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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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왕정 및 그 이전 시대
2. 로마 공화정 시대
3. 로마 제정 시대
4. 중세 시대
4.1. 로마 관련
5. 근대사
6. 현대사


수정된 부분은 다음 표시.

21세기판 - (03)
전면개정판 - (12)
업그레이드판 - (18)


1. 로마 왕정 및 그 이전 시대[편집]


  • 로마 이전 이탈리아에는 에트루리아인과 라틴족, 그리스인들 살고 있었다.
- 당장 삼니움 전쟁 자체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는 '삼니움' 지역에 거주하던 삼니움족과의 전투였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앞서 말한 세 민족 외에도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었다. 심지어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는 켈트족들이 살고 있었고[1], 이들 중 일부는 포에니 전쟁 이후까지도 로마에게 복속되지 않았다.
  • 레아실비아를 레아실바아라고 썼다.(03)
  • 로마의 건국 신화에서 로물루스-레무스 형제의 아버지인 전쟁의 신 마르스는 신과 인간이 결혼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어쩔 수 없이 지키기 위해 아이들을 강에 버렸다. 이후 이를 불쌍히 여긴 늑대들이 자발적으로 아이들을 거두었다.
- 일단 로마 신화에서 신이 인간과 관계를 맺지 말란 법도 없으며 오히려 신들이 인간형 여성 종족들을 대상으로 불륜과 강간을 일삼던 신화다.[2] 당장 로물루스 형제의 조상인 아이네이아스부터 아프로디테의 반신 아들이다. 특히 그렇게 멋대로 임신시켜놓고 나몰라라 하던 신화 주신들과 달리, 마르스는 자기 자식만큼은 끔찍하게 잘 챙겨주는 주신이었다.
또한 로물루스 설화에서 생략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너무 많은데, 로물루스 형제의 어머니 레아 실비아는 알비롱가 왕의 딸이었으나 삼촌인 아물리우스가 아버지를 쫓아내고 왕이 된 후 실비아가 자식을 낳지 못하게 무녀로 만들었다. 마르스는 그렇게 무녀가 된 실비아와 관계를 맺은 것이고, 실비아의 출산 사실을 알게 된 아물리우스 왕은 아이들을 강가에 버렸고, 마르스는 실비아에게 아들들을 반드시 잘 키워주겠다고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버려진 둘을 키워주기 위한 늑대를 준비한 것이다.[3] 물론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된 형제가 쳐들어와 아물리우스는 끔살당했다.
  • 로마가 공화국으로 시작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왕국으로 시작했다.
  • 로마에게 경제 봉쇄를 가한 에트루리아의 왕은 타르퀴니우스다.
-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인이긴 했지만 로마의 왕이였다. 로마 국왕 문서 참조. 또한 로마가 에트루리아에게 경제 봉쇄를 당하자 수입이 급감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로마는 상업보다는 농업 위주의 국가였다. 애당초 왕정 시대의 로마는 역사라기보다는 사실상 전설에 가깝지만. 또 로마가 에트루리아에 속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영향권에 속했을지언정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 당초에 에트루리아도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 루크레치아 관련
- 여러 이들이 루크레치아와 결혼하고자 했다고 나오지만 이미 루크레치아에게는 콜라티누스라는 남편이 있었다.
- 루크레치아는 섹스투스가 자신을 납치한 후 반항하다 자살했다고 써놓았지만 실제로는 섹스투스가 루크레치아의 방으로 쳐들어가 단도로 협박해[4] 강간한 후 루크레치아가 남편인 콜라티누스와 시아버지, 그리고 친척이자 왕의 사위인 브루투스[5]를 불러 섹스투스가 한 일을 폭로하고 자결했다.[6]
  • 개정판 31페이지에 루마니아를 루마'이나'라고 써 놓았다.
  • 로마를 비롯한 서양 국가들이 상징으로 쓰는 새는 독수리가 아니라 수리다사실 한국어에서 독수리라는 말은 문화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생물학에서 사용되는 의미가 달라서 국가수리에 사용되는 미국의 흰머리수리나 독일의 검독수리 따위의 수리 종류를 독수리라고 뭉뚱그려 부른다. 먼나라 이웃나라만의 잘못은 아니다.


2. 로마 공화정 시대[편집]


  • 함무라비 법전이 가장 오래되었다.
- 가장 오래된 법전은 우르 제3왕조에서 만든 우르-남무 법전이다. 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 보다 3백여년 전에 만들어졌다.
  • 알렉산더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아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로 갈라졌다.
- 아시리아는 마케도니아는 물론이고 페르시아가 건국되기 전에 멸망했던 나라이다. 또한 '페르시아' 라는 이름은 아케메네스 왕조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아르사케스 왕조 둘 다에서 사용되지 않다가 로마 말기에 사산 왕조 들어서야 사용되었다.
단, 그리스=마케도니아라고 하는 부분은 틀렸다고 보기 힘들다. 아무리 마케도니아가 쇠락해도 그리스의 주도권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포스 5세 치세에 남,중부 그리스가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로마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는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고, 그 아들 페르세우스 때에는 잠시나마 그리스 전역의 패권을 되찾았다. 또한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일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 없는게 알렉산드로스 생전이라면 모를까, 제국의 분열이 고착화 될쯤 되면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의 구별이 유명무실해졌다. 일례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복 이후에 많은 그리스인들이 동방으로 이주했지만, 이들이 계승자 왕조들의 주류인 마케도니아인들의 비해서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비록 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와 자주 대립했다고 하지만, 그 정도 대립과 적대감은 남,중부 그리스 이웃 도시들끼리도 매우 흔했다. 무엇보다도, 로마의 침공이 본격화 되자 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를 맹주로 추대했다. 만약에 일부 주장처럼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외국으로 여겨졌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마케도니아(=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의 이집트, 군소 소아시아 왕국들, 이란의 셀레우코스로 분리되었다. 셀레우코스에 대해선 대체로 시리아란 명칭을 쓰는 편이다. 디아도코이 문서 참고.

  • 메시나의 지배자는 히에론이란 젊고 씩씩한 왕이었는데, 히에론 왕은 이웃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이웃의 용감하고 싸움 잘하는 마메르니티족의 청년들을 데려다 많은 봉급을 주고 메시나 시를 지키도록 고용하고 있었다.
- 히에로 2세는 메시나가 아닌 시라쿠사의 왕이었고, 마메르티니 역시 부족이 아닌 용병대장이었다.(12)[7] 메시나에서 그들을 고용한 적은 없으며, 그들은 시칠리아를 떠돌다가 지쳐 메시나에 머무를 것을 시민들에게 수락받은 뒤 그 기후에 반해 메시나를 점령한 것이다. 그리고 히에로 2세는 이들의 만행에 분노해 그들을 공격한 것이지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그렇게 한 게 아니다. 마메르티니와 그 용병들은 메시나의 모든 성인 남자를 죽였기에 히에로가 만일 메시나에 있었다 해도 죽음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내용이 심각하게 다른데도 개정판에서도 수정이 되지 않은 부분들 중 하나이다.

  • 마메르티니족[A]의 구원 요청에 카르타고, 로마 모두 흔쾌히 받아들였다.
-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로 카르타고는 흔쾌히 받아들인게 사실이나 로마는 논쟁이 있었다. 위에 나왔듯 마메르티니와 그 용병들은 메시나에서 만행이란 만행은 다 저질렀고 이로 인해서 로마에서도 "왜 저런 놈들을 도와야 하나" 라는 여론도 있었지만 하필 시칠리아 중 메시나와 시라쿠사를 제외하면 전부 카르타고 땅이었기에 가만히 놔두면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전부 먹어버릴까봐 참여한 것이었다.

  • 마메르티니족[A]은 로마에게 처단당했다.
- 확실하지는 않지만[8] 잘 먹고 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은 카르타고군보다 해군이 약해 해전의 패배로 전쟁이 길어졌고 전쟁 말에야 카르타고 해군을 무찌르고 이길 수 있었다.
- 의외로 로마군은 해전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해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물론 첫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까마귀의 도입으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해전에서 로마 해군은 카르타고 해군과의 싸움에서 오히려 우위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해전에서 완전히 발리지 않았다. 중간에 폭풍우를 만나 함대를 대거 손실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결국 근성으로 복구된 로마 해군이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또 최후의 해전이 드레파나에서 벌어졌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실제 드레파나 해전은 오히려 까마귀에 골탕먹던 카르타고 해군이 이를 피하는 전술을 개발해 로마 해군을 격파한 카르타고의 승전이었다. 개정판에서는 이 내용이 추가되었다. 다만 까마귀가 없거나 까마귀가 무력화된 상태라면 패배했다. 실제로 카르타고 해군이 까마귀를 무력화시킨 후 로마 해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적도 있다.
사실 먼나라 이웃나라의 1차 포에니 전쟁 서술은 특히 문제가 많은데, 로마군의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려다 크산티포스에게 패한 후 철수하던 로마군이 폭풍으로 10만의 병력을 잃는 대참사를 당했다고 써놓고 그 직후 로마가 힘들여 해군을 재건해 드레파나[9]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한 방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로마는 10만의 병력을 잃는 대참패를 하고도 재기했는데 카르타고는 해전 하나 졌다고 그대로 무너졌다는 이상한 서술이 되기 때문. 실제로는 육전과 해전 모두에서 카르타고가 조금씩 밀렸으며, 최후의 아이가테스 해전의 패배로 시칠리아가 완전히 로마의 손에 떨어지자 전쟁 수행 의욕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 여기서 설명되는 '까마귀'는 실제로 병사들이 다른 배로 건너가기 위한 작은 교각 모양 구조물(조교(弔橋)라고 함)의 별명이다. 그림에서 묘사된 까마귀는 로마 상선에 있던 새 모양 장식물이다. 이후 신판에서 수정.(12)
  • 탈란톤을 영어식으로 탤런트라고쓴다.
  • 카르타고가 사군툼을 공격하면 로마와의 평화 협정을 깨는 것이었다.
- 카르타고가 에브로 강을 경계로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어 조약 상으로는 에브로 강 이남의 지역을 모두 정복할 수 있었고, 로마와 사군툼 간 동맹 체결을 과거 하스드루발이 인정한 게 카르타고 본국의 의견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 논리적으로는 깨는 게 아니었으나 반박하기에 논리적 근거가 부족했던 로마 사절단은 평화와 전쟁 사이 양자택일만을 강요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깨지는 않았다.

  • 로마는 한니발이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어갈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 만화에서는 한니발이 바닷길로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중요 항구인 마실리아(마르세유)에 로마군이 집결에서 한니발을 막으려 했다가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어가서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전후관계가 다 틀렸다.
먼저 피레네 산맥의 경우 만화에선 한니발이 지중해 연안의 평야 지대로 올 것이라 예측해서 로마군이 이 곳을 지키고 있다가 피레네 산맥 한가운데를 정면 돌파한 한니발 때문에 닭 쫒던 개 신세가 된 걸로 나온다. 하지만 한니발이 갈리아 지역으로 들어올 때 로마는 아직 스페인 지역에 병력을 보내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한니발이 스페인 지역에서 갈리아 지역으로 진격한 루트는 정작 만화의 지도에서 언급한 그 지중해 연안 지역이었다.
알프스의 경우 로마는 한니발의 진군 경로에 대해 긴가민가해 했지만 한니발과 갈리아 부족이 벌인 론 강 전투 이후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마실리아에 로마군이 집결한 것도 바닷길을 이용해서 마실리아 지역을 우선 확보하고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기 전 요격하기 위해 한 이동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군과 결전을 벌이는 대신 곧바로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을 선택했다. 한니발군의 진군 속도가 로마군의 예상보다 빨랐고 당시 로마군의 사령관이었던 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가 조우전에서 부상을 입어 응원군으로 온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의 지휘를 받게 되면서 트레비아 전투에서 무모한 전술을 펼치는 등의 악재가 겹쳐 로마군이 패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전투는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패배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독재관이었던 파비우스의 지연전술이 한니발에게 연전연패해 흩어졌던 로마군을 다시 모으기 전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전투를 회피한 것이었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병력이 다시 모이자 로마군이 벌인 결전을 칸나이 전투라고 묘사했다. 실제로는 파비우스의 지연전술은 칸나이 전투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결전을 벌일 의도도 없었다. 파비우스의 전략은 전투로는 이길 수 없는 한니발을 보급의 차단과 지속적인 소모를 통해 말려죽이기 위한 것이었으며, 칸나이 전투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 로마인들이 파비우스가 물러난 후[10] 취임한 강경파들에 의해 벌어진 전투였다. 물론 칸나이에서 로마군은 개털렸고 이후 파비우스는 다시 중용되어 로마가 승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코끼리의 공격과 한니발의 신묘한 전술에 휘말려 궤멸당했다.
- 만화에선 한니발의 '초승달 진형'과 같은 전술은 묘사하지 않고 그냥 한줄 설명으로 끝낸다. 그래도 이건 사실을 왜곡한 건 아니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코끼리 운운은 분명한 잘못이다. 한니발이 로마 원정을 위해 데리고 간 전투 코끼리는 처음엔 37마리였으나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 등 강행군을 하면서 많이 죽어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에 진입했을 땐 딱 1마리만 남았다. 그래서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냥 한니발이 타고 다니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이후 카르타고 본토에서 코끼리를 비롯한 지원 병력을 보내주기는 했으나, 칸나이 전투가 끝난 뒤의 일이다.

- 이 내용을 보면 마치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로마를 공격하기 직전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토에 상륙해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간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실제로는 한니발이 카르타고로 돌아가 스키피오와 결전을 치른 자마 전투와 칸나이 전투 간에는 무려 14년의 차이가 있음에도. 실제로는 한니발이 로마 시가지 근처에 온 것은 단 한 번뿐이었으며, 이후에는 로마군의 지연 전술에 밀려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기 전까지 무려 10여 년 가량을 이탈리아 남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를 '바라보며' 분통해하는 모습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런 '이미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할 때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비롯한 스페인 내 카르타고 세력과,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공격해서 궤멸시킨 것은 각각 딱 1컷으로 처리했다. 그것도 전투의 묘사 없이 그냥 처리했다는 대사 한줄로 끝. 게다가 시라쿠사는 실제로는 스키피오가 아닌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별도로 원정하였는데, 만화에서는 마치 스키피오가 스페인에서 카르타고로 갈 때 경유지로 삼아 찍고 간 것처럼 묘사했다.

  • 카르타고 군대가 출동하여 누미디아군을 단숨에 깨뜨렸다.
- 카르타고군은 누미디아군의 횡포에 누미디아를 공격했으나 깨뜨리기는 커녕 패배했다. 사실 누미디아는 이전부터 군사적으로 강국이었으며[11] 3차 포에니 전쟁 시점에는 카르타고를 압도하는 강국이었음에도 만화에서는 갑툭튀해 로마의 약조만 믿고 카르타고를 공격한 것처럼 되어 있어 독자들 입장에서는 누미디아를 믿고 설치는 약소국으로 착각할 수 있다.
- 그리고 카르타고는 군사적으로 강국이 되기에 제약이 많았다. 카르타고는 인구구조가 다수의 피지배민족과 소수의 지배민족인 페니키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지배민족이 피지배민족을 억압하다보니 카르타고는 늘 이들을 신경써야 했으나 지배민족인 자신들이 소수이다보니 시민병을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보내는 것은 어려웠다. 뭐 이건 결정적 이유까지는 아니라 할 수 있겠지만[12] 진짜 문제는 적어도 너무 적었기에[13] 카르타고에서는 패전한 장군을 죽여버리는 법이 있었고 이러니 패전으로부터 교훈을 배울 기회가 로마보다 적었다.

  • 3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전쟁이 지겨워 무장 해제 요구에 응했다.
- 앞선 누미디아 얘기도 그렇고, 여전히 카르타고가 로마에 맞서볼 만한 힘이 있었으나 두 번이나 패한 전적 때문에 자신이 없어 무장 해제에 응했다고 언급된다. 이 때 거둬들인 무기와 갑옷이 무려 10만 벌이나 되었으며 이에 로마 측에서 만약 그냥 싸웠다면 오히려 우리가 무장에서 밀렸을 거라며 안도하는 황당한 서술까지 나와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로마와 카르타고의 군사력 차이는 과장 좀 섞어 미국과 북한 수준으로 차이가 났다. 로마는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를 주름잡던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 등 헬레니즘 제국들을 관광보내고 합병하거나 속국으로 삼는 등 사실상 지중해 최강자가 된 반면 카르타고는 부는 유지했을지언정 군사적으로는 완전히 몰락하여 로마와 맞서기는 커녕 한때 속국이던 누미디아의 공세에도 빌빌거리기 바빴으며 로마와 전쟁 위기가 닥치자 같은 페니키아계인 우티카 등의 도시들마저 로마 편을 들겠다고 나서고 카르타고는 제발 살려만 주십사하고 로마 앞에 벌벌 기는 형국이었다. 사실상 자기 손으로 나라를 멸망시키라는 로마의 마지막 요구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전쟁에 돌입했지만, 무장 해제 요구를 받아들이든 아니든 애초에 카르타고가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물론 그런 상태에서 3년이나 버틴건 좀 흠좀무하지만

  •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군은 패한 카르타고인들의 용맹을 기려 생존자들을 살려주고 이주를 허락했다.
대체 어느 자료를 토대로 이런 서술을 한 건지[14]
- 실제로는 분노에 가득 찬 로마군이 카르타고 시내를 초토화시키고 농지에는 소금까지 뿌리며(그나마 파괴된 카르타고에 소금 뿌리라는 대사는 작중에 나온다) 생존자도 전원 노예로 팔아 버렸고 오랫동안 방치하였다. 아예 그 땅에 정착하는 사람에게 저주가 있을 거라는 의식까지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분노와 경계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물론 카르타고라고 해서 특별히 잔혹했던 건 아니고 항복을 거부한 도시는 근대 이전까지는 어디나 비슷한 운명을 겪긴 했다는 점에서 로마를 깔 문제는 아니다. 카르타고가 다시 도시의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은 무려 100년이 지난 카이사르 통치 시절이다.

  • 가이우스 마리우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키케로가 나오지 않는다. 이 두사람은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넘어가는 단초를 마련했을 만큼 역사적인 비중이 매우 높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사병화(私兵化)의 근거를 마련해서 이후 로마의 대권을 쥐고자 하는 장수들이 정권 장악의 수단으로 훌륭하게 활용했다. 로마 공화정은 농민과 빈민층이 다수였던 병사들에 대해 지원을 안 해준 대신, 장군이 이 병사들을 대하는 것에 대해서 법적으로 규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이 장군 개인과 독단적으로 친분을 쌓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술라의 개혁은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공화정을 강화하였으나, 정작 공화정을 크게 위협할 요소인 사병화는 전혀 손대지 못했다. 술라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그대로 따라했기 때문에 사병을 해체한다는 건 술라라 해도 불가능했다. 그의 사후 부하였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책동을 시작으로 오히려 공화정 자체가 정당성을 상실하는 역효과만 불러왔다. 그들은 평민회에서 만든 법이 원로원의 동의 없이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내용으로 하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시키고 호민관과 연합해서 원로원을 공격하는 등 술라의 개혁을 전부 무효화해 버렸다. 그리고 키케로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갈 때 반카이사르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점에서 로마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 밖에도 실제로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15]이것도 역시 셰익스피어가 지어낸 말이다. 실제로는 그런 거 없이 찔려 죽었다. 그래서 그런지 희대의 카이사르 빠순이라 불리는 시오노 나나미도 셰익스피어의 '줄리우스 시저'를 혹평했다.

또한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제정할 때 이전의 로마 역법이 엉망진창이어서 8월에 눈이 내리고 3월에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는 식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묘사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율리우스력을 제정할 당시, 기존의 로마 역법이 약 3개월 정도 오차가 생긴 것은 맞다. 그래서 기원전 46년 율리우스력을 제정한 뒤 기존의 역법과 연결하기 위해 그 해의 날짜를 445일로 대폭 늘렸다. 만화에서 언급한 '8월의 눈, 3월의 가을'은 이 날짜 늘리기로 인해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다. 방향은 반대이지만 율리우스력을 그레고리력으로 전환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레고리력으로 전환하면서 기존 율리우스력과 맞추기 위해 1582년 10월 5일부터 14일까지의 10일을 삭제한 것.

  •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연분이 났다는 사실을 듣고 노발대발한 후 얼마 안 가 죽었다.
- 풀비아는 안토니우스 세력을 이끌고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안일한 대처와 옥타비아누스의 기민한 대응으로 패배했고 풀비아는 자결했다.

- 해당 서적을 읽은 사람들로 하여금 폼페이우스를 함량 미달의 젊은 장수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며, 마치 이들의 싸움을 조조와 여포의 싸움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실제로 폼페이우스는 놀라운 군사적 업적을 성취한 장수였다. 애초에 본작에서는 폼페이의 인기를 "꺄아! 싸인해줘요!"라는 연예인식 인기로 묘사하는데, 장군의 명성은 군사적 업적에서 나오는 것이다. 걍 대중들의 인기만 많았던 게 아니라 명장으로서 명망이 높았다는 소리.[16] 게다가 "나는 용맹만 있고 멍청한 놈 취급한다"라고 카이사르에 열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리 고대라고 해도 돌격대장도 아니고 사령관이 멍청하면서 힘만 세고서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커리어를 비교하면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이전에는 이렇다 할 군사적 업적도 없는 정치인이었지만[17] 폼페이우스는 당시 로마의 주요 전장 중 하나였던 중동-아시아 일대에서 명성을 쌓아 왔던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그는 카이사르를 상대로도 파르살루스 회전을 치른 걸 빼놓곤 나름 합리적으로 맞섰으며, 디라키움 공방전에서는 카이사르를 완패시키기도 하였다. 파르살루스 회전도 폼페이우스 본인의 의사로 했다기보다는 동행한 원로원의 압박으로 인해 장기전을 포기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시 카이사르가 희대의 전술가인데다 쓸만한 카드를 워낙 많이 갖고 있어서 이겼지, 만약 그런 조건이 하나라도 안 맞았다면 승자는 폼페이우스였을 것이다. 조조와 여포의 싸움이 아니라 오히려 조조와 원소의 싸움에 가까운 것.
단 저자가 평가하는 두뇌가 정치력에 한정된다면 이는 얼추 맞는 평가다. 전략적 역량이나 정책적 능력은 카이사르에게 조금 밀리는 정도였지만, 원로원에 휘둘리며 정치적 입지를 잃어가는 장면들은 대부분 사실이다.
그리고 먼나라 이웃나라의 오류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폼페이우스의 실제 나이는 카이사르보다 6살이나 많았다. 이제 이걸 보고 이탈리아 편에 나오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얼굴 작화를 다시 보라. 카이사르는 얼굴에 주름이 잡혀져 있는 반면, 폼페이우스는 옥타비아누스만큼이나 젊게 묘사되어 있다.

- 로마 출신 옛 부하인 루키우스 셉티미우스에게 살해당한 것을 맞지만, 그의 독단이 아닌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를 지원한 적이 없다. 게다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장성한 어른처럼 그렸는데, 실제 당시 프톨레마이오스는 15세의 소년에 불과했다.

  • 안토니우스는 연설로 브루투스 일파를 몰아냈다?
- 틀렸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황급히 도망쳤고 나중에 돌아왔을 때는 오히려 카이사르파와 암살자들 사이를 조율하려고 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이 대거 몰락하게 한 것은 오히려 옥타비아누스 때문이었다. 다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브루투스가 민중들 앞에서 연설을 한 뒤 나타나서 해방자들을 비난하는 연설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다만 연설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 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레피두스는 세력이 가장 약해서 모반으로 기회를 노리다가 실패하고 몰락했다?
- 2차 삼두정치 당시 레피두스의 행적을 지나치게 축약했다. 오히려 처음엔 세력이 가장 강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활발하게 행동하는 동안 레피두스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서 점진적으로 세력이 약해진 형태이다. 자세한 내용은 레피두스 문서 참조.

  •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인 옥타비아와 정략결혼을 했지만 이혼했다.
- 실제로는 옥타비아 쪽이 연상, 즉 옥타비아누스의 누나다. 물론 정략결혼 후에 이혼한 건 사실이다.

  •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죽어서 이집트에 묻히는게 소원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이 때문에 로마 시민들이 분노했다.
- 옥타비아누스가 만들어낸 소문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이것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에 적혀 있었는데 당시 남의 유언장을 공개하는 건 안되는 행위였지만[18] 워낙 내용이 충격적인고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로마인들이 경악한 부분은 저 이집트에 묻히는게 소원 '따위'가 아니라 더 심각한 부분이었다. 안토니우스는 당시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하였고 그 자리에서 로마의 동지중해 지역 모두를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에게 넘겨주겠다고 했었다. 여기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발표했으므로 사실상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한 서지중해도 카이사르의 유산으로 보아 상속권을 주장할 수도 있게 되는 셈이었다.[19] 로마인들로선 남의 나라 왕에게 자국 영토를 고스란히 넘겨준다는 안토니우스의 저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한 일은 안토니우스의 이 발표로 로마인들이 경악한 가운데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공개한 것 정도로, 이는 이미 안토니우스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감이 활활 타오르는 와중에 장작을 더한 정도이다. 즉 옥타비아누스가 처음부터 날조한게 아니라, 안토니우스가 스스로 실책을 저지른 부분을 잘 이용했을 뿐이다.

  •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고 옥타비아에게 편지를 보낼 때 혼인 신고서를 카이로 시청에서 뗐다고 나온다.
- 오늘날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는 이슬람 시대에 만들어진 도시로 당시 이집트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였다. 혼인 신고서 자체가 개그성 요소이긴 하지만 그 시절 이집트의 수도를 착각할 만도 할 일이다.[20]

3. 로마 제정 시대[편집]


- 게르만족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을 전멸시킨 것은 사실인데 너무 축약해서 설명하느라 왜곡이 많은 부분. 일단 로마의 게르마니아 정복은 한 번에 이루어진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서서히 이루어졌으며, 토이토부르크 전투 직전에는 게르마니아 상당부분을 지배한 상태였다. 즉, 정복을 위해 쳐들어온 로마군을 한 번에 이겨서 정복을 좌절시킨게 아니라 이미 정복이 끝난 상태에서 로마군을 전멸시켜 그때까지의 정복 성과를 무위로 만들어버린 것.[21] 또한 아르미니우스 역시 단순한 게르만족 인물이 아닌, 젊은 시절 로마군에 입대해 로마식으로 교육받았던 인물로, 로마군을 전멸시킨 것도 지휘관 바루스의 부관으로서 로마군 코스프레를 한 채 로마군을 숲 한가운데로 끌어들인 뒤 게르만족을 불러들여 이들을 습격한 것이었다.
또 저자는 아르미니우스를 작중에서 독일식 명칭인 "헤르만"이라 칭하는데, 사실 현대 독일어는 고대 게르만어와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이쪽이 원어에 가까운 명칭이라 보기는 어렵고, 보통은 라틴어명인 아르미니우스가 표준적으로 쓰이는 명칭이다. 아무래도 저자가 독일에서 유학한 경험 때문인듯.

  • 아우구스투스는 76세까지 장수해서 후계자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 내용 자체는 틀리지 않았지만 표현이 잘못되었다. 작중에선 후계자들이 먼저 늙어서 세상을 하직하며 '쳇! 그 영감 오래도 사네...'라고 한탄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사망한 후계자들은 대부분 사고나 병으로 요절했다. 굳이 따지면 저 표현에 맞는 후계자는 아그리파 뿐인데[22], 정작 만화에서 아그리파는 악티움 해전의 로마군 지휘관으로 딱 한번 등장하며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는 전혀 언급이 없다.
  • 네로에 대한 악평. 그가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 탄압을 주도했다.
- 공화정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남아있던 제정 초기에 14년이나 되는 긴 재위 기간을 지냈을 만큼, 실제 네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악정만을 일삼는 폭군은 아니었다. 물론 상당한 사치를 했고 어머니를 죽였으며 충신을 쫓아내는 등 성군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최소한 답이 없는 폭군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장 파르티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황제가 바로 네로였다.
그 외 로마 대화재 당시 네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로마가 아닌 멀리 떨어진 도시인 안티움에 있었으며, 화재 소식을 듣고 로마로 귀환해 소화작업을 직접 지도하였다. 따라서 최소한 불타는 로마를 보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다. 다만 당시에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은 사실이고, 로마 대화재가 끝난 직후 민심이 흉흉해지자 기독교도들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이게 후대에 폭군으로 알려지게 된 진짜 원인이지만... 그리고 기독교 탄압은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로마의 어느 시대나 동일했다.
네로의 외모도 사실과 좀 다르다. 만화에서는 호리호리한 중년의 모습으로 나오는데, 실제 네로의 외형은 살이 꽤 찐 외모였다.

우선 오토의 경우 그의 즉위에 '살인 황제 물러나라!' 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불과 일곱달에 불과한 재위기간동안 온갖 삽질을 일삼은 갈바에게 실망한 이들이 많았다. 네 황제의 해의 세번째 황제인 비텔리우스 역시도 실제로는 갈바 재위기간중에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때문에 오토를 두고 '살인 황제' 운운하는 것은 그 당시 분위기상 호응하는 이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비텔리우스 역시도 마찬가지로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이미 오토가 즉위하기도 전부터 갈바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우스갯소리감이다. 뭐, 쫓겨나는 장면에서 '나도 그런가?' 라는 대사가 나오긴 하지만.

  • 로마 제국의 인구는 백만이 넘었다.
- 순식간에 소국이 되어버린 로마 대상을 로마 시라고 명확히 규정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추정되는 부분. 로마 제국 시기의 태평성대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인구가 백만이 넘었으며 2천년 전에 인구 백만이라면 엄청난 거라고 서술했는데, 로마 제국 시기의 인구는 최대 5600만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수도였던 로마 시에 한정한다면 100만이 맞으므로 틀린 서술은 아니다. 문제는 작중에 로마 시라고 명확히 언급하지 않아 독자들 입장에서는 그냥 로마 제국 자체의 인구가 100만이었다고 생각하기 딱 좋다. 특히 주 독자들이 도시와 국가를 뚜렷히 구분하기 어려운 저연령층이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리고 상식적으로도 태평성대의 로마를 묘사하려면 로마 전체를 대상으로 해야지 누가 수도인 로마만 놓고 생각하겠는가?

- 틀린 얘기다. 물론 지도자가 여럿 존재하면 서로 분열될 가능성도 높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그 이전에 이미 로마 제국은 단일 황제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부분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는데 그걸 소홀히 하고 이후의 혼란상을 부각시켜 서술하다 보니 독자 입장에선 마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뻘짓을 저지른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 실제 사두정치는 후의 혼란기를 불러오긴 했지만 성립 초반에는 이전의 위기를 끝내고 짧은 중흥기를 가져왔으며 이후 다중 황제 체제를 끝장낸 것으로 서술된 콘스탄티누스 1세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실제로는 생전에는 여러 아들에게 이미 로마 제국을 분할해서 통치하게 하고 있었다.

- 이건 한 마디로 동서 로마가 공식적으로 서로를 별개의 국가로 선언했다는 얘기나 마찬가진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참 전부터 로마 제국을 단일 황제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높으신 분들이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다중 황제는 여러 번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며 따라서 동서 로마 제국의 존재도 이와 별개의 상황으로 볼 수 없다. 즉, 여러 황제가 다스렸든 아니든 동서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하나의 국가였다. 정작 책에는 분명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를 언급해 놨으면서 이에 대한 설명이 다른 것은 무슨 일인지... 게다가 동서 분리 이후에도 두 로마 간의 공조는 계속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직계가 끊긴 후 서로마의 제위 계승이 혼란스러울 때, 동로마 측에서 특정인을 밀어주거나 아니면 아예 황제가 되라고 파견했다. 그리고 반달 왕국이 탈취한 북아프리카를 되찾기 위해 대함대를 보내서 1113척 규모의 동서로마 연합합대까지 구성했지만 대패했다. 1113척 중 대부분이 동로마의 파견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할 만큼 했다! 레오 1세 트라키안, 가이세리크 참조. 책에서 말한 대로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면 일반적으로 두 나라는 절대 사이가 좋을 수 없다.

  •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죽임으로서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퇴위시켜서 로마 제국이 끝난 건 사실이나 황제를 죽이지는 않았다. 오도아케르가 죽인 건 로물루스의 아버지인 오레스테스다. 로물루스 본인은 자택에서 그냥 조용히 살다가 자연사했다.

  • 로마 제국은 포용력이 강한 다신교를 버리고 제국 통치를 위해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독선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반발한 타 민족들의 반발로 멸망했다.
- 개정판에 등장한 내용인데, 전형적인 로마인 이야기식 서술이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틀린 얘기다. 먼저, 다신교라고 해서 다른 종교에 포용적이고 관대한 건 아니다.[23] 게다가 기독교의 확산과 국교화 과정을 보면 기독교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기보다는 로마가 망해가면서 기독교가 퍼졌다는 느낌이 더 든다. 로마 제국이 망할 때쯤에는 제국 영토 대부분에 기독교가 퍼졌을 뿐만 아니라 침공해 온 게르만족조차도 종파는 다르지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기독교 때문에 망했으면 동로마는 어떻게 1000년을 버텼겠는가?
- 서로마 제국 멸망은 대개 군인 황제 시대와 같은 끝없는 내분과 게르만족의 침공, 정복전쟁의 중단으로 인한 외부수입 감소,[24] 사회 구조 변화로 인해 국가 수입이 줄어들면서 커진 재정 적자 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기독교 이전 로마 제국이 열려 있는 제국이었다고 이야기하나 로마 민족이 아니면 야만족이라 무시하는 건 공화정 때나 오현제 때나 바뀐 게 없었다.[25]이 내용은 구판본에서는 찾을 수 없고 에스파냐 편 이후 개정된 판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또한 391년에 있었던 일인데 392년이라고 나온다.
  • 로마가 멸망한 이유는 오래 지속된 평화로 사치와 향락에 찌들었기 때문에 남하한 게르만족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그들에게 군권을 내주었다 멸망했다.
- 이탈리아편 뿐만 아니라 먼나라 이웃나라 전반에 걸쳐 로마에 대해 사치와 향락에 찌든 귀족들이 하루종일 빈둥대며 놀고 먹는 등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세간에 로마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심는데 일조했다.[26][27] 그러나 실제 로마는 절대 평화만이 오래 지속된 나라가 결코 아니었으며, 제정 시대 내내 동쪽의 파르티아사산 왕조, 북쪽의 게르만족의 침입에 시달렸고 중도에 다키아 원정이란 대규모 전쟁까지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잘못된 서술이다. 로마가 멸망한 이유에 내적인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외적인 요인이 더 크다. 게르만족은 로마의 군대 양식을 비롯한 많은 부분을 모방하여 부족 단계에서 왕국 단계로 성장하고 있었다. 느슨한 봉건제를 유지하던 동방의 파르티아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사산 왕조로 교체되었고, 사산 왕조는 축척된 국력을 구 아케메네스 왕조의 재건을 외치며 로마로 방출하였다.[28] 또한 로마도 디오클레티아누스나 콘스탄티누스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와 군제를 개혁하는 등 쇄신의 노력을 하였다. 결국 상대적으로 자원이 부족했던 서로마는 멸망했지만 동로마는 개혁된 군제를 가지고 이민족의 침입을 잘 방어했으며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때의 팽창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정작 로마에 남하한 게르만족들은 대부분은 로마를 위해 대단한 충성을 바쳤다. 로마 제국에 남하하는 게르만족들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 게르만족들이 개인별이 아니라 부족별로 정체성을 유지한 채 제국군에 편입되기 시작한 관행 이후부터였다. 이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르만족이 이른바 유명한 동고트라던가 서고트인데, 이들도 가능하면 프랑크족이나 알레마니족, 반달족 같은 다른 경쟁 게르만족이 잘되느니 차라리 로마 제국의 힘을 빌려 누르는 게 좋다는 생각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는 로마 제국에게 충성심은 있었다.

서고트, 동고트 등과 가끔 연합해서 적어도 아이티우스 생존 때까지는 이런저런 게르만족들을 학살하고 다니던 일리리쿰 정예군도 실상은 그 조상 대부분은 게르만족이었으나 이들은 상술했듯 각자 개별적으로 로마군에 입대해서 로마화된 게르만인들의 후손이었기에 7세기에 아바르족 침공으로 완전 붕괴되기 전까지 끝까지 로마에 충성을 바쳤다. 로마화된 게르만족들 중 로마군을 장악한 권신들이 서로마 제국을 말아먹었다는 오해가 있고 그중 대표적인 자가 리키메르지만, 리키메르는 얼마든지 로마를 버릴 순간이 여럿 있었는데도 마요리아누스와 권력 투쟁하던 시기만 제외하면 그래도 자기 손해 안 보는 선에선 최대한 제국을 위해 충성했던 편이었다.[29]


4. 중세 시대[편집]



4.1. 로마 관련[편집]


  • 서로마 멸망이 곧 로마 제국의 멸망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틀린 얘기다. 분명한 학술적 의미로, 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하면서 끝났다. 그간 서로마 제국만 로마 제국 취급했던 건, 서유럽에 라틴어와 서로마 제국 멸망 이전 고대 로마가 준 영향이 두드러져서, 근세 이후 세계사의 향방을 지배한 서유럽 지역에서 서로마 제국만 로마 제국이라는 잘못된 관념이 적어도 1990년대까지는 제대로 수정되지 않았던 과거의 반박된 역사적 견해에 불과하다.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가 비로마적 요소라는 것은 따라서 1990년대 이전 역사학의 그릇된 견해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어를 이미 최소한 공화정 중기부터는 상용하고 있었고 문화 자체가 지속적으로 '그리스화'되어가고 있었기에 그리스적 요소를 비로마적 요소라고 말하는 건 그리스-로마 문화에 상당히 무지한 사람들의 견해에 불과하다. 성상 숭배령으로 서유럽과 갈라졌다는 서술도 사실과 다르다. 성상 숭배령은 동로마 교회 내에서 아나톨리아측 호족들의 이단적 견해였고 결국 동로마 내부에서 성상 숭배는 승인된 견해가 되었다. 그러니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제국이 다른 나라라는 얘기는 통일신라와 신라가 다른 나라라는 얘기와 진배없다. 물론, 수사적 용어로 자주 쓰이는, 동로마 제국이 고대 로마를 계승한 나라였다는 얘기는 엄밀한 역사학적으로 틀린 얘기는 맞다. 그냥 동로마 제국은 계승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로마 제국의 연장선상에서 이어진 그 나라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가 긴 나라를 구분 없이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얘기니 편의적 구분으로 저마다 혹자는 313년부터, 혹자는 395년부터, 혹자는 627년~642년부터 동로마 혹은 비잔틴, 비잔티움 제국 등으로 나눠서 볼 뿐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고대 로마동로마 제국 문서 참조. 그냥 로마인 이야기 이탈리아편이 1990년대 이후 로마 후기사 연구 흐름에 대한 내용을 거의 알지 못해 이런 오류가 벌어진다고 보면 간단하겠다.
  • 보통은 서로마 멸망을 일부에선 동로마 멸망을 중세 시작으로 여긴다고 하는데 동로마 멸망은 오히려 중세 종료로 여긴다.
  • 동로마가 이슬람 세력 등장으로 인해 계속 밀려서 초라해지다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이슬람 국가와의 대립과 동로마의 세력 변화를 지나치게 축약한 부분이다. 7세기 정통 칼리파 시대부터 15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멸망할 때까지의 동로마 제국은 중흥과 쇠퇴를 반복한 매우 복잡한 시기였다. [30] 게다가 오스만 제국과 이슬람 제국은 연속성이 있는 나라가 아니고 추구하는 이념도 상당 부분 차이가 있는 다른 세력이었으며, 8~10세기는 제국의 반격이라고 여겨질 만큼 동로마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해당 편은 이탈리아 편이지 그리스 편이 아니므로 동로마 역사는 축약이 불가피하긴 하였으나 이런 식의 요약은 명백히 틀렸다고밖엔 할 수 없다.


4.2. 이탈리아 관련[편집]


  •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이탈리아는 동고트족이 차지했지만 곧 대대적으로 쳐들어온 랑고바르드족에게 멸망하였다.
-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것은 벨리사리우스가 이끈 동로마 제국군이었고 랑고바르드족은 그 동로마 제국 치하 이탈리아를 공격해 차지한 것이었다.

  •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수많은 도시국가로 갈린 이탈리아의 역사는 이민족 침략 등의 이유로 인해 기구하였다.
- 이들이 이민족의 침략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나라들이 항상 기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 들어섰던 국가들 중에서는 강하고 부유했던 국가들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은 근세까지는 최강 중 하나였고 에게 해와 아드리아 해, 이탈리아 본토에서도 수많은 속령을 만들며 '서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이라고 자평할 정도였다. 특히 캉브레 동맹과의의 전쟁 때는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교황령을 베네치아 공화국 혼자서 상대했을 정도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경쟁했었던 제노바 공화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피렌체 공국이나 밀라노 공국 역시 만만찮은 부국이었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 급격히 발달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스페인이나 프랑스같은 강대국가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는 시기는 중앙집권이 확립되는 16세기 이후에나 해당된다. 로마 멸망이후의 파트에도 이러한 점을 언급하였으며, 세상만사 유럽만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언급된다.

  • 카를 대제(카롤루스 대제)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침공하는 이슬람 세력을 막아 유럽 대륙에서 크리스트교를 지켰다는 서술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슬람 세력을 막은 것은 카롤루스 마르텔로 카를 대제의 할아버지이다.

  • 랑고바르드 왕국이 프랑크 왕국에게 멸망했을 때 롬바르드인이 세운 베네벤토 공국이 언급되지 않았다. 또 시칠리아 왕국이 세워졌을 때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으로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이 갈라진 것을 설명하지 못했고, 나중에 나오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통합 과정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세력을 바이킹으로 묘사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화 및 프랑스화된 노르만족이다. 노르만도 바이킹계이기는 하나 조금 다르다.


5. 근대사[편집]


  • 사보이아 공국을 사보이 왕국이라 말했다.
  • 통일 당시 베네치아는 공화제식 정치체제를 시행하는 곳이였다.
- 중간에 베네토 공화국이라 하는 공화제 국가가 잠시 부활하기는 했지만, 당시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기에 공화제를 실시한 역사가 있는 지방이라는 표현이면 몰라도 공화제로 통치되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나폴레옹에게 멸망하기 전에는 공화국이긴 했으나, 권력이 시민들에게는 제한되어 있는 편이었다. 이는 KBS <부국의 조건>에도 등장한다.
  • 통일 후에도 카밀로 카보우르가 계속 나오는데 카보우르는 통일 전에 죽었다. 통일 정부의 얼굴마담으로서 등장한 것...

6. 현대사[편집]


  • 무솔리니 축출과 2차대전 종결 이후 이탈리아 왕가가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쫓겨났다는 서술까지는 맞게 했으나, 무려 46년 전에 죽은 움베르토 1세가 퇴위했다는 움베르토 1세가 이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100세가 넘는다 해괴한 서술을 해놨다.
- 1946년 투표로 퇴위한 국왕은 움베르토 1세의 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고, 더 정확히 서술한다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어떻게든 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인기 없는[* 본인은 책에서도 나왔듯 무솔리니를 써줬다. 물론 그건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들이닥치자 무솔리니를 팽해버렸으니 실수했다 쳐도 그 뒤로 안전한 남부로 토껴버렸다. 덕분에 이탈리아 남부는 진작에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이탈리아 북부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살로 공화국이 들어섰고 때문에 북부의 해방은 2년 뒤에나 이뤄졌다. 투표에서 북부에서는 공화국 지지세가 강했던 것도 무책임한 왕실에 대한 분노도 크게 작용했다.[31] 그나마 보수적이고 일찍 해방된 남부에서 북부와 달리 왕정을 지지해서 46%의 지지표라도 나온 것. 그나마도 남부에서는 투표율이 낮게 나왔다.] 자신이 물러나고 왕세자인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하는 길을 택했지만 그 역시 아버지로부터 양위받은 지 불과 34일 만에 국민투표에서 왕정 폐지라는 결론을 받아들고 퇴위했다고 적어야 한다.[32] 21세기판에서는 제대로 2세로 수정되었다.(03) 다만 움베르토 1세처럼 커다란 콧수염이 그려져 있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라고 표기하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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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7 12:59:39에 나무위키 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이탈리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이 지역을 가리키던 '갈리아 키살피나'부터가 알프스 이쪽의 갈리아라는 뜻이다.[2] 제우스=유피테르만 해도 시도때도없이 인간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물론 유피테르가 최고신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3] 늑대 자체가 마르스를 상징하는 동물로 대접받은 동물이다.[4] 처음에는 루크레치아는 그를 거부했지만 섹스투스는 거부하면 너를 강간한 후 남자 노예를 데려와 너와 함께 죽여 네가 남자 노예와 놀아나다 죽은 것으로 하겠다고 협박했다.[5] 책에서 로마의 독립을 이끌었다고 나온 그 브루투스이며 책에서 나온대로 본인이 나서서 로마 시민들을 선동하여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는데 앞섰다.[6] 주 타겟이 아동~청소년인 만화에서 유부녀가 강간당하는 장면을 대놓고 넣긴 어려웠기에 반쯤 고의적으로 들어간 오류라고 할 수 있다.[7] 이 부분만큼은 수정되었다.[A] A B 물론 이는 위에 나왔듯 오류[8] 이유는 이후 그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9] 상술했듯 이것도 오류다. 실제론 아이가테스 해전[10] 한니발은 교묘하게도 파비우스를 실각시키기 위해서 남부 이탈리아를 털어다니면서 파비우스의 재산은 일절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러자 로마 내에서는 '파비우스 저 양반 한니발과 짝짜꿍하는거 아니야?' 라는 불만이 생겼고(이유는 파비우스의 재산은 온전한 동안 자기네들 재산은 거하게 털리고 있었기 때문) 결국 파비우스는 실각한다.[11] 애초 이 나라는 자국군을 용병으로도 보내던 국가다. 용병은 기본적인 실력은 어느정도 보장되어있다는 소리니 누미디아의 군사력이 결코 약하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누마디아의 군사력이 약했다면 카르타고한테 나라 방어한다고 전 군사력을 본토에 묶어놔야 하는데, 그 상황에서 자국군을 용병으로 보낸다는 사치에 가까운 뻘짓을 벌일 리가...오늘날로 따지자면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의 위협 때문에 해외 파병에 소극적인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12] 카르타고는 이 문제를 용병을 고용하는 쪽으로 해결했고 로마 역시도 시민병만으로 국방을 담당하지는 않았다. 비단 로마와 카르타고 뿐만 아니라 용병은 19세기 초반까지 각 나라 국방력의 주축을 차지했다. 스위스 용병과 세포이를 예로 들 수 있으머, 오늘날도 형식적이긴 하지만 남아있는 용병이 있다.[13] 전체 인구부터가 카르타고는 로마보다 100만명이나 적었다. 당시 영아 사망률이 높았다는 걸 감안하면 이는 굉장한 수치다.[14] 사실 이건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라, 이원복 작가가 몰라서 이렇게 썼다기 보다는 주독자층인 어린이들을 위해 순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카르타고 점령 후에 부관이 생존자를 노예로 팔거나 학살하자고 나오는 장면이 있기는 하다.[15] 다만 여기선 브루투스... 너도냐...이다.[16] 물론 작품에서도 폼페이에 대해서 '폼페이는 지중해에서 날뛰는 해적들을 뿌리뽑는 쟁쟁한 실력자' 라고 한 줄 정도지만 활약을 적긴 했다.[17] 삼두정치 이전 히스파니아에서 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군사적 업적을 쌓기는 했다.[18] 정확히는 당연히 생전에만 앞서 말한 안토니우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민중들에게 암살자들에 대한 비난 연설을 할 때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언급했으며 그 내용 또한 공개했다.[19] 더 웃긴건 동지중해야 안토니우스 영역이니 그렇다고 쳐도 서지중해는 옥타비우누스의 영역이었다. 자기 영역이라면 모를까 뭔 베짱으로 남의 영역까지 멋대로 다른 남에게 넘겨준다는 말을 했는지는 의문[20] 여담으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일 강에 해가지고 푸른 달이 피라미드에 걸리면...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해는 서쪽에서 지고 달은 동쪽에서 뜨는데 앞부분에서 피라미드는 나일 강 서쪽에 지었다고 서술했기에 앞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21] 무려 2개 군단이 한꺼번에 없어졌기 때문에 힘과 치안의 공백이 생겨 게르만족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총독이었던 바루스 또한 게르만족의 사정에 무지해 실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게르만족의 반발이 심한 상태였다.[22] 둘이 동갑이라 후계자라는게 의아할 수 있는데 평소 병약했던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강건했던 아그리파가 더 오래 살것이라 예상해 후계자로 내정했다. 그러나 정작 더 오래 산 쪽은 아우구스투스였다는 게 아이러니.[23] 가장 극단적인(?) 힌두교의 경우 타종교의 신들을 힌두교의 신들 중 하나로 취급해 절대 힌두교적 요소를 버리지 않는다.[24] 오죽하면 검투사 공급마저 어려워 이전에는 죽이는 일이 많았지만 말기쯤 되면 죽이는 대신 몸에 상처를 내는 것으로 완화했다. 검투사에 집어넣을 노예가 없어서 마냥 죽이기만 하면 사람이 줄어들 마당이니 죽이지 않게 된 것.[25] 단 로마는 속주민들을 어느 정도 포용하기는 했다. 속주 출신 황제나 이민족 피가 섞인 황제가 나오기도 했고.그리고 자민족 아니면 야만족이라고 무시한 건 비단 로마 제국 뿐만 아니라 웬만한 고대,근대 국가와 제국들도 마찬가지였다.당장 로마인들도 한때 그리스인들에게 바르바로이 취급을 당한 적이 있었다.[26] 실제로 이랬던 사람이 있는데 네 명의 황제의 해의 세 번째 황제인 비텔리우스로, 엄청난 식탐으로 온갖 만찬과 연회에 돈을 들이부었으며 심지어 음식을 먹어 배가 부르면 깃털로 목구멍을 간질여 게워낸 뒤 또 먹는 짓을 반복했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이걸 로마의 귀족들이 대개 그랬다고 부풀려 서술한 것. 당대 로마에서도 이 짓거리를 미친 짓으로 여겨 엄청난 욕을 먹었고 비텔리우스는 쫓겨나 죽었다.[27] 물론 이것과는 별개로 귀족들이 문제가 많았던 건 맞다. 어느나라건 기득권을 쥔 귀족들은 더 많은 기득권을 쥐기 위해서 분주했고 시대가 시대이니 더 많은 땅이 그들에게 더 많은 기득권이 되는 것이기에 어떻게든 땅을 더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합법적인 방법만 썼다면 모를까 그러지는 않았다. 당장에 그라쿠스 형제도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이 너무 가난해지자 이를 개선해보기 위해 나온 개혁가였다. 그러나 원로원을 위시한 귀족들은 이런 '민중파'들을 가차없이 때려잡았고 결국 이렇다할 대책이 마련되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로마의 귀족들이 먹고 놀기만 한건 오류. 이에 가까운 집단은 사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벌귀족이나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에 더 가깝다.[28] 이렇게 세워진 사산 왕조는 7세기까지 로마와 계속 충돌하는데 이 충돌은 해당 시기에 발흥한 이슬람에 의해 사산 왕조가 멸망하는 것으로 끝난다. 물론 동로마도 시리아, 이집트 등을 잃어 영토가 반쪽이 난다.[29] 리키메르는 로마 제국에게 충성을 바치던 스틸리코가 어떻게 버림 받았는지 익히 아는 세대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30] 심지어 동로마는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한 번 멸망해서 니케아 제국이 그 명맥을 이어가다 1261년에 가까스로 부활한 전적이 있으며,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동로마의 실질적인 쇠락을 초래했다고 보고 있다. 만약 1261년에서 1453년까지를 한정한다면 앞의 서술은 맞는 것이 된다.[31] 심지어 살로 공화국 시기 북부에서는 파르티잔 운동이 활발이 벌어졌는데 이들 파르티잔은 좌파였다. 즉 왕실의 자폭으로 북부에서 좌파 지지를 강하게 만들었던 셈.[32] 물론 움베르토 2세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왕정 지지가 강하게 나온 남부 역시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움베르토 2세는 대법원에서 그의 소송을 기각하자 받아들이고 남부는 움베르토 2세를 왕으로 모시고 북부에서 떨어져나가자는 주장까지 했지만 움베르토 2세가 나라를 반쪽낼 순 없다고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심지어 왕정 지지자들도 사실 내전까지 일으켜가며 왕정을 유지하려고 했을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다 남부에서도 공화국 지지율은 20% 정도는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