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T(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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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ДДТ(데데테)는 소련과 러시아의 락 밴드로, 1980년 여름 현 바시키르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의 수도 우파에서 결성되었다. 밴드의 리더는 락 뮤지션 유리 셰프추크(Юрий Шевчук)[1] 로, 결성 이후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원년 멤버이다. 40년 넘게 존속해 오면서 권위나 부조리에 굴하지 않고 진리와 진실을 외쳐온 밴드로 유명하다.
2. "데데테"라는 이름의 유래[편집]
살충제 DDT(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를 러시아어식으로 표기한 것일 뿐이다. 러시아 현지에서는 Дом детского творчества(아이들의 창의력의 집)[2] 의 약자에서 따왔다는 썰이 돌고 있으나[3] , 리더 셰프추크가 몇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이를 일축했다.
— А что такое ДДТ, Юрий? Не аббревиатура, разумеется, а группа, стиль?
— Ну ДДТ, конечно, название сатирическое. Придумали мы его в 1981 году а Уфе, когда только начинали работать. ДДТ — дуст. Им еще недавно всяких тараканов да клопов травили… Только не нужно очень смелых аналогий проводить…
-인터뷰어: "데데테"가 무엇인가요, 유리? 물론 약자는 아니라 그랬죠. 그룹, 아니면 스타일?
셰프추크: 데데테란, 물론, 풍자적 명칭입니다. 1981년 우파에서, 막 우리가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우린 이 이름을 떠올렸죠. 데데테, 그러니까 가루 살충제 말이죠. 최근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걸로 바퀴벌레니 빈대니 하는 놈들을 잡았죠... '용감한' 추측들을 더 끌고 올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 «ДДТ» — Дом детского творчества?
— Никакого детского творчества здесь быть не может. Это какой-то идиот придумал. Скорее «ДДТ» — яд, химикат, такой жуткий, в котором человечество видело панацею от всех вредителей, а на самом деле он сам принес большой вред. Фантазируйте! Помню список названий, которые мне пришли в голову, — «Монитор», «Блюминг», еще что-то. Ребятам понравилось «ДДТ». Исамбаев сказал — да, «ДДТ» — это круто. Представляете, вы выходите на сцену — объявляют: Д-э-э Д-э-э Т-э-э! И весь зал: Уу-a-a-a! Мы, конечно, посмеялись. Никто этому не верил, а название осталось…
-인터뷰어: 데데테라는 게 "아이들의 창의력의 집"의 약자인가요?
셰프추크: 아이들의 창의력이니 그런 게 끼여들 여지가 여긴 전혀 없습니다. 어떤 바보들이 그런 걸 떠올렸죠. 데데테는 끔찍한 화학 독으로, 인류가 모든 해충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보았지만 사실 더 큰 해악을 가져온 존재입니다. 생각해 봐요! 당시 제가 떠올렸던 (밴드 이름) 몇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니터", "블루밍" 뭐 그런 것들이었죠. 아이들은 "데데테"란 이름을 좋아했습니다. 이삼바예프[4]
가 그랬죠. 그 이름이 멋지다고요. 상상해 봐요. 당신이 무대 위에 서 있는데 사람들이 외치는 거죠. "데-데-테!" 그리고 다들 외쳐요. "우-와!" 물론 우린 크게 웃었죠. 아무도 이를 믿진 않았지만, 이름만은 남았죠...[5]
3. 역사[편집]
3.1. 1980년대 초중반 (우파 시절)[편집]
1980년 여름 데데테가 결성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썰이 있는데, 하나는 1980년 우파 텔레비전 센터에서 음악가 블라디미르 시가초프(Владимир Сигачёв)가 당시 정치적 노래를 부르던 3인 밴드의 리더 유리 셰프추크(Юрий Шевчук)를 만나 자신들의 밴드에 들어오라고 제안하여 영입했다는 썰이고, 다른 하나는 시가초프가 속해 있던 밴드 리더였던 겐나디 로딘(Геннадий Родин)이 1979년 12월 말 셰프추크를 자신들이 활동하고 있던 "아방가르드" 문화 궁전(ДК «Авангард»)[6] 에 초대했다는 썰이다.
결성 당시 멤버는 보컬 유리 셰프추크, 기타리스트 루스템 아산바예프, 베이시스트 겐나디 로딘, 키보디스트 블라디미르 시가초프와 드러머 리나트 샴수트디노프였다. 당시에는 밴드명도 없었고, 스스로 "겐나디 로딘 주도 하의 앙상블(ансамбль под управлением Геннадия Родина)"[7] 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들은 같은 해 가정집에서 최초의 앨범[8] "데데테 1집(ДДТ-1)"을 녹음했다. 총 13개 곡이 들어갔으며, 이 중 1곡 "검은 태양(Черное солнце)"[9] 을 제외하고는 이후 앨범 제작에 다시 사용되었다.
1982년 봄 겐나디 로딘이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Комсомольская правда)지에 실려 있던 "골든 튜닝 페스티벌(Золотой камертон)"에 대한 기사를 가지고 왔다.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이 관영 페스티벌은 "소련의 애국적 노래들을 발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참가하기 위해선 총 3가지 곡을 제출해야 했는데, 하나는 평화에 대한 곡[10] , 하나는 소련 음악가들의 커버곡, 다른 하나는 자유곡(밴드의 재량에 따라)이었다. 우승자에게는 관영 음반사이자 당시 소련의 하나밖에 없던 음반사 멜로디야에서 데뷔 싱글을 찍을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11] . 음악 제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밴드는 허겁지겁 음악을 녹음했고[12] , 밴드 이름도 그 과정에서 정해졌다[13] .
밴드는 2차까지 진출했고, 훗날 데데테의 18번이 될 "쏘지 말라!(Не стреляй!)"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에 셰프추크는 멜로디야 취입 기회를 얻어 모스크바에 갔으나, 최종적으로 싱글 음반은 무산되었다. "소련의 공식 음악가들의 곡에 소련의 공식 작사가/시인들의 가사를 붙인 노래를 공연해야 한다"라는 계약 조건을 셰프추크가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다만 일설에 따르면 이에 동의하고 친구 몇몇에게 소련 작사가의 곡을 녹음해 들려주었다는 증언도 있다.)
1982년 첫 앨범 "무지개 위의 암퇘지(Свинья на радуге)"를 발매했으나, 발매 후 KGB의 감시 대상이 되어 공식 활동을 금지당하고 언더그라운드로 기어 들어갔다. 앨범 수록곡 중 대놓고 반전을 외친 '쏘지 마시오'가 문제가 된 것도 있고, 당시 DDT는 비틀즈 등 서양 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런 종류의 곡은 소련 당국의 검열 대상이었다. 당국에서는 셰프추크에게 소련 음악가들이 작곡한 (그리고 체제의 입장에서 건전한) 노래를 부르라고 명했는데, 셰프추크는 이를 씹었다. 여기다 셰프추크의 목소리가 러시아의 유명 반체제 가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와 흡사해 금지당했다는 소문도 돌았다(실제로 두 사람의 목소리는 꽤 유사한 편이다). 이 때 KGB가 보컬 유리에게 "이 '무지개 위의 암퇘지'가 누구인가? 설마 브레즈네프인가?"라고 물었고, 유리가 "어떻게 알았지?"라고 응수했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이후 정부의 탄압이 이어지는 가운데 잠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활동하다 1986년 리더이자 결성자였던 유리 솁첸코가 가족 전체와 레닌그라드로 이주한 뒤 동명의 밴드를 다시 만들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므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도 끼워주는 편이다. 이 쪽도 징크스[16] 를 피하지 못해 리더를 제외한 밴드 멤버 전체가 물갈이 된 전력이 있으며, 소속 멤버들 중 두 명이 단명했다.
무지개 위의 암퇘지(Свинья на радуге)
조국(Родина)
쏘지 마라!(Не стреляй!)
눈보라(Метель)
나는 소련에서 태어났다(Рождённый в СССР)
FSB 장군이랑 술 한잔 했다네(Я пил у генерала ФСБ)
(대놓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지만) 절묘한 사회 풍자와 반정부적 성격, 그리고 반전 사상으로 유명하다. 이를 대표하는 곡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참전한 친구 빅토르 탸핀(Viktor Tyapin)의 말을 듣고 작곡한 곡 "쏘지 마라!(Не стреляй!)"[17] 와 제목만으로 무슨 곡인지 설명이 되는 "FSB 장군이랑 술 한잔 했다네(Я пил у генерала ФСБ)".
Родина, друзья, это не жопа президента, которую надо все время мусолить, целовать. Родина – это бабушка нищая на вокзале, продающая картошку. Вот это — родина.
조국이란 건 말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언제나 애무하고 키스해 줘야 하는 대통령의 후장이 아닙니다. 조국이란 기차역에서 감자를 팔고 있는 거지 노파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국이란 것입니다.
-유리 셰프추크, 2022년 05월 우파 공연 중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