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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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196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민주당의 전당대회로, 역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중 손꼽히게 치열하고 논란이 컸던 1968년 대선 후보 경선을 마무리짓고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대통령 후보로 현직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 후보로 메인주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험프리의 당선은 현직 대통령 린든 B. 존슨 및 당 간부들의 지지를 통해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던 젊은 당원들을 찍어누른 결과이기도 해서 논란이 컸으며, 전당대회 전후로 시카고 주변에서 많은 시위와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2. 상세[편집]


당시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 때문에 시끄러웠다. 테트 공세 이후 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수가 늘어났고 반전 시위도 자주 일어났다. 베트남에 적극 개입해 인기가 떨어진 대통령 린든 B. 존슨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고 재선을 포기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현직 대통령이 출마를 포기하자 민주당 대선 경선은 더 치열해졌다. 반전파의 기수로 맨 처음 나선 것은 미네소타주 상원의원 유진 매카시였으나, 젊은 뉴욕주 상원의원 로버트 F. 케네디가 반전파뿐만 아니라 진보적 성향의 젊은이들과 미국 흑인 민권 운동 지지로 결집한 소수인종들의 지지를 얻어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가 캘리포니아주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8년 6월 5일 저격당하고 이튿날 사망하면서 민주당 경선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매카시는 케네디와의 경쟁 과정에서의 대립으로 케네디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사우스다코타주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이 케네디 지지자들의 후원으로 출마를 선언하면서 반전파의 표는 다시 분열되었다. 한편, 현직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는 당의 큰손인 존슨 대통령과 각 주의 민주당 지역당 세력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당시 민주당 경선 자체가 유권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프라이머리의 비중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프라이머리 실시 주에서는 존슨 대통령이 밀어준 각 주의 'Favorite son' 후보들이 매카시나 케네디를 제치고 승리를 거두는 등 경선 시스템적으로 험프리를 제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공화당에서는 리처드 닉슨이 압도적으로 대선 후보로 결정되었으며 민주당도 시카고에서 전당대회를 열기로 했는데, 전당대회가 열리기 전부터 험프리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에 반발한 반전 시위대 수 만명이 전당대회에 몰려왔다는 것.

시위대가 전당대회를 방해하는 걸 막기 위해 시카고 경찰 12000명,연방군과 주방위군 각각 6천명 그리고 정보기관 요원 1천여명이 배치되었다. 마침내 전당대회가 열렸고 시위대는 진입을 시도했으나 전당대회장 주변이 봉쇄되었기 때문에 진입에 실패했다. 시위대는 링컨 공원과 시내에서 농성을 했으나 군경에 의해 진압되었다.

전당대회 내부도 혼란스러웠다. 부통령 겸 대선 후보인 휴버트 험프리는 베트남에 개입한 린든 B. 존슨의 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에 당내 반대파와 갈등을 겪었고 당원들은 서로 소리지르고 야유를 퍼부었다. 결국 휴버트 험프리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고 험프리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북베트남 공습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중단을 요청했으나[1] 대선에서 패배했고 베트남 철수를 주장한 닉슨이 대통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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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린든 존슨은 뒤통수를 친 험프리에 화가 나서 며칠간 험프리를 만나지 않았으나 닉슨의 당선을 막기 위해 결국 북베트남 공습을 중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