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종(조선) (문단 편집) === 왕대비의 [[수렴청정]] 및 [[병오박해]] ===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는 '척사윤음'(斥私倫音)이 반포되었고 [[조선의 천주교 박해|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1839년]](헌종 5년), [[기해박해]] 때는 [[프랑스]]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 [[피에르 모방|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조선인 평신도 [[정하상]] 바오로 등이 [[순교]]했다. [[1846년]](헌종 12년) [[병오박해]] 때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성직자)|신부]]가 [[순교]]했다. 더욱 극심해진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 [[1834년]](헌종 즉위년) [[11월 20일]] 1번째 기사 '[[호남|기호]] 지방에 제수의 복정을 특별히 늦추게 하다'와 동년 [[11월 28일]] 1번째기사에는 '[[한성부]]의 하속들이 주구하고 징색하는 폐단을 범하지 않도록 신칙하다'라는 기사가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1월 20일 (신사)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xa_10011020_001|#]].][*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1월 28일 (기축)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xa_10011028_001|#]].]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서는 [[서양]] 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왕권]]도 헌종 초기에는 매우 떨어지는 편이였는데 즉위 2년인 [[1836년]](헌종 2년) 남응중, [[1844년]](헌종 10년)에는 민진용[* 집안은 몰락한 [[노론]]이어서 신분은 [[중인]]이었다고 한다.]과 이원덕 등이 [[사도세자]]의 서출이자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회평군]]을 [[조선/왕사|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 [[역모]]로 인해 [[회평군]]은 [[사약]]을 받아 처형당했고, 그의 이복동생들인 [[철종(조선)|철종]]과 [[영평군(1828)|영평군]]은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 [[역모]]의 특징은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몰락한 [[양반]]들의 계획으로 이만큼 [[조선/왕사|왕]]의 위신이 떨어졌다. >남응중·남경중을 국문하여 사형에 처하다 >---- >남응중(南膺中)·남경중(南慶中)을 국문(鞫問)하여 사형(死刑)에 처하고, 고변인(告變人) 천기영(千璣英)은 상을 내려 오위 장(五衞將)으로 삼았다. 남응중의 족당은 모두 좋은 문벌(門閥)이었는데, 성품이 간교하여 남의 재물을 편취(騙取)하기 좋아하고 역모(逆謀)를 꾸며 경외(京外)에 출몰하면서 속임수만 써왔다. 일이 발각되자 면하지 못할 줄 알고, '''[[부산|동래(東萊)]]'''의 왜관(倭館)으로 도망해 들어가서 극도로 흉악하고도 부도(不道)한 말을 지어내어 투서(投書)하여 두 나라의 틈을 부추겼으나, 왜인들도 믿지 않고 그를 잡아서 우리 나라에 넘겨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국문하니, 남경중과 함께 승복하였다. 남공언은 그들의 도당이었는데 국정(鞫庭)에서의 난언(亂言)이 더욱 흉악하여 아울러 노륙(孥戮)하였다. 남응중의 수급(首級)은 왜관에 매달아 보이도록 명하고, 따로 __서계(書契)__[* 서계는 주로 [[일본]]과의 교린 관계(交隣關係)에 대한 문서를 말하는데, 일본 사행(使行)의 임무 내용, 사절(使節)과 상왜(商倭)의 구별, 왜구(倭寇) 여부의 식별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이의 발신인은 [[조선]]의 경우 [[조선/왕사|국왕]]을 비롯하여 예조 판서·참판·참의와 동래 부사 등이 막부장군(幕府將軍)·대마 도주·거추(巨酋) 등에게 보내는 것으로 대별되고, [[에도막부|일본]]의 경우는 막부장군 등 국가에서 보내 오는 공신(公信)으로의 서계와 거추 등이 보내 오는 사신(私信)으로서의 서계로 대별된다.]를 지어 관수왜(館守倭)에게 전하여 약조(約條)를 중히 여기고 교호(交好)를 돈독히 한 뜻을 보이었다. >--- >-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1836년]], 청 도광(道光) 16년) 12월 23일 (임신)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xa_10212023_001|#]].] >결안에 민진용의 죄가 부대시 능지 처사에 해당한다고 하다 >---- >죄인 '''민진용(閔晋鏞)'''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그는 미천한 무부(武夫)로서 감히 불궤(不軌)한 흉계를 품고 효경(梟獍)[* 악인(惡人)의 비유한다. 효(梟)는 어미새를 잡아먹는 올빼미, 경(獍)은 아비 짐승을 잡아먹는 짐승을 비유해 말한다.]의 마음으로 귀신처럼 물여우처럼 역당(逆黨)과 체결하고 흉언(凶言)을 난만(爛慢)[* 차서 넘치는 모양을 말함.]하게 하였습니다. 강사(江舍)에서 밤에 모여 세 사람이 주무(綢繆)한 것이 모두 지극히 흉악하고 지극히 참혹하였는데, ‘__이곽(伊霍)__’[* 은(殷)나라의 현상(賢相) 이윤(伊尹)과 전한(前漢)의 명신 곽광(霍光). 이윤은 처음에 농부(農夫)였는데, 탕왕(湯王)이 세 번이나 초빙(招聘)하여 마침내 출사(出仕)하였음. 탕왕을 도와 하(夏)의 걸왕(桀王)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탕왕이 죽은 뒤에 그 손자 태갑(太甲)이 무도(無道)하게 행동하므로 이를 3년 동안 동궁(桐宮)에 추방하였다가, 태갑이 다시 회개하자 맞아들였다. 곽광은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서 소제(昭帝)를 도왔으며, 다음 창읍왕(昌邑王)이 음란하므로 그를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웠다. 전후 20년 동안 나라의 정권을 잡았는데, 그의 딸은 선제의 황후가 되어 온 집안이 부귀를 누렸으나, 이로써 그의 사후(死後)에 선제는 곽씨(霍氏)의 병권(兵權)을 거두고, 모반(謀反)하려 하였다고 해서 친족(親族)을 멸하였음을 의미한다.] 두 글자가 어찌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있는 것이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마는 방자하게 입에다 내었습니다. 모반(謀反)하고 대역(大逆)하여 부도(不道)한 것이 확실하다고 지만(遲晩)[* 죄인이 스스로 자백할 때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던 말을 의미한다.]하였으니, 죄가 '''부대시 능지 처사(不待時凌遲處死)'''[* [[사형]]을 할 때 가을철 추분(秋分)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나, 십악 대죄(十惡大罪) 등 중죄(重罪)를 범한 죄인은 이에 구애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데, 이를 부대시라고 함. 능지 처사(凌遲處死)는 가장 참혹한 형벌(刑罰)의 하나로, 먼저 팔·다리의 사지(四肢)를 절단하고 그 다음에 머리를 베는 것. 수(隋)·당(唐) 이래로 없어졌으나 원(元)나라 때 다시 부활되었고, [[조선]]에서는 거열(車裂)로써 이를 대신하였다.]에 해당합니다." >하였다. >---- >- '''《[[헌종실록]]》 11권, 헌종 10년([[1844년]], 청 도광(道光) 24년) 8월 21일 (을묘)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xa_11008021_0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