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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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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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타
1.1. 불우한 인생
1.2. 식습관
1.3. 자손 대대로 이어진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
1.5. 후계자
1.6. 공자 한국인설


1. 기타[편집]



1.1. 불우한 인생[편집]


일단 아버지가 육십 노인에, 어머니는 십대 중후반의 꽃처녀였다. 태어난지 3년도 안 되어 아버지가 사망했고, 공자는 부친묘의 위치마저 장성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생아였다. 무녀의 자식이다보니 평범한 사람과 다른 세상을 접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공자 나이 십대 중후반에 사망했다. 신분이 천해 온갖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1] 공자가 경험한 일들은 정말로 다양한데, 장례식을 돕는 일, 종묘의 제사를 돕는 일, 창고를 관리하는 일, 수레를 모는 일 등등 온갖 허드렛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틈틈히 학문을 가까이하여 마지막으로 사학을 설립해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나이 들어 학문이 어느 정도 자리잡자 십 수년을 주유 열국하며 자신을 등용해줄 사람과 인을 구현할 나라를 찾아 떠돌아 다녔으나 온갖 조롱, 비판, 죽을 위기 등등을 거치면서 절망을 반복했고 끝내는 이름 뿐인 국부 하나 얻어 죽기 3, 4년 전에 노나라에 돌아왔다. 정치적 야망은 전부 무너졌다.

그래도 학식이 대단하고 인품이 지극히 높아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거느릴 수는 있었지만, 노나라에 돌아온지 첫해에 아들인 백어가 사망. 그 다음해에 수제자 안회가 이제 꽃을 피워볼려는 참에 사망. 그 다음해에 가장 친한 자로가 살해당해 젓갈이 되어 돌아왔다. 이 3단콤보를 맞은 공자는 노년의 나이에 심적 충격을 너무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세 제자 중의 마지막 한 명인 자공이 돌아오는 걸 보고 사망했다. 결국 살아서 정치적인 야망을 무엇 하나 달성하지 못했고, 자신의 학문의 적통을 이어줄 안회는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사실상 살아서 정치적이나 학문적이나 마땅한 무언가를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치적, 학문적 야망은 죽고나서야 동양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으니 얄궂다면 얄궂은 일일 것이다.


1.2. 식습관[편집]


공자의 생활습관을 설명한 논어 향당편을 보면 미식가로 나온다. 고운 쌀로 만든 밥과 가늘게 썬 를 즐겼고 색깔이 나쁘거나 나쁜 냄새가 나거나 제철 음식이 아니거나 알맞게 익히지 않거나 올바르게 자르지 않으면 음식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음식에 어울리는 장(醬)이 없어도 음식을 먹지 않았고 고기가 많아도 밥보다 많이 먹지는 않았다. 술이나 육포는 집에서 만들지 않고 시장에서 사온 것은 먹지 않았고 생강을 꾸준히 먹었으며 을 마셔도 취해서 흐트러질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1.2.1. 공자식인설[편집]


공자에 대한 낭설 중 인육을 먹었다는 설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을 팔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다. 특히 1990년대에 재미교포 폴 임 박사가 쓴 '책 속의 책'에 나온 공자가 인육을 즐겨 먹었다는 내용으로 인해 이러한 인식이 퍼졌다.[2] 여기에 더해 일본 극우파의 사주를 받는 대만인 어용학자 황문웅이 이런 주장을 더 퍼뜨렸다.

본래 그는 양고기, 사슴고기, 토끼고기 등의 고기로 만든 일종의 젓갈인 해(醢)를 즐겼는데, 이를 중죄인의 시신을 젓갈로 만들어 버리는 당시의 형벌과 연관시켜서 마치 공자가 사람고기로 만든 젓갈을 즐긴다고 왜곡한 것이다. 식인은 사람을 중요시하는 유가의 이념과 몹시 다를 뿐더러 공자는 제자인 자로가 권력 싸움에 휘말려 죽고 그 시체가 해로 만들어지자 그 충격으로 평시 즐겨먹던 평범한 해를 다시는 가까이하지 못했다.

공자의 유학을 계승한 맹자의 서적인 "맹자- 양혜왕 편"을 보면 "옛날에 공자께서는 '처음으로 사람 모양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순장에 쓰이게 한 자는 후손이 없을 것이다.'라 하시며 사람의 형상을 한 인형조차도 귀히 여길 것을 역설하셨습니다."라며 맹자가 양혜왕에게 백성의 목숨을 중히 여길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온다. 진짜 순장은 커녕 인명이 희생되지 않는 가짜 순장조차도 혐오한 공자이니만큼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 유교를 떠나서, 원래 식인 행위는 현대에 비해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으며 인권이라는 개념조차도 없었던 고대 중국에서도 분명한 비정상적 행위였다. 물론 전근대시절에는 영양상태나 의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긴 전쟁이나 기근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종종 나오지만,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나 나오는 행위였지, 고대인이라고 해서 "먹을 거 없으면 사람 좀 잡아먹을 수 있지"란 식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설령 극단적 상황에서 나온 식인이라도 두고두고 지탄을 받는 행동이었다.[3]


1.3. 자손 대대로 이어진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편집]


부부관계는 본인은 물론 후대에까지 별로 좋지 않았던 듯하다. 공자, 공자의 아들, 공자의 손자인 자사까지 3대가 이혼을 했다는 말이 있는데, 예기의 단궁편의 다음 구절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 백어의 어미가 죽었는데, 1년이 넘어도 여전히 곡을 했다. 선생님이 들으시고 "누가 곡을 하는가?"라고 물으셨다. 문인들이 "리입니다."라고 하니 "에휴. 심하네…."라고 하셨다. 백어가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4]
→ 백어는 공자의 아들을 말하는 것으로, 리(鯉)가 이름이다. 즉, 아들이 엄마가 죽었다고 1년 동안 곡을 하자 그것이 심하다고 언급한 것.

  • 자사의 어미가 위나라에서 죽어서, 자사에게 그 소식을 알리자 자사가 사당에서 곡을 했다. 문인이 도착해서 말했다. “서씨의 어미가 죽었는데 어째서 공씨의 사당에서 곡을 합니까?” 자사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면서 그리고는 다른 방에서 곡을 했다.[5]
→ 자사는 공자의 손자로, 백어의 아들이다. 서씨의 어미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백어가 이혼하였고, 이혼한 전처는 서씨와 재혼했다는 의미이다. 즉, 왜 더 이상 이 집 사람이 아닌 엄마 때문에 공씨 사당에서 우느냐고 한 것.

  • 자상의 어미가 죽어도 상을 치르지 않았다. 문인들이 자사에게 물었다. "옛날에 아버님께서는 쫓겨나신 어머니의 상을 치르신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자사가 답했다. "있었지." "헌데 선생님께서는 왜 흰둥이한테는 상을 못 치루게 하십니까?" 자사가 말했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께선 도를 잃으시는 법이 없으셨네.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도에 견주어 보시고 그 예를 높일만 하면 높이고, 낮출 만하면 낮추셨지.(내 아버지께서는 능히 그리하셨으나) 내가 (도를 잘 헤아리지 못 하는데) 어찌 그처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내 생각하기로는) 내 마누라가 흰둥이 엄마지, 내 마누라가 아닌 사람은 흰둥이 엄마가 아닐세!(…) 이리하여 공씨네 집에서는 이혼한 어머니의 상을 치르지 않는 것이 자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6]
→ 자상은 공자의 증손자로, 자사의 자식이다. 흰둥이는 자상을 말하는 것. 즉, 자신의 아내가 죽어도 상을 치루지 않자 예전에 이혼한 어머니의 상을 치룬 적이 있는 자사가 왜 자기 자식에겐 그렇게 못 하게 하는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는 것. 돌아오는 대답인 즉슨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도에 견주어 보시고 능히 적절한 예식을 취할 능력이 되셨으나, 나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 마누라가 곧 자상이 엄마지, 내 마누라가 아닌 사람은 자상이 엄마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설화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복잡한 가정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 하다. 김용옥처럼 부계만을 강조하려고 사실이 아닌 장례에 대한 이야기로서 썼다는 해석도 있다. 여담으로 효자로 유명했던 증자도 아내가 부모가 좋아하는 찐 배를 잘못 쪄서 이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순자의 주장에 따르면 증자-자사학파의 계승자인 맹자 또한 아내를 쫓아낸 전력이 있다고 한다.『순자荀子』「해폐解蔽[7]」편의 이야기에 나오는데, 애초에 해당 편에서 이 말이 언급된 이유가 맹자를 아니꼽게 여기던 순자가 맹자를 깔 껀덕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유가 이유인 만큼, 카더라일 가능성이 높다.

어느 날 맹자가 자기 방에 문 열고 들어갔는데, 마누라가 방 안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는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이에 기가 찬 맹자가 당장 어머니한테 달려가서 "엄마, 나 이런 무례한 애랑은 못 살겠어요!"라고 외쳤는데, 어머님 하시는 말씀이 "아니, 노크도 안 하고 귀신마냥 들이닥친 네 잘못인데 왜 우리 아가한테 성질이냐? 그리고 평소에 편안하게 쉬지도 못할 거면 방은 왜 만들어 놨겠니? 무례하기는 네가 제일 무례하다!" 이 가르침으로 인해 맹자는 근본적인 잘못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고 이후 평생 마누라랑 알콩달콩 잘 살았다고 한다.


공자가 여성을 특별히 나누어 말한 기록이 드문데, 여자와 소인[8]만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 하면 원한을 품는다.[9]라고 말한 적은 있다. 여기서 여자의 의미에 대해 국가를 막론하고 논란이 분분한데, 공자는 이 문장 빼곤 여성을 차별하는 언동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가 시대다보니 그냥 여성 전체를 가리켰단 의견, 특별히 철없는 여성을 찝어 말했단 의견, 딸(女)과 아들(子), 남(女)의 자식(子) 등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10]


1.4. 역대 왕조가 내린 작위[편집]




1.5. 후계자[편집]


맹자는 요-순-탕-문왕-무왕-주공-공자로 이어지는 라인을 자신이 계승했다고 자부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도통론(道統論)이 된다. 공자-증자-자사-맹자까지 라인이 이어지고, 단절되었다가 송나라 때 다시 복구되었다는 식의 설명. 그런데 사실 맹자는 공자의 아티스트적인 측면을 생각해보면 공자의 최대의 이단일 수도 있다. 맹자가 공자의 후계자로 인정된 것도 송나라 때 성리학이 체계화된 이후.[11]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맹자를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왜 그런지는 맹자 문서로 가보면 안다. 사실 공자는 자신의 후계자를 안회로 생각했던 듯하나, 안회는 요절하고 말았다.


1.6. 공자 한국인설[편집]


웃기게도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인들은 공자를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중국 인터넷에서 떠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많은 중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중국판 비정상회담인 스제칭녠숴에서도 이와 관련된 얘기가 나왔다.

러시아 패널: 그래서 공자는 한국인이야 중국인이야?

(일동 당황, 민감한 질문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듯)

(한국인 패널만 어이없게 웃는다.)

한국인 패널: 난 진짜 이게 어디서 나온 헛소리인지 모르겠어.

99.999999%의 한국인들은 다 공자가 중국인인 걸 알아.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한국인들을 대표해서 명확하게 말할게.

공자는 중국인이야.

(전 패널들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 답변해줘서 고맙다는 듯이 한국인 패널에게 박수 갈채.)

얘기가 나오자마자 타 국적의 패널들은 마치 "방송에서 이런 민감한 얘기 꺼냈다가 싸움나는거 아냐?" 라는 식의 표정을 짓거나, 한국인 패널이 오해를 풀어주고 공자는 중국인이라고 말하자 '큰 결심했다는 듯이' 박수갈채까지 쏟아진다. 더 놀랍게도 해당 방송 후 웨이보나 바이두같은 중국 웹사이트에서 중국 네티즌들도 "이 방송을 계기로 오해가 풀렸다"는 댓글 반응이 많았다. 어디 옛날 방송도 아니고 2018년 방송분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별 일도 아닌데 저리 심각한 분위기가 되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공자가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며[12] 한국의 학교 교과서에서도 공자를 한국인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윤사/생윤에서는 제자백가중 하나로 다루는데 제자백가를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가들이라 명시하고 있고 그 외에는 동아시아사/세계사 과목의 중국사 부분이나 중국어 과목의 중국 문화 이해 파트에서나 볼 수 있다. 오히려 '조선은 공자왈 맹자왈 하다가 망했다'는 인식이 젊은 세대로 갈 수록 심화되고 있기 때문에 공자와 유교를 은연 중 싫어하는 편이므로 한국사람이라고 우길 이유조차 없다. 한국에서는 수구적이고 폐쇄적인 유교 문화를 혐오하는 경향이 많이 퍼져있는데,[13] 그런 상황에서 '유교의 창시자' 격으로 인식되는 공자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1999년에는 심지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이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오래된 오해지만[14], 한국인들은 공자에게 관심조차 없어서 중국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고, 지금도 중국인들이 '한국에서 공자를 자기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면 굉장히 어이없어한다.

2020년을 전후해서는 중국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점점 증가하면서 자기들부터 만물중국설을 주장하고 다니니까 다른 나라도 그런 줄 안다고 까기도 한다. 또한 공자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 노나라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 같은 헛소문의 근원은 과거 일본 넷우익들이 공자 한국인설을 퍼뜨린게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에서도 비난받는 환빠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공자 동이족설을 말하여 빌미를 제공하긴 한 부분도 있지만[15], 이는 한국의 일반인들은 모르는 극소수의 비주류 의견이며, 한국 학계 내에서도 인정하지도 않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내용이다. 2000년대 초~중반 시기 이런식의 이야기들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 커뮤니티에서 굉장히 유행했으며 넷우익들이 번역한 이러한 한국기원설이 일부러 중국으로 재번역되어 흘러갔고 각종 오해의 근원이 되었다. 일본인들의 한국기원설 유포 작전. (그것이 알고싶다 839회) 일본인들의 한국기원설 유포 작전. (일본사이트)
[1] 강신주는 공자의 모친이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근거로 강간을 했다고 추측했지만 딱히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공자의 모친의 신분에 대해 무녀라고 추측한 인물로 대표적인 학자는 김용옥이며 중국과 대만의 많은 학자들도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2] 참고로 해당 책은 아프리카의 코뿔소는 뿔이 하나 인도의 코뿔소는 뿔이 두 개라는 오류도 범했다.[3] 원래 공자는 주공 단을 가장 존경했는데 이는 주공이 과거 은나라에 있었던 괴이한 풍습을 순화하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괴이한 풍습에는 순장, 식인 등이 있었다. 그러니 공자가 식인을 했다는 말은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4] 伯魚之母死, 期而猶哭。 夫子聞之, 曰, "誰與哭者?" 門人曰, "鯉也。" 夫子曰, "嘻, 其甚也!" 伯魚聞之, 遂除之。[5] 子思之母死於衛, 赴於子思, 子思哭於廟, 門人至, 曰, "庶氏之母死, 何爲哭於孔氏之廟乎?" 子思曰, "吾過矣, 吾過矣。" 遂哭於他室。[6] 子上之母死, 而不喪。 門人問諸子思, 曰, "昔者子之先君子喪出母乎?" 曰, "然。" "子之不使白也喪之, 何也?" 子思曰, "昔者吾先君子無所失道, 道隆則從而隆, 道汚則從而汚。伋則安能? 爲伋也妻者, 是爲白也母, 不爲伋也妻者, 是不爲白也母。" 故孔氏之不喪出母, 自子思始也。[7] 가려진 것은 열어서 밝혀야 함[8] 마부노예를 뜻한다.[9] 논어 양화편 子曰, 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近之則不孫, 遠之則怨[10] 뒤의 소인이 마부나 노비를 뜻한다면 여기서의 여자도 그에 준하는 낮은 계급의 집안 여성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채지충 만화에서는 이 대목의 여자를 첩실로 묘사.[11] 송나라 즈음하여 크게 융성한 도교 및 불교 사상, 그들의 세계론, 우주론에 대항하여 유가 사상이 존립하려면 유가 역시 그럴듯한 세계론, 우주론을 내놓았어야 했는데, 기본적으로 유가는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둔 사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분야에서의 얘깃거리가 적었다. 이때 주돈이가 『주역』과 전통적 오행설에 기반을 둔 『태극도설』을 지어 나름의 유가적 형이상학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을 본격적으로 유가적으로 정당화하려면 그 내용과 어떻게든 갖다 붙일 수 있는 유가 성현의 말이 필요했다. 그런데 공자는 형이상학적인 말을 아꼈고, 순자는 더 나아가 형이상학을 아예 거부하다시피 했다. 반면 자사나 맹자는 '천명으로서의 성'을 제시하는 등 그 이론에 형이상학적 색채가 있었다. 때문에 『태극도설』을 정당화해주기에 보다 용이한 자사, 맹자의 사상이 정호, 정이, 주자 등 신유학 운동가들을 거치면서 점차 선호되고 유가의 적통시되기에 이른 것이다.[12] 물론 이 중국인이라는 개념을 어디까지 보냐는 문제는 있다. 알다시피 중국 대륙의 역사는 한족뿐 아니라 온갖 이민족들이 얽히고 설킨 역사라.. 하지만 최소한 공자가 한국사람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확실하다.[13] 일례로 2019년 한국의 서원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자 관련 기사엔 "썩을 유교 문화의 잔재를 뭣하러 기념하냐"는 투의 부정적인 댓글들이 베스트 댓글에 오를 정도. 기사1 기사2 유교 탈레반이라는 신조어가 공공연히 돌아다닐 만큼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교의 평가는 극악을 달리고 있다.[14] 적어도 2천년대부터 떠돌던 루머다. 반대로 말하면 한중 수교와 인터넷 발달, 그로 인한 분탕종자들의 활동이 이런 거대한 오해의 시발점이라 할만하다. 이는 대만쪽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마잉주 총통 시절 한국인 유학생이 직접 총통한테 공자 한국인설이 왜케 대만에 퍼져있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억울함까지 호소할 정도였다.[15] 실제 근거 소스가 환빠 성향 학자들의 카더라성 글을 퍼간 넷우익들이 이걸 악용해서 퍼트리고 해외네티즌들이 이걸 또퍼가면서 한국인들의 주류 생각이라고 믿으면서 오해가 커진거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에 대한 오해가 인터넷의 부정확한 정보에 의해 유통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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