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오스만 제국, 터키

덤프버전 :




1. 로마제국 관련
2. 헝가리 관련
3. 오스만제국 관련
4. 나폴레옹
5.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
6. 대타협과 나폴레옹의 칭제 사건
7. 발칸 전쟁
8. 탈라스 전투 후일담


1. 로마제국 관련[편집]


  • 이탈리아 편에서도 범했던 오류인 로마 제국의 동서 분리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오류가 재등장했다. 제국의 영토를 두 명 이상의 황제가 나누어 다스린 것은 군인 황제 시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으며[1] 테오도시우스 사후의 분할도 그와 똑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결국 분열이 고착화된 것이었을 따름이지, 나라를 둘로 쪼갠다는 선언이나 칙령 따위가 있었던 게 아니다.

  •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아틸라에게 청혼해서 아틸라의 서로마 침공을 초래한 과정을 잘못 설명했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남매가 동로마에 망명했던 건 맞지만, 형제끼리 황제 자리를 두고 다투다 망명한 게 아니라 부황 콘스탄티우스 3세가 죽고 모후 갈라 플라키디아와 삼촌 호노리우스 황제의 다툼 때문에 온 가족이 호노리우스를 피해 동로마로 망명한 것이다. 그 후 423년에 호노리우스가 죽었을 때 서로마 측에서 발렌티니아누스가 아닌 요안네스를 황제로 추대하자,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원으로 요안네스를 내쫓고 425년에 발렌티니아누스가 즉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아닌 아틸라의 도움으로 451년에 즉위했다고 잘못 적었다. 호노리아가 아틸라를 끌어들인 조건인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반을 주겠다는 내용은 맞지만, 호노리아가 아틸라를 부른 진짜 계기인 궁정 추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아틸라와 교섭해서 훈족을 돌려보낸 로마 총대주교(교황) 레오 1세를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로 잘못 적었는데 이름, 재위기간과 활동 시기가 거의 겹쳐서 작가가 헷갈린 듯 하다.

  • 동로마 제국의 만치케르트 전투의 설명에서 로마노스 4세의 황후와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되어있다. 황후는 맞으나,[2] 아들은 로마네스 4세의 아들이 아니라 전대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의 아들인 미하일 7세 두카스이다.


2. 헝가리 관련[편집]


  • 헝가리훈족이 5세기 경 세운 나라라고 잘못 표기. 헝가리가 훈족을 조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맞지만, 명백한 헝가리의 기원인 머저르인이 판노니아 평원(현재의 헝가리)에 정착한 것은 9세기 후반의 일이다.

3. 오스만제국 관련[편집]


  • 오스만 제국 황제의 명칭을 작중 내내 술탄으로 통일하고 있다. 술탄 칭호는 메흐메트 2세 이후 왕들의 주인이라는 파디샤로 대체되었으며, 이후 황후나 공주들을 일컫는 용어로 격하되었다. 그냥 술탄으로 통일되어 있다면 이 부분을 생략하고 넘어갔다고 볼 수 있을텐데, 정작 무라트 1세 이전까지는 가지, 혹은 베이라는 칭호를 썼다는 내용은 그대로 실어 놓고서는 파디샤 칭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다만 이 점은 심각한 고증 오류까지는 아닌데, 공식 칭호는 파디샤가 되었어도 술탄 역시 관습적으로 계속 쓰였기 때문이다. 가령 터키의 사극인 무흐테솀 유즈이을을 보아도 쉴레이만 대제가 행차할 때 ''술탄 쉴레이만 한(Sultan Suleiman Han)' 납시오~!' 라고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3]. 또 이 점을 지적하려면, 표트르 1세 이후 러시아 황제들을 차르라고 부르는 사례는 모조리 지적해야 한다. 이 쪽 역시 공식 칭호는 아니었음에도 관습적으로 계속 쓰인 예이기 때문이다. 다만 간단하게라도 언급하고 넘어갔다면 모를까,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은 부분은 분명한 판단착오가 맞다.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점은 '무라드 1세 이전까지는 가지나 베이를 칭했다' 라는 부분. 베이는 군주의 칭호이며 실제로 무라드 이후로는 오스만의 군주가 사용한 예가 없지만, 가지는 군주의 칭호가 아니라 이슬람을 위해 싸우는 전사를 가리키는 명칭일 뿐더러 훨씬 후대인 무라드 4세마무드 2세도 칭했기 때문이다.

  •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스스로를 로마 황제라 칭했을 때 이것이 인정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유럽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당시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가 러시아로 이주해 이반 3세와 혼인하면서 동로마의 정통성이 러시아로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서술되었으나, 이는 논쟁의 대상이 될 부분이지 작중에서처럼 완전히 러시아 쪽이 로마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애당초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개념은 동서가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한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간에도 대립이 존재하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러시아가 제3의 로마를 칭한다 한들 서유럽 쪽에서 인정해 줄 리도 없다. 더군다나 러시아가 제 3의 로마를 처음으로 칭했다면 혹시 모를까 항목에도 소개되어 있듯 이런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낸 나라는 세르비아였고 그 다음이 불가리아였으며 그로부터 백여년 뒤에 메메드 2세가 로마 황제를 칭한 것인데,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주장이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비잔틴 황녀와 러시아 차르의 결혼으로 설명이 안 된다.

  • 하렘의 어원인 아랍어 단어 '하람'이 하림으로 오타가 났다(109페이지). 또 록셀란으로도 알려진 휘렘 술탄을 하렘 술탄으로 잘못 표기했다. 하렘 제도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기에 황후 비슷한 직책인 하세키 술탄을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한데[4], 한글 표기로 보나 Harem, Haseki Sultan이라는 현대 터키어 표기로 보나 비슷하게 안 생겼다.

  • 이브라힘 파샤가 록셀란과의 암투에 패하여 숙청당한 건 맞지만 암살당하지 않고 처형당했다. 다만 밤에 농아 처형인들을 이브라힘 파샤의 집으로 보내 암살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기는 한다.


4. 나폴레옹[편집]


  • 같은 문제로 나폴레옹이 황제로 인정받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작중에서는 유럽에서는 황제를 칭하기 위해서는 서로마의 후계자로 인정받아야 했기에 나폴레옹이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제위를 자신이 가져간 것이라고 서술했는데, 실제로 신성 로마 제국을 없애버린 것은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된 프란츠 2세였고, 나폴레옹은 오히려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노린 인물이다(...).[5] 애초에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 거의 모든 열강들이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게 된 경위가 바로 나폴레옹이 황제를 칭하면서 가톨릭 세계에 황제가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실 신성 로마 황제라는 자리는 사실상 30년 전쟁 이후 별 의미 없는 자리에 가까워졌고, 조지 3세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이[6] 황제가 정 되고 싶다면 대충 끼워 맞추면 될 일이었다. 러시아나 불가리아 제국 등이 황제를 칭했을 때도, 유럽에서는 황제는 황제이되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갔고, 나폴레옹 이후 로마 황제라는 자리가 사실상 무의미해지자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들은 황제를 칭하게 된다.

5.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편집]


  • 독일 통일 과정에 대해 작중 비스마르크가 나와 독일의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언급하는데,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독자가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독일 통일 당시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 민족의 하나로 통일의 대상으로 지목되었으나, 오스트리아는 독일 민족 이외에 다른 민족이 사는 지역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포기하려 하지 않아 통일에 걸림돌이 되었기에, 결국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러 패해 연방에서 쫓겨난 것이다.[7] 그러나 작중에서는 이러한 설명 없이 그저 오스트리아를 외세라고만 부르고 있어 마치 오스트리아가 독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라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8] 당장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붙어있으며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능한 부분인데도 말이다. 근데 정작 작중에 나온 독일 연방의 지도에는 독일의 범주에 오스트리아가 버젓이 끼어 있다(...).

6. 대타협과 나폴레옹의 칭제 사건[편집]


  • 한편 앞서 오스트리아가 칭제를 하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단독으로 황제를 칭하는 건 어폐가 있어서 헝가리를 끌어들여 이중 제국을 형성했다고 나오는데, 오스트리아가 제국을 칭한 것이 1804년이고, 대타협은 1867년으로 무려 63년의 격차가 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선포는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제국 내에 민족주의 바람이 불어 위기가 닥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헝가리를 끌어들인 것이지, 나폴레옹의 칭제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7. 발칸 전쟁[편집]


  • 발칸 전쟁문단에서 2차 발칸전쟁을 불가리아의 지나친 영토 독점을 원인으로 기록했는데, 실제로는 세르비아의 영토독점[9]에 반발한 불가리아가 전쟁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불가리아 역시 독립 직후부터 대불가리아주의를 주창하며 주변국들의 경계심을 샀으며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차지한 마케도니아를 힘으로 빼앗으려 한 것도 사실이다.

8. 탈라스 전투 후일담[편집]


  • 탈라스 전투로 중국이 중앙아시아 영토를 잃고 현재 위구르 지역만 지배한다고 나오는데, 송나라 때 이미 당나라의 서역 영토를 잃었으며 위구르에 대한 지배가 확고해진 것은 청나라 시기의 일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7 12:59:34에 나무위키 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오스만 제국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영토를 나누지 않고 황제가 둘이었던 사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루키우스 베루스가 처음이다.[2] 일단 전대 황제의 황후랑 결혼해서 즉위한 거라, 황후는 맞다.[3] 쉴레이만이 아니라 그보다 후대인 아메드 1세이기는 하지만, '술탄 아메드 한' 이라고 부르는 사례(40초부터).[4] 휘렘 술탄이 최초의 하세키 술탄이었으며, 이브라힘 1세 때 8명의 후궁이 동시에 이 직책에 임명되어 변질되더니 18세기부터는 쓰이지 않게 된다. 이후 하렘의 최고직은 카든에펜디라고 불리게 되지만, 황후라고 보기는 많이 부족한 위치였다.[5] 다만 나폴레옹도 처음에는 신성 로마 제위를 노리다 오스트리아가 제국을 선포해 별 의미가 없어지자 태도를 바꿔 신성 로마 제국 폐지를 요구했다. 그렇다 해도 제국을 직접 멸망시킨 것은 프란츠 2세가 맞다.[6] 조지 3세 치하에 미국이 독립해 나가자 신하들이 울적함도 달랠 겸 영국과 아일랜드의 황제라는 논리로 조지 3세에게 황제 칭호를 쓰도록 권유한 일이 있다. 다만 조지 3세 스스로가 거부해서 일단락.[7] 이렇게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의 통일을 주장한게 대독일주의,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의 통일을 주장한게 소독일주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제2제국은 소독일주의 제3제국은 대독일주의와 비슷하다. 물론 둘 다 세계대전에서 개발살이 난 것도 비슷하다.[8] 사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조명한 적이 없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일에 대해서도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일원이었다는 얘기는 전혀 없고 뜬금없이 히틀러가 "내가 태어난 곳이었으니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한 나라인겨!"라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내용만 나와있다.[9] 그렇지만 여기에 세르비아도 할 말이 있는게 원래 세르비아 몫이었던 알바니아를 삼국 동맹이 압력을 넣어 토해냈기 때문이다. 또 불가리아가 차리그라드를 차지하겠답시고 트라키아에 집중하는 사이 세르비아가 차지한 북마케도니아는 세르비아가 열심히 피를 흘려 정당하게 차지한 영토인데 줄 이유가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