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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賈彝
오호십육국시대 북위의 관료로 자는 언륜(彦倫).
가이의 집안은 본래 무위군(武威郡) 고장현(姑臧縣) 출신이었다. 6대조인 가부(賈敷)는 조위에서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역임했고 광천도정후(廣川都亭侯)로 봉해졌으며, 이후 자손들이 유주로 옮겨 살았다.
가이의 부친은 전진에서 거록태수(鉅鹿太守)를 역임했으나 뒤에 누군가의 참소로 인해 투옥되었다. 가이는 10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장안으로 가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가이의 효행에 감동해서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이는 이후 약관의 나이에 후연에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요서왕(遼西王) 모용농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북위의 탁발규는 가이의 명성에 대해서 듣고 일찍이 모용수에게 사자를 보내 가이를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모용수는 가이를 점점 후하게 대접하고 총애했으며, 표기부 장사로 삼고 창려태수(昌黎太守)를 겸임하게 했다.
395년, 모용수의 태자 모용보가 북위를 침공했으나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가이는 이때 사촌형인 대군태수(代郡太守) 가윤(賈潤) 등과 함께 북위군에 사로잡혔다.
398년, 위왕 탁발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가이는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했고 급사중(給事中)이 더해졌다. 업성에 행대(行臺)를 설치한 뒤 가이는 상서 화발(和跋)과 함께 업성에 진수하여 처음 귀순한 백성들을 위무하였으며, 뒤에 평성으로 귀환하였다.
천사(天賜) 연간 말, 가이는 병을 요양할 것을 청했는데 도중에 사로잡혀서 후진의 요흥에게 압송되었다. 가이는 몇 년 동안 후진에 구류되었다가 몰래 달아났으나 다시 북하의 혁련발발에게 붙잡혀서 북하에 억류되었다. 혁련발발은 가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이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를 비서감(秘書監)으로 임명하였다. 가이는 61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북위가 북하를 평정한 뒤 가이의 아들인 가수(賈秀)가 가이의 관을 가지고 돌아와서 대군(代郡) 남쪽에서 다시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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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賈彝
오호십육국시대 북위의 관료로 자는 언륜(彦倫).
2. 생애[편집]
가이의 집안은 본래 무위군(武威郡) 고장현(姑臧縣) 출신이었다. 6대조인 가부(賈敷)는 조위에서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역임했고 광천도정후(廣川都亭侯)로 봉해졌으며, 이후 자손들이 유주로 옮겨 살았다.
가이의 부친은 전진에서 거록태수(鉅鹿太守)를 역임했으나 뒤에 누군가의 참소로 인해 투옥되었다. 가이는 10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장안으로 가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가이의 효행에 감동해서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아이는 영민하고 준수하며, 가의의 후손들 중에서는 으뜸이로다.
가이는 이후 약관의 나이에 후연에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요서왕(遼西王) 모용농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북위의 탁발규는 가이의 명성에 대해서 듣고 일찍이 모용수에게 사자를 보내 가이를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모용수는 가이를 점점 후하게 대접하고 총애했으며, 표기부 장사로 삼고 창려태수(昌黎太守)를 겸임하게 했다.
395년, 모용수의 태자 모용보가 북위를 침공했으나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가이는 이때 사촌형인 대군태수(代郡太守) 가윤(賈潤) 등과 함께 북위군에 사로잡혔다.
398년, 위왕 탁발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가이는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했고 급사중(給事中)이 더해졌다. 업성에 행대(行臺)를 설치한 뒤 가이는 상서 화발(和跋)과 함께 업성에 진수하여 처음 귀순한 백성들을 위무하였으며, 뒤에 평성으로 귀환하였다.
천사(天賜) 연간 말, 가이는 병을 요양할 것을 청했는데 도중에 사로잡혀서 후진의 요흥에게 압송되었다. 가이는 몇 년 동안 후진에 구류되었다가 몰래 달아났으나 다시 북하의 혁련발발에게 붙잡혀서 북하에 억류되었다. 혁련발발은 가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이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를 비서감(秘書監)으로 임명하였다. 가이는 61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북위가 북하를 평정한 뒤 가이의 아들인 가수(賈秀)가 가이의 관을 가지고 돌아와서 대군(代郡) 남쪽에서 다시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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