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노(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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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키노(Кино)[1]
1982년 레닌그라드에서 결성되어 1990년까지 활동한 러시아의 록 그룹. 장르는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 쟁글 팝(Jangle Pop), 포크 록. 지금도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락의 전설로 불린다.[2] '키노'는 러시아어로 영화(cinema, film)를 의미한다.
2. 밴드 역사[편집]
2.1. 초기 시절 (1970년대 - 1980년대 초반)[편집]
키노의 전신을 1979년 레닌그라드에서 결성된 락 밴드 '제6병동(Палата № 6)'[3] 으로 보기도 하지만, 키노의 주체였던 빅토르가 이 밴드에서 보컬이 아닌 베이스 기타를 맡았기에 전신이라 보기엔 약간 미묘한 면이 없지 않다. 빅토르 초이가 시콜라(Shkola. 한국의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합친 과정) 도중 학교 친구였던 파시코프 및 스미르노프와 결성했는데, 이 사건과 그전의 성적 불량이 문제가 되어 초이는 시콜라 8학년 과정에서 결국 퇴학당했다.[4] 이 외에 소련의 펑크 락 뮤지션 안드레이 파노프(Андрей Панов, 1960-1998)[5] 가 1979년 결성한 '자동으로 만족하는 자들(아프토마티체스키예 우도블례드보리텔리, Автоматические удовлетворители - 보통 АУ(아우)라고 줄여 부름)'이라는 밴드에서도 초이가 잠시(1980년-1981년) 베이스 기타를 맡은 적이 있기에 간간히 언급되는 편이다.
이후 그는 알렉세이 리빈(Алексей Рыбин), 올렉 발린스키(Олег Валинский)[6] 등과 함께 밴드 '가린과 쌍곡선(Гарин и Гиперболоиды)'를 결성해 활동한다[7] . 이 이름은 러시아의 SF 거장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소설 '가린의 쌍곡선(Гиперболоид инженера Гарина[8] )'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1982년 봄부터 '레닌그라드 락 클럽(Ленинградский рок-клуб[9] )'에서 활동하던 그들은 같은 해 가을 밴드 이름을 '키노'라고 바꾸게 된다[10] .
이후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키노는 첫 번째 콘서트를 가지는데, 당대 최고의 밴드로 불리던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11] )과 함께 공연을 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영향력이 있던, 그리고 아크바리움의 리더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Boris Grebenshikov)가 프로듀서로 나서 주었기에 가능했었다. 이 즈음 밴드는 '키노'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1982년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최초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지만, (이후의 명성과는 달리)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12] 이후 키노는 첫 번째 앨범인 '45[13] '를 출시한다. 그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14] '45'는 아크바리움의 멤버들인 프세볼로트 가켈(Vsevolod Gakkel, 첼리스트), 안드레이 로마노프(Andrei Romanov, 플루티스트), 미하일 페인스타인-바실리예프(Mikhail Feinstein-Vasilev, 베이시스트)와 함께 공동으로 작업했었다[15] .
앨범 '45'는 가볍고 활기찬 곡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초이가 작곡한 곡[16] 들의 가사는 도시의 낭만이나 시적 언어의 사용 등, 초기의 소비에트 바르드 음악과 유사한 점이 돋보였다. 당시 키노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크게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후 초이는 녹음의 질이 조악했으며[17] , 좀 더 제대로 녹음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엘렉트리치카', 앨범 '45' 수록
다만 수록곡 중 '엘렉트리치카(Электричка)'는 상당히 유명해졌다. 엘렉트리치카는 통근열차로 사용되는 러시아의 일종의 광역철도로, 개인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주의체제의 부조리를 짧고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노래였다. 가사는 자신은 어젯밤 늦게 잠들어 간신히 일어났으며, 의사에게 가야 할 것 같지만 통근 기차가 자신을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내용이다. 당시 초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 행세를 하며 정신병원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이 당시 경험이 투영된 곡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발표 직후 소련 당국에 의해 공연을 금지당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는 와전된 사실이다. 빅토르 초이와 키노는 데뷔 이후부터 해체 직전까지 한 번도 금지령을 겪은 일이 없으며, 당국의 탄압을 받은 일도 없다. 언더그라운드 밴드에 대한 탄압이 절정을 달리던 1982-1984년경에는 말 그대로 '아는 사람만 아는' 수준의 밴드였던지라 탄압이나 규제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고, 1985년 이후에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해 탄압 강도가 매우 느슨해졌기 때문이다.[18]
1982년 말에서 1983년 초, 키노는 리빈과 드러머 발레리 키릴로프(Valery Kirillov), 음향 엔지니어 안드레이 쿠스코프(Andrei Kuskov)와 두 번째 앨범을 내려고 시도했지만 초이가 흥미를 잃어 녹음이 중단되었다[19] . 겨울에 그들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몇 번 공연을 했고, 아크바리움의 드러머인 표트르 트로센코프(Pyotr Troschenkov)와 공연을 하기도 했다. 리빈은 간혹 리허설용 베이시스트였던 막심 콜로소프(Maxim Kolosov) 혹은 후기 키노의 전속 기타리스트가 되는 유리 카스파랸(Юрий Каспарян)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그레벤시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카스파랸은 처음에는 실력이 정말 형편없었으나 갈수록 잘하게 되었고, 이후 키노의 2인자 포지션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콜로소프 및 카스파랸과 함께 키노는 두 번째 콘서트를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개최한다.
하지만 1983년 3월, 원년 멤버인 초이와 리빈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터진다. 원래 초이는 음악을 작곡하는 역할을 주로 했고, 리빈은 콘서트 준비나 리허설, 레코딩 준비 등을 맡는 식으로 역할이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초이는 리빈이 자신의 곡이 아닌 리빈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이 불만이었고[20] , 리빈은 초이의 리더십에 반감을 드러냈다. 이 갈등은 결국 리빈의 탈퇴로 끝난다. 이후 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며(어쩌다 공연장에서 몇 번 마주치긴 했는데 서로 말도 걸지 않고 못 본 체 했다고 한다), 초이 사후 감정이 좀 풀린 건지 리빈은 추모 콘서트(2001년)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으며 이후 관련 인터뷰에서도 몇 번 등장한다.
2.2. 중기 시절 (1980년대 초반 - 1980년대 중반)[편집]
1982년부터 후기 키노가 자리잡는 1984년 사이 초이와 리빈은 활발히 음악 활동을 했는데, 당시 곡들을 담은 데모 앨범[21] '46'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46'은 초이가 작곡한 데모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22] 대부분은 45의 낭만성을 그대로 가지고 왔지만 톤이 좀 더 어두워지 편이다.
'손님', 앨범 '캄차카의 지배인' 수록곡
1984년, 키노는 아크바리움 멤버들과 공동으로 (공식) 두 번째 앨범인 '캄차카/캄차트카[23] 의 지배인/지도원(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을 발표한다. 여기서도 그레벤시코프는 프로듀서로 나서 주었다. 당시 참여 인원으로는 카스파랸(기타), 알렉산드르 티토프(Alexandre Titov, 베이스), 세르게이 쿠리오힌(Sergei Kuriokhin, 키보드), 표트르 트로센코프, 프셰볼로트 가켈, 이고르 부트만(Igor Butman, 색소폰), 안드레이 라드첸코(Andrei Radchenko, 드럼)이 있다. 그레벤시코프 본인도 작은 키보드를 연주했다. 전반적으로 미니멀리즘 스타일에 카스파랸의 퍼즈 이펙트가 간간히 들어가 있었다. 이후 초이는 이 앨범에 대해 '앨범은 전반적으로 일렉 계열이었으며, 음향과 구조에서 전위적이었다. 소리나 스타일이 우리 생각대로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험적인 측면에서는 흥미로웠다'라고 평가했다[24] '.
앨범의 완성 이후 초이는 카스파랸을 리드 기타로, 아크바리움의 티토프를 베이스 기타로, 이 외에 게오르기 구리야노프(Георгий Гурьянов)를 영입해 타악기 주자로 배치했다. 티토프는 프렛리스 베이스가 특기인데, 같이 참여한 '이건 사랑이 아니야(Это не любовь)' 등의 앨범에서 특징적이고 멋진 프렛리스 베이스 라인을 감상할 수 있다.
1984년 5월 이후, 키노는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주최하던 제2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 당시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비핵화 지대로) (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безъядерной зоной))'라는, 대놓고 반전/반핵 사상을 드러낸 곡으로 화제가 되었다[25] . 같은 해 여름, 아크바리움 및 기타 인기 밴드들과 함께 모스크바의 교외인 니콜리나 고라(Nikolina Gora)에서 (공안의 감시 하에) 공연을 했다. 키노의 전성기는 이때부터로, 소련 전체에서 키노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앨범 '이건 사랑이 아니야' 수록곡
1985년 초, 키노는 안드레이 트로필로(Andrei Tropillo)의 지휘 하에 다른 앨범을 녹음했으나, 초이가 결과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26] . 이후 11월 티토프(당시 아크바리움과 키노에 공동으로 속함)는 두 밴드에서 동시에 활동하기 벅차했기에 키노를 떠나기로 했고, 재즈 기타리스트 이고리 티호미로프(Игорь Тихомиров)로 대체되었다[27] . 이후 키노는 해체 전까지 쭉 이 멤버로 가게 된다.
'별들이 여기에 떨어질 거야', 앨범 '밤' 수록곡
1986년 1월, 트로필로는 당시 미완성된 음반을 '밤(Ночь, Night)'이라는 제목으로 내놓는다[28] . 이 앨범은 20만장이나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키노는 다시 유명해졌다. 그러나 멤버들은 이 '미완성작'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고, 언더그라운드 락 기사들도 이 앨범에 대해 비판했다. 이후 봄에 있었던 레닌그라드 락 콘서트 4회에서 이들은 'Дальше действовать будем мы(이제부터 우린 행동할 거야)'라는 노래로 대상을 차지하고, 가을에 앨범 '이것은 사랑이 아니야(Это не любовь)'를 발매한다.
이후 여름, 그들은 세르게이 리센코(Sergei Lysenko)와 영화를 찍기 위해 우크라이나 키예프로 여행을 간다. 7월,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아크바리움과 알리사(Алиса[29] ) 등과 모스크바 문화 궁전에서 대규모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후 이 세 밴드는 스트란니예 이그리(Странные игры)[30] 와 함께 'Red Wave'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을 내놓는다#[31] . 이 앨범은 캘리포니아에서 약 만 장 정도 팔렸으며, 서방에 출시된 첫 번째 러시아 락 앨범이었다.
1986년부터 88년까지 초이는 '휴가의 끝(Конец каникул)', '긴급구조대(Асса)', '록(Pок[32] )' 등 많은 영화에 등장했으며, 와중에 키노를 위한 곡도 작동했다. 이 영화들 중 가장 유명한 영화가 바로 '이글라(Игла, 바늘, 정확히는 마약 주사의 바늘이라는 뜻)'로, 2012년 다시 리메이크되었다.
2.3. 후기 시절 (1980년대 중반 - 1990년)[편집]
그리고 1988년, 키노는 '러시아 락 역사상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고 불리는 앨범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를 내놓으며 명성의 정점을 찍는다[33] . 이 앨범은 1989년에 미국의 유명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Robert Christgau)를 통해 미국에서도 출시되었다.[34] 키노는 소련의 중앙 TV에서 공연했으며, 1987년 초이가 러시아 락에 대해 다룬 영화 'Assa'에서 '나는 변화를 원한다(Перемен)!"라고 외치는 퍼포먼스로 유명해졌는데[35] , 이는 영화 맨 마지막에 나온다. # (다만 빅토르 본인은 이 영화나 엔딩의 퍼포먼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이후 이 곡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리믹스 앨범 '마지막 영웅'에 수록된다.
이후 키노는 동구권을 포함한 외국 순회 공연에 나선다. 덴마크에서는 당시 아르메니아 지진에 대한 구호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으며(1989년 1월), 부르주(Bourges)에서 개최된 프랑스 최대의 락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했다. 1989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영화 '이글라'의 시사회와 소규모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36][37] .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앨범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수록
1989년, 밴드는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앨범을 내놓는다. 어둡고, 우울한 톤의 노래가 주를 이룬다. 이후 키노는 러시아 유명 프로그램인 우즈글랴드(Vzglyad)에 출현하고, 몇몇 비디오도 찍는다. 초이는 이걸 상당히 꺼렸지만, 이 비디오는 TV에 자주 상영되었다. 또한 이 당시 밴드는 가벼운 노래와 초이의 심오한 노래[38] 를 구분하기 위해 독립된 팝 밴드를 세우기로 계획했다고 한다.
1990년, 키노는 인기의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키노는 모스크바에 위치한 위치한 러시아 최대 경기장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 때 경기장에 모여든 관중들은 공식 집계로 62000여 명에 달했고, 심지어 모스크바 올림픽 때나 볼 수 있었던 성화까지 점화되는 등 전설적 이벤트를 연주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까지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성화가 올라간 적은 딱 네 번 뿐이며, 이들 모두 국제적인 페스티벌이었다. 이후 7월, 마지막 콘서트를 마치며 초이는 '이번 가을에 출시할 앨범도 기대해 달라'라고 말했으며, 8월 무렵 키노는 라트비아의 스튜디오에서 새 앨범의 녹음을 대부분 마쳤다.
2.4. 빅토르 초이의 사망 및 밴드 해체[편집]
그러나 신작 앨범의 녹음이 얼추 마무리 된 1990년 08월 15일, 자차로 낚시를 하고 돌아오던 빅토르 초이가 버스와 충돌하며 사망하는 사건이 터진다. 이에 당시 소련은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39] . 이후 12월 키노의 나머지 멤버들과 프랑스 스튜디오의 인원들[40] 이 손을 본 앨범이 발표되었다. 공식적으로 이 앨범의 제목은 없는데, 이 앨범을 부를 이름이 있을 때면 "키노"라고 부르거나[41] 올블랙 앨범 커버에서 따와 '검은 앨범(Чёрный альбом)'이라고 부른다[42] . 이후 나머지 멤버들과 초이의 관계자들은 키노의 해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가지며 키노는 막을 내리게 된다.
기존 멤버들 중 이고르 티호미로프와 게오르기 구리야노프[43] 는 음악활동을 접었으며, 유리 카스파랸은 1997년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2001년에는 러시아의 또 다른 전설적인 락밴드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Наутилус Помпилиус)'[44] 의 리드싱어 뱌체슬라프 부투소프와 함께 그룹 '유-피테르(Ю-Питер[45] )'를 결성,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46] .
2015년 유-피테르의 공연 영상. 연주곡은 키노의 대표곡인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노래 부르는 사람이 부투소프.
영화 '이글라 리믹스'에 삽입된 유-피테르의 곡 '시간의 아이들(Дети минут)'. 곡은 부투소프가 썼으며, 가사는 초이의 유고에서 가지고 왔다[47]
이후 2012년, 빅토르 초이의 50번째 생일을 맞아 밴드는 잠시 재결성해 미공개곡 '아타만(Атаман)'을 공개하였다. '아타만'은 원래 '검은 앨범'에 들어가려던 음악인데, 초이가 스튜디오 녹음을 하지 않아[48] 실리지 못했으나 남은 멤버들이 편곡을 거쳐 공개하였다. 편곡이 되지 않은 어쿠스틱 버전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이후 2018년 12월 마시나 레코드(Maschina Records)에서 싱글 앨범 '아타만'을 발매하며 공개되었다.
2012년 '아타만(Атаман)' 뮤직비디오. 후기 키노의 나머지 멤버들이 다시 모였으며, 인상적인 인트로 기타 부분은 카스파랸이 직접 작곡한 부분이다[49] .
이후 2013년 7월 20일, 드러머 게오르기 구리야노프는 C형 간염 및 췌장암 등의 질병으로 52세에 사망하며[50] , 카스파랸이 소속된 유-피테르도 2017년 활동 중단을 선언한다.
드러머 게오르기의 하관 영상. 배경 음악은 앨범 혈액형에 수록된 'Спокойная ночь'의 피아노 버전이다. [51]
[52]
2.5. 재결성 및 투어[편집]
2020년 키노의 공식 유튜브 채널이 개설되었고, 공연 티저가 공개되었다. 초이의 사망 이후 처음으로 키노의 이름 하에 진행되는 콘서트이다.
리드 기타에 카스파랸, 베이스에 티호미로프 및 티토프, 프로듀서에 알렉산드르 초이가 올랐으며, 보컬은 기존 마스터 테이프 녹음본을 재활용하고 드러머 또한 신규로 고용하였다.
원래 2020년 상트페테르부르크[53] 및 모스크바[54] 에서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전세계적인 코로나 발병으로 인해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
이후 2021년 성공적으로 투어를 마무리하였고, 이 중 세프카벨(Севкабель)[55] 공연 실황은 "Кино в Севкабеле"라는 제목으로 크라우드펀딩을 거쳐 앨범 발매되었다.
2021년 05월 15일 모스크바 공연(ЦСКА Арена, Москва)의 일부. 키노 공식 채널에 올라온 클립이다.
2022년 03월 공식 채널에 올라온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56] 뮤직비디오. 보컬은 기존 녹음본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음악은 재녹음하였다.
18 мая 1984 года песней «Безъядерная зона» группа КИНО открывала II фестиваль Ленинградского рок-клуба. Композиция была признана лучшей антивоенной песней фестиваля. Марианна Цой рассказывала, что «сам фестиваль имел в качестве девиза какую-то патриотическую фразу, причем всем группам предложили спеть по одной песне, связанной с этим девизом. Что-то там про борьбу за мир, кажется. Цой взял и написал «Безъядерную зону». И тут одумавшееся жюри решило открыть фестиваль этой песней в сольном исполнении Цоя, а само выступление группы поставили последним на фестивале».
-1984년 05월 18일 키노는 "비핵화 지대"라는 곡으로 제2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57]
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이 작품은 해당 페스티벌의 최고의 반전 노래로 선정되었습니다. 마리안나 초이의 말을 빌리자면, "이 페스티벌은 무언가 애국적인 모토를 띠고 있었고, 참여하는 모든 밴드들은 이 모토에 걸맞는 노래 하나를 불러야 했습니다. 무언가 평화를 위한 투쟁 같은 것 말입니다. 초이는 여기서 "비핵화 지대"를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심사 위원들은 페스티벌을 키노의 단독 공연 하에 이 노래로 개막하기로 결정하였고, 키노의 공연은 페스티벌의 마지막에 배치되었습니다."
-- MV와 함께 올라온 설명. 시기와 가사를 고려해 보았을 때 어떤 의도로 기존에 존재하지도 않던 MV를 만들어 올렸는지 알 수 있다.
Саша, запретите Гагариной исполнять Кукушку. Вчера она пела ее в Лужниках.
-사샤[58]
, 가가리나가 "뻐꾸기" 노래 좀 못 부르게 해 줘요. 어제 그 여자가 루즈니키에서 그 곡을 불렀단 말입니다.[59]
-- 유튜브에서 가장 많이 추천을 받은 댓글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침묵하고, 누군가는 너무 행복해요.
누구는 정말 너무 행복해요...[60]
고마워요 비탸. 당신이 죽은 지 한참이 지났지만 당신의 말은 아직 살아 있네요.
-- '엄마, 우린 전부 중환자예요'의 2020년 리메이크 버전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 해당 댓글은 2022년 3월, 즉 러시아의 침공이 벌어진 직후 작성되어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받았다. 위 곡은 소련의 황혼기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심정을 표현한 곡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22년 시점에도 그 핵심 주제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반전/자유주의적 러시아인들이 그동안 변하지 않은 조국의 상황을 얼마나 암담하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러시아 정부의 블랙리스트에는 올라가지 않은 건지[61] 2022년에도 공연 일정이 잡혔다.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시작으로 다시 러시아 전역을 순회할 계획이다.
3. 음반[편집]
자세한 내용은 키노/디스코그래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스튜디오 앨범
- 데모 앨범
- 46 (1983)[70]
- 기타 앨범[77]
4. 음악성[편집]
초기의 몇몇 곡을 제외하면 키노의 음악은 전부 빅토르 초이가 작곡하였으며, 초이의 음악은 초기와 후기 간 차이가 큰 편이다. 후기 시절 곡들이 압도적으로 유명하다보니 한국은 물론 러시아 현지에서도 초이 그리고 키노에 대한 평가가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다.
- 초기 시절: 일상을 다룬 간결한 가사와 복잡하지 않은 어쿠스틱 기타 반주[78] 가 특징인 "45", 신디사이저 및 색소폰 등이 강조된 "캄차트카의 지배인", 듀란 듀란 및 더 큐어 등의 영향을 받은 "밤" 등이 해당하며[79] , 후기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가볍고" 음악적으로 여러 장르를 시도해 본 것이 특징이다. "나는 나의 집을 비핵화 지대로 선언한다"처럼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80] 를 담은 곡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사랑이나 일상 생활, 자신들의 음악에 대해 다룬 곡이 많다.
- 후기 시절: 혈액형 이후의 앨범, 즉 혈액형,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마지막 영웅, 키노(검은 앨범) 등이 해당한다. 네 앨범은 전반적으로 뉴웨이브 및 포스트 펑크 계열 곡들이며[81][82] 초기 앨범에 비해 멜로디가 무거워졌으며 가사 또한 좀 더 은유적으로, 혹은, 복잡하게 변했다[83] . 유명세만 비교하자면 이 시절 곡들이 압도적으로 유명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초기에 비해 일률적으로 변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 시절 곡들이 페레스트로이카를 배경으로 한 변화나 반전, 자유, 시련 등을 노래한다는 평가를 받지만[84] 생전 초이는 이에 대해 말을 아꼈기에 확실하지는 않다.[85]
전반적으로는 소련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유입되던 서구의 락과 아크바리움/주파르크같은 선배나 동년배 러시아 록 선구자들, 비소츠키와 오쿠자바 등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특유의 바르드 전통을 잘 혼합해 러시아 록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멤버[편집]
6. 여담[편집]
- 러시아의 아르바트 거리에는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위한 일명 '초이 벽(Стена Цоя)'이 있다[86] . 초이가 사망한 당일(1990년 08월 15일) 이 벽에 누군가 '오늘 초이가 죽었다(Сегодня погиб Виктор Цой)'라고 적어놨는데, 이 아래 다른 사람이 '초이는 살아있다(Цой жив)!'라는, 훗날 초이의 상징이 될 문장을 적어놓은 게 시작이었다. 이 곳을 방문할 때는 담배를 하나 들고 가서 아래 배치된 재떨이에 반쯤 피운(혹은 반으로 부러뜨린) 불 붙은 담배를 두고 가는 게 키노 팬들의 전통이다.
왜 담배인지는 모르겠으나, 초이 벽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벽에 '담배 한 갑(Pachka Sigaret)' 가사가 그라피티로 자주 그려진 것에 대한 오마주일지도?[87] - 대체역사물인 일 베티사드에서는 소련의 위치를 대신한 백군이 승리한 러시아계열 대국인 SNOR에 저항하는 밴드인 NoMoreEagleZ로 바뀌었다.
- 키노와 키노의 리더였던 빅토르 초이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고, 나무위키에서 두 문서는 내용이 서로 섞여 있거나 연결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빅토르 초이 문서도 같이 읽는 걸 권한다.
-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김정일은 생전 소련의 붕괴 이유 중 하나로 락 밴드 키노가 소련 젊은이들을 동요시켰기 때문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빅토르 초이의 사망과 키노의 해체 1년 후 소련은 붕괴했다.
- 빅토르 최와 키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레토가 제작되어 2018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후보작까지 올랐다. 빅토르 최 역할은 한국배우 유태오가 맡아 열연을 펼쳤다.
- 서구권이나 아시아에서는 반전노래로 알려진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이 가장 유명한 곡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2020년 들어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동구권이나 구소련 소속 국가였던 곳 에선 '변화를 원한다(Хочу Перемен)'가 유명하다.