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조선) (r1판)

편집일시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8/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width=40
조선의 역대 국왕
23대 순조 이공

24대 헌종 이환

25대 철종 이변

파일:atjcwJl.png
묘호
헌종(憲宗)
시호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1]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
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
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2]

장숙(莊肅,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본관
전주(全州)
능묘
경릉(景陵)

이환(李烉)

문응(文應)

원헌(元軒)
출생지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
사망장소
창덕궁(昌德宮) 중희당(重熙堂)
배우자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아버지
조선 문조(효명세자)
어머니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종교
유교 (성리학)
생몰
기간
음력
1827년 7월 18일 ~ 1849년 6월 6일
양력
1827년 9월 8일 ~ 1849년 7월 25일(21년 10개월 17일,7991일.)
재위
기간
음력
1834년 11월 18일 ~ 1849년 6월 6일
양력
1834년 12월 18일 ~ 1849년 7월 25일.(14년 7개월 7일, 5,333일.)




조선의 역대 왕세손
문조 이영 (왕세자)

헌종 이환

순종 이척 (왕세자)

1. 개요
2. 치세
3. 가계
3.1. 조선의 사랑꾼?
4. 기타



1. 개요[편집]


조선 제24대 왕.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익종)의 외아들이다.

효명세자가 요절하고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의 신분으로 8살 나이에 왕이 되었다.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비슷한 경우로 충목왕이 있다.


2. 치세[편집]


어머니는 풍양 조씨다. 아내는 안동 김씨김조근의 딸인 효현왕후, 결혼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다. 어머니와 아내의 가문에서 보듯이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조선이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기에는 '척사윤음'을 반포하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 체포령이 내려졌고(기유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어 서로의 집안을 감시하도록 한 오가작통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한국 최초의 신부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하기도 했다.(병오박해)

더욱이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선 서양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실로 안습의 세월이라 할 만하다.(…)

기존의 견해로는 헌종조 전반을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와의 세력 다툼이 치열한 시기로 알려졌고, 그래서 야사에서는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들어 가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째 김좌근의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김택영의 <한사경>인데, 헌종 앞에서 애체(안경)을 썼다고 한소리 들은 것. 한소리만 듣고 끝난 게 다행인 게, 당대 예법에서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안경을 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웃어른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뽐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 헌종의 이 말에 조병구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황급히 물러나와 퇴궐하다가 가마가 뒤집혀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도 하고, 이게 신정왕후 앞이었는데도 헌종의 책망을 듣자 음독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는 죽기 전 해까지도 한성판윤, 예조, 이조, 공조판서를 한창 지내다가 대간들의 탄핵에 몰려 쫓겨나 그해 1845년 졸. 이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의 편인 대간들의 견제에 따른 것으로, 사망 시기 자체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보다 이르다. 무엇보다도 조병구가 헌종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권세를 휘둘렀다면 졸기에 좋은 내용이 실릴리 없다.[4]

실상은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 없이 커가는 시기였고 헌종은 친정이 시작된 이후 20세가 될 무렵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이 15세 때 끝나고, 아내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1903년 졸)를 계비로 맞은 것. 이 때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후궁 경빈(慶嬪) 김씨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는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헌종은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압박하여 유배를 보내는 등 반 안동 김씨 행보를 밟았고, 대구 서씨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5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한 건 대표적.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조의 장용영처럼 친위대인 총위영(총융청)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수령의 장죄(뇌물)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와서 법률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의 뇌물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 가문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100%다. 하지만 비변사의 비협조로 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조병헌 사사 요구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 귀양을 갔다가 헌종 말에 풀려나지만 철종 초에 사사된다. 대사간 서상교를 통해 안동 김씨의 실세 중의 실세인 김흥근을 탐오하고 대왕대비의 비위를 맞추어('궁위를 엿보아') 정치를 했다고 탄핵하고 귀양 보내기도 했다. 안동 김씨에게 밉보인 김정희, 조병헌도 헌종 14년에 유배에서 풀렸고 영상 정원용은 안동 김씨에게 아부하다가 파직 당한다. 그러나 그 직후 향년 23세로 사망(…) 증조할아버지 정조처럼 헌종 역시 스스로 약을 조제하고 의원을 불렀으나 결국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앓다가 갑자기 차도 없이 사망했다는 것과 안동 김씨의 세력을 한창 조지던 와중에 급사하는 바람에 미약하게나마 독살설이 나올 정도다. 특히 순원왕후의 어필 봉서[5]를 근거로 한 독살설은 증거는 없으나, 헌종과 순원왕후가 의외로 할아버지 정조와 고조할머니 정순왕후 김씨 급, 어쩌면 그 이상의 갈등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독살설에 대해서는 실록에 이렇다할 근거가 없는 만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왕성한 20대 초반의 나이, 호색과 죽음 사이에 그토록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안동 김씨 일문에게 헌종의 때 이른 죽음과 순헌왕후의 2차 수렴은 행복한 사태 반전이었다." 등을 언급하며 헌종의 이른 죽음에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늬앙스를 살짝 띄우고 있다.

나름대로 '국조보감'의 증수를 위해 정조·순조·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을 찬집했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고, 각 도의 제방과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의 치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런 정도의 치적으론 조선을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는게 문제. 안동김씨를 비롯한 척신을 척결하고자 하였지만 돌연 죽음으로 왕권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

아들은 없었으며 궁녀 출신 숙의 김씨와 효정왕후 홍씨 사이에서 각각 딸 하나 씩을 두었는데 모두 요절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23살이란 젊은 나이에 사망함에 따라 결국 효종 때부터 이어진 직계 왕통은 단절되었다. 동시에 정조의 혈통도 끊겼으며 결국 안동 김씨가 강화도를 뒤져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을 옹립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3. 가계[편집]


  • 정비 : 효현왕후 김씨
  • 계비 : 효정왕후 홍씨
    • 공주 - 요절
  • 후궁 : 순화궁 경빈 김씨
  • 후궁 : 정빈 윤씨
  • 후궁 : 숙의 김씨
    • 옹주 - 요절

3.1. 조선의 사랑꾼?[편집]


야사에 따르면 계비 효정왕후 간택 때 참여한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는데,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가 효정왕후를 간택하자 몇 년 뒤에 기어이 경빈 김씨를 간택했다고 한다. 경빈 김씨를 위해 석복헌과 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이는 왕비와 금슬이 좋았던 할아버지 순조나 아버지 효명세자보다는 증조부 정조와 유사한 면모. 정조도 의빈 성씨를 15년이나 기다렸을 정도로 사랑꾼이었기 때문이다.

애초 얼굴이 꽤나 잘 생겨 당대에 꽃미남 취급을 받았다고 하며, 궁녀들과 지나치게 호색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그가 궁녀들을 가까이 한 것은 욕구 이전에 안동 김씨 출신의 자손을 더는 낳지 않겠다. 어떻게든 후궁을 통해 대를 잇겠다라는 의지였다는 해석도 있다.

또한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7]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4. 기타[편집]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경릉(景陵).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와 나란히 묻힌 삼연릉으로 삼연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우왕좌비[8]'의 원칙에 따라 맨 오른쪽에 헌종 능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 김씨, 오른쪽에 효정왕후 홍씨가 묻혀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은 이 능에 대해 안동 김씨인 효현왕후를 헌종과 효정왕후가 모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촌평하기도 했다. #

순원왕후는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뭐든지 두번 생각하고 움직이며 눈치가 빠르다"는 평을 내렸다. 이를 안동 김씨가 장악한 조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행보를 밟은 것이라 보는 해석도 있다.

서예에 능했으며 특히 예서에 능했다고 한다.

덤으로 한국 사극에서 조선시대 왕 중 유일하게 한번도 등장하지 못한 왕이다. 하다 못해 '죽는 장면'으로라도 나온 적이 없다.[9] 물론 이는 아버지인 효명세자도 마찬가지였으나 마침내 2016년 하반기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박보검. 존재감 없는 임금 중 하나였던 현종드라마에 출연하는 판인데 안습. 조상님들이나 후임 왕들은 실컷 출연료 받아 먹고 있는데 난 이게 뭐야 징징

사실, 주목을 별로 받지 않는 것에 비해서 포장을 하자면 의외로 드라마로 만들 만한 소재가 될 법 하기는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젊은 왕"이라는 점도 그렇고, 세도 정치를 개혁하는 개혁 군주의 모습도 어느 정도 넣을 수 있기는 하고, 게다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수를 적게 잡아도 된다.(…) 막말로 대중매체에 유통되었던 정조와 정순왕후의 갈등을 다룬 작품들은 사실 헌종과 순원왕후의 대립으로 바꿔야 역사적으로 딱 맞아떨어진다

다만 사극에 등장할 가능성은 있다. 효명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작가 윤이수, 삽화 kk)이 드라마화 되었기 때문. 그러나 소설 원작과 드라마의 결말이 다르게 났기 때문에 결국 헌종은 등장하지 않았다...

광해의 연인을 쓴 유오디아의 차기작인 (현재 시점으로는 완결된) <반월의 나라>의 메인남주가 바로 헌종이다! 연재 당시에는 휘가 연으로 쓰였지만 후에 종이책으로 발간되면 본래 휘인 환으로 수정된다는 듯. 전체적인 내용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청으로 건너가 공주가 된 여주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선으로 건너가 남주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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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후 조선 왕실에서 올린 시호.[2] 1908년 순종 황제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시호[3] 훗날 서재필고종황제 앞에서 안경을 썼다가 욕을 먹기도 했고 순종도 지독한 근시였였지만 아버지 고종 앞에서는 예를 지키기 위해 안경을 안 썼다고 항다.[4] 조병구의 졸기엔 '숙성한 재주를 지녔다. 다만 각박한 게 흠이었다'라고 되어 있다.[5] (헌종 죽기 며칠 전) '왕을 몰아내지 않으려고', '내 집의 패악한 자식', (헌종 사후) '나도 거리길 거시 업서 싀훤해' 등[6] 변원림의 해석(<순원왕후 독재와 19세기 한국사회의 동요>, 2012) 참조. 다만 <순원왕후의 한글편지>를 편집한 이승희 교수는 이를 '안동 김씨일가의 패악한 이'로 해석한다. <대비, 왕 위의 여자>의 김수지의 종합에 따르면, 순원왕후는 대체로 안동 김씨가를 '우리 집'이라고 하고, 왕가를 '내 집'이라고 했는데, 순원왕후는 '내 집'을 거론했으므로, '내 집의 패악한 자식'이라고 언급할 만큼 손자 헌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본다.[7] 초상화를 말하며 당시 효명세자는 왕으로 추존되었으므로 정확히는 효명세자의 어진을 말한다.[8] 오른쪽에 왕을 장사하고 왼쪽에 왕비를 장사함[9] 단 네이버 대하사극 카페에는 "조선왕조500년"에 이경현이라는 배우가 헌종으로 등장했다는 게시물이 있는데 확인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