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희(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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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희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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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7
2006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44번}}}
동봉철
(1996)

김창희
(1997~2002)


권희석
(2004~2006)
두산 베어스 등번호 63번
장인규
(2001~2002)

김창희
(2003~2005)


김강률
(2007~200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3번
박대호
(2004~2005)

김창희
(2006~2009)


이만기
(2010)
KIA 타이거즈 등번호 80번
다카하시
(2012)

김창희
(2013~2019)


이현곤
(2020~)



파일:tigers_co_kr_20171016_183354.jpg
김창희
金昌熙 | Chang-Hei Kim

출생
1973년 7월 3일 (50세)
경상남도 마산시[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양덕초 - 마산중 - 마산고 - 한양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7년 2차 1라운드 (전체 9번, 해태)
소속팀
해태-KIA 타이거즈 (1997~2002)
두산 베어스 (2003~2005)
삼성 라이온즈 (2006~2009)
지도자
KIA 타이거즈 2군 외야수비코치 (2013)
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14)
KIA 타이거즈 2군 주루코치 (2015)
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16)
KIA 타이거즈 2군 수비코치 (2017~2018)
KIA 타이거즈 2군 작전·주루코치 (2019)
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1~)
프런트
삼성 라이온즈 전력분석원 (2010~2012)
KIA 타이거즈 전력분석원 (2015)
가족
아들 김재민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여담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KBO 리그 선수이자 前 KIA 타이거즈의 코치. 현역 선수 시절에는 해태-KIA 타이거즈두산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에서 외야수로 활약하였다. 등번호는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는 44번, 두산과 삼성에서는 63번을 달았다.

커리어 대부분을 준주전 혹은 백업으로 보낸 데다가 후술할 개그요소로서의 유명세로 인해 평가 절하되는 느낌이 있지만, 대학리그 시절에는 이병규와 버금가는 수준의 최상위급 타자였다. 실제로 1997년 당시 해태 타이거즈가 김창희를 2차 1번에서 지명하던 당시 땡잡은 타자라고 했을 정도였다.


2. 선수 경력[편집]





파일:/image/003/2007/08/21/NISI20070821_0005015574_web.jpg
삼성 라이온즈 시절.
파일:ddfdfdfdfdfdf.jpg
해당 사진은 2007년 4월 10일 SK와의 경기 중 장면.
여담으로 이 사진으로 인해 롤링창희, 퇴근창희(...) 라는 별명이 생겼다.

프로 데뷔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했으며, 2003년 손혁과 함께 진필중을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두산 베어스로 가게 된다. 그 후 2006 시즌을 앞두고 강봉규와 함께 강동우와 맞트레이드로 삼성으로 이적했다.

경기 도중 거성으로부터 '저런 선수가 있어야 팀이 산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정작 거성은 그한테 밀려 해태의 외야 자리를 내주기도 했지만, 그만큼 자기 몫을 해낸다는 뜻. 계약금은 1억 6,500만원이었으며 이는 해태 역사상 한남자에 이은 2위 기록이다.

해태 시절 신인 때부터 .263의 타율과 9홈런을 기록하며 신인 치고는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냥 저냥 평범한 수준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당시 이순철의 부진으로 인해 그 분, 최훈재, 로또와 더불어 90년대 후반 해태 외야의 한 축을 담당했다.[2] 1998년에는 약간 성장하여 .267에 12홈런 64타점으로 팀내 홈런 4위, 타점 3위를 기록했으며, 대학 시절 보여준 모습도 있었기에 향후 타이거즈의 주전 외야수로 성장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1998년 시즌의 성적이 그의 커리어하이였으며, 타고투저가 극심한 1999년에도 비슷한 성적을 내는 등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하다 2000년부터는 점점 성적이 떨어지더니 팀이 KIA로 간판을 바꿔단 뒤부터는 아예 벤치선수로 전락하였다. 급기야 2002 시즌 후 그는 진필중의 트레이드 맞상대가 되며 두산 베어스로 가게 된다.

두산에서는 정수근, 심재학 등의 이적으로 인해 외야에 공백이 발생해 기회를 꽤 얻었으나 준수했던 외야 수비에 비해 타격이 빈약해 여전히 주전 자리는 꿰차지 못했고, 준주전 혹은 백업 외야수에 그치며 명성을 떨쳤던 아마추어 시절에 비해 프로 시절에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2005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으나 당시 리빌딩에 한창이던 두산은 김창희와 계약을 거부했고, FA 미아가 될 위기에 처했다가 마감 직전에 가까스로 1년 1억에 싸인한 뒤 2006 시즌 시작 직전 팀 동료 강봉규와 함께 강동우를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었다.

삼성 시절에도 주로 백업 외야수로 쏠쏠히 활약했으며, 위의 사진처럼 2007년 4월 10일 SK전에서 홈 쇄도 중 SK 포수 박경완과 충돌 후 촬영된 사진 덕분에 다른 의미로(...) 유명해지며 초창기 야갤의 스타가 되었다. 여담으로 저 사진은 한동안 합성요소로 자주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2007년 8월 10일 대구 현대전에서는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수훈선수에 뽑혀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도중 감격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여러 코치들의 평에 의하면 발은 빠르지 않지만 낙구지점 판단력이나 송구과정 등의 외야수 수비 플레이에 있어선 국내 최고라고 한다.[3] 팀 내에서는 두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강봉규 선수와 친한 선후배 사이인 듯. 2009년 시즌 종료 뒤로는 김창희가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하게 됨에 따라 강봉규가 홀로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김창희도 김종국, 김재걸, 백재호, 강혁, 최만호와 마찬가지로 아마추어 시절 길들여져 있던 알루미늄 배트에 비해 프로에서는 나무배트에 적용하지 못하고[4]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에 비해 프로에서 실패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5] 그래도 한국시리즈 우승 복은 나름 있었는데, 1997년 해태, 2006년 삼성에서 각각 우승반지를 껴봤다.


3. 지도자 경력[편집]


2009년 시즌 종료 후 은퇴 선언을 했으며, 은퇴 이후로는 삼성 라이온즈 전력분석원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2012년 시즌 종료 후 선동열 감독의 부름을 받고 친정팀인 KIA 타이거즈의 코치로 영입되면서 10년 만에 친정팀으로 돌아왔다. 보직은 2군 외야수비코치.

하지만 선수 시절 성실했다는 이미지에 비해 코치로써의 평가는 나쁜 편이다. 2014 시즌이 종료되고 선동열 감독이 사퇴한 뒤에는 코치진에서 물러나고 삼성 시절과 마찬가지로 전력분석원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그런데, 김기태 감독 부임후 다시 2군 주루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2016년 시즌을 앞두고 1군 외야수비코치로 보직을 변경했고, 동시에 1루 주루코치도 겸하고 있다.

2017 시즌에는 김민호 코치가 다시 1군으로 올라오면서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2019 시즌 종료 후 맷 윌리엄스 감독 부임 후 코칭스태프 개편이 이뤄지면서 재계약에 실패, 팀을 떠났다.

1년의 공백기를 거쳐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다.


4. 여담[편집]


  • 네이버 검색에서 동명의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에게 밀릴 정도로 인지도가 낮은 눈에 띄지 않는 야구 선수였지만 이 사진 하나힛갤에 올라간 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초창기 야갤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원래 별명은 창희언니였지만 롤링창희 짤방의 힛갤입성 후, 롤링창희가 대세가 됐으며 그 후 아웃카운트를 착각하고 3루에서 그냥 덕아웃으로 들어오다 다시 돌아가는 사건 이후 퇴근창희라는 별명이 새로 추가되었다.

  • 해태에서 데뷔하자마자 거성을 외야에서 몰아내고[6]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반지를 차지하는 등 타이거즈에서 뛰던 시절 짧고 굵은 활약을 펼쳤다. 특히 데뷔 초부터 주전 요원으로 중용된 점을 들어 호남 출신인줄 아는 사람들이 종종 있으나[7] 경남 마산시 출신이다.

  •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해태의 마지막 홈런을 쳐낸 선수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2001년 7월 29일 경기의 對 삼성 전에서 해태가 삼성에게 8대 6으로 패했는데, 당시 8:5에서 마지막에 한 점을 추격하는 솔로 홈런을 쳤었다.

  • 해태 시절에는 삼나쌩 멤버의 일원으로 대구구장에서 유독 홈런을 자주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가 삼성에서 뛰게 된 걸 보면 아이러니.

  • 선수 생활 동안 두 차례의 트레이드를 겪었는데, 본의아니게 트레이드될 당시 맞상대 선수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김창희가 트레이드될 당시 맞상대는 각각 진필중, 강동우로, 두산 시절까지만 해도 특급 마무리였던 진필중은 KIA로 가자마자 하락세의 조짐을 보이더니 FA가 되어 LG와 계약한 이후부터는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히 몰락하며 먹튀 테크를 탔다. 강동우 역시 두산과 KIA를 거쳤으나 하향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은퇴 위기까지 갔다가, 그나마 후에 한화 유니폼을 입고 부활했다.

  •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었던 김응용 감독이 해태 시절부터 아껴왔던 선수이기도 하였으며 삼성에서 그를 데려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 지금은 고인이 된 한양대 후배인 투수 김건덕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규율이 빡센 한양대 야구부 선배들 중에서 유일하게 후배들을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 아들인 김재민이 2024 신인드래프트에서 NC에 지명되며 부자 야구선수가 되었다.





5.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7
해태
102
315
.263
83
20
1
9
43
41
2
32
.419
.330
1998
124
439
.267
117
23
1
12
64
49
5
53
.405
.343
1999
117
341
.261
89
12
0
10
39
55
5
64
.384
.378
2000
97
250
.236
59
8
1
5
37
36
3
53
.336
.368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KIA
88
232
.280
65
10
0
5
25
28
3
35
.388
.373
2002
114
310
.216
67
12
0
5
35
28
4
31
.303
.28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3
두산
121
288
.274
79
12
2
3
36
36
5
29
.361
.338
2004
110
301
.276
83
17
1
4
31
37
2
37
.379
.355
2005
84
221
.271
60
9
0
3
35
26
4
40
.353
.37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6
삼성
114
307
.221
68
12
1
8
38
35
6
34
.345
.297
2007
100
251
.247
62
14
2
3
22
20
2
22
.355
.305
2008
103
227
.282
64
13
0
1
19
29
2
33
.352
.373
2009
71
126
.238
30
5
0
0
14
7
1
16
.278
.322
KBO 통산
(13시즌)
1345
3608
.257
926
167
9
68
438
427
44
479
.365
.342

6.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7 00:15:34에 나무위키 김창희(야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2] 결국 1997 시즌이 끝난 후 김창희가 해태의 주전 외야수가 되었고, 이순철은 방출되어 삼성으로 이적한 뒤 거기서 은퇴했다.[3] 그 때문에 발이 빠르지 않음에도 중견수도 볼 수 있었다.[4] 참고로 대학야구는 2000년까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으며, 고교야구의 경우 2004년까지 사용했다.[5] 그래도 1998 성적을 보면 저 다섯의 커리어하이보다 비슷하거나 잘했다.[6] 그 거성은 1997년 시즌 직후 사실상 스스로 해태 타이거즈를 떠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는데 그 계기가 된 요인 중 하나가 주전 외야수 자리를 꿰찬 김창희의 선전 때문이다. 다른 요인은 이것.[7] 당시 리그 환경은 연고지 출신 선수를 우대하는 순혈주의가 파다했던 시절이었고 그 중에서 해태는 더더욱 심했다. 선수단 집합을 걸면 비호남권 출신 선수들은 배척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