌
2.1.5. 2016 시즌
2.1.6. 2017 시즌
2.1.7. 2018 시즌
2.2.1. 2019 시즌
2.2.2. 2020 시즌
2.2.3. 2021 시즌


1. 학창 시절[편집]


2006년(고1)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그 해 팀 선배 양현종과 에이스 이용찬을 앞세운 장충고와의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맞대결에서 패했고 같은 해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는 김민성-최종인의 덕수정보고에 패해 준우승하였다.

2007년(고2) 황금사자기 4강에서 최원제-박민석의 장충고에 역전패를 당했고, 2008년(고3) 경남고와의 청룡기 4강전에서는 팀이 8회에서 대거 6실점하는 바람에 결승진출에 실패했다.


2. 프로 입단[편집]


2009년 2차 7라운드 전체 52번으로 LG에 지명되었다. 광주동성고 시절에는 유명 유격수가 많이 배출된 1990년생들 중에 나름대로 인정받는 유격수였다. 다만 수비가 부족한 편이였기 때문에 평가가 짰던 편. 일반적으로 드래프트 당시 1990년생 4대 유격수를 이학주, 김상수, 허경민, 안치홍으로 뽑지만 이학주가 빠지고 문선재를 넣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1] 결국 비교되던 다른 유망주에 각각의 툴이 못 미친다는 점 때문에[2] 내야수로서는 평가가 조금 더 낮았던 정주현보다도 낮은 지명 순위를 받았다. 이에 충격을 받아 대학 진학을 생각했지만, 예상 외의 지명에 환호하던 엘팬들의 입단 요구 미니홈피 난입에 감동을 받았는지 프로행을 결심한다.


2.1. LG 트윈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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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시절.


2.1.1. 데뷔 초[편집]


LG에서는 오지환을 차세대 유격수로 육성하기로 한 결정에 의해 주 포지션을 2루수로 바꾸었다. 그러나 워낙 돌글러브로 유명해서 수비코치들이 많이 공을 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타격 파워와 포텐은 상당하다는 평가를 들었고 2군에서 오지환과 키스톤 콤비를 하기도 했다. 일단은 3루수1루수도 볼수 있는 등 유격수만 제외하고는 내야 전 포지션을 볼수 있으며 상무 야구단에서는 주로 1루수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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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퓨처스리그에서 사이클링 히트20-20 클럽을 달성하면서 높은 잠재력을 뽐내기도 했으나 이때 타율이 0.230 정도에 그쳐서 컨택능력은 아직 갈길이 멀다는 평가도 있었고, 상무 2년 차에는 부상으로 결장해서 발전할 수 있는 시기에 쉬게 되는 아쉬운 상황도 있었다.


2.1.2. 2013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문선재/선수 경력/201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3. 2014 시즌[편집]


4월 19일 한밭 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2차전에서 2:7로 지던 9회초에 대거 5득점으로 7:7 동점을 만드는 과정에 8번 타자 최경철 타석 때 임재철을 대타로 기용하는 바람에 엔트리에 있는 두 명의 포수 윤요섭과 최경철을 모두 소진하게 되었다. 여기서 벤치는 2루수를 보고 있던 문선재의 포수 포지션 변경 카드를 2013년 6월 2일 경기 때처럼 또 다시 꺼내들었고, 문선재는 2사 1루 상황에서 대주자 김경언이 도루를 시도하자 주자가 자동 태그될 정도의 완벽한 2루 송구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10회초 LG가 최영환에게 막혀 삼자범퇴로 허무하게 공격을 끝낸 뒤 돌입한 10회말. 선두 타자이자 1번타자인 이용규가 볼넷으로 출루한 뒤 다음 타자 고동진의 의도적인 번트 모션에 이용규가 도루하는 순간을 아예 인지하지도 못했고 이용규를 편하게 2루로 보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고동진이 끝내기 안타를 쳐서 스코어 7:8로 팀은 아쉽게 패하고 말았다. 물론 이용규의 2루 무혈입성이 끝내기 패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맞지만, 사실 이것을 가지고 오리지널 포수도 아닌 문선재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애초에 워낙 벌어진 점수차 탓에 백업 포수까지 모두 소진했음에도 대타를 꺼내야만 했던 상황 자체가 잘못됐던 것. 이 날 문선재는 선발 2루수 겸 2번타자로 출장하여 타석에서는 4타수 무안타 1희생플라이 1타점에 삼진 하나를 당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4월 21일자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됐다가 8월 29일일 자로 1군 엔트리에 등록됐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브레이크 중 임지섭 등과 함께 10월 5일 일본 미야자키 피닉스 교육 리그 파견이 확정되어 2014 시즌은 이로써 끝나는 줄 알았으나, 베테랑들의 활약과 상대팀의 공략 등으로 후반기 들어 벤치만 지키고 있던 채은성과 교체되어 남은 경기 동안 1군에서 대수비나 대주자 요원으로 뛰다가 NC 다이노스와의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포함됐다.

10월 19일 창원 마산 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13:2로 크게 앞선 8회말에 1루수 대수비로 출장했다. 그리고 스코어 13:3인 9회초 1사 상황에서 상대 8번째 투수인 손민한을 상대로 안타를 쳐서 생애 첫 포스트시즌 안타를 기록했다. 다음 타자 오지환이 6-4-3 병살타를 쳐서 문선재는 득점을 올리지 못했고, 팀은 스코어 13:4로 이겼다.

10월 22일 창원 마산 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3:2로 앞선 9회초 1사 1루 상황에서 1루주자 박용택의 대주자로 나왔다. 그런데 이병규의 높게 뜬 평범한 2루 플라이 때 슬라이딩으로 2루 베이스를 밟은 것도 모자라 그대로 3루수 베이스로 냅다 뛰는 바람에 그대로 뛰어 주루사를 당하며 까임권을 획득하는가 했다. 하지만 2루수 박민우가 평범한 플라이를 놓친 덕에 홈까지 들어와서 생애 첫 포스트시즌 득점을 기록했다. 1993년 윤찬의 재림이 될 뻔했던 것이 도리어 행운의 득점이 된 셈. 결국 팀은 이 쐐기점을 지켜서 스코어 4:2로 이겼다. 그 때문에 최훈이런 만화로 이 주루를 풍자하기도 했다.

문선재의 이 황당한 플레이를 본 사람들은 문선재가 아웃카운트를 착각해서 이런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 문선재 본인은 단독 도루를 했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 계속 뛰었다고 해명을 했다. 본인도 뛰면서 "왜 가고 있는거지."라고 생각 했다고.[3] # 이 해명 기사를 본 팬들은 우주의 기운이 LG에 도는 것 같다는 둥 문선재는 미래를 보는 문선재, 문속인, 문스트라다무스, 문견지명, 시간을 달리는 문선재라는 둥의 드립을 쳤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으로 앞선 10월 24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4:2로 지던 8회말 무사 1루, 7번타자 김용의의 대타로 나온 최승준 타석에 풀카운트 상황에서 1루주자 브래드 스나이더의 대주자로 출장했다. 최승준의 볼넷과 8번타자 최경철의 희생번트로 1사 2, 3루가 된 상황에서 9번타자 손주인의 대타로 나온 이병규의 타석 때 손민한의 폭투를 틈타 홈으로 들어와서 득점을 올렸다. 그리고 팀이 스코어 4:3으로 지던 9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상대 마무리 투수 김진성을 상대로 볼넷을 얻었다. 팀은 다음 타자 황목치승의 대타로 나온 정의윤이 헛스윙 삼진으로 아웃되어 스코어 4:3으로 졌다.

문선재는 2014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대수비, 2, 3, 4차전은 대주자로 출장하여 1타수 1안타 1볼넷 3득점, 타율&장타율&출루율 1.000을 기록했다.


문선재는 넥센 히어로즈와의 2014년 플레이오프 1, 3차전은 대타, 2타전은 대주자로 출장하여 2타수 무안타 1득점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문선재는 2014년 포스트시즌에서 3타수 1안타 1볼넷 4득점 타율&장타율 .333, 출루율 .500을 기록했다.


2.1.4. 2015 시즌[편집]



1할 근처를 머무르는 타격으로 주전경쟁에서 밀러나 한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4월 15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뜻밖의 상황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2루 베이스 근처에서 자기 키만큼 주루라인에서 벗어나 태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이프 판정을 받았다. 판정을 내린 이민호 심판은 3피트 라인 아웃을 적용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해당 기사의 댓글을 보면 오심이라는 평이 많다. 이 사건 덕분에 키가 3피트(91.44cm)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당시 김기태 기아 감독은 직접 그라운드에 누워 시범을 보이며 강하게 항의하다가 퇴장당했다. 이후 타율은 낮지만, 5홈런 20타점 7도루로 제 몫을 해주었다. 비슷한 유형의 정의윤SK 와이번스로 떠나버려 역할이 중요해진 상황.
여름이 되면서 타격감이 떨어졌는지 번번이 삽질을 반복했으며 8월 22일 말소되었다.

정확히 말소되기 직전까지의 13년과 타석수나 출전 경기수가 거의 비슷하므로 기록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삼진 갯수 : 71 → 50
볼넷 갯수 : 13 → 20

같이 좋아진 기록도 있고,

병살 : 1 → 4

등 나빠진 기록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타율을 제외하곤 성장하는 편이었다. 특히 말소되는 8월을 제외하고는, 타율을 제외하고 OPS를 포함한 대부분의 기록이 13년도보다 좋아졌었다.

임훈의 나이가 31살로 적지 않은 나이라는 점과, 안익훈이 아직은 유망주에 가깝고 미필인 점, 김용의가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 등을 볼때, 15년에 보여준 성장세보다 더 성장세를 보여준다면 크게는 주전급 외야수로, 적게는 백업 외야수로 나름 쏠쏠하게 활약해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후반기 페이스가 급락하면서 결국 1군에서 말소되었고 9월 20일에야 다시 1군으로 돌아왔다.

최종 성적은 103경기 212타수 타율.226 5홈런 27타점. 그냥 폭망해버린 2014년보다는 훨씬 낫지만 본인의 커리어 하이였던 13년 기록에는 좀 부족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2.1.5. 2016 시즌[편집]


시범경기에서 18타석 1안타 타율 0.077을 기록하며 무척 부진하였다. 결국 개막엔트리에 제외되었고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5월 24일 1군으로 콜업되었다. 26일 롯데전에서 중견수로 선발 출장하여 3타수 2안타(1홈런)을 기록하면서 맹활약했지만 팀은 패배하고 말았다.

8월 20일 KIA전에서 동점을 만드는 투런포를 쳤다. 그렇지만 팀은 3:2로 패배.

특이하게도 올 시즌 홈런 7개 중 3개가 LG에 강한 양현종을 상대로 쳐낸 홈런들이다.

9월 18일 삼성전에서 쐐기 투런포를 쳤다. 덕분에 류제국이 편안하게 첫 완봉승을 하게 해줬다.

9월 24일 어마어마한 실책으로 팀을 패배로 몰아넣은 정주현 대신 후반에 2루수로 출장해 괜찮은 수비를 보여줬다. 정주현이 타격, 주루, 수비 모두 처참한 상황이라 앞으로 2루수로 출장할 일이 잦을 수도 있다.

9월 27일 양현종을 상대로 또 홈런을 쳤다. 올 시즌 양현종만 만나면 홈런을 기록하고있다. 이 날 허프와 함께 베스트플레이어가 됐다.

10월 3일 대구 삼성전에서 데뷔 첫 멀티 홈런 경기를 펼쳤다. 그러면서 자신의 단일시즌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10월 11일 와일드카드 2차전에서 5회말 양현종을 상대로 좌전 안타를 기록했으며, 양현종의 5연속 견제 이후 런다운에 걸렸지만 유격수 김선빈의 실책으로 2루에 안착하였다. 박용택이 3루수 플라이로 물러나며 득점에는 실패했지만 양현종 킬러임을 어김없이 드러냈다.


2.1.6. 2017 시즌[편집]


1군에서 5월까지 꼴랑 12경기 나와서 1할대의 타율을 기록하고 5월 초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거기에 퓨처스 리그에서도 1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며 폭망했다. 시즌 내내 2군에만 있다가 9월 5일에 1군으로 콜업되었고, 콜업된 당일부터 9월 8일 현재까지 선발 1번타자로 출장했다.

좌익수로 나와서 3일 연속 실책을 저지르며 팀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커리어가 짧은 선수도 아닌데도 수비가 매우 심각하게 안 좋았다.[4]

9월 23일 기준으로 28경기 19안타 1홈런 10타점 8볼넷 타율 0.271을 기록하였다. 타격 측면에선 이 선수가 '퓨쳐스 리그에서도 망한 인간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대로 통하였으나 문제는 수비가 너무나도 안 좋다는 거였다.


2.1.7. 2018 시즌[편집]


수비를 중시하는 류중일 감독이 새롭게 부임해서인지 도통 1군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게다가 타격을 살려보자니 FA로 데려온 김현수가 있어서 입지가 불안해졌다.

하지만 가르시아의 부상으로 양석환이 3루로 가고 김용의를 1루에 써봤지만 다리 빼고 모든 게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자 김현수를 1루로 돌리고 문선재를 좌익수로 써봤지만 문선재는 낙구지점 파악을 전혀 못해 플라이 처리될 공을 몇 번이나 장타로 둔갑시키는 눈이 썩는 수비력을 선보였다.

5월 10일 첫 안타를 기록했다. 그러고서 재앙 같은 수비로 팀의 대패의 원흉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11일 2군으로 내려갔다.

퓨처스 리그에서 꼴랑 39경기 타율 0.230을 기록하는 바람에 시즌 끝날 때까지 1군에 콜업되려야 될 수가 없었다.

시즌 종료 후 두산 베어스에서 뛰고 있던 친동생 문진제가 방출되면서 이제는 문선재만 선수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2018년 문선재 기용은 장기적으로 엘지에 이득이었는데 그게 바로 김용의와 함께 삽을 들면서 4월 한달간 3안타 때리던 이천웅이 1군 복귀할 구실을 만들어준 것.. 물론 이 시즌에 이천웅이 .340을 치면서 문선재는 완전히 잊혀졌다


2.2. KIA 타이거즈 시절[편집]


2019 시즌을 앞둔 2019년 1월 17일, 정용운과 트레이드 되어 고향팀 KIA로 이적하게 되었다. 차명석 단장은 본인이 트레이드 요청을 했다고 한다. "LG에서는 이제 뛸 자리가 없는 것 같다. 나이도 많다. 부탁드린다"고 간곡하게 요청했다라고. 김기태 감독도 역시 KIA 감독을 맡은 이후 그렇게 문선재를 원했었고, 시즌 전 단장회의와 맞아 떨어져 트레이드가 성사된 것으로 보인다. 김 감독이 문선재를 원한 것이 KIA 부임 첫 시즌인 2015 시즌부터라고 한다. [오피셜] 문선재↔정용운, LG-KIA 맞트레이드 단행 게다가 문선재가 양현종을 상대로 강한지라 자팀 투수에게 강한 선수를 영입함으로서 부담을 줄이고, 문선재가 광주 출신이기도 하기 때문에[5] 고향팀에서 심리적 안정을 취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2.2.1. 2019 시즌[편집]


선택한 등번호는 27번인데, 트레이드로 온 김상현, 이명기 둘 다 등번호 27번을 쓰고 성공했던 기억이 있어서 문선재도 '혹시나' 하는 KIA 팬들의 바람이 컸다. 다만 입단 당시에 가뜩이나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제발 문선재 주세요"같은 언플을 했던지라 선수 본인이 잘하지 않는 이상 우호적인 시선은 힘들 전망이었다. 통산 성적이 그리 좋은 타자도 아니라서 더더욱 그리 기대가 안되는 상황이었다.[6]

1군 스프링캠프에 합류하였다. 그 와중에 탈쥐효과를 운운하며 인터뷰를 해서 LG팬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여기에 자신은 외야 전 포지션을 볼 수 있고 1루도 잘 본다는 드립을 쳤는데 엠팍과 디시의 LG 팬들과 삼성 팬들은 1루 수비도 제대로 못해서 조동찬을 부상으로 보내버린데다 그 상황에서의 사과도 전혀 없었고, 외야수비도 10년 경력 동안 아직도 타구판단을 제대로 못해서 고종욱만도 못한 수비를 보여주면서[7] 저런 소리가 나오냐고 까였고, 나이 먹고 인터뷰 스킬도 참 형편없고 눈치도 없다고 비난을 받았다. LG에서는 기회가 없었다고 드립을 친 김상현 & 정의윤 & 주키치처럼 LG팬들의 금지어 확정.[8]

물론 선수도 사람인 지라 매사에 완벽할 수는 없고 구단에 섭섭한 점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본인이 차명석 단장을 찾아가 간곡히 트레이드를 요청하고 차명석은 KIA 측에 좋게 얘기해서 보내주기까지 했으며 LG에 있을 때 기회를 못 받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김기태 감독이 LG 시절, 포지션을 정하지 않고 내, 외야 아무 포지션이나 막 썼던 잘못도 있긴 하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경력동안 전혀 개선이 안되는 타석에서의 답없는 컨택능력과 고쳐지지 않는 선구안은 엄연히 본인 책임이다. 결국 본인이 못해서 기회를 못 얻은건데, 아무리 섭섭한 마음이 있어도 어린 나이도 아닌 선수가 경솔한 인터뷰를 해서 차명석 단장까지 먹이는 행동을 한 점은 비판 받을 점이다.

시범경기에서 꾸준히 기용되면서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다른 의미로 환상적인 외야수비를 시전했다.

3월 26일, 경기가 기운 8회말 대타로 나와 포크볼 3개에 모두 헛스윙만 기록하며 초라하게 물러났다.

3월 29일, 3대6으로 뒤진 7회초 무사 1루에서 역시 삼진을 당했다.

4월 3일, 올 시즌 처음으로 선발출장했으나 첫 타석 10구 승부를 제외하면 포수 땅볼과 삼진 2개를 적립했다.(..) 와중에 중견수로 선발출장했던 이창진은 안타가 있었음에도 좌완 최채흥이 내려가자 해즐베이커로 교체되며 좌우놀이를 당했는데 정작 본인은 살아남아 자신이 양아들임을 증명해냈다.

4월 6일 대타로 나와 홈런을 치면서 생명이 연장되었다.

그리고 나지완과 제레미 해즐베이커가 2군으로 내려간 가운데에도 꾸준히 1군에 붙어있다.

4월 13일 SK전에서는 9회초 2아웃에 대타로 나와 볼넷을 얻어 만루를 채웠다. 이때 2점 지고 있던 상황이었고 그 다음 대타인 한승택이 역전 만루홈런을 때려냈기에 이 볼넷은 매우 중요한 활약이었다.

4월 17일 롯데전 타격도 타격이지만 우익수 수비에서 타구 판단, 포구가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얼마 못가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동안 잠깐잠깐 1군에 콜업됐다 다시 내려갔다를 반복하다가 9월 중순에 오랜만에 다시 1군에 콜업됐는데 그동안 제대로 된 활약이 없다가 9월 11일 사직 롯데전에서 레일리를 상대로 결승 홈런을 때렸다.

확대 엔트리 이후 콜업되어 그럭저럭 쓸만한 모습을 보여주나 싶었으나 9월 13일 1루수로 선발 출장해서는 어이없는 실책 2개로 윌랜드의 멘탈만 터트리고는 유민상과 교체됐다.


2.2.2. 2020 시즌[편집]


1월 6일 조부상을 당했다. 이후 1루 수비가 가능한 장영석이 KIA로 넘어오면서 경쟁이 불가피해졌다.[9] 물론 장영석을 3루로 돌리고 문선재를 1루로 쓰는 대안도 가능하겠지만 현재 팀 내에서의 활용도는 좌익수와 중견수 백업이라서 내야로 나올 일은 없을 듯하다. 만약 올해도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탈쥐효과는 고사하고 방출까지 각오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김호령의 부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개막전 엔트리에 승선했다. 중견수 후보였던 선수들의 줄부상과 기타 외야 선수들에 비하면 수비가 그나마 제일 나아서 승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발 장타력이 있는 몇 안 되는 외야 백업이기도 하고.

5월 5일 키움과의 개막전에서 대수비로 교체 출전해 9회에 내야 플라이를 치며 1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5월 6일 키움전에서 7회말에 한승택의 대주자로 출전해 최원준의 번트로 2루까지 가고,[10] 이후 8회에 백용환과 교체되었다.

5월 16일 두산전에서 터커의 대수비로 출전해 박신지를 상대로 시즌 첫 안타를 때려낸데 이어 최형우의 2루타 때 홈을 밟으며 득점까지 기록했다. 이날 문선재는 1타수 1안타 1득점을 기록했다. 다만 9회초 약간 아쉬운 수비로 3루타를 내준 건 옥에 티.

5월 24일 SK전에서 대수비로 출전해 1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지만, 선발로 출장했던 경쟁자 이우성13타수 무안타, 시즌 타율 0할이라는 끔찍한 성적을 남기면서 당분간은 문선재에게 기회가 갈 것으로 보인다.

5월 28일 KT전에서 김선빈의 대주자로 출전해 태그업 상황에서 슬라이딩을 하는 과정에서 발이 베이스에서 떨어지며 태그아웃을 당해 찬스를 날렸다.

5월 30일 LG전에서 나지완의 대수비로 출전해 포수 플라이를 치며 1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5월 31일 LG전에서 터커와 교체출전해 2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6월 2일, 김호령이 콜업되며 1군에서 말소되었다.

8월 30일, 1군에 등록되었다. 2군에서는 38경기에 나서, 26안타, 5홈런 21타점, 20득점, 0.230의 타율을 기록했다.

9월 2일, 이진영이 경조사 휴가에서 복귀하며 1군에서 말소되었다.

2군에서의 성적은 준수한 편이지만[11] 팀의 외야진이 리빌딩에 돌입했다보니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1군에서의 기회는 적은 편이다. 다만 리빌딩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이우성, 이진영 등 다른 젊은 외야수들의 성적 또한 신통치 않은지라 차라리 문선재에게 기회를 주는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다.

트레이드 상대였던 정용운이 11월 초에 방출된 가운데 2군 마무리 캠프에 참여하면서 살아남았다. 팀에 우타 외야수가 워낙 없는데다가 주전 외야수인 프레스턴 터커의 1루수 전향까지 겹치면서 외야진에 자리가 생김에 따라 문선재에게도 기회를 주려는 듯.


2.2.3. 2021 시즌[편집]


시즌을 앞두고 열린 1군 스프링캠프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

4월 29일,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류지혁을 대신해 1군에 콜업되었다. 콜업 직전 성적은 24타수 4안타에 타출장 0.167/0.276/0.208.

다음날 하루만에 1군에서 말소되었다. 그 이후로는 1군에 전혀 올라오지 못하고 2군에서도 2할 초반의 타율을 기록했다.

결국 김명찬, 장영석, 황인준과 함께 7월 20일 웨이버 공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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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8 18:31:05에 나무위키 문선재/선수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다만 이것은 이학주가 메이저리그로 진로를 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오지환은 유격수보다는 투수로 분류되는 선수였다.[2] 드래프트 당시에는 수비는 허경민, 타격은 안치홍, 주루는 이학주, 평균적인 면에서는 김상수가 높이 평가 받았지만 문선재는 모든 면에서 어정쩡하다는 평가가 있었다.[3] 그래도 본헤드 플레이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 무사나 1사에서 단독 도루 스타트를 끊었더라도 공이 맞는 소리가 나면 공을 피하거나 하이 플라이 시 귀루하기 위해 타구 확인은 해야 한다. 물론 관중들의 함성 소리 등의 영향으로 타구 소리를 못 들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2루 찍고도 멍하니 플라이 쳐다보며 3루로 가던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본헤드 플레이이다.[4] 사실 LG 외야진의 노쇠화 등의 사정으로 애매한 포지션의 내야수들이 외야수비 연습을 받은 사례가 꽤 된다. 결과들이 거진 별로라....[5] 심지어 양현종과는 동성중-동성고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6] 김상현같은 경우 하다못해 파워는 LG 트윈스 시절부터 유명했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파워툴 하나는 옛날부터 유명했다. 그러나 문선재는 그런 것도 없다.[7] 고종욱도 그 좋은 신체능력에도 불구하고 타구판단이 지옥급에 소녀어깨라 좌익수에서도 영 불안하지만 문선재와 비교한다면 전설의 수비수다(…).[8] 다만 정의윤의 경우 기레기의 소행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냥 탈잠실효과를 누려보라는 말에 그냥 별 생각없이 알았다고 했는데 갑자기 자신도 탈G효과를 누리겠다는 식으로 말했다며 기사가 나간 것. 정의윤 본인도 억울하다고 인터뷰에서 해명했다.[9] 실제로 문선재와 장영석은 겹치는 부분이 많은데, 일단 나이부터 같고, 포지션도 같은 1루수이며, 타석에서는 우타 거포지만 수비는 영 좋지 않은 것까지 닮았다.[10] 단 최원준이 중견수로는 영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대주자로만 출전하기에는 아깝지 않냐는 의견도 간혹 있다.[11] 타율 0.208 35안타 7홈런으로 남부리그 홈런 5위, 팀 홈런 1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