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규/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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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
2. 두산 베어스 시절
3. 삼성 라이온즈 시절
3.1. 2009 시즌
3.2. 2010 시즌
3.3. 2011 시즌
3.4. 2012 시즌
3.5. 2013 시즌
3.6. 2014 시즌
3.7. 2015 시즌
4. 베이스볼 분데스리가
4.1. 2016 시즌
5. 연도별 성적


1. 아마추어 시절[편집]


경남고, 고려대 체육교육학과 재학 시절 3루수에 4번 타자로 활약했으며 고려대 재학 시절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뽑혀 병역 특례를 받았다. 아마추어 시절에 상당히 좋은 기량의 3루수로 인정받았다. 경고 시절에는 투수로도 활약했으나 대학 진학 후 타자로 정착했다. 박재홍과 같은 경우.


2. 두산 베어스 시절[편집]


파일:두산 강봉규.jpg
두산 베어스 시절.

프로에 데뷔하자 마자 삼진을 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또한 하필이면 지명받은 팀인 두산 베어스의 3루수가 국가대표 3루수인 김동주였던지라, 이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하고 외야로 전향해 1, 2군을 나도는 생활이 계속되었다.[1][2]

결국 프로 데뷔 이후에는 아마 시절만큼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두산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3.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2006년 시즌 개막 직전에 김창희와 함께 강동우를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됐다. 김창희와는 두산으로 이적한 뒤에 한솥밥을 먹기 시작했으며 친한 선후배 사이. 2009 시즌 종료 뒤 김창희가 은퇴한 뒤로는 홀로서기에 서 있다.

두산 시절에는 비중이 없었으나 삼성으로 이적하고 와서는 비중이 늘었다. 이적 첫해 류현진을 상대로 홈런을 친 후로는 좌완투수 상대로 출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여담으로 이 시기 강봉규는 나름 특이한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2007년 7월 13일 수원 현대전에서 연장 12회에 대주자로 투입된 뒤 그 이닝에 타석에 서서 홈런을 기록한 것. 이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역대 4번밖에 없는 기록이다.[3]

2009 시즌 김상수에게 응원가를 빼앗겼지만, 정작 김상수보다 타석에 들어서는 횟수가 더 많다. 라기보다 김상수의 간염으로 인해 2군행으로 오히려 타석에 있는 비중이 늘어 났다. 그리고 2010 시즌에는 노라조의 고등어를 응원가로 정했다고….


3.1. 2009 시즌[편집]


2009년 6월 28일 현재 타율 0.320으로 팀 내 안타 1위를 기록하며 3번타자로 맹활약하고 있다. 한때 양준혁과 함께 팀내 둘뿐인 3할 타자로서 팀 타선에 없어서 안 될 존재로 부각되었으며, 양준혁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고 나선 완전히 개화하여 삼성의 신진 타자 3인방과 함께 막강한 폭풍 타선을 구축했다.

마침내 2009 시즌에 19홈런을 넘기면서 데뷔 후 9년 동안 친 18홈런을 한 시즌 만에 추월했다.

그리고 9월 25일,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신명철과 함께 한 시즌에 한 팀에서 두 명의 20홈런-20도루가 나온 것. 동갑내기 신명철과 함께 화려하게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원래는 김창희와 파트너였지만, 2009 시즌에는 신명철과 쌍두마차 파트너가 되었다.

불암콩콩코믹스의 영향 탓인지 강쩌리라는 별명이 튀어나온적도 있다. 실제로 상당한 2군 무명 쩌리 생활을 극복하고 2009년도 골든 글러브 수상도 유력시되었던 인간승리의 선수. 거기에 성실함과 순박한 인간성까지... 그 덕에 작년부터 꾸준히 '봉느님'으로 불렸다.

나가시마 기요유키 타격코치의 지도가 꽤 잘 먹혔던 시즌이기도 하다.


3.2. 2010 시즌[편집]


2009년의 활약까지 더해져 2010년도 새 주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 덕에 봉주장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그리고 시즌초 추위를 막기 위해 복면을 하고 수비를 하다 실책을 해서 강복면이라고도 불린다.

2010 시즌에는 태평양 존으로 바뀐 스트라이크 존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4] 2010년 3월 31일 광주 KIA전에서는 도저히 일반 상식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스트라이크 존에 의한 삼진을 당하고 덕아웃에 헬멧을 벗어 던지는등 심판에게 강하게 어필, 2010 시즌 첫 퇴장을 당했다. 여태껏 한번도 항의하지 않았을 정도로 순한 성품인 강봉규가 퇴장을 당했을 정도.

견제도 많이 받고 해서 타격이 엉성해져서 2010 시즌 초중반 결국 2군행. 이후 복귀하였으나 역시나 계속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양준혁의 은퇴 건과 관련하여, 엠엘비파크의 삼성팬들에게 선동열과 함께 죽어라 까였다. 양준혁과 포지션이 겹치는 다른 선수들은 나이가 젊다거나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덜까인데 비해 강봉규는 젊지 않은 나이에 성적도 최악이었던 만큼 폭풍처럼 까였다. 그러나 사실 양준혁과 강봉규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양준혁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주전 3루수를 차지한 조동찬[5], 양준혁의 부진을 틈타 1군에 올라온 오정복, 지명타자와 1루수를 번갈아 출장한 조영훈이다. 강봉규에게 진짜로 자리를 뺏길 뻔 한건 당시 FA를 빌미로 선동열이 팀에서 쫒아내려고 했던 박한이다.[6]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7타수 1안타 1득점, 타율&장타율&출루율 .143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5타수 2안타 1홈런 1볼넷 1타점 2득점, 타율 .400, 장타율 1.000, 출루율 .50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12타수 3안타 1홈런 1볼넷 1타점 3득점, 타율 .250, 장타율 .500, 출루율 .308를 기록했다.


3.3. 2011 시즌[편집]


2011년 3월 23일 시범경기 중 김상수와 충돌로 왼쪽 엄지 골절로 7월 12일에 1군에 올라왔다. 하지만 강봉규가 올라오기 전까지 모두 그를 잊고 있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16타수 5안타 1홈런 1볼넷 2사구(死球) 1도루 1타점 3득점 타율 .313, 장타율 .500, 출루율 .421을 기록하여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파일:kangbonggyooHR.jpg
특히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SK의 선발 투수 고든을 상대로 4회말 1사 상황에서 결승 솔로 홈런[7]을 쳐서 팀의 0:1 승리와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고 5차전 MVP로 뽑혔다.


3.4. 2012 시즌[편집]


4월엔 주춤했으나 5월부터 방망이가 조금씩 터지기 시작. 이따금씩 홈런도 터뜨리며 외야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었다. 다만 사실상 외야~지명타자 라인이 배영섭 - 정형식 - 박한이 - 최형우로 고정된 상황이라 좌투수 상대로 정형식이나 박한이를 대신해 나오는 정도로 출전하였는데....

조영훈KIA 타이거즈로 이적하고 채태인모상기는 부진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상황에서 이승엽의 1루 백업이 없는 상황에서 1루수 백업으로 선택되었다. 처음 1루에 섰을때는 1루수의 기본적인 수비에서 실책을 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노출하였으나 점점 적응하며 훌륭한 1루수 백업 역할을 수행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 1패로 앞선 10월 29일 문학 야구장에서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에 4차전에 상대 선발 투수인 좌완 김광현을 상대로 선발 좌익수 겸 6번타자로 출장했지만, 2타수 무안타를 기록했고 6회초에 대타 정형식으로 교체되었다.
이날 팀은 스코어 1:4로 패했다.

강봉규는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2, 3차전은 대타, 4차전은 선발 좌익수 겸 6번타자로 출장하여 4타수 무안타,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우승하여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3.5. 2013 시즌[편집]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오른쪽 어깨와 손목부상으로 인해 재활군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즌 초반에 삼성이 또 부진하자 수많은 삼팬들이 강봉규를 찾으러 다녔을 정도. 심지어 채태인이 선발 출장한다는 소리에도 반응이 민감하여 제발 채태인 넣지 말고 강봉규 1루 세우라는 말도 많이 돌았었으나, 채태인이 2013년 초반 각성한 모습을 보이며 공수에서 맹활약하는 모습을 보이자 자연히 묻혔다.

4월 30일부터 2군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했고, 5월 23일 2군으로 내려간 채태인을 대신해서 1군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5월 26일까지 9타석 무안타 행진 중(…)이었으나 5월 30일 SK와의 경기에서 1회초 승부에 쐐기를 박는 좌중간 2루타를 기록함으로서 본인의 시즌 첫 안타, 첫 타점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다시 6타석 무안타를 기록하였고 6월 2일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8월 20일 채태인이 어깨 통증으로 2군으로 내려가면서 대신 1군으로 올라왔다.

시즌 최종 성적은 30경기에 출장해 타율 0.207에 그치며 삼성 유니폼을 입은 뒤 최악의 커리어로우 시즌을 보내고 말았고, 2013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들지 못했다. 부상이 겹치며 노쇠화 기미를 확실히 보인데다 이미 외야진에는 최형우, 박한이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강봉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3.6. 2014 시즌[편집]


윤성환, 안지만 등과 연봉 미계약자로 남으면서 스프링캠프 합류가 불발되었다. 근데 두 사람 때문에 기사나 팬들이나 언급을 거의 안하는 상황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구단에서는 플레잉코치 자리를 제시했지만 강봉규 측은 현역으로 더 뛰는 걸 원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협의하느라 연봉 협상이 미뤄졌다고 한다. 일단 1월 23일자 기사에 의하면 5천만원 삭감된 1억 원에 재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어깨 통증 탓에 스프링캠프는 못 가고 국내에 남아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규시즌 개막 후 2군 경기에도 안 나왔는데, 4월 15일에 오른쪽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시즌 내내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시즌 후 방출 혹은 은퇴 후 코치가 될 것이라는 소문과 다르게 보류선수 명단에 포함되면서 2015년에도 선수로 뛰게 되었다.


3.7. 2015 시즌[편집]


기존 연봉 1억에서 30%가 삭감된 7000만원에 연봉 계약을 마쳤고, 스프링캠프에 합류하게 되었다.

채태인이 부상을 당한 공백 + 1군 엔트리 1명 확대 메리트를 입어 우타자 대타 요원으로 엔트리 한 자리에 합류했다. 간혹 가다 구자욱이 수비가 불안한 면이 있어 몇몇 팬들은 강봉규를 1루에 세우자는 이야기도 하고 있는 중.

4월 9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팬들의 바람대로 구자욱이 빠지고 강봉규가 1루수로 선발 출장했는데, 수비는 그럭저럭했지만 타석에서는 완전히 빠지는 공에 스윙하면서 삼진만 2번 당했다. 결국 4월 10일 채태인이 복귀하면서 대신 2군으로 내려갔다.

2군에서는 주로 지명타자로 출장하면서 66경기에 출장해 48안타 6홈런 26타점 29득점 .318의 타율을 기록했다. 9월 초만 하더라도 류중일 감독은 우타 대타감으로 언급했지만, 이후 제대하는 배영섭을 제대 직후 등록하겠다고 말했다. 2군에서 수비를 거의 보지 않았을 정도로 외야 수비가 불가능한데다가 나이도 30대 후반이라 노쇠화가 뚜렷하기 때문에 더 이상 강봉규를 1군 전력감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결국 2015시즌 이후 본인이 방출을 요청하면서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불러 주는 팀이 없을 경우 해외로 지도자 연수를 떠날 생각이라고 한다.

최근 근황이 올라왔는데, 독일 야구 리그에 진출한다고 밝혔다. 삼성 시절 팀 동료였던 릭 밴덴헐크(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추천으로 독일 레겐스부르크를 연고로 하는 베이스볼 분데스리가부흐빈더 레지언나레팀에입단하게 되었다.


4. 베이스볼 분데스리가[편집]



4.1. 2016 시즌[편집]


4월 2일 베이스볼 분데스리가 첫 개막전 슈투트가르트 레즈와의 경기에서 5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지만 희생타로 1타점을 만들었고 그 다음날 경기에서는 5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해 데뷔 첫 안타와 타점을 신고했다. 4월 9일 튀빙겐 호크스 경기에서는 데뷔 첫 2루타와 볼넷 2개 득점 하나를 만들었다.

6월 18일 바트 홈부르크 호넷츠의 경기에서 독일에서의 첫 대활약을 펼쳤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 홈런을 포함하여 안타 3개 타점 4개 볼넷 1개 득점2개를 기록해 대승을 거두는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프로 출신으로 세미프로리그인 독일에서조차 성적은 좋지 않아[8] 내년을 기약할 수 없기에 시즌이 종료된 2016년 10월 28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5.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출장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2000
두산 베어스
1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2001
64
89
.236
21
7
1
2
11
16
2
7
.286
.167
2002
93
160
.250
40
6
1
5
25
30
6
18
.324
.394
2003
6
13
.231
3
0
0
1
3
3
1
2
.333
.462
2004
40
72
.236
17
2
1
1
5
14
2
11
.337
.333
2005
48
102
.235
24
3
1
1
10
12
2
20
.361
.314
연도

출장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2006
삼성 라이온즈
87
128
.234
30
6
1
4
16
16
4
14
.306
.391
2007
83
142
.282
40
9
1
1
13
20
4
21
.370
.380
2008
81
134
.276
37
8
0
3
14
27
3
22
.376
.403
2009
126
449
.310
139
24
2
20
78
89
20
73
.405
.506
2010
89
232
.237
55
12
0
4
26
38
8
42
.353
.341
2011
52
146
.267
39
7
1
1
18
14
3
19
.347
.349
2012
102
235
.255
60
10
1
6
38
30
5
30
.332
.383
2013
32
82
.207
17
5
0
0
5
11
3
15
.327
.268
2014
1군 기록 없음
2015
5
6
.000
0
0
0
0
0
0
0
2
.250
.000
KBO 통산
(15시즌)
909
1991
.262
522
99
10
49
262
320
63
296
.355
.396
연도

출장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2016
부흐빈더
레지언나레

22
71
.239
17
4
0
1
12
15
1
9
.317
.338
베이스볼 분데스리가 통산
(1시즌)
22
71
.239
17
4
0
1
12
15
1
9
.317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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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밌는 건 이 김동주도 데뷔시즌에는 3루에 안경현이 있었기 때문에 외야수로 뛰었다는 점. 1999년부터 안경현이 2루로 이동하며 김동주가 3루수를 맡게 되었다.[2] 그래도 200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백업 멤버로 승선하며 두산에서 우승반지를 하나 획득했다.[3] 나머지 셋은 전상렬, 박용근, 김준완.[4] 거의 1980년대 수준인 이 일관성 없는 태평양 스트라이크존은 역대 KBO 정책 중 손꼽히는 병크가 되었다.[5] 원래 주전 3루수였던 박석민은 부상 여파로 중, 후반기에 대부분 지명타자로 출장했다.[6]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봉규가 폭망하면서 선동열이 어쩔수없이 오정복과 함께 박한이를 기용했지만, 타격감이 좋은 데도 억지로 7번 타순에 박는 등 홀대는 여전했다. 시즌 후반 당시 상위타순과 클린업에서는 뇌진탕의 후유증으로 채태인이 고전했으며 경험 부족으로 이영욱, 조영훈은 밑천을 드러냈고 조동찬이 부상을 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명백한 선수 죽이기이다. 류중일이 장타력 있는 "강한 2번"을 천명하며 14년까지 박한이를 2번에 기용, 배영섭 or 정형식 안타-박한이 2루타로 경기초반을 풀어나간 것과 대비되는 셈이다.[7] 2011 시즌 강봉규의 홈런 개수는 단 하나였다!![8] 71타수 17안타 1홈런 12타점 1도루. 타율 .239 출루율 .338 장타율 .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