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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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jpg
이름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Justa Grata Honoria)
출생
미상 로마 제국 로마
사망
미상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3세
어머니
갈라 플라키디아
형제자매
테오도시우스(이부 남매), 발렌티니아누스 3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나.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청혼한 일로 유명한 인물이다. 위키백과에서는 418년부터 455년까지 살았다고 나온다.


2. 생애[편집]


호노리우스 황제에 의해 공동 황제로 지명된 콘스탄티우스 3세갈라 플라키디아의 딸이다. 친형제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있었으며, 이부형제로 갈라 플라키디아가 서고트 왕국의 국왕 아타울프 사이에서 낳은 테오도시우스가 있었다. 421년 콘스탄티우스 3세가 급사한 후, 갈라 플라키디아는 호노리우스가 자신을 해치려 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데리고 라벤나에서 도망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이때 호노리아도 같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425년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의 지원에 힘입어 서방 로마의 제위를 탈환했다. 426년경엔 호노리아가 아우구스타를 수여받은 걸 기념하는 주화가 주조되었다.

서기 7세기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기록한 역사서에 따르면, 호노리아는 시종장 에우게니우스를 유혹하여 성관계를 맺었고, 임신까지 했다가 탄로났다고 한다. 마르켈리누스 콤스 연대기에 따르면, 호노리아는 즉각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고 한다. 에드워드 기번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발렌티니아누스의 누이(호노리아)는 라벤나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녀의 결혼이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으므로, 아무리 뻔뻔한 신하라도 함부로 넘보지 못하도록 '아우구스타'의 칭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아름다운 호노리아는 열여섯 살이 되자 자신에게 고귀한 사랑의 기쁨을 영원히 빼앗아 버린 성가신 지위를 증오하게 되었다. 호노리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불만스럽기만 한 허식으로 가득 찬 생활 속에서 탄식하다가 욕망에 굴복하여 시종장인 에우게니우스의 팔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녀의 죄와 수치(이것은 오만한 남자의 어리석은 표현이다.)는 임신의 징후가 나타남으로써 곧 탄로났다. 황후 플라키디아는 경솔한 언행으로 황족의 불명예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그녀는 딸을 엄격하고 치욕스러운 감금 상태에 두었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추방했다.


하지만 현대의 여러 역사학자는 호노리아가 성욕에 사로잡혀 시종장을 유혹했다가 신세를 망쳤다는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무능한 남동생을 축출하고 권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에우게니우스에게 접근했다고 본다. 어머니 갈라 플라키디아가 국정을 이끄는 걸 동경의 눈으로 지켜보면서,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남동생이 방해가 되니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에우게니우스와의 모종의 관계가 발각되는 바람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진 그녀는 그곳에서 숨막힌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은 아일리아 풀케리아의 주도로 기독교 교리에 입각한 엄격한 생활이 이뤄지고 있었다. 궁궐에 생활하는 여인들은 단순한 옷을 입고 교회 예배, 단식, 집회, 기도 등에 헌신해야 했다. 이렇듯 수녀원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오래도록 생활하던 그녀는 원로원 의원 플라비우스 바수스 헤르쿨라누스와 자신의 결혼이 예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결혼을 회피하고 아틸라에게 구원을 청하기로 작정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불행한 공주는 테오도시우스의 누이들과 그들이 선택한 시중드는 처녀들하고만 교제하면서 12년 내지 14년의 세월을 보냈다. 호노리아는 그 처녀들과 같은 영광을 바랄 처지도 아니면서 기도와 단식, 철야로 채워진 그들의 열성적인 금욕 생활을 억지로 따라 해야 했다. 길고 희망 없는 금욕 생활에 넌더리가 난 그녀는 기이하고 절망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틸라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익숙하면서도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가 파견하는 사절들은 그의 막사와 황제의 궁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플라키디아의 딸은 사랑을 갈구해서가 아니라 복수심에서 모든 의무와 선입관을 버리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언어를 쓸 뿐 아니라 인간 같지도 않은 외모에 혐오스러운 종교와 관습을 지닌 이 야만인의 손에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한 충실한 환관의 도움으로 그녀는 아틸라에게 애정의 증표로 반지를 전해 주고 자신을 비밀 약혼한 적법한 배우자로 요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호노리아의 서신은 450년 봄에 아틸라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호노리아는 반지를 함께 보냈는데, 아틸라는 이를 청혼으로 해석하여 그녀를 자신의 신부라고 주장했다. 그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사신을 보내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며, 이와 동시에 갈리아를 침공할 준비를 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분노했고, 서신을 아틸라에게 전달한 히아신투스는 체포된 뒤 참수형에 처해졌다. 한편 호노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탈리아로 쫓겨났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그녀를 죽이려 했지만 어머니의 만류로 그만뒀다고 한다. 아틸라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로부터 거절 통보를 받자 호노리아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갈리아를 전격 침공했다.

에드워드 기번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호노리아는 이름 모를 남성과 허울뿐인 혼례를 치른 후 죽을 때까지 유폐되었다고 한다.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호노리아 사건의 서술을 "호노리아는 이 시기에 위험에서 벗어났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해, 후대 학자들의 의구심을 자아냈다. 호노리아가 정확히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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