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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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웨스트버지니아 주 클래스 1)
제84~85대
챔프먼 리버콤

제86~111대
로버트 버드


제111대
카트 굿윈[1]



미합중국 상원 임시의장
로버트 칼라일 버드
Robert Carlyle Byrd


본명
코넬리어스 캘빈 세일 주니어
(Cornelius Calvin Sale Jr.)
출생
1917년 11월 20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노스윌크스보로
사망
2010년 6월 28일 (향년 92세)
미국 버지니아 주 폴스 처치
묘소
미국 버지니아 주 알링턴 카운티
컬럼비아 가든스 묘지
재임기간
미국 상원 임시의장
1 1989년 1월 3일 ~ 1995년 1월 3일
2 2001년 1월 3일 ~ 2001년 1월 20일
3 2001년 6월 6일 ~ 2003년 1월 3일
4 2007년 1월 3일 ~ 2010년 6월 28일
서명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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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코넬리어스 캘빈 세일
어머니 에이다 매 커비
배우자
어마 제임스 버드 (1936년 결혼~2006년 사별)
자녀
슬하 2명
학력
마셜 대학교 (B.A.)
아메리칸 대학교 (법학 / J.D.)
종교
개신교 (침례회)
소속 정당

의원 선수
9 (상원)[1]
의원 대수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2] (상원)
약력
쿠 클럭스 클랜 웨스트버지니아 지부 신입회원 모집회장 (?~1946)
웨스트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롤리 카운티 / 1947~1950)
웨스트버지니아 주 상원의원 (제2구 / 1950~1952)
미국 하원의원 (웨스트버지니아 제6구 / 1953~1959)
미국 상원의원 (웨스트버지니아 클래스 1 / 1959~2010)
상원 민주당 의원 총회 의장 (1967~1973)
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1971~1977)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1977~1989)
상원 임시의장 (1989~1995, 2001, 2001~2003, 2007~2010)
상원 명예의장 (2003~2007)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와 초기 정치생활
2.2.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다
2.3. 상원 원내총무, 원내대표
2.4. 민주당의 원로로서
3. 평가
4. 선거 이력
5.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정치인.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상원의원이었으며 1959년부터 2010년까지 51년간 상원의원을 역임해 미국 헌정 역사상 최장수 상원의원이자 최장수 국회의원[1]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총 60년을 넘어가는 공직 생활 기간동안, 쿠 클럭스 클랜 가입, 1964년 연방 민권법 반대,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 주도,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인준 반대운동, 모나 르윈스키 스캔들, 이라크 전쟁 파병안 반대에 버락 오바마 지지까지 미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마다 두각을 드러내는 상원의원 판 포레스트 검프와 같은 의정 활동을 이어나갔다. 또한 의원 초반에는 흑인 민권 운동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지만 후일 이를 후회하고 반성하는 발언을 남기는 등 미국 남부 민주당원의 정치 성향 변동을 그대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에게서 존경받는 원로 의원이었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막강해 처음 당선된 1958년 선거를 제외한 모든 선거에서 60%대 이상의 득표율로 웨스트버지니아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의 사후,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민주당의 당세는 급격히 줄어든다.[2]


2. 생애[편집]



2.1. 유년기와 초기 정치생활[편집]


1917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에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고 아버지는 가정 형편이 너무 나빠서 그를 웨스트버지니아 탄광촌에서 일하는 고모 부부에게 입양보내야했다. 이때 로버트 버드의 이름도 코넬리우스 세일 주니어에서 로버트 버드로 바뀌게 된다. 그는 19살에 고등학교 친구이자 같은 탄광 노동자의 딸인 어마 제임스와 결혼했고 2명의 딸을 낳았다.

로버트 버드는 공부를 잘해 고등학생 대표가 되기도 했지만 너무 가난해서 대학교에 갈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정육점 직원, 주유소 직원, 용접공, 식료품점 직원 등 궂은 일을 전전한다. 그의 삶에 변화를 준 것은 KKK단이었다. 로버트 버드는 당시 세를 불리던 쿠 클럭스 클랜의 이념에 동조해 KKK단에 가입했다. 흑인 권리와 공산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하던 KKK의 사상에 매료된 것이다. 그는 동네 친구 150명을 KKK단에 가입시켜 단숨에 웨스트버지니아 주 쿠클럭스클랜 지부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이 되었으며, 겨우 23~24세였을때 KKK단 지도부에 의해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1946년, KKK단의 "대 마법사"(대표) 새뮤얼 그린(Samuel Green)에게 주의원으로 출마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1946년,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웨스트버지니아 롤리 카운티를 대표하는 주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며, KKK단의 압도적인 지원 속에 손쉽게 당선된다. 그는 1950년까지 이 지역구를 대표했으며 1950년부터 1953년까지는 체급을 높여 주 상원의원으로 재직했다. 이 시기 그는 가난해서 진학할 수 없었던 대학교에도 진학했다. 몇차례 대학을 옮기긴 했지만, 공직 생활과 야간 학교 수업을 병행할 정도로 학구열이 뜨거워서 1963년 결국 아메리칸 대학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 로버트 버드는 처음으로 미국의 연방 하원의원직에 도전했다. 지역구는 마찬가지로 롤리 카운티가 포함된 웨스트버지니아 6구. 6구 하원의원인 E. H. 핸드릭(E. H. Hedrick)이 주지사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그만두자, 그 지역구에 출마했고, KKK단의 조직력 덕분에 상대 공화당 후보를 2만여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는 1954년, 1956년 선거에서도 당선되며 하원의원 3선을 기록했다.

2.2.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다[편집]


1958년, 로버트 버드는 웨스트버지니아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현직 의원은 공화당 소속의 W. 챔프먼 리버콤(W. Chapman Revercomb)이었다. 당시 웨스트버지니아 주는 매튜 M. 닐리 상원의원의 사망으로 같은 날 재보궐 선거도 열려, 2석의 의석이 열렸는데, 이 때문에 로버트 버드는 당 내 경쟁 상대였던 제닝스 랜돌프(Jennings Randolph)와의 경선 없이 각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3] 제닝스 랜돌프와 로버트 버드가 같이 선거운동을 하던 도중 제닝스 랜돌프가 졸음운전을 해 교통사고로 죽을뻔 했지만(...) 본선은 아주 수월했다. 하필 1958년 민권법 투표에서 W. 챔프먼 리버콤이 찬성표를 행사하는 바람에 백인 비중이 높은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여론이 출렁였고 로버트 버드가 이를 이용해 리버콤을 상대로 59% 대 41%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41세였다.

1964년의 로버트 버드
그는 당선된 이후 린든 B. 존슨의 계파에 속했다. 1960년 대선의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는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했다.[4]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로버트 버드는 매섭게 치고 올라온 조지 월리스를 지지하지 않고 린든 B. 존슨을 지지하며 존슨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존슨의 인종 차별 철폐에는 가장 완강히 반대하는 상원의원 중 하나였다. 로버트 버드는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통과 전 14시간이나 필리버스터를 하며 법안 통과를 방해하였다. 버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권법은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었다. 그는 1960년 민권법과 수정헌법 24조 통과에는 찬성했으나, 1957년 민권법, 1968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에 모두 반대 투표를 하며 민권 문제에 있어 당내 보수파로 분류되었다. 또 서굿 마셜의 연방대법관 인준을 거부하며 서굿 마셜이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1968년 대선에서 로버트 버드는 존슨의 재선을 지지했다. 존슨이 재선 불출마를 선언하자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했다. 로버트 버드는 케네디 형제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이번 선거 출마는 실수였다며 당원들에게 험프리 지지를 촉구하였다. 또 그는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폭력 사건에서 멋모르는 대학생들이 일으킨 폭동을 경찰이 잘 진압한거라며 경찰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 68혁명 시위대에게 주적으로 꼽히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표명해, 미군의 베트남 전쟁 철수를 명시한 맥거번-햇필드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는 상원의원으로 지내면서 종종 자신의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지역구의 보수성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자랑하고 다닌 것으로(...) 동료 의원들에게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2.3. 상원 원내총무, 원내대표[편집]


1971년, 그는 테드 케네디의 후임으로 상원원내총무로 선출된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결과였는데 로버트 버드는 당 내 소수파인 남부민주당원, 그중에서도 극우파에 속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에서는 심한 분열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휴버트 험프리와의 정치적 거래의 결과물이 아니냐며 의심했다. 로버트 버드는 린든 B. 존슨의 정치적인 후계자 중 한명이었고 그만큼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자리인 원내총무의 자리에 앉았다는게 중론이다. 그는 원내총무로 지내면서도 여러차례 보수적인 표결을 하여 당내 진보파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특히 조지 맥거번, 헨리 M. 잭슨과는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사이였다.

로버트 버드는 리처드 닉슨과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 1971년 10월 닉슨 대통령이 그를 대법관에 임명하는 것을 고려했을 정도였다. 당연히 조지 맥거번은 펄쩍 펄쩍 뛰면서 어떤 수가 있어도 버드의 대법관 인준을 막겠다고 선언했고 닉슨은 결국 버드 임명을 포기한다.[5] 그러나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버드는 닉슨에게 강경하게 대응하며 민주당 의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73년 버드는 사법위에서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인사들의 청문회를 주도하며 닉슨의 죄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닉슨의 탄핵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닉슨의 사임을 바라지 않았으며 국가적인 분열이 있더라도 닉슨이 탄핵되고 사법처리를 받아야한다고 믿었다. 닉슨이 사퇴한 후, 그는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이 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의회 관련 업부를 처리해 정국을 잘 해결했다고 평가받았다.#

1977년의 로버트 버드와 휴버트 험프리
상원 원내총무로서 두각을 드러낸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이는 대의원 수를 확보하여 전당대회에서 입지를 굳히기 위함이었다. 1977년 1월 새로 개원한 의회에서 로버트 버드는 워터게이트 사건 때의 공로로 상원 원내대표로 추대되었다. 상원 원내대표로서 그는 안정적인 리더십을 펼쳤지만 지미 카터 대통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6]

로널드 레이건 정권 하에서, 로버트 버드는 상원원내대표로서 레이건에 맞서 민주당의 이익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동시에 중도보수적인 표결을 이끌어내 의회와 백악관이 필요 이상으로 갈등하는 일을 막았다. 한편으로 그는 "관례와 절차 사이사이로 절묘하게 탭댄스를 추며 공화당을 농락한다"는 평판을 들을 만큼 의회의 관례와 절차와 규칙을 최대한 활용해 레이건 행정부와 공화당을 견제했다. 1989년, 민주당 내 최고참이었던 존 C. 스테니스 상원의원이 의원직에서 은퇴하자 그는 민주당의 최고 원로가 되었다. 로버트 버드는 1989년 스테니스의 뒤를 이어 상원 임시의장이 되기 위해 원내대표직을 사퇴하고 1989년 1월 3일 상원의 의사진행 담당자인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4. 민주당의 원로로서[편집]


1990년대 로버트 버드는 대니얼 이노우에, 테드 케네디와 함께 민주당의 최고참 원로 의원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테드 케네디, 대니얼 이노우에와 으르렁거리던 사이였지만 말년에는 성격이 유해져서 서로 친해졌다고 한다. 1990년대에 접어들며 로버트 버드는 점차 인종차별주의를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마틴 루터 킹의 날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주변의 의원과 보좌관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기 위해 흑인 민권운동을 옹호할 필요성이 생겼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1995년 인터뷰에서 KKK단에 입단한 것을 실수라고 표현했으며, 절대로 백인우월주의에 경도되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내는 등, 과거의 행동을 끊임 없이 반성하는 좋은 모습을 보여 찬사를 받았다. 일부는 그의 진심을 의심하기도 했으나 로버트 버드는 과거의 잘못을 지속적으로 사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며 2010년 사망할때까지 흑인 민권운동을 옹호하고 자신의 과거 행적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 그런 의심을 접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다른 사안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민주당원으로 남았는데, 동성혼을 금지하는 표결에 참여했고 교토 의정서에 가입에도 반대했다. 그는 새뮤얼 알리토의 대법관 인준에 찬성한 4명의 상원의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즉, 그는 자신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해서는 반성했지만 그럼에도 보수주의 민주당원으로 끝까지 남았다고 볼 수 있다.


로버트 버드의 2003년 이라크 전쟁 반대 연설
그런 그도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상원에서 가장 강력하게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냈다. 대니얼 이노우에, 테드 케네디와 함께 그는 이라크 전쟁 파병 동의안에 반대표를 던졌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기도 했다.

오늘, 저는 조국을 위해 울었습니다. 저는 무겁고 엄중한 마음으로 최근 몇달 동안 정세를 지켜보았습니다. 미국의 모습은 어느세인가 달라져있었습니다. 더이상 미국의 모습은 강력하면서도 자비로운 평화의 수호자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우리와 친하였던 국가들은 이제 우리를 불신하며, 우리의 말은 전세계적 논쟁거리이며, 우리의 모든 의도는 의심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대신 복종시키려 하고, 공격하겠다며 위협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사담 후세인이 아닌 우리 자신, 미국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7]

2003년 3월 19일 로버트 버드 상원의원의 연설 中

또 그는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미국의 변화를 촉구하는 등, 여러모로 젊은 시절의 모습과 달라진 모습을 보여, 좌우를 가리지 않고 찬사를 받았다.[8]

로버트 버드는 2000년대 민주당의 원로로 존경받는 여생을 보냈으며 여전히 웨스트버지니아 지역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계속 재선되었다. 2008년부터 로버트 버드의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반세기동안 의회에서 함께 일했던 테드 케네디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상원의 필리버스터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클로처" 의석을 발동시키기 위해 계속 상원에 출석했지만 2009년 12월부터는 건강이 더욱 악화되 상원에 출석할 수 없었다.

2010년 6월, 그는 병원에서 평화롭게 숨졌다. 장례식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조 바이든 상원의원, 조 맨친 웨스트버지니아 주지사, 해리 리드 민주당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 공화당 원내대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이 참여했고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장례식 곡으로 연주되었다. 미국의 각계 정치 인사들은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3. 평가[편집]


그는 1958년 원내 입성 당시 당 내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의원 중 하나였지만 말년으로 갈 수록 인종주의적인 행보에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태도가 시대의 변화에 맞춘 말바꾸기라는 평가도 있다. 단지 1960년대 이후 민주당의 좌경화에 맞추어, 원내총무와 원내대표의 자리를 따내기 위해 인종주의적인 태도를 누그러트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의회에서 자기 지역구에 예산을 몰아주고 이권사업을 따내는 데 앞장서는 의원으로 악명이 높았다.[9]

그는 세출위원회에 입성한 후 웨스트버지니아의 인프라 시설을 개선하는데 예산을 몰아줘 동료 의원들에게서도 원성을 들었다. 이를 토대로 로버트 버드의 비판자들은 그가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지역구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인종주의적인 태도를 버렸을 뿐 실제로는 죽을 때까지 인종차별주의를 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인터뷰에서 종종 흑인을 "it"으로 지칭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차별적인 태도를 보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스트롬 서먼드 등 다른 의원들과 비교했을 때 로버트 버드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고, 그의 지역구인 웨스트버지니아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굳이 인종주의적인 태도를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버릴 필요가 없었음을 감안한다면 로버트 버드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반성이 진짜였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또한 80세가 넘은 노인이 평생 사용해온 인종주의적인 사고관이나 언어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가 간혹가다 보여준 인종주의적인 면을 참작해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래나 저래나 조지 월리스와 비슷한 면이 많은 인물. 다만, 조지 월리스와 달리 로버트 버드는 정말로 신념형 인종주의자였다가 이를 버렸다는 점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인종주의를 추구한 월리스와는 차이가 있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6
웨스트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선거
롤리 카운티


-
당선 (1위)
초선
1948
웨스트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선거
재선
1950
웨스트버지니아 주 상원의원 선거
웨스트버지니아 2구
초선
1952
연방 하원의원 선거
웨스트버지니아 6구
104,387 (55.48%)
초선
1954
연방 하원의원 선거
73,535 (67.32%)
재선
1956
연방 하원의원 선거
99,854 (57.40%)
3선
1958
연방 상원의원 선거
웨스트버지니아
381,745 (59.19%)
초선
1964
연방 상원의원 선거
515,015 (67.67%)
재선
1970
연방 상원의원 선거
345,965 (77.64%)
3선
1976
연방 상원의원 선거
566,359 (100.00%)
4선[단독]
1982
연방 상원의원 선거
387,170 (68.49%)
5선
1988
연방 상원의원 선거
410,983 (64.77%)
6선
1994
연방 상원의원 선거
290,495 (69.01%)
7선
2000
연방 상원의원 선거
469,215 (77.75%)
8선
2006
연방 상원의원 선거
291,058 (64.41%)
9선[10]

5. 여담[편집]



  • 로버트 버드를 상징하는 또다른 요소는 바이올린이다. 버드 의원의 바이올린 연주 실력은 수준급이라서 유세와 공개 행사에서도 종종 바이올린을 켜곤 했다.


  • 2007년, 투견을 금지하는 법안을 지지할 때 투견을 "야만적"이라고 주장하는 연설을 했는데, 이 때가 그의 나이 90세 였기 때문에 연설이 매우 부자연스러워보여 인터넷 밈이 되기도 했다.

  • 로버트 버드의 지역구였던 웨스트버지니아 클래스 1 의석은 버드가 당선된 1958년 이후 공화당이 단 한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 그의 후임자 조 맨친이 2024년 상원선거에서 패배한다면, 무려 66년만에 공화당 의원이 이 지역구에서 당선되는 셈이 된다. 그런데 11월 조 맨친의 불출마 선언으로 결국 공화당의 재입성이 현실화되었다. 민주당에서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증을 받을 정도로 보수우파 다수 우위인 지역 유권자의 선택을 받거나 득표할 만한 정치인이 사실상 없기 때문. 여담으로 맨친은 당적만 민주당일 뿐, 선거구 관리를 위해 사실상 공화당원처럼 보수우파적 성향을 견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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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 하원의원을 지낸 1947년부터 사망한 2010년까지, 총 63년. 한국사에 대입하자면, 미군정과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들어섰을 때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이 2010년 6.2 지방선거와 천안함 피격 사건 때에도 여전히 국회의원이었다는 뜻이다.[2]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2010년대까지 민주당은 남부에서, 공화당은 동북부에서 어느정도의 기반이 있었다. 그러나 200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참패, 2010년 티파티 운동, 2018년 하원의원 선거의 블루웨이브 등등을 거치면서 현재는 뉴햄프셔, 조지아 같은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주 정계 단위로도 북동부는 민주당 우위, 남부는 공화당 우위의 구도가 이어지게 된다.[3] 2020년 조지아 주 상원의원 선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4] 우습게도 휴버트 험프리는 1948년 이후 상원에서 가장 강력한 민권법의 옹호자였다. 이는 험프리에 대한 지지보다는 존 F. 케네디를 막으려는 시도에 가까웠다.[5] 사실 10년 뒤 샌드라 데이 오코너 같이 주 정치인 경력의 여성 대법관도 나오긴 하는 거지만, 로버트 버드의 변호사 경력은 보잘 것 없었다. 다만 대법관 인준에 한국 같은 자격 요건이 강한 건 아니긴 하다. 닉슨 입장에선 일종의 탕평인사 겸 청문회 통과가 수월한 것을 고려했을 듯.[6] 지미 카터는 미숙한 정치 스타일로 인하여 재임기간 내내 상하원과 갈등했다.[7] 해당 영상의 맨 앞부분에 나온다.[8] 버드는 오바마가 초선 상원의원 임기를 시작한 직후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오자 본인의 의정 활동을 다룬 책을 선물하며, 젊은 날의 자신의 과오를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버드는 대선 경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하게 됐다고 한다.*[9] 지역구 예산확보와 이권사업에만 몰두하는 정치행태를 미국에서는 'pork barrel politics'라고 부른다.[단독] 단독 입후보[10] 2010.06.28.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