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FC/역사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광주 FC




1. 창단
2. 승강제 시행 이전 (2011~2012)
3. K리그 챌린지 강등 (2013~2014)
4. K리그 클래식 승격 (2015~2017)
5. K리그2 재강등 및 K리그2 첫 우승 (2018~2019)
6. K리그1 재승격 (2020~2021)
7. K리그2 세 번째 강등 및 K리그2 두 번째 우승, 혜성처럼 나타난 명장 (2022)
8. 1년 만의 K리그1 복귀, 이정효 감독과 빛고을 전사들의 돌풍 (2023~ )



1. 창단[편집]


한국프로축구연맹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후 월드컵경기장의 활용 및 K리그의 양적 확대 차원에서 대도시에 축구팀 창단을 추진한다. 당시 광역시 중에 팀이 없던 곳이 대구, 인천, 광주였다. 대구는 2003년 시민구단 창단, 인천은 할렐루야 유치와 시민구단 창단을 고민하다가 손쉬운 시민구단 창단으로 가닥을 잡았고, 광주도 가만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호남 지역에는 프로 기업구단을 희망하는 대규모의 연고 기업도 없다.[1] 전라남도에는 이미 전남 드래곤즈가 있어도 LG(現 LG, GS 등), 대림(現 DL), 한화 등의 대기업이 많기에 고려해 볼 수 있었지만 LG는 FC 서울(당시 안양 LG 치타스, 현재는 GS가 운영)을 운영하고 있고 타 기업들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시민구단을 만들기에는 예산도 부족했다.[2]

그래서 결국 차선책으로 군 소속 팀인 상무를 K리그에 참가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연고지는 광주로 정해 광주에 축구 붐을 일으킨 후, 5년 후에 시민구단이나 기업구단 창단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광주 상무 불사조로 K리그에 참여한다. 당시 광주 축구팬들은 상무는 군인팀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3], 광주에서 차후 프로축구단을 출범할 것을 약속하면서 결국 수용한다. 그리고 광주광역시는 미리 가입금과 축구발전기금 40억을 한국프로축구연맹에 지급한다. 그렇게 2003년부터 광주에는 상무가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약속 기간인 2008년이 다 되도록 돈을 내놓고서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광주 연고 최대 기업인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접촉도 해 봤지만,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스포츠에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실패.[4][5] 한 때 내셔널리그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를 광주로 이동시킨 다음 이 팀을 시에서 시민구단으로 전환하고, 현대미포조선과 같은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로 조선소가 영암군의 대불공단에 있는 현대삼호중공업에서 메인 스폰서로 지원하는 방법도 검토되었지만, 당시 시장인 박광태가 현대삼호중공업이 직접 경영하는 기업구단을 주장하면서 무산되었다. 현대미포조선의 직접 경영은 불가능한 말인데, 이미 계열사인 현대중공업이 울산 현대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6] 만약 현대미포조선을 옮겨서 축구단이 생겼다면, 진짜 문제는 축구판에서 안 그래도 높은 현대가에 대한 의존도가 더 올라간다는데 있다. 당시 15개 팀 중 3개 구단(울산, 전북, 부산)이 현대가 구단인데, 16개 구단 중 4개 구단, 즉 25%에 이르는 팀이 현대가 팀이 되는 기형적 구조가 되게 된다.

결국 다 실패하면서 약속 기간이 끝날 때쯤인 2008년 말, 광주는 약속기간을 2년 늘려 달라며 시간을 끌었고, 광주 상무를 응원하던 서포터측은 분개하여 응원 포기라는 초강수를 둔다.


파일:attachment/20081019052805470_faith1996.jpg


당장 갈 곳이 없던 상무 팀 때문에 일단 연맹에서 2년 연기를 받아주기는 했지만, 대신 2년 안에 창단을 안 하면, 미리 납입한 40억도 돌려주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후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다 2010년 4월 5일, 광주광역시는 전격적으로 시민구단 형태로 프로구단을 출범시킬 것을 결정한다. 롤모델은 강원 FC. 다만 이 선언 당시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는 이로부터 두 달 뒤 열릴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박광태 시장이 선언한 것이라 선거 후에도 지켜질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달 뒤인 5월 3일, 광주 시민 구단 준비위원회를 발족했으며 13일 첫 회의에 들어간다. 5월 19일 이사회를 개최하고, 6월 3일부터 시민주 청약을 시작했다. 목표액은 10억 원. 이로써 의구심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7월 15일, 시민주 목표액의 절반인 5억원 정도를 달성했으며, 준비위에서는 12월 안으로 창단을 끝내는 걸 목표로 했다. 광주 출신 선수 기성용이 창단비 1천만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7]

2010년 10월 18일, 초대 감독으로 최만희 감독이 선임되었고, 2010년 10월 26일 광주 레이어스로 팀 공식 명칭이 정해졌는데, 의도치 않게 분란이 되기 시작했다. 레이어스의 본래 의미는 빛, 섬광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인 'Ray'가 빛고을 광주와 관련도 있고, 우승을 향해 빛처럼 뻗어나간다는 뜻을 따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Ray'는 가오리도 포함된 다의어라[8] 홍어과에 속하는 가오리를 팀의 의미로 해석하면 반호남 지역드립의 상징인 홍어가 팀 이름에 들어가는 꼴이 되기에 디시인사이드극우 성향 갤러리 등에서 이를 조롱했다. 이 홍어드립 때문에 원 공모자는 포기 신청을 했고,[9] 신청 자체는 반려되었지만 이번에는 'Rayer'가 사전에도 없는 콩글리시라는 비판이 일었다. 결과적으로 팀명에서 레이어스를 제거했다. 이와 비슷한 전례가 하나 있는데, 대구 FC 창단 당시 팀 명칭을 '대구 이글스'로 하려다가 반발에 부딪혀 그냥 '대구 FC'로 정한 사례가 있다.

팀명이야 어찌되었든 2010년 12월 14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광주 FC의 창단식이 열려 광주 시민구단이 공식적으로 탄생했고, 상무는 경상북도 상주시로 떠났다.


2. 승강제 시행 이전 (2011~2012)[편집]



박호진을 비롯한 베테랑 선수를 영입하고, 드래프트를 통해 신인 선수들을 영입해 선수단을 구성했다. 비록 팀의 메인 스폰서를 얻지 못해 재정적인 문제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2011년 3월 5일 창단 첫 경기이자, 첫 홈경기에서 대구 FC 상대로 3:2 승리를 기록했다. 전반적으로 2011년은 창단팀의 패기와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시즌. 초창기에는 8경기 연속 무승으로 신생팀의 한계를 보여줬고, 이 위기를 극복한 FC 서울전의 승리는 황보관 FC 서울 감독의 자진 사임을 불러왔다.

여타 신생팀과는 다르게 제법 승수도 챙겼다. 그리고 막판 6강 PO 경쟁에서 고추가루 부대의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초반에는 박기동이 공격을 주도했고, 시즌이 진행될 수록 김동섭, 이승기, 주앙 파울로가 공격을 주도했다. 적어도 공격진은 시민구단 중에서도 수준급을 자랑했다. 키퍼는 박호진이 그럭저럭 자기 역할은 다 했다. 이 중 박기동과 이승기는 국가대표로도 발탁되었고, 김동섭은 올림픽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흑역사도 있었는데, 관중 뻥튀기를 한 것이 드러나면서, 광주 FC 팬들에게까지도 욕 먹었다. 광주 FC 홈페이지 게시판에 가면, 실명을 공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회원까지 나왔다. 언론에 기사화된 것은 당연지사. 여기에 채용비리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창단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실망감을 주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비록 단장은 결국 무혐의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골키퍼 성경모승부조작 가담으로 인해 영구 제명되었다. 다른 선수들의 연루 의혹도 나왔지만, 다행이 묻혔고, 성경모 자신은 승부조작을 하기로 했지만, 실제로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흑역사는 흑역사. 다행히 다른 선수들에게까지 마수가 퍼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리그 최종성적은 9승 8무 13패로 리그 11위로 마무리했다. 중하위권이긴 하지만 열악한 재정 및 여러가지 악재 속에서 꽤 선전한 셈, 참고로 리그 10위인 성남 일화도 똑같이 9승 8무 13패였는데 골득실로 밀렸다. 보다 자세한 리그 결과는 위의 링크인 광주 FC/2011년을 참조 바람.

2012 시즌에는 부족한 재정 때문에 수비진의 공백을 전혀 메우지 못했다. 공격진은 나쁘지 않았지만, 수비진의 공백은 시즌 내내 발목을 잡았고, 결국 스플릿 B로 떨어진 후, 스플릿 B에서 부진을 거듭하면서 15위를 기록, 2부리그로 강등당했다.

광주는 일정도 아쉬웠다. 상무가 강제 강등에 대한 보이콧으로 스플릿 B의 전경기를 보이콧함에 따라 상무와의 경기 일정이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다. 홈, 원정을 나눠서 각기 7번씩 총 14번을 치르는 일정 속에서, 광주의 첫번째 상주전은 스플릿 시작 후 5번째 경기였다. 다른 팀이 중간중간 체력을 비축했던 것에 비해 체력적으로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6번째나 7번째로 걸리는 팀보다는 나아보이는 이 일정이 최악인 이유는 그 다음 주가 a매치 관계로 그러지 않아도 휴식기였기 때문이다. 경기감각과 긴장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다른 팀들도 체력을 보존하고 정신무장을 하기 때문에 휴식에 대한 이점도 전혀 없었다. 차라리 A매치 다음 주가 상주전인 것보다도 못한, 최악의 일정이었다. 결국 그 탓에 광주는 하위 스플릿의 호구 성남에게도 패배했고, 불운하게도 성남전 다음 주는 최강자 인천을 맞아 연패를 당하게 되었다.

더더군다나 광주의 2번째 상주전은 8번째 하위 스플릿 경기였고, 이 말은 광주가 나머지 6번째 경기를 연속으로 치룬다는 얘기였다. 성남과 인천에게 연패를 당한 다음에 휴식기를 가지는 건 연패를 당한 것이 문제이지만, 그러나 다른 팀이 휴식에 맞춰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것에 반해 광주만이 최후의 6경기를 연속으로 치러야 한다는 건 너무나 불공평하고 가혹한 운명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2012 시즌 16개 팀 스플릿의 과밀일정 탓에 마지막 5경기는 주중 2경기로 치러졌다. 광주는 최선을 다했지만, 과밀 일정에 따르기 마련인 체력고갈과 부상과 경고 트러블에는 방법이 없었다. 일정 자체가 강등이라는 낭떠러지로 광주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상주의 보이콧이 불의의 사태이긴 하지만,[10] 2012시즌 강등은 최후의 한 끝 차이로 결정이 났는데, 정말이지 일정이 너무나도 불리했다.

결국 초대 감독인 최만희 감독도 강등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하면서 2부 리그에서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2013년 시작하면서 방만경영에 대한 기사가 떴다. 광고수입, 입장료를 다 포함하면 광주의 1년 예산에 버금가는 규모가 나오는데 대출을 받을 정도로 방만경영을 하고 있었다고.

강등 후 파이어세일이 벌어져 이승기, 김동섭, 박기동, 박호진, 이용 등 기존 주전 선수들이 대거 떠나버려 2부리그에서도 고난이 예상된다.


3. K리그 챌린지 강등 (2013~2014)[편집]



K리그 역사상 첫 2부리그 강등 팀이 되는 굴욕을 맛본 광주 FC는 K리그 챌린지 2013 우승 팀에게만 주어지는 승격 플레이오프 티켓을 목표로 시즌에 임하였으나 두 팀이 너무 강한데다가 시즌 내내 기복이 심하여 1위는커녕 2위조차 한 번 오르지 못하고 결국에는 승격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2014 시즌 개막 이후 4월까지는 기복이 있는 경기력을 내내 보여주면서 중위권을 유지했다. 상위권으로 올라갈 쯤하면 패배가 계속되면서 연승을 하지 못해, 좀처럼 치고 나가지 못했다. 1위 대전과 2위 안산이 상대적으로 치고 나가 혼전 양상이 된 챌린지 중위권에서 꾸준히 버티는데 성공하며, 결국 막판 유니버시아드 준비 관계로 홈 경기를 치루지 못한다는 약점도 이겨내면서, 꾸준히 성적을 내면서 4위에서 극적으로 미끄러진 FC 안양을 제치고 4위를 확정지으며 승강 PO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승강 PO에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정규시즌은 버린 양, 정규시즌에 오락가락한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인 양 승강 PO에서 최고의 경기력을 뿜어냈다. 강원과의 준PO 원정 경기에서 1:0으로 이기더니, 부상자가 많았다는 행운도 따랐지만 경찰 축구단도 3:0으로 완파하고 승강 PO에 진출했다. 그리고 승강 PO 1차전 홈 경기에서 경남을 3:1로 잡으면서 이제 원정에서 두 골차 이상으로 지지만 않으면 승격에 성공하게 된다. 드디어 대망의 승강 PO 2차전에는 경남에게 선취골을 먹혔지만, 곧바로 김호남이 극적으로 동점골을 넣으면서 1:1로 경기가 종료되었고, 광주는 2012년 강등된 이후, 3년만에 다시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했다. 그렇게 3년만의 K리그 클래식 복귀로 선수들과 팬들은 기쁨의 비명을 질렀고 행복한 다음 시즌이 기다리고 있었다.


4. K리그 클래식 승격 (2015~2017)[편집]



2015시즌 전에는 강등 후보로 뽑혔으나 이러한 전망을 한 큐에 날리고 시즌 초중반까지는 승승장구. 강등권도 아닌 상위권 팀들을 위협하며 상위스플릿 언저리인 5~6위권을 오가며 2015시즌 K리그 클래식 최대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결국 후반기부터 힘이 떨어졌지만, 광주광역시의 열악한 선수 수급과 지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K리그 클래식 잔류를 확정지었다. 챌린지에서 승격한 팀 최초의 잔류 확정이라는 기록은 덤.

2016년에도 개막하기 전부터 무려 정조국을 영입하는 강수를 두며 스쿼드를 보강했고 이후로도 상위권 팀들을 꾸준히 위협하는 복병으로 떠오르고 있다. 결국, 정규리그(스플릿 전 33R) 결과는 아쉽게 상위 스플릿 진출 실패. 하지만, 37R 포항전에서 잔류를 확정지었고, 8위로 전 시즌보다 2단계 상승한 순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정조국은 20골로 득점왕에 등극했으며, 리그 MVP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정조국이 강원 FC로 이적하고 수비형 미드필더 이찬동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중앙에서 공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던 여름상주 상무에 입대했기 때문에 공격과 미드필더에 공백이 크게 발생했다. 적절한 보강이 이뤄지지 않으면 2017 시즌은 고단할 것으로 보인다.

예감은 적중하였다. 1라운드 대구 FC전 승리 이후, 6G 연속 무승, 그리고 강등권까지도 밀려나면서 한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8라운드에서 전북 현대를 상대로 첫 승을 따냈다.

2017년 8월 14일부로 광주의 영광을 함께했던 남기일 감독이 자진 사퇴하고, 이후 학범슨이라 불리는 김학범 감독을 전격 선임하여 시즌 끝까지 함께 할 예정이었으나, 11월 4일 대구 FC 원정경기에서 0:2으로 패배해 하위스플릿 최하위로 자동 강등이 확정되었다. 결국 김학범 감독은 3개월만에 강등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다.

참고로 2014년 광주 FC의 승격 희생양이 된 경남 FC는 2017년 챌린지 우승으로 클래식에 승격했다.


5. K리그2 재강등 및 K리그2 첫 우승 (2018~2019)[편집]



파일:FB_IMG_1572776198687.jpg


2019년 10월 20일 부산이 안산에 패배하면서 조기 우승을 확정짓고 2년 만에 K리그1으로 돌아오게 됐다.

참고로 이때가 광주의 역사상 첫 우승이다.


6. K리그1 재승격 (2020~2021)[편집]



파일:qlICBZ.jpg

재승격 첫해인 2020년에 1부 리그인 K리그1에서 처음으로 상위 스플릿에 올라보며 구단 역대 최고 성적을 기록하고, 1만명 규모의 아담한 새둥지인 광주축구전용구장에 자리를 튼 한해였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무관중 경기가 태반을 차지하면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따른 시즌이었다.


7. K리그2 세 번째 강등 및 K리그2 두 번째 우승, 혜성처럼 나타난 명장 (2022)[편집]


심판의 오심으로 인해 최다 강등의 불명예를 안으며 승격 2년 만에 다시 K리그2로 강등 당했다. 그래도 2022시즌부터는 1+2 승강제가 시행되어 2부 리그 구단이 조금 더 유리해지는 만큼 즉각적인 복귀도 높은 확률로 가능할 전망이다.

혜성처럼 등장한 이정효 감독의 뛰어난 용병술로 압도적인 우승과 승격을 성취했다. 동시에 K리그2 최다 승리, 최다 승점이란 기록을 작성했다.


8. 1년 만의 K리그1 복귀, 이정효 감독과 빛고을 전사들의 돌풍 (2023~ )[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3 23:23:10에 나무위키 광주 FC/역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광주를 기반으로 탄생해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으로는 금호아시아나그룹교보생명그룹, 부영그룹, 대상그룹, 삼양그룹(삼양사), SM그룹, 하림그룹, 쌍방울그룹 등이 있다. 하지만 삼양사와 금호는 1980년대 초 KBO 리그 출범 당시 호남 연고 구단 창설 과정에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외에도 광주에 대규모 공장을 둔 대표적인 기업으로 기아(당시 기아자동차)와 삼성전자 등도 있지만 이미 각각의 모기업이 전북 현대 모터스수원 삼성 블루윙즈 등의 프로축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2] 광주는 광역도시임에도 재정자립도가 16개 시도에서 늘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심지어 과거 옛 마산시보다 시 예산이 적은 적도 있었다.[3] 본 소속팀도 아닌데다 2년마다 선수가 바뀌는 팀을 응원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2년 뒤면 자연스럽게 떠나야 할 선수들을 평생 말뚝박게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똑같은 군팀인 WK리그부산 상무는 드래프트에 지명된 선수들을 반강제로 말뚝을 박게 만들어서 논란을 낳기도 했다.[4]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자금 사정이 당시 문제도 됐겠지만, 일단 여기는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다. 있던 팀도 다른 곳에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음악에 관심이 많다. 박삼구 당시 회장도 그렇지만, 그의 큰형인 박성용 명예회장이 꽤 유명한 클래식덕후이기 때문. 그래서 음악보다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원이 상당히 빵빵하다.[5] 다만 광주 상무의 메인 스폰서를 맡긴 했다. 2009년 당시 홈 개막전 포스터엔 유니폼 메인 스폰서였던 금호건설을 비롯해 금호고속금호타이어의 이름이 적혀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6] 다만 포스코에서 포항 스틸러스전남 드래곤즈를 함께 운영하고 있으므로 아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물론 현대중공업 측에서 2개 구단을 운영할 의지나 자본력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지만.[7] 그리고 훗날 그의 아버지인 기영옥이 이 팀의 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8] 탬파베이 레이스의 'Rays' 역시 지금은 빛, 섬광의 뜻으로 쓰이지만 창단 당시의 이름이었던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서의 데블레이는 가오리라는 뜻이었다. 현재는 '빛'의 의미로 Ray라는 단어를 쓰긴 하지만, 유니폼에 가오리 패치를 부착하고 있어 과거의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9] 팀명은 공모로 선정되었는데, 1위 1명은 100만원의 상금이 있었다.[10] 근데 따지고 보면 공평하게 돌릴 수도 있는 리그에서 상주를 강제 강등 시킨 건 광주를 비롯한 지방구단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결과다. 결국 경쟁팀 하나를 떨어뜨려놓고 나머지 하위 스풀릿 팀들끼리 돌린 러시안 룰렛에 광주가 당첨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