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형/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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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김원형


1. 개요
2.1. 1991 시즌
2.2. 1992 시즌
2.3. 1993 시즌
2.4. 1994 시즌
2.5. 1995 시즌
2.6. 1996 시즌
2.7. 1997 시즌
2.8. 1998 시즌
2.9. 1999 시즌
3.1. 2000 시즌
3.2. 2001~2003 시즌
3.3. 2004 시즌
3.4. 2005 시즌
3.5. 2006 시즌
3.6. 2007 시즌
3.7. 2008 시즌
3.8. 2009~2010 시즌
3.9. 2011 시즌
4. 은퇴


1. 개요[편집]


김원형의 선수 경력을 요약한 문서.


2.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편집]


파일:/image/295/2010/01/10/7296_4.jpg
1996년에 찍힌 사진, 즉, 24세 때의 사진.


당시 투구폼.

전라북도 전주시 출신의 순혈 프랜차이즈 선수로서 전주고를 졸업하고 연고팀인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되었다.[1] 1991년부터 1군 리그에 데뷔를 해야 하는 쌍방울이 고려대와의 치열한 스카우트 싸움을 벌인 끝에 입단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컸던 선수였다.[2] 신인 시절부터 구단 차원에서 엄청나게 관리할 정도였으며 미래의 에이스로 일찍부터 점찍었던 선수였다. 이 당시 각 팀의 에이스급 투수들은 전부 기본 선발에 가끔 팀이 위기에 빠지면 중간이나 마무리 알바도 겸했지만 김원형은 드물게도 중간-마무리 알바는 다른 팀 투수들에 비교해봐도 경험한 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당장 같은 기간 쌍방울 다른 투수들인 박성기, 김기덕, 박진석, 최한림[3]과 비교해봐도 그렇고. 또한 주목할 점은 이 때 창단 감독이 국민감독이라 불리던 김인식이었다는 것. 김인식 감독 성향을 생각한다면 굉장히 보호받고 관리받은 거다. 이 시절의 일화로 김원형이 꽤 곱상하게 생긴 편이라 당시 김기태는 누구 빽으로 입단한 선순 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다 포수 친구까지 달고 왔으니 편견은 더 컸다. 그러나 김원형의 불펜 피칭을 보게 된 후 편견이 사라졌는지, 그 후에는 김원형이 등판할 때마다 우리 원형이 우리 원형이하면서 경기에 임했다고. 그 선동열을 상대[4]로 거둔 데뷔 첫 완봉승도 김기태의 솔로 홈런으로 승리한 것이었다.


2.1. 1991 시즌[편집]


창단 첫 해 선수층, 특히 선발 투수진이 얇다 못해 없다시피 한 쌍방울 레이더스의 사정상 2군에서 담금질이고 뭐고 없이 데뷔년도인 1991년부터 바로 1군에서 선발로 등판하게 되었다. 그렇게 데뷔 첫해 방어율 4.69에 7승 11패, 4완투(1완봉)이란 성적을 거두며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이 시즌 초반에는 최연소 완투승[5]을 거두기도 했지만 이후 내리 9연패에 빠지며 부진하고 관중석에서도 나올 때마다 아재들에게 욕을 먹자 당시 감독이었던 김인식에게 스스로 2군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항상 거절당하던 중,[6] 오기가 생겼는지 큰일을 저지르고 만다.

1991년 8월 14일 광주 해태전에서 선동열을 상대로 만 19세 1개월 10일에 완봉승(1:0)을 거둔 것. 이와 동시에 당시 최연소 완봉승이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때 상대가 신생팀 듣보잡 + 고졸투수에 한참 연전연패중인지라 다 이긴 게임이라고 생각했던 광주아재들은 멘붕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1년 후인 1992년, 이 기록에 염종석이 이틀이 모자라 경신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걸 태평양 돌핀스의 안병원이 깨뜨렸고, 2년 뒤인 1994년에 주형광이 만 18세 1개월 18일로 이 기록을 경신했다.


2.2. 1992 시즌[편집]


1992년 8승 7패 3.22로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원만한 시즌을 보내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2.3. 1993 시즌[편집]


1993년 4월 30일 전주에서 열린 OB전에서 만 20세 9개월 25일로 최연소 노히트 노런 기록(6탈삼진, 1사사구)을 작성하였다. 이 기록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안 깨지고 있는 불멸의 기록. 또한 전주에서 나온 최초이자 최후의 노히트 노런이기도 하다. 1993년 11승 9패 2.93으로 박성기와 함께 팀 내 최다승을 거두면서 기대대로 쌍방울의 에이스로 떠오른다.


2.4. 1994 시즌[편집]


1994년 어깨 부상으로 인해 5승 11패 5.39으로 부진했다.[7]


2.5. 1995 시즌[편집]


1995년부터 다시 9승 8패 3.95로 팀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2.6. 1996 시즌[편집]


1996년 5승 8패 ERA 4.12로 조금 부진하였지만, 이 때의 쌍방울은 24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ERA 2.37로 그 시즌 공동 3위라는 기록을 남긴 성영재에게 10승 5패라는 10승에 겨우 걸친 성적을 안겨줄 만큼 좋지만은 못했다. 그럼에도 김성근 감독의 지도 아래 3위라는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1996년과 1997년 쌍방울의 기적의 돌풍 속에서 생애 처음으로 가을 야구라는 것을 경험하기도. 그런데 1996년 현대 유니콘스와 맞붙었던 플레이오프에서는 김인호가 김원형의 공을 헤딩해 버린 이 후 다음 타자였던 윤덕규가 김원형의 초구를 받아치며 싹쓸이 3루타를 쳤다.[8]


2.7. 1997 시즌[편집]


1997년에는 선발투수진이 완전 붕괴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경기당 평균 5이닝 이상을 기록하며 9승 9패 2.75로 시즌을 마친다.[9]


2.8. 1998 시즌[편집]


그리고 1998년, 51경기(11선발)에 등판해 150이닝을 먹으며 선발 구원 안 가리고 마구 등판하며[10] 12승 7패 13세이브로 그해 ERA 5위를 차지하며 쌍방울 시절의 커리어 하이를 찍는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합류하며 금메달을 따고 본인도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다.[11] 다만 아시안 게임에서의 활약은 썩 좋지 못했다. 4강전 중국과의 경기에 나왔지만 인상적인 투구는 보이지 못했다.


2.9. 1999 시즌[편집]


IMF로 인해 모기업이 어려워진 쌍방울의 주축 선수들이 줄줄이 팔려나가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쌍방울에서 뛰었으나, 1999년 7월 10일 대전 한화전에서 장종훈의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아 코뼈와 광대뼈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12] 심지어 장종훈 특유의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는 친 타구가 점프한 유격수 글러브 윗부분을 살짝 스쳐 지나갔는데 그 타구가 그대로 펜스에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직격으로 꽂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홈런 타구도 그의 전매특허. 그러니 은퇴 직전도 아니고 27홈런을 쳤을 시절의 장종훈의 타구에 맞은 김원형은... 이 때 장종훈은 1루를 밟고선 김원형에게 갈 수도 있었음에도 1루를 밟지 않고 그대로 마운드로 달려가 김원형의 상태부터 살폈고, 결국 아웃되었다.[13] 경기 중 동업자 정신이 덕보인 초유의 훈훈한 사례였다.[14] 이후 김원형은 장종훈이 타석에 설 때마다 모자를 벗어 인사하며 예우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상으로 인해 32이닝(전년도의 ⅕) 평균자책점 4.86, 3승 2패 3세이브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15][16]

사실 쌍방울이 팀 내 연봉 상위권인 김원형을 끝까지 지켰다기보다 잇따른 부상으로 인해 트레이드할 시기를 못 잡고 놓쳤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쌍방울은 1999년에 현대 피닉스 소속 강필선[17]의 지명권과 2차 1순위 지명권[18]을 현대에 팔았을 정도의 재정난을 겪고 있었으니까... 저 부상직전에도 쌍방울이 김원형 트레이드를 알아보고 있었다는 말이 있었지만 부상으로 없던 일이 되고 말았고, 결국 쌍방울이 1999년을 마지막으로 해체 수순을 밟으면서 선수단을 인계한 SK 와이번스에 입단,[19] 그렇게 그는 고향인 전주에서 더 이상 등판할 수 없게 되었다.

여담으로 저 때 선동열과 맞짱떠서 승리를 거둔 이후 쌍방울해태에게 광주에서 13연패를 당한다.[20] 그러나 그 연패를 끊은 것도 바로 김원형이었다!


3.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파일:00wonhyung.jpg
파일:external/www.sksports.net/2005082411341459526_163.jpg
파일:/image/109/2006/03/31/200603311454151100_1.jpg
2000년 창단 유니폼을 입고
전매특허인 커브를 던지는 모습. 왼쪽은 2005년, 오른쪽은 2006년 사진.[21]



2003년 한국시리즈 7차전 당시 투구폼. 쌍방울 시절과 달리 킥킹이 달라졌다.

고향팀 쌍방울 레이더스가 결국 해체되고 SK 와이번스가 창단되면서 프로 생활 이후 처음으로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을 홈으로 쓰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3.1. 2000 시즌[편집]


푸른색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면서 새출발을 다짐했지만 사실 2000년의 SK는 리즈시절의 쌍방울과 비교한다면 심각한 약체였다. 이미 쌍방울 시절 주축 선수들 대거 팔아먹은 탓에 팀 사정이 워낙 안 좋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원형은 쌍방울의 투수진 중 그나마 기량이 검증된 이른바 '써먹을 수 있는 선수'였던 탓에 선발과 중간을 가리지 않으며 나오면서, 2000년 ERA 5.81, 2승 13패 5세이브로 커리어 로우를 찍고, 한화 이글스의 한용덕과 함께 리그 다패왕을 먹고 만다.[22][23] 심지어 같이 다패왕 먹은 한용덕의 자책점은 4점대인 4.68. 이 때의 처참한 성적이 결국 그의 통산 성적에 작용하고 마는데, 그의 통산 승률은 5할 미만이다. [24] 134승 144패. 야구에 만약이 없다고 하지만, 2승 13패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5할은 넘겼을 것이다. 물론 김원형의 이런 부진에는 1999년 얼굴에 공을 맞은 후유증이 결정적이었다.


3.2. 2001~2003 시즌[편집]


2001년 6월 23일은 잠실에서 두산 베어스와 원정경기에서 스코어 6:6으로 맞선 9회말 2사 만루(2아웃의 주자 만루)에서 대타로 프로 데뷔 첫 타석에서 송원국에게 만루 홈런을 허용하여 맞기도 했다. 그리고 02년까지 고령화로 인한 구속저하와 어깨부상으로 성적이 하락하였으나, 정교한 제구력으로 맞춰잡는 기교파로 투구스타일을 변경하며 다시 성적이 나아졌다. 2003년에는 생애 처음으로 친구[25] 한국시리즈 마운드를 밟을 수 있었다.[26]


3.3. 2004 시즌[편집]


2004년 역시 135이닝 8승 6패 ERA 4.20으로 팀의 감초 같은 역을 하였지만 성적은 별반 다름 없었고 팀은 아쉽게 가을 야구에 실패를 한다.


3.4. 2005 시즌[편집]


2005년에는 171.2이닝을 던지며 오랜만에 10승 투수가 되었으며, 최종 14승 8패를 거두며 평균자책점 6위를 차지했고, 팀의 에이스가 되며 팀의 3위에 공헌한다. 허나, 가을야구에서는 한화 이글스에게 준플레이오프에서 완벽하게 압도당하며 패퇴한다.[27]


3.5. 2006 시즌[편집]


하지만 2006년 다시 부진했고, 전년도 보다도 못한 성적을 받으며 시즌을 마감, 팀도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28]


3.6. 2007 시즌[편집]


파일:김원형 2007.jpg
2007년 시즌을 앞두고 쌍방울 시절 감독이자 은사였던 김성근 감독이 부임을 한다. 투수로서 주장을 맡았으나, 부진으로 인해 선발에서 밀려 중간계투로 주로 나와 5승 4패 4홀드 73⅔이닝을 기록하며 생애 첫 우승을 맛보았다. 다만, 마운드에는 오르지 못했는데, 시리즈 자체가 워낙 접전[29]이었기 때문이었다. 여담으로 김성근 감독은 6차전 9회에 점수차가 5점차 이상이었다면 김원형에게 마지막 카운트를 잡는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6차전은 접전 양상으로 흘러 5:1로 마무리를 등판시켰으니...

우승 직후 쌍방울 출신 중 SK에서도 뛰었지만 결국 우승 경험을 하지 못한 김기태조원우가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30][31]

3.7. 2008 시즌[편집]


2008 시즌에는 42경기 출장[32] 74.1이닝을 먹고, 주로 중간계투로 나와 12승(다승 공동 4위) 6패 2세이브 2홀드로 롱릴리프로서 핵심 불펜역할을 해주었으며, 규정이닝 미달 선수중 최다승[33]을 기록하였다. 특히 끝장 승부가 벌어지던 2008년의 특성상 김원형이 연장에 나와 길게 막으면 SK가 점수를 내서 이기는 패턴으로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다.[34]

3.8. 2009~2010 시즌[편집]


2000년대 후반 회춘하면서 우승도 경험하고 했지만, 아쉽게도 2009년 시즌 후에 왼쪽 팔꿈치 수술을 받고 전력에서 이탈했다가 2010년 8월이 돼서야 복귀했다. 결국 10시즌은 3경기밖에 나오지 못했다. 은퇴하지 않고 2011년에도 뛰었다. 연봉은 2억 5천에서 1억 5천이 깎인 1억원. 절친인 박경완이 40임에도 불구하고 2년간 총 14억에 FA대박을 터트린 것과[35] 비교하면... 그래도 김성근 감독이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세월의 흐름은 이기지 못했다.


3.9. 2011 시즌[편집]


2011년에는 내내 플레잉코치 역할을 하고 1군과 동행하다가 결국 2011년 9월 은퇴를 선언하면서 한 시대를 성실하게 던진 선수는 이렇게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4. 은퇴[편집]



파일:/image/076/2011/10/08/2011100801000618700052991.jpg

2011년 준PO 1차전 시구자로 나섰고, 2012년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가지고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은퇴 전 시즌 성적이 나름 괜찮아 기대를 모았음에도 은퇴하여 의아해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은퇴식 전 기사에서 직구는 아직도 던질 수 있으나, 이번 부상 이후 전매특허였던 커브 자체를 아예 던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은퇴 이유라고 밝혔다.

은퇴 후 통산 다승 5위에 해당되는 성적과, 항상 같은 등번호로(16번) 쌍방울-SK시절 동안 한번도 팀을 떠난 적이 없는 순혈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상징성 등을 감안하여 SK 와이번스 최초의 KBO 영구결번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영구결번되지는 않았던 데에는 SK 시절의 활약상이 전성기였던 쌍방울 시절만큼 뛰어나지 않았던 것과 쌍방울의 프랜차이즈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SK의 의도가 맞물린 결과일지도 모른다.[36]


파일:20170326133643_11.jpg

SK의 창단 멤버 및 프랜차이즈 스타답게 은퇴 후 현역 시절 입었던 유니폼과 글러브가 인천 SSG 랜더스필드 안에 위치한 L's 갤러리[37] 레전드 플레이어 존에 진열되어 2022년 박물관이 폐관될 때까지 전시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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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기태(1969), 조규제, 박경완과는 1991년 입단 동기인데 이들은 모두 쌍방울을 상징하는 선수로 활약했다. 다만 김원형을 뺀 3명은 1997년 외환 위기 전후로 팀의 살림살이가 가난해지자 부자 구단으로 팔려가게 됐고 김원형만 홀로 쌍방울에 남게 됐다. 다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는데 이는 아래에 후술한다.[2] 초-중-고교 단짝 친구였던 박경완도 고려대 입단 제시를 받았었다.[3] 그 외에 조규제는 선발로 거의 안 뛰었지만 중무리로 엄청나게 굴렀다.[4] 80년대 말 ~ 90년대 초 당시 국내에서 선동열은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던 선수였다.[5] 데뷔 첫 승이기도 하다.[6] 단 등판간격을 조정해주기는 했다.[7] 5월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6월 한 달 동안 평균자책이 무려 20점대를 넘을 정도로 최악의 부진에 빠진다.[8] 현대가 5차전까지 분위기를 이끌며 승리하자, 사상 첫 리버스 스윕이 만들어졌다.[9] 쌍방울 투수 중 선발 10승 투수가 아무도 없었다.[10] 그해 그보다 많이 출장한 선수 중 그보다 이닝을 더 많이 먹은 선수는 61경기 158.1이닝의 OB의 진필중밖에 없었다![11] 당시 대표팀 선수단 중 동갑내기인 심재학과 함께 최연장자였다. 1998년 12월 기준 만 26세로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선수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건 이 당시 병역특례를 위해 전원 미필자만 선발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대표팀의 연령대가 매우 젊었다.[묘사] 얼굴이 피로 뒤덮인 채 들것에 실려나가는 모습이다.[12] 사고 당시의 사진(열람 주의)[묘사] 아직도 당시 야구팬들은 야구공에 맞은 김원형을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한다.[13] 야수가 공에 맞은 상황은 당연히 인플레이이며, 1루가 아닌 마운드로 향할 경우 당연히 3피트 라인 룰에 의해 자동아웃된다.[14] 훗날 박명환야구TV에서 오상민이 술회한 바에 따르면 장종훈은 그 날 게임에서 자진해서 교체됐다고 한다.[15] 흔히 장종훈의 이 타석으로 인해 장종훈의 타격 1위의 성적이 3위로 떨어졌다고 하는데, 한화 이글스 홈페이지에서도 그렇게 서술되어 있으나 이는 와전된 것으로 성적과는 별 관계가 없는 평범한 타석이었다. 참고로 장종훈의 1999년 최종 타율은 0.284였으며, 그해의 타격왕은 그보다 타율이 1할 가까이 높았던(0.372) 롯데의 마해영이었다. 그러니깐, 애초에 타격왕과는 별 관련이 없던 것이 와전이 된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16] 그러나 충격으로 다소 성적은 떨어진건 사실이다. 타격왕과는 거리가 먼건 사실이지만 본인 커리어에 문제가 있었던건 분명한듯 보인다.[17] 군산상고와 연세대를 졸업했고, 현대 유니콘스롯데 자이언츠를 떠돌다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2023년 현재 제물포고 감독으로 재직중이다.[18] 현대는 당시 쌍방울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은 대전고 투수 마일영의 지명권을 받아 입단시킨다.[19] 쌍방울과 SK는 서로 남남이며, 역사는 승계되지 않는다.[20] 1991년 8월 15일 ~ 1993년 4월 17일.[21] 유니폼이 다른 이유는 2005년도까지 모기업이 푸른색 CI 로고를 쓰면서 푸른색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었고, 2006년도 부터는 붉은색으로 CI가 변경되면서 붉은색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었다.[22] 00년 SK의 팀 전력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투수진이 완전히 망가져, 에이스는 그해 1차 지명한 신인상을 타이틀을 딴 이승호로, 워낙 팀에 구멍이 많았던지라 이승호가 돌려막기 요원으로 선발 구원 안 가리고 무차별 등판해 139이닝 4.51 10승 12패 9세이브를 거뒀다. 팀내 ERA 1위는 44이닝 던진 불펜투수 박상근. 그마저 평균자책점은 4.30이었다. 2위는 불펜투수 박주언이나, 고작 20이닝 던진지라 제외. 결국 2000년 SK 선발요원 중 평균자책 1위는 이승호였다. 그해가 타고투저 시즌이란 점도 있다만 답없는 투수진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SK 창단 초반 3년 간의 혹사는 이승호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와, 그를 기나긴 재활의 길로 불러들인다. 그렇다고 타격이 좋았나 하면 그건 또 아니올시다여서, 3할3푼을 치며 타격 3위를 차지하며 성공한 유격수 용병 틸슨 브리또를 제외하곤 타격 30위 안에 드는 선수는 0.262로 딱 30위를 차지한 2루수, '철인' 최태원 이외엔 없었다. 투타 모두 개판이었던 상황. 그리고 승률 3할 3푼 8리으로 꼴찌를 차지한다.[23] 여담으로 이해 구원승으로 기록한 2승을 모두 해태 상대로 기록했다.[24] 1999년 5월 2일 수원 현대전부터 2000년 8월 22일 광주 해태전에서 구원승을 거두기 전까지 14연패를 당했다.[25] 그는 이미 1998년 한국시리즈2000년 한국시리즈를 경험하고 우승반지도 2개를 먹은 선수였다.[26] 역설적으로 이는 SK와 김원형의 등판은 악용이 작용하였고 4차전에 현대 주장 이숭용에게 동점타와 역전타를 연거푸 맞으며 패전을 당하고 7차전 선발 당시 클리프 브룸바심정수에게 일격을 맞으며 패전을 당해 우승에는 실패한다.[27] 특히 2선발 신승현의 부진이 컸다. 3승 무패 방어율 0.64로 날아다녔기에 믿었지만 끝내 주저앉았다.[28] 2006년의 SK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시즌이었는데, 시즌 초부터 맹활약하던 용병 타자 시오타니 가즈히코KIA 타이거즈 투수 장문석에게 사구를 맞아 손가락이 부러지는 바람에 웨이버 공시되었고, 또다른 외국인 타자였던 캘빈 피커링 역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과 향수병 때문에 퇴출되었다. 큰 기대를 갖고 영입한 외국인 타자 2명이 모두 부상이나 부진으로 퇴출되자 타선 역시 박재홍김재현을 제외하면 힘을 잃어버렸고, 투수진 역시 시즌 초부터 외국인 선수를 죄다 타자로 영입한 덕분에 보강이 되지 않은데다가 이승호엄정욱이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고, 중간계투였던 윤길현을 급하게 선발로 돌리고 조웅천까지 선발 등판시켜야 할 정도로 선발진에 구멍이 제대로 뚫린 상황이었다. 당연히 타선의 부진과 투수진 약화는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로 직결되었고, 시즌 후 조범현 감독은 사퇴하였다. 그나마 이 해 소소하게 건진 것이 있다면 최정, 정근우, 박재상, 김강민 등 향후 왕조의 주축들이 슬슬 기회를 받으며 경험치를 쌓아 주전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시즌이기도 하다.[29] 역대 한국시리즈 중 벤치 클리어링이 이렇게 심한 것은 2009년 한국시리즈와 함께 아직도 손꼽히는 명장면이었다.[30] 김기태의 경우 선수시절에는 우승복과는 거리가 영 멀었는데, 쌍방울이 그나마 한끗발 날리던 96~97년에도 한국시리즈는 밟아보지 못했고, 현금트레이드로 간 삼성에서도 이상하게 플레이오프만 가면 팀 자체가 꼬이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었다. 이후 SK에서 2003년에서야 한국시리즈 무대를 처음 밟았으나 7차전까지 가능 명승부 끝에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고 2005년을 끝으로 SK에서 은퇴하면서 선수생활 동안은 우승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조원우의 경우에도 김기태와 같이 SK에서 뛸 때 2003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2006년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으나 준우승에 그쳤을 정도로 둘 다 우승복이 없었다.[31] 다만 김기태의 경우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타격코치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단기전이기는 하나 우승을 경험해봤고, 기아 감독을 맡고 있던 2017년, 드디어 생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감독으로써 경험하게 되었다. 아쉽게 조원우는 감독이 되어서도 우승은 못하고 사퇴하였다. 개인 커리어로는 2017년 준플레이오프가 가장 큰 업적이다. 하지만 2022년 SSG 랜더스의 수석코치로써 기어코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32] 4번 선발[33] 당시 2위는 두산의 이재우. 11승이었다.[34] 마무리 정대현이 08시즌 유독 기복있는 투구를 여러차례 보였는데, 특히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었던 7월 월간 방어율이 6.48로 치솟을 정도로 이상징후가 감지되어 메달권을 목표로 하던 국가대표팀 전력에도 큰 차질이 있을 뻔했다. 다행히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우리가 다 아는 결정적인 그 순간을 만들어내며 팬들이 아는 그 정대현으로 돌아왔고, 최종 정규시즌 20세이브는 올려준데다 한국시리즈에서도 2세이브로 뒷문을 잘 잠그며 우승에 큰 공헌을 했었다.[35] 하지만, 이 계약은 사실상 문제점이 있던 계약이다. 박경완 문서를 참고[36]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친구인 박경완이 SK 선수 최초로 영구결번이 되었다.[37] 전신팀인 SK 와이번스부터 이어저 오는 구단 역사관으로 인천야구의 변천사와 SK 와이번스 히스토리, 레전드 플레이어존 및 우승 트로피등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